• 최종편집 2024-05-21(화)
 
  • 강성률 목사(신촌예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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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저가 내 앞에서 겸비함을 인하여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더라.”(왕상21:29).

 

동서를 막론하고 하나님께도, 사람에게도, 결코 용서 받을 수 없는 사람으로 보이는 포악한 군주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로마의 네로, 조선의 연산군, 독일의 히틀러, 북한의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등입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북왕국 아합이었고, 남왕국의 므낫세였습니다. 아합은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우상을 이스라엘에 들여놓고 아무 거리낌 없이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습니다. 그것을 반대하는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자기의 나물 밭으로 삼았습니다.

 

이러한 아합의 삶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습니다. “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스스로 팔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 자가 없음은 저가 그 아내 이세벨에게 충동되었음이라.”(왕상21:25). 곧 아합은 이세벨에게 팔려 살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며, 충동적인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의 죄악에 대한 결과로 하나님의 종 엘리야는 아합에게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재앙을 네게 내려 너를 쓸어버리되 네게 속한 남자는 이스라엘 가운데 매인 자나 놓인 자를 다 멸할 것이요, 또 네 집으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처럼 되게 하고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처럼 되게 하리니 이는 네가 나의 노를 격동하고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까닭이니라 하셨고”(왕상21:22).

 

이 말을 들었을 때 아합은 다음과 같은 모습을 보였습니다.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행보도 천천히 한지라.”(왕상21:27).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아합에 대하여 엘리야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저가 내 앞에서 겸비함을 인하여,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왕상22:29).

 

이러한 말씀을 볼 때, 하나님은 어느 누구든지 회개하고 돌이키면 사해주시는 분이며, 겸비함을 보이는 자는 내리기로 한 재앙까지 돌이키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히틀러같이 악한 자라도 돌이키기만 하면 사해 주시는 분이며, 자기 고모부를 죽이고, 이복형까지 죽인 김정은이라 할지라도 회개하여 합당한 열매를 맺으면 용서해 주시는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에 속아 죄를 지었을지라도 낙심하지 말고, 자백하면 긍휼을 베푸시고 사해주시는 주님 앞에 담대히 나가야 할 것입니다(4:16).

 

하나님께서는 아합의 겸비함을 들은 것이 아니라 보았습니다. 입으로 겸비를 외친 것이 아니라 직접 겸비한 행동을 한 것입니다. 우리도 겸비를 외치기는 쉽습니다. 겸비함을 좋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직접 겸비를 보여주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겸비함을 보십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함을 보이는 것 가운데 하나는 겸비이기 때문입니다.

 

아합이 엘리야의 책망을 강하게 들었을 때 성령께서는 아합의 마음을 열어 그 자신의 죄악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가 한 행동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습니다. 선지자들을 죽이고, 나봇을 죽인 일들이 얼마나 끔찍한 죄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내가 이렇게 끔찍한 일들을 저질렀다니, 그까짓 나물이 뭐라고, 나봇의 포도원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원하는 만큼 먹을 수 있는데, 하나님께 충성된 사람 나봇을 나의 사욕을 위하여 죽였구나그야말로 자신이 미웠고 한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며 굵은 베에 누운 것입니다. 너무나 마음이 아파 음식을 먹을 마음도 사라진 것입니다.

 

옷을 찢는 것은 통회하는 마음, 상한 마음을 의미합니다(57:15). 신앙인들이 믿음과 착한 양심을 쓰려고 할 때 자신이 착한 양심을 못 쓰는 사람임을 보게 됩니다. 그럴 때 중심에서 통회가 나옵니다. 제가 저를 볼 때 매일 매일 탄식하게 됩니다. 특히 하나님의 영광은 말 뿐이고, 저의 영광을 나타내려 하는 마음이 가득 찬 모습을 볼 때 탄식하게 됩니다. 식탐으로 인하여 탄식하게 됩니다. 게으름으로 인하여 탄식하게 됩니다. 저 실제 모습보다 그 이상 되게 보이려하는 외식하는 모습을 볼 때 탄식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한 후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세마포로 시체를 쌌듯이(23:53), 베로 몸을 동인다는 것은 자신을 죽은 자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금식은 식물을 금하는 것을 뜻하는데 영적인 금식은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대로 살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굵은 베에 눕는다는 것은 편안한 생활을 추구하지 않고 고난 받을 각오를 하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말로만 하는 겸손이 아니라, 통회하는 겸손, 죽은 자 곧 십자가 지고 살아가는 겸손, 자신의 기쁨을 추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기쁨만을 추구하는 겸손, 주님을 위하여 고난 받을 각오로 살아가는 겸손, 의복과 삶에 있어서 검소하고 소박한 생활의 겸손을 보이기를 우리 주님께서는 원하십니다. 이러한 겸손을 보일 때 주님은 아무개가 내 앞에서 겸손함을 보느냐?” 하시며 은혜를 내려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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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겸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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