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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효상 칼럼] 세계가 주목하는 베스트셀러는?
    세상에 다양한 수많은 책들이 있다. 책은 ‘어떤 생각이나 사실을 글이나 그림으로 나타낸 종이를 겹쳐서 한데 꿰맨 물건’이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책은 세상을 이겨내고 인생의 가치를 일깨우며 맑고 따뜻하게 살아가는 힘을 얻게 하는 것이라 말하고 싶다. 책이 초기에는 대, 나무, 깁, 가죽 등의 재료로 만들어지기 시작했지만 점차 종이가 사용되고 인쇄물로 책이 출판되어진 것은 우리나라의 ‘직지(直指)’가 최초이다. 서양에서 최초로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 인쇄로 42행 성경을 출판한 해는 1455년이다. 구텐베르크 활자로 발행된 것 중에서 가장 독보적인 책은 성경으로 너무도 아름다운 호화 장식으로 세계가 인정하는 미서본(美書本)에 해당된다. 세계 3대 미서를 든다면 DOVE PRESS의 걸작으로 20세기 초에 나온 신·구약 영문성경‘The English Bible‘외에 ‘초우서 저작집(The Works of Geoffrey Chaucer, KELM SCOTT PRESS, 1896)’, 단테저작집(Tutte Le Opere DI DANTE ALIGHIERI, ASHENDEN PRESS, 1909)을 칭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1377년 고려 우왕(禑王) 3년에 구텐베르크보다 78년을 빠르게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을 출판하였다.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본 ‘직지’에는 선광 7년(고려 우왕 3년)에 인쇄한 기록이 또렷하게 적혀 있다. 그런가 하면, 세종대왕이 15세기에 미천한 백성들을 위하여 ‘한글’을 창제하고 활자를 개량 주조하여 수많은 전적을 간행하여 보급한 것이 독일의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 보다 14년 먼저 빨리, 보다 널리, 보다 값싸게 보급할 수 있는 금속활자의 활판 인쇄술을 개발한 것은 매스 커뮤니케이션(mass communication)역사의 새 기원을 열었다. 특히 표의문자(表意文字)인 중국의 한자(漢字)가 수천년 동안 사용되던 동북아 문화권에서 ‘한글’의 등장은 획기적이다. 유일하고 완벽한 표음문자(表音文字)였다. 훈민정음(訓民正音)은 매우 과학적이고 독창적이며, 누구나 쉽게 배우고 익힐 수 있는 우수한 글자로 평가받고 있다. 한글창제는 ‘한반도의 기적’이다. 세종 시대의 귀족들은 간단한 글을 쓰기 위해 최소 천자 정도의 한자를 배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한 조선에서 하룻밤이면 배울 수 있는 ‘한글’ 알파벳 ‘훈민정음’이 창제된 것이다. 세종 대왕이 훈민정음을 세상에 반포(1446)하자 조선 사회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훈민정음의 반포로 우리는 문화 국민으로서 고유한 문자를 가지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의 민족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다. 훈민정음은 28자의 표음문자로서, 웬만한 소리는 거의 다 적을 수 있어 창제 당시에 바람소리나 학의 울음소리까지도 적을 수 있다고 할 정도였다. 훈민정음의 창제로 우리의 국문학과 출판은 획기적으로 발달되었다. 세종 때에 훈민정음으로 지은 ‘용비어천가’는 우리 국문학 작품의 첫 출발이 되었고, ‘월인천강지곡’이 그 뒤를 이었다. 그리고 한문을 모르는 백성들이 훈민정음을 익힘으로써 글을 아는 인구가 늘어나게 되었다. 세계적으로 제일 많이 발행된 책은 단연 성경(bible)이며, 100억부 이상 예측불가로 가장 오래도록 많은 사람이 읽은 베스트셀러중의 베스트셀러이다. 경전(經典)으로 이슬람의 꾸란(코란)이 8억권 정도, 몰몬경이 1억5천부 정도 판매되었다. 최고 판매 작가로는 역시 세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가 30억부 이상, 애거서 크리스티(Agatha Christie)가 4억부 이상 발행된 것으로 보인다. 세계가 주목하는 단행본에는 ‘올리버 트위스트’, ‘크리스마스 캐럴’, ‘위대한 유산’의 저자로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에 버금간다는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의 ‘두 도시 이야기 (A tale of two cities)’이다. 1859년에 발표한 이 소설은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런던과 파리에서 펼쳐지는 격동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여기에 맞서는 책이 프랑스의 비행사이자 소설가가 생텍쥐페리(Saint-Exupéry, Antoine Marie Roger de)가 쓴 ‘어린왕자(The Little Prince)’로 160개 언어로 번역되어 2억부 이상을 넘어서고 있다. 비행기 고장으로 사막에 불시착한 주인공이 어떤 별에서 우주 여행을 온 어린 왕자와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 이야기는, 인간이 고독을 극복하는 과정을 어린 왕자를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이다. 그런가하면, 현대 판타지 소설의 바람을 일으킨 잉글랜드 존 로널드 로엘 톨킨(John Ronald Reuel Tolkien)의 ‘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s)’은 창의성이 돋보이는 대하 3부작으로 1억 5000만 부를 발매하며 명성을 얻었다. <반지 원정대>, <2개의 탑>, <왕의 귀환>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1960년대 중반에 발표되어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 높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소설은 C.S루이스(Staples Lewis)의 ‘나니아 연대기’, 어슐러 르귄(Ursula Kroeber Le Guin)의 ‘어스시 시리즈’와 함께 세계 3대 판타지 소설로 꼽힌다. 톨킨의 이전 작품인 호빗(The Hobbit)의 다음편으로서 이어진 ‘반지의 제왕’은 더 많은 이야기를 다루며 매니아들을 사로잡은 것이다. 톨킨은 ‘호빗’으로 1억부 이상, ‘반지의 제왕’으로 연이어 1억 5000만부 등 총 2억 5000만부 이상을 판매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영국을 대표하는 추리소설 작가로, 미스터리의 여왕으로 불린 애거서 크리스티(Agatha Christie)가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And Then There Were None)’ 가 그 뒤를 잇고 있다. '애거서 크리스티'라는 필명으로 약 80여 편을, '메리 웨스트매콧'이라는 필명으로 연애소설을 쓰고, 희곡, 어린이 소설 등도 썼다. 이런 단행본 시장을 뒤엎는 이변이 일어났다. 시리즈물이다.《해리포터》(Harry Potter)는 1997년부터 2016년까지 연재된 영국의 작가 조앤 K. 롤링(Joan K. Rowling)의 판타지 시리즈 소설로‘해리포터의 마법사의 돌’을 시작으로 시리즈물 8권까지 매번 1억부 이상 발행되며 전체 5억부 이상을 상회하며 절대강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런 추세를 꾸준히 뒤따르는 것이 아동문학의 고전으로 불리는 C.S루이스(Clive Staples Lewis)의 1949년 작 ‘나니아연대기(The Chronicles of Narnia)’이다. 캠브리지 대학교수로 문학을 가르쳤던 루이스는 1929년 회심한 후, 치밀하고도 논리적인 정신과 명료하고 문학적인 문체로 뛰어난 저작들을 남는데, 특히 '나니아 연대기'는 그의 유일한 판타지 소설이면서 가장 대중적인 사랑을 받은 작품이다. 종교를 넘어서서 보편성을 얻는 주제들로 전세계인의 공감을 얻는 흥미진진한 작품으로 평가되며, 작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시인으로 꼽힌다. 또 다르게 매년 개정을 거듭하며 출판 된 책의 경우 중국의 신화자전(神話字典,주편집자:위건공)은 1957년 발행된 이후 인구수에 의해 자동으로 200쇄를 기록하고 5억대의 발행부수를 기록했다. 물론 ‘마오쩌둥(모택동)어록’도 단일 출판으로 중국내에서 무료배포되어 11억부를 기록하기도 했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1966년부터 홍성대에 의해 발행되어 교과서의 절대지존 자리를 한번도 놓친 적이 없는 ‘수학의 정석’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성문기본영어‘도 학창시절의 기억에 남는다. 1948년판 ‘옥스포드 영어사전( 줄여서 OED)’은 영국 옥스포드 대학교 출판부에서 출간하는 영어사전으로 인쇄 제본형 표준판은 1884년부터 부분적으로 나오기 시작하여 44년만인 1928년 초판이 완성됐다. 매년 개정판으로 나오는 ‘기네스북(The Guinness Book of Records)’도 같은 유형이다. 세계 최고의 기록들을 모은 책이자,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연속 출간물. 기네스 양조회사의 사장이었던 휴 비버 경의 궁금증에서 착안하여, 기록광 맥허터 쌍둥이 형제와 함께 만든 진기한 기록을 모은 책으로 1955년 초판부터 전 세계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세상가 주목하는 가장 큰 책은 어떤 책일까? 바로 그 책이 미국에서 발간된 ‘부탄( Bhutan)’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말하자면 디지털 기술의 ‘총화’라고 할 수 있다. ‘히말라야 마지막 왕국의 사진오디세이’라는 부제의 이 책은 ‘세계에서 가장 큰 책’으로 최근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마이클 홀리(Michael Hawley)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교수가 만들었는데, 가로 1.5m 세로 2.1m 크기에 무게가 60㎏이나 나간다. 책 한권 제작하는 데 들어가는 종이만도 축구장을 뒤덮을 정도며, 사용된 잉크의 양은 2갤런(약 8ℓ)에 달한다.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 중 하나인 부탄의 모습을 세계에서 가장 큰 책에 담았다는 것이 흥미롭다. MIT 학생들과 4차례에 걸친 현지탐사 끝에 완성한 이 책에는 ‘지구상의 마지막 상그리라’로 불리는 부탄의 숨막히는 풍경사진들이 들어 있다. 그럼 세계에서 가장 작은 책’으로 기네스북에 오른 책은 ‘Old King Cole’이다. 이 책의 내용: 스코틀랜드 자장가가 수록한 것으로 12페이지 분량으로 제작년도는 1985년도다. 작아도 너무 작아 워낙 작은 까닭에 현미경으로 봐야 한다. 얼마나 작은지 눈으로는 볼 수 없어 현미경으로 가능하다. 크기는 가로 세로 1mm이다. 책이 좋다. 책 속에서 희망을 얻었고 기도속에서 감사를 배웠다. 그레서 책을 볼 때가 가장 즐겁고 행복하다. 애서가(愛書家)로 책 수집하다 보면 책 표지(表紙)부터 보고 책을 평가한다. 장정(裝幀)은 잘 되었는지, 누가 장정한 것인지, 표지화는 누가 그렸는지를 본다, 근현대 미술사를 대표하는 화가 대부분이 책의 장정(裝訂)과 표지화(表紙畵), 삽화(揷畵)등에 참여하므로 오늘날에는 책장정이 북디자인(Book design)이라는 이름으로 그림 한 점과 같이 가치있게 새롭게 재평가된다. 김용준, 정현웅, 길진섭, 김환기, 김기창, 장욱진, 남관, 박서보, 서세옥, 이준, 변종하, 문학진, 천경자, 박고석, 김영주, 이승만, 백영수, 구본웅, 백영수 등의 장정이면 언제든 좋다. 오랜 시간 내 맘을 설레게 한다. 아날로그(analogu)에 바탕을 둔 예술성을 충분히 구현하고 있다. 이젠 미술이 곧 책이 되고, 책이 곧 예술이 되었다. 책은 단순히 그 내용을 넘어 전체적인 만듦새와 장정의 미적(美的) 특성으로도 조명되고 또한 감상되어야 할 대상으로 재평가 되고 있다. 추위에 떨어 본 사람이라야 태양의 따스함을 진실로 느끼고, 굶주림에 시달린 사람이라야 쌀 한 톨의 귀중함을 절감하듯 한권의 책 속에서 인생의 길을 찾은 사람이라야 책이 주는 지식과 지혜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스마트폰과 미디어의 확산으로 이 광할한 우주에서 책이 사라져 가는 시대에 책을 읽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책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은 책을 만든다’는 사실을 기억하기에 다시 책을 집어 든다. 종이책의 종말시대는 전자책과 앱북(App book)의 공존 을 모색하며 또 다른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디지털(digital)시대에 아날로그(analog)시대의 감성은 가능한가, 어떻게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변환( transformation)이 가능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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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효상 칼럼
    2021-03-22
  • [이효상 칼럼] 커피(coffee)) 한잔 하시죠?
    아침이면 쓴 맛을 보며 하루를 연다. 마치 인생의 쓴 맛처럼, 다름 아닌 ‘커피(coffee)) 한잔’의 유혹(템프테이션(Temptation)으로 시작된다. 눈 뜨자 마자 또는 출근과 동시에 마시는 커피 한잔은 직장인들의 즐거움이자 적(敵)이다. 언제부터인가부터 커피는 일상이 되었고 습관이 되었다. 중독이 따로 있나. 선택이 아니라 반복되면 중독이다. 베토벤(Beethoven)은 매일 의식을 치르듯 커피를 내리는 것으로 아침을 시작했다고 한다. “매일 아침 나는 더할 수 없는 내 벗과 만난다. 아침에 커피보다 더 좋은 것은 있을 수가 없다. 한 잔의 커피에 담긴 60알의 원두는 내게 60개의 아이디어를 가르쳐준다.”고 말했다는데. 커피 한 잔이 예술가들의 혼을 일깨우고, 귀가 들리지 않는 베토벤에게 누구보다 소중한 친구가 되어주었으리라 생각된다. 대한민국 국민 1인당 1년에 몇 잔의 커피를 마실까. 2018년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 기준 1년에 커피 353잔을 마신다고 한다. 하루에 1잔은 마신다는 의미인데, 세계 평균 소비량 132잔의 2배 이상이다. 하지만 커피를 안 마시는 사람도 다수 있으니 엄청난 양이다. 커피는 예전 ‘숭늉’의 자리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 커피의 고향이 어디일까? 커피의 원조국은 아프리카 북동부에 위치한 에티오피아(Ethiopia)다. 커피의 3대 품종 중 가장 향미가 뛰어난 아라비카종([라틴어]Arabica種)의 주산지로 이슬람 문화권인 아랍과 함께 아프리카 북동부에서 재배를 시작했다. 사실 커피를 마시게 된 기원에 관해서는 에티오피아의 옛 이름인 아비시니아(Abyssinia)에 ‘칼디’라는 목동이 있었다. 어느 날 염소들이 빨간 열매를 따먹고는 흥분하며 잠을 못 자는 것을 본 그는 직접 빨간 열매를 따서 먹어봤다. 목동은 열매를 먹고 나자 온몸에 힘이 나면서 이상한 기운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씨앗을 이슬람 사제에게 가져다주었는데 부정한 음식을 먹기 전, 의식으로 빨간 열매를 불에 태웠더니 그윽한 커피향이 퍼지면서 사제들과 이슬람교도들이 커피 열매를 먹기 시작했다. 이후 척박한 땅에서 양이나 염소를 치며 유목생활을 하는 이슬람교도들은 힘이 나는 열매를 가지고 다니며 약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사제들은 밤에 기도를 드릴 때 잠을 쫓기 위해 즐겨 먹게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는 홍해 바로 건너편 나라인 예멘(Yemen)에서 비롯됐다. 이슬람 대사제인 오마르는 모함을 받아 쫓겨 모카(Mocha)라는 항구 도시로 건너오게 되었다. 너무나 배가 고팠던 그는 새가 먹고 있던 빨간 열매를 보고 알라의 계시라 생각해 그 열매로 허기를 달랬다. 그랬더니 배고픔도 사라지고 기운이 나서 그 뒤 그 열매로 병약한 이들을 치료했다. 예멘의 모카 항은 그 뒤로 커피를 수출하는 주요 항구로 이름을 알려지며 모카커피(Mochacoffee))의 원조가 되었다. 그렇다면 커피는 어떻게 세계적으로 보급되었을까. 그 시간은 천년이 넘게 걸렸다. 아랍인은 지중해를 넘나들며 유럽과 활발히 교역을 이어나갔고 그 와중에 커피가 점차 유럽인에게 퍼져나갔다. 유럽에서는 한때 커피를 금하기도 했다. 그 당시 유럽은 로마 카토릭교회의 교황이 가진 힘이 막강했는데, 이교도들이 들여온 음료 때문에 밤에 잠을 안자고 범죄와 음탕한 생활을 한다고 믿었기에 커피를 ‘악마의 음료’라 부르고 금지하기도 했다. 17세기경부터 유럽 전역에 유행처럼 번져 나갔으며 네덜란드와 프랑스 사람들을 통해 아시아와 중남미로 보급되며 브라질과 콜롬비아,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같은 커피 최대 생산지들이 생겨나게 된다. 1900년대 초 미국에서는 인스턴트(instant) 커피가 나왔는데, 1차 세계대전 당시 군인들에게 휴대용 커피를 마시게 하므로 전쟁에서 승패가 결정되기도 하였다고 전한다. 전쟁 후에는 인스턴트 식품의 물결을 타고 널리 일반화되었다. 우리나라에는 고종 황제가 러시아 공관에 머물 당시 커피를 마셨다는 기록이 있다. 이 문서로 봐서 우리나라 최초의 커피 드링커(Drinker)는 고종황제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언제부터 커피를 마시게 되었을까? 최초의 커피를 마신 기록은 미국의 천문학자 퍼시벌 로월(Percival Lowell, 1855.3.13-1916.11.12)은 그의 저서『Choső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에 보면 1884년 1월의 추운 어느 날 조선 고위관리의 초대를 받아 한강변 별장으로 유람을 가게 되었는데 꽁꽁 얼어붙은 겨울 한강의 정취를 즐기던 중 “우리는 다시 누대 위로 올라 당시 조선의 최신 유행품이었던 커피를 마셨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우리나라 최초의 커피 전문점은 20세기 초, 독일인 러시아 공사의 처형인 손탁(Antoniette Sontag, 1854-1925)이라는 독일계 러시아 여인에 의해 들어섰다. 정동에 세운 한국 최초의 호텔인 손탁호텔 안에 첫 커피숍을 개업한 이후 일제 강점기에는 명동과 소공동 등지에 일본식 다방들이 생겨났다. 대중보급은 6.25 전쟁 이후 미군들의 식량에 속해 있던 인스턴트커피가 익숙해지고 인기를 얻어 본격적으로 시판되면서부터다. 다방식 커피든 인스턴트커피든 요즘 유행하는 브랜드 커피든 간에 커피는 그 향미를 즐기며 소통하는 접촉점임에는 틀림없다. 우울한 날에는 달달한 커피가 좋다. 사람도 커피를 잘 사는 사람이 더 좋다. 그런 사람은 대개 소통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따뜻한 나눔이 행복이다. 우아하게 함께 나누는 커피 한잔의 여유로움은 일상의 소소한 행복이다. 사람은 그렇게 행복하기로 마음먹은 만큼 행복해 진다. 커피 한 잔이 주는 선물은 분명 매혹적이다. “커피 한잔 하시죠?” 사람들을 자주 만나다보면 그럴 때마다 커피를 권하고 마시는 일들이 생긴다.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소통할 때, 으레 마실 커피를 권하는 것이 예의처럼 여겨진다. 좋은 이미지를 지닌 매너 있는 사람으로, 통찰력을 겸비한 에너지 넘치는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맑은 정신을 갖게 하는 도구 역할도 톡톡히 해 내서 바쁜 현대인들과 쉽게 친숙해진다. 모든 만남과 거래에서 첫인상은 매우 중요한데 커피 한 잔은 상대방이 보여주는 태도와 매너가 그 사람에 대한 이미지를 결정하거나 첫인상을 다지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한다. 누군가와의 첫 만남이나 미팅 자리에서 마시는 한 잔의 커피는 소통을 열어주고 거래를 성공적으로 성사시키며 멋진 이미지를 심어주는 데 도움을 준다. 에덴동산부터 사람은 누구나 유혹에 약하다. 커피 한잔의 유혹은 쉬지 않고 다가온다. 주일에 출석하는 교회는 로비에 커피숍(coffee shop)을 차리신 담임 최 목사님은 바리스타(barista) 교육까지 받고 커피머신(coffee machine)을 신나게 당기신다. 커피 나누는 즐거움을 누리신다. 일회용 컵은 이 장로님이 제공하셨다. 그런가하면 남양주 다산동 자치위원회 사무실에도 새해부터 커피머신을 설치하고 별다방(?) 커피가 항상 제공된다. 당연히 안 마실 수 없는 구조다. 대학로 사무실에 나오면 주로 점심을 사머는데 시후에 단 맛 좀 보려고 달달한 자몽차로 마셔야지 하다가도 식당에서 주는 공짜커피인 믹스커피(mix coffee)나 지인들이 사는 아메리카노(Americano)의 유혹에 넘어가게 된다. 이런 유혹에는 후유증이 반드시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이유는 중독성 때문이다. 한 잔 마시면 기분이 업그레이드(upgrade) 되는 것 같고 집중이 잘 된다. 가끔 안 마시면 뭔가 허전하고 집중이 안 되는 이 느낌은 뭐지 싶다. 어찌보면 ‘카페인 부작용’이나 ‘카페인 중독’같기도 하다. 정말 커피 한잔은 약일까? 독일까? 커피를 마시면 정신이 맑아지고 집중력이 생기는데 반해 너무 많이 마시면 밤에 깊은 숙면을 하지 못한다. 필자의 경우, 커피의 민감성은 오후 2~3시 이후에 커피를 마시면 수면의 질이 떨어져 밤12시경 잠깐 잠들었다가 새벽 2,3시경에 깨면 화장실에 갔다오면 그 다음부터는 다시 잠들기 힘들어 진다. 그래서 아침이면 몽롱하고 그 잠에서 깨기 위해 다시 커피를 마시는 일이 반복된다. 커피가 가진 카페인 성분은 두 얼굴로 나타난다. 뇌를 각성시키지만 반면 두통과 신경과민, 불안, 현기증을 가져다준다. 심장박동수를 증가시켜 가슴 두근거림, 혈압상승을 유발하기도 한다. 위산 분비를 촉진시키다 오히려 위궤양, 역류성 식도염 등 위 질환을 주기도 하고, 철분과 칼슘을 흡수를 방해해 빈혈이나 뼈의 성장을 저해한다. 한국인들은 칼슘섭취가 부족한데 하루에 3잔 이상 커피를 마시면 칼슘의 배출로 오히려 독이 되기도 한다. 이런 커피가 알츠하이머 질환을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연구결과도 흥미롭다. 건물마다 커피 전문점이 많이 생겨나고 점심시간이면 직장인들이 테이크아웃 컵을 손에 든 채 길을 걷는 광경을 보게 된다. 매일 마시는 일회용 잔에 들어있는 커피, 간편하게 먹는 컵라면, 배달음식의 랩 포장은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코팅용 환경호르몬의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휴대용 개인 텀블러를 이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환경호르몬을 완벽하게 배제하면서 살기는 어렵지만 최대한 멀리하는 습관이 중요하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사용하는 일회용 컵, 캡슐과 캔 음료 등에서 나오는 쓰레기를 생각하면 커피가 만들어내는 폐기물의 양은 엄청나다. 음악을 들으며 마시는 커피 한잔의 여유와 사색이 인생을 열정을 쏟은 창조적 에너지로 승화되기를 기대하지만 1g의 원두에서 커피는 0.002g, 나머지는 커피 찌꺼기로 버려진다. 기후위기의 환경 변화에서 비상행동이 필요한 때에 지구의 미래를 생각하며 이것을 재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해 보인다. 일회용 컵 등 쓰레기를 최소화함으로 환경호르몬도 줄이고 지구도 보호할 수 있다. 한 잔의 커피의 유혹 앞에서 지혜롭게 일회용 컵 대신 머그컵이나 텀블러를 사용해 일회용품의 사용을 줄이는 습관은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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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효상 칼럼
    2021-03-16
  • [이효상 칼럼] 이슈에서 정치인의 침묵과 소신
    4·7 보궐선거를 앞두고 후보자들의 토론이 뜨겁다. 부동산 정책에 이어 초저출산율도 화제가 되었고, 지난 달 가진 ‘3지대후보토론’에서 안철수 후보와 금태섭 후보간의 퀴어(Queer)축제를 두고 차별금지와 혐오 논쟁도 이슈가 확산되었다. 선거에 출마한 여야 예비후보들의 가세함으로 '퀴어축제' 찬반 입장을 둘러싼 논란이 정치권 전반으로 확산된 바 있다. 퀴어축제는 대한민국의 성소수자 행사로써, 현재 2000년부터 ‘서울퀴어문화축제’라는 이름으로 대구, 부산, 전주, 인천 등 각 지역에서 매년 열리고 있다. 일정 기간 퍼레이드와 영화제, 파티를 중심으로 강연이나 전시회, 마켓, 토론회 등의 행사를 통해 성적 자유를 누리고 있다. 특히 퀴어 퍼레이드(Queer Parade)는 성소수자들의 권리를 주장하며 시가행진을 진행한다. 예비후보자 토론에서 금 후보가 “‘퀴어축제’에 참가할 의향이 있는가”라고 묻자 안 후보는 TV토론에서 “인권은 자기의 인권 뿐 아니라 타인의 인권도 중요하다”며 매년 서울광장에서 개최해온 ‘퀴어축제’에 반대한다는 발언을 했다. 안 후보는 차별에 대해서 반대하는 건 당연하다”고 전제한 뒤 미국의 예를 들어가며 서울 한복판에서 열리는 ‘퀴어축제’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일종의 퀴어축제를 카스트로 스트리라는 곳에서 한다. 거기는 중심에서 조금 떨어진 샌프란시스코의 남부 쪽에 있다. 그러다보니까 거기에서 축제를 하시는 분들 뿐만 아니라 본인이 보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분들이 거기 가서 보신다. 샌프란시스코 중심에서 하지 않는다는 그 말씀을 드리고 싶다”고 답했다. 안 후보가 샌프란시스코의 예를 든 것은 서울 퀴어축제가 서울의 중심인 시청 광장과 광화문, 남대문 등 사람들의 방문과 왕래가 많은 곳에서 열리기 때문에 축제 참가자가 아닌 일반 시민들에게 불편과 거부감을 줄 수 있다는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면서 성소수자들의 표현의 자유도 중요하겠지만 그것을 거부할 권리도 존중해야 한다는 의미로 분명한 메시지를 내 놓았다. 안 후보가 퀴어축제와 관련해 밝힌 '거부할 권리'의 중요성을 두고 정치권이 시끌벅적하다. 그동안 금기시됐던 성소수자 관련 이슈에 안철수 예비후보가 소신발언으로 성소수자 문제가 핵심 이슈로 떠오른 바 있다. 진보진영은 일제히 비판을 쏟아냈다. 자신의 발언이 논란으로 확대되자 안 후보는 “저 역시 소수자 차별에 누구보다 반대하고 이들을 배제하거나 거부할 권리는 누구한테도 없다”면서 “서울 퀴어 퍼레이드를 보면 신체 노출이나 성적 표현 수위가 높은 경우가 있었다”며 “성적 수위가 높은 축제가 도심에서 열리면 아동이나 청소년이 무방비하게 노출되는 걸 걱정하는 시민들 의견도 있다. 그래서 미국 사례를 들어 말한 것뿐”이라고 설명했다. 후보라면 마땅히 이런 소신이 있어야 한다. 이런 안 후보에 긍정적 평가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특히 안 후보자가 “자기의 인권뿐 아니라 타인의 인권도 소중하다. 거부할 수 있는 권리도 존중받아야 한다”고 한 대목에 공감을 표시하는 의견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 모처럼 안 후보가 분명하고 시원한 메시지를 내 놓았다는 느낌이다. 인물이 없다는 야권에 인물로 부각되는 모양새다. 여기에 국민의힘 후보 오세훈 전 시장이 발을 올렸다. 모 라디오 방송에서 "다만 퀴어축제가 서울광장이나 광화문광장 등 인근 도심에서 행해져 논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서울시에는 서울시광장사용심의위원회라는 결정기구도 있고 규정도 있다"며, "이 기구에서 심의 사용 규칙을 기준으로 결정한다"며 "시장 개인이 '해도 된다, 하면 안 된다' 결정할 문제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광장사용심의위원회는 '열린광장운영시민위원회'를 가리킨다. 이 위원회는 지난 2019년에도 퀴어문화축제의 서울광장 개최 여부를 심의하고, 퀴어문화축제의 부대행사인 '서울핑크닷'과 '서울퀴어퍼레이드' 행사의 서울광장 사용허가 여부를 승인한 바 있어 바꾸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 측은 “반인권적 대우나 차별은 없어야 하지만, 남녀노소가 모이는 시청 광장에서 동성애자 축제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게 오 전 시장 입장”이라고 덧 붙였다. 더불어민주당 민주당의 박영선 후보는 퀴어축제에 대해 명확한 답변을 피하고 있다. 박 후보는 기자간담회에서 차별금지법에 대한 입장이 바뀌었다는 보도에 대한 생각을 묻는 질문에 "제가 이야기한 것은 2016년으로 5년 전인데 그때와 지금 사회가 많이 바뀌었다"며 "사람들 생각도 바뀌었기 때문에 우리도 시대 흐름과 같이 바뀌는 것이 맞는다"고 말했다. 성소수자, 동성애, 동성혼, 차별금지법 등 논쟁의 중심에서 정치인의 소신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과녁에 맞추지 않은 채 구렁이 담 넘어가듯 그냥 흘러가는 얘기는 아무리 많은 시간을 투자해 들어줘도 국민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한 논쟁은 다르다. 치열한 논쟁 끝에 타당하다고 인정되는 것, 수긍할 수 있는 지점이 생기면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런 소신에 국민의 선택과 평가는 또 어떨까. 성소수자 문제, 특히 ‘퀴어축제’에 대해 인권 차원에서 표현할 자유와 거부할 권리를 동시에 언급한 것을 가지고 일부 진영에서 무조건 차별, 혐오로 몰고 가는 것을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이렇듯 일부 정치인들이 성소수자 문제를 자신의 정치 유 불리에 따라 침묵하거나 때론 정치 수단화하는 바람에 인권이 마치 특정 소수의 전유물처럼 변질돼 가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이 보편적 인권을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편향적 인권 편에 슬쩍 발을 담그는 국가인권위원회와 정치인들의 어정쩡한 처신 앞에서 동전의 양면과 같은 인권의 중요성을 강조한 정치인의 소신이 새롭게 평가되기를 기대해 본다. 현재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국회에 계류 중이다. 여기에 더불어 민주당 이상민 의원이 발의한 ‘평등 및 차별금지에 관한 법률안“에 20여명의 의원들이 가세하며 법적 요건을 갖췄다. ‘동성애조장’, ‘동성혼합법화’, ‘포괄적 차별금지법 독소조항’과 싸우고 있는 한국교회로서는 주목할 만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교계가 아무리 떠들어도 잔 안의 태풍처럼 전달되지 않던 것이 정치인의 분명한 소신 메시지에 여론이 달라지고 국민들이 호응하고 있다. 이참에 특히 퀴어축제에 대해 서울시민 절대 다수의 뜻에 반하는 광장사용을 지속적으로 허락하는 '열린광장운영시민위원회'도 재검토가 필요해 보인다. 이슈에 대하여 침묵하는 정치인과 소신을 분명히 밝히는 정치인을 보며, 자기 정체성과 표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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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효상 칼럼
    2021-03-10
  • [이효상 칼럼] 고난의 봄에 그대를 바라봄
    봄이 오고 있다. 살을 에이는 칼바람에도 봄은 온다. 겨울의 깊은 잠에서 깨기에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다. 마음은 봄을 향해 달려가지만 날씨는 느릿느릿 거북이 걸음이다. 봄이 오는 것을 시샘이라도 하듯 꽃샘추위까지 이어진다. 그래도 봄이 왔다. 겨울이 마음의 ‘얼어붙음’이라면 봄은 ‘풀림’이다. 봄을 이기는 겨울은 없다. 겨울의 심장을 녹이는 봄바람은 따스한 화해의 기운이다. 얼어붙은 겨울을 지나야 풀림의 봄이 온다. 마음도 관계도 그렇다. 돌덩이같은 가슴에 찾아온 꽃처럼 피어나는 이른 봄날이 왔다. 땅 속의 미물들도 긴긴 겨울잠을 끝내고 기지개를 하려는듯 논밭으로, 들녘으로 기운을 내 뿜는다. 겨울의 찬바람에 죽은듯했던 실나뭇가지에도 새싹이 돋아나며, 아카시아 웃음꽃이 피어난다. 시냇가의 버들강아지는 눈망울을 터뜨리고, 산에는 어느새 진달래, 철쭉들이 피기 시작했다. 길가에는 벚꽃이 기지개를 하며 웃는다. 시골집 담장 너머론 개나리가 담을 넘으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본다. 얼어붙었던 산새들의 노랫소리에 하늘도 녹아내렸다. 아름다운 목소리를 자랑하듯 봄을 알린다. 누가 이토록 이른 봄날을 절절히 그려 놓았을까. 마스크를 벗고 꽃내음을 맡고 싶다. 봄은 알리는 향기와 메아리는 퍼져가지만 봄은 봄이 아니다. 코로나와 함께하는 봄은 사랑스런 봄이 아니다. 잔인한 날들이다. 지난 해 봄, 여름, 가을, 겨울이 그랬다. 다시 봄이 오면 괜찮겠다고 생각했지만 그 봄이 아니다. 봄이 두렵다. 성악가도, 시인도, 상인도 봄이 두렵다. 도대체 봄이 주는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사랑스러움이 무엇인지 잊을 지경이다. 봄을 잊은 이에게 봄은 괴로운 인생의 한 조각이요, 시작이자 단절일 뿐이다. 마음과 삶이 무너지는 고난과 눈물을 안고 있다. 일상의 처절함으로 남는다. 고난의 계절을 지나는 그대에게 희망을 주지 못하는 봄은 봄이 아니다. 고난의 봄에 필요한 건 위로와 치유이자 무너진 관계나 공동체의 회복이다. 봄 아닌 봄 같은 세상에 봄은 온다. 그러나 그 봄은 건물 안에도, 쇼윈도우(show window)에 갇힌 봄이 아니다. 가난하고 소외당한 민초들의 삶이 어우러진 들판에서 피어난다. 봄의 전령으로부터 말이다. 추위를 녹이며 훈풍이 불어오고 햇볕도 따사롭다. 봄 길의 꽃씨를 뿌리고 꽃길을 여는 그들이 있기에... 봄의 전령으로서 교회는 고난당하는 이들의 현장으로 가야 한다. 세상이 비판하는 교회의 아픈 치부와 부패의 고리를 끊고 건강한 미래로 나아가라. 회복의 세대여 일어나라. 봄은 생기를 준다. 생기는 죽은 것을 살린다. 아름다운 생명이 끝나면 추해진다. 생명을 주는 능력이다. 생명이 있기에 아름답다. 생명이 있기에 의미가 있고, 목적이 있고 가치가 있다. 여기에 소망이 있고 사랑이 있다. 그래서 아름답다. 사랑스럽다. 어느 시인이 봄을 봄처럼 노래할 수 있을까. 어떤 화가가 봄을 봄처럼 그려낼 수 있을까. 죽은 고목나무 같은 인생에게 생기를 불어 넣을 수 있을까. 봄은 늘 봄으로 존재하겠지만 사실 바라봄이다. 고개를 들어 그대를 바라본다. 바라봄은 관심이자 위로다. 바라볼 때 살아있다는 것이 아름답고 사랑스럽다. 아니 신비스럽다. 내가 그렇고 가족이 그렇고 이웃이 그렇다. 몰랐던 삶에 경외감마저 든다. 돌이켜 처절한 절망속에서 새로운 영혼으로 봄을 쳐다보니 봄은 이미 봄이 되었다. 고난의 봄은 은총이 깃드는 시간이다. 하지만 자유와 풍요, 화려한 겉모습에 매몰된 채 홀로 십자가지고 가신 그분처럼 그렇게 동행하지 못한다면 영혼의 고갈을 회복할 수 없다.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우시던 그 눈물이 우리의 눈물이 되고 피땀흘려 기도하시던 그 옆자리가 우리의 자리가 되며, 십자가 지고가신 그 길을 따라갈 때 그래도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꿈꾸는 봄은 영혼의 봄이다. 옥토같은 대지에 꽃들이 만개하듯 피어나는 그런 영혼의 봄날이다. 사랑과 찬송으로 넘치는 감사로 가득 찬 인생의 봄이다. 그 맘에 훈풍이 불고 햇볕은 따사롭다. 봄은 그분과 함께 이미 내 마음에 와 있다. 내 영혼의 봄날이 왔다. 그래서 봄이 좋다. 그분과 함께 동행하기에 더욱 좋다. 사순절이 시작된다.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기 위해 금식(禁食)과 금육(禁肉)을 통해 절제하는 생활을 통해 갈라진 이 땅에도 어둠이 물러가고 봄이 왔다. 더 이상의 갈등과 분열, 전쟁과 분열을 종식시키고 화해와 평화의 부활아침 같은 봄이 밝아 온다. 봄을 언제나 새로운 부활이다. ‘이대로는 안된다’는 각오로 마음을 찢고 통회함으로 어두운 이 땅이 밝아오는 부활의 영광이 임하는 새벽을 맞는다. 고난이 인생의 마지막 고난이 되고 찬란한 영광이 빛나는 새로운 부활의 아침을 맞고 싶다. 추위와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한다. ‘복음’만이 민족의 희망의 등불이자, 이 민족의 부활이다. 고난의 봄을 지나며 시대의 어둠을 몰아낼 등불을 높이 들어본다. 고난의 봄에 그대를 바라본다. 고난당하는 그대와 함께하고 싶다. 언제나 마음만은 포근한 봄날이고 싶다. 고난가운데서 동행하며 깊은 대화와 묵상으로 봄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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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효상 칼럼
    2021-02-23
  • [이효상 칼럼] 인구 데드크로스(dead cross), 출산율 재고(再考)가 필요하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인구 문제 중 하나는 사회 전반적으로 아이를 적게 낳아 출산율이 감소하는 저출산 문제이다. 저출산 현상이 지속될 경우 장차 경제 활동 인구가 감소하게 되어 경제 성장이 둔화되고, 고령화에 따른 노년층의 부양 부담이 상승하게 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인구와 경제는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유엔 미래 보고서 2040」에서 “인구 감소가 이미 시작된 선진국은 예외 없이 국력 감소가 나타났다”고 경고한다. 그리고 일본의 인구 감소와 경기 침체를 사례로 들었다. 이에 우리 정부와 지방자체단체에서는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출산 장려정책을 추진하고 있지만 출산장려를 위한 예산은 매년 증가하는데, 전혀 출산율은 오르지 않고 오히려 추락하고 있다. 출산을 강조하지만 실제 출산에 대한 직접지원이 굉장히 낮은 수준이다. 문제는 정부의 출산장려예산이다. 2021년도 현재 저출산 명목의 예산은 꾸준히 증가해 2021년도 지난해보다 6조원 늘어난 46조원이 편성됐다. 이렇게 정부가 돈은 많이 쓰고 있다는데, 아이 키우는 환경도 함께 나아지고 있을까. 2006년 저출산·고령화 사회 기본계획이 수립된 이후, 저출산 지원예산은 모두 200조 원 넘게 투입됐다. 예산은 지난 10년간 연평균 21.1%나 증가했다. 예산은 매년 늘어나는데, 정작 주변에서 '아이 키우는데 저출산 예산의 덕을 봤다'는 가정은 찾기 어렵다. 오히려 출생보다 사망자가 더 많은 이른바 ‘인구 데드크로스(dead cross)’는 지난해 이미 현실화됐다. 2020년 강원도내 모든 시‧군에서 사망자 수가 출생자 수를 앞지르는 ‘인구 데드크로스’ 현상이 일어났다. 도내 전역에서 일어난 건 사상 처음으로 저출산과 고령화가 심화되고 있다. 2021년 행정안전부 주민등록인구통계에 따르면 2020년 비교적 인구가 많은 춘천시, 원주시, 강릉시를 포함 도내 18개 전 시‧군에서는 사망자 수가 출생자 수를 앞섰다. 2019년에는 원주시, 화천군을 제외한 16개 시‧군에서 인구 데드크로스 현상이 발생했다. 2020년 원주시, 화천군에서 사망자 수가 출생자 수를 역전하면서 도내 전역으로 인구 데드크로스 현상이 확대되었다. 강원도만 그런 게 아니다. 전국적으로 출생자 수가 27만여명으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한 데 비해 사망자 수는 30만명을 넘으면서 인구가 자연 감소했다. 세대수는 1인 세대 급증으로 사상 최다를 기록했다. 60대 이상 인구가 전체의 4분의 1 수준에 달해 고령화가 심화했으며 수도권 인구 집중 현상도 심해졌다. 2020년 12월 31일 기준 우리나라 주민등록 인구는 모두 5천182만9천23명으로 전년도 말보다 2만838명(0.04%) 감소했다. 연간 기준으로 주민등록인구가 감소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란다. 활력을 잃어가는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우리나라 주민등록 인구가 사상 처음으로 감소하면서 각 지방자치단체가 인구 늘리기에 비상이다. 그럼 출산장려지원을 젊은이들이 체감하고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이유가 무엇일까. 정부는 저출산 예산이 매년 늘었다고 하는데, 정작 젊은 부부들은 왜 체감하지 못할까. 2018년 이후 처음 1명대로 떨어진 합계출산율은 202년 0.9명에도 못 미쳤다. 계속 출산율은 떨어지고 있다. 국민소득 300달러에서 3만달러로 성장하면서 출산율은 오히려 4.5에서 1 미만으로 추락했다. 결혼과 출산을 당연시 여기던 기존 생각들이 여성의 지위 향상과 자기 결정권이 생기면서, 비혼과 출산은 이제 선택사항이 되었다. 서울시장 선거전이 뜨겁다. 후보들의 정책이슈는 단연 ‘출산지원’이 화두이다. 나경원 서울시장 예비후보는 “서울에서 독립해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으면 총 1억1700만원의 보조금 혜택을 주겠다”고 밝히며 이슈를 선점했다. 그녀의 공약은 결혼하면 4500만원, 아이를 낳으면 추가로 4500만원을 지원하고, 여기에 대출이자를 9년간 100% 대납해 총 1억원 넘는 혜택으로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뤄주겠다는 정책을 제시했다. 이에 여러 후보들이 공격하고 나섰지만 정작 상응하는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나 후보의 공약이 오히려 주목받는 이유다. 나 후보자는 “저출산 문제는 이번에 당선될 서울시장이 무엇보다도 먼저 해결해야할 최우선 과제이기 때문”이라며 “저출산·고령화가 얼마나 재앙적이고 심각한지 뼈저리게 체감했다”고 밝혔다. 17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20대까지 4선 의원을 지내며 재임시 저출산·고령화 특별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이 분야에선 전문가의 공약이어서 수긍하고 공감하게 된다. 그는 “주택문제는 저출산에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라며 “단순히 현금을 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저소득 신혼부부가 토지 임대부 주택을 마련할 때까지 이자를 지원하겠다는 것”이라며 “현금 살포하고는 다르다”고 짤라 말했다. 저출산과 고령화를 극복할 수 있는 일·가정양립제도의 성공적인 정착을 위해서는 이미 선진화된 복지정책을 시행하고 있는 해외사례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특히 프랑스와 스웨덴, 덴마크는 성공적인 가족정책사례로 손꼽힌다. 프랑스는 저출산·고령화를 정책의 힘으로 극복한 대표적 사례이자 이미 선진국에 진입한 나라 가운데 독보적으로 출산율을 끌어올린 사례이다. 다양한 가족 구성에 따라 `맞춤형 지원`을 하는 점이 프랑스의 특징이다. 그렇다고 신혼부부 모두들 서울이나 프랑스로 이사할 수도 없는 것 아닌가. 지방자치단체별로 들쑥날쑥한 출산장려금을 정리하고 가족 정책 전반적인 큰 틀에서 시행할 컨트롤타워(control tower)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적이다. 충남도의 경우 결혼한 지 2년 안 된 청년 부부가 공공아파트에 입주한 뒤 자녀 두 명을 낳으면 임대료를 전액 감면해주는 '더 행복한 주택'을 공급한다. 방 규모는 기존 임대아파트보다 큰 최대 59㎡(17.8평형)이다. 주거문제를 해결해 준다. 충북 제천시의 사례도 눈 여겨 볼만하다. 최대 5150만원까지 주택구매 대출금을 내주는 ‘3쾌(快)한 주택자금지원’ 사업을 도입했다. 결혼 후 5000만원 이상 주택자금을 대출한 가정이 아이를 낳으면 첫째 150만원, 둘째 1000만원(2년 4회 분할 지급), 셋째 4000만(4년 8회 분할 지급)을 지원한다. 셋째까지 낳으면 총 5150만원의 은행 빚을 지자체가 대신 갚아준다고 한다. 사실 한국은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중 출산 장려 관련 현금 지원 비율이 멕시코 다음으로 낮다. 저출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주거지원, 현금지원, 육아서비스 공급, 조세 정책 등 맞물려 돌아가야 할 요소들이 있다. 가족구성원들이나 사회 시스템이 함께 결혼, 가사노동, 출산, 양육, 교육 등의 몫을 함께 감당해 주지 않으면 경제, 직장, 주거, 세금 등의 장벽을 뚫고 결혼과 출산으로 나가긴 어렵다. 그래서 출산 때부터 대폭 지원하는 획기적인 정책 변화가 필요하다. 세액공제 혜택도 주로 중산층 이상에 쏠리는 만큼 저소득층 젊은 신혼부부의 출산율 재고를 위해 현금 지원 형태는 늘려야 한다. 저출산 문제는 포기한 것 아니냐는 말이 돈다. 저출산 너머를 볼 수 있는 비전, 미래로 나가기 위한 시스템,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려는 앞장 선 정치적 결단, 제대로 된 컨트롤타워(control tower)가 없다. 백수가 태반인 젊은이들이나 수입이 없는 서민들의 삶이 이토록 팍팍한 것은 경제도, 부동산 정책도, 저출산과 고령화 문제도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이제 출산은 ‘취업-결혼-육아’ 등 라이프 싸이클(Life Cycle)과 관련된 문제로 장기적으로 투자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 일·가정양립이 안정적으로 정착되는 사회로 나가기위해서 재정적인 지원뿐만 아니라 가족친화적인 사고를 가지려는 노력도 병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은 ‘비용’이 아닌 ‘내일을 위한 투자’이다. 우리 정부의 여성부, 복지부 등 여러 부처와 지자체들도 우물가에서 숭늉찾는 식의 뜬 구름 잡는 캠페인이 아니라, 산재해 있는 가족 정책을 모은 컨트롤타워로 피부에 와 닿는 직접적이고 효과있는 지원에 나서야 한다. 문경시의 경우 신축년 첫 넷째아 출산 가정이 탄생해 3천만원의 출산장려금을 받게 되었다 고 한다 문경시 점촌2동 김모(35)·강모 씨(34) 부부의 남아로 2남 2녀의 막내가 됐다. 문경시의 출산장려금은 첫째 360만원, 둘째 1천400만원, 셋째 1천600만원, 넷째 이상 3천만원이다. 이러한 출산장려정책에 힘입어 문경시는 2019년부터 출생아 수가 2년 연속 증가세를 이어가고 있다. 2020년 출생아는 328명으로 전년도 대비 14명이 증가했고 이는 경북도 내 유일한 출산증가 기록이다. 출산 절벽시대에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말을 실감하면서, 다음세대가 대한민국의 미래라는 생각은 나만의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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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효상 칼럼
    2021-02-16
  • [이효상 칼럼] 한국교회여! 트렌드(trend)를 멀리하라
    “카페인(caffeine)을 하세요?”라고 묻는다. 예전에 마시던 박카스나 커피같은 각성 물질의 마시던 그 카페인이 이미 아니다. 이 카페인은 젊은이들이 소통하는 생활방식인 카카오톡(kakao tok), 페이스북(facebook), 인스타그램(instagram)을 줄여 뜻한다. 그동안 웹(web) 2.0을 기반으로 하는 소셜미디어(social media)는 블로그(blogs), 소셜 네트워크(Social Networks), 메시지 보드(Message Boards), 팟캐스트(Podcasts)등으로 참여, 공유, 개방이 특징으로 네티즌들이 적극 참여해서 정보를 만들고 공유하는 사회적인 연결성을 중시했다. 웹(web) 3.0은 데이터의 의미를 중심으로 서비스되는 시대를 말한다. 개인화, 지능화, 상황인식 등이 엄청난 양의 정보 중에 내가 지금 필요한 정보와 지식만을 추출해서 보여주는 맞춤형 웹의 시대가 웹 3.0 시대다. 컴퓨터가 사람을 대신해서 정보를 모으고 필요한 정보만을 편집하여 새로운 정보를 만들어내는 인공지능(AI) 웹이다. 가령 예를 들어, 웹 3.0에서는 우리가 여행을 가고 싶을 때 그 여행지에 대한 정보를 찾기 위해 여러 웹사이트를 일일이 들어가서 정보를 모으고 예약하는 과정 대신 우리의 휴가 일정과 좋아하는 여행 스타일 등을 입력하면 컴퓨터가 정보를 다 찾아보고 그것에 맞춰 알려준다. 코로나와 4차 산업혁명이 사회에서 회자되면서, 많이 쓰이는 용어중 하나가 ‘메가트렌드’와 ‘빅데이터’라는 단어이다. 인공지능(AI) 기술과 사물인터넷 등 첨단 정보통신기술이 사회 전반에 융합돼 혁신적 변화가 나타나는 코로나로 인한 변화와 4차 산업혁명이 일상 속으로 빠르게 파고들고 있다. 어찌보면 변종(變種)이 생겨날 정도이다. 교회는 이같은 변화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고 대응해야 할까? 1980년대는 산업화의 뒤를 이어 ‘경영’과 ‘부흥회’가 목회의 필수 키워드(Keyword)가 된 적도 있고. 1980년 후반에는 ‘제자훈련’이, 1990년대는 ‘빈야드’사역이 2000년대에는 ‘복지’가 유행이었다. 2010년경부터는 인간 이해를 전제로 ‘상담’이 목회의 필수 과정처럼 어필(appeal)되기도 했다. 어찌보면 한국교회가 트렌드(Trend)라는 호랑이등에 올라타 롤러코스터를 해 왔다. 한때는 미국의 어떤 교회가 성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마치 그것이 교회 성공의 비결인 것처럼 여겨지고 유행처럼 번져 교회 강단과 세미나를 독점하고 필수코스로 탐방하며 그 과정은 그대로 국내 도입되었다. 교회와 목회, 사역에 뭔 트렌드가 있을까마는 강조점이 사회와 소통하기 위한 한때의 흐름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물론 트렌드를 잘 선용하면 교회의 여러 활동에 도움되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교회가 너무 트렌드에 민감하고 트렌드에 맞추느라 요란스럽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트렌드는 그때 그때 다르다. 선택은 자유겠지만 존재의 가벼움보다는 존재의 진중함이 더 종교가 가진 고유의 성질과 맞다. 어찌보면 트렌드는 ‘유행’이고, 왔다가 사라지는 ‘바람’ 같은 것이다. 짧게는 3년 길어야 10년을 못 넘긴다. 왔다가 반짝하고 지나가는 허상이다. 영원한 것이 아니기에 사람들을 열광케 한다. 혹자는 ‘교회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결국 도태되고 기술에 매몰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교회가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 교회는 기술적 가치에 의존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다움’이라는 영성적 기준이 있다. 이런 기능에도 불구하고 트렌드가 어떤 방향이나 모습으로 변화할지 정확히 예측하는 게 어려운 만큼 지금의 교회는 신기술과의 접점을 넓혀가면서도 초대교회의 영성과 공동체성, 공교회성과 공공성을 오히려 강화하는 노력이 더 필요해 보인다. 물론 전통적인 교회문화 안에도 인공지능의 문화가 도입될 수 있다. 교회가 트렌드를 민감하여 교회 안에 백화점 문화센터와 비슷한 방식으로 교양 아카데미, 카페와 서점, 꽃집 등을 만들어 교회를 '거룩한 공간'이라기보다 평일에도 쉽게 찾을 수 있는 '생활 공간화'함으로써 교회의 대중접근, 특히 교회와 거리를 두는 젊은 세대들을 끌어 들였다. 긍정적으로 보면 대중의 일상적 삶에 접근하기 위한 노력으로 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종교고유의 색깔을 잃어버리고 비즈니스나 마케팅 지상주의에 빠지는 부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트렌드를 파악하고 알아차리는 일은 중요하되 그것이 정말 필요한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미래학자의 책을 100여권 읽고 여러 강의를 들었지만 그들의 예측도 틀린 경우도 허다했다. 미래학자들의 헛발질을 보며 그들의 말이 꼭 맞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그렇다고 시대의 트렌드를 외면하고 모른다고 잘한 일도 아니다. 줌(Zoom)이나 화상회의가 그렇다. 현 시세를 읽고 사회와 소통하기 위해 트렌드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트렌드를 따르는 순간, 트렌드에 휩쓸려 결국은 트렌드와 함께 추락할 수 있다. 오늘 날 너무 많은 크리스천들이 그런 함정에 빠지고 있다. 세상문화가 추구하는 많은 것들에 동조하고 세상 풍속을 따라 간다. “자기 스스로 사색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사색과 주장과 선동에 따르게 된다. 자신의 사색을 그 누구에게 공물로 바치는 일은 자기 육체를 공물로 바치는 것보다 천하다.”라고 저시아의 문호 톨스토이(Leo Tolstoy)는 말했던가. 세상과 소통하고 문화를 접목하며 꼭 트렌드를 앞서가고 주도하고 트렌드에 맞춰가기 보다 중요한 것은 시대를 넘어선 교회가 가진 영성의 깊이에 달려 있다. 교회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의 갈급함과 방황하는 그 영혼을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붙들어 세울 것인가 하는 데 더 큰 고민을 가져야 한다. 트렌드는 포장지 정도의 효과를 발휘한다. 화려한 포장지에 정작 그 알맹이가 허당이면 사람들은 금방 실망하고 떠나가게 된다. 알맹이 즉 내공이 없으면 무슨 사회적 영향력이 있겠는가? 이미지라는 이름으로 유행하는 문화 시류에 맹목적으로 편승하려는 것은 어찌보면 남의 뒤에 서겠다는 것과 같다. 그런데 그런 문화현상에 동조하지 않을 경우 거친 반발과 비판을 두려워해 세속적인 현상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인지 트렌드를 멀리하고 시대를 거슬러 ‘수도원적 영성’으로 나가야 하는 것이 오히려 역설적 대안일 수 있다. 트렌드의 옷을 입고 젠틀(gentle)한 교회의 모습은 지녔지만 은혜가 메마른 교회보다는, 트렌드를 멀리하고 영성의 깊이를 더해 영혼을 향한 눈물과 가슴이 뜨거운 교회가 그래도 더 건강하고 희망적이다. 한국교회여! 트렌드를 멀리하자. 트렌드는 본질이 아니다. 4차 산업혁명시대라고 여기저기 세미나 돌아다니며 들은 풍월로 따라한들 언제 전문가가 되겠나. 빌게이츠처럼 한다고 첨단목회가 되겠나. 4차 산업혁명은 이미 전문가인 평신도들의 몫으로 역할 분담을 해야 한다. 그렇게 그들에게 맡기고 목회자는 차라리 목회의 본질을 부여잡아야 한다. 교회여! 영성과 능력을 지닌 교회로 가자. ‘다시 복음으로’, 트렌드와는 결이 다른 길을 가자. 코로나 위기속에 한 영혼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달으며, 다시 말씀을 깊이 파 실력을 쌓고, 다시 기도의 분량을 채우며 핵심역량을 강화하고 극대화하는 쪽으로 가야 산다. 시세를 읽고 실력을 쌓으며 트렌드와 반대로 갈 용기를 가진 사람만이 남 다른 생존과 탁월함을 이뤄낼 수 있다. 어느 시대나 시대정신을 읽고 성공하는 사람은 그 생각과 가는 길이 이미 다르다. 그래서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감으로서 시대를 열고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 낸다.
    • 칼럼
    • 이효상 칼럼
    2021-02-02
  • [이효상 칼럼] 하나된 한국교회를 꿈꾸며...
    지난 연말 전국 대학교수들이 한 해를 마감하며 의미하는 사자성어(四子成語)를 뽑아 발표했다. 2020년(경자년)의 사자성어는 “我是他非(아시타비)”다. 그 뜻은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이다. 한국 정치권에서 유행했던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란 말을 한문(漢文)으로 옮긴 성어(成語)로, 한국사회에서 만들어진 신조어(新造語)다. 우리 사회 분열에는 ‘내 탓’ ‘내 잘못’ ‘내 책임’이라는 자기 성찰을 망각하는 기류가 깔려있다. 저쪽이 잘못이고, 가짜 뉴스이고, 거짓말이라는 식의 비방이나 감정 대립의 오만한 언사들로 가득하다. 올 한 해는 한국이나 미국의 정치 키워드(key word)는 ‘국민통합’일 것이다. 갈라진 민심과 반목, 질시의 분열의 역사를 끝내고 대통합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 분열의 역사가 그렇다. 한국교회의 분열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분열된 역사는 이제 그만하고 한국교회가 하나된 모습이 절실하다. 한국교회에는 소위 ‘연합운동’을 표방하는 기관이나 단체가 참으로 많다. 그러나 여기서 기존 ‘연합기관’이라 함은 공 교단을 중심으로 결성된 단체를 연합기관이라고 지칭한다. 한국교회연합기관은 결국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그리고 ‘한국교회연합’등과 ‘한국교회총연합’에 ‘한국장로교총연합회’등 4분 5열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한국교회연합기관’은 개교회가 하지 못하는 일들을 힘을 모아 대신하기위해 그 권한을 위임받은 기관이다. 그런데 연합기관이 그 위임받은 힘으로 해야 할 일보다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더 심혈을 기울인다면 한국교회의 외면을 받기 십상이다. 그런 예가 정치권력 지향하거나 또는 자리를 만들고 자리를 차지하는 일에 관심을 전력투구하는 일이다. 대표적 연합기관은 지난 2007년 평양대부흥 100주년을 통해 하나 될 수 있는 모멘텀(momentum)을 가졌지만 결국 ‘밥그릇 지키기’에 따라 실기하고 지난 14년간 금권선거와 타락선거 등으로 얼룩져 쪼개졌고, 보수와 진보는 균형점을 찾지 못하고 서로를 헐뜯는 소모전을 치러 왔다. 이젠 무기력하다 못해 포기 상황이다. 분열은 불행이다. 지난 130여년의 양적성장에도 불구하고 연합하지 못하고, 분열하는 영적미숙은 여전히 교회가 풀어가야 할 오랜 과제이다. 이 사회의 도덕적 해이 못지않게 교회의 분열로 나타난 영적 해이와 일탈은 날이 갈수록 도를 더해가고 있으며 이로 인한 사회의 영적 침체와 타락의 책임도 통감하게 된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소위 ‘한기총’과 한기총의 분열로 생겨난 한국교회연합 즉 ‘한교연’ 등 모두가 대표성을 주장하지만 역사에 걸맞게 어느 단체도 전적인 권한을 갖지 못하므로 ’대표기구‘가 아니라 ’대표적 연합기구‘라고 불리고 있다. 2006년까지는 그래도 보수를 대변하는 ‘한기총’과 진보를 대변하는 ‘교회협’은 나름 존재에 대한 명분을 지니고 있었다. 서로의 색깔을 분명하게 드러내며 기독교의 다양성을 담아내기도 하였지만 한기총이 2012년 한교연으로 분열되면서 그 색깔도 드러내지 못하고 분열의 상처만 간직하고 있다. 2012년 이후 한기총과 한교연이 ‘보수’라는 간판아래 두집 살림을 하고, 교회협도 최근까지 에큐메니칼 정신의 실종으로 도덕성에 큰 흠집을 가져왔다. 2006년 한기총과 교회협이 통합하기로 하여 정관까지 만들었지만, 결국 각 기관의 밥그릇 챙기기에 밀려 출범하지 못해 14년이라는 허송세월을 보내며 분열은 지속됐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한국교회의 현실을 미리 아셨을까? 최후의 만찬을 하신 후 드린 마지막 기도에서 “그들이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17:21)라고 하셨다. 한국교회에 주님의 기도와 당부는 아직도 유효한가? 갈등과 분열의 역사속에서 다름보다 같음을, 분열보다 화해를 추구했던 교회의 일치와 연합운동이 있었기에 2천년 역사는 그 흐름을 유지 할 수 있었다. 우리는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을 지금도 믿고 있는가? 지금 한국교회는 참담하다. 이 막막한 현실을 타개하는 방법중 하나가 ‘하나됨’이다. 분열의 주된 원인은 상대를 동동하게 대하지 않은 갑질이다. ‘나는 갑이고, 너는 을’이라는 잠재의식에서 비롯되는 것 아닐까. 무조건 나만 옳고 너는 틀렸다는 독선가 아집으로 편가르기를 해선 안된다. 분열의 악순환으로 더 이상 역사 앞에 부끄러움을 남기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에 교회의 미래를 생각하는 교계지도자들이 함께 모여 머리를 맞대고 기도하며 연합운동의 새 장을 열기위해 대타협을 이끌어내야 하겠다 코로나의 위기속에서 예배조차 맘대로 드리지 못하는 한국교회가 그렇게 한가한 상황인가. 강도만난 사마리아인된 지경에서 식구들끼리 책임전가하며 싸울 때인가. 연합기구들이 정치적 분열로 인하여 갈등의 정점에 서있는 상황에서 사회적 문제에 책임있는 기관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라도 하나됨을 이루기 위해 치열하게 피와 땀을 흘려야할 상황이다. 연합운동은 대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개체로서, 안티세력으로부터 교회를 방어하는 영적 전진기지로서 그 역할이 막중하다. 현실은 그 역할에 맞는 그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교회의 영적부흥도, 사회의 도덕적 변화도 우리 손에 있음을 알면서도 연합의 힘이 미치지 못함을 안타까워 해야 한다. 2021년 한국교회가 다시 회복되어야 한다. 그래야 민족과 역사도 살릴 수 있다. 윤동주시인이 말한 것처럼 이 시대의 희망이 교회의 십자가에 걸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새해가 되면 덕담 겸 인사로 “새해에 꿈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필자는 개인적 꿈이 아닌 공적인 꿈으로서의 ‘하나된 한국교회’라고 말하게 된다. 하지만 새해에 연합기관의 통합은 정말 가능한가 라는 의문이 든다. 명분에는 전적으로 공감하고 박수를 보내지만 실제적으로 이루어질지는 미지수다. 연합기관이 대통합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연합기관 지도자들이 얼마나 자신을 희생하고 양보하면서 성령안에서 하나되는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이다. ‘결자해지’와 ‘십자가’를 지겠다는 정신으로만 가능할 것 같다. 말로만 ‘연합’과 ‘에큐메니컬’을 논 할 것이 아니라 그 정신을 진정성 있게 구현하며 하나됨을 실천으로 보여줄 시험대에 서 있다. 분열과 대립의 길을 걸어온 연합기관 지도자들이 이제는 서로의 손을 잡고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고 미스바로 모여 하나되야 할 절호의 기회다. “이대로, 여기가 좋사오니”라는 생각과 자신들이 가진 철밥통을 내려놓는 결단에서 시작된다. 코로나 정국, 안티기독교세력과 이에 따른 여러 정책앞에서 한국교회는 심각한 리더십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지도자들의 대 사회적 영향력이 점점 사라지고, 사회에 영향력은 잃어가고, 병든 시대를 고치고 바로 잡을 수 있는 영적 감화력도 떨어지고 있다. 교회는 존경받는 지도자를 세워 교회가 대사회적 지도력과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한국교회 연합운동에 대한 새로운 지도력을 요구하는 2021년 새해, 분열과 갈등으로는 더 이상 미래를 열어 갈 수 없다. 세속과 역사의 현장에서 비겁하게 그 책임을 회피하는 지도자들로는 더 이상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 2021년 하나된 한국교회를 꿈꾸며, 하나의 단일 개신교단으로 ‘대한예수교’를 조직하기 위해 노력했던 역사적 경험에서 일치와 연합운동의 지혜를 찾을 필요가 있다. 1906년 여름, ‘하나된’ 교회가 세워지기를 사모했던 조선의 기독인들이 드렸던 기도는 오늘도 여전히 유효한 것인가. “주의 셩신이 전능하신 권력으로 모든 사람의 마음을 감동식히샤 어렵다 하난 생각은 다 없시하여 주시옵기를 구쥬님과 아버지끠서 하나히 되신 것 갓치 우리 교회도 하나히 되기를 간구하옵시다.”
    • 칼럼
    • 이효상 칼럼
    2021-01-21
  • [이효상 칼럼] 한국교회, ‘성장주의’ 이대로 좋은가?
    지난해 모 기독교방송사에서 ‘이 땅을 치유하소서’라는 토크프로를 방송한 적이 있다. 토론자로 고신대 석좌교수 손봉호 박사와 필자도 토론자로 함께 참석했다. 화두는 ‘성장주의의 문제점’이었다. 손 박사의 예리하고도 비판적 시각에 맞서 건강한 성장이 필요하다는 필자의 견해가 맞불을 놓으며 열띤 토론을 가졌다. 두 세시간을 훌쩍 넘기며 서로 공감대를 가지며 엄청 친밀해졌다. 물론 방송은 한시간 이내로 나갔지만 말이다. 한국교회의 성장주의는 시대마다 역사적 흐름을 가지고 있다. 1884년 초기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학교와 병원, 교회와 한글성경 보급 등을 통해 민족을 계몽했고, 이것이 1919년 3.1운동의 동력이 되었다. 고난 속에서 민족과 함께하는 교회로 자리매김했다.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핍박 속에서 소망이 없었던 교회는 오직 재림을 대망하는 종말론적 신앙을 지녔다. 1938년 신사참배 결의 후 주기철 목사님을 비롯하여 일사각오 순교신앙을 지켰다. 1945년 해방이후 한경직 목사님,빌리그레엄 중심으로 반공과 부흥운동을 통해 엑스폴로 74와 77년 5천만 민족복음화 성회를 통해 부흥을 경험했다. 1980년대 옥한흠 목사를 중심으로 ‘평신도를 깨운다’는 지적인 성장을 도모하는 제자훈련이 유행된 적도 있었지만, 1970년대 풀러신학교 맥가브란 박사와 제자 피터 와그너에 의해 시작된 교회성장학이 국내에 전파되면서 오순절 은사운동 즉 정적 신사도운동 전개하게 되었다. 한편 성장에 목마른 교회에 기름에 성냥불을 끄듯 성장주의 불길로 나타났다. 하지만 2000년대 성장 멈춤고 오히려 성장에서 추락하자 달릴 때는 보이지 않던 것이 멈추면 비로소 보여지기 시작했다. 그런 성장의 반사작용으로 자각으로 일어난 것이 ‘교회건강’이다. 교회는 고혈압, 당뇨의 원인이 되는 덩치를 키우는 성장에서 건강으로 가야한다. 비만은 건강이 아니었다. 군대 있을 때 ‘전방이 살아야 후방이 산다’ 는 말이 있었다. 한국교회는 작은 교회가 살아야 큰 교회도 살고, 큰 교회가 살아야 작은 교회도 살 수 있다. 교회성장, 이제는 경쟁구도가 아니라 상생관계이다. 한국의 6만교회가 있는데 큰 교회. 작은 교회의 각자 역할이 있다. 간혹 이런 착각에 빠질 수 있다. 큰 교회도 문제가 있고, 작은 교회는 문제가 없다는 식 말이다. 큰 교회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교회도 문제가 있다. 작은 교회도 아름답다면, 큰 교회도 아름다운 점이 있다. 큰 교회 다니면 큰 믿음이고, 작은 교회 다니면 작은 믿음처럼 생각하면 안된다. 큰 교회 목회하면 큰 목사되고 작은 교회 목회하면 작은 목사가 아니다. 이런 동역자 의식을 잃어버린 차별이 교계를 양극화 시킨다. 문제는 작은 교회가 무조건적으로 큰 교회를 흉내내고 따라했다. 교회는 찍어낸 붕어빵이 아니다. 교회마다 주신 비전이 다르다. 예를 들면 10명교인인데 허구헌날 1만명 초대형교회 성장노하우 배우러 다니다보니 ‘경영학에 물든 기독교’가 되었다. 두 날개 세 날개 전도폭발 총동원 등 이런 관념도 벗어나는 것이 좋다. 각자의 교회에 주신 고유의 정체성, 공동체문화, 지역공동체와 함께하는 교회의 모습을 만들어내야 건강한교회로 나갈 수 있다. 한국교회의 성장은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이다. 목회자와 성도들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더 실감하게 된다. 코로나 상황에서 성장은 생존이다. 그러다보니 성장시키기 위해 목회자 스스로 ‘성장’이라는 강박관념에 늘 시달린다. 개인주의(스타의식, 영웅)는 개 교회주의를 심화시키고 교회가 상호 연합이 되지 않는다. 물량을 투입하면서 52주 성장용 이벤트를 가동했다. 전도폭팔, 총동원전도 등으로 성장 피로감으로 성도들도 못 버텨낸다. 더 큰 문제는 목사와 장로 갈등요인으로 자리하였다. 성장프레임에 갇혀 성장을 못시키면 목사를 내보내고 그러다보니 차량운행 교인쟁탈전을 하기도 하고, 교회의 기업화 촉진하는 지성전 즉 프렌차이즈화를 도모하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정작 역사와 삶으로부터 분리되어 건강한 역사의식, 애국심. 자유, 정의, 생명, 진리, 평화 등 중요한 부분들을 놓치고 사회적 책임과 기여를 상실했다. 이제는 ‘성장’에서 ‘건강’으로 영적부흥으로 돌아서야 한다. 코로나는 우리를 ‘모이는 교회’에서 ‘흩어지는 교회’가 되게 했다. 어찌보면 1만명 모이는 한 교회 보다는 100명 모이는 100교회가 더 건강한 구조이다. 한국교회 전체가 함께 건강해지는 길을 함께 모색해야 상생이 가능하다. ‘성장’에서 ‘건강’으로 캐치프레이즈의 전환하고, 분립개척, 분가독립을 모색해야 한다. 꾸준한 의식개혁과 설득노력 통해 상생 추진해야 한다. 로마의 핍박에서도 카타콤교회가 그 시대를 살려낸 것에 주목하게 된다. 교회의 본질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교회의 지향점 달라진다. 요즘은 교회의 공교회성의 필요성에 더 주목하게 되면서, 바른 교회, 건강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되는가를 묻게 된다. 성경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교회의 본질이자 교회의 표지 3가지 정도를 짚어 본다면, 성경적으로 베드로나 스데반 집사처럼 성경적 바른 신앙고백과 바른 말씀선포가 전제되어야 한다. 삶으로는 예수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예수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교회여야 한다. 선교적으로 영혼을 구원하여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교회가 정답일 것 같다. 코로나로 한국교회의 민낮이 그대로 드러낫다. 신천지나 이단, 사이비 및 돌팔이 같은 회복하기 어려운 이미지를 남겼다. 코로나로 한국교회가 참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위기는 코로나가 아니다. 외적인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하나됨과 생명보다 소중하다고 늘 고백하던 그 예배를 잃어버린데 있다. 머리 짤리고 두 눈 뽑힌 삼손처럼 야성과 영성을 잃어버린 교회가 건강하다 할 수 있겠는가. 한국교회는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값위에 오늘의 교회를 이루고 있다. 새삼 묻게 된다. 진정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고 있는가.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의 순교신앙을 이어받고 있는가. 6·25전쟁 당시의 이념앞에 신앙과 양심의 갈등을 그려 한국인 최초로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른 재미작가 김은국의『순교자』란 작품에서 보듯, 숨은 순교자들이 곳곳에 아직도 있다. 일사각오로 이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십자가신앙으로 교회폐쇄에 맞서 한 몸을 던진 손현보 목사와 부산세계로 교회는 한국교회에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보여 주었다. 세상적 시각과는 다르겠지만 말이다. 주님을 따르는 길이라면 그 길을 그렇게 가야하지 않을까 싶다. “주님 이 땅을 치유하여 주옵소서! 주님 교회를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며 주님이 디자인 하신 교회, 주님의 가슴에 품고 있는 그 교회가 우리의 소망이 될 때, 그래도 교회가 세상의 희망이 되지 않겠는가?
    • 칼럼
    • 이효상 칼럼
    2021-01-13
  • [이효상 칼럼] 절망하라. 한국교회여!
    ‘희망’은 있는가? 다들 ‘희망’을 이야기 한다. 그런데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굳게 굳게 다짐하건만 지나갈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지나간들 다시 회복이 될 것인가? 그 뿐이랴. 나라의 두 축인 안보와 경제가 무너져 내려도 “괜찮아, 다 잘 될꺼야”라는 희망의 찬가가 울려 퍼지고 있으니 말이다. 경제에도 가짜 희망이 판을 친다. 코로나 사태 와중에 나랏빚이 올해 100조원 이상을 넘는다지만, 직업없는 백수들이 100만명을 넘어섰다지만 다들 천하태평이다. 정치권은 ‘추경’이라는 퍼주기 경주에 나섰고 국민은 달콤한 돈 맛이 좋아졌다. 포퓰리즘 (Populism)으로 망한 나라들이 즐비하지만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고 굳게 믿는다. “설마, 우리나라가 망하겠어?”라는 막연한 희망이 국민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다. 왜 사람들은 뻔한 사실을 간과할까. 오스트리아 출신의 작가 에바 메나세는 “사람들이 풍요로움에 빠져 주어진 호사의 의미를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현대의 뇌과학은 그 이유를 이렇게 풀어놓는다. 인간의 뇌는 저장 용량이 제한적이므로 과거의 묵은 기억을 지우거나 외진 곳으로 옮기고, 그 공간을 새로운 기억으로 채운다. 수십 년 전 전쟁이나 가난의 기억보다 현재의 평화와 풍요 문제가 더 부각될 수밖에 없다. 양적으로도 후자에 관한 정보는 넘쳐난다. 인간이 균형감을 잃고 현재의 상황에 쉽게 매몰되는 이유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교회도 막연한 희망을 노래할 것인가. 만약 오늘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면 어디로 임하실까. 성탄절이 다가온다. 처음 예수님이 오신 곳은 가장 낮은 절망의 자리 누울 곳이 없는 ‘마굿간’이었다. 특급호텔의 상석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잃고 길 바닥인생인 서울역의 노숙자로, 거리의 나사로로, 죄수의 옷을 입고 아니면 병자의 몸으로 오실 것 같다. 그런데 거기에는 별 관심들이 없다. 온갖 화려한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으며 살다보니 이제는 날마다 좀 더 저 높은 곳만 향해 가려한다. 고통받는 밑바닥 인생들, 민초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은 이미 오래된 것일까. 이렇듯 ‘교회가 희망’이라는 불씨가 꺼져가자 너무나 실망한 나머지 세상은 강하게 비판의 소리를 내고 있다. 가장 낮고 처절한 절망의 자리야말로 가장 순수하고 치열한 삶의 열정이자 현장이다. 사람들이 불행해지는 이유는 ‘진실하게 절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삶의 가장 낮은 자리, 밑바닥을 치고 나면 다시 솟아날 힘과 용기가 생긴다. 그러니 꼭 진실하게 절망하고 낮아지라 권하고 싶다. 다시 교회는 야성과 영성을 회복하고 다시 낮은 곳으로 내려가 사랑을 실천하는 사마리아 사람들과 강도만난 사람들로 채워져야 한다. 강도만나 경제적으로, 육신적으로 소외당하는 이들의 억울한 자리로 다가가 아픔에 관심을 가져주고 함께 나누며 붙들어 주므로 상처를 치유해줄 수 있는, 그래서 그들에게 참된 기쁨과 회복을 되돌려주는 기회가 되면 안 되는 것일까. ‘천하대혼돈’이라는 저서로 코로나 시대의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의 글에 “변화는 절망에 지쳐 더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희망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나타난다.”는 말로 희망보다 절망의 가치를 제시했다. 그는 “진정한 용기는 터널 끝에 보이는 빛이 어쩌면 반대 방향에서 달려오는 기차의 헤드라이트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아무 대안도 없는 상황에서 희미한 불빛을 찾는 식의 ‘거짓 희망’을 단호히 뿌리치라는 것이다. 아직 희망이 있다는 안일함이 정확한 현실 인식을 방해하고 변화를 가로막기 때문이다. 지금 벼랑 끝에 있다는 끔찍한 절망을 받아들일 때 돌아설 용기가 생긴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지젝의 진단은 거짓 희망이 만연한 우리 사회에 더없는 고언이다. 한국교회! 이대로는 안된다. 강도만나 모든 것을 다 털리면서도 하나되지 못하는 지도자들의 무능한 민낯을 보고 있다. 더 이상 주변 눈치 볼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 하나됨을 위해 어떻게 몸을 던질 것인가를 고민하고 몸소 실천해야 한다. 진정한 변화와 변신을 가로막는 주범은 누구인가. 자칭 지도자라는 이들이 “이대로, 여기가 좋사오니”라는 생각과 자신들이 가진 철 밥통을 내려놓을 생각이 없기에, ‘저들 탓’이라고 여전히 고함만 치는 것 아닐까. 내 탓으로 알고 가슴을 쳐야 할 것인가. 아니면 국가나 사회, 혹은 교회를 바닥에서 끌어 올려줄 구세주가 오기만을 기다려야 하는가. 범사에 때와 기한이 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그분이 오시려면 말세의 여건이 갖춰져야 한다. 윤리와 도덕이 송두리째 무너지고 부조리가 춤추고, 국민은 수백 번 더 찢어져야 한다. 교회는 더 낮아져야 한다. 마침내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된다는 절규와 아우성이 터질 것이다. 공동체 내부에서 살아남기 위해 생존의 건강한 연대의식이 움트는 것은 바로 그 시점이다. 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 우리는 어설픈 ‘희망’을 말하기 전에 먼저 잘못을 고백해야 한다. 새로운 인물을 키우지 못한 잘못, 교회의 사유화에 침묵한 잘못, 자신이익 챙기느라 한국교회 전체 이익을 돌보지 않은 잘못, 하나되어 제대로 싸우지도 대응하지도 대안 제시도 못한 잘못, 품격 없는 행동으로 신뢰도를 떨어뜨린 잘못, 반성하지 않고 누구도 책임지지 않은 잘못, 다음세대에 희망과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는 잘못 등 말이다. 감히 ‘희망’을 얘기하지 말라. “설마 괜찮겠지”하는 어설픈 희망으로 때우려 하지 마라. 우리는 그간 신앙의 선배들이 피땀으로 일군 희망을 함부로 낭비했다. 그 희망은 이제 바닥이 났다. 현재의 가짜 희망으로는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진다는 사실을 직시하자. 요나가 배에서 떨어져 가장 밑바닥인 고기 뱃속에 들어가자 ‘더 이상은 안되겠구나, 나는 죽었다’라고, 불난 집에서 뛰쳐나와 몸둥아리 하나 남았을 때처럼 절망하고 절망해야한다. 세상에 절망하고 사람에 절망하란 말이다. 코로나 ‘팬데믹(Pandemic)’이란 악몽에서 깨어나는 법이 있다면, 절망하고 절망하다 아무리 둘러봐도 바닥이어서 또 절망일 때 그 때 홀로 선 절망 하나가 마지막 희망의 불꽃이다. “이러다간 죽겠구나!” “정말 망하는구나!” 이런 절망적 두려움이 몰려올 때, 사람은 극한 상황에서 새로운 신앙의 눈을 뜨게 된다. 진정한 변화와 변신은 거기서 시작된다. 어떤 일이든 극에 달해야 반전이 생긴다. 아래로 떨어지는 공도 바닥까지 완전히 닿아야 다시 튀어오를 수 있다. 코로나 확진자가 멈추지 않고 계속 터져 나오므로 신뢰를 잃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떤 곳인가. 세상은 우리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이단이나 사이비와 같다는 세상이 보는 이미지를 벗어날 길이 없어 보인다. 교회도 기회가 여러번 있었지만, 막연한 희망을 논하며 위기를 탈출하지 못했다. 비대면 또는 20명 미만이라는 기준에 발목이 잡혔다. 스스로 자초한 면이 있는 절망적인 상황이다. ‘건강한공동체’가 존재하지 않는 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 성도들의 헌금이 재정의 20%선에 멈춰서 있고, 중대형 교회들이 소유한 건물과 땅을 내놓고 있다. 교회 건물 임대 및 매매 사이트에는 내 놓은 물건으로 차고 넘친다. 결국 교회는 코로나에 갇히고 말았다. 2020년 성탄절을 앞두고 아직도 더 낮아지고 더 정신 차려야 할 것 같다는 지적들은 먼 나라 이야기인가. ‘복음으로’ ‘복음만이’에 공감하면서 이제 가장 낮은 절망의 자리에서 다시 하늘을 보면 어떨까.
    • 칼럼
    • 이효상 칼럼
    2020-12-17
  • [이효상 칼럼] 사유리의 비혼출산과 생명윤리
    방송인 사유리씨의 자발적 비혼 출산 소식을 두고 우리 사회의 반응이 뜨겁다. 한국에서 아기를 낳고 싶었지만 불가능해, 마지못해 일본에서 정자를 기증받아 출산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에 많은 이들이 찬성과 비판적인 목소리를 냈다. 한국에서 정자를 받아 출산하는 것이 불법이라 일본에서 실행했다는 말에, 보건복지부는 현행법상 불법이 아니라고 밝히고 나왔다. 비혼 출산은 산부인과학회 윤리지침상 허용되지 않을 뿐이라고 해명했는데, 그렇다면, 이제 의학계에서 규정을 바꾸기만 하면 정자 기증은 무조건 허용되어도 괜찮은 걸까. 결혼적으로 시술을 통한 비혼모의 출산은 국내법상 가능하지만 실현은 어렵다. 의학계의 윤리지침에서 '법률적 혼인관계에 있는 부부만을 대상으로 시행한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뉴스에 주목하게 되는 것은 남성과 여성이 법적으로 혼인관계를 맺고 자녀를 낳아 가정을 꾸리는 이른바 '정상가족'의 형태만을 가족으로 인정하는 한국사회의 문화적, 제도적 인식에 대해 전환을 생각케했다는 점이다. 사유리 씨의 비혼출산과 관련된 놀라운 반응을 보면 여성 몸의 자기 결정권이라는데 근거하고 있다. 사유리 씨의 ‘비혼출산’이 던진 메시를 일부 수긍하면서도 이 이슈의 찬성과 반대로는 담지 못하는 문제 때문로 고민이 심각해졌다. 아이를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 엄마에게 아이란, 물론 어떤 준비로 어떻게 수용하느냐에 따라 아이라는 거대한 이방인을 맞아 엄마 되기를 수용하는 일은 그야말로 천차만별이겠지만 말이다. 왜 어떤 출산은 환대받고 어떤 출산은 비난 받아야 되는가. 사유리 씨의 경우 간절히 아기를 바라왔고 이로써 엄마 되기를 기꺼이 수용했겠지만, 비혼의 엄마가 수행해야 모성은 숭고한 무엇으로 이해될 수 있을까. 얼마 전 인터넷 중고거래 사이트에 아기 판매 사건으로 물의를 일으킨 미혼모 모(모)씨가 떠 오른다. 그의 경우도 비혼출산이긴 마찬가지인데, ‘미혼모’로 불렸으며, 증발한 아기 아버지에 대한 질타는 사라진 채, 즉시 비정한 모성이라고 엄청난 질타를 받았다. 저출생을 걱정한다는 정부가 그간 보여 온 미혼모나 한 부모 가정에 대한 소극적 정책은, 국가가 정상 가족이 아닌 가정에 대해 얼마나 관심이 부족한지 알 수있다. 미혼모든 비혼모든, 이들이 결혼이라는 정상 가족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다. OECD국가들의 비혼출산 비율이 평균 40%대 인데 반해 우리나라의 경우 아직 현재 1.9% 정도에 달하고 있다. OECD국가별 비혼출산율 비혼출산을 지지하는 측에서는 결혼은 가부장제도를 유지시키는 불평등으로 자리하고 있다고 보는 것 같다. 인구보건복지협회의 설문 조사에서도 예시하는 것처럼, 여성(30%)이 남성(18.8%)보다 결혼에 대해 부정적인 결과가 높게 나온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아마도 비혼 출산에 대한 지지 역시 여성이 남성보다 압도적으로 많을 것으로 예상되면서, 이는 많은 여성이 결혼이라는 제도에 더 이상 합류하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강력한 신호같다. 사유리 씨 비혼 출산에 한 가지 더 우려되는 점은, 그가 선택한 임신의 방식인데, 이는 사회적으로 신중한 논의로 이어져야 할 예민한 문제다. 정자를 기증받아 임신과 출산에 이르게 된 사유리 씨 사례를 포함하여 체외 수정의 문제는, 유전공학이 깊이 관여해 조정하는 출생을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의 심각한 문제가 남는다. 이렇게 태어난 생명이 자신의 탄생이 유전공학의 조정과 정자 난자의 매매로 이루어진 결과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겪을 혼란과 고통은 누가 책임질 수있는가. 생명의 탄생에 전제되는 인권 침해 문제는 논외로 하고, 체외 수정의 불법 합법만이 논제가 되고 있는 사회적 분위기는 해괴하다. 주로 여성의 자기 신체에 대한 결정권, 가족 형태의 다변화, 저출산 정책의 실효성과 방향성 등 우리사회가 오랫동안 고민해 왔던 주제들이다. 논의가 깊어지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지만 중요한 한 가지가 빠져 있다. 바로 태어나는 아이의 생각, 의사, 감정, 의도 같은 것들이다. 어떤 출산도 인권이 전제되어야 하지 않을까?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해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은 것일까? 전통적 가족의 가치를 추구하는 보수주의자에게도, 새로운 가족 형태를 인정하라는 진보주의자에게서도, 태어날 아이의 입장을 생각하는 목소리는 좀처럼 들리지 않는다. 우리는 이 세상에 낳아 주는 것만으로 부모의 은혜가 하늘 같다고 배우지만 태어난 아이는 좋은 환경에서 독립적 인격체로 성장할 수 있도록 충분한 보호와 사랑을 받을 권리가 있다. 하지만 이번 뉴스에서 출생권을 온전히 보호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논의는 온데간데없다. 이제는 비혼출산과 더불어 생명윤리에 대한 생각의 지평을 넓혀야 한다. 무조건 어른의 입장(임신, 출산, 양육)만이 아닌 아이의 바람(가족구성과 사랑, 권리)을 생각지 않은 논의는 공허하기 그지없다. 여성의 출산권도 중요한 권리이지만 '자유의지의 남용'이란 측면도 있어 양날의 칼이다. 태아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 임부의 자기 결정권보다 중요하다고 본다. 2017년 1월 국회토론회에서 발표한 대한산부인과의사회에 따르면 하루 3000여건, 일 년 110만여건의 낙태가 이뤄지고 있다.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낙태율 1위라는 오명을 갖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9년 신생아 숫자는 30만3100여명이다. 신생아 숫자보다 세 배가 넘는 태아가 낙태되는 것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2018년)에 따르면 낙태의 95%가 12주 이하에 이뤄지고, 낙태 사유의 66%가 사회·경제적 이유다. 24주까지 사회·경제적 이유의 낙태가 허용되면 전면 허용이나 마찬가지인데 꼭 낙태죄를 폐지해야 하나 싶다. 낙태가 자유로워지면 성별 또는 정상적인 아이 골라 낳기라는 윤리적 문제가 생긴다. 엄마 몸 밖에 나와도 살 수 있는 아이를 낙태한다는 건 살인이다. 22주면 낙태 시술은 태아의 팔 다리 머리를 모두 조각내 자궁 밖으로 꺼낸다. 다 꺼냈는지 확인하기 위해 꺼낸 조각들은 다시 퍼즐 맞추듯 맞춰 본다. 의사도 못 할 짓이고, 임부도 위험한 일이다. 한국 기혼과 미혼 여성의 낙태율은 6 대 4라고 한다. 기혼 여성은 둘째 셋째를 기를 형편이 못 돼서, 미혼 여성은 퇴학당하고 회사에서 쫓겨날까 봐 수술대에 오른다. 이 모든 고민과 책임이 여성들만의 몫이다. 이런 현실을 그대로 둔 채 낙태 규제만 완화해서는 낙태율 감소를 기대할 수 없다. OECD 국가 중 낙태율 1위 그렇다고 미혼모들의 출산으로 부득이한 사정으로 아기를 키울 수 없어 작은 철체 상자 안에 아기를 두고 갈 수 밖에 없는 환경은 어떻게 할 것인가. 유기되는 아이들의 안전을 위한 베이비박스(baby box)를 더 늘려야 할까. 오히려 익명으로 출생신고를 하는 보호출산제 이야기까지 나온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부모가 되거나, 되지 않을 권리를 보장하라는 주장이 점차 힘을 얻지만 원치 않게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아이들, 세상에 나왔지만 아버지, 어머니에게 온전히 사랑받지 못한 아이는 누가 지켜줄까? 어떤 아이도 스스로 선택해서 이 거친 세상에 나오지 않는다. 철저히 어른들의 선택으로 삶을 시작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지혜와 슬기가 모여야 할 곳은 그 아이들이 행복하고 올바르게 양육, 성장 할 수 있는 '환경과 가족'의 형태를 제공해 주는 일이다. 무조건 출산이 축복이 되려면 아이들이 행복하게 살아갈 환경이 갖춰져야 한다. 베이비박스는 소멸되어져 가야 할 대상이다. 탄생의 축복은 누구나에게, 언제나 모두에게 공평하게 제공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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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효상 칼럼
    2020-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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