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2-09(월)

칼럼
Home >  칼럼  >  이효상 칼럼

실시간뉴스

실시간 이효상 칼럼 기사

  • [이효상 칼럼] ‘나 홀로 산다’ 617만명 시대에
    최근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가 펴낸 ’2020 한국 1인 가구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598만7000가구(전체 중 29.8%)였던 우리나라 1인 가구가 올해 기준 617만 가구로 처음으로 600만 가구를 돌파했다. 전체 가구 중 비중으로는 30.3%다. 바야흐로 ‘나 혼자 산다’가 대세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예능 프로그램의 제목도 ‘나 혼자 산다’다. “나 혼자 밥을 먹고, 나 혼자 영화를 보고, 나 혼자 노래하고~” 바야흐로 혼자 사는 시대다. 단순 숫자의 개념이 아니라, 혼자의 삶은 우리의 삶을 둘러싼 전반적인 생활양식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 10년 전 출간된 소설 속 ‘혼밥’이 2020년엔 트렌드가 됐다. 우리는 살기 위해 하루 세 끼 식사를 한다. 이 중요한 식사를 혼자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지, 그 식사가 존중받을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더 나아가 그냥 생존이 아닌 공존을 위한 식사는 무엇일지 고민하게 된다. 식사는 더 이상 그냥 음식 섭취가 아닌,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기 위한, 즉 생존을 위한 치열한 전쟁터가 되고 있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 일까. ‘혼자 먹는 게 좋다’ 또는 ‘누군가와 같이 먹어야 한다’ 식의 이분법적인 결론을 내고 싶진 않다. 단지 혼자 밥을 먹는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 단지 혼자 밥 먹는 차원에 그치는 게 아니라, 혼자 사는 삶, 라이프스타일(Life style)에 주목하게 된다. 꼭 이혼이나 사별 등 비자발적 이유로 혼자 사는 게 아니라, 그저 혼자 사는 게 자유롭고 편해서 나 혼자 사는 사람이 늘어난 것도 특징이다. 자발적 의지로 독립생활을 시작한 사람들이 늘어나다 보니, 자연스레 계속 나 혼자 살겠다고 마음먹는 경우도 많았다. 1인 생활 지속 의향도를 묻는 질문에 “앞으로 10년 이상 1인 생활을 계속할 것 같다”는 응답자가 44.1%나 됐다. 불과 2년 전 조사(34.5%) 때보다 10%포인트 가까이 급증했다. 1인 가구 수 급증의 최대 원인은 비혼율의 증가이다. 기존에 부모로부터 독립한 1인 가구 청년 세대가 혼인을 미루거나 포기하는 사이, 새로 부모로부터 독립한 청년 세대가 여기에 가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또한 결혼을 미루고 포기하는 까닭에 2인 이상 가구 수가 늘지 않고 있다. ‘결혼 의향이 있느냐’고 묻자 23.4%는 “없다”고 응답했다. 지난해보다 6%포인트(p) 높아진 수치다. 특히 30대 남성(6.8%→18.8%)과 20대 여성(4.2%→15.5%)의 증가폭이 컸다. 이들의 비혼의 경우 20대 여성의 경우 작년 4.2%였던 것이 15.5%로 급증해, 결혼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가끔 청년들을 만나보면 결혼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팽배한 것이 생활 속에서 온몸으로 느껴질 지경이다. 젊은 층에서 비혼 추세가 확산하는 가운데, 이러한 증가세는 당분간 꺾이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특히 올해는 코로나로 대인 접촉이 줄고 집콕생활을 하게 되면서 1인 가구의 개인화 성향도 더 굳어지고 있다. 일과 후 시간을 혼자 쓰는 이들이 더욱더 대중 시설에 가지 않고 집 근처에서 돈과 시간을 소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1인 가구 수 추정치는 통계청이 장래 인구 추계를 내놓을 때마다 늘어나고 있다. 2047년엔 1인 가구 총 832만 명, 즉 전체 가구 중 37.3%에 달해 3가구 중 1가구는 1인 가구인 시대가 올 것으로 전망한다. 어느 신문에서 읽은 글인데, “10대는 철이 없고, 20대는 답이 없고, 30대는 집이 없고, 40대는 돈이 없고, 50대는 일이 없고, 60대는 낙(樂)이 없고, 70대는 이(齒)가 없고… 100세는 다 필요 없단다.” ‘답이 없는 20대’에 유독 눈길이 간다. 20대가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과업’(task), 곧 평생 무슨 일을 하면서 살아갈 것인가 하는 직업을 탐색하는 과업, 더불어 누구와 함께 살아갈 것인가 배우자를 선택하는 과업을 고민하면서 자신만의 답을 찾아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1인 가구가 일상화 문화가 된 시대에 혼자의 삶은 사회·환경적인 요인에 의해 발생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더 이상 처량하지만 않을 수 있다. 당연히 여긴다. 최근 저출산·고령화와 연계된 시각에서의 가족의 가치(value of family)가 지나치게 간과되며, 혼자서도 얼마든지 ‘잘 먹고’, ‘잘 즐기는’ 시대를 추구한다. 1990년대 생(生), 밀레니얼세대(Millennial Generation), 사실 그 세대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독립적이며, 효율적으로 업무를 처리하고자 한다. 이는 인간관계에도 마찬가지이다. 부모보다 경제적으로 힘든 세대라고 정의가 내려지면서 이들은 학자금 대출에서부터 압박을 받아왔고 대학 졸업과 동시에 채무자가 되어버린 채 사회에 내보내진 것이다. 경제적으로 힘들기 때문에 식사 중 ‘더치페이’(dutch pay)는 기본이며, 여러 명이서 함께 식사를 하면 추가로 비용이 더 들 수 있다는 생각에 혼자서 식사하는 ‘혼밥족’ 경향이 뚜렷하다. 그러다 보니 타인과 소통하고 대화하는 시간이 줄어들어 인간관계에서 과도한 친밀감에 오히려 적대감을 드러낸다. 이런 세대는 전화 통화하는 것도 싫어한다. 언텍트(untact,비대면)문화가 가속화되고 익숙해지다보니 현실세계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래서 가끔 전화하지 말고 카톡이나 문자로 이야기하라며 직접적으로 불편함을 드러낸다. 혼자 고민하고 결과물을 만드는 것이 익숙한 그들의 삶은 시대적 측면에서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 있다. 한국사회는 무엇을 준비해야 있나. 청년들에게 잊혀진 가정, 가족을 어떻게 회복해야 하나. 일반적으로 많은 교회들이 가정 형성의 가치를 높이는 데 주력해 왔다. ‘가정같은 교회, 교회같은 가정’을 추구해 왔고, 목회 현장에서 청년들이 결혼하고, 충실한 가정을 일구고, 자녀 양육에 힘쓰며 믿음의 가정을 이루게 했다. 어쨌든 이같은 교회들에게는 현재 가속화와 증가현상은 매우 당혹스럽다. 한편 지난해 1인 가구 고용률은 전년보다 0.3%포인트 하락해 전체 1인 가구의 60.8%만 일자리를 갖고 있고, 약 40%는 미취업 상태인 것으로 나타났다. 고용률이 낮은 60세 이상이 많이 포함되기 때문도 있지만 더 나아가 20대가 태반이 백수인 시대도 간과할 수 없다. 생존과 자립을 위한 취업을 위해 젊은 취준생들이 기울이고 있는 노력은 진정 눈물겹다. 자격증을 준비하고, 직무 관련 프로그램을 이수하는 것은 기본이요, 영어 및 외국어 점수는 필수에다, 체력단련 및 외모 관리는 물론 의사소통 및 표현력 향상 훈련에도 아낌없이 투자하고 인문학적 소양을 키우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더더욱 20대의 목소리에 담긴 분노와 좌절에 귀 기울이게 된다. 사실 현재 청년들만큼 사회적 입지가 좁은 청년세대는 감히 결혼을 통한 화목한 가정의 형성과 온전한 자녀 양육이란 엄두도 내지 못할 처지로 내몰리는 것이다. 따라서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는 것이 생존을 위한 당연하고 절박한 선택으로 대두되고 있고, 만혼과 비혼 세태를 더 강화하고 있다. 인구 구조가 변화함에 따라 교회 연령 구성 역시 크게 변화하고 있다. 하지만 교회 내부에서도 아직은 40-50대 베이비붐세대(baby boom generation)가 건재하고, 이들 가운데 교회 사역에 적극 동참하고 헌신하는 이들이 있어 한국교회가 아직은 사역의 원동력을 잃지는 않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이들이 노쇠해지는 시점에 전도, 선교, 구제, 봉사 등 교회의 사역을 이어나갈 젊은 신앙의 세대가 교회 내에 과연 존재하고 있는가? 현재 한국교회는 청년 세대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사역의 새로운 방향을 고민하는 데에도 적극성을 보이고 있는가. 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교회 내에서도 그들의 입지와 참여가 상대적으로 미약하다. 누구나 개개인의 존재가 있고, 그들이 각각 밥을 먹는 방식과 리듬이 있다. 자신만의 리듬을 찾고, 그 리듬을 지키는 과정에서 때로는 타인과 불협화음이 있을 수도, 멋진 화음을 이룰 수도 있는 게 ‘공존’ 아닐까. 홀로 살아가며 타인과의 완전한 고립이 아닌, 때때로 더불어 살아가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도 긴요하다. 누구나 자신의 일과 삶에서 진정 추구하고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반추해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구체적으로 현재, 무엇을 혼자 하고, 무엇을 같이 해야 하나? 자의로든 타의든 혼자 살아가는 데 익숙해진 오늘의 세대를 공동체가 함께하는 지혜가 필요해 보인다.
    • 칼럼
    • 이효상 칼럼
    2020-11-15
  • [이효상 칼럼] 쓰레기 대란, 지구를 살려라
    해를 거듭할수록 환경오염이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쓰레기 문제다. 필자가 자치위원으로 있는 남양주시가 인천에 매립하는 년간 쓰레기는 총 1,200만톤이다. 이미 초과됐다. 패널티(penalty)가 생각보다 만만찮다. 문제는 주민들이 쓰레기를 맘대로 버릴 수 있지만 업체가 더 이상 가져가지 않는 상황이 올 수 있다. 남양주시는 쓰레기 20% 줄이기를 시작했다. 동별로 30%를 목표로 한다. 쓰레기를 최소화하려는 ‘쓰레기와의 전쟁’이다. 그래서 생각해낸 아이디어가 아이스팩(ice pack)과 스티로폼( styrofoam)의 분리수거이다. 남양주시는 아이스팩 5개를 모아오면 10ℓ짜리 종량제 봉투를 주는 보상 수거제를 실시했다. '아이스팩'이 '나이스팩(nice pack)'이 되도록 하는데 성공했다. 주민센터가 자발적 캠페인을, 주민자치위원들이 앞장 서 전개하며 아파트 카페에 아이스팩 분리수거의 글을 올리는 등 독려하다보니 다산동이 전국적으로 1위가 됐다. 그렇게 해도 매주 아파트에는 일회용 쓰레기와 프라스틱(plastic) 등이 산더미처럼 쌓여지고 있다. '쓰레기 대란' 우려는 전 세계이고 전 지구적 문제가 됐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배달 음식 주문량이 늘자 일회용품 사용도 함께 증가했다. 환경부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에 플라스틱류 폐기물은 하루 평균 848t(톤) 발생했다. 1년 전(734t)보다 15.6% 늘어난 수치다. 버려진 일회용, 아이스팩의 미세분자, 플라스틱들은 어디로 갈까? 최근 일상에서 마시는 물과 갑각류, 맥주, 소금 등을 통해 매주 신용카드 한 장 무게의 미세 플라스틱을 섭취하고 있다는 믿기 힘든 연구 결과가 나왔다. 일회용품과 플라스틱 사용 횟수가 점차 늘어남에 따라 생산, 운반, 소각 시에 많은 비용이 발생하고 그 과정에서 대기, 토양을 오염시켜 환경오염을 더욱 악화시키고 생태계를 교란하고 면역체계를 무너뜨린다. 암 발생 확률도 높아지고 있다. 세계자연기금(WWF)에 따르면 연간 800만톤의 플라스틱 폐기물이 바다로 유출되면서 가장 큰 문제는 흘러간 플라스틱 폐기물 때문에 해양 동물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 국립해양생물자원관과 국립생태원 등이 지난 6월 충남 서천의 국립생태원내 부검실에서 바다거북 해부를 진행했는데 소장, 내장, 대장을 부검한 결과 비닐쓰레기가 나왔다. 이틀 동안 진행된 검사에서 바다거북 3마리의 몸 속엔 24개의 플라스틱 쓰레기가 발견되기도 했다. 세계자연보호기금(WWF, World Wide Fund for Nature)과 호주 뉴캐슬 대학이 올해 발표한 '플라스틱의 인체 섭취 평가 연구'에 의하면 평균 한 사람당 '미세플라스틱(Microplastic)' 2000여개를 매주 섭취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미세 플라스틱은 통상 크기가 5㎜ 이하인 작은 플라스틱을 통칭한다. 이제 플라스틱 조각을 먹이인줄 알고 삼킨 어류가 우리의 식탁에 오를 가능성은 매우 높다. 여기에 환경호르몬을 배출해 인류의 건강을 해치고 있다. 우리도 매주 무게로 따지면 5g으로 신용카드 한 장이나 볼펜 한 개를 먹는다는데. 한 달이면 칫솔 한 개 분량인 21g을, 1년이면 250g이 넘는 미세 플라스틱을 먹는 셈이다. 이같은 미세 플라스틱을 섭취 인체에 영향을 미치는 주된 경로는 놀랍게도 우리가 주로 마시는 수돗물을 포함한 식수로, 한 사람당 매주 마시는 물을 통해 미세플라스틱 1769개를 섭취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갑각류에서 182개, 소금 11개, 맥주 10개 등이 미세 플라스틱 섭취의 경로로 밝혀졌다. 창조 환경문제 깊게 보고 멀리보자. 일회용 쓰레기와 플라스틱은 해양과 수로를 오염시키고 해양생물을 죽음으로 몰아갈 뿐 아니라 인류도 위협하고 있다. 플라스틱을 먹지 않으려면 매년 수백만 톤의 플라스틱을 자연에 버리는 일부터 막아야 한다. 인류가 촉발한 환경의 급속한 변화는 이미 시위를 떠난 화살이다. 지구가 쓰레기장이 되고, 인간이 만들어낸 생성물로 인해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에 처해 있다. 플라스틱 대량생산 60여년 만에 미세플라스틱 가득 찬 바다, 바다생물은 먹이로 착각해 먹고 인간은 그들을 먹고 그렇게 지구는 ‘플라스틱 행성’이 되어간다. 환경 파괴로 코로나가 생기고 인간의 복지와 생존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창조세계를 돌보기 위해 친화적인 환경 정책과 환경을 지키는 노력과 생활 방식을 채택할 듯 싶다. 우리가 받은 세상을 보존하고 건강한 사회를 유지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그것이 인간의 생존에 직결되기 때문이다. 창조 세계의 자원들을 적절하게 사용하고, 일회용으로 낭비하는 것은 가능한 피하면 좋겠다. 새로운 상품들을 사 냉장고나 집에 쌓아두고 싶은 유혹이나 압박을 거부하는 자족한 삶을 살면 어떨까. 어차피 나그네인생인데 좀 부족한 듯 사는 것도 좋을듯 하다. 개인의 행동이 큰 영향을 끼치든 말든 상관없이 나머지 창조 세계를 돌보는 일에 충실했으면 한다. 나와 가족과 이웃을 지키는 것이 에코패밀리(ecofamily)다, ‘에코패밀리’는 지구를 살리는 환경실천을 일상적으로 실천하는 가족을 말한다. 배운 것을 실천하며 이웃에게 전파하고 모두가 에코패밀리가 되는 것을 꿈꾸어 본다. 일회용품과 프라스틱 사용을 줄이자, 생활 쓰레기를 최소화하며 우리 동네를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자발적 주민 참여 환경운동은 이제 시작이다. 생활 속에서 일회용품과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려면 음식 배달시 일회용품을 최소화 한다. 시장을 볼 때, 조금 불편할지라도 가게에서 상품을 담아주는 일회용 비닐봉지를 거부하거나 장바구니와 일회용 컵 대신텀블러를 사용한다면 환경을 살리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정부는 개인과 사업체가 환경 친화적 실천을 채택하고, 창조 세계에 심각하게 해를 입히는 행동은 하지 않도록 권해야 한다. 우리사회가 환경오염의 심각성을 주민들에게 정확히 알리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제도와 정책이 시급하다. 또한 개인과 지역사회나, 교회 스스로가 적절한 노력을 모색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창조세계를 잘 보존해 다음 세대에게 물려줘야하는 만큼 환경을 보호하기 위한 개인과 지역사회 시민단체(NGO)들의 관심과 참여, 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하다. ‘환경’은 좋은 말이 아니라 좋은 행동이다. 지역을 건강한 사회로 만들고 생태 환경을 회복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행동하는 것은 여간 어색한 일이 아니다. 또한 나 혼자 이렇게 한다고 될까란 의문이 들기도 하고, 쉬 주저하곤 한다. 힘을 내서 시작해야한다. 가족과 이웃과 주민들이 함께 할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일까 고민해보고 하나씩 실천하면서 말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던 창조의 아침을 맞이할 수 있도록 창조세계의 지킴이로 부름 받은 소명을 가지고 오늘도 올바로 실천해 보려한다.
    • 칼럼
    • 이효상 칼럼
    2020-11-04
  • [이효상 칼럼] “어느 편이세요?”
    매주 이메일로 칼럼의 구독자가 5천여명에 이르고, 문자 SNS로 까지 최소 1만여명 선이다. 기타 온 오프라인 신문 방송으로 접하는 이들까지 포함할 경우 대충 20여만명에 접하고 있다. 글을 쓰는 이유는 단지 국익(國益)과 우리의 삶을 위해서다. 비정상이 일상화된 현실에 분노하며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의 삶을 위해 고민과 진액을 쏟아내며 글을 쓴다. 하지만 '왜 그런 글을 쓰느냐" 에서부터 글의 찬반에 대한 워낙 다양한 의견들이 많아 참 조심스럽다. 아무리 어둠이 짙었어도 닭이 울면 새벽이 온다. 작은 목소리, 작은 글이지만 메시지가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위로와 도전과 용기를 불러 일으켰으면 한다. 글을 쓸 때면 고민이 참 많다. 찬반(贊反) 호불호(好不好)가 갈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정치적이진 않은데, 기득권에 대해, 기득권층의 오만방자함에 대해서는 단호히 쓴 소리를 마다하지 않아서 이이다. 펜이 무딘 탓인지 몇 년을 그렇게 다양하게 쓰다보니 이젠 별 오해가 없는 듯하다. 간혹 이런 질문을 받는다. “원장님은 어느 편이세요?” 몹시도 궁금한 모양이다. 아마도 정치적 견해를 묻는 것 같다. 딱히 대답하기가 곤란하다. 나는 철저한 ‘자유 민주주의’지지자다. 정치적으로 극우나 극좌, 종교적으론 이단 사이비 돌팔이들을 배격한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죽기 살기로 싸우는 꼴도 보기 싫다. 평화주의자로 살며 적을 안 만들려 노력한다. 시비를 걸어오는 적은 피하지만 그래도 생긴다. 그만큼 양 진영으로 갈라져 있는 벽을 마주보는 것 같다. 시대상황에 따라 명분없이 이익을 좇아 이편저편 넘나들고 기웃거리며 어느 편에 줄서고 싶은 생각도 없다. 굳이 따진다면 난 ‘예수님’편이다. 삶은 ‘보수’적이나 생각은 ‘진보’적이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삶은 ‘진보’적이면서 생각만 ‘보수’적이면 곤란할 듯 싶다. 요즘 ‘진보’나 ‘보수’가 영 맘에 들지 않는다. 보수나 진보 세력이 자기네 집단만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국가와 국민들은 생각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오직 자기들 이권을 챙기는 것이 먼저다 보니 국가는 어려워지고 국민들 삶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어 보인다. 민심은 시계추와 같다. 오늘의 흔들리는 추가 내일 어디에 멈출지 아무도 모른다. 예전에 진보의 유 모(某) 이사장이 ‘보수’를 가르쳐 “‘공동체의 가치'를 지키는 것이다. 유럽에서는 그렇다”라고 말했는데, ’보수‘가 '공동체의 가치를 지키는 것’이라면 그러면 ‘진보’는의 실체는 무엇일까? ‘진보’는 공동체라는 것을 어떻게 보는 것일까. ‘진보’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말을 할 수가 있겠다. ‘진보’는 ‘공동체의 가치변화를 추구해 가는 것’이라고. ‘국민 생존권’과 ‘국가존망’이 걸려 있는 최근 코로나 상황에서 ‘보수다, 진보다’ 하는 이분법적으로 가치를 나누는 것은 사실 무의미 하다. 하지만 중간에 기준을 두고 오른쪽에 더 가치를 두느냐, 왼쪽에 더 가치를 두느냐 하는 것은 나라 발전에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한 바퀴로는 움직이기 힘들기에 양 바퀴가 함께 움직이는 것처럼, 그런데 양 바퀴로 돌지 못하고 한쪽 바퀴로 돌다보니 한 참 돌아도 발전이 없는 제자리이다. 최근 진보는 기득권이 되면서, 참 꼴불견이다. 소위 ‘20년 집권론’을 거론하고, 권력의 오만함을 드러냈다. 보수가 기가 죽어 아무 말도 못하는 처마 밑에서 비맞은 생쥐처럼 풀 죽은 모양새라고 해도 그렇게 꼭 용비어천가를 불러야만 되는 것은 아니지 않나. 중도진영은 양 날개로 날아야 할 새의 한쪽 날개가 꺽였다며 불안 해 한다. 보수에 대한 비난, 모두 맞는 말이다. 많은 유권자들이 ‘보수’라는 말만 들어도 고개를 돌려버릴 만큼 망가진 것도 사실이고, 이대로 남미(南美) 모델로 가면 진보가 실제로 20년 동안 집권할 수도 있으니 한쪽으로 치우친 대한민국을 걱정하는 것도 이해된다. 보수가 무너지고 힘을 못 쓰는 상태가 된 것은 맞다. 이렇게 된 것은 보수의 가치가 아니라 보수를 참칭하던 가짜 보수 세력 아닐까. 집권 기간 점진적 개혁을 통해 대한민국 공동체와 자유민주주의를 신장하는 대신, 계파 이익과 특권 유지에만 몰두한 가짜 보수 세력이 무너진 것이지 보수의 가치가 쓸모 없어진 것은 아니다. 사실 어느 세력이 집권했건 ‘기업하기 더 좋은 나라가 되었는가? 보통사람들의 일상이 더 자유로워졌는가? 사회는 더 안전 해졌는가? 학생들의 교육은 더 창의적이 되었는가? 안보와 평화는 더 신장되었는가?, 미래 비전은 분병한가? 등을 자문해보면 분명해 진다. 그동안 정치의 계파는 더 단단해졌고 특권은 더 늘어만 갔던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고 가령 예를 들어 정치인들이 특권의식을 버리고 이탈리아처럼 의원수를 3분의 1로 줄인다든지 ‘무보수 명예직’으로 하라고 하면 아마 정치인들이 무조건 한 팀이 되어 결사반대 할 것이다. 그들만의 리그(league)이기 때문이다. 시대에 따라서 ‘선’의 기준도 변하는 것이고, ‘악’의 기준도 변하고 있다. 그것은 사회변화에 따라 당연히 따르는 현상이다. 하지만 너무 과거의 선을 절대적인 것으로 주장하여 기득권의 유지를 위한 방편으로 옹호하고, 또한 검증되지도 않고 상황에 따라 쉽게 변하는 선의 기준만을 추구한다면 나라는 개판이 될 수 있다. 흑백의 이분법 사고는 매우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다. 절대선의 공동체의 가치를 지키기도 하고 변하는 선의 기준에 따라 공동체의 가치를 변화시켜 나가기도 해야 하는데, 시민들이 여러 시각을 교환하고 적절히 선택하는 것이 나라발전의 중요한 관건이라 생각된다. 역사의 정(正)-반(反)-합(合)은 언제나 있어 왔고 필연적이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진짜 보수가 추구해야 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자유’와 ‘공동체’다. ‘자유’에는 개인의 자유를 지키는‘자유민주주의’와 시장의 자유를 지키는 ‘시장경제주의’가 포함되어 있다. ‘공동체’에는 외부의 적으로부터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국방과 안보’가 강조되고, 내부의 적으로부터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법질서’가 포함된다. 즉 보수란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주의, 국방과 안보, 법질서 수호 등 지키고자 하는 철학과 가치를 담고 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지난 4.15선거에서 국민이 이런 가치를 외면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대다수 국민이 여전히 이 가치들이 중요하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문제는 이 가치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실천도 하지 않는 다수 사람들이 보수의 간판을 들고 있었다는 점이다. 자유와 공동체는 어찌되든 개인의 이익과 특권을 누리는데 끝까지 추종한다든지, 책임질 상황에서 책임지지 않는 사람들이 보수를 참칭한 것이 문제였다. 이렇듯 보수의 위기는 사람의 문제이지 가치 그 자체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의 가치 가운데 논란이 가장 많은 항목을 고르자면 아마도 ‘시장경제주의’일 것이다. 시장에만 맡겨둔 결과 빈익빈 부익부, 양극화가 심화했다는 주장이 팽배했다. 사회적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정부가 적극 개입해야 한다고 해서 문정부가 물가에 개입하고 시장에 개입한 결과 식물경제가 되고 말았다. 시장경제주의는 불가피하게 결과의 차이를 가져온다. 이 차이가 실은 사람들을 더 노력하게 만드는 동력이 된다. 노력한 사람과 노력하지 않은 사람 사이에 결과의 차이가 없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결과 평등주의가 우선시되면 더 이상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굳이 힘들게 노력하려 할 사람이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은 이미 실패했다. 그들은 재정건전성에는 관심이 없다. 따라서 공동체의 발전 동력인 시장경제주의의 가치를 중시해야 한다. 다만 빈곤·장애·환경·에너지와 공정거래 등 시장이 풀지 못하는 문제에 대해서만 정부가 나서서 개입하는 방식을 택하는 것이 옳다. 그러지 않고 평등주의적 해결부터 시작하면 경제를 하향 평준화시키면서 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려 결국 더 많은 빈곤층을 만들게 된다. ‘공동체를 지키는 보수’라고 말해놓고 보니 좀 생뚱맞다. 마치 쓰레기통 속에서 장미꽃을 피워 보려는 꿈일까. 과연 우리사회에 '공동체를 지키는 보수'가 있을까. 보수 아닌 보수에 바라는 애절한 절규같기도 하다. 그럼 ‘공동체’는 진보에는 없고 오직 보수에만 있다는 말이냐고 반문할 것이다. 이미 닳고 단 보수보다는 차라리 진보에 대한 애정어린 방향제시로 우리사회 절대과제인 ‘공동체 복원’은 기대할 수 없는 거냐고 말이다.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는 한국사회, 도대체 자유 대한민국호(號)는 어디에 중심을 맞추고 가야 하는 걸까. 또한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더 나은 길을 찾고자 해야 할까? 근본적으로 회의가 든다. 의식있는 자들이 문제를 보고도 침묵하므로, 민주주의의 위기는 더 심화되고 있다. 이미 지난 20세기 냉전을 넘어, 21세기 탈냉전 시대다. 실용사회에 그 무슨 절대 보수, 절대 진보가 따로 있을까. 결국 보수나 진보란 해묵은 진영논리에 빠져있는 진영 이념세력의 모습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혹시나 6,70년대 근대화 향수에 젖은 정치 세력를 숭고한 '보수'로 미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얼마전 “우리 사회 변화의 동력이었던 사람들이 어느새 기득권자가 돼 변화를 가로막고 있어 안타깝다”는 장 모(某) 의원의 연설은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를 다짐하던 그들의 변절을 일깨웠다. 보수나 진보가 추구하는 ‘가치’는 죄가 없다. 보수를 참칭하는 변절된 가짜 보수나 가짜 진보가 문제다. 권력만 탐하는 가짜 진보나 가짜 보수가 판을 치고 있으니 진짜 진보나 진짜 보수가 나서지 못하고 있다. 분명한 철학과 가치를 내재화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껍데기는 가라. 가짜는 가라. 그래야 철학과 가치가 확고한 진짜가 나라를 재건할 것이다. 양날개를 균형 있게 갖춘 강한 대한민국이 새롭게 탄생할 것 같다.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겠다’고 했는데 나라 돌아가는 꼴이 말이 아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산다는 게 참 힘든 거다. 사람들 속에 터질듯한 울분이 참 많다. “어느 편이세요?”묻지 말자. 과거를 묻지 말자. 과거나 편 가르기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공동체를 파괴한다. 좁은 땅에서 편먹고 싸움질 하지말자. 상대가 나와 다르다고 비난할 것도 없다. 어차피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은 연결성(connectivity)이다. 그러기에 다양한 분야에서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준비하자.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고, 또한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려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서로의 경험과 지혜를 나누고 협력을 키워나가는 소통이 민주 사회의 대안이다. 대안 소통 플랫폼이라고 할까나. 현실은 이미 벌어진 일이라 생각해야 편하다. 미래로 전진할 때는 주저하지 말며, 가는 세월에 인내해야 할 때는 초조해하지 말고, 후회될 때도 있지만 낙심하지 말고 가자. 사회가 분열되고 국가적으로 민주주의의 위기일수록 보수나 진보의 미덕이나 덕목이 빛나야 한다. 변화와 혁신도 좋지만 공동체를 유지하는 기본이 되는 미덕, 규범, 국가 정체성부터라도 지키면서 가야 할 것 같다.
    • 칼럼
    • 이효상 칼럼
    2020-10-23
  • 한글날 전하는 두 선교사 이야기: 마테오 리치와 존 로스
    아시아권 특히 중국을 선교지로 중국과 조선에 복음을 전한 시초라고 할 수 있는 두 선교사가 있다.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와 존 로스(John Ross) 선교사이다. 중국선교의 아버지라 할 이는 마테오 리치(중국명:利瑪竇) 선교사이다. 1552년 10월 6일, 이탈리아의 도시 마체라타에서 출생한 ‘마테오(Matteo)’는 세례명이다. 부친인 요한 리치는 마체라타의 시장을 지냈으며, 후에 주지사의 지위에까지 이른 인물이다. 마테오 리치는 어려서부터 가정교사로부터 배웠으며, 가정교사인 니콜로 벤치베니는 후에 개혁적인 예수회에 입회하여 리치에게 큰 영향을 준 인물이다. 1571년 (19세) 예수회에 입회하여, 로마의 예수회 수련원에 들어가 수도생활을 한 후 선교사로 1582년 (30세) 중국의 마카오에 도착했다. 명나라 말기에 중국에 들어 온 이탈리아인으로 선교를 위해 중국어를 배우고, 중국의 사제급인 승려와 같은 격으로 어필하기 위해 삭발하고 승복을 착용하고 전도생활을 시작할 정도였다. 유교의 경전인 사서(四書)를 라틴어로 번역하고,『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라는 세계지도까지 만들었다. 그뿐 아니라 기독교를 중국에 전하기 위해 유교를 공부하여 유교의 세계관을 이해하고 유학자들의 한계를 찾아내 기독교를 그 대안으로 제시하는데 성공했다. 그가 중국 선비와 서양 선비에 대해 자신과의 대화 형식을 빌어 저술한 『천주실의(天主實義)』는 극희귀한 기독교 서적이다. 이 책의 제목처럼 『천주실의(天主實義)』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토론’이라는 뜻이며, 두 권으로 구성된 이첵은 8편 174항목으로 되어 있고, 1603년『천주실의(天主實義)』를 중국 북경에서 처음 간행하였다. 이후 선교사들에 의해 1868년 거듭 출판되었다. 마테오 리치 선교사는 중국에서 중국인을 대상으로, 동양사회에 대한 기독교 전파가 목적이었으므로, 유교적 교양을 바탕으로 기독교 교리를 설득하는 방식이다. 필요한 경우 불교와 도교 이념도 동원하였고, 중국의 고사(古事)와 성어(成語)를 적절히 이용하였다. 그의 명저『천주실의(天主實義)』의 내용을 살펴보면, 1편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인간의 인식, 2편은 불교·도교에 대한 논박과 상제(上帝) 개념 등 기독교 수용의 기반이 되는 유교적 성격에 대한 설명, 3편은 천국(天國)의 필요성과 식물·동물·인간의 특성을, 4편은 인간 영혼의 신령함과 범신론적 일신론(汎神論的一神論)에 대한 비판을, 5편은 윤회설 등 불교에 대한 비판과 그리스도교의 재계(齋戒)의 성격을, 6편은 죽은 후의 상벌(賞罰)과 지옥·천국에 대한 설명을, 7편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귀결되는 인간의 본성을, 8편은 기독교 신앙생활과 상통하는 중국 고대의 생활과 기독교에 귀의하여야 할 당위성을 논하였다. 그렇게 하므로 기독교는 ‘서교(西敎)’,'서학(西學)'이라는 이름으로 중국과 조선의 유학자들에게 큰 관심거리가 되었다. 이로 인하여 기독교를 반대하였던 조선의 유학자들조차 기독교를 접하게 된다.『천주실의(天主實義)』는 중국의 지식인들뿐 아니라, 조선의 지식인들이 서학, 즉 기독교(천주교)를 수용 신앙운동으로 발전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기독교(천주교), 즉 서학이 유교와 불교사상이 굳건한 조선에 뿌리를 내린 것은 인조 때이다. 숙종 때에는 교세를 자못 떨쳤으며 영.정조 때에는 황해. 강원. 경기. 충청. 전라 등 각처에 성행했다. 특히 영조시대에는 전성기를 맞아 이익(李瀷)을 중심한 서학연구는 그의 제자와 문하생들에게 확산되어 ‘조선서학’이란 학문체계가 수립됐고, 조선후기 실학형성의 중요한 줄기가 되었다. 당시 사회불안 속에서 서학사상은 지식층에게 새로운 개혁의식의 확대와 봉건사회에 대한 개혁의식의 자극제 역할을 감당 하였다. 조선후기 대표적 유학자로『성호사설』을 저술한 이익(李瀷)은『천주실의(天主實義)』를 읽고 “그 학문은 오로지 천주(天主)만을 위하는데 '천주'란 곧 유가(儒家)의 '상제(上帝)'이다”라고 '상제'와 '천주'를 같은 것으로 받아들였다.『천주실의(天主實義)』의 내용은 1614년 선조 때 지봉(芝峰) 이수광이 쓴『지봉유설(芝峰類設)』에 실리면서 조선학자들에게 전해져 이익, 안정복, 다산 정약용, 이승훈으로 이어지는 신앙인들을 배출하며 초기 한국기독교의 사상적 기초를 놓았다. 1866년 (고종 3년 )부터 1871년 (고종 8년 )까지 이어진 한국 최대의 신앙박해사건인 병인박해와 특히 중국의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은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년간 자국의 문화를 자국의 국민들이 있는 대로 부수고 불태워 없앤 전례 없는 대사건으로, 『천주실의(天主實義)』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기독교 신앙서적은 두 사건을 통해 전부 소실되었다. 그래서 박물관들도 이때의 영인 복사본을 간신히 구해 전시할 정도로 극 희귀하다. 그런가 하면, 마테오 리치의 기초를 닦은 뒤 이어 중국이 들어 온 존 로스 선교사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연합장로교 선교사로, 연합장로교회는 1862년부터 중국선교를 개시했고, 1871년부터는 산동 반도를 선교지로 삼았다. 존 로스 선교사는 1872년 중국선교사로 파송됐다. 중국 동북지방에서 사역을 하여 심양의 동관교회를 설립하였는데 1873년 존 로스는 윌리암슨 선교사로부터 토마스 선교사가 평양 대동강에서 순교한 소식을 듣게 된다. 두 선배의 한국선교 열의에 감동받은 로스는 중국에서 조선에 복음을 전하겠다는 결심을 한다. 존 로스 선교사가 한글에 끼친 영향은 엄청나다. 1877년 중국 선교지에서 저서 '조선어 첫걸음(Corean Primer)한글 교재를 출판하면서 가로쓰기를 하게 되었고, 띄어쓰기도 함께 도입한 것이다. 그 책에서 "한글 자모는 아름다운 음성문자로 너무나 간단해서 모든 남녀노소가 읽을 수 있습니다. 소리글자이므로 한글로 인쇄된 어떤 책이든 자모만 배우면 읽을 수 있습니다"며 한글을 극찬하기도 했다. 이 같은 최초의 한글 띄어쓰기 이후 1896년 서재필, 주시경,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 등이 만든 ‘독립신문’이 간행물로 한글 최초 띄어쓰기로 전해져 오늘까지 그렇게 쓰여 진다. 그는 최초로 한국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일에 매달린다. 선교를 위해 마테오리치 선교사가 기독교 교리를 한자로 출간하여 기독교 기초를 놓았다면, 존 로스 선교사는 라틴어나 독일어 성경을 평민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한국인들의 도움을 받아 한글로 번역하면서 한글의 발전 및 복음의 확산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일반적으로 로스역 성경이라 함은 1882년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와 『예수셩교 요한복음젼셔』, 1883년『예수셩교셩셔 누가복음 데자행젹』과 『예수셩교셩셔 요한복음』, 1884년 『예수셩교셩셔 마태복음』과 『예수셩교셩셔 말코복음』, 1885년『예수셩교셩셔 요한복음 어비쇼셔신』, 1887년『예수셩교젼셔』등 총 8권의 한글 성경을 번역 간행하였다. 한글날을 맞으며 두 선교사들을 생각함은 한자와 한글이라는 도구, 지식인과 평민이라는 대상 등 복음을 전하는 방식은 달랐지만 동 시대를 살며 같은 땅, 같은 선교지에서 한 사람은 중국을 또 한 선교사는 조선에 복음을 전하려 했던 그 영혼구원을 향한 열정과 사랑의 수고는 오늘까지 꺼지지 않고 이어져 오고 있기 때문이다.
    • 칼럼
    • 이효상 칼럼
    2020-10-08
  • [이효상 칼럼] K-컬쳐 원조 기산(箕山), 《천로역정》에 흠뻑 빠지다
    그룹 방탄소년단(BTS)이 디지털 싱글 '다이너마이트(Dynamite)'로 미국 빌보드 메인 싱글 차트인 '핫 100' 정상을 2주 연속 지키며 K팝 아이돌로 한류의 새 역사를 쓰고 있다. 이런 한류문화의 원조는 누구일까. K(Korea)-컬처(culture) 원조는 당연히 기산(箕山) 김준근(金俊根) 화백이다. 김홍도로 대표되는 조선 시대 풍속화는 18세기 정조 때 전성기를 누리다 그의 사후 쇠락했다. 그러던 것이 19세기 중엽 개항 이후 서양인 선교사들이 찾으면서 다시 인기를 누렸고, 해외수출 1호작이 나왔다. 이런 K-컬처!, ‘원조’한류 풍속화의 그 중심에 기산(箕山)이 있다. 정확한 생몰연대나 경력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구한말에 활약한 기산(箕山) 선생은 명실상부한 한국인 최초의 국제 화가라 할 수 있다. 조선인으로는 최초로 독일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다양한 그림을 통해 당시 조선의 문화와 풍속을 세계만방에 알려졌기 때문이다. 기산(箕山)선생의 그림이 국내보다는 독일이나 프랑스, 덴마크, 캐나다 등 해외에 더 많이 전하는 것도 그의 국제성을 웅변하는 하나의 증거이다. 특히 2천년대에 접어들면서 '김준근 붐'이라고 할 만한 현상이 일어났다. 기산 그림의 품귀현상이다. 그럼에도 이 짧은 기간에 기산은 단원(壇園) 김홍도(金弘道, 1745∼1806 이후), 그리고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1758-1813 이후)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일약 한국 3대 풍속화가 대열에 당당히 입성했다. 기산(箕山)선생은 국내 최초 출판된《텬료력뎡》의 삽화를 그려 냈다. 원전《천로역정(天路歷程,ThePilgrim's Progress)》은 영국의 청교도 작가 존 번연(1628∼1688)의 소설로 1678년 초판이 나왔다. 꿈의 형식을 빌어 이야기를 풀어낸 책으로 ‘기독도’이라는 남자가 ‘멸망할 도시(장망성)’를 떠나 ‘시온성(천성)’을 향해 가는 과정을 그렸다. 크리스천이 인생의 여정에서 욕망과 싸우며 사탄의 도전 앞에서 거룩함을 이뤄간다는 이야기로 구원과 성화의 여정을 잘 보여준다. 국내에서 1895년 첫 출판된《텬료력뎡》은 장로교 제임스 스카스 게일(한국명 기일·1863~1937) 선교사와 부인 깁슨이 공동 번역했다. 그들은 한국 문화의 진수를 간파해 이를 서양에 소개하고, 토착적 기독교를 한국에 심어주기 위해 애썼던 선교사였다. 이 책을 읽으며 책에 흠뻑 빠진 기산은 총 42장의 삽화로 당대 풍속화가 기산(箕山)풍속화의 진수를 보여준다. 특히 책에서 보여주는 ‘기독도를 인도하시는 그리스도’는 세계 최초의 갓 쓴 예수님으로 소개되고 있다. 이 장면은 외래종교인 기독교를 주체적으로 수용해 토착적인 전통을 반영한 한국 개신교 미술의 효시로 평가받으며, 다원이 삽화를 그린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와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과 함께 한국의 3대 미서(美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텬료력뎡》초판본은 상. 하 2책으로 나눠 목판으로 인쇄하였으며 미려한 한지를 사용하여 한 장 제본으로 만들어졌다. 당시 한글로 번역된 《텬료력뎡》은 장대현교회 길선주(1869~1935) 목사가 읽고 감명을 받음으로써 1907년 평양 대부흥을 이끌어낸 원동력이 됐다. 신촌성결교회를 세운 이성봉(1900~1965) 목사도 전국을 다니며 '천로역정 부흥회'를 개최할 정도로 이 책을 높게 평가했다. 이 목사는 ‘멸망의 도시’를 장차 망할 성이란 의미의 ‘장망성’으로 표현했다. 한말 당시 기산(箕山) 그림의 첫 주문자는 독일 함부르크 출신의 에드워드 마이어(1841~1926)로, 조선 정부로부터 독일 주재 조선국총영사로 임명되었던 인물이다. 그는 1884년 고종의 외교 고문을 지냈던 독일인 파울 게오르크 묄렌도르프의 권유로 제물포에 한국 첫 독일회사인 세창양행을 설립했던 사업가였다. 마이어는 이 그림을 포함해 기산(箕山)에게 주문한 조선의 풍속화 61점을 고향 함부르크민족학박물관(현 MARKK)에 보냈다. 최근 함부르크민족학박물관이 소장한 김준근 풍속화 총 79점이 최근 코로나19를 뚫고 한국에 들어 왔는데, 이것을 접한다는 것은 미술애호가 만이 아니라 크리스천에게도 즐거운 일이다. 현재 국립민속박물관에서 10월 5일까지 ‘기산 풍속화에서 민속을 찾다’라는 특별전을 열어 대중을 만나고 있다. 기산(箕山) 특별전을 통해 세계문학사의 불후의 명작으로, 또한 한국기독교 신앙 초기에 큰 영향을 미쳤을《텬료력뎡》과 기독교 문화개척에 일생을 바친 게일 선교사와 김준근 화백에 대한 관심과 재평가가 필요해 보인다. 기산(箕山)선생의 작품 중《천로역정》은 개화기 번역문학의 효시로 국문학사적으로도 당시 한글보급과 한글문체를 보여주는 중요한 책이다. 최초로 번역된 《텬료력뎡》초판본은 현대식 인쇄출판을 통해 초기 대중에게 복음을 전하는 통로로 사용되었고 한국의 기독교 신앙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현재 문화재 685호에 등재된《텬료력뎡》초판본은 한국 기독교 복음전파와 책의 역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희귀본으로, 철저한 연구와 고증이 필요하다. 《텬료력뎡》출판 당시는 기독교신앙이 한국에 상륙한 당시 19세기의 한국은 열강의 간섭에 국기가 흔들리고 부패와 혼란이 극도에 달하여 생활이 참으로 어려웠던 때다. 그러한 시대에 오늘의 고통과 유혹을 이겨내고 구원의 길을 걸어가 내세의 행복을 접하게 되는 ‘천로역정’의 이야기가 이 땅에 소개된 것이다. 천성을 바라보며 일제의 기독교신앙 탄압에 대항하여 순교로 맞선 신앙인들의 꿈은 ‘천로역정’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가. 신앙을 지키며 사는 것이 쉽지 않다는 오늘에 ‘천로역정’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것일까?
    • 칼럼
    • 이효상 칼럼
    2020-09-23
  • [이효상 칼럼] 과연 민주주의는 무너지고 있는가?
    민주주의가 화두로 떠 오르고 있다. 나라 안팎에서 많은 학자들이 민주주의가 흔들리고 있다고 진단한다. 최근 책 한 권을 주목하여 읽으며, 큰 충격과 도전을 받았다. 미국의 정치이야기 인줄 알았는데 우리나라의 이야기 같아서였다. 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 스티븐 레비츠키(Steven Levitsky)와 대니얼 지블랏(Daniel Ziblatt). 전통을 자랑하는 민주주의조차 쉽게 무너질 수 있음을 깨달은 그들은〈뉴욕 타임스〉에 민주주의의 위기를 경고하는 칼럼을 꾸준히 썼다. 그들의 글은 100만 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하며 큰 주목을 받았고, 마침내 출판사의 요청을 받아『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How Democracies Die)』로 거듭난 책이다. 오늘 날 민주주의는 위험에 처했는가?라는 물음에서 시작하는『어떻게 민주주의는...』에서 세계 여러 나라의 경우를 비교한 끝에 민주주의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과정을 거쳐 무너졌음을 발견하고, 몇 가지 신호를 패턴화한 두 저자들은 독재자가 될 가능성이 다분한 극단주의 포퓰리스트들이 어떤 조건에서 선출되는지, 선출된 독재자들이 어떻게 합법적으로 민주주의를 파괴하는지 세계 여러 나라의 사례를 통해 생생하게 보여준다. 국민에게 ‘진정한 민주주의 건설’을 약속했던 베네수엘라의 차베스(Hugo Rafael Chavez Frias)는 대통령에 오르자 무서운 독재자로 변했고 결국 나라를 망쳤다. “페루를 더 나은 나라로 만들겠다”고 대통령 취임사에서 다짐했던 후지모리(Alberto Kenya Fujimori)도 의회를 해산하고 헌법을 파괴했다. 러시아의 푸틴(Vladimir Putin)도 똑같은 독재자의 전철을 밟고 있다. 민주주의가 그렇게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잠재적 독재자가 권력을 잡으면 위험에 취약하다. 합법적으로 전복되는 민주주의의 붕괴다. 책은 『이솝우화』를 소개한다. 말과 사슴이 싸움을 벌였다. 말은 사냥꾼을 찾아가 사슴에게 복수하도록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사냥꾼은 한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사슴을 쫓을 수 있도록 등 위에 안장을 얹고, 고삐로 너를 조종할 수 있도록 입에 마구를 채워야 해.” 말은 기꺼이 동의했다. 드디어 사냥꾼이 사슴을 물리치자 말이 말했다. “이제 그만 내려와요. 입과 등에 채운 것도 풀어주세요.” 사냥꾼이 고개를 저으며 소리쳤다. “이제 막 마구를 채웠잖아. 난 지금 이대로가 좋아.” 말과 사냥꾼의 우화는 오늘날 민주주의가 처한 실상을 대변한다. 정치인은 사냥꾼처럼 자기에게 권력을 몰아주면 좋은 세상을 만들어주겠다고 떠벌린다. 하지만 권력을 잡으면 생각이 달라진다. 권력의 속성이 그런 모양이다. 두 저자는 자신들이 파악한 패턴 속에서 후보를 가려내는 역할을 내던진 정당, 경쟁자를 적으로 간주하는 정치인, 언론을 공격하는 선출된 지도자 등 민주주의 붕괴 조짐을 알리는 명백한 신호들을 찾아냈고, 결과적으로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은 헌법 같은 제도가 아니라 ‘상호인정/존중(mutual tolerance)’과 ‘권력의 절제(forbearance)’와 같은 규범이라고 이야기하면서, 규범들이 무너질 때 민주주의도 함께 허물어진다는 깨달음을 전한다. 우리가 놓치는 민주주의의 위기 신호는 무엇인가. 저자들은 독재자를 감별하는 4개의 리트머스 시험지를 제시한다. 민주주의 규범을 거부하고, 경쟁자의 존재를 부인하고, 폭력을 용인하며, 언론의 자유를 비롯해 반대자의 기본권을 억압하는지를 유심히 살피라는 것이다. 이 중 하나만 양성반응을 보이더라도 독재의 위험이 있다고 지적한다. 저자들은 최근 민주주의의 붕괴는 군사쿠데타 같은 비합법적인 방식이 아닌 투표로 선출된 권력에 의해 무너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사실 다수결로 뽑는 민주주의는 선동과 포퓰리즘에 매우 취약하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항상 옳다는 환상 버려야 할듯 싶다. 하지만 다수결 없는 민주주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민주주의의 출발점은 모든 국민이 주권자라는 “국민주권”이지만, 주권자인 국민의 의사가 하나의 의사로 통일되어 나타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다수의 의사를 대체적 국민의 의사로 보아야 할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물론 다수결은 중요하다. 대표자를 뽑는 것도 다수결이고 선출된 대표자들, 특히 국회의원들이 위원회나 국회의 이름으로 의사결정을 할 때도 다수결이 적용된다. ‘다수결’이란 양날의 칼과 같아 민주주의를 지키면서 파괴할 수도 있다. 그러면 다수의 결정은 항상 옳은가. 인류 역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말해준다. 소수당의 목소리를 일방적으로 무시하는 다수당은 오만·독선·독재에 쉽게 빠질 수 있다. 다수결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라는 역사적 경험 때문에 현대 민주국가들에서는 다수의 독재, 다수의 횡포를 막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다수결’이란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의사결정 방식이지만, 이를 자칫 잘못 사용하면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통로가 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수결을 존중하되, 항상 소수자 보호를 고려해야 하며, 의회 다수당의 주도적인 역할은 인정하되 소수당의 목소리가 일방적으로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건강한 민주주의’란, 민주적 다수란 주권자인 국민을 대신하기 위한 것이며 51%의 다수가 49%의 소수 위에 군림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마치 일시적인 정치적 승리를 영원한 것으로 착각하고 적과 동지라는 진영 논리에 빠져 소수를 동반자가 아닌 궤멸하여야 할 악으로 규정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무너지게 한다. 책에서 언급하는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힘은 헌법 같은 ‘제도’뿐 아니라 ‘상호인정/존중’과 ‘권력의 절제’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형식적 법치주의만으로는 자유민주주의를 지킬 수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다수의 힘에 취해 불합리한 일이라도 합리적인 것으로 둔갑시킬 수 있다는 착각이 나라를 부패하게 하고 망친다. 이런 식의 오만과 독선은 모두를 불행하게 하며, 결국은 다수 자체가 내부적으로 붕괴하게 한다. ‘극단주의 포퓰리스트는 어떻게 권력을 잡는가’부분에서 정당의 약화와 정치인의 타락을 다루고 있다. 갈수록 심화하는 경제 격차와 빈곤으로 분노하는 시민들이 희생양을 찾을 때를 틈타,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선동하고 반민주적인 말과 행동을 일삼는 포퓰리스트들은 늘 있었다고 적고 있다. 여기에 코로나를 대입해보면 희생양은 누군지 자연스럽게 답이 나온다. ‘민주주의는 영원하다’고 장담할 사람이 있겠는가. 벼랑 끝에 선 민주주의. 남의 나라만의 위기가 아니다. 문대통령은 ‘국민 통합’, ‘겸손한 권력’으로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 수 있도록 ‘소통하겠다’고 권력을 요청했다. 하지만 권좌에 오르더니 스스로 공약을 헌신짝처럼 내던졌다. ‘촛불’을 자신이 가진 전가의 보도(傳家寶刀)로 삼아 반대파는 ‘적폐’라는 이름으로 치고 국민을 나누고 삼권분립의 보루를 허물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과연 건강한가. 저자가 제시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를 사용할 경우, 문정부는 4곳 모두 양성반응을 나타낼 가능성이 농후하다. ‘서로 적대하는 정당, 양극화된 정치, 무너지는 규범’등. 민주규범뿐 아니라 정의, 공정, 양심 등의 도덕규범까지 무너뜨렸다. 게임의 룰(rule) 인 선거제도를 멋대로 고치더니 헌법까지 자기 입맛대로 바꾸겠다고 떠든다. 상대방의 존재는 애초 안중에도 없다. 기득권 진보는 아직도 운동권인가. 80년대 운동권처럼 바리게이트를 무너뜨리고 적으로 공격하고 짓밟는 일이 허다하다. 자신들의 폭력과 불법은 묵인하고 상대의 위법엔 몽둥이를 휘두른다. 국기기관을 장악하고 경쟁자와 반대자를 처벌한다. 곰을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 격이다. 촛불로 전 정권을 내쫓더니 ‘코로나’와 ‘재난지원금’으로 국민의 등에 안장을 얹고 고삐를 채우기 시작했다. 그들은 국가 위기를 즐긴다고 책은 기술하고 있다. 신국가주의의 출현이다. 민주화를 부르짖던 운동권이 민주주의를 잡는 사냥꾼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많은 국민이 뜨거운 마음으로 촛불을 들었던 이유는 단지 지난 정부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동기가 선하다고 결과가 꼭 아름다운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이제야 비로소 깨닫지만 나라를 반듯이 세우려면 뜨거운 가슴만으로는 부족했다. ‘두려움’과 ‘분노’만으로 민주주의를 지켜낼 수 없다. 민주주의의 위기와 정치 실종의 지금이야말로 이 책 읽기를 권하고 싶다. 지금은 차가운 이성을 소환해야 할 시점이다. ‘소통부재’와 ‘오만한 권력’이라는 현 정권과 전 정권의 행보는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이성의 눈을 뜨고 권력의 독단과 전횡을 똑똑히 살펴야 한다. 갈가리 찢긴 사회, 누군가 경종을 울려야 한다. 자유 민주주의가 무너질 때, 권력의 독단과 전횡을 막으려면 국민 각자가 작지만 자기 몫의 소리를 내야 하는 이유다.
    • 칼럼
    • 이효상 칼럼
    2020-09-07
  • [이효상 칼럼] 까칠하고 예민한 그대를 위하여
    당신은 까칠하고 예민하다. 가까이 다가가기엔 너무 부담스럽다. 뭘 그리 아는 게 많은 건지,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꼭 옳은 건지는 잘 모르지만 그대를 보면 그냥 좋습니다. 그냥 말없이 받아주면 안되는 걸까. 그대를 향해 다른 이들이 ‘너무 계산이 빠르다’고 하는 말은 칭찬이 아닌 것 같다. 매사에 시념이 너무 강해 무슨 장사꾼이나 판사처럼 행동하기 때문이지 않나 싶다. 어려운 시대를 다들 힘들어할 때, 까칠하고 예민하게 행동하면 자신이 돋보이고 남들이 알아준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행동하는 걸까. 이런 ‘관계’에 대해 20 여년 가까이 강연을 해왔다. 1천여회가 넘는 강의와 수많은 모임을 통해 다양한 계층의 사람을 만난다. 직장인들도 만나보면 ‘일’보다는 ‘관계’때문에 힘들다는 고백을 듣게 된다. 많은 주부들의 심각한 고민도 가사 때문에, 경제문제보다도 가족과 만족스럽지 못한 ‘관계’ 때문이란다. 특히 코로나로 근접 접촉없이 소통이 계속되면서 우리 사회의 관계형성은 어떻게 변할까? 형식적이고 불필요한 대면접촉들이 없어져서 좋다는 견해도 있지만, 직접 만나지 않고 비대면 방식은 관계를 단절시키고 고립시킬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빠지게 한다. 직접 만나지 않으니 상호간에 공감이나 연결성이 별로 없다고 느끼는 이들이 많다. 그동안 비접촉 방식은 대면을 보완하는 정도의 교류 방식이었고 사람들은 접촉을 통해 친밀감을 유지해 왔기 때문이다. 인간은 여전히 사회적 동물이며, 서로 간의 협력을 기반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선택의 차원이었던 간접적인 대면 방식이 일상화되면서, 안전함과 편리함의 이면에서 느끼는 사람들의 관계단절감을 어떻게 극복해 나갈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지금 변화와 적응의 갈림길에 서 있다. 모두들 ‘관계’가 서툴다. 친밀한 인간관계를 이루지 못하다보니 고독과 소외감 속에 괴로운 인생을 산다. 많은 사람이 이렇게 관계 갈등 때문에 괴로워한다. 인간관계에서 갈등은 항상 있고 그것이 정상처럼 느껴진다. 어찌보면 서로의 생각과 문화, 살아온 라이프스타일이 다르기 때문에 갈등요인은 생겨날 수 밖에 없다. 흔히들 착각한다. 내가 변화시킬 수 있다고. ‘다른’이를 나처럼 변화시키려 욕심내지 말고 ‘다른 이’는 어차피 ‘나와 다른’이 다. 그 다름과 싸우면 평생 불행하다. ‘다름’ 그 자체를 인정해야 행복해진다. 이런 문제는 먼저 나 자신과의 관계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것은 실제로 나 자신과 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법은 사실 자신을 대하는 태도를 그대로 반영한다.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며, 나 자신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따라 다른 사람과 관계 맺는 방식이 결정된다. 그러므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어려운 건 ‘다른’ 이의 문제가 아니라 본인에게 달려 있는 건 아닐까. 한국인 누구에게나 특유의 까칠하고 예민한 기질(야성?)이 있다. 그래서 부부나, 자녀, 타인과의 관계회복이 더디고 어렵다. 어떻게 이런 관계의 벽을 넘을 수 있을까. 까칠하고 예민성을 줄이면서 더 나은 삶을 살 수는 없을까. ‘예민함의 성격적 특성은 감정이 침체되고 불만이 많아지는 우울증 증상과 비슷한 결과를 낳기에 예민함만 잘 다스린다면 우울증 치료 효과까지 기대해 볼 수 있다. 우울증 진단을 받은 환자 다수가 “성격이 예민한가” 물으면 “그렇다”고 답하지만, “우울한가”라고 질문을 바꾸면 “아니다”라고 답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50대가 되면 남녀 모두 갱년기와 맞물려 까칠함에 예민함이 더 해진다. 서양문화에 비해 감정 표현이 많지 않은 한국인의 경우 감정의 찌꺼기가 쌓이다보니 특성상(우울감을 느끼는 것보다는) 몸이 아픈 신체반응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더 흔하다. 이런 예민하거나 까칠한 기질이 어릴 때 형성된다면 성인이 되어서도 지속적으로 나타내게 된다. 꽈배기장사를 하는 것도 아닌데 마음이 배배 꼬여 있다. 타인과의 관계가 그렇다. 말을 놓으면 관계가 가까워지는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긴장이 풀리게 되고 예의를 벗어나 무례하게 된다. 서로 친하다고 가볍게 상대하게 된다. 좋을 때야 웃지만, 감정이 틀어질 때는 상대 눈치 안 보고 욕설을 내뱉는 일도 어렵지 않다. 말과 행동은 한번 거칠어지면 되돌려지지 않는다. 거친 말에 중독되면 어지간한 욕설이나 육두문자로는 표출된다. 이런 현상은 그 사람의 ‘열심’의 단계를 넘어 ‘욕심’이 밑바닥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인간관계’를 단절시키고 평상심을 잃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적 욕심’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흔히 겪는 갈등은 이런 ‘평상심의 상실’, ‘사적욕심’, ‘양심의 불감증’에서 비롯된 것이 많다. 동시에 여기서 나타나는 현상은 무엇보다 ‘언어의 폭력성’, ‘말의 횡포’, ‘예절의 상실’, ‘관계의 단절’에 빠져 들게 한다. ‘어떤 사람이라도 비난, 비평, 불평 세 가지만 안 한다면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링컨의 성공비결은 절대 타인을 비판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을 비판하거나 판단하지 말라. 그러면 너희도 비판이나 판단 받지 않을 것”이라는 성경말씀을 삶의 원칙으로 삼았다. 흥미로운 것은 말이란 것이 그렇다. 불특정 다수앞에서 뒷담화로 남을 비난할 때는 우월해지는 것 같은 쾌감마저 느끼겠지만, 나는 저 사람을 맘대로 비난해도, 반대로 내가 비난을 들으면 그게 진실이든 거짓이든 상관없이 처음처럼 서럽고 억울하고 분노하게 된다. 그래서 말하는 사람은 남의 인생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말고, 성숙한 관계를 위해 한번 더 깊이 생각하고 말해야 한다. 까칠하고 예민한 그대가 범하는 실수는, 타인의 인생을 모르면서 다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주워들은 몇 마디로 타인의 잘못이나 부족함을 지적하는 사람도, 그걸 듣는 사람도 모두 거칠다. 그래서 정작 전해져야 할 진심도, 고쳐져야 할 문제의 본질도 사라지고 서로의 가슴과 머리에 분노의 성냥불을 확 집어던져 불길을 일으키고는 서로를 홀라당 태워 죽인다. 우리 모두는 타죽지 않으려고 누군가 성냥불을 탁 그었을 때, 파르르 떤다. 두려운 것이다. 그로인해 뒤끝이 생긴다. 혹시 당신은 뒤끝이 작렬하지는 않은가. 잘못이 있다면 조용히 물어보고 충고하고,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자. 까칠하고 예민한 우리는 ‘관계’에서 정말 중요한 ‘사과’도 ‘용서’도 잘못한다. 왜냐하면 ‘(자)존심’이 상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의무’와 ‘책임’에 대해서는 아주 낯설고, 거짓과 진실을 구분하는 것도 여전히 어색하다. 우리들 속에는 화 잘 내고, 원망 잘 하고, 남 탓 잘 하고, 남 핑계 대는 거 좋아하고, 쉽게 서운해 하는 피가 흐르고 있는 것 아닐까. 자유니, 평등이니, 공동체니, 책임이니 하는 것을 몸에 익힌 지 고작 75년이기 때문일까. 까칠하고 예민한 우리는 한 번도 주인공으로 살아본 적 없다가 이제 겨우 내 집 갖고, 내 차 갖고, 내 가족 부양하며 안정된 자리를 갖고 살게 된 사람들. 그래서 잠시만 한 눈 팔면 누군가 빼앗아 갈 것 같은 불안과 경쟁심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그 뜨거운 피. 그래서 상대의 눈치보며 긴장하고 경계하고, 그러면서도 남의 일에는 사사건건 간섭하면서도 누가 나에게 뭐라고 하면 부르르 주먹 쥐고 뜨거운 분노부터 보여주는 마치 자신의 몸을 부풀려 크게 보이려는 개구리처럼, 건드리면 가시 확 세우는 고슴도치들처럼 그렇게 살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에 보면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오래전부터 거짓으로 고발돼 왔다. 그러나 정말 위험한 것은 거짓말로 여러분을 사로잡고, 있지도 않은 죄로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이다. (거짓 고발이기 때문에)그런 그림자와 싸워야 하고 대답할 자가 없는 상태에서 논박해야 한다. 내가 파멸 당하면 그것은 비방 때문이며, 앞으로 더 많은 선량한 사람을 죽게 할 것이다.” 까칠하고 예민한 그대가 보다 성숙하고 더 깊은 인간관계로 나가려면, ‘이권’을 나눠먹는 그런 야바위꾼 수준이 아니라 칭찬과 경청, 상대방을 세워주는 참다운 지혜가 필요해 보인다. 칭찬은 이기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천박한 아첨이나 비위를 맞추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진심에서 나오는 격려와 관심의 표현이며, 다른 사람을 축복하고 성장시키고자 하는 성숙한 삶의 표현이다.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바 있는 고아와 빈자의 어머니로서 살았던 데레사(Teresa) 수녀는 자신의 업적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한 일은 사람들이 와서 무언가 내게 말 할 때 그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잘 들어준 것 뿐”이라고 했다. 인류애를 몸소 실천하는 그녀가 배려한 일은 어려움 당한 이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 주는 것, ‘경청’ 그 한 가지였다. 까칠하고 예민한 그대가 한 걸음 더 나아가 상대방의 필요를 채울 때, 그 사람을 얻을 수 있고 진정한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다.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되려면, ‘나를 따르라’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성공시키는 삶을 살아야 한다. 사람들 속에 있는 가치와 능력을 발견하고 그들로 성공할 수 있도록 자질을 키워주고 세워주는 것이다. 내가 주인공이 되고, 내가 인정받으려 하지 말고, 그가 주인공이 되게 하자. 까칠하고 예민한 그대가 웬지모를 원인을 알 수 없어 신경 쓰이는 불면증과 몸이 자꾸 아플 때, 병원을 찾아다니기보다는 관계의 긴장이나 마음의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충동적으로 일터를 도피하거나 관둘 생각은 절대 하지 말고, 타인의 반응에 과도한 의미를 두지 않는 연습하기 등 실생활에서 예민함을 최소화하고 줄이는 방법이 필요해 보인다. 까칠함과 예민성을 줄이면서 더 나은 삶을 살 수는 없을까. 삐딱한 마음에서 오는 ‘까칠함’을 ‘유연함’으로, ‘예민함’을 조금 더 ‘둔감함’으로 바로 잡아보는 것은 어떨까. 어떤 사건이든 마음의 ‘슬기로움’이 ‘희극’을 만들기도 하고 ‘비극’을 만들기도 한다. ‘죄인’도 ‘웬수’도 친구로 변하게 하는 관계의 ’벽을’ 넘는 건 순전히 마음먹기에 달렸다. 그래서 사람은 행복하기로 마음먹은 만큼 행복하다.
    • 칼럼
    • 이효상 칼럼
    2020-08-27
  • [이효상 칼럼] 우리 사회의 정직과 신뢰회복은 어디서부터일까?
    공영방송과 주류 방송들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면서 딱히 볼만한 프로그램이 없었다. 그 틈에 유튜브(YouTube)가 블루오션(Blue Ocean)이 되고 있다. 어찌보면 바람직한 현상 같다. TV든 라디오든 지들끼리 낄낄거리고 먹방(먹는 방송)하고 막말하고 전파낭비하면서 수신료 내라고 하는 것이 싫었던 터라 그 내용이 좋고 나쁜 것보다 오히려 잘 되었다 싶었다. 그런데 막상 유튜브 동네를 들여다보면 막장이다. 불특정다수를 상대로, 또는 왜 자신의 감정을 거르지 않고 막말과 검증되지 않은 거짓을 진실로 오도한다. 그러면서 계좌번호 공지하고, 시청자 수에 따라 광고료 수입도 얻고, 실시간 방송으로 구독자들 귀에 들어갈 말들을 골라 거의 '업(業)'으로 한다. 이렇게 사람들은 듣고 싶을 것만 골라서 듣는다. “요즘 구독자는 그렇게 막장으로 해야 들어요”라는 유튜버들은 변명하고. 그들이 배설해 놓은 것으로 인해 구독자들은 점점 마조히스트(메저키스트; masochist;환자)가 되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다보면, 스마트폰이나 유튜브에 너무 심하게 빠져 스스로 절제하지 못하고, 신체에 무리가 갈 정도로 극단이나 중독에 빠졌다면 상담이나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의 사람을 주변에서 종종 보게 된다. 외국인이 한국을 홍보하는 자극적인 일명 ‘국뽕’도 그렇다. 돈 벌이를 위해 연출된 콘텐츠일뿐 모든 게 사실은 아니다. 요즘 유튜브 에서 일어나는 극우나 극좌가 도배하는 ‘가짜뉴스’들을 지켜보면서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이 깊어지고, 뉴스 자체가 가짜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 발표에 따르면 한국은 ‘언론의 뉴스를 신뢰한다’는 비율이 21%에 불과했다. 한국 언론의 신뢰도는 지난 2017년 이후 4년째 세계 최하위 수준이다. 이런 ‘신뢰도 4년째 세계 꼴찌’라는 발표에 대해 한국기자협회는 “언론만 문제 아니다”라고 반발했다는데, 바뀔 조짐이 보이지 않는 것인가. ‘신뢰’는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라 ‘정직’이라는 희생의 댓가를 지불해야 생긴다. 100만 구독자를 보유한 유명 유튜버가 조작 방송으로 논란의 중심에 섰다. 피해를 입은 해당 업체는 법적 대응을 예고한 상태다. 유튜브만이 아니다. 인간관계도 그렇다. 말을 놓으면 관계가 가까워지는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긴장이 풀리게 되고 예의를 벗어나 무례하게 된다. 서로 친하다고 가볍게 상대하게 된다. 좋을 때야 웃지만, 감정이 틀어질 때는 상대 눈치 안 보고 욕설을 내뱉는 일도 어렵지 않다. 말과 행동은 한번 거칠어지면 되돌려지지 않는다. 거친 말에 중독되면 아무리 쎄게 말해도 어지간한 욕설이나 육두문자로는 감정이 충분히 표출되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이런 도덕불감증, 양심의 불감증 시대를 살고 있는 동시에 무엇보다 언어의 불감증, 말의 불감증, 예절의 불감증에 빠져 ‘민폐’를 끼치면서도 민폐라는 걸 모르고 산다. 유튜브만이 아니다. 진보든 보수든, 우리가 정치에 염증을 느끼는 이유는 스스로는 실천하지 않으면서 남에게 강요하고, 상대편의 실수에는 크게 분노하면서도 자기편의 거짓에는 눈 감아 주고, 조금만 달라도 적폐로 낙인찍고, 국민의 이익보다 내 편의 이익이 더 중요한, '이런 정치' 때문이다. 최근 신문을 보면 어떤 주장이 옳은 것일까. 그리고 어떠한 판단을 내려야 하는 걸까. 정의에 대한 기억도 희미한데 ‘내 편이어서 옳다’는 어리석음으로 ‘닥치고 총공세’를 펼친다. ‘진실 혹은 거짓’이냐가 중요함에도, 사람들은 그게 어디든 믿고 싶은 쪽으로 가고, 믿고 싶은 쪽을 믿는 현상, ‘뇌피셜’이라고 한다. ‘뇌피셜’은 한자어 '뇌(腦)'와 영어 '오피셜(official)'이 합해져서 만들어졌다. 객관적 근거도 없이 자기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 사실이나 검증된 것 인양 믿고 말하는 것을 뜻한다. ‘좋고 싫음’은 감성적 취향을 선택할 때이고, ‘옳고 그름’은 시시비비를 가리는 이성적 판단의 근거이다. 그런데 요즘은 커피를 갈아마시듯 ‘좋으니까 옳다’라는 식으로 갈아 버린다. 믿고 싶은 것이 모두 사실이 아닐 때가 많다. 그런데 그런 마음이 다른 데서 온 거 아니다. 다른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니다. 할아버지가, 아버지와 어머니가, 우파든 좌파든 할 것 없이 이 땅에서 눈물겹게 견디며 살아온 선배세대, 기성세대가 열심히 가르치고 물려준 안타까운 생존과 처세의 유산이다. 누구든 상관없이 우리 편, 같은 편이면 ‘팔은 안으로 굽는다’,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고, 그런 일이 우리 가까이에서 늘 벌어지고 있다. 이렇게까지 엉망진창이 된 것은 그냥 우리들의 문제, 결국 사람의 문제로 귀결된다. 최근 ‘유언비어’나 ‘위증’논란에는 피노키오도 놀랄 지경이다. ‘키가 커지고, 성적이 쑥쑥 오른다’고 ‘안마의자’를 팔기위해 거짓 광고로 소비자를 현혹하는 것은 애교수준이다. ‘사실만 말할 것’을 맹세해놓곤 지인 부탁 못 이겨, 금전이나 댓가를 받고 하는 위증이 판친다. 실체적 진실을 방해하고 억울한 피해자를 양산하게 된다.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하는 거짓말은 괜찮다’는 재판부의 판단은 진실의 ‘눈’을 가린다. 스스로의 판결을 손바닥 뒤짚듯 무효로 만든다. 이는 좌우파의 문제도,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문제가 아니다. 옳고 그름을 가르는 기준도, 그 사람이 ‘정직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 하는가’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미국의 17대 존슨(Andrew Johnson)대통령은 "정직하지 않고 지식이 있는 자는 위험하니 조심하라"고 했다. 또한 프랑스의 철학자, 사회학자 레몽 아롱(Raymond Aron)도 그러지 않았던가. “정직하고 머리 좋은 사람은 절대로 좌파가 될 수 없다. 정직한 좌파는 머리가 나쁘고, 머리가 좋은 좌파는 정직하지 않다.”고. 우리가 이 말에서 생각해야 할 것은 머리가 좋고 나쁜 게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진실에 다다를 수 있고, 정직 할 수 있을까. 우리는 과연 정직했는가. 다음세대에 정직을 얼마나 정직하게 가르쳤는가에 대한 반성이어야 한다. 붕어빵에 ‘붕어’가 들어 있지 않고 모양만 붕어이듯 ‘정의’나 ‘미래’라는 이름을 걸었다고 그 단체가 정의롭거나 미래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최근 정상이 비정상이 되고, ‘차별이 없는 평등’이라는 이름으로 오히려 역차별이 생기고, 권위와 질서가 붕괴되면서 비주류가 주류가 되는 세대교체가 일어나고 있다. 이런 변화와 가치관 혼돈의 시대에 다음세대에게 우리는 정직을 얼마나 정직하게 가르쳤는가. ‘정직’을 기초로 이뤄지는 ‘신뢰’는 세상을 바꾸는 삶의 에너지이자, 미래를 여는 타임캡슐과 같다. 살다보면 본의 아니게 실수나 실언을 하고 말을 지키지 못하여 거짓이 될 때도 있다, 그럴 때 사과하고 미안해하는 ‘염치’가 정직으로 가는 사람된 도리 아닐까. 정직으로 인한 비난이라는 ‘인내는 쓰지만 그 열매는 달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믿을 만한 사람이 된다. 우리 사회의 정직과 신뢰회복은 어디서부터일까. 한 때 베스트 셀러였던 로버트 풀검(Robert Fulghum)이 쓴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2018)는 책이 있다. 최근 일련의 일들을 보면서 우리나 다음세대가 유치원들에서 배워야 할 것들을, 밥상머리에서 가르쳐야 할 것들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가르치지 못했다는 생각이 확고해진다.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삶의 기본이 안 돼 있으면 혼란이 온다. 지혜로운 교훈이 담겨있는 토끼와 거북이부터 거짓말하면 코가 커진다는 피노키오까지 다시 읽어야 한다. 무엇이 감사할 일이고, 무엇이 미안해 할 일인지. 무엇이 거짓이고, 무엇이 진실인지부터. 정직하다는 게 무엇인지부터, 그렇게 정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게 아닐까. 공동체에서 자신의 전염병, 코로나 바이러스를 드러내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공의로운 일이다. 진실을 숨기는 거짓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피해자가 생겼던가. 성경 누가복음서에서 보면 나병환자 10명은 자신의 병을 드러낸 적이 없는 환자였다. 제사장에게 병을 입증 받아야 하고, 또 스스로를 공동체로부터 격리시키는 희생적인 헌신이 요구되었다. 이 이야기의 결론은 예수님을 만나고 제사장에게 정직하게 자신의 부정함을 고백하러 가던 열 사람이 깨끗함을 받았다는 것이다. 길에서 고침받고 돌아가지 않는 나머지 아홉은 아마 자신이 한 번도 나병환자가 아니었던 것처럼 살아가려는 저의가 있었을 것 아닐까. 숨겨왔던 병을 드러내고 자신에게 정직하려고 했던 그 한 명을 성경은 조명한다. 혹시나 우리도 아홉 명처럼 공동체에 조용히 스며들어 한 번도 죄지은 적이 없었던 것처럼 자신의 양심을 속이며 살아가지는 않는가. 코로나19사태보다 퍼져나가는 ‘거짓’과 ‘부패’의 전염성이 위험하다. 산불화재나 산사태를 만난 것처럼 국가 자체가 타들어가고 무너져 내리고 있다. 나라가 무너지건 물에 잠기건 불에 타건, 죽기 전까지는 그래도 정직하게 최선을 다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모처럼 한국정직운동본부가 다음세대에게 ‘정직을 통해 세상이 변화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기위해 정직캠페인 UCC 공모전을 가진다고 한다. 다음세대가 참여하는 의미있는 행사가 되었으면 좋겠다. 오늘 우리는 멘토 바울이 디모데에게 가르쳤던 정직을 얼마나 정직(딤후1:1~3)하게 가르쳤는가. “청결한 양심(Clean Conscience)”은 분명 거짓이 없는 “정직한 믿음(Sincere Faith)”을 생산하는 산실이다. 건강한 사회나 국가는 민폐 끼치지 않는 정직한 개인으로 인해 깨어나고, 성숙한 자유인으로 자각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대한민국, 어디서부터, 어떻게 다시 시작해야 할까. ‘양심회복’, ‘정직운동’이 나라 살리기라는 생각이 깊어진다.
    • 칼럼
    • 이효상 칼럼
    2020-08-19
  • [이효상 칼럼]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제주도의 이기풍 선교기념관을 방문하게 되었다. 기념관에 들어가다 길가에 놓인 꽃을 주목했다 다름 아닌 활짝 핀 무궁화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무궁화를 볼 때마다 삼천리 방방곡곡마다 무궁화가 만발하길 기대하며,남궁억 선생을 기억하게 된다.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무궁화심기운동을 벌여 무궁화 묘목을 전국의 예배당과 학교로 보냈고 무궁화 예찬시를 지어 퍼뜨렸던 그 무궁화가 여기까지 전해진 것일까. 남궁억(南宮檍1863-1939) 선생은 정말 대단하다. 1884년 영어학교를 졸업하고 고종의 영어통역관, 경상도 칠곡부사, 내무부 토목국장 등을 역임하였다.1896년엔 서재필, 이상재 등과 함께 국민운동을 전개하여 ‘독립신문’ 영문판 편집장, 독립협회 수석총무 등을 맡았다. 또한 1898년 ‘황성신문’ 창간에 관여하여 초대 사장 겸 주필로 활약했다. 1910년 한일합병 이후 배화학당 교사, 상동청년 야학원 원장을 지냈고, 1918년 고향인 홍천 모곡리로 낙향한 뒤 예배당을 짓고 모곡학교를 세워 애국교육에 힘썼다. 동시에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무궁화심기운동을 벌였다. 당시 애국부인들은 삼천리를 무궁화로 수를 놓아 이를 뒷받침하기도 했다. 선생에게 있어 무궁화는 ‘나라사랑’이었고 ‘애국’이었다. 선생은 무궁화 묘목을 전국적으로 보급해오다가 형무소에 투옥되었고, 동아일보 신문사의 제호에 들어가던 무궁화 도안도 삭제되었다. 무궁화가 태극기나 애국가와 함께 한민족에게 조국을 상징하고 결속력을 키우는 강력한 존재임을 간파한 일제는 무궁화를 우리 민족과 멀리 떼어놓기 위해 무궁화를 볼품없는 지저분한 꽃이라고 경멸하여 격하시키고 일본 꽃인 벚꽃을 심게 했다. 그래도 한서(翰西) 남궁억 선생은 굽히지 아니하고 무궁화선양운동을 펼치고 무궁화나무 심기를 계속 했다. 1933년 독립운동 단체인 기독교 비밀결사 ‘십자가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옥고를 치르다 병보석으로 석방되었지만, 병고에 시달리다 끝내 별세했다.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남궁억 선생은 ‘나라사랑’은 남 달랐다. 일제 치하에서도 한글과 우리 역사를 알리고자 ‘신편언문체법’과 ‘조선어보충’ ‘동사략’(東史略)과 ‘조선이야기’(전5권) 등을 저술하였고 또한 백여 편의 시와 노랫말을 지어 독립정신을 고취했고, 특히 나라 사랑의 정신과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이라는 곡은 현행 찬송가에 수록되어 지금도 널리 불리고 있다. 나라마다 나라를 상징하는 세 가지, 즉 국기와 국가, 국화가 있다. 일본은 ‘벚꽃’, 영국은 ‘장미’, 우리나라는 무궁화다. ‘무궁화’는 이름처럼 무궁하다. 어릴 때 불렀던 노래 중에 "무궁 무궁 무궁화, 무궁화는 우리나라 꽃, 피고 지고 또 피어 무궁화라네 !~ 너도 나도 모두 무궁화가 되어. 지키자 이 땅, 빛내자 조국, 아름다운 이 강산 무궁화겨레 우리 손잡고서 무궁화~ 무궁화 ~ ” 가사 말처럼 우리들은 무궁화 민족이다. 그럼 왜 무궁화가 우리 민족에게 선택된 것일까? 끈기와 지구력과 아름다움을 보여 주는 꽃 무궁화는 우리나라 토양에 맞는 꽃으로서 원산지가 우리나라이며, 우리나라 전국에 긴 역사를 가지고 자생해 온 꽃이기 때문이다. 무궁화의 역사는 길다. 실제로 무궁화가 우리 민족의 마음속에 나라를 대표하고 상징하는 꽃이 된 것은 이미 수 천년이 된 일이다. 우리나라의 무궁화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동진(東振))의 지리서 산해경(山海經)에 군자의 나라에 무궁화가 많은데 아침에 피고에 군자의 나라에 저녁에 자더라‘((君子之國有薰華草朝生暮死)’라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 박민웅의 ‘창암집(滄巖集)’에 따르면 ‘기자(箕子)가 동쪽으로 오면서 무궁화(槿花) 종자를 가지고 와 이 땅에 심었다’고 했다. 무궁화가 전래된 초기의 기록. 신라의 문장가 최치원이 당나라에 보낸 국서에는 계림을 근화향(槿花鄕;무궁화의 나라, 신라를 뜻함)이라 했다. 또 중국의 고전인《고금기(古今記)》에는 ‘군자의 나라에는 지방이 천리인데 무궁화가 많이 피었더라( 君子之國地方千里多木槿花)’라는 기록이 있고,《예문유취(藝文類聚)》권(卷)89에는' 군자의 나라에는 무궁화가 많은데 백성들이 그것을 먹는다.(君子之國多木菫之華人民食)'라고 전해져 왔다. 이렇게 보면 최소한 조선시대에는 가는 곳마다 무궁화가 만발했던 것을 같다. 우리 겨레와 역사를 같이해 온 애틋한 꽃. 하지만 무궁화를 일제강점기에 일제는 모조리 뽑아냈다. 무궁화가 한민족의 상징이라는 것을 안 일제에 의해 민족혼을 말살하기 위한 수단으로 조선의 무궁화를 전 국적으로 뽑아 없애버림으로써 큰 수난을 겪었다. 꽃나무가 민족의 상징이자 이름으로 이처럼 가혹한 시련을 겪은 사례는 일찍이 없었고 이를 사람한 사람이 있었으니,,그가 남궁억 선생이다. 삼천리 방방곡곡 무궁화가 만발하기를 기대하며 무궁화를 볼 때마다 남궁억 선생을 다시 기억하게 된다. 이렇게 나라꽃 무궁화야말로 겨레의 얼굴이며 혼으로 그렇게 수난을 견딘 꽃이 무궁화다. 오랜 역사를 두고 우리 만족의 구심점의 위치에서 우리 민족과 함께 끊임없이 피어왔다. 애국가 가사에 '무궁화 삼천리'라는 구절이 아무런 저항없이 표현되고 불려지는 것도 무궁화가 오랜 세월을 통해 우리나라, 우리 민족속에 자리한 때문이다. 8.15 해방 75주년이 된다. 정부가 나서 무궁화가 나라꽃으로 규정한 것은 1949년이지만, 진해에서 일본 꽃인 ‘벚꽃대축제’는 하면서 우리나라 국화인 무관심하고, ‘무궁화잔치’는 시도하지 않는 것을 볼 때면 일제 때 빼앗긴 민족혼을 오늘날까지 제대로 찾지 못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무궁화가 서양에서는 ‘샤론의 꽃’이라 불리며 꽃 중의 꽃으로 불린다. 봄에 잎이 나오면 이어 꽃이 피기 시작하여 가을에 잎이 지고 가을에 쉬는 끈기와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무더위와 장마철에 무궁화 꽃이 활짝 피었다. 해마다 피는 꽃이지만 질긴 생명력 때문인지 올 여름 무궁화는 어쩐지 더 귀해 보인다. 어제도 오늘도 그렇게 꽃을 피우고 있다. 무궁화는 이름처럼 무궁히 뻗어 나갈 우리나라처럼, 우리 곁에서 항상 그렇게 묵묵히 꽃을 피울 것 같다.
    • 칼럼
    • 이효상 칼럼
    2020-08-12
  • [이효상 칼럼] 대한민국이 지켜내야 할 가치는?
    정치권은 뭘 하는지, 보수와 진보로 갈라져 싸우느라 국민은 무얼 먹고, 어떻게 사는지 관심이 없다. 그렇게 허송세월만 간다. 구태를 털어내고 정권을 맡겨도 될 만한 든든한 대안정당이 사실상 보이지 않는다. 보수는, 진보가 무능한 아마추어들이라서 언젠가 스스로 무너질 것이라는데 일말의 희망을 걸고 있다. 반면, 진보는 보수를 친일과 반공의 유산에 물든 구시대의 잔재로 보고 청산돼야 할 적폐세력으로 치부한다. 민심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민심은 마구 흔들리고 요동치고 있다. 민심은 무능도 싫어하지만 독선과 오만은 더 더욱 싫어한다. 국민들이 가만히 있으니까 ‘가마니’ 취급하기에 사람들은 분노한다. 빚은 공짜가 아니다. 정치권은 가계 빚은 적신호인데도 3차 추경예산까지 편성하며 빚내서라도 일단 돈 쓰고 보자는데 있다. 하지만 국민의 관심은 단 한가지 민생해결이다. 누가 일자리를 만들어 내느냐, 누가 더 좋은 정책을 제시하느냐에 있다. 얼마 전 어느 정치인이 쓴 책에서 “국민 모두가 한국정치의 ‘창조적 파괴’,‘파괴적 혁신’을 결심해야 한다. 정치의 근본을 바꿔야 국민이 산다. 상생과 타협의 정치드라마를 만들어야 한다”는 글을 읽었다. 정치 변혁에 대한 글에 공감하면서도 서로 대화와 가교도 없이 비판과 공격만 일삼는 양 진영논리에 현실정치의 문제가 ‘사람’의 문제인가. ‘책임’의 문제인가, 아니면 시스템의 문제인가를 심각히 고민하게 됐다. 우리는 흔히 ‘사람’만의 문제라고 보고 사람을 미워하거나 ‘극혐’으로 비판하곤 한다. 가령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차량 급발진의 경우처럼, 미끄럼·전복·화재가 생겼다면 분명 ‘차량결함’이다. 심각한 결함이다. 사람의 운전 문제를 넘어 시스템의 오작동 문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리석은 지도자는 “내가 하면 남보다 잘 할 수 있다”고 고집을 부린다. 또는 “나까지는 해먹어야 한다”라는 뱃포, “이건 내꺼다”라며 사유화하려는 이런 고집과 사욕이 조직이나 기관을 망친다. 꼭 조직이나 기관만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도 마찬가지다. 사유화를 막고 함께하는 공적영역의 가치와 공적 시스템의 구축은 요원한 것인가. 그렇다면 대한민국이 지켜내야 할 가치는 무엇인가.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목숨을 걸고 지켜야 될 진정한 가치는 어떤 것인가. 대한민국의 다음세대에게 전해야 할 가치는 무엇인가. 당연히 ‘자유민주주의’라는 국가 정체성이다. 두말하면 잔소리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1인 1표이지만 ‘다수결’이라는데 함정이 있다. 선거에서 ‘좋아하고 지지하는 후보’보다는 ‘이길 후보’를 찍는다. 내 표가 사표(死票)가 되길 원치 않기 때문이다. 무조건 단 1표만 많아도 다수면 된다는 ‘단순 다수제’방식의 오류다. 51대 49라면 당연히 51이 승자이겠지만 상대방인 49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다수가 됨으로 소수의 자유를 침해하는 다수의 오만한 횡포에는 답이 없다. 이런 다수가 권력이 되면 사생활에 까지 간섭이 심해진다. ‘자유’로울 줄 알았던 민주사회는 공권력이 전횡되는 모순을 안게 된다. ‘차별금지법’이 있음에도 ‘포괄적’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차별금지법이 그렇다. 이렇게 독소조항이 있는 법안에 대해 다양한 민의를 수렴하기보다는 ‘그들만의 성역’을 만들어 그 결정을 따르라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성과 다양성에 기반한 ‘자유’라는 이름은 사라지고, 전체주의적 사회화가 춤을 춘다. 쥐꼬리만한 권력이나 자리도 권력이라고 사람들은 그 편에 줄을 서게 된다. 그래서 정치는 그저 과거에 만들어 놓은 그 틀을 밑천삼아 적당히 관리하며 소비하다 문 닫으면 그만이라는 식이다. 겉으론 ‘혁신’, ‘미래’를 말하지만 그런 변화와 시도조차 보이지 않는다. 아니 꿈도 꾸지 않는다. 요지부동이다. 특히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는 많이 가진 ‘갑(甲)들의 세상이다. 실직자·무주택자·신용불량자·고령자 등 복지의 사각지대에 있는 소외된 이들을 무시한 채 오히려 경제적 불평등을 더 키우고, 사회적 불공정을 대놓고 자행하는 데도 가진 자들의 갑질에는 해답이 없다. 이것이 ‘천민자본주의’의 실체이자 폐해이다. 정부는 땀흘려 일하는 자들이 보람을 누리며 살 수 있는 공정의 틀을 마련하는 동시에 시장의 왜곡과 독점폐해를 바로잡는 역할을 해야 된다. 하지만 현실은 수요공급의 법칙을 뒤로하고, 저녁 값부터 아파트값까지 정부가 정하고, 일자리도 국가가 만들고, 친시장정책을 외면하다보니 정상적인 시장의 작동이 붕괴되거나 교란현상이 일어난다. 그렇다고 자율성을 통제하고 역동성을 상실케 하며, 개인의 다양성이나 독특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주의를 지향하고 갈 순 없지 않는가. 이렇듯 불안전하고 모순을 안고 있는 구조가 언제까지 가능할 것인가. 그러기에 근본적인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 최대 다수라는 지분을 가졌다거나 돈 많이 낸 사람이 갑(甲)이라는 생각으로 하고 싶은대로 한다면야, 딱히 할 말은 없다. 남용되는 권한을 탐하고 누리려는 어쩌면 언제 타 죽을지도 모르는 불빛에 달려드는 불나방들이다. 그런 순간적 달콤함과 화려함을 추구하는 이들이 낡은 시스템을 지켜려 한다. 이들이 진정 미래를 위해, 국민을 위해 낡은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바꾸려 시도할 용기나 기회가 있을까. 침몰하는 배와 같은 대한민국호(號)를 누가 구할 것인가. 국회를 바꾸고, 정치구조를 바꾸고 사회를 변화시킬 그런 거룩한 능력이 있기는 한 것인가. 그렇다면 건강한 사회는 어떤 가치를 추구해야 하고, 우리 사회가 지켜야 할 진정한 가치는 무엇인가. 이런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돈이 권력이 되고 권력이 돈을 추구하는 구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이념 양극화와 정치 불신을 넘어설 방법은 없는 것일까. 어떤 정치가, 어떤 권력이, 어떤 가치가 이 사회를 융합시키고 통합시킬 수 있는가. 이런 시스템의 변화를 어떻게 이뤄낼 수 있는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브레이크 없이 오만하거나 탐욕스럽지 않게 하기위해 ‘자유’와 ‘평등’, ‘사랑’과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을 꿈꾸는 것은 나만의 환상일까. 이런 세상을 지향하는데 기독교 가치가 전제되거나 전환되지 아니고는 건강한 자유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를 지켜 낼 방법이 없다는 생각이다. 기독교 가치가 사회 전반에 깔리므로 사회가 건강하게 발전할 수 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유일한 대안 시스템이다. 이 시대 지도자의 자질은 무엇일까. 의무· 책임· 열정· 안목· 균형감각 등이다. 다들 자리에 대한 열정은 뜨겁다. 지도자는 짐을 지는 자다. 하지만 의무에는 무관심하고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도 적다. 또한 이벤트가 아닌 장기적 안목을 가진 사람은 찾기가 쉽지 않다. 여기에 균형감각까지 두루 갖추면 최고의 경지다. 오늘 우리 지도자에게 그런 다섯가지 자질이 필요하지 않을까. 건강한 지도자라면 자존심과 자긍심을 고양할 수 있는 가치와 미래비전을 제시하고 만드는 일에 앞장서고 헌신해야 한다. 오늘이 있기까지 당당한 성취를 폄훼하거나, 과거사만을 드러내 국민을 자조적·자학적으로 만들어가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열정과 책임, 그리고 안목이 중요하다 하지만 전임자들이 결국 자살하거나 권력을 놓음과 동시에 감옥에 들어가야만 하는 현실은 문제가 있다. 우수한 경쟁자를 죽이는 소비정치는 어떤 말로 설명해도 불행이다.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다. 광장을 촛불로 물들여도, 정권을 교체해도 우리의 현실이 제자리걸음인 이유는 무엇인가. 자꾸 되풀이 되는 사고의 후진성에 과연 우리는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일까. 이제는 근본적인 시스템 변화의 노력을 고민해야 한다. 어차피 정권은 돌고 도는 것. 대통령제와 양당정치, 수도권 중앙집중부터 바꿔야 한다. 자치능력이 사라지고 중앙으로 권력집중이 계속되는 한 지금과 같은 상황은 피할 수 없다. 기존 가치에 대한 ‘각성의 대전환’이 필수조건이다. 보수가 보수로 살면 ‘보수꼴통’이 되고, 보수가 진보로 살면 ‘후안무치’가 되고, 진보가 진보로만 살면 과격해지거나 ‘무도덕’하기 쉽다. 무너져가는 권위를 지키려 하면 ‘꼰대’가 되고, 기득권에 의지하면 ‘적폐’가 된다. 진보는 이미 기득권이 되었다. 성경에 보면 자신에게 맡겨진 권한으로 빚진 자의 과거 채무를 탕감하거나 어려운 이들의 세를 경감해 준 청지기이야기가 나온다. 개혁적으로 볼 때, 시스템 변화의 노력으로 공동체에 선한 영향력을 끼쳤지만, 전통적 입장에서 보면, 주인의 권한을 멋대로 사용했다는 일명 ‘불의한 청지기’를 주인은 오히려 ‘지혜롭다’ 칭찬했다. 혹시나 ‘나 혼자’가 아닌 ‘함께 살아갈 세상’을 꿈꾼 것 아닐까. 시대에 맞는 옷처럼 시스템의 변혁과 새로운 가치가 필요한 것 아닐까. ‘우리끼리’의 권력에 취하면 안팎의 쓴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민심을 읽지 못하는 권력은 위험하다. 그렇게 공동체를 분열시켜 패거리끼리 이익을 취하려는 편협한 생각을 버리고 ‘탕감’과 ‘등용’, ‘대 탕평책’으로 문호를 개방해야 한다. 다양한 세대와 계층이 함께 공감하는 ‘건강한 공동체’와 함께 살아갈 ‘사회적 틀’을 만들기 위해 ‘통합과 융합’의 기치를 높이 들어야 한다. 갈등과 분쟁의 시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가치는 무엇일까. 가치혼돈의 시대를 살아가며 준비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성경적 가치와 그 지혜가 아닐까 싶다. 그러기에 세상의 지혜보다 더 현명한 신앙의 지혜가 언젠가는 세상가치를 바꾸는 날이 오리라 믿으며 뼈아픈 역사의 기회비용을 이제 그만 치르고 변혁의 그날이 빨리 도래하길 두 손 모아 기도한다.
    • 칼럼
    • 이효상 칼럼
    2020-07-23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