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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호와의증인
    ◇오늘날 세계교회를 괴롭히는 주요 이단종파들은 모두 미국의 남북전쟁 전후에 생견난 집단들이다. 이 시기 생겨난 대표적 이단종파가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 크리스챤 사이언스 등이다. 이들은 모두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한다. 그 중에 한국교회가 가장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는 여호와의증인은 찰스 테즈 러셀(Charles Taze Russell)이 종말에 관한 특별한 견해를 갖고 ‘국제성서연구자협회’를 창립한 데서 비롯되었다. 러셀은 본래 회중파 교회의 신도였으나, 그의 나이 20세 되던 1872년에 성서연구에 대한 한 그룹을 조직하였다. 이들이 1881년에 ‘파수대성서책자협회’라는 법인조직을 만들고, 스스로 원시 기독교의 재현을 설파했다. ◇여호와의증인이라는 이름은 이사야 43장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나는 하나님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10~12)에서 온 것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독생자로 보지 않고 ‘여호와의 수석증인’이라고 한다. 성경 요한복음 18장 37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하는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고 했고, 계시록 1장 5절은 “충성된 증인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으며, 계시록 3장 14절에는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여호와의증인은 “하나님의 으뜸되시는 증인 예수 그리스도의 지도 아래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헌신한 사람들의 집단”이다.◇그러면 여호와의증인은 정통 기독교와 무엇이 다른가? 첫째, 그들은 삼위일체를 부정한다. 그들은 삼위일체는 고대 바빌론의 우상숭배 사상으로서, 잘못된 기독교의 교리 속으로 들어와 주후 325년 니케아 회의에서 확립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둘째, 그리스도는 이 땅에 태어나기 전에 천상에서 ‘말씀’으로 역사하였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과는 동일하지 않으셨다. 예수는 성령의 능력으로 마리아의 몸을 통해 인간으로 왔지만 그가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성령을 부어주어 비로소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한다. 셋째, 인간은 ‘땅의 먼지’와 ‘생명의 숨결’이 한데 합쳐서 이루어진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의 영혼이 불멸한다(영혼불멸설)는 것은 거짓이라고 주장한다(겔 18:4, 사 53:12 참조).◇여호외의증인은 구원을 두 가지로 본다. 하나는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며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통치권을 위임받은 ‘적은 무리’이다. 이는 여호와의증인의 전도자로 있다가 죽은 144,000이고, 다른 하나는 마지막 아마겟돈 전쟁에서 살아남은 ‘큰 무리’가 있다. 이들은 현재 여호와의증인 조직 속에 있는 사람들로서 ‘지상반열’이라고 부르며, 머지않아 지상낙원에서 군왕들이 되어 통치권을 가지게 될 사람들이다. 따라서 여호와의증인은 성경을 읽고, 여호와 를 경배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세운 그리스도교는 아니다. 그리스도교의 신관은 삼위일체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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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2-14
  • 제단과 강단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그리스도교에서 천주교(로마 가톨릭)와 기독교(프로테스탄트)의 차이는 ‘제단’(Altar)과 ‘강단’(Pulpit)에 있다. 제단은 ‘제물’이 필요하고, 그 제물을 드리는 자격을 갖춘 ‘제사장’이 필요하다. 그래서 천주교는 미사를 집례하는 사제(곧 제사장)가 하나님께 드리는 매 미사에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실제적 제물로 드린다. 그리스도가 매 미사 때마다 다시 죽어 그 살과 피를 나누는 것이다. ◇그러나 강단은 말씀이 선포되는 곳이다, 그 말씀의 선포를 위해 설교자 곧 '목사'가 있다. 설교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세상에 오시고, ‘우리의 유월절 양’(고전 5:7)으로서 단번에 십자가에 제물로 그 몸을 드리고, 인류의 구원을 다 이루셨다는 사실을 항상 일깨우고, 그리스도가 세운 교회공동체의 역사적 경험을 오늘 우리의 삶에 연관시켜 세상에서 유혹자 사탄을 이기도록 가르치는 것이다.◇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이루어진 좋은 일들의 대제사장으로 오셔서… 오직 자기 피로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셔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히 9:11,12)라고 했다. 그리스도가 제물로 드려진 것은 오직 한번에 다 이루신 것이다(요 19:30). 미사 때마다 매 번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제물로 제단에 드리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오히려 온전한 속죄로 여기지 않는 것이 된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같이 자기를 자주 드리려고 않으시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제물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단 한번 나타나셨다”(히 9:25,26)라고 했다. ◇그러므로 인류의 구원에 있어 더 이상 제물도, 제단도, 사제도 필요 없게 된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그가 인류의 구원을 위해 다 이룬 속죄의 사역을 증언하는 일이다. 그리스도는 곧 말씀이다. 그래서 설교자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을 ‘말씀의 증언’이라 한다. 말씀은 세 가지로 우리에게 온다. 첫째는 성경에 계시된 기록된 말씀이다. 둘째는 성찬에서 드러난 보이는 말씀이다. 셋째는 오늘 선포되는 들리는 말씀이다. 설교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어의 Pulpit은 말씀이 선포되는 ‘강단’뿐 아니라, 비행기의 ‘조종석’이라는 뜻도 있다. 조종석에 앉은 기장이 자기 임무와 그 비행기가 갈 목적지를 온전히 숙지하고 있어야 승객을 안전하게 그 목적지에 도착시킬 수 있는 것같이 강단이 바로 그런 곳이다. 강단에 선 설교자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사랑과 구원을 온전히 숙지하고 있어야 그 교인들을 그 목적지인 하나님의 나라에 모두 완전하게 들어가게 할 수 있다. 성경구절 한 구절 읽어놓고, 현대인들의 입맛에 맞는 그럴듯한 연설이나 종교적 강화(講話), 또는 기복적 설교로는 강단의 사명을 다할 수 없다. 강단에서는 예수 믿어 만사형통하고 복 받는 ‘축복’이 아니라, 예수 믿어 죄사함을 받고 ‘구원’함을 받는 복음이 선포되어야 한다. 축복은 구원받은 주의 백성에게 덤으로 주어지는 은총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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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1-31
  • 원로목사 제도 교회성장에 해악
    ◇개교회의 원로목사 제도는 목회자의 잦은 이동으로 개교회 발전에 지장이 초래된다고 생각해, 목회자가 한교회에서 일생을 헌신하도록 배려한 제도이다. 목사가 개교회에 청빙되어 부임한 후 ‘위임식’을 갖고 노후를 걱정하지 말고 20여년을 마음놓고 목회정책을 펴보라는 것이다. 한국교회에 원로목사 제도가 도입된 후 교회성장에 기여한 면도 있다. 그러나 이제는 이 원로목사 제도가 재검토 되어야 할 시기가 왔다. 왜냐하면 원로목사와 후임 담임목사 간의 갈등이 교회분열을 야기하고, 교회성장에 해악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다. “원로목사는 한교회에서 20년 이상을 시무하던 목사가 노후에 시무를 사면할 때 교회가 그 명예를 보존하기 위하여 원로목사로 추대한 목사이다.”◇한국교회에서 원로목사가 배출되는 교회는 대체로 그 지역에서 규모가 상당한 세력을 가진 교회들이다. 그런데 지금 전국에서 원로목사를 배출한 교회들이 몸살을 앓고 있다. 그래도 역사와 전통이 있는 교회는 그동안 여러 경험이 있기 때문에 별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중에는 단순히 은퇴목사도 있었고 원로목사도 있었기 때문에 으례히 그들을 어떻게 예우해야 한다는 것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회현장에서 상당한 카리스마를 가졌거나, 교회를 개척하여 성장시킨 경우에는 전혀 상황이 달라진다. 이들 중에는 은퇴 후에도 ‘진짜 원로’가 되어 섭정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원로목사와 담임목사 간의 소유권 유지와 지배권 확장의 갈등이 심각하게 표출된다. 원로목사가 ‘시어머니’ 노릇을 하는 바람에 담임목사와의 사이에 갈등이 고스란히 교회운영에 드러남으로써 원로목사 지지측과 담임목사 지지측 간에 교회가 분쟁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다. 이로 인해 교회 내의 갈등을 넘어 법원에 소송이 제기된 교회가 수도 없이 많다.◇은퇴목사가 되면 ‘이제 나는 더 이상 이 교회의 목회자가 아니다’라는 자세를 일관해야지, 교인들이 새로 부임한 담임목사만 찾아가고 자신을 찾아오지 않는다고 섭섭해 하거나, 또는 담임목사가 당회에서 결정한 사항을 몇몇 당회원들이 자신을 찾아와 불만을 호소한다고 하여 그 결정사항을 변경시키는 ‘상왕’(上王)의 행위는 결국 교인들 간의 분쟁으로 귀결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교인들의 자세이다. 원로목사에게 충성하던 장로나 제직들이 그를 존경하는 마음에서 원로목사를 찾는 경우가 많지만, 장로나 제직들은 말할 것도 없고, 평교인들까지도 현재 교회의 지도자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인식하고, 옛정을 생각해서 계속 원로목사를 찾는 행동은 자제함이 옳다.◇사실 이러한 교회의 분쟁은 교단 헌법에 문제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목사가 정년퇴임을 했으면 그냥 ‘은퇴목사’면 그만이지 굳이 원로목사니, 공로목사니 하여 공(功)과 명예(名譽)를 따로 인정해 주는 것이 교회 운영상 문제가 많은 것으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 한국교회도 이만큼 성장했으니, 노회의 공로목사는 그대로 두더라도 개교회의 원로목사 제도는 없애는 것이 옳다. 이대로 가다간 교계에서 진짜로 존경을 받아야 할 원로들이 교계나 사회로부터 모두 존경심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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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1-17
  • 신년사
    구약성경 민수기 11장에는 모세 시대 특별히 선택받은 70인 장로들이 회막에 모여 다 예언을 했는데, 70인 중에 회막에 나가지 아니한 두 사람도 자기 진에서 예언을 했다. 이것을 보고받은 여호수아가 모세에게 이들의 예언을 금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자 모세는 오히려 “여호와께서 그 신을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한다”(29절)며 일축했다.선지자를 예언자라고 한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보이신 것을 세상에 선포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하나님의 우주 섭리와 구원의 역사에 대해 ‘본 것을 말하는 자’이다. ‘보지도 않고 말하는 자’는 가짜이다. 그래서 선지자는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가 있다. 참 선지자의 예언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고, 거짓 선지자의 예언은 선지자 자신의 스스로의 생각에서 우러나는 것이다.성경에서 선지자를 가까이 한 왕들은 대체로 신앙과 통치에 성공한 왕들이고, 선지자를 멀리한 왕들은 대체로 실패한 왕들이다. 선지자를 가까이 두지 않은 왕들의 시대에는 그 사회 자체가 부패와 타락을 일삼았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다윗의 시대에는 선지자나 선견자들이 왕궁에도 들락거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다윗은 범죄 후 나단 선지자의 정곡을 찌르는 지적을 받고 즉시 침상을 적시는 눈물로 회개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솔로몬은 취임 초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지혜를 얻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왕이 되었으나, 그 권력이 강화되면서 선지자들을 멀리한 관계로 말년에 신앙적 윤리적 타락을 가져와 끝내 왕국이 분열하는 단초를 제공했다.또 히스기야도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를 비롯한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받아 산당을 제거하고 종교개혁을 시도하는 등 여호와 신앙을 회복하고 선한 정치를 하였다. 그러나 그 아들 므낫세는 선지자를 멀리하고 선왕(先王)이 제거한 산당을 새로 재건하는 등 여호와 보시기에 악한 길로 갔다. 그래서 성경은 “므낫세의 꾀임을 받고 악을 행한 것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멸하신 열방보다 더욱 심하였더라”(왕하 21:9)고 기록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사회는 심각한 여론분열을 겪고 있다. 전국에는 6만에 이르는 교회당이 있고, 15만에 이르는 목회자가 있지만, 막상 사회를 향한 선지자적 발언은 듣기 어렵다. 현대교회는 하나님의 완성된 계시를 직접 보고 듣고 있으면서도, 그 계시를 우리사회를 향해 적용하려는 노력에는 둔감하다. 설교자는 현대사회의 선지자이다. 하나님의 계시에서 보고 들은 것을 가감없이 말해야 한다. 그러나 보지 않은 것을 마치 본 것처럼 말하는 자는 사이비이다. 또 보고도 못본체 하며 입을 열지 않는 자도 ‘벙어리개’이다. 진정으로 우리사회가 위기에 처했다고 확신한다면 모여 앉아 뒷담화만 하지 말고, 정부를 향해, 권력을 향해 선지자 노릇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2019년 새해에는 모든 설교자들이 다 선지자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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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1-03
  • 성탄메시지/ 예레미야 31:15~20
    옛 말에 ‘감탄고토’(甘呑苦吐)라는 말이 있습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뜻입니다. 자신에게 유리하면 좋아하지만, 불리하면 싫어하는 이기적인 태도를 말합니다. 이해 관계에 따라 자신에게 이로우면 다가서고, 이롭지 않다고 판단되면 돌아서는 믿음없는 관계가 그런 것입니다.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헤롯 왕이 그러했습니다. 그는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왕궁으로 찾아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있느냐’고 물었을 때, 위장된 평화로 ‘나도 가서 메시야에게 경배하겠다’며 아기가 있는 장소를 자신에게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겉으로는 웃으며 말했지만 헤롯은 무서운 살인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결국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베들레험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두살 아래 사내 아이들을 모두 살해했습니다.예수님의 탄생과 더불어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가 선포되었으나, 베들레험에는 수많은 통곡과 비명소리가 거리마다 골목마다 메이리쳤습니다.예레미야 선지자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는 이스라엘의 젊은이들을 바라보며, 일찌기 요셉의 가장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자식이 없어 통곡하던 상항을 기억했습니다. 라헬은 뒤늦게 요셉과 베냐민을 낳지만 베냐민에게는 젖 한번 물리지 못한채 숨을 거두었습니다. 핏덩이 자식을 두고 눈을 감아야 햇던 라헬, 인간의 모든 고통과 참혹함을 다 지켜본 눈물의 여인이, 요셉이 사라지자 무덤속에서 통곡했다는 것입니다.그러나 라헬의 통곡은 새로운 역사의 태동을 알리는 진통이었습니다. 요셉은 비록 노예의 신세로 전락했지만 이집트와 그 가족을 살리는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예루살렘과 그 지경의 통곡소리도 인류 구원의 역사를 여는 진통이었습니다.라마의 통곡소리는 이 시대의 역사에도, 오늘의 우리사회 구석구석에도 수없이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진로 문제로 고민하는 청소년들, 실업으로 한숨 쉬는 청년들, 생활고에 지쳐 삶을 비관하는 외로온 사람들, 정신적인 공황상태에 빠져있는 소시민들의 현실에 대한 실의와 고퉁을 누가 멈추게 할 수 있습니까? 이들의 통곡을 위로하고 싸매줄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성탄은 우리의 이 아픔과 고통을 위로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독생자가 임마누엘로 우리에게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 세상에는 아픔이 있고, 고통이 있고, 질병이 있습니다. 실패가 있고, 국음이 있습니다. 이 아픔과 죽음을 이기는 길은 주님을 바라보면서 새로운 삶에 대한 소망과 용기를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백성은 사방에 에워쌈을 당해도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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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2-21
  • 구름과 흑암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낮에는 구름 기둥과 밤에는 불 기둥으로 보호함을 받았다. “그들이 숙곳에서 발행하여 광야 끝 에담에 진을 치니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 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출 13:20-22). 여기에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은 보통의 자연현상이 아니라, 여호와의 권능이 이스라엘 가운데 함께 하셨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출애굽 후 이스라엘이 홍해를 만나 더 이상 진격할 수 없게 되었고, 뒤에는 바로의 병거와 마병이 바짝 추격해 왔을 때는 “이스라엘 진 앞에 행하던 하나님의 사자가 옮겨 그 뒤로 행하며 구름 기둥도 앞에서 그 뒤로 옮겨”(출 14:19) 바로의 군대를 막았다. ◇또 하나의 구름이 있다. “성막을 세운 날에 구름이 성막 곧 증거막을 덮었고 저녁이 되면 성막 위에 불 모양 같은 것이 나타나서 아침까지 이르렀으되 항상 그러하여 낮에는 구름이 그것을 덮었고 밤이 되면 불 모양이 있었는데 구름이 성막에서 떠오르는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곧 진행하였고 구름이 머무는 곳에 이스라엘 자손이 진을 쳤으니”(민 9:15-17).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한 구름을 통해 가나안을 향한 인도함을 받았다. 이 구름을 세키나(shekinah)라 한다.◇그리고 또 다른 구름이 있다. 암흑(暗黑)이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빽빽한 구름 속에서 하나님과 대면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강림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치 않게 함이라 백성은 멀리 섰고 모세는 하나님의 계신 암흑으로 가까이 가니라”(출 20:20,21). 이 암흑은 신에 대한 이성인식(理性認識)의 불가능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모세가 사람이 손으로 짓지 않은 장막을 본 것은 이 빽빽한 구름 속에서 본 것이다. 이 장막은 신의 능력, 신의 지혜인 그리스도이시다. 그 분은 독생하신 하나님이요, 온 우주를 그 품안에 안으신 분이요, 자신의 성전을 우리들 가운데 지으신 분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참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히9:24). 하나님의 지혜인 독생자 그리스도를 바로 알지 못하면 성경의 참진리를 깨닫지 못한 자이다.◇모세에 대한 신의 현현(顯現)은 처음에 호렙산 떨기나무에서 빛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 다음에는 구름 속에서 말씀하셨다. 그리고 모세의 영혼이 더 고귀해져 완전에 도달하자 그 후에는 암흑 속에서 하나님을 본 것이다. 빛, 구름, 암흑이라는 삼단계는 영혼의 도정(道程)에 있어서 완전한 진리에 이르는 과정이다. 그것은 먼저 첫째 단계에서 진리의 빛으로 인간이 가진 온갖 오류의 어두움을 추방하고, 거기서 전진함에 따라 차츰 암흑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감각인식이 가능한 것, 이성인식이 가능한 것, 더 나아가 진리를 가리고 있는 일체의 어리석음에서 끊겨질 때 참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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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2-14
  • 기독교의 사회적 기능
    ◇19세기 개화파 지식인 박영효(1861~1939)는 “내가 미국을 들어가 여러 곳을 유람하며 마음을 두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과연 그 풍속이 문명(文明)하고 순량(純良)함은 오로지 기독교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 나라가 정치가 화평하고 민간사업이 번성함은 종교와는 무관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근원을 찾아보면 종교의 가르침에 의하지 아니함이 없고 우선 교육이나 정치나 그 모두가 종교적 영향으로 풍속이 순량하고 민업이 흥왕케 한 것 같다. 원래 전국민이 모두 신도는 아니라 할지라도 그 종교의 영향은 자연히 스며있다. 대체로 종교의 장점은 오직 사악함을 금할 뿐 아니라 사람들을 자립케 하는 효과가 있으며 심려강직(心廬强直)하고, 덕과 의로서 서로 상종하며, 서로 도우게 한다. 고로 생각건대 인간은 종교가 아니면 자립할 수 없고, 정치를 하는 자도 종교가 아니면 모든 인민을 교육할 수 없다. 개명한 나라는 이미 다 그렇다”라고 했다.(朝野新聞).◇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 한 사회의 가치관은 그 사회의 주류종교에서 나온다. 종말론적 세계관에 바탕한 기독교는 그 가치관이 확실하다. 기독교를 주류종교로 받아들인 국가 치고 일류국가가 되지 않은 나라가 없다. 20세기 초 인류사회를 구원할 것처럼 등장한 공산주의가 한 세기도 지나기 전에 망하고 만 것은, 공산주의를 받아들인 국가들이 모두 인류사회와 함께 발전해온 클래식종교를 부정했기 때문이다. 박영효가 지적한 대로, 어떤 정치일지라도 종교가 아니고는 모든 인민을 교육할 수 없다. 그래서 중국이나 북한 같은 공산주의 사회는 아예 ‘공산당’ 자체가 하나의 종교를 대신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정치종교는 대표적 사이비이다. 따라서 그 근본 실체가 드러나면 그 사회는 오래지 않아 인민으로부터 배척된다. 지구상에 나타났던 전체국가나 독재국가는 모두 그런 과정을 거쳐 소멸되었다.◇기독교는 흔히 말하는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강건하기를”(요삼 1:2) 바라는, 소시민 개개인이 무병장수하고, 만사형통하며, 잘 먹고 잘 사는 ‘축복’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 복으로 세상을 의와 진리와 사랑이 넘치는 세상으로 바꾸는데 있다. 이것이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하나님의 나리이다. 이 얼마나 고귀하고 헌신적인 사상인가. 역사적 기독교는 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오늘까지 선교와 교육에 혼신을 다해 온 것이다. 그런 기독교를 기복주의 종교쯤으로 여기는 무지한 자들이 있다. 이들은 사실상 인류사회를 파멸로 이끌려는 ‘악령’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기독교의 기본 사명인 ‘말씀’과 ‘교육’과 ‘봉사’는 모두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바꾸려는데 있다. 인류사회를 위한 아름다운 헌신이다. 그럼에도 어떤 이들은 종종 이 아름다운 노력조차 부정한다. 기독교는 이 악령의 지배를 받는 세력과 싸우기 위해 세상에 있는 교회를 ‘전투하는 교회’라고 부른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모든 질서나 가치의 뒤에 신들의 세계가 있고 이들의 싸움은 질서들 사이의 싸움, 가치들 간의 싸움”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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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1-29
  • 가짜뉴스
    ◇오늘날 우리사회에는 ‘가짜뉴스’란 말이 횡행(橫行)한다. 아예 정권 차원에서 가짜뉴스 단속 논의까지 하고 있다. 정보 홍수 시대에 가짜뉴스는 어디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의도적이고 악의적일 때는 그 피해자가 개인이든, 조직이든, 국가든 회복하기 힘든 심각한 위험에 빠뜨리게 된다. 우리사회에서 가짜뉴스의 위험성을 극명히 보여준 사건은 이명박 정부를 공격하기 위해 퍼뜨린 미국산 소고기 광우병 사건이고, 박근혜 정부 시절 일어난 세월호와 관련된 허위보도들이다. 그 두 정부에서 가짜뉴스는 국정운영에 큰 차질을 가져오고 사회를 분열시켜 고스란히 국민들이 피해를 보았다. 그러므로 국민의 바른 판단을 흐리게 하는 가짜뉴스는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가짜뉴스는 우리 교계에도 난무한다. 그런데 다분히 의도성이 있는 종교집단에 대한 가짜뉴스는 그것이 가짜로 드러나도 처벌조차 하지 못한다. 대법원 판례에서 종교집단에 대한 ‘비판의 자유’를 가짜뉴스에 대한 처벌보다 앞세우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소위 이단연구가들의 주장을 뒷받침 하는 근거 자료들이 “신빙성이 없거나 부적절하다고 하더라도 이는 학문의 자유 및 비판의 자유에 의해 보호되어야 할 것이고, 그로 인하여 결론이 다소 잘못 도출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이를 위법하다고 판단할 수 없다”고 한다. 명백한 가짜뉴스로 인해 개인이나 집단의 명예가 심대히 훼손되었음에도 비판의 자유라는 대법원 판례가 면죄부를 주고있는 것이다. 2012년 한기총의 분열도 이들이 공급한 가짜뉴스에 그 원인이 있다.◇그런데 가짜뉴스는 구약성경의 예언자 세계에도 공급자들이 있었다. 성경에서 말하는 거짓 예언자들이 그들이다. 참 예언자들과 달리 거짓 예언자들은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의 구분은 첫째, 참 예언자는 비직업적이고, 거짓 예언자는 직업적이라는 점이다. 들째, 참 예언자는 재앙을 예언하지만, 거짓 예언자는 복지를 예언한다는 점이다. 셋째, 참 예언자는 다분히 고립적이지만, 거짓 예언자는 집단적 교권을 형성한다는 점이다. 넷째, 참 예언자는 자기가 ‘본 것’을 말하지만, 거짓 예언자는 자기의 '생각'을 말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거짓 예언자의 예언은 모두가 가짜뉴스인 셈이다.◇오늘날 한국교회 주변에도 직업적 이단연구가들, 또는 이단감별사들의 가짜뉴스에 시달리며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일반 사건 같으면 벌써 처벌을 받아도 몇 번씩은 받았을 것이지만, 그러나 이들은 허위사실을 유포하고도 종교비판의 자유에 의해 톡톡히 보호를 받는다. 그래서 개인도, 교단도 속는 일이 자주 벌어진다. 교계가 이들이 공급하는 가짜뉴스에 속지 않으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아래 있는 모든 사람은 우리의 형제요 자매라는 기독교의 기본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교파나 교단만 달라도 이단으로 여긴다. 본보는 창간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계에서 공급되는 가짜뉴스와 오래동안 싸워왔다.
    • 연지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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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1-16
  • 천주교와 기독교
    ◇중국과 한국에서는 로마 가톨릭교회(Roman Catholic Church)를 ‘천주교(天主敎)’라고 부른다. 그러면 천주교라는 말은 어떻게 생겨난 것인가? 중국 사람들은 다른 나라의 모든 말을 중국어로 번안해서 사용하는 것을 좋아한다. 처음에 중국에 전파된 기독교는 네스토리우스 교회였다. 네스토리우스는 시리아인으로서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 교구의 대감독이었다. 그는 초기 기독교의 성모 마리아에 대한 ‘데오토코스’(하나님의 어머니) 논쟁으로, 431년 에베소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몰려 쫓겨난 인물이다. 그를 따르던 주교들이 페르시아의 니시비스에 신학교와 교단본부를 세우고 동방선교를 시작해, 651년 당태종 정관 9년에 아라본 주교가 이끄는 페르시아 선교사들이 장안에 도착함으로써 중국에 기독교 선교가 시작되었다. 그들은 그 교회를 ‘경교’(景敎)라고 불렀다.◇경교는 성경과 교리서를 번역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아라가’(阿羅訶)라고 했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라한’(阿羅漢)이라 했다. 그리고 성령은 ‘정풍’(淨風)이라 불렀다. 그런데 몽골 원나라 시대를 지나고, 중국에서 기독교의 맥이 끊겼다가, 1584년 제수이트(Jesuit) 선교사들이 중국에 들어와 선교하기 시작했다. 제수이트는 중국의 문화전통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적응주의 선교를 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천’(天), ‘천주’(天主) 혹은 ‘상티’(上帝)라 불렀다. 그런데 제수이트보다 50년 후인 1637년에 도미니칸(Dominican) 선교사들과 1633년 프란치스코(Franciscan) 선교사들이 중국선교에 가담했다. 이들은 제수이트의 선교방법을 적응주의를 빙자한 영합주의라고 비판하여, 중국에서 조상제사 문제와 신명(神名)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이 논쟁의 쟁점은 세 가지로서, 교회가 ① “하나님을 천(天)이나 상제(上帝)라 할 수 있는가?” ② “공자에게 공경의 제사를 지낼 수 있는가?” ③ “죽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도 되는가?”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이 논쟁은 교황청에 제소되었고, 교황청은 1715년 교황 클레멘트 2세의 칙서를 통해 “하나님을 상제나 천이라 해서는 안된다. 반드시 천주(天主)라고 부르는 것만이 가능하다.” “공자에 대한 제사와 조상숭배는 안된다.” “이름을 쓰고 그 밑에 신위(神位)라고 쓸 수 없다.”고 선포했다. 그리하여 중국의 가톨릭교회는 조상제사가 금지되고, 신명도 ‘상제’(상티)에서 ‘천주’(티엔추)가 되었으며, 교회의 명칭도 ‘천주교’가 된 것이다. 한국의 천주교는 1784년에 출범했다. `◇이렇게 하여 한국에서 로만 가톨릭은 ‘천주교’로 정리가 되었으나, 후에 들어 온 프로테스탄트는 그 이름이 정리되지 않은 채 어떤 쪽은 ‘기독교’ 또는 ‘개혁교회’라고도 하고, 또 어떤 쪽은 ‘개신교’라고도 한다. 기독교(基督敎)는 중국에서 그리스도를 일컫는 기리사독(基利斯督)에서 온 것이지만, 개신교(改新敎)는 어디에서 온 것인지 알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신명도 어떤이는 ‘하나님’이라 하고, 또 어떤이는 ‘하느님’이라고도 한다. 100년이 훨씬 넘은 교회가 똑같은 신학과 신앙을 가지고도 그 집단의 명칭과 신명 하나 통일하지 못한채 혼돈상태로 방치해도 되는 것인가.
    • 연지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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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1-08
  • 교계분열 책임 누구에게 있나
    ◇처음부터 교파주의 교회로 자리매김한 한국기독교에는 수십 개의 교파와 또 그들 교파에서 분립한 수백 개의 교단이 있다. 이에 따라 자연히 교파 간, 또는 교단 간 연합을 위한 단체와 기관들이 생겨났다. 그 가운데 교단협의체인 연합단체도 여럿 있다. 대표적인 것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교회협, 1924년 창립),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1989년 창립), 한국기독교연합(한기연, 2012년 창립)이 있고, 최근에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 2018년 창립)이 새로 탄생했다. 그 외에도 한국기독교보수교단협의회(한기보협, 1978년 창립), 한국기독교교단협의회(교단협, 1985년 창립) 등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교단 간 연합과 일치를 목적으로 창립된 것이다. 그동안 이들 연합단체 중 ‘교회협’은 기독교의 진보를 대변하고, ‘한기총’은 보수를 대변해 왔다. 그런데 한기총이 2012년에 분열하면서 ‘한기연’(창립 당시는 ‘한교연’)이 창립되자 한국교회의 대사회적 영향력은 현저한 약화를 초래했다. 이때부터 한국기독교는 우리사회의 주류종교임에도 불구하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순전히 연합단체의 분열에 그 원인이 있다.◇300개도 넘는 교파와 교단으로 분열한 한국기독교가 대사회적인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하나된 연합단체의 역할은 필수적이다. 먼저 한국기독교의 최초의 연합단체로 출범한 교회협은 한국사회의 민주화와 인권운동, 노동운동, 통일운동, 복지 문제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 분야에 걸쳐 매우 지대한 공헌을 해왔다. 특히 늘 약자의 편에서 정의를 외친 교회협의 모습은 거대 권력에 억눌리기만 했던 서민들의 희망이었다. 교회협의 이런 역할은 성경이 제시하는 교회 본연의 임무이기도 하다. 반면 보수진영의 결집을 목적으로 탄생한 한기총은 그간 교회협 위주로 대변되던 한국교회의 모습을 새롭게 탈바꿈시켰다. 한국교회의 주류를 이루는 보수진영은 한기총을 통해 대대적으로 결집했고, 사회적 현안에 있어 보수진영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사회의 안정과 통합에 기여했다.◇이렇게 구성된 한국교회의 교회협과 한기총의 구도는 매우 안정적이었다. 진보와 보수로 대변된 양 단체는 그 정체성 탓에 서로가 굳이 함께 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적대시 하지도 않았다. 여기에 1년에 한번 부활절에는 모두 함께 모여 부활절연합예배를 드리며 한국교회의 하나된 힘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기총이 분열하면서 그 구도는 완전히 깨어지고 말았다. 그로인해 무엇보다 한국기독교를 상대해야 할 정부 당국을 혼란케 만들었다. 다른 종교는 종교전통별로 한 단체만 상대하면 되었지만, 기독교는 이제 진보측과 보수측 뿐 아니라, 또 다른 단체들도 상대해야 할 판이 된 것이다. 그래서 아예 외면해버리는 경우도 많다. ◇한국교회의 대사회적 신뢰를 이처럼 약화시킨 분열의 책임은 합동측과 통합측에 있다. 그럼에도 그 분열의 책임을 누구도 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한국기독교의 연합과 일치가 제자리를 찾으려면 통합측은 교회협에 매진하고, 합동측은 한기총에 합류하는 것이 옳다.
    • 연지골
    • 연지골
    2018-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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