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4(토)
 
우리 기독교인들의 가장 핵심적인 믿음의 내용은 우리 주 예수께서 마리아라는 처녀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하시고 탄생하셨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처녀의 몸에서 낳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그는 죄가 없으시고, 그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씻을 수가 있고, 하나님과 우리 죄인 사이의 온전한 중보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딤전 2:5-6). 만일에 예수께서 우리와 같은 보통 생육법으로 태어나셨다면 그도 우리와 같은 죄인이라서 죄인의 피가 죄인들을 깨끗하게 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예수께서 참 하나님이시오 참 사람이 아니라면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의 참 중보자도 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동정녀의 몸에서 낳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은 우리 신앙의 뿌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하여 보아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부를 것이다.”(7:14)라고 미리서 약속하셨다. 그리스도의 탄생 약 700여년 전의 일이었다.
그런데 일부 고대 근동 언어학자들은 히브리어 성경 본문에 사용된 처녀라고 번역하는 알마”(המלע)가 꼭 처녀라는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니고 결혼과 상관없이 처녀이든 아니든 간에 첫 아이를 낳기 전까지의 임신 가능한 젊은 여자를 지칭하는 말이라고 주장한다. 우가릿이나 아람의 동계어는 처녀가 아닌 젊은 여자에게 사용된다. 따라서 New English Translation, New Jerusalem Bible, Revised Standard Version(1952), JPS Tanakh 등은 이를 젊은 여자”(the young woman)라고 번역하고 있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 여자가 임신한다는 것은 과학적으로나 상식적으로 맞지 않기 때문에 현대의 이성주의적 정서를 고려하여 성경을 합리적으로 번역한 것이다.
알마”(המלע)라는 말은 젊은 남자”(young man)라는 뜻을 가진 에렘”(מלע)의 여성 형이다(삼상 17:56; 20:22). 따라서 본래 처녀라는 의미를 가진 말이 아니다. “처녀라는 말은 히브리어에서 일반적으로 베투라”(הלותב)를 사용한다. 이 어휘는 결혼을 아직 안했거나 결혼하기 위하여 약혼한 여자로서 아직까지 남자와 더불어 성관계를 갖지 않는 젊은 여성을 일컫는 말이다(22:16; 왕상 1:2; 31:13).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창세기 24장에는 아직 약혼도 하지 않는 리브가라는 한 소녀에 대하여 알마”(המלע)베투라”(הלותב)를 다 같이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창세기 24:16에서는 그 소녀는 외모가 매우 아름다우며,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베투라הלותב)였다.”라고 말하고, 24:43에서는 제가 우물곁에 서 있다가 물을 길으러 나오는 처녀(‘알마המלע)에게 물동이의 물을 조금 마시게 해 달라고 말하겠습니다.”라고 말한다. 이 같은 용례를 통해서 볼 때, 히브리어에서는 고대로부터 베투라” (הלותב)알마”(המלע)는 큰 차이 없이 혼용되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베투라”(הלותב) 의 처녀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남자를 알지(עדי) 못하는이라는 형용구를 첨가하고 있다. 남자를 알지 못한다는 말은 남자와 성관계를 갖지 않았다는 뜻이다. 아마도 이러한 이유 때문에 주전 2-3세기에 번역된 그리스어 칠십인역(LXX)에는 이사야서 7:14에 사용된 알마”(המלע)라는 말을 파르데노스”(παρθένος), 처녀”(virgin)로 번역하고 있고, 마태복음은 칠십인역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1:23). 따라서 우리가 이러한 성경 해석 전통을 따른다면 굳이 알마”(המלע)젊은 여자로 번역하여 성도들에게 많은 혼란을 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여기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어떠한 상황 속에서, 왜 동정녀 탄생에 대한 약속을 주셨는지에 대하여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사야 7장의 배경이 되는 유다 왕 아하스 때는 국제 정치가 긴박하데 돌아가서 전운이 감도는 때였다. 아시리아의 디글랏빌레셀 3세의 팽창 정책으로 큰 위협을 느낀 시리아(아람)의 르신은 북왕국의 베가와 더불어 시리아-에브라임의 군사동맹(Syro-Ephramite Federation)을 맺고 아시리아를 대항하려고 했다. 그러나 후방에 유다를 두고 아시리아를 대항하는 것은 작전상 불리하다고 생각되어 아람 왕 르신은 유다 왕 아하스에게 함께 아시리아를 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겁이 많은 아하스는 르신의 이러한 제안이 오히려 자기를 치기 위한 빌미를 삼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거절한다(7:2). 그러자 르신은 아하스를 공격하여 다윗 왕조를 멸망시키고 대신 그의 심복 다브엘을 새로운 남왕국의 왕으로, 다시 말하면 자기의 분봉왕으로 삼을 계획을 세운다. 아하스는 멸망에 이르는 막다른 골목에 몰리게 된 것이다. 이 가운데 아하스가 살 길은 아시리아의 원병을 청하는 길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아하슨는 성전과 궁전에 저축해둔 은금과 보물들을 가지고 아시리아로 가서 디글랏빌레셀의 봉신이 될 것을 자청하며 군사적 도움을 청한다.
이러한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보내어 아하스에게 이 르신의 작전이 절대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안심을 시키며, 하나님을 굳게 믿으라고 권한다. 믿기가 어렵거든 징조를 구하라고 하신다. 그러나 아하스는 겸손을 가장하여 징조 구하는 것을 거절했다. 아하스는 믿음이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다윗에게 그의 왕위를 영원토록 견고하게 보존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셨다(삼하 7:8-16). 그러나 아하스는 이 약속을 믿지 않았다. 오히려 아하스는 거센 바람 앞에 당장 꺼져버릴 것 같은 자기의 왕좌를 지키기 위하여 아시리아의 디글렛빌레셋을 의지하고, 그의 돈을 믿었다. 앗시리아의 원군을 기다리며, 하나님의 약속과 도움을 거절한 것이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직접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너희에게 징조를 주실 것이다. 보아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부를 것이다.”(7:14).
아하스는 자기의 왕위가 위협을 받자 아시리아의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왕위를 영원히 보존하실 것인데 그 증거가 바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르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결국 예수께서 처녀의 몸에서 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의미의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그의 백성을 위하여 대속적인 고난과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왕 중의 왕이 되셔서 다윗의 후손으로 영원히 그의 왕위를 이어받게 된 것이다.
처녀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불가능한 일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다윗에게 영원한 왕위를 주시겠다는 약속은 당장 불가능하게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베가와 르신의 대 유다 연합 작전을 무력화하여 다윗의 자손 아하스의 왕좌를 지켜주실 것이다. 그리고 다윗의 영원한 왕위를 이을 그리스도, 처녀의 몸에서 낳을 임마누엘을 구체적으로 약속하신다. 아하스는 디글렛 빌레셀의 원군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임마누엘의 오심을 기다렸어야 했
.
따라서 당대에 이 처녀가 누구를 지칭하느냐하는 문제를 두고 토론을 벌리는 것은 의미가 없다. 여호와께서는 다윗에게 약속하신대로 그의 후손 아하스의 왕위를 아람과 베가의 군사 동맹으로부터 지키실 것이고, 더 나아가서 다윗의 왕위를 영원토록 보존하기 위하여 처녀의 몸에서 임마누엘을 낳게 하신다는 보다 구체적인 약속을 주시는 것이 본문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는 하루가 천년이요 천년이 하루와 같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에게는 감내하기 힘든 긴 기다림의 시간일지라도 하나님께는 한 순간의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기독교는 언약의 종교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을 믿고 사는 자이며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성실하게 지키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위기에 닥칠 때 아하스 처럼 권세 있고 돈 있는 사람을 의지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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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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