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4(토)
 
그들의 목표는 도덕과 신앙의 개혁… 중세 종교개혁에 지대한 영향 미쳐



중세의 분리파 카타리파
중세의 분리파 운동은 제후들과 성직자들의 탐욕과 세속성에 반기를 든 대중들로부터 나온 것이다. 이들은 대체로 로마교회로부터 이단으로 규정되어 박해를 받았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목표는 성직자들의 세속성과 교만, 교회예배의 형식주의, 교황제도에 깔린 세속적 야심들을 타파하고자 한데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언제나 사제들의 교만과 탐욕, 부도덕성을 지적했다.
이러한 불만의 저변에는 대중의 영적 배고픔이 자리잡고 있었다. 교회가 가르치지 않는 복음에 대한 갈망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성직자와 교회의 의례(儀禮)를 넘어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직접 나아가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결국은 로마교회 사제들의 지도와 감독에서 떠나버렸다. 그들의 목표는 교회가 지배하는 시민사회의 도덕과 신앙의 개혁이었다.
그리하여 11세기 후반에 들어서면 밀라노, 오르레앙, 스트라스부르, 괼른, 마인츠에서 프랑스 남부 툴루즈에 이르기까지 분리주의자들이 수없이 나타났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유아세례의 정당성을 부정했고, 십자가를 비롯한 가톨릭교회가 숭배하는 여러 가지 상(像)들을 우상숭배 행위로 간주했다. 그러므로 당연히 기성교회(로마파)는 그들을 비난할 수 밖에 없었다.
기성교회는 그들을 향해 주님의 포도원에 몰래 들어와 “포도원을 망쳐놓는 솔로몬의 여우들”, “저주의 살로 타격을 가하는 전갈”. “해충을 지닌 채 땅에 숨는 요엘의 메뚜기떼”, “바빌론의 금잔에 담긴 뱀의 독을 내미는 귀신들”이라는 비난을 퍼부었다. 그들 중에 대표적인 분파는 카타리파였다.
이에 대해 카타리파는 로마교회는 계시록에 등장하는 여자 곧 음녀이며, 교황은 적그리스도라고 응수했다.

1. 카타리파는 무엇인가?
중세의 분리파 가운데 가장 널리 확산된 분파는 카타리파(Cathari)이다. 카타리는 ‘순수하다’는 뜻의 헬라어 카타로스(catharos)에서 유래했다. 카타리파는 그 이름이 다양하게 불렸다. 그들의 중심지가 프랑스 남부의 알비(Allbi) 시였으므로 ‘알비파’(Allbigensis)라고도 불렸고, 또 유럽 동부에서는 불가리파(Bulgari), 부가레스파(Bugares), 부그레스파(Bugres)로도 불렸다.
그 밖에도 프랑스에서는 직조공과 노동자 계층 사람들이 많이 참여했기 때문에 ‘테사랑파’(Tessarants)로 불리거나, ‘파울루스파’ ‘푸블리카니파’ ‘포플리카니파’라고도 했다.
카타리파는 1167년에 프랑스 남부 생 펠릭스 드 카라망에서 독자적 교회공의회를 소집할 정도로 막강한 세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 공의회에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니케타스가 참석했다. 12세기 말경에는 거의 1천 개의 도시에 교회를 설립하고 그 수가 약 4백만명에 이르렀다. 그들은 여러 도시에서 카타리파 소년들과 소녀들을 가르칠 학교도 운영했다. 그러나 카타리파는 이원론적 교리를 갖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2. 카타리파의 교회론
카타리파는 두 가지 교회가 있다고 주장했다. 하나는 악하고, 다른 하나는 의롭다. 그들은 주님께서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고 한대로 기성교회(로마파)는 참 교회가 아님이 입증되었다. 참 교회는 다른 교회를 박해하지 않고 오히려 박해를 견딘다. 로마교회는 다스리는 자리에 앉아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있다. 참 교회는 먼저 가르치는 일에 힘쓴다. 그러나 로마교회는 세례를 앞세운다. 참 교회는 고관들과 고위성직자들과 추기경들과 대부제들과 수사들을 두지 않는다.
자신들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교훈에 따라 안수를 받고 고해를 행한 의인들의 교회이며, 이 교회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성경을 많이 사용했다. 성경의 기적들을 영적으로 해석했고, 비유들을 알레고리 방식으로 해석했다. 예를들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은 아담이다. 그의 영혼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하늘에서 땅에 내려와 이 낮은 세속의 강도들 사이에 떨어졌다. 그리고 제사장과 레위인은 구약을 대표하는 멜기세덱과 아론이다. 구약의 율법으로는 그를 도울 수 없었으나, 참 교회인 자신들이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강도 만난 자를 도울 수 있다고 해석했다.
카타리파는 교회를 ‘완전한 자들’과 ‘신자들’로 구분했다. 완전한 자들은 하나님께 위령 안수례(慰靈按手禮, consolamentum) 를 받고 그리스도에게 묶인 자로서 선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불렸고, 신자들은 교리문답자들에 해당되어 앞으로 위령 안수례에 참여할 준비 중에 있는 자이다. 위령 안수례는 로마교회의 칠성사를 배격하는 의미에서 행해졌는데, 세례보다 더 광범위한 영적 의미를 갖는다.

3. 카타리파의 신행(信行)
카타리파는 육식은 고기뿐 아니라 달걀과 치즈까지 금하고, 생선은 먹도록 허용했다. 생선이 허용된 것은 주께서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신 것과 부활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생선을 주어 먹게 하셨기 때문이다.
또 카타리파는 사형을 반대했다. 이는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 12:19)라는 구절을 근거로 제시했다. 그래서 그들은 군대를 기피하고, 교회가 전쟁을 장려하고 군대를 모집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맹세를 금했다.
카타리파는 사제의 복장과 교회의 꾸민 제단, 십자가상을 우상숭배로 보았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수치와 죽음에 쓰인 도구였으므로 교회가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았다. 십자가보다는 창이나 가시가 신앙의 상징으로 더 적합하다고 보았다. 그들은 또 로마교회의 연옥과 면죄부 교리를 부정했다.
카타리파 교인들은 이단재판소의 죽음 앞에서도 끝까지 소신을 지켰다. 슈타인벨트의 에버빈이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힘겨운 방랑생활을 하고 있다. 늑대 떼에 에워싸인 양들처럼 이 도시 저 도시를 피해 다닌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이 거룩하고 엄숙한 것이기 때문에 사도들과 순교자들처럼 박해를 당한다. 기도와 금욕과 수고가 따르는 일이긴 하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에 모든 일이 쉽다.”
카타리파는 이원론적 신학사상으로 역사적 기독교의 보편성에 오류를 남기긴 했지만, 당시 교회가 제시한 것과 다른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영성에 가까이 가려고 한 노력은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4. 그외 분리파들과 이단 탄압
중세에는 카타리파 이외에도 수많은 분리파가 있었다. 이들은 로마교회에 의해서 모두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1238년에 프리드리히 2세가 공포한 법률에는 카타리파, 파타리아파, 베긴파, 아르놀드파, 발도파를 비롯하여 19개의 이단 분파가 들어 있었다. 이 목록에 들어있지 않은 것도 있었다. 이탈리아 북부의 겸손파, 스트라스부르의 오르틀리브파, 벨기에의 사도파 , 또 파사기니파, 요세피니파, 아르놀드파 등이 있었다.
어떤 문헌에는 72개, 혹은 130개에 이르는 분리파 집단이 거론된다. 그들은 모두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리와 의식과 조직을 반대했다. 그들은 유아세례의 정당성을 부정했고, 십자가와 성상 등의 숭배 행위를 우상 숭배로 간주했으며, 화체설과 미사 교리를 부정했다.
이들 분리파를 탄압하려는 세속 정부가 제정한 이단금지법은 교회의 이단에 대한 법률과 일치했다. 이단은 제국에서 추방하거나 화형에 처했다. 또 이단의 재산은 1232년에 공포된 법률에 의해 몰수했다.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1224년에 이들 분리파에 화형을 언도하거나, 판사의 재량에 따라 그들의 혀를 뽑도록 했고, 1231년 시칠리아 헌법은 교회가 이단으로 판결한 자들은 군중이 보는 앞에서 산 채로 불태우도록 규정했으며, 같은 해 로마에서는 이단은 교회 법정이 판결을 내린지 8일 내에 사형을 집행토록 했고, 베네치아는 1249년부터 이단들을 화형에 처했으며, 잉글랜드는 1401년에 화형법이 통과되었다. 독일에서는 심지어 이단을 화형시키지 않는 군주는 이단으로 취급하도록 규정했다.
그리고 종교재판소는 1228년 프랑스 루이 9세가 제일 먼저 법령으로 승인한 후 로마 가톨릭교회가 영향을 미치는 모든 나라에 설립됐다. 종교재판관들은 대체로 사제가 아니라, 도미니쿠스회 수사들이 맡았다. 이들은 이단 혐의가 있는 사제들에게서도 성직록을 박탈하고, 세속 권력의 지원을 받아 이단을 진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또 그들이 내린 판결에 대해서는 교황청에 항소하는 것 외에는 재심을 청구할 길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 분리파들의 주장은 16세기 종교개혁을 통해 많은 부분이 프로테스탄트 교회로 들어왔다. 모든 개혁세력은 십자가 숭배와 마리아와 성자 및 화상 숭배를 부정했으며, 루터파와 칼빈파는 미사와 화체설을 버렸고, 사제와 주교와 추기경과 교황으로 이어지는 교회 성직위계제도를 버렸다. 또 재세례파와 침례파는 유아세례를 버렸다. 이것들은 모두 중세의 분리파들이 주장하다가 이단으로 몰린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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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그리스도교 분파 이야기/강 춘 오 목사(발행인)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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