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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절대권 거부를 위한 절대적 교훈-임 영 천 목사
    2017년 올해는 종교개혁(1517) 500주년의 해이다. 마르틴 루터가 본격적인 종교개혁의 선두주자 역할을 맡았다는 관점에서 보아 그러하다. 그가 교회개혁을 위해 면죄부 반박 95개 신조를 독일 비텐베르크 성곽교회 정문에 1517년(10월31일) 공표했었기 때문이다. 이것의 파급효과는 예상외로 컸고 루터가 의도했건 안 했건 간에 그는 이미 종교개혁 운동의 소용돌이에 선두주자로 휘말리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종교개혁 운동은 장 칼뱅과 같은 프랑스 개혁가가 뒤따라 이어가면서 유럽 사회와 교회(종교계)를 완전히 새롭게 변화시켜 놓았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상징적인 두 인물 루터와 칼뱅에게도 성취 못지않게 실패의 면도 있었던 것으로 지적되고 있어서 여기서는 타산지석의 교훈이란 의미에서 그 면을 강조적으로 다루어보고, 마지막으로 현 시국과도 그 점을 연관시켜 생각해 보고자 한다. 먼저 이 ‘실패’의 면을 ‘생명 존중’이란 사항과 관련시켜 접근함이 좋으리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덕목 가운데 이웃의 인권을 존중하고 특히 그 생명을 존중하는 일은 무엇보다 훌륭한 것으로 찬양돼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외로 그에 반하는 일이 일어났다고 하면 그 점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자연히 뒤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루터(1483-1546)는 종교개혁의 총아로 우뚝 서게 되었을 때, 남은 한 가지 문제 때문에 고충을 겪고 있었다. 그것은 얼마 동안 독일농민전쟁을 주도해온 민중들과 함께해 왔던 그가 더 이상 그들과만 얽혀 가지고선 개혁의 완성(?) 단계에 도달할 수 없다는 판단과 관련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생명의 은인이기도 했던 농민들을 저버리기로 하고, 그동안 서로 소원(疎遠)했던 제후/영주들과 끝내 손을 잡기로 한 것이다. 그 결과 힘을 얻게 된 영주들이 농민들을 적극 공격함으로써 많게는 12만 명의 농민들이 도륙되고 만 것이다. 그런데 제후/영주들과 손을 잡았을 때 농민들이 몰살되리란 것을 루터교의 수장이 될 그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까? 칼뱅(1509-1564)은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개혁운동을 하면서 여러 대적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중의 한 사람이 세르베투스(1511-1553)란 박식하고 논쟁적인 인물이었다. 의사이기도 했던 그는 신학적 견해 차이 때문에 칼뱅과 충돌하게 되었다. 칼뱅은 그를 만나 담판을 지으려 했으나 기회가 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그의 교회에 설교를 들으러 온 세르베투스를 발견하고 칼뱅은 수하를 시켜 그를 체포하였다. 자신과 견해를 달리하는 그를 회유하다 실패하자 종교재판에 회부해 이단으로 화형선고를 내렸고 그는 1553년(10월27일) 불에 타 숨졌다. 그러나 이런 식의 처형 방식은 개혁가들이 지금껏 저항해온, 중세 가톨릭 교황들의 소위 이단자들에 대한 처형방식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으니 큰 문젯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세르베투스 처형 사건은 그러나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였다. 칼뱅이 제네바에 머무르는 동안 1542년부터 1546년까지의 5년 어간에 그에 의해 무려 57명의 자유사상가 또는 개혁가들이 이단 명의로 처형되었다 하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후에 인문주의자 카스텔리오(1515~1563)가 칼빈의 세르베투스 처형에 항의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끝내는 그 역시 이단으로 몰려 칼뱅의 종교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불행이라 해야할지 다행이라 해야할지 재판 기간 중에 운명하고 말아 처참한 꼴만은 면한 셈이 되었다. 루터가 독일농민들을 제후/영주의 손에 맡기려 했던 즈음 그는 “살인과 약탈을 일삼는 농민폭도들을 치라”는, 절대권 의지를 드러낸 팸플릿을 내어 제후들을 부추겼다. 이로 인해 그 팸플릿은 신학자 리처드 니버에 의해 “기독교적인 내용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무가치한 문서라는 악평을 듣게까지 된 것이다. 칼뱅은 평소 세르베투스에 대해 유감을 품고 있었는데, 그는 개혁의 동료 파렐에게 “세르베투스가 만약 제네바에 오기만 하면, 나는 내가 권력을 갖고 있는 한 그를 결코 살려 보내지 않을 것이다.”고 노골적으로 천명한 바 있었다. 세계적인 전기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에 의해 씌어진, 칼뱅에 저항한 카스텔리오의 전기물이 그때의 사정을 잘 기술함으로써 절대권자로 군림하려 했던 칼뱅의 사람됨에 대해 많은 이들이 그 진면목을 알게 해주었다. 그렇다면 이들(루터와 칼뱅)이 왜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그 답은, 그들이 권력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결국 절대권력은 그것이 교권이든 속권이든 똑같다는 점을 위의 사례는 잘 말해주고 있다. 나약한 인간에게 그것의 유혹은 너무도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절대권력을 추구하게 되면 중세의 로마 가톨릭, 또는 그에 저항했던 루터와 칼뱅에게서도 보듯이 부정적인 그늘(부패상)을 필히 남기게 되는 법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탄핵 정국도 그 사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그러므로 국민이나 위정자나, 또는 평신도나 성직자나 “절대권력은 절대로 부패한다”는 교훈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바벨탑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신 주님의 절대적 교훈이기 때문이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7-02-24
  • 한국교회 연합운동의 로드맵/이 효 상 목사
    종교개혁500주년을 맞이하는 한국교회는 지난 세기 양적성장에도 불구하고 연합하지 못하고 분열하는 영적미숙은 여전히 우리 교회의 개혁과제로 남아있다. 교파와 교단의 경쟁주의를 극복하고 일치와 공동창조로 나아가는 것이 한국교회가 도약하는 방편이자 한국교회의 영적부흥의 지름길이며 기초가 될 것이다. 이런 연합운동의 시작이 교단간의 ‘연합’과 ‘협치’이다. 최근 연합기관 통합논의에 ‘교단장협의회’를 중심으로 주요교단이 참여하며 출범한 ‘한교총’은 연합기관의 통합을 이뤄낼 것인가 하는 물음을 준다. 명분에는 전적으로 공감하면서도 완성된 통합의 그림으로 나타날 것인가하는 것과 그 이후 나타날 후유증에 우려가 참 많다. 엄밀히 말하자면 ‘한국교회연합기관’은 개교회가 하지 못하는 일들을 힘을 모아 대신하기위해 그 권한을 위임받은 기관이다. 그런데 연합기관이 그 위임받은 힘으로 해야 할 일보다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더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면 한국교회의 외면을 받기 십상이다. 그런 예가 정치권력 지향하거나 또는 자리를 만들고 자리를 차지하는 일에 관심을 전력투구하는 일이다.한국교회의 교단을 대표적이라는 연합기구들이 사회적 문제에 책임있는 기관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 치열하게 피와 땀을 흘려야할 상황이다. 한국교회의 연합운동은 대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개체로서, 안티세력으로부터 교회를 방어하는 영적 전진기지로서 그 역할이 막중하다. 그러나 그 역할에 맞는 그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는 평이다. 사실 현재 한국교회는 연합운동에 대한 패러다임쉬프트가 이루어져야 한다. ‘연합운동’이 기존의 교단중심의 연합기관이 연합기관이라는 독선적 사고에 매여 있다보니 이 연합기관이라는 곳의 분열로 인하여 지난 2006년 이후 한국교회는 대사회적, 대정부적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다. 그리고 사회적 영향력도 오히려 실종되고 말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난립한 교단 연합기관들의 통합으로의 구조조정이 시급하다. 혀지 진행되는 통합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들이 가진 철밥통을 내어 놓는 것만큼 어렵다. 그런 점에서 연합기관 지도자들이 얼마나 자신을 희생하고 양보하면서 에큐메니컬정신을 구현하며 하나되느냐 하는 시험대에 서 있다. 그래서 이제 건강한 한국교회의 미래를 준비하며 다양한 연합기관을 함께 키워내는 ‘삼겹줄연합’이 필요한 시점이다. ‘삼겹줄연합론’의 핵심은 연합기관들을 교단중심과 지역중심, 그리고 NGO를 포함하는 교회중심 연합기관들로 축을 나누고 벨트화해야 한다. 교단중심, 지역중심, 교회중심을 축으로 하는 삼겹줄처럼 튼튼한 연대를 형성하여 한국교회를 방어하고 보호하는 일들을 해나가자는 것이다. 이는 마치 고기를 낚는 그물과 같은 망을 촘촘히 형성하자는 말이다. 지금처럼 허송해서는 미래를 열어갈 수 없다. 교단연합기관이나 지역연합기관 , 그리고 교회연합기관 등이 유기적인 협력강화를 통한 연합운동 활성화를 심층적으로 모색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사실 교단의 연합기관이 대변하지 못하는 지역적 현실적인 문제에 대처하는 방안으로 한국교회를 방어하는 차원에서 제2의 방어벽이자 벨트로 지역교회중심의 연합기관이 그 역할을 하게 해야 한다. 기존 광역시나 시, 군, 구별 ‘기독교연합회’ 들이 이미 조직되어 수십년동안 활동하고 있지만 이를 하나로 묶어내야 한국교회가 건강하게 살아날 수 있게 해야 한다. 더 나아가 NGO단체를 포함한 개 교회연합기관이 제3의 방어벽으로 연합운동의 벨트를 형성해야 할 것이다. 이건 순전히 자생적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 교단중심의 정치적 연합이나 지역적 연합운동에 나서지 않는 40~50대 젊은 목회자들이 독립교단이나 독립교회로 옮겨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교회연합기관이 각 영역에서 전문화된 단체들과의 유대강화를 통해 전문영역을 더욱 활성화 해 나가야 한다. 한국교회는 연합운동의 새로운 축을 만들어내야 한다. 한국교회는 개인기는 강점이지만 팀웍이 약하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다. 우리민족 전체로나 한국교회가 당면한 이런 현실적 모순들을 과감히 개혁하고 새로운 역사,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출해 나가려면 이 팀웍의 문제, 옳은 일을 함께 이루어 나가는 협치와 역동성을 길러야 한다. 개개인으로는 뜻이 있으되 그 뜻이 합쳐져 힘이 되고 조직이 되지 못하므로 광야의 공허한 울림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지금 ‘개혁정신’을 되새기며 한국교회는 잘못된 현실을 바로 잡기위해서는 한국교회의 ‘삼겹줄연합론’으로 새로운 역동성을 회복하기를 바란다. 지금은 민족과 역사를 개혁하는 일에 자신이 가진 것을 바칠 수 있는 리더와 리더십이 필요하다. 2017년에는 ‘삼겹줄연합운동’이라는 새로운 그림으로 한국교회연합운동의 지도를 함께 그려보자.
    • 연지골
    • 토요시평
    2017-02-10
  • 한국교회와 한민족/홍 성 표 목사
    한국에 상륙한 개신교 원년을 1876년 2월 27일 조일수호조약으로 보는 이해도 있고, 민경배교수는 1884년으로 보기도 한다. 한국개신교의 특징으로는 선교사가 한국 땅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한글 말 성서가 번역이 되어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져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선교사로 하여금 교회가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성령의 역사, 그리고 한국 민중의 주체적인 믿음의 실천과 행동으로 한국교회의 선교는 시작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동안 왕과 궁중을 중심으로 한 지배자들의 역사에서 이제는 역사의 변두리에 살던 민중이 역사의 주체가 되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해 가는 역사의 주체인 민중이 역사중심에 서게 되는 시작을 알리게 된 것이다. 물론 열강과 일제의 침탈이 둘러싸고 있는 암흑과 어둠이 한반도의 운명을 도마에 올려놓으려는 상황이 전개되고는 있었지만 하나님은 분명 한반도에 새로운 역사의 씨앗을 뿌리고 있었음이 분명하였다. 그리고 일제의 병탄이 한반도를 깊은 지하로 몰아넣는 죽음의 긴 세월이 있었고, 그 죽음의 터널을 빠져나오자마자 다시 미소의 냉전의 산물인 민족분단과 이후에 세계적 민족전쟁을 겪어야 했다.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71여 년의 분단과 세계적 민족전쟁을 겪으며 북은 북대로, 남은 남쪽대로 살아오는 동안 그 깊은 고난과 고통을 겪어내며 하늘의 섭리를 향하여 울부짖고 몸부림치며 한 많은 시간들을 이겨내 오고 있다. 근자에 벌어진 박근혜와 최순실게이트를 통한 국기문란과 국정농단으로 대한민국은 방향성을 상실한 채 존재의 의미가 혼돈에 묻히고 있다. 오늘의 대한민국의 현주소는 여전히 남북으로 갈라 서 있고, 역사적으로는 친일세력의 잔재들이 민족의 기상을 흐려놓고 있으며, 친일에서 이제는 친미의 신 식민을 살고 있다. 해방공간에서의 미소의 냉전의 산물인 좌우 이념의 분단 이데올로기를 정권유지의 방패와 지배이데올로기로 삼고 여전히 민족의 희망과 미래를 짓밟고 있다. 이러한 거짓과 진실의 혼돈 속에서‘촛불혁명’ 그나마 새 역사를 여는 시작을 알리고 있다. 이것은 정치의 지도자나 종교지도자가 아니라 바로 130 여 년 전에 살아 역사의 변두리로부터 역사의 중심과 주체로서 있게 된 민중(사실은 모든 역사를 떠받치고 살아 온)이 있는 것이다. 트럼프를 통한 미국으로부터 세계는 요동치고 있다. ‘자국우선주의’의 이익을 주장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역사는 함께와 더불어의 역사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개인의 유익을 추구하는 자기 실존의 역사가 된지 오래이다. 보이지 않는 신을 주장하며, 그 이름으로 민중을 협박하고 속이며, 착취하는 종교라는 이름의 거짓과 위선이 우리의 희망을 더욱더 어둡게 하고 있다. 믿어야 하는데 믿을 수 없는 현실의 역사를 다가오는 미래의 희망으로 채워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희망을 쉽게 노래할 수 없다. 한국교회는 교회대로, 세속의 역사는 역사 대로 분명히 문명의 파괴와 새 문명의 물결이 밀려오고 그 파고는 아주 거칠고 높게 치고 있다. 과연 한국교회는 한 민족의 미래를 담보할 수 있는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 대통령의 탄핵과 대선이 앞에 놓이고 진정한 혁명과 개혁 세력 앞에 거짓된 세력들이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진실과 거짓을 분별하여 말해야 되고 ‘예와 아니오’를 확실히 말해야 한다. 설령 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내 고통이 역사적 예수의 처형에 임하는 고통이 주어진다 하더라도 교회가 그래야만 한민족의 미래와 희망을 담아낼 수 있다. 십자가는 무늬만의 십자가도 아니고 부활은 흉내만 내는 부활이 아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은 모든 어둠과 모든 죽음의 세력들을 몰아내고 마침내 어둠을 이기는 영원한 생명의 빛으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이 한 해에 한국교회는 불의한 권력과 자본으로부터의 관계를 단호히 끊고 생명의 능력으로 새로이 태어나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개혁과 혁명의 길이 된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7-02-03
  • 기독교 1등 국가-강 경 신 목사
    대한민국의 기독교(개신교)가 1등 종교가 되었다. 작년 12월 통계청에서 발표한 종교인구 조사결과에 의하면 기독교가 불교를 앞질러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신도수를 보유하게 되었다. 불교와 천주교 등 타 종교들이 감소하는 가운데서, 유독 기독교만이 증가했다는 발표가 의아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다. 특히 교회현장에서 느끼는 체감지수와 너무도 다른 결과에 많은 목회자들은 어리둥절하다. 하지만, 이번 조사발표에서 한 가지는 분명하다. 대한민국의 종교지형이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우리 사회가 종교적 다원주의사회로 접어 든 것이다. 무엇보다도 종교인구에 비해 무종교인구의 비율이 크게 증가했다는 점은 세계적인 현상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다.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우리 기독교가 감소내지 정체현상에서 증가세로 돌아섰을까? 나름대로의 다양한 분석과 견해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교인수의 증가는 대형교회와 이단교회의 부흥과 맞물려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는 대형교회들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게 되었다. 이전에 없었던 초대형교회들이 그 규모와 교세를 과시하고 있다. 적어도 개교회적인 차원에서 교인수로만 따진다면, ‘대한민국 1등이 세계 1등’이다. 아니 1위부터 10위까지 쭉 줄을 세워도 대한민국교회들이 거의 다 차지한다. 실로 대단하다. 그런데도 대형교회들의 교세확장과 부흥열기는 식지 않고 뜨겁다. 마찬가지로 이단교회들도 이에 뒤질세라 교세확장에 가일층 열을 올리고 있다. 그런 와중에 한국교회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중소형 교회들은 더욱 위축되고 있다. 부흥을 위해 합심하여 기도하고 노력하지만 교회의 자리는 갈수록 비어간다. 교회는 냉냉하고 좀체 열기가 달아오르지 않는다. 기독교가 1등 종교가 된 시대에 대부분의 목회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주눅이 들고 있다. 왜 그럴까? 왜 그리 당당하지 못할까? 왜 자신있게 “우리를 보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일까? 올해는 종교개혁 5백주년의 해이다. 역사학자들은 서양사에서 중세를 ‘암흑기’라고 말한다. 이는 단순히 종교적 암흑기가 아니다. 말 그대로 역사의 암흑기이다. 그런데 암흑의 중심에 세상의 빛인 교회가 있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중세시대 서구기독교는 찬란했다. 위엄과 권위와 권력과 세상의 모든 것을 가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대표적인 실례가 ‘카노사의 굴욕’이라고 일컫는 사건이다. 신성로마제국시대 황제 하인리히 4세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와의 권력싸움은 가히 점입가경이었다. 그러다가 황제 하인리히가 자신을 파문하는 교황의 최후통첩에 굴복하여 북이탈리아 카노사 성에 있는 교황을 직접 찾아가게 된다. 황제는 성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추운 겨울 눈보라 속에서 맨발로 사흘 동안이나 서서 용서를 빌었다. 그리하여 교황이 최고의 권력과 지위를 가지고,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 이후 16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나기까지 중세는 그야말로 긴역사의 암흑기였다.그렇다면 종교개혁 5백년 주년을 맞는 대한민국 교회의 현실은 어떠한가? 오늘날 교회는 세상사람들에게 욕을 먹고 있다. 사회로부터 온갖 비난을 받고 있다. 그런데도 교회지도자들은 입으로는 ‘섬김’과 ‘낮아짐’을 말하고, 말로는 ‘연합’과 일치‘를 이구동성으로 외치지만, 여전히 합종연횡하며 자리다툼에 연연해하고 있다. 이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자타가 공인하는 ’큰 목사‘요, ’능력의 종‘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한국교회의 부흥을 주도한 큰 인물들이다. 한국기독교가 1등 종교가 되게 한 장본인들이다. 교회부흥의 수고에 대한 공로장이라도 주어야 될 만한 분들이다. 그래서 우리네 보통 목회자들은 감히 입을 열지 못한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고, 차라리 침묵이 말보다 낫다고 묵언한다. 하지만 은밀한 골방에서 기도하며 조용히 묻고 또 묻는다. “우리나라가 기독교 1등 국가가 되어 하나님이 기뻐하십니까?” 하나님은 묵묵하시다. 하지만, 왠지 이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세상이 어지럽고, 지도자는 썩었고, 국민이 도탄에 빠지고 사회가 온통 불의가 만연한데, 기독교 1등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지금도 교회지도자들이란 사람들이 권력의 주변에 서성거리며, 권력자의 대변자가 되고 불의한 정권의 옹호자가 되어 자기의 기준과 잣대로 의로우신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매도하고 있는데, 왜 하나님이 기뻐하시겠는가? 기독교 1등 국가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는 아니다. 먼 훗날 기독교 1등 시대가 대한민국 역사의 암흑기라고 평가받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정신을 차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는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교인은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무엇보다도 교회지도자들은 제 자리로 돌아가서 ‘코람 데오’하여야 한다. 그래서 교회가 세상의 어두움을 밝히는 빛이 되어야 한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7-01-24
  • 블랙리스트와 블랙 정치 / 임 영 천 목사
    이른바 용띠 출생(1940년생)인 필자는 1970년대에 아직은 혈기 방종한 30대였었다. 당시 한 지방대학의 교수직에 있었던 나는 당시의 사회·정치적 분위기가 너무 경직되어 있어서 아마도 그 불편한 심기를 강의 도중에 은연중(아니 자주?) 토로했었던 것 같다. 결국 77년에 나는 긴급조치9호 경합범으로 구속되었고 3심의 재판과정을 거쳐 실형을 언도받아 실제로 2년 4개월의 영어(囹圄) 생활도 하게 되었다.1979년 김재규 주도의 10·26 사태가 터져 긴급조치 9호법이 폐지되면서 나는 그해 말 감옥에서 출소하였고, 1980년 2월말 대통령 특별사면을 받아 복권이 됨으로써 3월초에 옛 대학으로 복직까지 하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복직 교수의 근무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복직 후 2개월 반이 지난, 5월 18일 일어난 광주 민중항쟁(민주화운동)의 여파로 결국 대학교수직에서 다시 물러나야 했다. 그때 전국적으로 나 말고도 80여 명의 교수들이 함께 교수직에서 물러나야 했었다. 그때 물러난 교수들은 나처럼 70년대에 해직되었다가 80년 3월에 복직한 인사들이 대부분이었다고 알려졌다. 시쳇말과 연관시켜 표현해 보자면, 70년대에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던 교수들은 80년대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그 처지(신분)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요즘 블랙리스트 문제가 커다란 사회·정치적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블랙리스트 4인방이란 말도 언론에 자주 오르내리는 편이다. 지금 특검에서는 블랙리스트 작성의 실제 책임자가 누구이며, 그로 인해 피해를 보게 된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그 피해 실상이 어느 정도인지에 대하여 사실(査實)하느라고 동분서주하고 있는 모습이다. 특검이 그 사실의 결과를 명쾌하게 발표할 날을 우리는 기대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이 시점에서 다음의 문제에 대하여 관심이 더 기울어지고 있는 편이다. 우리 정부가 주도해서 요즘 크게 지탄받고 있는 이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1만여 명 안팎의 문화예술계 인사들을 압박해 들어갔다고 한다면 현 정부의 그 고위 인사들은 ‘블랙(暗黑) 정치’에 앞장선 인사들로 평가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자기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누구를 암흑인사(블랙리스트)로 특별히 지목해 해(害)를 끼치는 일은 엄연한 반헌법적, 반인권적 범죄행위가 아닐 수 없다. 어떤 식으로든 암흑 정치에 체질화된 인사가 아니고서는 이런 만행에 앞장설 수가 없는 법이란 말이다. 그런데 나는 이런 야만적인 행위가 박근혜 정부에 들어와서 극성을 부리고 있다는 사실을 주의 깊게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블랙리스트는 현 정부에 들어와서 다시 살아난 일종의 긴급조치법이라고 볼 수 있겠다. 70년대의 긴급조치법들(1·4·9호들)은 다른 말로 표현해 당시의 블랙리스트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며, 오늘날의 블랙리스트는 70년대식 긴급조치법의 현대판이라고 표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70년대의 긴급조치와 오늘날의 블랙리스트는 그것들이 어느 면 살생부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면에서 닮아 있고, 또 실제적으로도 제왕적 통치자 부녀(父女)가 바톤을 서로 주고받아온 처지란 면에서도 그러하다고 보는 게 무리하지 않을 것 같다. 앞으로 시니어 박 대통령과 주니어 박 대통령으로 편의적으로 나누어 양인(兩人)을 구별해 보기로 하겠다(여성에겐 ‘주니어’란 식의 표현이 맞지 않다고 지적해도 괘념하지 않기로 한다). 최근 주니어 박 대통령은 부친(시니어) 박 대통령에 지나치게 매달리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박정희 기념관을 사비(私費)도 아닌 건립비 200억을 들여 건립한 데서 그 면이 엿보인다. 국정 역사교과서를 통하여 부친의 업적을 지나치게 내세우려 하는 데서도 그 점이 훤히 엿보이지 않는가? 교과서에 혁명 공약의 어떤 부분은 완전히 빼버리고 다른 구절을 새로 만들어 넣었다는 말도 들리는데, 그러면 이때는 “나는 그런 바 없다. 교과서 편찬자들이 한 일일 뿐이다.”라고 변명해 버리기만 하면 끝날 일일까? 이런 무리가 따르다 보니 시니어 박 대통령 때처럼 현대판 긴급조치라 할 블랙리스트가 등장하게 되는 법이다. 강압적인 방법이 아니고서는 비판자들의 입을 막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블랙리스트들을 오래 사용해 그 적폐가 누적되다 보면 결국에는 집단적인 저항을 불러일으키게 되는 법이다. 특검을 중심으로 한 오늘의 사법 발동 사태는 그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현 정부는 과거의 긴급조치 피해자들에게 재심의 기회를 주어 많은 이들이 재심 과정을 통해 무죄판결을 받게 해주었다. 그러나, 한 편에선 이런 일을 하면서, 다른 한 편으론 현대판 긴급조치로 그들을 다시 엮는 일을 했으니 통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과거(70년대 말)에 블랙리스트 교수들을 사면시켜 80년대 초(신학기)에 복직시켜 놓고는 5·18 직후 다시 그들을 잘라냈던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 시절의 어두운 면을 떠올리게 한다. 블랙(暗黑) 정치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블랙리스트는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 같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7-01-13
  • 그래도 희망을 노래하자
    2016년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힘겹고 어려운 한 해였다. 지난해는 육십갑자(六十甲子)로 병신년(丙申年)이었다. 이 ‘병신’이란 말을 넣어서 온갖 부정적인 말들이 유행하였다. 난신적자로 표현하였고, 이 시대를 같은 음절로 비하하기도 하였다. 지난 해 대학 교수들이 뽑은 사자성어(四字成語)도 군주민수(君舟民水)였다. 군주는 배가 되어 물과 같은 민심을 타고 미끄러져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배에 문제가 생겨 물이 새면 배는 뒤집어진다는 것이다. 그 말처럼, 성난 촛불의 물결은 결국 대통령을 탄핵소추안에 이르도록 정치권을 자극하였고, 셈법에 빠른 정치권은 자기들 주견도 없이, 발 빠른 행보를 보였다. 그로 인하여 혼란은 계속되고 있고, 소위 대권 주자라는 사람들은 눈길을 만난 강아지들처럼 천방지축이다. 어쩌면 우리가 겪고 있는 혼란은 20세기 초반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가 주장했던 사회를 병들게 하는 ‘7대 사회악’ 가운데, 몇 가지가 겹쳐져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그 중에 으뜸은 ‘원칙 없는 정치’이다. 국민들을 위해서 일하라고 국민들이 정치 지도자를 뽑아 놓았더니, 속된 말로 ‘개판’을 친 것이다. 누가 책임지겠다는 지도자를 보기는 드물고, 정치권 모두가 서로가 허둥대기는 마찬가지이고, 위기 상황에서 해법(解法) 제시보다는 해법(害法)을 부추기는 양상이다. 또 한 가지는 ‘노동 없는 부’가 만연한 것이다. 노력하고 수고하고 애써서, 그 결과를 얻어야 하는데, 권력에 빌붙고, 권위주의적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결국은 사회적 병폐를 민낯으로 드러낸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인격 없는 교육’도 한 몫 거들고 있다. 국정교과서 문제는 아이들의 미래보다 교사 자신들의 주장에 따라, 아이들을 의식화 하려는 욕심으로 인한 혼란으로 본다. 문제의식과 잘못된 것에 대한 교정보다는 그저 자기주장에 급급한 모습이다. 기득권을 가진 자는 영원히 그 자리를 지킬 것처럼 수성(守成)에 몰두하고, 인격도 인물도 안 되는 인사들은 탁류(濁流)를 만난 물고기 떼처럼 요란스럽다. 그런 와중에도 역사의 도도한 물결은 흘러간다. 새로운 2017년이 찾아 온 것이다. 우리는 이 시간들을 어떻게 보낸 것인가? 사실 역사를 돌아보면, 위기가 아닐 때가 없었고, 위기라고 규정하여, 혼란을 부추기는 세력이 없었던 때도 드물다. 그 위기의 순간을 어떻게 헤쳐 왔는가? 나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믿는다. 세상 사람들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간에, 역사의 수레바퀴는 하나님께서 굴러가게 하시며, 위기의 순간마다 붙드시고 역사하심을 믿는다.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주는 한결 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라고 말씀하신다. 문제는 우리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느냐 하는 것이다. 지난 해 통계청의 주택/인구 조사에서 우리 기독교 인구가 967만 명으로 나왔다. 10년 전보다 123만 명이 늘어났는데, 다른 주요 종교는 줄어들었고, 우리나라 전체 종교 인구가 급격히 줄어드는 상황 속에서는 매우 고무적이라고 본다. 이 1,000만 명은, 우리 국민 가운데 5분의 1일에 해당하는 것으로, 우리 기독교인들의 자세와 태도에 따라 우리 사회는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모든 기독교인의 정치에 대한, 개인적 견해나 의견은 다를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고, 우리 삶 속에서 섭리하시고, 우리 인생의 주인 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결코 다르지 않다고 본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 앞에서 옷깃을 여미고, 바르고 올바른 신앙으로 살고 있는 지를 돌아 볼 일이다. 우리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나라와 사회에 어려움이 있을 때,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께 믿음대로 살지 못함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 앞에서 바른 신앙의 길을 돌아보자. 그리고 절망 가운데 희망을 주시는 주님을 노래하자. 역사의 주권자 되신 주님만이 우리 희망의 노래를 들으시고, 역사의 흐름을 주도하실 수 있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7-01-06
  • 민정수석직의 명(明)과 암(暗)
    구약의 아모스서에는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에게 아모스 선지자(예언자)를 고발하는 내용을 들려주고 있다. “이스라엘 족속 중에 아모스가 왕을 모반하나니 그 모든 말을 이 땅이 견딜 수 없나이다,” 그런데 아모스가 앞서 한 모반(?)의 말(예언)은 이러했다. “여로보암은 칼에 죽겠고 이스라엘은 반드시 사로잡혀 그 땅에서 떠나겠다.” 예언자 아모스의 이런 불길한 예언을 우리는 흉예언이라고 부른다. 흉예언은 왕이 듣기에 거북할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회개할 기회를 부여해 준다는 의미에서 순기능을 인정받을 예언이라고 보겠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길예언은 왕이 듣기에 달콤할는지는 모르지만 현실 판단에 지장을 초래하는 역기능의 사이비 예언이어서 그 폐해가 심히 크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옛날 우리나라에는 임금님에게 때로 간하는 간신(諫臣)이 있어서, 마치 이스라엘의 흉예언자와 같은 역할을 감당하곤 하였다. 국어사전에 의하면 ‘간하다’란 말의 뜻은 “임금에게 옳지 못하거나 잘못된 일을 고치도록 말하다”라고 풀이되어 있고, ‘간신’이란 “임금에게 옳은 말로 간하는 신하”라고 되어 있다. 지금까지의 논의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간신은 이스라엘의 아모스와 같은 흉예언자의 역할을 맡은 신하라고 할 수 있으며, 반대로 임금의 귀를 즐겁게만 해주는 아마샤와 같은 신하는 오히려 간신(諫臣) 아닌, 소위 간신(奸臣)이 될 법하다고 하겠다. 간신(奸臣)은 사전에 ‘간사한 신하’라고 풀이되어 있고, 또 육사신 즉 여섯 가지 사신(邪臣) 중의 하나라고도 풀이되는데, 이 용어(사신)에 대한 사전적 풀이는 ‘나쁜 마음을 품은 신하’라는 것이다. 달리 말해 사특(邪慝)한 마음을 품은 신하라는 뜻이 되겠다. 결국 간신(奸臣)은 ‘나쁜(사특한) 마음을 품은 간사한 신하’로 종합적으로 결론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면 지금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 요즘 관심도 많고 말썽도 많은 청와대 민정수석 직의 문제에 대하여 잠시 살펴보기로 하겠다. 박 정부 들어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민정수석은 김영한 우병우 최재경 조대환 등 네 사람이다. 앞으로부터 시작해 세 번째 인사까지는 전직이었고 마지막 인사 조 수석은 현직이다. 그리고 전직의 세 수석들 중에서 김영한은 몇 달 전(지난 8월중)에 별세하였다.이제 이들에 대하여 살펴보기 전에 민정수석 직이 어떤 자리인지부터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이 직은 국민 여론 및 민심 동향 파악, 공직 및 사회 기강과 관련한 직무를 수행하는 직책으로 알려져 있다. 원래 ‘민정’이란 말이 국민의 안녕 유지와 행복 증진을 꾀하는 행정이란 사전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그렇다면 어느 정부가 국민의 안녕 유지와 행복 증진을 위해서 국민 여론 및 민심 동향을 파악하고, 또 이 문제와 관련된 공직의 기강과 사회 기강은 어떠한지를 상호 연관해 파악하고 그 결과를 건설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야 하는 임무가 정무수석의 어깨에는 지워져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김영한 전 민정수석은 이런 자신의 직책을 소신 있게 수행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못했다고 주위 사람들은 판단하고 있다. 상사인 당시의 비서실장[김기춘]이 김 전 수석을 실무에서 제외시키고, 김 수석의 부하[우병우]와만 일들을 처리함으로써 그를 완전히 소외시키면서도 국회 상임위원회 회의 현장에 나가 위원들의 질문에 답하라고 명령을 하니 그로서는 그 자리에 나갈 자신이 없었던지 그 명령 받아들이기를 거부했으며, 그 결과 그는 항명에 따른 면직 처분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바로 이 궐위된 자리에 우병우 민정비서관이 민정수석 직으로 승진해 부임하였다. 이번 국회의 국정조사 청문회에 출두해 여러 질문에 답해야 했던 우 전 수석은 지금(이 글을 쓰는 12월 14일)까지 국회의 동행명령권 발동에도 불구하고 출두하지 않고 도피 행각을 일삼고 있다. 전혀 떳떳하지 못한 처신인 것 같다. 현상금이 2천만 원을 넘자 그는 어느 언론기관을 통해 불원간 출두하겠노라고 알려왔다 한다. 우병우의 후임으로 최재경 민정수석이 새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그 역시 소위 민정수석의 직책을 충실히 수행할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얼마 되지 않아 사표를 제출하였고, 국회에서 찬성 234표로 박 대통령의 탄핵이 가결된 뒤에야 최 수석의 사표가 수리되면서 대신 그 자리에 조대환 민정수석이 새로 들어앉게 되었다.그런데 새로 부임한 조 민정수석은 여러 구설수에 휘말리게 되었다. 특히 박 대통령의 혐의점에 대하여 검찰이 뇌물죄 적용을 하지 않은 것이 잘못이란 식으로 자기의 SNS에 올린 글이 문제 되자 그는 애써 자신을 변호했지만 그의 이중적 처신에 실망한 이들은 그가 간신(諫臣)이 아닌 간신(奸臣)이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싸여 있는 것 같다. 그가 ‘뇌물죄’ 운운한 데서 그의 흉예언자로서의 면모를 일시 발견했던 이들은 이제 그의 급격한 태도 변화로 인해 그에게서 전혀 다른 면을 발견하고서 벌써부터 실망감에 빠져들고 만 것이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6-12-22
  • 이를 어쩌란 말인가-강 경 신 목사
    온 나라가 시끄럽다. 최순실의 국정농단으로 발화된 소위 ‘최순실 게이트’는 그 중심이 대통령이라는 사실에 국민은 분노하고 있다. 주말이면 백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촛불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어린이, 청소년, 대학생, 주부, 직장인, 근로자, 노인 할 것 없이 남녀노소가 이 시위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세계 각국의 통신들이 앞 다투어 보도할 정도로 실로 거대한 촛불시위가 온 나라에 뜨겁다. 다섯 번의 촛불시위와 이에 따른 세 번의 대통령 사과담화가 있었지만 끝이 아니다. 여전히 끝은 보이지 않는다. 대통령은 자꾸 아니라고 해도 이미 국민은 알건 다 안다. “나는 결코 사익을 추구한 일이 없다”고 말해도 국민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 양파껍질처럼 벗기면 벗길수록 대통령의 개입정황이 속속들이 드러나도 “나는 아니다”라고 잡아 뗄 수 있는가. “나는 사교에 결코 빠지지 않았다”고 해명해도 국민들은 사교 말고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대통령의 행태에 오히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대통령이 ‘무당 최순실’에 사로잡히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대통령의 변명처럼 단지 어려울 때 도와주고, 함께 있어 준 그 인연 때문인가? 소가 웃을 일이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이상하리만큼 권력을 비호하고, 권력자들의 대변자노릇을 자처한 적이 많았다. 하기야 반공과 경제성장을 위해서라면 하나님의 축복을 권력층과 기득권자들에게 쏟아 부어도 당연시하였다. 그래야 나라가 잘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분단된 나라에 살면서 극심한 이념갈등으로 어지러울 때, 교회가 한편에 서는 것이 마땅하다는 인식을 가진 이들도 꽤 많았다. 그러나 이를 어쩌란 말인가! 하나님의 축복을 마구 도매금으로 넘겨온 교회가 이제 세상 사람들의 조롱을 받고 있다. 교회성장이 목회성공의 목표가 되고, 축복이 곧 번영과 형통이라는 주술에 걸려 기복주의로 치닫던 교회가 안팎에서 욕을 먹고 있다. 그래도 정작 교회는 무덤덤하다. 나라의 안위와 번영을 위한다는 대의명분으로 국가조찬기도회에서 대통령에게 아첨하는 말을 해도 뻔뻔하다. 심지어 지난 번 대통령 선거에서 노골적인 지지와 비호를 한 어떤 목사는, ‘대통령이 사교에 빠졌으니, 그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자’고 강단에서 궁색한 변명을 하였다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강단이 말장난의 유희가 되어 버리고 있으니 이를 어쩌란 말인가! 언젠가부터 한국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교회왕국을 세우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사람들이 알아주는 유명목사가 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형교회를 세우면 마치 자신이 대단한 능력의 종이 된 것인 양 행세한다. 교회가 부여한 영적권위를 권력으로 생각하며 으스댄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왕이시다’고 외치면서, 정작 자신이 교인들 위에 군림한다. 교회는 왕국이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전위대요, 장막이다. 더 이상 교회를 왕국으로 착각하거나 혼동하는 일이 없어야한다. 교회규모와 교인숫자로 교회를 평가하거나, 이를 무기삼아 기독교지도자인양 행세해서는 안 된다. 적어도 기독교지도자가 되려면, 사회에 대한 냉철한 이성적인 판단과 예언자적인 영성을 갖추어야 한다. 성서에 대한 분명한 신학적 이해와 역사인식을 가져야 한다. 개인의 주관적인 경험과 생각이 아닌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세계관을 가져야 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대림절이 시작되었다. 온 나라가 비탄에 잠기고, 모든 국민이 참담해하는 이 때 교회는 대림절을 맞았다. 그런데, 이를 어쩌란 말인가!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며, 소망과 기쁨을 말해야 하는 한국교회가 온갖 불협화음으로 허우적거리고 있다. 실로 깊은 탄식이 나온다. 하지만 교회는 교회다. 교회의 사명은 세상에 대하여 말하고 전하고 외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는 다시 광야로 돌아가야 한다. 세례자 요한처럼 ‘광야의 소리’가 되어야 한다. 세례자 요한처럼 ‘거룩한 분노’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외쳐야 한다. 오늘의 교회는 이천년 전 광야에서 세례자 요한이 헤롯 왕에게 퍼붓던 그 거룩한 분노를 가지고 이 시대의 불의한 권력과 지도자들을 꾸짖어야 한다. 교회지도자들은 어떤 자리에서도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 분명히 말해야 한다. 그래서 교회에 주신 영적 권위를 다시 회복해야 한다. 그래야 교회가 살고 세상이 산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6-12-07
  • 하루 속히 국정 안정이 우선돼야-심 만 섭 목사
    대통령의 가까운, 사적인 측근들이 국정을 농단하였다 하여, 온 나라가 시끄럽다. 이제 대통령의 임기가 1년 여 남은 시점에서, ‘레임덕 현상’이 이런 식으로 올지는 누구도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나라는 정치적으로 안정된다고 하여도, 북한을 포함한 여러 이웃 나라들과의 문제나, 복잡다단한 국제관계에서 진취적이고, 신중하게 처리해 나갈 일들이 산적해 있다. 그런데 국내 문제로 이렇듯 시끄럽고, 소란한 것은 국민들로 하여금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오죽하면 국민들은, 경찰 추산 26만 명(주최측 100만명)이 서울 거리를 뒤덮고, 대통령의 거취에 대한 의견표명을 촉구했을까? 이러한 상황을 국정의 책임자들은 어떤 시각으로 받아들이고 있을까? 또 대통령의 ‘하야’니, ‘탄핵’이니 하는 사람들의 진짜 마음은 무엇일까? 공동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 정치 지도자들은 어떤 셈법을 하고 있을까? 정말 이 나라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가? 궁금하고 답답하여, 뉴스를 보고, 하루 종일 제 때를 만났듯, 자기주장을 펴는 여러 방송들을 보아도, 속 시원한 해답은 없고, 오히려 혼란스럽기만 하다. 또 지식인층과 학생들과 심지어 가방을 멘 학생들까지 거리로 나와 대통령이 물러나야 한다고 외치는데, 과연 그러한 처사만이 능사인지? 우리 국민들은 슬기로운 민족이다. 국가가 어려움을 당할 때, 때론 우왕좌왕하는 듯해도, 곧 질서를 잡고, 갈피를 잡아가는 민족이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돌보심이 있기 때문이라고 굳게 믿는다. 자! 그렇다면 이런 사태에 대하여 어떻게 정리해 나가는 것이 옳은가? 우선은 이 나라가 ‘법치국가’라는 것이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대통령도 법의 절차에 따라 국민들이 선택한 국정의 최고 책임자이며, 국가를 대표하는 자리이다. 그렇다면, 법의 절차에 따라 모든 것이 면밀히 조사되고, 그 결과에 따라 위법(違法)한 사실이 밝혀지면, 정당한 처리가 이뤄져야 한다. 그런데 작금의 상황을 보면, 여론과 언론에 의한 폭로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는 생각이다. 잘못하였을 것이라는 ‘의혹’과 잘못 된 것임이 분명히 밝혀지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우리 언론들은 매일같이 수도 없이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물론 언론의 역할이 사실을 찾아내고 은닉된 진실을 찾아내는 것이겠지만, 그 가운데에는 불필요한 내용들도 포함되어 있어, 국민들로 하여금 더욱 불신의 세계로 몰아가는 역할만 가중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이제는 우리나라가 ‘법치국가’이므로, 대통령에 관한 제반 문제는 법으로 말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 법에 의하여, 판단되고, 정리되어야 한다. 얼마 전에 끝난 미국의 제 4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이번에 당선된, 공화당의 트럼트 후보의 당선을 예견하는 언론은 적었다고 한다. 그럼 왜 그런 현상이 나타났는가? 아무리 날고뛰는 실력을 갖춘 언론이라고 하여도, 국민들 마음속에 감춰진 표현되지 않은 의견과 여론까지를 감안하기는 어려웠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의 대통령 문제에서, 거리에 뛰쳐나온 국민의 숫자보다 말없이 침묵하고 있는 절대 다수의 국민들의 생각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국민들의 마음에 진정으로 ‘동의’를 얻을 수 있는 길은, 법에 의한 정확한 조사와 그 결과이다. 두 번째는 우리 모두는 자신만의 주장이나 이익만을 내세울 것이 아니라, 국가와, 국가 운명체의 미래를 생각해야 한다. 지금의 정국은 어떤 형태로든 정리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방법이나 시기가 잘못된다면,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는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국가의 위신과 이미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되었다. 개인도 그러려니와, 국가의 이미지도 한 번 추락하면, 회복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때문에 소탐대실이 있어서는 안 된다. 국가가 위기를 맞았을 때, 이를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의 모든 결정과 영향은 잘못된 주체들에게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국민 전체에게 돌아감을 직시해야 한다. 또한 이러한 때, 우리 기독교인들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하다. 적어도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며,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 지를 분별해야 한다. 그래서 이 국가를 견인하는 분이 하나님이시며, 그의 백성된 우리 기독교인들은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안목과 자세를 가져, 진정으로 애국자다운 모습을 잃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간섭하심으로 국정이 속히 안정되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는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6-11-24
  • 교계 언론의 사명
    오늘날 우리는 이른바 ‘언론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지면 신문이 일색이던 과거와는 달리 10여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형성된 인터넷 언론 시장은 무한 경쟁 속에 하루하루 새로운 언론 트렌드를 이끌어 내고 있다. 하지만 일일이 헤아리기도 어려울 만큼 수백, 수천 개의 언론 매체가 활동하는 지금 우리들은 그들 매체가 매일같이 쏟아내는 온갖 정보에 오히려 더 큰 혼란을 마주할 때가 종종 있다. 늘어난 언론의 숫자만큼 독자로서의 정보 선택권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진실에 대한 각기 다른 판단은 오히려 사회적 혼란을 부추기는 중대한 요인이 되기도 한다. 이는 기독교 언론 역시 마찬가지다. 20여년 전 고작 10여개에 달했던 기독교 언론도 이제는 그 숫자를 가늠하기가 어려울 만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새롭게 형성된 인터넷 언론시장 문화가 기독교 언론 상황마저 완전히 바꿔 버린 것이다. 그런 만큼 기독교 언론 역시 위와 비슷한 상황을 연출한다. 교계의 온갖 사건과 사고에 대해 각각의 판단에 맞는 기사를 양산한다. 이는 언론사만의 논조와 입장이 있기에 매우 건강한 현상이지만, 반대로 한국교회 목회자들과 성도들은 진실과 거짓의 기로에서 늘 혼란을 겪어야 한다. 이런 때 독자들이 참과 거짓을 판단하기 위해 가장 중요시 하는 것이 바로 언론사에 대한 신뢰다. 언론이 그간 얼마나 참된 목소리를 내 왔고, 진실을 위해 헌신했는지는 바로 독자들이 그 언론의 정보를 택하는 주요 요인이다. 지난 25년간 한국교회를 위해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하며, 올곧은 목소리를 내온 교회연합신문은 꾸준한 교감으로 한국교회 성도들과의 신뢰를 쌓아왔다. 이는 하루아침에 이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언론으로서의 정도를 지켰을 때 가능한 일이다. 한국교회가 위기라는 진단은 이미 십수년 전부터 계속되어 왔다. 심지어 10년 후 한국교회는 완전히 무너질 것이라는 예측도 나온 상황이다. 하지만 진단만 있을 뿐 마땅한 대안이 없어 상황은 더욱 악화될 뿐이다. 이런 때일수록 한국교회 성도들은 진실에 대한 갈급함이 점차 커지게 된다. 한국교회에 대한 걱정과 우려가 커질수록 위기의 뿌리에 더 깊게 다가가기 원한다. 교회연합신문은 그런 한국교회 성도들의 갈급함을 풀어줄 참 언론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교회 위기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이에 따른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며, 위기 극복을 위한 제 역할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교계 언론은 일반 언론과는 다른 ‘선교’라는 사명이 있음을 늘 기억해야 한다. 언론이 취재의 대상으로 삼는 교계 기관이나 연합단체, 교단, 개교회, NGO 모두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축복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 존재한다. 교계 언론 역시 한국교회의 일원으로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이 더 크게 드러나도록 힘써야 한다. 또한 이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이를 주저하지 말고 바로잡는 언론의 ‘고발’ 역할도 중시해야 할 것이다. 최근 나라 전체를 들썩이게 하고 있는 이른바 ‘최순실 사태’ 역시 바로 언론의 고발에서 촉발된 것이다. 교회연합신문이 지금처럼 외압에 휘둘리지 않고, 정치적 상황에 편승하지 않으며, 진실을 수호하는데 주저하지 않는 올곧은 모습을 계속해서 지켜주기를 바란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불빛은 더욱 환히 빛나는 법이다. 비록 지금 한국교회가 온갖 어둠으로 뒤덮여 있지만, 교계 언론이 진리의 횃불을 든 파수꾼이 되어 한국교회를 선도해 나가준다면, 한국교회의 회복은 분명 이뤄질 것이다. 내년은 특별히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매우 특별한 해다. 미래목회포럼은 교회의 참 모습을 회복했던 종교개혁의 정신을 살려 한국교회에 개혁의 새 바람을 일으키고자 많은 준비를 하고 있다. 이 때 교계 언론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한국교회 성도들과의 통로가 되어줄 언론이 미래목회포럼이 제시하는 개혁의 방향을 온전히 전달해 줄 때, 진정한 개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한국교회의 새로운 역사를 위해 건강한 교계 언론 문화 창달에 힘써 주기를 기대한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6-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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