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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장로교의 일치운동-홍 성 표 목사
    한국 기독교의 원년을 카톨릭의 경우 1774년으로 보고 개신교는 100년 이후인 1884 년으로 친다. 이때의 한국 역사로는 1884년 12월 4일 김옥균을 비롯한 홍영식과 박영호 등의 삼일천하의 갑신정변이 있었고, 이들의 개화당은 독립당이라고 한다. 기울어 가는 유교의 나라 조선은 풍전등화 였고, 이러프영러일미의 강대국의 맛있는 한 손의 요리 감으로 민족과 나라의 운명은 슬프고 애절한 운명을 맞고 있었다. 판넨베르그는 보편사 속에 구원사를 말한다. 하나님의 구원사는 보편사와 분리해서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다. 예수가 하늘 보좌를 버리고 모든 세상(코스모스)의 구원을 위해서 이 역사 한 복판에 성육신 한 사건 역시 그러하다. 개인과 역사 전체의 구원을 떼어서 생각할 수 없듯이 전 우주의 구원과 구원사를 따로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다. E.H. Carr의 말을 빌린다면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고 아놀드 토인비의 말대로 “역사가의 할 일은 하나님의 일을 더듬어 찾아 가는 일”(행 17:27)이라는 것이다. 그 1884년에 또 하나의 사건은 임오군란이다. 군인들의 배급 쌀에 돌을 썩어 줌으로써 군인들의 분노가 나라를 흔든 사건이다. 그 다음 해인 1894 년에는 “후천개벽 사상”과 민심은 천심이요. 인내천 사상을 설파 하며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꿈꾸는 최재우 동학사상을 근거로 한 동학농민 전쟁이 일어난다. 전북 고부의 몰락양반인 김제의 전봉준과 김개남 장군을 필두로 한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대한 저항 혁명이 불길처럼 요원하게 불타 오른 한민족 역사의 기상이 땅과 하늘에 진동한 잊지 못할 찬란한 민중들의 살아 있는 시대적 깃발을 펄럭인 시기 였다. 타락한 권력과 탐관오리들의 부패와 비리 속에 민중의 자각이 꿈틀거릴 때, 강대국들은 호시탐탐 침략의 야욕을 불태우고 있었다. 이러한 민족의 어두운 역사가 깊어갈 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이 한민족을 살리는 강한 빛으로 비추이기 시작한 때 이기도하다. 1885년에 감리교의 아페젤러와 언더우드가 이 땅에 첫 발을 딛는다. 언더우드는 제물포에 4월 5일에 아펜젤러는 4월 2일에 부산에 닿는다. 물론 장로교의 알렌은 이미 갑신정변을 겪는 1884년에 들어와 부상당한 민영환 등을 치료하여 궁중 선교를 시작한다. 강대국 속의 한 입의 먹이 감의 신세 속에서 역사는 요동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1905년에 오적을 앞세운 강제 을사늑약으로 사실상 국권을 상실하고 5년 후에는 강제 한일 합방이라는 민족사에 씻을 수 없는 일제의 식민통치가 실시된다. 나라를 잃어버린 비탄과 통곡의 소리가 하늘과 땅을 흔들고 민중들은 삶의 희망을 상실 한다. 나라는 잃었지만 민족의 혼과 얼은 살아 있었다. “아와 비와의 투쟁”을 통하여 민족의 독립을 위한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여기는 국내외의 민족 해방 군사들은 물밀 듯이 일어났다. 추위와 배고픔과 굶주림, 멸시와 천대와 자기부인을 통한 민족의 하나님 나라 회복 운동은 만주와 미주와 그리고 시베리아의 동토의 지역에서도 끊임 없이 불타올랐다. 조국을 다시 찾고 진정한 독립을 위한 싸움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아니했다. 이완용을 비롯한 매국노들과 친일 족속들이 판을 치고 있었지만, 우리의 얼과 혼으로 충만한 하늘에 순천하는 대한민국 남녀노소 아들딸들은 모든 것을 바쳐서 독립을 위한 제물이 되는데 추호도 주저함이 없었다. 동학혁명의 정신과 함께 1919 년 3.1 운동의 횃불은 민족의 어둠을 샅샅이 밝힐 생명의 빛이었고 이것은 분명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민족과 민중의 울부짖음에 대한 응답이었다. 여기에 종교나 어떤 다름이 나뉠 수가 없었다. 그것은 한 하늘 아래에서 일어 난 땅과 하늘의 일치된 움직임이며 새로운 역사의 잉태와 해산의 움직임 이었다. 이 속에 감리교와 장로교가 나누일 수 없고, 장로교의 예장과 기장 등이 나누일 수가 없다. 단지 하나의 독립과 해방,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사에 대한 참여만이 있었다. 그러나 36년과 40년의 민족 독립과 해방사는 민족의 분단과 전쟁, 그리고 분단의 영구화로 이어지고 있다. 교회의 일치운동은 하나의 낮 내기 이상 아무 것도 아니다. 분단과 독재, 자본의 독점과 사상의 독단의 악이 끊임없이 하나님의 나라 건설과 해방을 방해 하고 있는 이때에도 교회는 세속의 탐욕에 젖어 있고 권력과 자본에 공생, 혹은 기생하고 있다. 세월호를 통한 생명의 가치를 경시 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살림의 역사에 반하고 있다. 청일과 중일 이후의 한민족의 역사는 침탈당하였다. 지금 교회의 일치 운동, 장로교의 일치 운동은 썩은 교권들의 허위의식의 일환일 뿐이다. 한국 교회의 일치 운동은 먼저 하나님과 역사, 사람과 자연 앞에서 거짓과 위선을 버리고 정직과 진실로 바로 서야한다. 다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앞에 옷깃을 여미고 구원의 역사에 우리를 던져야 한다. 지금의 세계 역사와 문명의 흐름을 통찰 하고 민족의 역사를 직시하여 생명의 역사를 재창조해야 한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6-07-21
  • 동성애 반대, 시민운동으로 전환해야-이 병 대 목사
    지난 퀴어집회 대응에서도 언론들은 극히 일부의 돌출행동만 크게 부각시켜 한국교회를 비인권적인 동성애 혐오세력으로 몰아가는데 성공했다. 한국교회가 국가와 우리 청소년들과 청년들의 건강한 미래를 위해 아무리 선한 집회를 해도 언론들은 이를 다루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한국교회의 동성애 조장 반대운동이 언론과 시민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오히려 혐오세력으로 몰리고 있는 현주소다. 한국교회가 아무리 강력한 대규모 집회와 시위를 가져도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할 뿐, 오히려 국내외적으로 언론의 역풍을 맞아 사회여론만 악화시키고 있는 실정이다.이제 한국교회의 동성애 조장 및 확산 저지운동에 대한 대응책에 획기적인 변화가 요구 된다. 지금처럼 해마다 6월이면, 서울광장과 대구동성로 퀴어집회에 대하여 맞대응하는 식의 교계연합의 ‘반대집회’는 오히려 동성애를 지지하는 젊은 층과 좌파세력들에게는 물론, 일반 시민들과 언론들에게도 한국교회가 ‘동성애자들을 핍박한다’는 오해를 심어준다. 한국교회가 매년마다 반복되는 퀴어집회 맞대응을 언제 까지 할 것인가? 또 어떤 효과를 얻었는가? 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한 의견들은 분분하지만, 오히려 한국교회의 이름을 내건 대규모 반대집회 장면들은 국제인권단체와 국내·외 언론들에 의해 동성애자들에 대한 한국교회의 차별과 혐오를 증명하는 자료로 역이용 되고 있어 안타깝다. 한국교회 집회의 진정성은 허공에 사라지고, 각 언론들과 국제인권단체들은 한국교회에 대한 부정적 비판적 보도만 쏟아놓는다. 언론과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집회가 어떤 유익을 주는지(?) 고민해봐야 한다. 이제 우리끼리의 성토보다는 새로운 방향으로 길을 터야 할 것이다.첫째, 이제 동성애 조장 및 확산 저지를 위한 맞대응 외부집회는 교계연합단체가 아니라, 시민단체가 중심이 되어 시민문화운동으로 나가야 한다. 둘째,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교회가 연합하여 한국교회와 함께 도덕적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시민단체를 적극 육성하고, 지원해야 한다. 특히 학부형이 중심이 된 어머니 단체들과 뜻있는 교사들 단체, 건전한 가정과 생명윤리 운동을 전개해 나갈 단체들, 전문가 단체들 의 집중 육성이 절실하다. 셋째는, 국민들과 언론들의 적극적인 동의와 지지를 이끌어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민들에게 동성애의 사회적 폐해와 에이즈 확산의 심각성을 일깨워야 한다. 이를 위해서 한국교회는 시민운동을 주도하여 시민과 언론들에게 적극적인 동성애 문제와 에이즈의 실체를 알려, 여론의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 넷째, 동성애와 에이즈에 대한 진실보도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국민의 알권리를 차단시키고 있는 국가인권위원회와 기자협회 간에 체결된 <인권보도 준칙 8조>의 철폐에도 심혈을 기울여야 겠다. 다섯째, 교육부, 교육청 공직자들과 초·중·고등학교 교사들과 대학교 교수들을 깨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수단체를 비롯한 학부모시민단체들을 통해 교육자들에게 청소년들의 동성애와 에이즈 확산의 심각성과 폐해를 알릴 수 있는 정보제공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여섯째, 국회의원을 비롯한 각 정당 정치인들과 보건복지부와 여성가족부를 비롯한 정부 각 부처 공직자들에게 동성애 조장과 에이즈의 확산의 심각성을 제대로 알게 하는 것이다. 일곱째, 대학생들과 군 장병들에게 동성애와 에이즈의 심각성을 일깨워야 한다. 헌법재판관들에게 지속적인 정보 제공으로 단순한 법리적 판단이 아니라, 청소년들과 청년들, 국가안보에 미치는 심대한 영향을 깨닫게 하여야 한다.여덟째, 영화계를 비롯한 예술계를 깨워야 한다. 예술계에 만연된 동성애에 대한 잘 못된 인식을 한국교회가 적극적으로 깨우쳐야 한다.아홉째, 한국교회의 슬로건은 <동성애 반대운동>이 아니라 <동성애 조장 및 에이즈 확산 저지운동>으로 나가야 한다. 동성애를 즐기는 사람들을 막을 방법은 없다. 다행한 것은 국민들의 대다수는 ‘동성애’에 대하여 동의하지 않는다. 국민들은 동성애 조장과 확산운동에 대해서는 용납하지 않는다. 그런 반대 여론을 적극 반영할 필요가 있다.열째, 진보세력에 점령당한 좌경화 된 인권운동을 건전한 인권운동으로 전환시켜야 한다. 이제 한국교회는 건전한 인권운동단체들을 적극 육성하여 인권운동을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좌경화된 인권운동을 이대로 방치하게 되면 서구사회처럼 탈 기독교운동의 확산으로 한국교회는 급격히 쇠퇴하게 될 것이다. 교회 안에 막강한 인재들을 인권운동가들로 키워야 한다. 사회인권운동은 물론 학생과 군대 인권운동가들을 육성하여 왜곡된 인권운동이 정의인양 사람들을 속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인권위원회와 유엔 인권단체들에 기독인들이 대거 진출해야 할 것이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6-07-08
  • 고난과 시련의 두 미국 작가-임 영 천 목사
    지난 6월 16일 필자는 오랜만에 미국 여행길에 올랐다. 한국문인협회와 미국의 워싱턴문인회가 공동으로 한인문학 심포지엄을 열기로 협약 중이었는데, 필자는 그곳에서 “미국 동부 한인소설가들의 작품세계"란 제목으로 주제 발표를 하게 돼 있었기 때문이다. 심포지엄 현장에서 나는 그곳의 대표적인 동포 작가로 <네이티브 스피커>, <제스처 라이프>, <생존자>… 등의 작품으로 이름난 한국계 미국 소설가, 그곳의 노벨문학상 후보로도 자주 추천되곤 하는 이창래의 작품세계에 대해 언급할 수 있게 되었음이 기뻤다. 특히 그의 <제스처 라이프>, 달리 <척하는 삶>이란 이름으로도 번역된 그 작품을 중점적으로 다루게 되었던 것도 의의가 큰 일로 생각하였다. 그 소설은 이른바 종군위안부 문제를 다룬 그 방면의 매우 비중 있는 작품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행사가 끝나고 난 뒤 여행사 가이드의 인도 하에 관람했던 두 작고 미국 문인들의 문학 기념관과 그 해당 작가들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이 붓을 들게 된 본뜻이다. 그 두 미국 작가는 에드거 앨런 포(1809~1849)와 마크 트웨인(1835~1910)이다. 전자는 <어셔가의 몰락>과 <모르그가의 살인사건>… 등으로 이름난 작가이며, 후자는 <톰 소여의 모험>과 <허클베리 핀의 모험>… 등으로 너무도 잘 알려져 있는 작가이다. 우리 일행은 앨런 포의 생존(거주) 기념 가택과, 마크 트웨인을 기념해 건립한 ‘마크 트웨인 박물관’ 등을 관람할 수 있었다. 메릴랜드 주의 최대도시 볼티모어에 있는 에드거 앨런 포의 거주 가택은 사영(私營) 기념관 형식으로 남아 있는 처지였지만, 코네티컷 주의 주도(州都) 하트퍼드 시에 위치한 마크 트웨인 박물관은 공영(公營) 건물로서 그가 전성기를 구가하며 거주했던 고전적인 저택 바로 옆에 별도로 건립돼 있어서 그 웅장한 모습이 매우 돋보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제 우리는 에드거 앨런 포와 마크 트웨인 두 작가들에 대해서 생각해 볼 차례이다. 포는 한마디로 고난의 작가였다. 그는 유랑극단의 배우였던 부모로부터 태어나, 그나마 그 부모 모두 일찍 사망해 그는 그 후 고아 신세로 살아가야만 했다. 어느 부유한 집에 양자로 들어가긴 했으나 고집스런 그의 성격 때문에 양부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후에 웨스트포인트 육사에 들어가기도 했으나 그마저도 졸업하지 못했다. 그는 별수 없이 그의 재능인 글쓰기로 연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글을 쓰면서 잡지사의 기자로 생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인, 소설가, 평론가였던 다재다능했던 그의 필치가 너무도 날카로워 많은 적들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었다. 결국 회사의 권고사직 형식으로 거기에서도 물러나야 했다. 설상가상이란 말처럼 그는 그의 사망 2년 전에 불행하게도 상처를 당하고야 말았다. 그 뒤 그가 새 여인과의 결혼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숙모 집에 가던 중 볼티모어의 한 노상에서 술에 취한 상태로 의식불명 환자로 발견되었고 아깝게도 그것으로 생을 마감했다. 이런 그의 불행한 삶을 업튼 싱클레어는 이렇게 간단히 표현했다. “그는 도시에서 도시로 방황하였고, 적이거나 벗이거나 간에 서로 다투었으며, 알코올과 아편에 중독되어 온갖 형태의 핑계와 부정직을 드러내고 말았다.” 이런 불행한 삶과는 별도로 그의 작품들만은 오늘도 살아서 반짝이고 있음이 대조된다. 마크 트웨인은 무한운동기계를 발명해 보려고 애쓴 몽상가 풍의 아버지에게서 태어났다. 그는 후에 인쇄공이 되었고, 그 후에는 미시시피 강의 물길 안내원이 되었다가, 남북전쟁 이후에는 네바다로 가서 금광의 갱부 생활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앨런 포가 그러했듯이 트웨인도 언론 기자로 생활하면서 글을 쓰는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때 쓴 작품으로 제법 돈도 벌게 되었고 명성도 얻게 되었다. 그리고 부유한 사람의 딸과 결혼하는 행운(?)도 뒤따랐다. 그러나 그의 생활이 행복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속물근성을 지닌 사람들과 싸워야 하는 처지로 몰려 있었다. 기득권 옹호의 세력들과 싸우는 일이 그가 문학을 통해 무엇을 이룰 수 있을까가를 결정할 판이었다. 그 노력의 결과가 성공적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톰 소여의 모험>과 <허클베리 핀의 모험> 등이었던 것이다. 어떻든 그는 상당 기간 제왕처럼 살았다. 그러나 후년에 그에게도 시련이 찾아왔다. 선친의 그 발명에 대한 몽상과 그의 청소년기의 인쇄공 경험 등이 합쳐져 발명에의 꿈이 발동되었던 것일까. 그는 식자 기계, 곧 인쇄기 발명 작업에 몰두하면서 결국 많은 빚을 지게 되어 파산에 이르고야 말았다. 아내도 딸도 다 죽거나 떠나고 그 역시 몰락한 상태로 생을 마감해야 했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만은 그런 그의 불행과 무관하게 오늘도 그대로 살아서 빛나고 있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6-07-01
  • 한국교회 동성애 조장 저지운동 방향 전환해야-유 만 석 목사
    한국교회의 동성애 조장 반대 운동에 대한 대응책에 획기적인 변화가 요구 된다. 지금처럼 해마다 6월이면, 서울광장 퀴어집회에 대하여 맞대응하는 식의 교계연합의 ‘반대 집회’는 오히려 동성애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물론, 일반 시민들과 언론들에게도 한국교회가 ‘동성애자들을 핍박한다’는 오해를 심어준다. 매년마다 맞대응을 언제까지 할 것인가?오히려 대규모 반대집회 장면들은 국제인권단체와 국내외 언론들에 의해 동성애자들에 대한 한국교회의 차별과 혐오를 증명하는 자료로 역이용 되고 있다. 한국교회 집회의 진정성은 허공에 사라지고, 각 언론들은 한국교회에 대한 비판적 보도만 쏟아놓는다.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실외집회가 한국교회에 어떤 유익을 주는지(?) 고민해봐야 한다.이제 동성애 조장과 동성애 등 독소조항이 포함된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대한 한국교회의 저지운동과 대응방향을 과감하게 바꿀 것을 제안한다.첫째, 이제 외부집회는 시민단체인 NGO가 중심이 되어 NGO운동으로 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교회와 함께 도덕적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NGO를 적극 육성하고, 지원해야 한다. 특히 학부형이 중심이 된 어머니 단체들의 집중 육성이 절실하다. 이제 한국교회의 이름으로는 교회당에서 기도회로 모여야 한다. 교계지도자들이 거리에 나서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교계지도자들은 NGO시민운동의 방향성만 제시하고 시민운동을 적극 지원하고, 장려하는데 집중해야 한다.둘째는, 국민들의 적극적인 동의와 지지를 이끌어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민들에게 동성애와 에이즈의 심각성을 일깨워야 한다. 이를 위해서 한국교회는 언론들에게 적극적인 동성애와 에이즈의 실체를 알려야 하며, 이것이 우리 청소년들과 청년들에게 미치는 심각한 폐해를 알려야 한다. 뿐만 아니라 엄청난 국민세금 부담의 실상을 알려야 한다. 언론들을 깨우지 않고서는 한국교회의 노력이 열매를 맺지 못한다.이미 이를 위해 모 단체에서 각 언론사 기자와 피디들을 대상으로 동성애와 에이즈의 실상을 알리는 책자를 배포하여 그 효과를 얻고 있다. 언론들을 탓할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가 언론들에게 적극 다가야 할 것이다. 외부집회에 쏟아 붓는 재정이면 언론들을 깨우는데 상당한 효과를 얻을 것이다.셋째, 한국교회의 슬로건은 ‘동성애 반대운동’이 아니라 ‘동성애 조장 반대운동’으로 나가야 한다. 동성애를 즐기는 사람들을 막을 방법은 없다. 다행한 것은 국민들의 대다수는 ‘동성애’에 대하여 동의하지 않는다. 국민들은 동성애에 대해선 무관심하지만, 동성애 조장에 대해서는 용납하지 않는다. 그런 반대 여론을 적극 반영할 필요가 있다.넷째, 교육부, 교육청 공직자들과 초·중·고등학교 교사들과 대학교 교수들을 깨워야 한다. 학생들을 바로 가르쳐야 할 교육자들이 동성애와 에이즈의 진실을 피상적으로만 알고, 국가인권위원회의 지시만 따라 인권문제로만 다가가는데 문제가 심각하다. 교육자들도 진실을 알게 되면 학생들의 장래를 망치는 교육을 하지 않을 것이다.다섯째, 보건복지부와 여성가족부를 비롯한 정부 각 부처 공직자들과 국회의원을 비롯한 각 정당 정치인들이 동성애와 에이즈의 심각성을 제대로 알게 하는 것이다. 그동안 한국교회가 정부와 국회를 깨우는 일에 손을 놓고 있었다. 1,000만 명의 기독교인들이 반대하는 것에 정부와 국회가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정부와 국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교회의 전략적 실수다.여섯째, 대학생들과 군 장병들에게 동성애와 에이즈의 심각성을 일깨워야 한다. 군부대 내의 동성 간 성추행, 성폭력은 이미 심각한 지경에 와 있다. 드러난 사건들은 빙산의 일각일 뿐, 수면하의 심각성은 덮어진 상태라고 본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국가인권위와 진보인권단체들은 군형법 92조6을 폐지시키기 위하여 줄기차게 위헌소송 제기를 해오고 있다. 군 당국에 동성애와 에이즈는 인권문제가 아닌 것을 깨우쳐야 한다. 국군의 전투력을 무력화 시키는 국가안보의 문제요, 우리 장병들의 건강과 장래에 관한 심각한 문제임을 깨워야 한다. 대학교마다 동성애 동아리가 갑질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한 전략이 필요하다. 모 단체에서 이를 깨우기 위해 엄청난 전단지와 배포와 현수막 걸기, 대학교 기도회를 갖고 있다.일곱째, 영화계를 비롯한 예술계를 깨워야 한다. 지금 극장가에서는 ‘아가씨’라는 노골적인 여성동성애 영화가 히트를 치고 있다. 예술계에 만연된 동성애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한국교회가 적극적으로 깨우쳐야 한다. 드라마나 일본만화를 통한 동성애에 대한 환상이 청소년들과 청년들을 무너뜨리고 있다. 따라서 전략적 대처가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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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요시평
    2016-06-16
  • 6·15와 민족의 희망-홍 성 표 목사
    오늘 우리가 사는 지구촌의 문제 중 하나는 생태계의 문제이다. 지금의 자연과 인간, 인간과 환경의 문제는 서로의 미래를 담보해 낼 수 없는 불확실성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여름은 뜨겁고 겨울은 추우며 이러한 현상들은 인간이 생존하기에는 너무도 힘든 기후 변화를 맞고 있는 것이다. 물론 세계의 문제가 단순히 기후 문제만은 아니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의 원자력 발전의 사고 이후 의 바다와 삶의 터전의 오염, 핵연료처리의 문제는 우리의 존재의 기반을 의심케하는 문제로 치닫고 있다. 우리가 주지하는 바대로 오늘을 지배하는 맘몬의 신은 인간의 브레이크 없는 탐욕의 결과로 사람들의 영혼과 생기를 흐리게 하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종교의 거의 모든 영역이 물질과 자본의 악마에 붙잡혀 창조의 본질을 회복하기는 매우 어려운 좌절과 절망의 늪에 빠져 들고 있다. 자본과 권력의 결탁, 초국적 기업과 다국적 기업들의 횡포와 착취의 구조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조직과 조직, 국가와 국가의 진정한 화해의 길에 종지부를 찍고 영원한 싸움과 갈등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 인간의 역사는 전쟁과 땅 빼앗기의 역사이다. 땅은 창조주의 인간에 대한 최고의 선물이며 인간은 그 땅 위에 살 수 있는 ‘창조의 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한 생명이 천하 보다 귀하다 하였다. 그런데 이 땅에서 횡행하는 것은 불의와 거짓이 홍수를 이룬다. 자본과 권력의 추악한 결탁은 인간뿐 아니라 창조주의 모든 피조물들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다. 입술로는 구원의 주인을 말하지만, 실제 마음은 신의 이름을 더럽히고 조롱하며, 만홀히 여기는 것이다. 성서는 하나님의 자비를 거듭 강조하여 말한다. 그 사랑의 자비는 조건도 없고 다함도 없다. 그러나 그 자비와 사랑은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강물 같이 흐르는 근거 위에서 열매 맺는다. 이 세상은 사랑이 없어 정신적인 분열을 이루고 관계가 깨어지며 사랑의 열매를 보지 못하는 무성한 가지와 잎만으로 인하여 저주를 불러 오고 있다. 헤아릴 수 없는 사랑과 용서는 인간들의 수없는 죄악을 진정으로 회개하고 뉘우치는 것으로 이뤄진다. 도덕과 윤리, 양심과 삶의 도리가 보이지 않는 집은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다. 우리의 현실은 갈등과 충돌, 전쟁과 싸움의 연속이다. 묻지마의 폭력과 이유 없는 살인이 난무하고 있다. 약하고 힘 없는 자들에 대한 자본과 권력의 착취 현상은 끝이 없다. 그것이 공산주의건, 자본주의건, 사회주의 든 간에 약자와 힘 없고 가난한 자들이 진정한 평화가 없는 양극화의 지속 현상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 사회가 평화롭다고 말할 어떤 기반도 없다. 오늘날 타종교의 잘못을 지적하기에 앞서 우리가 속한 교회와 기독교의 바탕은 어떠한가? 이러한 갈등과 양극화의의 상처들을 치유하고 그 간격의 골을 메워갈 복음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의 공동체들은 과연 정직하고 정의로운 길을 추구하고 있는가? 교회와 기독교는 약자의 편에 서서 새로운 희망을 창조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라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인가? 이 땅에서 일어나는 불의들에 침묵하고 방관하며, 공범자가 되어서 열매 없는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처럼 주님의 저주의 시간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2000년 6월 15일 남북 두 정상 간에 이루어진 민족통일 협력선언은 우리민족의 새 역사와 새 희망을 창조하는 생명의 사건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남북은 서로가 합의한 자주적, 민족주체의 평화통일 협력합의가 무색한 지경이다. 외세의 간섭없이 우리민족 끼리, 자주, 주체 상호인정의 평화 통일의 민족숙원인 6.15의 역사적 혈통이 끊어진 듯 슬픈 현실을 맞고 있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 일본을 비롯한 러시아 등의 주변 강대국들의 한반도에 대한 자국의 이익 추구의 정책은 공고화 되고 통일의 현실 공동체인 개성공단마저 전격적으로 강제 폐쇄되었다. 분단의 벽을 허물지 않고는 우리 민족공동체의 희망은 없다. 좌우의 이념의 찌꺼기들을 불태우지 않고는 우리들의 후손은 여전히 더 큰 절망과 어둠의 늪에서 헤어날 수 없다. 교회와 기독교의 공동체가 새 역사와 하나님 나라의 새 지평의 문을 열려면 진정성 있는 통일의 길을 여는 기도를 심도 있게 구체적으로 확장해 가야만 한다. 소위 아직도 보수와 진보의 낡은 옷을 입고 반공과 레드 콤플렉스의 프레임을 고집한다면 남북한 민중들의 한은 풀기 힘들 것이다. 강자와 외세들의 힘을 의존하고 흡수 통일을 지향하고 고집하는 한 우리의 고통은 지속 되고 억울하고 슬픈 죽음은 쌓여만 갈 것이다. 이념과 도그마의 굴레를 넘어서 6·15의 정신을 살리고 진정한 회해와 하나 됨을 사는 새 창조의 역사를 열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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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6-10
  • 20대 국회는 협치를 꼭 실행하기를-심 만 섭 목사
    20대 국회가 5월 30일 개원했다. 20대 국회는 개원 전부터 여소야대(與小野大) 정국에서 협치(協治)를 강조하였다. 뭔가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는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20대 국회가 개원하면서, 그 기대는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로 바꾸어지고 있지 않나, 우려된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불신을 받는 부류가 정치권이다. 특히 우리 국회는 일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각종 혜택만 누리는 집단으로 국민들이 인식하고 있다.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에게 들어가는 돈은 연간 1인당 약 7억 원이 소요된다고 한다.(1인당 세비는 약 1억 4,000여만 원이지만, 각종 지원 경비를 합하면 그렇게 된다고 함) 전체 국회의원이 300명이니, 연간 2,100억 원이 들어가고, 임기 4년을 합하면, 국민들이 뽑은 국회의원에 들어가는 돈은 8,000억 원이 넘게 들어간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럼 국회가 그 정도의 일을 하고 있는가? 지난 19대 국회는 법안 가결률에서 역대 최저를 기록하고 있다. 국회에서 발의된 법안 중 본회의를 거쳐 통과한 법안 비율은, 19대가 31.6%이다. 18대 44.4%, 17대 50.4%, 16대 62.9%, 15대 73.0%, 14대 80.7%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라는 것이다. 특히나 국민들에게 꼭 필요하거나 국제 정세 상, 반드시 필요한 법률조차도, 당리당략(黨利黨略)과 정쟁(政爭)으로 끝내 마무리하지 못한 것들이 수두룩했다. 규제개혁특별법,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노동개혁 4법, 사이버테러방지법 등은 시급한 과제들이었다. 그런가 하면, 국회의원들의 의정활동 분석을 살펴보면, 평균 66점이라고 한다. 대학의 점수로 치면 D학점이다. 겨우 낙제를 면한 점수이다. 또 국회의원들이 공약한, 공약이행 점수는 51점이라고 한다. 법을 만드는 정치인들이 거짓말을 남발했다는 이야기이다.20대 국회에는 초선의원 132명을 빼면, 적어도 재선 이상의 국회의원이 60% 가까이 된다. 그들이 또 다시 20대 국회에 입성하여 활동하게 될 것인데, 19대 국회의 잘못된 관행을 따라가지 않기를 바란다. 국민들은 진정으로 20대 국회에 기대하고 있다. 한 여론조사기관의 발표에 의하면, 20대 국회의 여소야대 상황이 ‘잘된 것’이라고 응답한 것이 61%, 20대 국회가 ‘잘할 것’이라고 응답한 것이 53%에 이른다고 한다. 3당 정립(鼎立)을 만들어준 국민들이 기대하는 바가 크다. 우리 정치에 대하여 국민들은 비난을 하면서도, 그래도 정치권에 기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정치가 실종되면, 외부의 침입을 받고, 내부는 극심한 분열과 갈등으로 치닫다’는 모 원로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정치는 대화와 타협, 협상과 양보, 포용과 책임이 따르는 일이다. 또 민생과 국가의 안위와 국가의 미래적 발전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하는 과제가 있다. 그런데 우리 정치는 그런 면보다는 ‘패거리 문화’와 포퓰리즘에 좌우되는 모습을 자주 보와 왔다. 그래서 20대 국회에 거는 국민들의 기대는, 그 어느 때보다 남다르다할 것이다. 20대 국회의원 당선 이후 각 당의 책임자들은 ‘협치’를 하자고 뜻을 모았다. 협치(協治)는 국정운영에서, 서로가 잘 참여하고 협력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는 우리 정치의 고질적인 단면을 교정하고, 민생 돌봄과 정치적으로 성숙한 면모를 보이기 위한 좋은 발상이라고 본다. 그러나 20대 국회가 개원하던 날의 모습을 살펴보면, 정치인들이 ‘협치’를 실행하겠다는 모습보다는 예전의 ‘공방’과 일방적으로 ‘상대방 비난’의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상대방을 배려하기 보다는, 자기주장에 충실하려는 모습으로 비춰졌다. 국민들은 진정으로 20대 국회가 ‘협치’의 진솔한 실행의 장이 되기를 바란다. 진정한 협치(協治)를 위해서는 협치(狹治)의 마음을 버려야 한다. 지난 19대가 협치(狹治)로 최악의 국회가 되지 않았던가? 또 협치(協治)에 앞서, 자치(自治)를 해야 한다. 자기 스스로를 돌아보고, 정말 협치(協治)를 위한 준비가 된 것인지, 아니면, ‘눈 가리고 아웅’하려는 것인지 부터 먼저 정해야 한다. 이제 20대 국회가 개원하였다. 제발 국민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를 바란다. 큰 틀의 정치를 하고, 신뢰의 정치를 하며, 국민들의 사랑을 받는 책임감 있는 정치를 하기 바란다. 그리하여 정치권에서도, 국민들이 희망을 찾도록 만들어 가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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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6-01
  • 나의 사랑하는 딸들과 아들들아-홍 성 표 목사
    우리가 겪어온 산업화나 민주화의 과정에서 일제와 분단, 그리고 민족상잔 후에 정말 배고프고 쉴 곳이 없는 아주 가난한 세월을 살아 온 것이 사실이다. 일제의 압박과 설움을 겪어 온 할아버지 할머니 우리들의 조상들의 아픔을 역사를 통하여 알고, 독립을 향한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는 그 시련과 고난, 고통의 세월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그러나 가장 큰 아픔은 분단 된 후의 같은 피를 갖고 있는 민족과 동족끼리의 살상인 민족전쟁이었다. 역사는 사실을 기록한 기록의 역사와 그 기록된 역사를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에서 이해하고 해석하는 역사가 있다. 역사를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 하느냐의 문제는 바로 역사를 보는 인식 즉 사관이라고 한다. 역사는 주관과 객관적 해석이 존재한다. 주관적인 해석과 이해는 자기의 틀 속에 갇혀 자기 이해의 관점에서 보는 어떻게 보면 이기적인 관점이라고도 볼 수 있다. 대개의 경우 인간의 역사 이해나 해석은 여기에 머물기 일쑤다. 많은 사람들이 투옥되고 억압을 받으며 몇 십 년의 세월이 흘러 갔지만, 여전히 남북은 대립해 있고 민주의 이름은 짓밟혀 더러워지고 있다. 군사 독재와 유신 독재의 찌꺼기들이 부활하여 이 나라와 민중을 옥죄고 있다. 그리하여 다시 묻는다. 과연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는 강자의 역사요. 민중은 항상 강자에 짓밟혀 사는 운명으로 돌려야 하는 것인가? 금수저와 흙수저가 당연히 존재하는 것이 역사라고 인정해야만 하는가? 사랑하는 딸들아 아들아! 분단 70년이 되었는데도 우리는 아직도 자주와 자립 된 나라를 살지 못하고 강대국의 종속과 예속의 삶에서 그들의 눈치를 보며 점령군에게 땅을 내주고 그들의 국방비를 지출하며 남북의 분단과 긴장을 빌미로 이해할 수 없는 무기를 사 주어야만 한다. 이제 삶의 후반기를 살고 있는 이 시간에 오늘의 역사적 현실을 묵상 하며 고뇌하게 된다. 타락한 자본과 불의한 권력의 결탁 아래서 빈곤을 대물림 하고 거짓된 자유와 평등 평화가 자행되며, 맘몬과 물질의 가치가 생명의 가치 위에 군림하는 오늘의 헬 조선 아니 그보다 못한 현실들이 넘실대는 오늘을 보는 것이 아리고 쓰리며 저려오구나!남북의 분단과 동서의 분열과 신 냉전을 사는 이 나라와 민족의 현실을 생각하면 편히 눈을 감을 수도 없다. 존재가 비존재에 눌리고, 거짓이 진실의 마스크를 쓰며. 거룩히 썩어버린 오늘의 삶을 보면서 가슴이 아프다. 사랑하는 아들과 딸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살면 된다고 말해야겠다. 그래야지 정신을 바짝 차려야지 사방에 둘러싼 악한 세력들이 언제 너의 영혼과 삶을 훔치고 빼앗아 갈지 모르니까? 사랑하는 딸과 아들들아!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말한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우리를 기가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며. 우리들을 도우시고 상담 하시고 위로하시는 예수그리스도와 성령께서 너희들을 밤이나 낮이나 지키시며 돌보신다. 그 하나님께서 너희 일생과 동행하시며 죽음과 사망의 골짜기에서도 해를 받지 않게 하시며, 모든 질병과 정망에서 상처를 치유하시고 고치신다. 나를 죽음 가운데서 건지시고 살리신 것처럼, 나를 질병 가운데서 고치시고 건강하게 고치신 것처럼 그 하나님께서도 너희 모두를 살리시며 고치신다. 사랑하는 딸과 아들들아 다시 한 번 말한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진정한 자유와 평화는 누가 그저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러했듯이 너희가 그것은 만들어 가고 창조하는 구체적인 기도와 노력만큼 누릴 수가 있다. 혼자 잘 사는 것은 짐승이나 동물의 삶과 같다. 아니 짐승이나 동물도 그렇게 살지는 않는다. 나와 네 이웃이 함께 잘 사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삶의 소명과 사명의식, 그리고 책임의식을 갖고 살아야 한다. 힘 있는 자에게 아부와 아첨을 하지 말고 약한 자와 힘 없는 자를 멸시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들을 섬기고 대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하고 옳은 것은 옳다고 해야 한다. 사랑하는 아들아 딸들아! 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다 주고 또 주고 싶다. 그러나 진실로 하나님에 대한 말씀과 예수그리스도의 믿음과 성령님의 동행 하심을 기도하고 물려 주고 싶다. 우리가 어떤 곳에 있든지 너희들이 어디에서 살던지 통일 된 조국에서 자유를 누리고 살기를 기도한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6-05-20
  • 나치의 홀로코스트, 그 명과 암
    지금으로부터 석 달 전쯤인 지난 2월 중에 독일 나치 주도의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에 관련된 90대 노옹(老翁)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한 사람은 유대인들을 박해한 일로 2월 11일 법정에 출두하게 된 94세의 라인홀드 하닝이란 전직 나치 친위대원이었고, 또 한 사람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겨우 탈출한 뒤 이스라엘로 건너가 살다가 2월 19일 향년 93세로 생을 마감한 사무엘 빌렌베르크란 이름의 유대인 조각가였다. 폴란드 출신의 빌렌베르크(S. Willenberg)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갓 스물의 나이로 두 명의 누이를 포함해 총 6천여 명의 유대인들과 함께 나치의 점령지, 곧 ‘죽음의 수용소’ 트레블링카(Treblinka)로 끌려와 수용되었다. 트레블링카 수용소는 당시 악명 높던, 같은 폴란드 내 아우슈비츠 수용소 다음으로 악명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다른 수용소가 강제노역 후 병약해져 쓸모없게 돼버린 유대인들을 폐기처분했던 경우와는 달리, 이 수용소는 거의 대부분의 유대인들을 즉각 가스실로 보내 희생시켰다. 이 수용소에서 87만5천여 명의 유대인들이 학살당함으로써 아우슈비츠 수용소(110만여 명) 다음으로 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당한 악랄한 곳으로 알려졌다.당시 스무 살의 청년이었던 빌렌베르크는 어떤 이웃 사람이, 벽돌공이라고 자신을 위장하면 생존할 수도 있다고 하여 경비병을 속여 운좋게 가스실로 보내지지 않고 노역자로 살아남아 있었다. 그러던 중 1943년 8월 무기를 탈취한 수백 명의 수감자들과 함께 그곳에서 봉기를 일으켜, 또 운 좋게 그곳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무장봉기에 가담한 수백 명의 수감자들 중 겨우 67명만이 살아남았으니 그가 어떻든 행운아인 것만은 사실이었다.수용소에서 탈출한 후 그는 일단 바르샤바로 잠입했다가, 종전 뒤 이스라엘로 건너가서 측량사란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가다가, 후년에 자신의 수난의 체험을 표출하는 조각가로 변신하였다. 그의 조각 작품들 중 이름난 것은 나치의 홀로코스트 만행을 고발하는 <가스실로 들어가는 아들의 신발을 벗겨주는 아버지>란 제목의 청동 조각상이다. 이는 세계의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려준 생동감 넘치는 조각품으로 유명하다. 또 한 사람, 라인홀드 하닝(R. Hanning)은 21세 때인 1943년 초부터 1944년 중반기까지 나치 친위대(SS)의 감시요원으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복무했다. 이 일로 그는 90대 노년기에 이르러 데트몰드 시에 차려진 재판정에 서게 되었다. 최근 독일 사법 당국은 90대 노령에 접어든 나치 친위대원 네(4) 명에 대한 공판을 열기로 계획하고 있었는데, 그날 하닝이 첫 번째로 심판대에 서게 된 것이다. 그는 1940년대에 최소 17만여 명의 헝가리 출신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해된 일에 대한 책임 추궁을 당하게 되었다.검찰은 하닝을 아우슈비츠의 살인 기계(murder machine)라고 부르며 그를 기소하였다. 2011년 나치 부역자 존 뎀잔추크에게 유죄판결이 내려졌었는데, 당시 판사는 점령지 폴란드의 나치 수용소 근무자로서의 활동만으로도 학살 공모 혐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요지로 판결한 바 있었으며, 지난해(2015) 아우슈비츠의 전(前) 회계장부 관리인이었던 오스카 그뢰닝(94세)에게도 징역 4년형이 언도된 것에 비추어볼 때 하닝의 경우도 결코 낙관할 수 없는 일이었다.그 사건을 담당한 도르트문트 검찰은 당시 하닝이 수용소 내의 수용자들 중에서 강제노역이 가능한 인원과 가스실로 보내야 할 인원을 구별해 내는 일과, 그리고 유대인들에 대해 주기적으로 행해진 대규모의 총살 및 수용자들에 대한 조직적인 아사(굶겨 죽이기) 작전을 그가 방조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대량 학살을 도왔다고 지적하였다.그 재판정에는 다국적 고소인단(38명)의 일원인 레온 슈바르츠바움(94세)이란 베를린 거주의 노인도 증인으로 참석했는데, 그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생존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발가벗겨져 가스실로 향하던, 트럭에 탄 수용자들의 비명(悲鳴)을 떠올리며 당시를 ‘생지옥(living hell)'이었다고 회상하였다. 그는 “살이 타는 냄새가 진동하고 시체를 태우는 곳에서는 굴뚝 연기가 그칠 날이 없었다.”고 증언하였다.2월 11일에 행해진 나치 부역자 라인홀드 하닝에 대한 공판진행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 그 일주일쯤 뒤인 2월 19일 유대인 조각가 사무엘 빌렌베르크는 평안한 영면(永眠)에 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6-05-11
  • “20대 국회는 20·30청년세대의 목소리를 경청하라”-장 헌 일 목사
    현재 우리나라 청년 실업률은 12.5%, 56만 명이다. 이는 3분의 1이 비정규직이 될 역대 최고 수준이다. 청년들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하는 정치권에 고개를 돌린 결과 지난 17·18대 대선, 19대 총선에서 투표율이 가장 낮은 세대가 20·30세대였다. 50대, 60대 이상 유권자 투표율보다 20%포인트나 낮았다. 그러나 이제 정치의 무관심과 혐오로는 더 이상 정치가 변할 수 없음을 알았다. 이번 제20대 총선에서 선거혁명이 일어났다. 국민의 승리, 청년의 승리였다.20대 투표율이 28.1%(18대 총선) 41.5%(19대 총선) 49.4%(20대 총선)로, 30대 투표율은 35.5%(18대 총선) 45.5%(19대 총선) 49.9%(20대 총선)로 2030세대 투표율이 이제 50%에 근접했다. 2030세대 청년이 정치의 주변인에서 정치의 주체자로 당당하게 일어선 것이다. 국민을 무시하고 오만한 정치권인 그들만의 리그전을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대한민국호의 희망인 청년세대가 선거혁명의 주체자로 일어선 것이다. 20대 총선을 뒤흔든 청년세대의 투표율 상승으로 국회 최고의 황금분할이 만들어졌다. 여야 할 것 없이 그 어느 당도 과반수가 되지 않아 오직 국민만을 바라보며 정치해야 하는, 정치교과서를 다시 쓰게 만든 자랑스러운 청년세대들이 16년 만의 여소야대를 만들었다. 이는 곧 청년세대의 높아진 투표율이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다. 이제는 국가의 미래와 국민에게 신뢰와 희망의 국가정책을 보고 투표하는 청년부동층이 차기대통령도 결정할 것이다. 20대 국회는 대한민국의 미래청년에게 희망을 주는 정책으로 여야는 경쟁해야한다.이번 선거에서 이와 같은 청년세대 투표율 급등은 사전투표제의 도입이 영향을 미쳤지만 무엇보다 정치를 바라보는 청년들의 인식변화가 가장 큰 원인이다. 우리나라 청년들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에서 노동시간이 가장 길고 수면 시간이 가장 짧은 나라, 아무리 노력을 해도 답이 없는 나라라고 느끼고 있는 것이다.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청년세대들은 ‘아프니까 청춘이다’ ‘힐링이나 위로’에 대해 이야기하고 어떻게 하면 스펙을 잘 쌓을 수 있을까 고민했지만 이번 총선에서는 그 분노가 적극적인 정치참여를 통해 표로 표출된 것이다. 이번에 전국 10개 대학 총학생회가 총선에서 청년들의 목소리를 한데 모아 ‘대학생·청년 공동행동 네트워크’를 조직해 적극투표 참여운동을 전개했다. 특별히 교계에서도 필자와 함께 뜻있는 기독대학청년들이 모여 기독대학청년희망포럼을 조직하여 이번 총선에 적극 참여했다.이번 20대 국회가 가장 우선해야 할 태도는 “경청”이라는 키워드이다. 국민의 목소리를 경청해야한다. 무엇보다 청년들의 이야기를 먼저 귀담아 들어야 한다. 그들이 선택한 여야에 대한 관심이 다시 국가와 사회에 대한 고민으로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청년들은 이미 지난 20대 총선에서 부쩍 높아진 투표율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이젠 정치권과 우리 사회가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차례다. 한국교회도 청년세대를 중심으로 전 성도가 우리 사회 모든 우상들을 홍해에 묻고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살아 있는 대한민국을 새롭게 디자인 하여야 한다. 하나님 나라 정치운동은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하는 정치이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여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 생명과 복지, 환경과 인권 등 샬롬의 세상을 이루라는 주님의 명령이다. 그 어떤 이유로도 국회는 포기 할 수 없는 선교의 가장 중요한 영역이다.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3장 11절에서 예언자 미가의 말을 인용하면서 돈정치하는 자들, 돈 받고 왜곡된 재판을 하는 자들을 비판하고, 정의와 사랑, 어렵고 소외된 우리 이웃을 향한 선한 복지 정치를 강조했다. 이제는 20대 국회가 국민의 진정한 대변자로서 국민에게 신뢰와 희망주는 국회로 거듭나게 하기 위해서는 국정감사를 비롯한 상시 국회 운영에 직간접으로 참여하는 국회NGO모니터단 활동에 한국교회가 적극참여 해야 한다. 또한 대한민국의 미래를 책임지고 나갈 다음세대에게 살만한 나라, 열심히 노력하면 비전이 보이는 희망의 대한민국을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2030 청년세대들의 주체적 참여를 위해 (가칭)기독대학청년아카데미 설립을 서둘러 각 영역에서 성경적 세계관으로 무장한 하나님의 영적 전사를 양육하여 세상을 향해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하도록 우리 교회의 거룩성과 공공성 회복이 우선되어야 한다. 한국교회가 하나되어 말씀과 삶으로 청년세대와 함께 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한국교회여 일어나라! 기독 청년이여 일어나 빛을 발하라!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이사야60:1)
    • 연지골
    • 토요시평
    2016-04-28
  • 새로운 정치권에 바란다-이 효 상 목사
    지난 4년간 국정을 이끌어 온 제19대 국회는 무능 그 자체였다. 민생을 최우선으로 해야 하는 국회가 국민은 뒷전이고, 정작 자기 밥그릇 챙기기에만 몰두하는 모습은 많은 국민들의 분노와 한숨을 자아냈다. 국민들의 삶에 직접 연관된 수많은 법안들이 본회의는 고사하고 상임위원회조차 넘지 못하고 폐기를 반복하는 모습은 국회가 도대체 누굴 위해 존재하며, 누굴 위해 일하는 곳인지 의심하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 치러진 이번 4.13 총선은 기존 정치에 실망한 국민들의 결연한 의지가 반영됐다고 볼 수 있다. 사실 금번 총선에서 보여준 정치권의 행태도 이전과 별 다를바는 없었다. 국민 모두를 경악케 한 거대 여야당의 공천 논란은 물론이고, 난무하는 각종 반짝 공약은 그나마 남아있던 정치에 대한 신뢰조차 무너뜨렸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번 총선에서 기존 양당 정치체제의 붕괴와 새로운 정당들의 출현은 분명 주목할만한 부분이다. 특히 우리나라를 동서로 양분해 1번 혹은 2번만을 강요하며 양당외에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과거와는 달리 또다른 선택지가 생겼다는 것만으로 많은 의미가 있다. 이는 국민들에 있어 총선이 진정한 정치참여로 이어지는 계기가 됐으며, 그만큼 국민들의 정치의식 또한 한층 높아졌다 할 수 있겠다. 그렇기에 새롭게 구성되는 20대 국회는 정말 잘해야 한다. 무엇보다 ‘국민을 대변하겠다’는 마음가짐, 그 초심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멀쩡한 사람도 정치에 한번 발을 들이고, 재선, 3선을 하며, 그야말로 ‘정치꾼’이 되다보면, 대부분 국민보다는 자기 밥그릇에 먼저 눈독을 들이곤 한다. 새로운 정치권에서는 ‘국회의원’이라는 특권의식과 특권을 내려놓아야 한다. 국회의원이 놀고먹어도 탓하는 사람이 없다. 이게 어떻게 보면 국회의원의 특권이다. 하지만 아무 일도 안하고, 세비만 받는 것은 본인은 물론이고 나라 전체를 망하게 하는 길이다. 국회의원은 머슴이 아닌 나라의 주인인 국민의 대표로 떳떳이 의정 활동 본업에 충실해야 한다.그리고 국회 회기 중 회의도 빠지고 지역구 행사나 해외로 나가는 건 문제다. 국정의 질이나 내용이 떨어지고 법안은 엉망이 된다. 이런 식의 운영되는 국회법은 개정해야 한다. 민심을 제대로 듣기 위해 내려간다지만 국회 규칙으로 회기중에는 공·사적인 일을 막론하고 지역구나 해외에 나가지 못 가게 해야 한다. 새 정치권은 무엇보다도 국민들의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이런 노력을 기울이며 정치권도 변해야 산다. 특권의식을 버리고 국민속으로 들어가야 답이 있다. ‘국회를 없애고 그 자리에 공원이나 임대주택을 짓는 게 좋겠다’는 국민들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더 나아가 정치권이 우선해야 할 일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이다. 어떻게 하면 꿈을 잃은 청년들, 아이들을 키우기 힘든 젊은 엄마들이 마음 놓고 아이들을 키워서 다음세대를 기대할 수 있도록 만드는 정책들. 기본적으로는 한반도의 평화를 정착하게 만들 수 있는 법안들, 그 다음에 그 땅에 사는 약한 사람들도 기회를 갖고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것과 관련된 구체적인 대안들이 정책으로 제시하면 국민들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런 생활 밀착형 정당, 의원이 요청되는 때이다.국회는 입법기관으로 정책과정에 심도를 높여야 한다. 수많은 정책들 중에 국가와 국민의 미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법안처리에 혜안이 필요하다.특히 지난해 교과서 논쟁으로 불거진 역사적 논쟁이 소모적이 되지 않고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역사 분야와 관련해 ‘역사정립특별위원회’ 설치가 필요하다. 역사 교과서 논란을 겪은 만큼 다양한 학자들로 위원회를 구성해 새롭게 역사 편찬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또한 한국교회가 ‘동성애조장’과 IS가 이미 대한민국을 테러 대상국가로 지목한 상태에서 ‘이슬람국가의 일방적 입국비자면제’, ‘정부의 할랄 인증 비용 지원’ 등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심각한 우려를 정치권에 요청한 바 있다. 이런 한국교회의 목소리에 응답해주었으면 한다. 현재 한국사회는 한편으로는 엄중한 국제현실 속에서 대한민국을 지키고 통일을 위한 준비를 해야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사회의 다양한 목소리를 합하여 국민화합을 이루어야 하는 중대한 상황에 처해 있다. 이런 중요한 시기에 당선자로 개원국회에 임하는 정치권은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 나기를 기대한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6-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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