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2-12(목)

해설/기획
Home >  해설/기획  >  기획

실시간뉴스

실시간 기획 기사

  • [신년기획] 한국교회가 기도해야 할 가장 우선적 문제는 연합과 일치
    한국교회는 수년 전 보수계 교단연합단체인 한기총의 분열로 사회적 지도력을 상실한지 오래다. 전혀 교계 지도자감이 안되는 각 교단 인사들이 자파 교단의 총회장 자리 하나씩 차지한 경력을 빌미로 돈 몇 푼씩 들고 나와 교계연합단체에서교권행사를 하다가 결국 연합단체도 망가뜨리고, 자신도 망해갔다. 이후 한교연과 한교총이 연이어 발족했으나, 어떤 연합체도 교계의 대표성을 담보하지는 못했다. 거기에다가 코로나로 인한 정부의 교회에 대한 강압조치로 한국교회는 회복키 어려운 폐해를 입었다. 이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10년이 걸릴지 20년이 걸릴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는 한국교회뿐 아니라, 우리사회의 통합과 개혁에 커다란 손실로 작용하게 될 것이 명백하다. 따라서 2024년 새해를?열면서 한국교회가 우선적으로 기도해야 할 중요한 문제가 어떤 것인지를 점검해 보고자 한다. 그 중 하나가 곧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이다. 지금은 22대 총선을 앞두고 있어 우리사회 전반이 정치권에 휘둘리고 있지만, 선거가 끝나면 제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여기에는 특히 한국교회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사회에 오랜 전통을 가진 종교로서 불교와 유교가 기능하고 있고, 한국 천주교 역시 무시할 수 없는 큰 세력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역시 사회적 지도력으로 볼 때 기독교(개신교)에 비견하기 어렵다. 현재 한국 기독교인들은 우리사회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전반에 지도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사회는 기독교 외에 어떤 종교적 이념이나 정치 이념도, 사회 개혁이나 통합 이념으로 내세울 만한 사상이 없다. 한국 기독교는 초기부터 근대화와 사회개혁을 과감히 지향해 왔다. 근대 학교교육을 통한 인재양성과 서구 선진문화의 창구역할을 통한 사회지도자 양성, 사회개혁에 저해 요인으로 작용하는 전래의 가치관과 풍속을 타파하는 일 등은 오늘날 우리사회를 선진국으로 이끄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이러한 전통을 이어 한국기독교는 70-80년대 민주화와 인권운동을 통한 사회정의와 시대적 양심의 기수 역할을 감당해 왔다. 그런데 왜 작금에 이르러 사회로부터 기독교가 외면 당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먼저 우리 내면에 있다. 첫째는 교단의 분열이다. 한국기독교는 미국의 이민교회를 모태로 하기 때문에 서구에서 발생한 많은 '교파주의' 교회가 이식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 교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들 교파에서 수많은 '교단'이 나뉘었다는 것이다. 같은 교리, 같은 신학, 같은 신앙고백을 가진 교파에서 수백 개의 교단으로 갈라진 교회는 세계에서 한국교회 밖에 없다. 특히 한국장로교회는 그 정도가 심해도 너무 심하다. 그러다보니 교단연합단체도 제 구실을 못하고 있다. 둘째는 초기 사회개혁의 명분으로 삼아 왔던 미신이 교회 안에 기복주의로 변질해 '축복'이라는 이름으로 또아리를 틀고 있다는 점이다. 기복주의는 사회개혁이나 교회 내부에서 일어나는 독선적 경직성과 부패현상에 대해서도 무감각한 태도를 보인다.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무서운 적이다. 셋째는 이런 문제를 비판하고 개혁하는 신학적 활동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현재 교계에는 신학대학이 60여 개에 이르고,여기에 종사하는 신학자만 해도 1000여명에 이른다. 그럼에도 작금의 한국 신학계는 교단신학의 교권적 강화에 기여할 뿐, 교회개혁에는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모두 이들 신학교가 교단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보수주의 신앙에 입각한 교회제일주의로 나타나 정통과 다른 체험은 무조건 부정되는 이단시비로 발전하게 되고, 대사회적으로는 현대사회의 규범을 무시하는 교회지상주의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문제들이 결국 한국교회로 하여금 사회개혁에 지도력을 상실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 마땅히 통일한국의 사상적 토대를 기독교에서 찾아야 하는데, 기독교마저 갈갈이 짖어져 있으니 그 기대가 난망한 것이다. 한국교회의 '교회관' 바뀌어야 한다 한국기독교에는 6만여 개가 넘는 교회당과 3만 개가 넘는 잘 건축된 예배당, 수백억원씩 들여서 지은 산속의 기도원, 20만이 넘는 안수받은 목사, 1천만에 이르는 신도가 있다. 이것만 보면 한국기독교는 탄탄대로를 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종교의 흥망은 그런 것과 상관 없이 갑자기 나타난다. 오래 전에 영국에서 '교회'가 사라질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된 일이 있다. 영국은 성공회와 침례교와 감리교와 구세구과 퀘이커의 고향이고, 청교도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낳은 위대한 신앙전통을 가진 기독교 나라이다. 이런 사회에서 기독교가 사라질 것이라는 예고는 세계교회를 놀라게 하고도 남는다. 그러므로 한국기독교는 무엇보다 교회본질의 회복이 요구되고 있다. 그래야만 500년, 1000년의 한국교회를 말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첫째는 교회(에클레시아)의 본질이 왜곡되고 있다는 문제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에서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교회를 정의하고 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로서 믿는 사람들의 모임을 뜻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정의와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무리이다. 우리 자신인 것이다. 절대로 건축물이 교회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한국기독교는 입으로는 교회란 에배를 위해 모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하면서도, 그 백성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이는 그 공간을 '교회' 또는 '성전'이라고 착각하게 만든다. 그래서 교인들이 힘에 겹도록 대출을 받아서라도 땅을 사고 예배당을 짓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한다. 예배당 크기가 마치 그 교회 신도들의 신앙의 척도인양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한국교회는 '교회'와 '교회당'이 구분되지 않아 교회의 본질이 흐려지고 있다. 교회는 그 교회당에 모이는 믿는 사람들이다. 한국천주교는 '교회'와 '성당'을 명확히 구분한다. 성당은 교인들이 모여 미사를 드리는 곳이다. 중국교회는 '교회'와 '교당'을 구분한다. 그런데 한국기독교는 '교회'와 '교회당'이 구분되지 않는다. 그래서 교회당을 팔면서도 교회를 판다고 한다. 둘째는 설교자들의 기복적 메시지의 문제이다. 작금 한국교계에서 괘 이름있는 목사들의 설교에서도 기복과 축복만 강조될 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복음의 자유에 대한 말씀을 듣기 어렵다. 누가 어떻게 예수를 잘 믿어 얼마큼 큰 돈을 벌어 예배당을 잘 지었다. 누가 어떤 중병에 걸렸다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기적같이 나았다. 믿는 자는 이런 축복을 받는다는 따위만 강조된다. 이런 것은 설교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이성과 지성은 무시된 채 맹신과 광신이 믿음인양 떠벌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 인류 지성사를 이끌어온 기독교의 논리와 지성은 간데 없고 무지와 억지만 난무하는 꼴이다. 이것이 한국기독교의 수준이라면 한국교회도 오래지 않아 우리사회에서 영국교회처럼 '교회가 사라지는 때'를 맞이하게 될것이라는 우려를 떨칠 수가 없다. 한국기독교 교회관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
    • 해설/기획
    • 기획
    2024-02-15
  • [기획]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교회론 바로 세워 교회분쟁 줄여야 한국교회 희망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지상에 남긴 유일한 기관… 분쟁이나 교권 행사는 큰 죄 예수께서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고 한 교회(에클레시아)는 예수 그리스도가 지상에 남긴 유일한 기관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교회는 역사적 산물이나 종교적 결집체인 세상의 여타 종교기관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이 교회는 창세전에 작정된 하나님의 공동체이다. 기독교인들마저도 교회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마치 교회를 기복(祈福)을 위한 ‘세속적 종교’ 쯤으로 여기는 경우가 그것이다. ‘예수 믿고 만사형통’을 부르짖는 사람들이 그런 경우이다. 그러면 예수의 믿음으로 인해 고난 받는 사람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또 예수로 인한 순교자는 무엇인가? 성경은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은 순교자를 가장 복 받은 사람이라고 말한다(마 5:10, 벧전 3:14, 계 20:6). 그러므로 교회는 인생의 진정한 복(福)에 대한 개념을 전혀 달리하는 기관이다. 첫째, 성경은 이 교회에 대해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비밀을 맡은 기관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피로 사신 것(행 20:28),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집(딤전 3:15),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고전 1:2), 모든 만물 위에 있는 것(엡 1:22), 예수 그리스도의 몸(엡 1:23), 만세와 만대에 감취었던 비밀(골 1:26), 최후의 승리자(계 21장)라고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의 어떠한 여타 종교기관과 다른 것이 분명하다. 둘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에서 나온 것으로 구성된다. 로마서 5장 14절은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고 했고, 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는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고 했다. 즉 첫 사람 아담은 ‘오실 자’마지막 아담의 표상이라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첫 사람 아담이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그 신부가 된 것 같이, 마지막 아담 그리스도의 신부도 그리스도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어야 한다. 창세기 2장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그가 잠들며 하나님이 그 갈빗대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21-23). 첫사람 아담은 흙으로 지어졌으나, 그 배필 하와는 흙에서 지어진 것이 아니고 아담의 몸에서 나온 것으로 지어졌다. 세상의 모든 들짐승이나 공중의 각종 새들은 모두 흙으로 지어진 것이고, 첫사람 아담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따라서 흙으로 지어진 것들은 그 어떤 것도 아담의 배필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그 갈빗대로 하와를 지었다. 아담의 배필은 오직 아담의 몸에서 나온 것만이 그 자격이 있다. 그리고 “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니라”(24)고 했다. 에베소서 5장에는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해 말하노라”(24-32)라고 한다. 즉 첫사람 아담이 그의 몸에서 나온 것으로 만들어진 하와만이 배필로 삼은 것 같이,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도 그리스도의 몸에서 나온 것으로만 구성되어야 한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몸에서 나온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유월절 어린양으로 십자가에 달렸을 때, 그의 몸에서 나온 물과 피이다.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요 19:34).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는 물과 피로 구성된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요한1서 5:5-7).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물과 피로만 구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나온 것이 아니면 그것이 어떤 이름을 가졌든, 또는 공교히 꾸민 교리를 내세우든, 그리스도의 교회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 교회이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자신을 '거룩한 보편적 교회'(catholic church)라고 불렀다. 이 보편적 교회에는 아무런 차별이나 구별이 없다. 종이나 자주자나, 흑인이나 백인이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여자나 남자나 차별이 없다. 누구나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이 교회를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이 보편적 교회는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로 구분된다. “가시적 교회는 선택된 사람들의 전체 회원으로서 구성되었으며, 그들은 교회의 머리인 그리스도 아래 모여서 하나가 되었고, 또 하나이며, 하나가 될 것이다.” “그 교회는 모든 것에 충만한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몸이고 충만이다 그리고 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왕국이며 하나님의 집이고 가족이다. 이 교회 밖에는 구원의 정상적인 가능성이 없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재25장). 또 이 보편적 교회는 인간의 죄를 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은혜의 기관이다. 하나님은 죄로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태초부터 구원의 계획을 세우시고 인간과 언약을 맺었다. 그 언약은 때때로 인간 편에서 배신도 있었지만 파기된 적은 없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그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 1:1-3)고 했다. 이 같은 하나님의 섭리를 증언하는 기관이 곧 교회이다. 교회는 이처럼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존재이다. 그래서 인류의 삶에 교회가 그토록 중요한 것이다. 넷째, 교회의 분쟁은 대부분 말씀에 대한 불순종에서 온다.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이 교회를 놓고 분쟁하거나 교권을 행사하는 죄 또한 얼마나 크겠는가? 오늘날 교회의 분쟁은 모두 교회론이 잘못된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교회론이 바로 되면 교회가 분쟁할 수가 없다. 사무엘상 15장 22절에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첫사람 아담의 죄가 불순중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면 더욱 확연해 진다. 그러므로 목화자들은 바른 교회론에 대한 설교를 자주해야 한다. 초대교회의 설교는 하나님의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승천과 성령강림, 재림과 심판이라는 교회론을 구성하는 내용을 증언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만세와 만대에 감취었던 하나님의 비밀임을 알고, 그리스도 안의 영원한 생명을 알았다. 초대교회가 무서운 박해 아래서 수많은 순교자를 내면서도 끈질긴 생명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같은 설교에 기인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 승천과 재림과 심판이 없는 설교는 아무런 생명도 능력도 없는 종교강화(宗敎講話)에 불과한 것이다. 한국교회에 이런 가짜 설교가 난무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무슨 기복신(祈福神)으로 알고 세상에서 만사형통만을 역설하는 설교는 교회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 해설/기획
    • 기획
    2022-02-04
  • ■ 기획/300개 넘는 장로교단 언제까지 이대로 방치할 것인가?
    1907년에 단 7명의 목사로 출범한 한국기독교는 불과 110여년 만에 15만 여명에 이르는 목사를 가진 거대한 종교집단이 되었다. 매년 발행되는 교회연합주소록의 통계에 의하면, 300여 개 교단 중 대표성 가진 주요교단 29개에 속한 목사 수만 12만명에 이른다. 따라서 한국교회 전체 목사 수는 어쩌면 15만명보다 훨씬 많을 수도 있다. 한국기독교에 목사 수가 얼마인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문제는 근래 목회자의 전반적 수준이 너무 하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목회자의 수준 저하는 곧 한국교회의 불신으로 이어진다. 목회자의 수준은 학력이나 학벌 등 지적 신학적 수준만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신학을 기본으로 하는 목회자의 지적 상식적 수준은 기본적인 것이고, 여기에 영적 인성적 수준과 소명감이 갖추어져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 목회자 가운데는 단순히 영적 체험만을 앞세워 가장 기본이 되는 신학적 수준조차 의심스러운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한 번 목사안수를 받고 나면 더 이상 배우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부 군소교단 신학교들의 ‘무자격’ 목회자 배출이 문제 물론 목회자 자격은 교단에서 정한다. 한국기독교에서 정통을 지키는 교단에서는 대학 졸업생을 받아 3년제 신학대학원 과정을 거쳐 전도사나 목사가 된다. 보통 대학 졸업 후 7~8년이 걸린다. 또 다른 과정은 교단 사정에 따라 고졸생을 받아 4년제 신학과정과 2년제 대학원 과정을 거쳐 목사가 된다. 이 또한 최소 6~7년이 걸린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신학훈련 과정을 생략한채 ‘무자격’ 목회자를 양산하는 교단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수백 개의 간판이 내걸린 장로교 군소교단이 문제인데, 군소교단 총회신학교 가운데는 나이든 집사 권사 등을 모집해 한두 학기 등록금만 내면 졸업장을 주어 곧바로 목사안수를 하는 경우도 있고, 특정한 교단 신학교에 등록을 하고 한두 학기 다니다가 다른 교단 신학교로 옮겨가 더이상 신학공부는 하지 않은 채 목사안수를 받는 경우도 있다. 주로 나이가 들어 목회자가 되려는 사람들 가운데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되어 목사안수부터 받으려는 편법을 찾아 나서는 사람들에게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런 경우는 불과 2~3년이면 목사가 된다. 이들 장로교 군소교단 신학교들은 소위 ‘ 무인가’ 상태이기 때문에 통제없이 이적이 가능하다. 교단 신학교는 반드시 대학인가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 교단에서 필요한 목회자를 양육하는 것이지, 일반 사회에서 활동하는 인재를 양육하는데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도 비록 신학교는 무인가 상태로 운영되더라도 학제는 정통 신학교육 과정을 충실히 거쳐야 한다. 보통 신학부 8학기, 대학원부 4학기 정도의 교육기간을 거쳐야 제대로 신학교육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만 안다고 제대로 된 목회자의 자격을 갖추었다고 볼 수는 없다. 성경의 기본 언어인 히브리어와 헬라어는 말할 것도 없고, 기독교의 역사를 공부하는 교회사와 교리사, 역사적 보편적 기독교가 성경을 해석해온 성경주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달하는 설교학 등 목회자가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교육과정이 많다. 짧은 시간에 마칠 수 있는 교육과정이 아니다. 장로교 통합의 필요성이 여기에도 있다교회는 ‘하나’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오늘날 한국교회의 ‘무자격’ 목회자 양산을 이대로 방치해서는 안된다. 장로교 통합의 중요한 이유가 목회자들을 향해 여기에 있다. 가능한 정통성을 갖춘 전통교단들이 군소교단을 흡수하여 목회자의 재교육을 통해 한국교회의 건강성을 지켜가야 한다. 소위 대교단 목회자들은 군소교단 ‘저들은 우리와 다르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소위 장자교단을 자처하는 대교단이든, 1백여 개의 개척교회로 이루어진 군소교단이든, 모두 ‘하나의 장로교’라는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 건물의 한쪽 면이 부실하여 무너지면 건물 전체가 영향을 받게 되어 곧 모두가 무너지는 날이 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장로교 지도자들은 교단이기주의를 버리고 과감하게 장로교 통합운동에 나서야 한다. 한국교회에는 장로교 끼리 연합하자면서 장로교의 연합과 일치를 논의하는 소위 장로교연합체만 10여 개에 이른다. 한국장로교연합회, 한국장로교총연합회, 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대한예수교장로회총연합회, 대한예수교장로회협의회, 한국장로회협의회 등등. 장로교단이 얼마나 많으면 장로교연합회라는 간판이 이처럼 많이 내걸릴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들 장로교단은 하나같이 신학은 정통개혁신학이요, 신앙노선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따른다고 한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간판을 다르게 내달고 딴 살림을 차려야 하나. 이는 성경도, 복음도, 기독교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순전히 기독교라는 간판 아래서 먹고 살려는 인본주의적 세속적 욕심에 기인한다고 밖에 볼 수 없다는 것이다.목회자의 도덕적 해이로 한국교회 신뢰 잃어 모든 교회와 목회자는 한국기독교라는 ‘한 그물’에 싸인 물고기와 같다. 그 그물에는 질 좋은 고기와 질이 낮은 고기가 섞여있으나, 그 교회를 밖에서 보고 있는 세상 사람들은 구분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어느 한 목사의 도덕적 일탈은 전체 목사들의 문제로 비화된다. 그래서 목사도 교회도 도매금으로 불신을 받게 된다. 근래 수년간의 한국교회 마이너스 성장에는 목회자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다. 요즘 우리사회에는 ‘미투’니 ‘그로밍’이니 하는 말로 고위 공직자나 목회자들까지 문제가 되고 있다. 여기에는 시기와 질투와 모함도 있다. 그러나 이런 일에 목회자가 틈을 보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직업인 목회자가 스스로 자신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하고, 또 노회나 총회가 감독적 입장에서 통제해야 한다. 교단이 지금처럼 갈갈이 찢어져 있는 상황에서는 감독이 어렵다. 따라서 장로교 통합 논의 없이 한국교회의 미래 또한 논하기 어렵다. 장로교 통합을 진지하게 말하는 지도자들이 나와야 한다.
    • 해설/기획
    • 기획
    2020-06-12
  • 장로교단 통합 없이는 효율적 이단 방지대책도 어렵다
    ‘이단감별사’라는 직업까지 생겨난 한국교회한 국기독교에는 유달리 이단문제가 심각하다. 그래서 아예 직업이 이단을 감별하고 먹고 사는 부류도 생겨났다. 소위 이단연구가들이 그들이다. 그런데 한국교회에서 이처럼 이단이 창궐하는 근본적 배경은 교회의 무질서에 원인이 있다. 한국기독교는 헌법상 종교자유를 빙자해 교단이나 총회의 간섭을 받지 않는 마치 ‘무당 절간’처럼 운영되는 교회가 많다.또 거기에 한국인의 정신의식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비결신앙(秘訣信仰)이 성경을 방자하게 자의적으로 해석해 섹트를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다. 비결이란 세싱에 알려지지 않은 비밀스러운 어떤 구원의 방법을 뜻한다. 즉 어떤 특별한 구원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특정인의 말을 믿고 따르는 것이다. 이를 교주우상주의라고 한다. 기독교의 성경을 인용하며 나타난 통일교나 천부교나 영생교 등이 그런 것이다.기독교 계통 이전의 신종교(新宗敎)는 대체로 정감록 같은 한국적 비결신앙을 그 모태로 한다. 증산교 계열의 수많은 유파가 그 대표적 예이다. 그런데 기독교 계통의 신종교 역시 이 비결신앙에 기반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성경을 이 비결로 설명하고 해석하는 것이다. 심지어 한국교회 주변에서 빈번히 벌어지고 있는 시한부 예수 재림운동도 장소와 날짜를 중요시 하는 비결에서 비롯되고 있다.이번 코로나19 사태로 드러난 증거장막성전 신천지 신도가 20만명이 훨씬 넘는 것으로 확인됐다. 여기에 하나님의교회 안상홍증인회도 그 숫자에 못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보면 한국교회 주변에 이단세력은 약 일백만명에 이른다고 볼 수 있다. 100만명은 전체 기독교 인구의 약 10%에 이르는 숫자이다. 그러니 그들을 상대해서 싸우는 이단감별사라는 직업이 생겨난 것도 무리는 아니다.이단 문제는 종교 내부의 문제일 뿐이번 코로나19 사태에도 이단 혹은 사이비 집단으로 비판받는 신천지 등의 문제가 생기자, 교계주변에서 ‘이단사이비종교특별법’ 제정 운운하고 나서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종교자유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법은 이단을 모른다”는 것이 대원칙이다. 법이 종교적으로 이단이나 사이비를 알게 되는 순간에 그 사회는 중세 기독교시대와 같이 종교재판이나 마녀재판이 벌어지게 된다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이단이나 사이비는 어떤 경우에도 종교집단 내부의 문제이지 법이 개입할 문제는 아니다. 종교가 그 근본 원리를 일탈해 반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사교’(詐敎)의 문제는 특별법 없이도 현행 형사법으로 얼마든지 제어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기성종교로부터 이단(理端)이라는 비판을 받는 신종교(新宗敎)로부터 시작된다. 인류사에서 신종교가 처음에 이단 아닌 종교는 어디에도 없었다. 불교는 힌두교로부터 이단이었고, 기독교는 유대교로부터 이단이었으며, 이슬람은 기독교로부터 이단이었다. 문제는 그 종교가 가진 역사관과 세계관이 인류 보편적 상식에 바탕하는 건강한 것인가, 아니면 보편적 상식을 초월한 비이성적인 것인가 여부로 그 종교의 보편성이 판단될 뿐이다. 그런데 모든 신앙은 그 종교가 갖는 교리내용에 대한 각 개인의 심리적인 확신을 가질 때 가능하다. 어떤 세계적 종교일지라도 그 교리에 대한 확신이 없을 때는 그 종교를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처럼 신앙에는 그 종교의 가르침에 대한 확신이라는 인간의 심리현상과 그 공동체에서 역사적으로 고백되어온 교리가 합해져 하나의 온전한 종교현상으로 나타난다. 세계적 클래식 종교들도 모두 이같은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따라서 어느 한 종교의 교리가 불합리하다고 판단된다는 이유로 그 종교의 신앙을 잘못된 것이라고 정죄한다면 이는 매우 중대한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정죄의 태도는 기성종교에서 파생되는 이단이나 신종교에 대하여 갖기 쉬운 현상이다. 그러나 상기해야 할 것은 어느 한 종교에 대해 불건전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곧 자신의 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가 거부되는 결과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의 자유는 어떤 경우에도 무한정 보장되어야 한다.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는 정도가 곧 그 사회에서 양심의 자유가 보장되는 척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른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단의 문제는 분명한 비판과 변증이 따르게 된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수많은 이단대책 활동에도 이단은 계속 늘어한국교회가 이단대책을 위해 각급 교단 차원과 연합단체 차원에서 이단대책 조직을 만들고 '이단방지대책'을 내어놓고 있다. 그래도 이단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계속 늘어나고 있다. 기성교단에서 이탈한 교인들이 줄지어 이단으로 넘어가고 있다. 이는 효율적인 이단대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방증이다. 그 이유는 두말할 필요없이 교계의 분열에 있다. 300여 개가 넘는 장로교단의 간판아래 사이비 신앙이 독버섯처럼 자라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창궐하는 이단방지를 위해서라도 교단통합이 이루어져야 한다. 로마 가톨릭이나 그리스 정교회, 또는 성공회나 루터교 등은 미사나 예배를 교단이 제공하는 예배의식문에 따라 집전하면 된다. 모든 주일예배는 교회력에 따라 예배의식문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설교 중심의 개혁교회는 설교자가 강단에서 성경만 강해하고 맏음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온갖 세속적 이야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비성경적 비교리적 망발도 나타나게 된다. 그러다가 어떤 이단감별사가 그것을 비판하고 나서면 꼼짝없이 이단으로 몰려갈 수도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이단시비는 그만큼 가볍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이단 아닌 이단도 많이 남발된다. 이런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교단의 감시가 중요하다. 그 교단 내부에서 엉뚱한 주장이 생겨나지 않게끔 노회나 총회로부터 감시되어야 한다. 그런데 교단이기주의가 작동하게 되면 교단 내부의 이단은 숨긴채 그 교단 밖의 사람에 대한 이단시비가 빈번히 일어나게 된다. 그것은 교계의 분열책동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장로교단이 통합되면 이런 문제가 해소되고 효율적 이단대책이 이루어 질 수 있다.
    • 해설/기획
    • 기획
    2020-05-29
  • 한국교회, 장로교 분열 극복 없이는 신뢰 회복 어렵다
    개혁교회(Reformed Church)라고 불리우는 장로교는 노회(老會)를 중심하는 교파이다. 노회가 중심이 되어 목사를 양육하고 양육한 목사를 파송해 지교회(支敎會)를 설립한다. 그리고 다시 노회의 회원인 목사와 지교회를 대표하는 장로를 노회의 대표로 뽑아 총회(總會)에 총대로 파송하는 대의제(代議制) 정치체제를 가진 교회이다. 따라서 장로교는 지교회, 노회, 총회가 하나의 교회로 구성된 조직이다. 그러므로 장로교는 원리적으로는 노회에 소속되지 않은 독립된 ‘개교회’가 존재할 수 없다.한국기독교는 장로교가 약 70%를 점하고 있다. 그런데 처음에 하나로 시작한 장로교가 1백여년 만에 300개가 넘는 교단으로 갈라져 있다. 장로교가 이토록 많은 교단 분열을 기록한 예는 세계교회사에서 한국교회 외에 다른 나라에서는 유례가 없는 일이다.하나의 한국장로교가 갈라지게 된 것은 일제하의 신사참배 강요에 패배한 결과이다. 한국장로교는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을 숭배하는 신사참배를 국민의식이라며 받아들이고, 동방의 현인신 소화천황(現人神 昭和天皇)을 하나님께 예배하기 전에 먼저 경배하는 우상숭배의 죄를 저질렀다. 그로인해 해방 후 교회는 분열했다. 그 분열이 결국 오늘의 장로교 분열상황을 가져온 것이다. 명분 없는 교단분열은 범죄이다일제 식민지 통치하의 총칼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신앙절개가 겪였다 하더라도 해방 후에 회개하고, 그 같은 잘못된 신앙적 역사적 오류를 청산했어야 했는데, 한국교회는 이를 외면하여 결국 교단 분열이라는 치욕의 길을 걸었다. 장로교 분열의 시초가 해방 후 신사참배 논쟁에서 비롯되었음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그런데 한번 바람난 배우자는 두 번 세 번 바람을 피우듯이, 한번 분열하기 시작한 장로교는 습관처럼 분열하면서 국민과 역사 앞에서 부끄러워하거나 민망해 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같은 교단 안에서 교권을 두고 갈등이 생기면 학연과 지연에 따라 파벌을 이루고, 감투를 노리는 사람들이 같은 신학교 출신끼리 또는 지역 색을 업고 ‘우리가 남이가’라며 교단을 만들어 나간다. 교단분열은 범죄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데, 교단분열을 예사로 여긴다. 보편적 교회를 분열시키는 것은 이단에 가담하는 것과 다름없는 범죄이다. 이는 한줌도 안 되는 종교적, 세속적 이익을 따르는 타락한 행위이기 때문이다.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분열한 교단 이름을 달고 교계 연합단체에 다시 가입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정통성을 인정받은 양 행세한다. 사실상 교계의 교단연합단체들이 연합과 일치를 이루는데 힘쓰기는커녕 오히려 교단을 분열시키는 촉매가 되고 있는 셈이다.“너희는 하나 되라”는 성경의 말씀과 ‘교회는 하나’라는 원리가 있음에도 명분 없이 교단을 분열시켜 교권욕과 명예욕에 찌들어 살아가는 군상들을 교계의 지도자들이라고 인정을 해야 하는가? 300개가 넘는 장로교단들은 하나같이 신앙, 교리, 신조가 똑 같다. 그러면서도 하나가 되지 않고 있다. 이런 기독교는 한국 외에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진정으로 새로워지려면 장로교 하나 되는 운동부터 해야 한다. 장로교 하나 되는 운동 없이 한국교회 도덕성 회복을 말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한국교회가 새로워지려면 장로교 하나 되는 운동부터 해야 한다첫째, 한국장로교회에 진보와 보수가 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한국장로교 안에서 진보와 보수를 말하는 사람들은 분열주의자들의 상투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형제를 정죄하는 사탄의 혀를 가진 자들이다.한국장로교가 세계교회에 자유주의 신학과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으로 일어난 6.25전쟁 이후 장로교 안에서 진보니 보수니 하는 논쟁으로 단절이 있었다. 소위 WCC 문제가 그것이다. 강단교류가 금지되고 서로를 이단시 하는 우(愚)를 범한 시대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80년대 이후 그런 험악한 오해는 사라져 가고 있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침체기에 들었다. 이제 한국교회가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서로의 불신을 거두고 장로교의 통합이 절대적으로 요구되고 있다.한국교회는 먼저 분열로 인해 교인들이 상처를 입었고, 그 다음은 교회 밖의 사람들이 교회를 이상하게 보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교인들끼리 만나면 서로를 이단시하고 정죄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같은 형제 간에, 집안 간에도 합동이니, 통합이니 하며 교회가 나뉘었다. 그 결과 교회에 대한 신뢰에 불신을 가져왔다. 이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교단통합으로 사회에 새로운 모습을 보여야 한다.둘째, 한국교회 도덕성 회복을 위해서 반드시 교단분열이 극복되어야 한다. 한국교회는 70-80년대 교회의 급성장 이후 목회자의 영적 지적 인격적 수준이 너무 낮은 지도자들이 많이 유입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교단분열로 목회자를 양성하는 교단신학교가 우후죽순 간판을 내건데 원인이 있다. 여기에서 제대로 인성교육이나 신학교육 과정을 제대로 마치지 않고 졸업하고 목사가 되거나, 아예 신학교육 과정 자체를 무시하고 교단이 필요로 하는 몇 푼의 돈을 내고 목사가 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작금 장로교 군소교단은 대부분 여성목사들에 의해 유지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 여성목사 중에는 성경의 기본 언어인 히브리어나 헬라어를 습득하지 못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조직신학이나 교리사 또는 교회사 등에 대해서도 제대로 배운 일 없이, 겨우 성경만 좀 읽고 몇 절 외울 줄 알며, 기도하여 은사체험을 했다는 것만으로 목사안수를 받은 자들도 많다.셋째, 최근 ‘미투’니, ‘그루밍’이니 하는 성범죄 사건이 빈번이 일어나고 있다.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특히 목회자의 성범죄는 그 목사가 속한 개교회나 교단뿐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의 도덕성에 영향을 미친다. 목회자는 그 소속 노회나 총회의 감시를 받는다. 그러나 그 감시가 느슨한 교단에서 목회자의 일탈이 번번히 일어나고 있다. 이는 심각한 문제이다.장로교단의 통합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능한 정통성을 인정받는 대교단이 군소교단을 흡수하여 목회자 재교육을 통해 한국교회의 도덕적 건강성을 확보해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대교단 지도자들이 교단이기주의를 버리고 과감한 교단통합운동에 나서야 한다.한국기독교가 장로교의 분열을 이대로 방치하는 것은 모두가 망하는 한국교회의 윤리적 패배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장로교 지도자들 스스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 해설/기획
    • 기획
    2020-05-15
  • 특별기고/시진핑 정부의 중국기독교 탄압에 대한 ‘샬롬나비’ 논평서
    한국교회는 중국교회의 예배와 신앙자유를 위해 힘써 기도해야 하겠다지난 1월 중국 산동성 조장시, 곡부시 등을 방문하는 기회가 있었다. 복음을 전하는 가정(지하)교회에 수천, 수백 킬로미터 거리에서 찾아온 청소년, 청년들을 보았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성경공부를 하고 있었다. 비밀 주택에서 거주하면서 언제든 들이닥칠 당국의 경찰에 의해 붙잡힐 것을 알면서도 장차 주님의 때가 오면 자국민을 복음화 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한 현장을 목격하면서 주님의 도우심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중국은 기독교를 크게 삼자(三自)교회와 가정(家庭)교회로 구분한다. 먼저 삼자교회란 중국당국이 유일하게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교회이다. 삼자(三自)란 자치(自治)·자양(自養)·자전(自傳)인데, 예를 들어 말하면 외국인이 운영하는 교회나 외국 선교사들의 활동과 중국인들의 접촉을 금지하여 중국인들로부터 단절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삼자교회는 중국국가의 통제에 따라 중국 사회주의 건설에 부합하는 예배를 완전히 수용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가정교회는 관제 종교를 확실히 거부하고 성경의 순수 신앙을 추구하고자 지하로, 가정(家庭)으로 숨어든 교회이다. 최근에 공산당에 의해 강제적으로 폐쇄당한 베이징 시온교회도 가정교회에 속한 신앙공동체이며, 중국 당국의 주된 탄압 대상이었다.현재 중국은 강력한 군사력 건설을 통해 국가 전략목표를 달성하려는 이른바 ‘강군몽’(强軍夢)으로 동북아시아는 물론 전 세계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 그동안 북핵 위기 이면에 가려졌던 중국 변수가 서서히 가시화되면서 군사 충돌의 전운(戰雲)마저 감도는 위협적인 분위기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시진핑은 집권 이래 최악의 기독교 박해를 감행하고 있다. 심지어 허난성에 있는 교회를 폐쇄하는 강력한 조치를 취하고 성경과 십자가를 불태우는 비상식적인 작태를 저지르고 있다. 사실상 중국 장기집권을 획득하려는 ‘국가 주석 임기 제한’을 철폐하면서 헌법까지 개정하여 영구집권은 코앞에 다가와 있다.중국 기독교인들에게 가하는 인권유린의 현장은 참으로 처참하다. 위와 같은 심각한 중국 공산당에 의한 기독교박해와 인권 해를 중단하라는 샬롬나비 논평을 다음과 같이 발표한다.1. 중국 국가주석 시진핑(習近平)의 영구집권은 중국과 주변국들에게 위협이 되고 있다.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시진핑 국가 주석 10년 임기제한 삭제를 위한 개헌을 추진하여 이미 지난 3월 11일에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99.83%의 찬성으로 가결하였다. 기존의 법에서는 국가주석과 부주석의 임기를 2번 이상 연임할 수 없다고 되어 있었다. 하지만 주석 임지 제한을 폐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켜 최대 2023까지 국가주석으로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는 심각한 경지에 놓여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중국의 방송들은 황금시간대를 이용하여 시진핀의 사상을 방송하여 그의 우상화에 열을 올리고 있고, 반대 여론을 봉쇄하기 위해 인터넷 매채들을 통제하는 독재화의 길을 걷고 있어 주변들에게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2. 국제기독교 감시단체에서는 중국 공산당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더욱 강화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종신집권을 노리는 법안이 통과된 후에 시진핑 주석은 영구집권을 위해 그의 통치 세력에 가장 방해가 되는 기독교 세력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강력한 박해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2018년 에는 ‘종교사무 조례’의 시행으로 인해 종교인과 종교단체의 감시를 강화하는 등 박해가 진행되고 있다. 조례에 따르면 불법성 종교활동으로 인해 중국당국에 발각이 되면 최대 한화로 환산하여 300만원에서 3000만원 이상의 벌금을 지불해야 하는 상황이다.현재 중국 인민정부는 민족종교판공실 명의의 통고문을 임의로 붙여 교회 폐쇄를 강행하고 있다. 그 예로 ‘시온 교회가 등록을 하지 않고 사회단체 명의로 활동을 전개해’ 종교사무조례를 위반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태는 최근 중국 전역에서 벌어지는 일상적인 사건들이다. 이제는 한국선교사들에게 죄목을 뒤집어 씌어 추방하는 사태가 발생하고 있다. 허난성에서는 수백 수천의 교회와 십자가와 예배 성구들을 불태우고, 밤새 강제로 철거하며 교회 폭파를 저지르고 있다. 중국 공산당이 이렇게 공개적으로 기독교 박해와 인권 유린을 자행사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 우리의 가슴이 대단히 아프고 고통스럽다. 조속히 비정상적인 종교정책을 개정하여 중국기독교인들의 예배보장을 촉구한다. 3. 중국내 기독교지도자와 인권운동가들의 체포를 중단하고 목회자의 종교활동을 보장하라.호주의 매콰리 대학교(Macquarie University)의 케빈 캐리코 교수는 “중국이 기독교인 인권을 대하는 관점은 매우 무섭다”면서 이것이 시주석의 철통 통제가 사태를 더 악화시키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임기 연장이 공식화 되고 있는 이때에 중국의 정부당국이 중국민의 생활과 종교인들의 삶을 손바닥 보듯이 철두철미 감시하고 종교의 자유와 인권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음을 개탄하며 하루빨리 인권유린의 현장에서 해방시켜 거대한 중국의 중원의 세계관과 철학에 맞는 처신을 강력히 촉구한다.4. 중국 당국은 기독교인들의 성경과 예배 성구를 불태운 잘못을 사과하라.중국에서는 가정교회가 활성화 되고 성장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이 2018년 2월 종교법안을 개정하여 새 종교 조례를 시행하면서 가정교회의 단속은 더욱더 강력해 지고 있다. 북경 최대 가정교회인 시온교회는 지난 10년간 비교적 순탄하게 성장했으나 중국 정부의 타깃이 되어 최근 폐쇄됐다. 게다가 개정된 종교 문제 규정의 일부가 신앙을 포기하라는 서명이나 압박의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아동, 청소년 성인들이 교회생활을 금지하고 여러 가지 형태의 진술들을 강요하는 실정이다. 심지어 기독교인들의 사회적 활동을 제한하는 위험한 발상을 꾀하고 있음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다. 앞으로는 공산당과 기독교인들이 충돌하는 돌발적인 사태가 우려되고 있는 시점에 현명한 판단하기를 기대한다.5. 중국 공산당은 기독교를 체제의 경쟁자로 보기 시작했다.심각한 중국 공산당의 탄압에도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 중국의 가정교회는 전국적으로 널리 퍼지고 있는 실정이다. 심지어 동방의 예루살렘으로까지 불리는 중국 저장성 윈저우시는 인민의 15%가량이 기독교인이라는 분석이 나올 정도로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그렇다면 이제 중국 당국은 기독교 단체와 교회를 두려움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 입장에서는 공산당원 수자를 앞지르는 기독교인들의 성장에 매우 불편한 생각이 든다는 평가이다.6. 중국당국은 수감자들을 조속히 석방하고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라.세계기독교인들은 중국의 기독교 박해와 인권유린 사태를 심각하게 판단한다. 역사적으로 긴 세월동안 교회를 유지하며 신앙생활을 한 교회와 지역들에게 교회의 폐쇄와 탄압을 자행하는 것은 큰문제이다. 심지어 당국이 허락한 교회마저 철거하는 사태가 신장 위구르족 자치구에서는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강제 해산과 투옥을 일삼고 있는 시점에서 중국 당국은 인권을 보장하고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라. 중국은 헌법 제33조 3항에 의해 국가는 인권을 존중하고 보장해야 하며, 제36조에서 공민의 종교적 신념의 자유와 "정부에 의한 종교인들의 합법적인 권리와 이익을 보호“를 규정하고 있다. 현재 기독교 박해와 인권 침해사태는 헌법에 대한 중국정부의 위반이다. 북한이 저지르고 있는 종교탄압을 답습하고 있는 중국을 주변국들은 안타깝게 인식하고 있다. 이제 중국당국은 종교인들을 무참히 압박하는 재교육 수용소를 폐지하고 그들을 조건 없이 석방하라. 종교적인 자유의 신념들을 파괴하지 말고 인류의 평화와 자유를 인정하라. 그러므로 중국은 자국 내 교회들을 강제 폐쇄하는 비상식적이고 비인간적인 만행을 중단하고 기독교인들이 추구하는 기본적인 종교의 자유를 분명히 보장할 것을 강력하게 촉구한다.7. 한국교회는 이제 중국교회를 위해 깨어서 기도하며 아픔을 함께 해야 한다.중국교회가 정부당국에 의해 탄압하는 이 박해의 어려운 시기에 한국교회는 안일함에서 깨어나 중국교회와 아픔을 함께 하며 중국교회의 예배의 자유와 안전을 위해 힘써 기도해야 하겠다. 한국교회가 어려울 때 많은 외국교회들이 함께 기도하며 도왔던 것을 기억하며 이제 한국교회가 깨어나 중국교회를 위하여 함께 합심하여 기도해야 하겠다.2018년 10월 22일 샬롬을 꿈꾸는 나비행동
    • 해설/기획
    • 기획
    2018-10-26
  • 특별기획 / 신사참배 80년 회개 ‘한국교회일천만 기도대성회’의 의미
    공교단 아닌 개인들의 모임… 한국교회 대표성 가질 수 없어 아쉬움태양신 숭배자들의 ‘성지순례’한국교회일천만기도운동본부라는 교계 한 단체가 ‘한국교회 신사참배 80주년 회개기도대성회’를 광화문 사거리에서 대대적으로 연다고 한다. 일본의 태양신 천조대신(天照大神, 아마데라스오미가미)을 섬기는 신사참배(神社參拜)는 당시 다른 교파들이 다 일제에 굴복하여 신사참배를 결행한 후에도, 지금의 대한예수교장로회인 ‘조선예수교장로회’만은 남아 반대했다. 그러나 일제의 강압에 조선예수교장로회도 끝까지 버티지 못하고 1938년 9월 제27회 총회에서 “신사는 종교가 아니고 국가의식”이라며 신사참배를 결의했다.총회의 결의에도 불구하고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목회자들은 교회에서 쫓겨나 감옥으로 끌려가고, 끝까지 반대하던 교회는 문을 닫았다. 신사참배를 하는 교회가 ‘정통’이 되고, 반대하던 교회는 ‘이단’이 된 것이다.그리고 신사참배를 이끈 지도자들은 ‘성지순례’(聖地巡禮)에 나섰다. 그들의 성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땅, 이스라엘이 아니라, 천조대신의 신궁(神宮)이 있는 일본이었다. 김응순 이승길 장운경 등 조선의 대표적 장로교 목사들은 1938년 오문환의 인솔로 당시 개통된지 얼마 되지 않은 경부선 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가 다시 관부연락선으로 시모노세키에 도착해 먼저 교도의 헤이안신궁(平安神宮)을 참배하고, 어어서 도교의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와 미에현에 있는 이세신궁(伊勢神宮), 나라에 있는 가시하라신궁(柵原神宮)까지 순례하고 돌아왔다. 그후 그들 이외에도 소위 지도급 목사들이 일본신사에 수없이 ‘성지순례’를 다녀왔다.1938년 조선예수교장로회의 신사참배 결의는 결코 천조대신의 신사에 대한 단순한 참배가 아니었다. 한국기독교를 철저히 일본의 태양신을 섬기는 요상한 우상숭배 집단으로 바꾸려는 일제의 야심찬 계획이었다. 이후 그들은 경신숭조(敬神崇祖)를 가장 중요한 과제로 내세우고, 기독교를 근본적으로 혁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 일본정신에 기초한 일본적 기독교를 수립하고자 했다. 한국기독교는 철저한 일제의 어용교회가 되고 만 것이다. 그리하여 1945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는 사라지고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탈바꿈 하고 말았다. . 독일교회와는 너무도 다른 한국교회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교회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독일교회의 약 80%에 이르는 ‘독일기독교도’(DC)는 나치의 어용교회였다. 나치를 반대하던 일명 ‘고백교회’는 불과 10%도 채되지 않았다. 고백교회는 1934년 5월 발표된 ‘바르멘선언’을 충실히 따르는 교회였다. 바르멘선언은 “우리는 마치 교회가 인간을 스스로 높이면서, 주님의 말씀과 사역을 인간들이 임의로 선택한 어떤 욕망, 목적 및 계획에 이용할 수 있는 것처럼 가르치는 것을 거부한다”며, 나치의 협력 요구를 거부했다. 당연히 그 지도자들은 감옥에 갇치거나 사형당했다. 여기에는 이르베르츠 야코비, 니젤, 이반트, 아스므센, 힐데브란트, 헬트, 칼 바르트, 니뮐러, 본훼퍼 목사 등이 참가했다.그러나 독일교회는 전쟁이 끝난 1945년 10월 ‘슈투트가르트 죄책고백’을 통해, 당시 절대다수를 차지하던 나치의 어용교회인 독일기독교도를 해산하고, 그 앞잡이들은 모두 교회에서 좇아냈으며, 소수의 저항집단이었던 고백교회가 그 정통성을 이어갔다. 나치의 어용교회를 거부한 그들이 주축이 되어 EKD를 창립한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독일복음주의교회’(EKD)이다.오늘의 한국장로교가 300여 개에 이르는 교단으로 분열하는 등 이처럼 추악한 몰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비의 죄를 삼사대에 이르게 한다’는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1945년 8월 15일 느닷없는 해방이 되자, 한국교회 신사참배 지도자들은 입을 싹딱고 ‘회개’를 요구하는 반대파를 향해 “우리도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그랬다”며 뻔뻔스러운 변명으로 일관했다. 교단총회는 제27회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했을뿐, 회개는 없었다.한국교회도 해방 이후 신사참배 주도자들을 모두 교회에서 좇아내고 신앙적 양심이 있는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전혀 새롭게 출발했어야 했다. 그러나 노회든, 총회든 신사참배를 주도한 자들끼리 똘똘 뭉쳐 감쌌다. 결국은 분열이었다. 장로교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감옥살이를 한 목사들이 중심된 ‘고신’의 분열 이후, 마치 봇물 터지듯이 300여 개의 교단으로 나뉘었다. 이젠 교단분열을 아무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양심이 화인(火印)을 맞아 마비된 것이다. 세상에 이런 기독교는 한국 외에 어디에도 없다.신사참배 지도자들의 후손들은 지금도 잘먹고 잘산다한국기독교를 일제의 어용교회로 전락시키고, 태양신을 숭배하는데 앞장섰던 신사참배 지도자들은 본인들 뿐 아니라, 그 자녀들 또한 일본과 영국, 미국 등지로 나가 유학하고 돌아와 대학이나 교회에서 자리를 잡았다. 해방후 한국교회는 그들에 의해 지배되었다. 80년이 지난 이젠 그들의 손자와 증손들이 그 덕을 보고 산다. 부산의 한 목사는 신사참배에 앞장선 댓가로 일본 총독부 학무국으로부터 10여 개의 학교를 인가받아 학원재벌이 되었다. 지금은 그의 후손들이 그것을 운영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신사참배 60년이 되던 2008년 9월에 이르러서야 제주선교 100주년을 기념해 모인 제93회 총회에서 합동, 통합, 합신, 기장의 지도자들이 제주국제컨벤션센터에서 사상 처음으로 한 자리에 모여 회개 기도를 한 바 있다. 그러나 한국기독교의 신사참배 문제는 아직도 살아 있다. 지금 한반도가 남북으로 갈라진 이유 또한 태양신에 굴복한 한국교회의 신사참배죄에 대한 죄벌에서 찾아야 한다. 그리고 한국기독교가 그 덩치에 비해 허약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단 한번도 신사참배죄에 대해 진정성을 담은 죄책고백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교계의 일부 목회자들이 중심이 되어 신사참배 80주년 회개 기도성회를 갖는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아쉬움도 있다. 한국교회의 신사참배는 교단이라는 공교회의 범죄이다. 죄를 지은 자가 회개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공교단이 아니라 개인들이 모여 회개하는 것이 과연 대표성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강춘오 목사>
    • 해설/기획
    • 기획
    2018-10-19
  • 성경은 어떤 책인가?
    ‘정경화’ 과정에 하나님의 뜻이 구현된 것으로 믿고 인정해야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는 성경은 쓰여진 연대와 시대적 폭이 넓어 그 기간이 주전(B.C) 1300년경부터 주후(A.D) 100년경까지 약 1400년에 걸쳐 기록되었다.이 책들은 만물의 기원에 대한 고대의 시가, 율법, 사사(지도자)들의 영웅적 활동, 이스라엘 열왕에 대한 역사, 선지자들의 예언, 현인들의 지혜, 제사장들의 예배의식, 종교적 시가 등으로 구성된 구약성경과, 예수의 탄생과 그의 가르침, 사도들의 전도활동과 초대교회 지도자들의 편지 및 묵시록 등으로 구성된 신약성경으로 나누인다.1. 구약성경(총24권) <39권)구약성경은 크게 세 종류로 구성된다.① 율법(Torah):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전5권). ② 예언서(Nebiim): 전기 예언서=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전4권). 후기 예언서=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12소예언서(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전4권). ③ 성문서(Kethubim): 시편, 잠언, 전도서, 욥기, 에스더, 룻기, 아가, 예레미야 애가, 다니엘, 에스라-느헤미야, 역대서(전11권)이다. 기원전 250년경 이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70인역)하는 과정에서 예언서의 사무엘과 열왕기를 각기 상·하로 나누고, 또 한 권으로 묶여있던 호세아로부터 말라기까지 12소예언서를 각각의 책으로 나누었으며, 성문서에 한 권으로 편집되어 있던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각각 나누고, 역대기를 상·하로 나누어 총39권이 되었다. 기독교는 이 헬라어 번역의 편집을 따르고 있다.2. 신약성경(총27권)예수의 가르침과 초대 사도들의 전도활동을 담고 있는 신약성경은 기독교만이 가진 독특한 정경으로 네 종류로 구성된다.① 복음서: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전4권). ② 행전: 사도행전(전1권). ③ 서신: 로마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후서,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전서, 베드로후서, 요한1서, 요한2서 요한3서, 유다서(전 21권). ④ 묵시: 요한계시록(전1권)이다. 3. 성경의 기록과 목적① 모세오경(Torah): 처음부터 ‘토라’라고 부르는 오경은 계시의 책으로서 구약의 다른 책들보다 더 높은 권위와 신용을 얻고 있었다. 이 책은 율법서로서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계시하신 것이다.2) 예언서(Nebiim): 예언서는 ‘네비임’이라 한다. 이스라엘 역사를 반영하고 있는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는 역사서로 분류되는 것이 아니라 ‘전기 예언서’이다. 이는 그 저자가 예언자적 시각에서 역사를 다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 이사야, 예레미아, 에스겔은 12소선지서와 함께 ‘후기 예언서’이다.③ 성문서(Kethuim): 성문서라고 불리우는 ‘케튜빔’은 에스라, 느헤미야, 역대기가 이스라엘의 사실상 역사이지만 성문서에 편집되었고, 다니엘서는 ‘예언서’임에도 성문서에 편집되어 있다.④ 신약성경 :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과 달리, 처음부터 헬라어로 기록된 신약성경은 여러 저자들에 의해 쓰여졌지만 그 내용은 하나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것은 나사렛 출신 마리아의 아들 예수가 곧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라는 것이다. 신약성경은 정경상(正經上) 예수의 가르침인 4복음서가 먼저 쓰여진 것이 아니라, 바울의 편지가 먼저 쓰였고, 그 후에 누가복음이 나타났다. 그리고 이어 마태, 마가가 기록되고, 요한복음은 맨 나중에 기록되었다.신약성경은 ‘하나’의 메시지를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다양한 형식으로 이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한다. 저자마다 강조되는 기록 목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라고 했다. 이는 구약 성경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요한복음은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라고 쓰고 있다. 그러나 당시 저자들이 성령의 영감을 받아 기록한 원본 책들은 모두 소실되었고, 이 원본에서 베껴 쓴 사본들이 남아 있을 뿐이다. 성경 사본은 그것이 발견된 지역의 이름을 따서 시내산 사본, 알렉산드리아 사본, 바티칸 사본 등등 여러 종류의 사본들로 불린다.주후 2세기 말경부터 이들 신구약 성경은 다시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라틴어 역본 중에는 주후 4세기 말에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제롬 Jerome이라고도 함)에 의해 번역된 불가타(Vulgata)역이 가장 유명하다. 그리고 현재 성경은 전 세계에서 1천 가지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또 다른 언어들과 방언들로 번역되어 가고 있다.4. 성경의 영감“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성경은 다른 책과 달리 하나님의 영감(靈感)에 의해 쓰여진 글이라는 점이다. 영감(Inspiration)은 성령의 초자연적 영향력(하나님의 숨)이 불어넣어졌다는 뜻이다. 모세나 다윗이나 예언자들은 영감된 사람들일 뿐아니라, 자신이 영감되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예언자들은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다.” 또는 “주님의 말씀이 내게 임하셔서 말씀하시기를”과 같은 표현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예수님은 구약의 율법과 예언자들의 기록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요 10:33 이하). 성경의 책들을 쓴 저자들은 모두 성령의 초자연적 개입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초대교회 사도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살전 2:13).영감은 진리의 축자적 전달이긴 하지만, 그러나 이것이 꼭 하나님께서 저자에게 구술(口述)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 보다 저자의 지식, 개성, 환경, 경험 등 다른 요소들을 포함한 그 배후에 성령의 감동이 작용하여서 그 계시를 나타내게 하신 것이다.성경은 기독교에 의해 주후 393년 힙포레기우스 회의와 397년 칼타고 회의에서 신약성경 27권이 ‘정경’(正經)으로 공식 인정됨으로써 이 세상 모든 다른 문서들과 구분되는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공인되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교회의 이 정경화(正經化) 과정에 하나님의 뜻이 구현된 것으로 믿고 그대로 고백하며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최종적으로 정경으로 인정되고 선포된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하나님의 선택이요, 하나님의 결정으로 인정되고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5. 성경의 독특성과 양면성성경은 이 세상 모든 책들과 구분된 책으로서 독특성과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계시성과 초월성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인간에 의해 기록된 역사적 문헌이다. ② 성경의 저자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성령이시다. 동시에 인간 저자가 있다. ③ 성경 66권은 다양성과 통일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각 성경은 각기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그 중심에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④ 성경은 아주 쉬운 이야기 형식으로 기록된 책이다. 그러나 또 매우 어려운 책이다. 따라서 해석이 필요하다.6. 성경의 장절의 구분본래 성경에는 장절의 구분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성경을 읽고 외울 때 찾기 쉽게 만들어진 장절의 구분의 역사도 꽤 깊다. 제일 처음 장(章)을 구분한 성경은 주후 4세기 경의 신약성경으로 바티칸 사본이고, 구약성경은 13세기 초 라틴역에서 사용되었다. 또 절(節)의 구분은 10세기부터이다. 그 후 신구약 성경 모두에 장절이 붙여진 것은 1555년 스테파누스의 라틴 불가타역이다. 라틴 불가타역은 가톨릭교회의 공인성경이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장절의 구분은 1560년대 출판된 제네바 성경의 것을 따른다. 구약은 929장 23,214절이고, 신약은 260장 7,959절이다. 총 1,189장 31,173절로 나누어져 있다. <강춘오 목사>
    • 해설/기획
    • 기획
    2018-10-05
  • 기획/귀신론 : 한국민속의 귀신·성서의 귀신
    어느 민족이나 영적 세계를 말할 때 귀신(鬼神)의 존재를 말한다. 그러나 그 귀신이 무엇인가 하는데 대한 견해는 각기 다르다. 아예 귀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뿐만 아니라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경우에도 귀신이 어떻게 생성되었는지에 대해서도 문화전통에 따라 각기 그 견해가 다르다. 그러면 귀신은 무엇인가에 대해 한국 민속에서의 귀신관과 성경의 귀신관을 살펴본다.Ⅰ. 한국 민속에서의 귀신관먼저 한국인의 귀신관을 살펴보자. 한글사전에는 귀신을 죽은 사람의 혼령,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 사람에게 화복(禍福)을 내려 준다고 하는 정령(精靈)이라고 정의하고 있다.1. 귀신의 생성동양인의 귀신관은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어떤 사물이 변하여 귀신이 된다고 믿는다. 그 중에서 사람이 죽어 귀신이 되는 경우가 가장 대표적 관념이다.사람이 죽으면 그 생명은 세 종류로 분리된다. 즉 혼(魂) 귀(鬼) 백(魄)으로 나누인다. ‘혼’은 양기(陽氣)의 응집으로 청명한 하늘로 올라가 신명(神明)이 되고, ‘귀’는 음기(陰氣)의 응집으로 공중에 떠 구천(九天)에 존재하고, ‘백’은 본래 흙에서 왔으므로 땅으로 귀의(歸依)한다. 그리고 공중에 있는 ‘귀’는 ‘백’이 땅으로 들어간 후 ‘위패’나 ‘지방’에 붙어 신주(神主)로서 영접되어 인가(人家)로 들어온다. 이와 같이 사람은 죽어서도 그 생명이 천·지·인에 분리되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다.이 셋 중에 ‘귀’와 ‘백’이 살아있는 인간과 끊임없이 관계를 가진다. ‘백’은 풍수상 자손들과 직접 관계를 맺으며, ‘귀’는 1년에 한 번씩 자손 4대까지 제사를 받는다. 그런데 ‘귀’가 살아있는 후손으로부터 충분한 조위(弔慰)를 받지 못하면 원한을 가지고 그 음기(陰氣)가 흩어지지 않고 구천을 떠돌며 귀신(鬼神)이 된다고 믿는 것이다.2. 귀신과 신명그러면 신명(神明)은 무엇인가? 신명은 말하지면 선한 귀신인데, 대체로 ‘귀’와 상반되는 성질의 소유자이다. ‘귀’는 음(陰)에 속한 것으로 어둡고 컴컴한 것을 좋아하지만, ‘신명’은 양(陽)에 속한 것으로 청정하고 밝은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신명은 하늘에 있다. 여기에서 하늘과 공중은 다르다.귀신은 사람에게 집힐 때 무엇인가 스스로 원하는 것이 있어서 그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사람과 교섭을 하지만, 신명은 사람이 원하지 않으면 찾아오지 않고, 또 예(禮)가 아닌 것에는 응답하지 아니한다. 뿐만 아니라 신명은 부정(不淨)을 싫어하여 부정한 제사에는 강림하지도 않는다. 귀신은 인간에게 해(害)를 끼치는 존재이지만, 신명은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동양의 기론(氣論)에 의하면 모든 물질에는 반드시 기(氣)가 있다. 기는 만물을 생성하는 근원의 힘으로써, 음기(陰氣)와 양기(陽氣)가 있다. 그 기가 응집된 것을 정(精)이라 하고, 그것이 발현(發顯)하는 것을 영(靈)이라 한다. 양기의 정령(精靈)을 신명이라 하고, 음기의 정령을 귀신이라 한다. 어떤 사물에 음양의 조화가 깨져 그 기물이 파손되면 양기가 부족하게 됨으로 귀신이 되는 것이다.3. 귀신의 거쳐귀신은 그 성질이 유음(幽陰)을 좋아하고, 파괴하는 것을 좋아함으로 음기가 많은 곳에 존재한다. 그래서 음습한 곳, 울창한 숲속, 어두운 동굴, 오래된 우물, 옛연못, 성터, 폐허된 절간, 허물어져 가는 누락, 고목나무, 산언덕, 바위틈, 계곡 등에 살고, 집안에는 파손되었거나 낡아빠진 물건 등에 깃들인다고 믿는다. 이것들은 모두 양기가 부족한 곳이기 때문이다.사람도 어떤 어러운 일에 휘말려 고민에 빠졌거나, 건강이 허약해졌거나, 근심에 쌓여 마음이 약해져 그 속에 음이 승할 때 귀신이 들어온다는 것이 한국 민속의 귀신관이다.Ⅱ. 성경의 귀신관성경에는 귀신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천국복음 사역 중 귀신을 쫓아낸 기록이 복음서마다 자주 등장한다. 사도들의 행적에도 귀신 쫓은 기록이 많다.1. 더러운 귀신, 더러운 영“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마 10:1),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이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눅 8:29). 예수님의 지상사역 중에 귀신을 쫓아낸 역사가 자주 나온다. 그러나 예수님은 귀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더러운 영’(프뉴마 아카달톤)으로 설명했지만, 그 귀신이 어떻게 생성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밝힌 바 없다. 그리고 성경에는 인간의 죽은 어떤 존재가 귀신이 된다는 말은 없다.2. 인간을 해롭게 하는 악령들성경에서 인간을 해롭게 하는 악한 존재를 세 가지로 표현하고 있다.첫째는 ‘사단’이다. 그러나 성경도 사단의 기원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힌 곳이 없다. 다만 사단은 하나님의 피조물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이사야는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 하나님의 뭇 별위에 보좌를 높여 지극히 높으신 자와 비기리라 하다가 음부 구덩이에 빠치운 자’(사14:12-17)라고 했고, 에스겔은 ‘하나님의 성산에서 왕래하였던 기름부움 받은 그룹이었지만 범죄함으로 추방된 자’(겔 28:14-19)라고 했고, 사도 요한은 ‘하늘의 전쟁에서 사단이 그의 사자들과 함께 추방되어 하나님 앞에서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계 12:7-10)라고 했다.또한 사단은 많은 악령들을 거느린 우두머리로 등장한다(마 8:28, 9:34).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요 8:44), 하나님의 말씀을 더럽힌 자요(마 13:19), 예수님을 증오하여 유다의 마음을 건드려서 배신하게 한 자(요 13:27)이며, 귀신들의 왕이다(마 9:34).둘째는 ‘마귀’이다. 성경에서는 사단과 마귀는 언제나 단수로 표시되어 하나의 세력을 나타내고 있다. 마귀는 사단의 다른 이름이다. “큰 용이 내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쫓기니라”(계 12:9).셋째는 ‘귀신들’이다. 귀신들은 악령이다(마 12:43-45). 사단의 심부름꾼들이다(마 12:26,27). 귀신은 사람과 짐승 속에 들어가 그것을 부릴 수 있는 능력이 있고, 항상 그 대상을 찾는다. 귀신들은 더럽고 음침하고 사악하다. 귀신들은 사람의 몸에 질병을 일으킨다.3. 사단의 목적사단은 처음부터 그 목적이 하나님과 비기리라는 것이었으므로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를 노린다. 인류의 조상을 유혹할 때도 “너도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주권에서 벗어나 자신이 인간을 부리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자기만 하나님께 반역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그렇게 하도록 조종한다.사단은 어둠의 세상 주관자로서(엡 6:12), 우는 사자같이 교회를 삼키려고 덤비고 있다(벧전 5:8). 사단은 광명한 천사로 가장한다(고후 11:14). 사단은 각 민족의 풍속을 이용하여 문화전통이란 이름으로 사람들을 속박한다. 귀신은 그 사단이 부리는 악령들이다.그런데 근래에는 신학교 교수들 중에도 귀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필자가 70년대 신학교에 다닐 때 어떤 교수 한 분이 일본 동경 신학교에 연구교수로 잠깐 있다가 돌아와서, 성경에서 예수님이 내어쫓았다는 귀신이란 옛날 미개한 사회에서 정신적 질병을 두고 말한 것이지 실재로 귀신은 없다고 주장했다. 귀신론은 아직도 미정립된 분야라고 봄이 옳다.<강춘오 목사>
    • 해설/기획
    • 기획
    2018-08-30
  • 기획 / 교회의 정체성과 기독교언론
    인류사에서 현시대만큼 언론의 역할이 증대된 때는 없었다. 인류사회가 지금 누구나 어디서든 실시간 정보를 시시각각 접수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것은 신문에서 방송으로, 방송에서 영상으로, 영상에서 다시 인터넷으로 발전해 온 매체가 이루어놓은 언론의 쾌거이다. 세계가 한 마을처럼 언론을 통해 가까이 다가와 있다. 그만큼 언론의 역할이 크게 증대되고 있다.1. 한국기독교의 언론상황과 그 위치한국의 언론자유는 매우 신장되어 있다. 그러나 특수언론 등록제도에 의해 허가된 ‘종교방송’이나 ‘종교신문’은 정치적 기사를 보도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익히 아는 대로 기독교계에는 4~5개의 케이블 TV와 위성방송, 라디오 방송(산하에 다수의 지방 방송이 있음), 인터넷방송 등이 있고, 또 기독교를 대변한다는 일간신문도 있다. 그리고 100여 종의 주간신문(격주간 등 포함) 등이 있다. 이들 방송이나 신문 등의 기사에 있어서 그 편집, 보도 내용이 대체로 기독교 내부 문제에 머물러 있다. 따라서 기독교언론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에 미치는 영향력은 그리 높지 못한 실정이다.그런데 교계에서 사실상 기독교언론을 대변하고 있는 주간신문의 경우, 크게 교단지와 연합지 그리고 선교단체 등이 그 목적을 위해 발간하는 기관신문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교단지는 그 교단의 정책홍보와 회보적 성격을 가지고 있고, 또 선교단체 등이 발간하는 기관신문 역시 그들 단체의 홍보지에 머물러 있으므로 언론으로 보기에는 매우 미흡하다고 평가된다.그러므로 기독교언론은 초교파 연합지가 그 사명과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는데, 글자 그대로 ‘초교파 연합지’란 어느 교단이나 기관에도 소속되지 않으므로써 경제적 영세성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다. 게다가 시장의 독자들이 신문을 구별할 줄 아는 안목이 부족해 그저 신문용지에다 먹으로 글자가 찍혀 있으면 ‘신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심지어 교단지와 연합지를 구분 못해 한 달에 한번 정도 배달되는 교단회보를 받아보면서 ‘나도 교계신문 하나 본다’고 말한다. 2. 종교다원주의 사회에서의 기독교언론현대사회는 다원주의 사회이다. 현대인이 처한 이 다원주의사회가 어느 누구에게도 절대주의를 용납하지 않고 있다. 즉 다원주의는 상대주의를 뜻한다. 이 상대주의가 종교세계에 들어와 종교다원주의를 낳았다. 종교는 그것이 어떤 형태를 가졌든 그것을 추종하는 자들에게 절대신념체계를 갖는다. “내 종교는 옳고 네 종교는 틀렸다”는 생각은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특정종교를 절대화 할 수 없다는 것이지, 종교다원주의가 ‘종교는 모두 같다’는 종교혼합주의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종교다원주의는 오히려 상대의 절대신념체계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또한 상대가 나의 신앙도 그렇게 대해 줄 것을 기대하는 성숙한 사회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고 종교다원주의란 미명하에 자신의 정체성이 모호한 채로 ‘타종교와의 대화’는 오히려 종교간의 혼돈과 갈등만을 초래하게 될 뿐이다.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독생자시요, 우리의 구주가 되심을 분명하고도 확고하게 고백한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에 동의하지 않는 타종교인과 무종교인에게 똑같이 이 사실을 증언하되, 그들의 생각과 판단도 존중하자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기독교가 종교패권주의화 하거나, 또는 타종교가 기독교를 무시하는데 대해서는 기독교언론이 이를 바로 잡고 방어해야 할 책임이 있다.요즘 소위 진보적 언론을 자임하는 일부 기독교매체 가운데도 기독교의 호교(護敎)보다 오히려 ‘개혁’(改革)이란 미명하에 기독교 내부의 약점을 들추어 공격하는 것을 사명으로 아는 언론도 있다. 이는 옳은 방향이 아니다.3. 교회의 정체성과 언론의 역할교회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사건이나 또는 교회와 관련된 사회적 이슈가 생기면 목회자나 교계 지도자들은 한 사람 예외 없이 언론의 중요성을 말한다. 이를 방어하는 교계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실 교회는 교계언론이 중요하다. 신구약 시대를 통털어서 특히 문서운동의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우리가 잘 아는 대로 구약시대의 예언자에는 두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구두 예언자이고, 다른 하나는 문서 예언자이다. 구두 예언자의 예언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 크게 영향을 끼쳤으나 우리에게 전해진 것은 왕사(王史)에 몇 줄씩 인용된 내용뿐이다. 엘리야나 엘리사 같은 위대한 선자자들의 예언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문서 예언자들의 예언은 시시콜콜한 내용까지 그대로 남아서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것이 문서의 중요성이다.그리고 오늘날 목회자들의 설교 역시 아무리 훌륭한 설교라고 할지라도 그 영향력은 그 목사가 담당하고 있는 교회의 성도들에게 미치는 것 뿐이다. 그것이 언론을 통할 때 비로소 그 교회 울타리를 넘어 전국교회 또는 우리사회에 보다 큰 영향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이 시대 기독교언론의 역할과 사명 역시 교회의 신앙과 신학을 보호하는 호교(護敎)와 선전(宣傳)에 있다. 호교는 외부로부터 오는 공격을 막는 ‘방패’ 역할을 하는 것이고, 선전은 내부의 복음을 외부에 전파하는 ‘창’의 역활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언론의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 지금이 중요이다. 한국교회는 영향력 있고 제대로 된 기독교언론을 육성할 책무가 있다.사실 지금의 한국교회 정도면 신문은 조중동 같은 주류를 대변할 만한 일간지가 한 개 정도는 있어야 하고, 방송은 MBC나 SBS 정도의 영향력을 가진 방송매체가 있어야 한다. 특히 기독교 정체성의 문제는 한국교회의 기복주의와 물신숭배를 비판하고 견제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이것이 교계언론의 사명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우리사회에 만연한 순수자본주의의 폐해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도 제시해야 한다.이미 한국사회는 ‘돈’(Mammon)이라는 유사신(類似神)을 숭배대상으로 찬미한 지가 오래이다. 여기에 교회마저 비판없이 함께 합류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기복주의에 사로잡힌 교회가 섬기는 신(神)은 하나님이 아닌 것이다. 일찌기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비신화화 되고 비인격적 힘으로 바뀐 수많은 고대 신들이 무덤에서 나와 우리의 삶을 지배하려 들고 그들 사이에 또다시 영원한 싸움이 벌어진다”고 말한 그 고대 신(高代神)들은 맘몬이라는 물신(物神)을 두고 한 말이다.기독교언론은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설교되고, 목회자나 교인들이 물욕을 버리며, 정직한 삶을 살 때, 기독교의 정체성은 저절로 확립된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설교를 하는 기독교, 십자가의 죽음과 무덤에서 살아나오지 않은 기독교는 ‘가짜 기독교’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처럼 “믿습니다. 아멘”의 기독교는 싸구려 은혜에 매달려 있는 낮은 수준의 기독교이다. 이런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한번 콧김으로 ‘후-’하면 다 날아가 버리고 말 가라지인 것이다.4. 교계언론인의 자세교계언론인은 예언자적 자세를 가져야 한다. 예언자는 자기의 유익을 따라 말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메시지와 하나님의 공의만을 선포해야 한다. 그러다보니 권력과 충돌하기도 하고, 종교적 기득권과 갈등을 빚기도 한다.교계언론인의 사명이 예언자적 사명이라면 예언자가 겪은 고난도 함께 따르게 되어 있다. 때로는 자신이 쓴 기사로 인해 고소고발도 당하게 되고, 심지어 원치 않는 어려움에 처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교계언론인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위해, 복음을 변증하다가 감방 가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일제 시대나 군사독재 시대도 아닌데 교계언론인이 감방 갈 일이 어디 있겠는가’고 생각한다면, 이는 교계언론의 위치나 사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예수님의 언론관은 “옳은 것은 옳다 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 하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왜곡과 불의와 부정이 있는가?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다가 권력과 충돌하고 교권과 부딪친다. 그러면 자연히 신변에 위협이 닥치게 되는 것이다.그러므로 진정으로 교회를 사랑하고, 내가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교계언론을 통해 교회와 사회의 밝은 미래를 열어가겠다는 의지가 없다면, 교계언론인으로서의 활동은 그만 두어야 한다.끝으로, 개 교회와 교계언론은 두 바퀴처럼 함께 가야 한다. 그런데 교회는 비대한데 교계언론은 빈약하다. 그러면 한쪽 바퀴가 너무 작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빙빙 돌뿐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교회는 교계언론을 지원하고, 교계언론은 교회를 보호하는데 힘쓰야 한다. 나는 믿는다. 교계언론이 바로 서면 한국교회가 바로 되고, 한국교회가 바로 되면 한국사회가 개혁된다는 것을.
    • 해설/기획
    • 기획
    2018-05-18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