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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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년말에 장기 목회를 이어 왔다고 노회에서 배려해 주어 서유럽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종교개혁의 본산지인 독일 스위스를 위시하여 고대 문명의 수많은 흔적을 남긴 로마를 방문 하여서는 그러한 문명의 도시가 왜 흔적만 남기고 사라졌나? 거기에 이어 왜 이스라엘 왕국은 여지없이 무너졌든가? 잠시 상상의 날개를 펴 본다.
우선 이스라엘 왕국의 전성기를 떠 올린다 이스라엘 역사의 최고 전성기는 솔로몬의 치세였다. 그는 아쉽게도 그의 BC 922년에 생애 최고의 전성기를 넘기고 세상을 떠난다.
그후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그의 왕위를 승계하게 되고 곧바로 여로보암을 지지하는 세력들이 반기를 들게 되어 제국이라 할 수 있는 나라가 치명적인 분열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아브라함, 이삭, 다윗의 후예들인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 남 왕조 유다가 신 바벨론에 망함으로 영광의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된다.
이스라엘의 불행에는 많은 이유가 있겠으나 두드러진 부분이 솔로몬의 화려한 외교력에 있는데 이방 여인들을 첩으로 불러 들였고 그 때 그 여인들을 따라 이방 잡신들이 함께 이스라엘에 끼어들어 왔던 것이다.
이번 로마에서도 많은 유적들이 널브러져 있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성적인 문란과 퇴폐 문화를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자아성찰에 둔감한데서 아닌가 하는 진단을 해 본다.
기독교는 건강한가? 자기 성찰이 필요한 때이다. 기독교는 병든 것이 아니라는 자부심을 버리고 우리의 병리를 깊이 더듬어 보는 것이 바로 사는 길이기 때문이다. 외부적으로 느끼는 병리를 진단해 보자.
1. 편견에서 생긴 병
크리스천들은 그 신앙이 독실한 만큼 편식을 많이 하고 있다. 이 편식으로 생긴 병은 피가 말라 핼쑥해진 얼굴을 가진 환자를 만들어 놓았는데 그것이 무서운 병인지 모르고 오히려 가장 건강하고 이상적인 얼굴인 듯 착각을 한다.
마태복음 9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당시의 모범적인 종교적인 바리새인들과 예수님과 근본적으로 충돌한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바리새인들이 꿈꾸는 신앙인의 모델은 죄인들과는 멀리 떨어져 사는 거룩한 성자의 모습이었으나 예수님의 모습은 그러한 성자의 자화상이 아니라 친히 죄인의 벗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도 기독교라는 교리를 형성하고 나서는 다시 성자의 초상을 만들어 피가 없는 인간으로 화해 버렸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이타적이고 이 편협한 인간상을 두들겨 부순 것이 마틴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이었다. 그러나 그 루터나 칼뱅이 개혁해 놓은 개신교회도 다시 이런 왜곡된 성자의 초상을 수 없이 만들어 낸 것이다. 루터나 칼뱅에게도 그런 병의 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소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라는 구호는 다시 배타적인 성격으로 왜곡되고 순수한 신앙이란 곧 배타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으로만’이라는 구호는 순수하고 고귀한 가치임에 분명하지만 그 속에 안주하는 신앙은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아집에 안주하고 있지 않은가 자아를 성찰 해 볼 때이다.
이러한 기독교는 날이 갈수록 사회로부터 외면당하기 일수이다 이번 여행에서도 기독교의 전성지라 할 수 있는 지역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 기회 지나가기 전에 철저한 자기 성찰로 기회를 만회 해야 할 것이다.
2. 분열증세
지난주 교계의 두 교단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한국교회의 현주소를 보는 듯하다. 한국 교회를 희화해서 말하기를 ‘둘이 합치면 셋으로 나뉜다는’ 기사를 읽고 병의 심각성을 인식하는 듯하다. 이제 한국 기독교는 병든 사회, 병든 몸(교회 공동체)을 건강하게 만드는 일이 시급하다.
우리 크리스천 문학인들의 사명을 살펴본다. 그 병을 고치는 의사는 율법 이라는 방식으로의 처방이 아니라 복음으로 인간을 치료 하시는 예수그리스도라는 의사이시다. 이 의사에게 먼저 치유를 받고 사회의 여러 계층의 고질적인 병들을 치유하는 일에 총결집을 이루어 내는 희망을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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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 성찰 -이 선 규 목사/금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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