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1(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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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복음을 가져온 교회는 서방교회로서 칼뱅의 개혁교회이다. 그런데 이 서방교회가 동방교회가 가진 것을 놓친 부문이 많이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예배 중에, 예배 자들이 예수님의 화상 앞에서 경배의 순서를 기다리다가, 자기 차례가 되면 아이콘 앞에 경건하게 서서 오직 예수님께만 집중하며 경배하는 모습이다. 이러한 모습은 어린아이나 어른 할 것 없이 한결같은 모습이다. 마치 한 젖먹이가 어머니의 품속에서 젖을 빨다가, 잠시 물었던 젖을 빼고는, 한동안 물끄러미 그 어머니의 얼굴을 한참 뚫어지게 보는 모습과 다르지 아니하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실 때에, 짐승들보다도 더 많은 사랑을 부모로부터 받을 수 있도록 창조하신 것 같다. 짐승들에게서 젖을 먹이며 새끼를 돌보는 시간이 그 짐승마다 정해져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을 키워낸 늑대의 이야기 사례가 많았던 것에서 착안된 실험에서, 새끼를 출산한 짐승들에게서 새끼를 돌보도록 하는 모성애 호르몬이 한동안 나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모성애로 인하여, 아이는 안전한 부모의 품에서 보호를 받으며, 인간의 조건으로서의 갖추어져야할 결정적인 시간들을 놓치질 않고서, 모국어를 배우는 것은 물론, 딸은 엄마의 목소리를, 아들은 아빠의 목소리마저 그대로 빼닮는다.
이렇게 한 생명이 부모의 모든 것에 집중하며 학습을 하면서 사람됨을 배워 왔듯이, 종교적인 분야에서도 이와 같은 학습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시고 지상에서 하늘로 높이 올리심으로, 우리 모두를 하나님의 품으로 들어 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치 어머니의 품에서 젖을 빠는 아이가 어머니의 눈을 바라보듯이, 매일 같이 주님에게 집중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 예배 자에게는 다른 어떠한 유혹들이 들어설 틈도 없을 뿐만 아니라, 오로지 주님의 형상을 본받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요한과 그의 교회에 이와 같은 예배를 확실하게 보여주셨다. 요한교회의 예배는 모임의 숫자나 장소나 시간에 연연하질 않는다. 비록 그 예배 자가 사마리아인이라 할지라도, 그가 혼자서 예배한다고 할지라도, 그가 성령과 성령의 실재 안에서 예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현대 예배 자들의 음악이 부재하다고 할지라도, 저들은 주님의 임재 가운데에 깊숙하게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원시 교회가 저들의 모임과 저들 개개인을 그리스도가 임재하시는 몸이며, 거룩한 성소라고 한 것과 동일한 것이다. 성전이라는 용어보다는 성소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을 보아도, 저들은 주님을 예배할 때에 즉각 지성소에 들어갔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숨을 거두시자, 지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는 보도는, 저들 모두가 언제든지 어디에서든지 주님의 지성소에 저마다 출입하게 되는 혜택을 받았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영적인 진보는 공관복음서는 물론, 그보다 일찍 기록된 바울 서신들에게서도 확실하게 나타나며, 히브리서에서는 아주 광범위하고도 세밀하게 다뤄졌다. 요한은 세계 도처에 퍼져나간 그리스도의 이 모든 교회들이 예순을 넘기며, 내외적으로 발생하는 요인들로 인해서 교회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흐려지기 시작하자, 교회라는 것이 무엇임을 확실하게 보여 주었다. 요한 자신은 물론, 그가 섬기는 교회 공동체는 예수가 부어주신 성령이 강물처럼 충만하게 흘러가는 교회이었다. 이러한 생수가 솟아나서 흐르는 역사는 사마리아도 구원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광야 같은 세상에 젖을 주고 꿀이 흐르게 하는 역사를 가져오게 된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유대광야와 사해바다를 보긴 하였으나, 요한의 교회는 이미 죽음의 바다를 생명의 바다로 바꾸어서 어부들이 그물을 내리는 곳이 되게 한지 오래이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 5장에서 38년 동안 질병에 시달리던 사람을 치유하면서, 그 사역의 비법을 지치질 아니하고 즐겨 설명하고 설득하고 있음을 본다. 이는 요한복음의 결론을 내면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고 세상의 죄를 사하시려 우리를 세상에 파송하시려 함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는 사역의 비밀을 아버지와 하나 됨에서 설명하신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이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이 세상에 내어준 선물이었음을 알아차렸다. 세상을 살리려면 자기 자신의 능력이나 사상, 자신의 본을 보임을 넘어서는 그 이상의 것을 세상이 요구하고 있음을 아신 것이었다. 이를 이미 인지하신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떡으로, 자신의 생명을 거룩한 잔에 부어서 마시게 하신 것이었다. 예수님의 사역의 비밀은 아버지에게 날마다 집중하고 바라봄에서 비롯되었다. 항상 그 경배의 시간에 아버지를 보았고, 그의 사역을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를 부끄러워하거나 게으르질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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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교회, 행복한 세상-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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