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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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사회는 다방면에서 연합이 실종된 느낌이다. 불행 스럽게도 최선선에서 날마다 뉴스를 생산해 내는 정치권, 사회의 양극화를 통한 고통의 소리 그리고 심지어 기독교계 에서도 연합이라는 상생은 실종된지 오래가 되었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는 선교학자인 데이비드 보쉬가 주장하는 연합의 의미를 생각해 볼 때다. 그는 선교가 지닌 패러다임의 변환과정을 담담히 기술하면서 포스트모던 시대 속에서도 연합의 중요성을 기술하고 있다. 오늘은 그가 진단한 계몽주의 이후에 도래된 서구의 사고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식민지 확장 계획을 일으킨 것은 대체로 계몽주의 발전사고였다. 그러나 호의적인 식민주의 정책은 부분적으로 기독교 선교사역에 의해 산출되었다. “발전” 계획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기독교 선교에 관한 한 과거의 접근들을 넘어서는 독특한 발전을 반영했다.
그러나 발전 모델의 결과들은 기대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부유한 나라들은 더 부유해진 반면에 가난한 나라들은 더 가난한 상태가 되었다. 가난한 나라들 안에서도 기득권 층들은 그 발전계획들로부터 가장 많은 혜택을 누린 것 같았다. 사회적으로 그리고 생태학적으로 그 결과들은 종종 재난에 가까웠다. 기술의 적용은 기술적인 문제일 뿐만 아니라, 그 이면에 있는 사회적인 그리고 종교적인 전제들에 의해 깊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과거 2,3세기 동안에 일어났던 기술적인 발전과 이러한 발전들이 서구 사람들을 재구성한 방식 때문에 서구는 사실상 다른 나라들이 따라잡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 정도로 앞질러 가 있었다.
그러므로 점점 더 많은 제3세계 나라들이 그 발전 개념과 그것의 계몽주의적인 전제들을 배척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모델이 주장되었다. 계몽주의 사상에 깊게 물든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후진성과 현대성간의 관계가 아닌 의존과 해방과의 관계였다. 그러나 현재 나는 해방 모델이 현대화 모델이 겪은 계몽주의를 쇠약하게 하는 영향들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계몽주의 패러다임에 기본적인 전제는 사실과 가치간의 철저한 구분이었다. 그러나 이 전체의 구조는 붕괴되었다. 실증주의와 경험론이 주체와 객체 사이에, 가치와 사실 사이에 세워 놓은 벽들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보는 것을 변화시킴이 없이 실재를 관찰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밝혀졌다. 전적인 문제는 현대 과학이 인간의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권력의 손이 쥐어준 상황에 의해 크게 복잡해졌다.
결국 우리는 상호의존을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 계몽주의 신조는 모든 개인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든 상관없이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자유가 있다고 가르쳤다. 이 전체 접근은 파괴적인 결과들을 낳았다. 너무 자신에 차서 그들의 종교적인 뿌리를 인정하지 않을 때에 결국 남는 것은 허무주의의 수용이다.
최근 수십년간 그렇게 자랑하던 개인의 자율성은 결국 타율로 끝났다. 사람이 원하는 것을 믿는 자유는 결국 신앙의 부재로 끝났다. 상호 의존을 인정하기를 거부함은 결국 자신으로부터의 소외로 끝났다. 자율성의 거짓된 교리의 지배를 종식시키고 본질적으로 인간적인 것을 회복하기 위해서 두 가지의 일이 필요하다.
첫째로, 우리는 확신과 신앙의 필요성을 다시 긍정해야 한다. 결국 아무도 실제로 그것들 없이 생존할 수 없다. 요구되는 것은 비록 그것이 인기 없고 심지어 위험한 것이라 할지라도, 기꺼이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관용이 분명히 덕은 아니며, 특히 서로를 도전할 여지를 전혀 남기지 않는 “나도 좋고, 너도 좋고”식이다.
둘째로, 우리는 연합, 상호 의존, “공생”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개인은 단자가 아닌 한 유기체의 일부분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희생하면서 어떤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는 세계 속에 산다. 단지 함께할 때에만 구원과 생존이 있다. 이것은 자연과의 새로운 관계뿐만 아니라 사람들과의 새로운 관계를 포함한다. 계몽주의의 “도구적인” 이성은 “교통적인” 이성으로 보충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 존재는 정의상 상호주체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와 공동의 운명을 가진 사람들의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으로서의 기독교 선교에 대한 재발견의 적절성이 있다. 지금 이 순간 이미 소천하신 보쉬의 혜안을 되 세겨 볼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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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의 필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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