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 오는 해에 겸손하게 나의 덕담을 피력한다. 덕담을 우리 선조들은 다 가지고 있었다. 우리 조상들이 갖는 신앙에 ‘언령신앙’(言靈信仰)이 있다. 말에는 혼, 영, 즉 보이지 않는 ‘힘’이 붙어 있어 그 말대로 길흉화복이 좌우되고 평생의 운명까지도 영향을 받는다는 믿음이 있다. 이러한 언령신앙 때문에 우리 조상들은 말조심을 특히 강조했고 설날부터 대보름까지의 기간에는 아예 남에게 듣기 좋은 덕담만 하도록 풍습을 만들어 놓기도 했다.
말과 언어에 대하여 전래되어온 속담이나 격언 중에는 來語不美 去語何美 去言美 來言美(래어불미 거어하미 거언미 래언미 : 가는 말이 고아야 오는 말이 곱다는 말조심의 경고). 晝語雀聽 夜語鼠聽 晝言雀聽 夜言鼠聆(주어작청 야어서청 주언작청 야언서령 : 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 言他事食冷粥(언타사식냉죽 : 남의 말 하기는 식은 죽 먹기이다). 饌傳愈減 言傳愈濫(찬전유감 언전유람 : 음식은 갈수록 좋고 말은 갈수록 는다). 於異阿異(어이아이 : ‘어 다르고 아 다르다’는 뜻은 같은 말이라도 어떻게 표현하는가에 따라 상대가 받아들이는 기분이 다를 수 있다는 의미이다. 결국 항상 말을 조심해서 해야 한다는 말이다).그런데 요즘에 와서 우리나라 정초 새해인사말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하는 이 새해 인사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복을 좋아한다. 베개에다가도 ‘복’자를 넣고, 수저에다가도 ‘복’자를 넣고, 심지어 어느 화장실에도 ‘복’자가 붙어 있다. 복의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새해 복 많이 받자.”라는 인사의 시작이 어느 때 시작되었는지는 몰라도, 이것은 분명히 산업화 이후에 생겨난 인사라고 생각한다. 그전에는 이런 인사를 하지 않았다.
우리의 생각은 복을, 그것도 물질의 복을 ‘많이 받자’는 데 초점이 모아져 있다. 그런데 ‘받으세요.’ 그랬다. ‘준다’는 말은 없다. 받기만 하자는 것이다. 이런 사고의식이 우리 민족 속에 깔려 있다. 미국 사람에게는 이런 인사가 없다. “해피 뉴 이어(Happy new year.)”이다. 하루 좋은 날을 보내면, “Have a nice day.”, “Have a good day.” 이렇게 말한다. 서로가 행복한 새해, 좋은 하루를 갖도록 하는 인사가 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설날은 새해를 맞이하여 서로 덕담을 나누는 날이다. 덕담을 우리 선조들은 다 가지고 있었다. 이 덕담이 우리에게 인사로 표현되어야 되는데, “너 돈 잘 벌어라.”, “너 금년에는 주지 말고 받기만 해라.”, 이런 인사가 어디에 있는가. “새해 행복하세요.”라고 해야 할 텐데, 우리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광복 이후, 우리가 서구화 도시화 산업화되면서 얻게 된 구조적 변화는 한국국민의 욕구의 수준을 높이 상승시켜 버리고 말았다. 그것으로 인해서 개인이기주의와 구조적 부조리가 번창하여 개인의 범죄와 제도화된 부정부패가 오늘의 현실을 어둡게 하고 있는 것이다. 목표를 정당하게, 착실히 밟으려는 사람의 수는 점점 줄어들고, 편법주의가 팽배하고, 또 사회의 질서도 혼란스럽고 안전을 무시해 버리는 이런 근본적인 것이 혼란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부분에서 적용되는 문제의 해결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베풀어야 한다.’는 말로 고쳐서 생각해야 한다. 이 말씀을 현실적으로 더 가미해서 말씀을 드려보겠다.
인사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생활문화를 한결 윤택하게 만들어 주는 윤활유 역할을 해준다. 인사는 남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마음이다. 상대방을 향한 따뜻한 관심이다. 신약에서는 ‘마카리오스’라고 썼다. 이는 축복 받은 자라는 뜻으로 영적인 의무로 승화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이 죄인인 우리를 의로 만들어 주는 것, 좋은 일로, 의로운 일로 만들어주는 것을 ‘복’이라고, ‘마카리우스’라고 말했다.
신약성서를 보면, 복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예수님의 산상수훈으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린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 전부 우리가 생각한 것과는 거꾸로 이다. 뒤집어서 복이라는 이해를 우리에게 새롭게 인식시켜 주고 있다. 구약에서의 ‘복’은 ‘아슈레’라는 말을 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그 번영된 행복, 그것을 일컫고 있다. 구약시대에 사는 백성들은 장수한다든가, 자식을 많이 낳는다든가, 현숙한 아내와 남보다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는 것도 중요했지만, 존경을 받고 신임을 얻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그런 뜻에서, 복이라는 말로 대신함을 알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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