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4(수)
 
  • 강성률 목사(신촌예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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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사가 사자를 저에게 보내어 가로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왕하5:10).

 

서울 강북 경찰서는 지난달 26일 미아지구대 소속 경찰관 2명을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불구속 입건하였습니다. 해당 지구대 경찰관들은 지난해 1130일 서울에 한파경보가 내려졌을 당시 60대 취객을 집 문 앞까지 데려다주고 돌아갔는데, 이 취객이 약 6시간 후에 이웃 주민에 의하여 숨진 채로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경찰관이 취객을 발견하여 집 문 앞까지 데려다준 것은 잘한 일이지만, 1%의 마무리가 잘못되어 취객이 사망하였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중요한 것이 마무리입니다. 작게는 매 순간 사건 사건에서의 마무리이며, 크게는 인생의 마무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전자에 해당하는 것으로 나아만의 병을 통하여 어떻게 사건이 아름답게 마무리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나아만은 비록 한센병 환자였지만 아람 왕에게는 존귀한 자였습니다. 이 전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아람을 구원케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집에는 이스라엘에서 잡아 온 포로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 소녀의 소개로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나아만은 마침내 엘리사가 있는 곳까지 갔습니다. 나아만이 오자 엘리사는 나가보지도 않고 사자를 보내어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왕하5:10)라고 말하였습니다. 평생 대접만 받고 살아왔던 나아만은 엘리사의 이런 태도에 마음이 상했습니다. 노하여 그의 종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왕하5:11-12).

 

항상 내 생각이 문제입니다. 다윗은 상책을 좇아가다가 시글락에서 낭패를 맛보았고, 여로보암도 자기 생각 때문에 금송아지를 세워 대대로 악한 길의 전형이 되고 말았습니다. 만일 나아만이 상한 마음에 요단강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자기 생각대로 아마나나 바르발강으로 갔다면 틀림없이 깨끗하게 되지 못하였을 것이며 남은 삶도 이전 삶과 다를 바 없었을 것입니다.

 

다행히도 그에게는 충성스러운 종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말하였습니다.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일을 행하라 하였다면 행치 아니 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이 말은 우리가 대접을 받으러 왔습니까? 씻어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였는데, 무엇이 문제입니까?”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충성스러운 종들 덕분에 나아만은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왕이 성군이 된 것은 자신 혼자만의 힘으로 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에게는 요나단이라는 친구가 있었고, 갓이나 나단 같은 훌륭한 선지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나아만에게도 성령의 전달자 역할을 했던 종이 있었던 것입니다. 온전케 되기 위해서는 좋은 동역자가 있어야 합니다. 혼자서는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주관에 치우칠 수 있습니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동역자가 있어야 치우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훌륭한 동역자는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은 항상 자신을 한 발자국 떠나 바라보게 하십니다.

 

엘리사의 말을 듣고 나아만은 요단강에 갔습니다. 한 번 들어갔다 나왔지만 환처는 여전하였습니다. 두 번, 세 번, 네 번. 힘써 들어가 보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어 보였습니다. 감기 환자가 있는데 일주일치 약을 조제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틀을 먹어도 아무런 효과가 없다면 다른 병원에 가서 다른 약을 타 올 것입니다. 전혀 차도가 없는데, 일주일을 참고 약을 복용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나아만도 이런 유혹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지. 요단강에 무슨 약 기운이 있다고, 들어간다 해서 곪아 터진 환부가 사라질까?’ 하고 포기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아만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다섯, 여섯, 일곱 번째까지 들어갔다 나왔습니다. 그가 일곱 번 들어갔다 나왔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지긋지긋한 한센병 환처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온전한 순종을 원하고 계십니다. 온전한 순종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끝까지 순종함을 의미합니다. “너희 복종이 온전케 될 때 복종치 않은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고후10:6).

 

이와같이 좋은 마무리를 위해서는 성령과 동역을 하며, 자원하는 마음과, 끝까지 순종하는 충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 위에 사랑은 온전하게 매는 띠입니다(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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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독연 칼럼] 강성률 목사의 ‘끝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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