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8(수)
 
  • 강성률 목사(신촌예배당)

강성률 목사.jpg

 

창세 이후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9:32-33).

 

소경으로 태어나 구걸하며 지내던 사람이 예수님께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시기하던 사람들이 그 사실을 믿지 못하고 예수님이 어디 계시는지’ ‘그가 어떻게 고침을 받았는지’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예수님이 어디서 왔는지한두 번도 아니고 반복해서 물어왔습니다. 이에 대하여 고침받았던 사람은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 하는도다.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9:30-33)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9:34)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 글을 통하여 소경이었던 사람의 말은 상당히 조리 있고 설득력이 있지만, 유대인들은 다소 감정적이고 억압적이며, 전혀 말씀에도 맞지 않는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소경이었던 자가 직업의 종류가 다양하지 않았던 당시 구걸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었지만, 그의 지적 소양과 인격만큼은 다른 사람에게 무시 받을 만큼 천박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년 공생기간 많은 환자의 병을 고치셨습니다. 고침을 받는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장애인들과 불치병 환자들의 병을 고쳐 주셨지만, 세부적인 면에서는 다소 차이가 있었습니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을 마치시고 산에서 내려오시자 한센병 환자 한 사람이 절하며 말하였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그러자 즉시 깨끗해졌습니다(8:1-4).

 

반면 누가복음 17장에서 등장하는 열 명의 한센병 환자에 대하여는 그들이 소리 높여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했을 때 손을 대지 아니하시고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17:14)고만 하셨습니다. 물론 그들도 다 나았습니다. 이 외에도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에 걸렸을 때, 그것을 직접 꾸짖으셨고(4:39), 손 마른 사람에게는 손을 내밀도록 하였습니다(6:10). 귀먹고 어눌한 자에게는 예수님의 손가락을 그의 귀에 넣고 손에 침을 뱉어 그 혀를 만진 후 에바다라고 하시며 고쳐주셨습니다(7:31-35).

 

여러 방법 가운데 본문에 등장하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는 과정은 4복음서에 나타난 병 고치는 사역 가운데 가장 많은 과정을 거칩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진흙에 침을 뱉으시고 진흙을 이기셨습니다. 둘째, 그 진흙을 소경의 눈에 바르셨습니다. 셋째,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대로 순종한 소경은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단지 한마디 말씀만 하셔도 무슨 병에 걸렸든지 낫게 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뜻을 모두 헤아릴 수 없지만, 그것은 각 사람의 형편에 따른 치료였을 것입니다. 그 형편은 각 사람 인품의 정도와 믿음의 정도입니다.

 

이 소경이었던 사람이 바리새인과 같은 유대인 장로들을 상대한 것을 보면 상당히 똑똑하고 야무진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실 믿음에 있어서 야무지고 똑똑한 것은 썩 바람직한 것이 못 됩니다. 오히려 걸림돌이 될 때가 많습니다. 그가 알고 있는 지식들과 논리들이 믿음을 사용하지 못 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소경 되었던 사람도 그가 고침을 받기 전에는 얼마간의 변화 되는 과정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소경이라는 사실과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이 있음을 깨달은 후로는 겸손과 약함을 배웠을 것입니다.

 

그의 본성대로라면 예수님께서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를 때,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이 사람 뭐 하는 거야? 내가 앞을 못 본다고 이렇게 더러운 흙을 내 눈에 발라? 나를 무시해도 보통이 아니구먼.” 예수님께서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했을 때는 바를 때는 언제고, 이제는 씻으라고 하는 거야? 그리고 눈을 씻기 위하여 실로암까지 갈 필요가 있어? 여기서 씻으면 되지. 참 별사람도 다 봤네.”하고 따지고 돌아섰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소경은 한 마디 대꾸하지 않고 예수님이 시키는 대로 합니다. 그만큼 그가 볼 수 없는 약점을 통하여 온유하고 겸손해진 표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이었던 사람에게 이 세 과정을 통과하게 한 후 고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쓰실 때는 이전 모습대로 쓰시지 않습니다. 새롭게 고치신 후에 쓰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질까지 바꾸는 것은 아닙니다. 모세는 모세의 기질대로, 베드로는 베드로의 기질대로 쓰셨고 바울은 바울의 기질대로 쓰셨습니다.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게 하고 십자가에 처리하신 후 성령의 열매를 바탕으로 일하게 하신 것입니다.

 

소경의 경우 이전에는 자신을 위하여 이론이 강하고 변론적인 사람일 수 있었지만, 믿은 후에는 하나님이 주신 기질로 예수님을 위하여 유대인들 앞에서도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태그

전체댓글 0

  • 67315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형편에 따른 치료’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