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2(일)

칼럼
Home >  칼럼

실시간뉴스

실시간 칼럼 기사

  • [국독연 설교] 장금오 목사의 ‘주인에게 맡기는 삶이란’(삼상 23:1-5)
    1 사람들이 다윗에게 전하여 이르되 보소서 블레셋 사람이 그일라를 쳐서 그 타작 마당을 탈취 하더이다 하니 2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들을 치리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이르시되 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 하시니 3 다윗의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렵거든 하물며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치는 일이리이까 한지라 4 다윗이 여호와께 다시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 5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그들을 크게 쳐서 죽이고 그들의 가축을 끌어 오니라 다윗이 이와 같이 그일라 주민을 구원하니라 우리가 만약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으로 전문 관광안내자 없이 자유여행을 가게 된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뭘까요?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먼저 여행자 안내소를 찾아 가든지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여행 할 지역에 대해서 알아보고 물어 보는 것이 우선순위 일 겁니다. 그것이 바로 가장 안전하고, 쉽고, 빠르게 여행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죠. 그렇지 않고 혼자의 생각으로 길을 찾아서 여행을 다닌다고 생각하면 동행자들이 보기에 얼마나 답답하고 불안할까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지역에 오랫동안 살아서 그 지역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이든지, 전문적인 관광 가이드의 안내를 받는 것이라 할 수가 있겠습니다. 전문가의 안내를 받게 될 때, 우리는 안전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시간과 힘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면서 여행을 즐길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인생에서 우리가 길을 찾아야 할 때 가장 안전하고, 쉽고, 빠른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오늘의 말씀에 등장하고 있는 다윗과 같이 주님께 여쭤보는 것입니다. 온 우주에서 가장 뛰어난 전문가이시며, 완벽한 인생의 가이드가 되시는 하나님께 조목조목 여쭤보면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 동안 다윗은 양떼들을 지키면서 훈련된 목동으로 여러 가지 위험한 환경 속에서 자기 자신의 지혜와 방법으로 그 모든 것을 극복해 보려고 노력하였지만 때로는 지혜롭게 양떼들을 공격하는 맹수들로부터 양떼들을 보호하기도 했고 양떼들을 잃을 때도 있었을 겁니다. 결국 사울에게 쫓기면서도 반복되는 인생의 절망에 처하게 되었던 다윗의 삶은 비로소 아둘람 굴에서 완전히 새로운 걸음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무엘기상 23장의 말씀을 통해서, 다윗이 그일라 처서 타작마당을 탈취한 블레셋 사람을 보고 의분함을 금치 못하고 다윗의 주인 되신 주님께 블레셋 사람들을 치리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즉시 응답을 하시며 블레셋사람들을 치고 그일라를 구하라고 하셨을 때 즉시 하나님께 순종하여 블레셋 사람들을 다위에 손에 붙이시겠다는 응답을 듣게 되는 다윗의 모습을 보며 어떤 도전을 받으셨나요? 하나님께 합한 자로서 여쭙고 가는 길이 얼마다 복된 길인지 그때 그때 하나님께 묻고 웅답받는 방법을 살펴볼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의 삶이 어떻게 변하게 되었는지 살펴볼 것입니다. 외적인 환경을 볼 때, 다윗의 삶에서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습니다. 사울 왕은 여전히 그의 생명을 찾아다녔고, 다윗은 여전히 죽음과 한 걸음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다윗처럼 하나님께 묻고 기도하는 방법 1) 다윗은 모든 일의 시작과 결정하기 전에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왜 이런 기도를 해야 하는가? 블레셋사람들을 치는 것이 옳은 일인가? 하나님의 뜻인가? 나의 명예를 위한 나의 욕심 때문인지? 선택하기 전에 만일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 아닌 일을 했다면 하나님의 뜻을 끝까지 물어야 합니다. 매사에 주님께서 응답하시기 전에는 하나님의 뜻을 확실히 하고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자신의 진로, 취업, 직장을 구하는 것까지 섬세하게 묻고 응답을 받을 때는 어려움이나 힘든 일이 닥친다 해도 능히 이겨낼 수 있는 믿음과 능력을 공급받게 되고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책임지시고 인도해 주신다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2)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3) 결정권이나 계획까지 모두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 어떻게 할까요? 그리하면 모든 환경과 조성을 사람을 통해서 응답하십니다. 혹시라도 내 뜻을 하나님께 반영하였는가 의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4) 모든 위기 속에서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구할 때 말씀으로 응답하십니다. 다윗은 모든 환경 속에서 오직 주님께 마음의 초점을 고정할 때 다윗에게 임하는 응답의 복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처럼 삶의 주인되신 하나님께 모든 일을 묻고 맡기고 나아가는 승리의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한편, 장금오 목사는 아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을 전공하고 최근 국제독립교회연합회(총회장 정인찬 목사, 설립자 박조준 목사, 사무총장 임우성 목사)의 제19회 목사안수식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높은뜻숭의교회, 높은뜻광성교회 등에서 스리랑카 및 영어권 이주민 사역팀장을 역임했고, 현재는 양주진리교회(담임 채하경 목사)에서 캄보디아 이주민 전문 사역자로 시무하고 있다.
    • 칼럼
    • WAIC 칼럼
    2023-04-27
  • [국독연 칼럼] 강성률 목사의 ‘무엇을 회복하기 원하는가?’
    “유다 왕 아사 제 이십 칠년에 시므리가 디르사에서 칠일 동안 왕이 되니라. 때에 백성들이 블레셋 사람에게 속한 깁브돈을 향하여 진을 치고 있더니”(왕상16:15). 우리는 남왕국 유다는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할 때까지 350여 년간 한 왕조로 이어지지만, 북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멸망할 때까지 200여 년간 9왕조가 쿠데타에 의하여 바뀌는 것을 보게 됩니다. 새 왕조가 들어설 때마다 그들 나름대로 부국강병을 모색하지만, 대부분 4대를 더 채우지 못하고 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선왕의 잘못을 간파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시므리는 바아사 왕의 아들 엘라를 모반하고 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그 사실을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상태에서 계속 블레셋에 속한 깁브돈을 빼앗기 위하여 싸우고 있었습니다. 깁브돈은 본래 단 지파에 속한 도피성이었습니다(수19:44, 21:23). 그런데 블레셋에게 빼앗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셨을지라도 지키지 못하면 빼앗기고 맙니다. 하지만 그곳이 전략적인 요충지였기 때문에 새 왕조가 들어서면 왕들은 그것을 되찾기 위하여 애썼습니다. 그들은 이처럼 전략적 요충지를 되찾기 위하여 싸웠지만, 하나님께 등불을 돌려받기 위하여 마음 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한 등불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왕상11:36, 왕하8:19). 등불은 생명의 연속성을 의미하며, 형통을 의미합니다(잠21:4). 하나님께서는 북왕국의 시조 여로보암에게도 그가 만일 다윗처럼 행하기만 하면 그 가족을 세워주실 것을 약속하셨지만(왕상11:38), 여로보암이 죄악을 행함으로 등불은 바아사 왕조로 옮겨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여로보암과 그의 후손에게 기름을 부어주실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등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윗이 어떻게 행하였는지 살펴서 그것을 유지해 나가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몽둥이가 되어 여로보암을 친 바아사 역시 다시는 여로보암처럼 행하지 않기로 뜻을 정하고, 그 뜻을 위하여 애를 써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관심도 이전 악한 왕들처럼 전략적 요충지만 찾으려 애썼지, 하나님의 등불을 유지하려 힘쓰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 아들 엘라시대에 시므리에 의하여 왕조가 무너지고 맙니다(왕상16:10). 촛대를 옮기는 것은 그야말로 비극입니다. 하나님의 생명, 영광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찾으면 다른 것도 회복이 됩니다. 다윗 시대에 여호와의 등불이 활활 타올랐습니다. 그러자 그 나라의 영토가 확장되었고 군인이 130만이나 되었습니다(삼하24:9). 후손들 가운데 선한 왕도 있었지만 대부분 악한 왕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시겠다는 등불 약속 때문에 그 왕조가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신앙인들이 보이는 것에만 관심을 둔다면 결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며, 오히려 더욱 깊은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요사이 북한이 핵무기를 만들고 이제 7차 핵실험을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들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핵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것도 방법의 하나이겠지만, 신앙인들은 더욱더 영적인 것에 마음을 써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등불이 한국에 머물도록, 옮기지 아니하도록 힘을 써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등불이 머물도록 하겠습니까? 촛대를 옮기지 아니하도록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소아시아지역의 일곱 교회 가운데 에베소 교회에 책망하신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2:4-5) 위의 말씀처럼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초대교회시절 조선을 뜨겁게 달구었던 회개 운동이 다시 한번 일어나야 합니다. 한국교회적으로, 각 교회적으로, 개인적으로 어디서부터 타락했는지 찾아서 회개해야 합니다.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주일 지키는 정신부터 회복되어야 합니다. 다음은 대한 예수교 장로교 헌법 제 7항 예배모범편 1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제 1장 주일을 거룩히 지킬 것 1. 주일을 기념하는 것은 사람의 당연한 의무이니 미리 육신의 모든 사업을 정돈하고 속히 준비하여 성경에 가르친대로 그 날을 거룩함에 구애가 없게 하라. 2. 이 날은 주일인즉 종일토록 거룩히 지킬지니 공동 회집으로나 개체로 예배하는 일에 씀이 옳으며, 종일토록 거룩히 안식하고 위급한 일 밖에 모든 사무와 육신적 쾌락의 일을 폐할지니, 세상 염려와 속된 말도 금함이 옳다. 3. 먹을 것까지라도 미리 준비하고 이날에는 가족이나 집안 사환으로 공동 예배하는 일과 주일을 거룩히 함에 구애가 되지 않도록 함이 옳다. 4. 주일 아침에는 개인으로나 혹 권속으로 자기와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되 특히 저희 목사가 그 봉직하는 가운데서 복 받기를 위하여 기도하고 성경을 연구하며 묵상함으로 공동 예배에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을 준비하라. 5. 개회 때부터 일심 단합함으로 예배 전부에 참여하기 위하여 정한 시간에 일제히 회집함이 옳고 마지막 축복 기도할 때까지 특별히 연고 없이는 출입함이 옳지 않다. 6 이와 같이 엄숙한 태도로 공식 예배를 마친 후에는 이날 남은 시간은 기도하며 영적 수양서를 읽되 특별히 성경을 공부하며 묵상하며 성경 문답을 교수하며 종교상 담화하며 시편과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를 것이요, 병자를 방문하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며 무식한 자를 가르치며 불신자에게 전도하며 경건하고 사랑하며 은혜로운 일을 해함이 옳다.
    • 칼럼
    • WAIC 칼럼
    2023-04-23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새순이 나르샤”
    “새에덴의 꽃, 생명 / 순장들이 모인 은혜 넘치는 / 이 좋은 시간과 공간에 / 나를 택하여 주사 더 큰 사명으로 날아오/르게 하시니 더욱 주님 높이 섬기며 / 샤론의 꽃을 피우겠습니다.” 이건 지난주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있었던 ‘새순이 나르샤’ 시간에 어느 순장이 저에게 보낸 ‘새순이 나르샤’로 지은 6행시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느 순장은 ‘맨발의 소명자’로 6행시를 썼습니다. “맨 처음 교회를 간 건 그저 예쁜 여학생 때문이었습니다. / 발치에 앉아 멀리 떨어져서 들은 제자 베드로의 배신 이야기에 의로운 분노가 타올랐습니다. ‘나라면 그렇게 배신 안 한다. 사내 대장부가 3년이나 따라 다녔으면서 배신을 하냐?’ / 소리치듯 내뱉은 마음의 소리에 / 명령이 내려오듯 제게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 자녀로 삼아주시고 주님의 종이 되게 하셨습니다.” ‘새순이 나르샤’라는 프로그램은 코로나 이후 소그룹과 생명순(구역)을 살리기 위한 중간 그룹의 모임이었습니다.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100명에서 150명 단위로 교회 카페에서 교회오빠인 담임목사와 교회언니인 순장들과의 영적인 따뜻한 대화와 소통을 하는 시간을 갖았습니다. 코로나 상황에서는 겨우 교회를 유지하고 회복을 하였지만 이제 코로나의 검은 파도가 휩쓸고 간 자리에서 새로운 부흥과 성장을 이루어야 할 시기이지 않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생명순(구역)이 살아야 되고 생명순이 살기 위해서는 생명순장(구역장)들과의 긴밀한 소통과 관계성이 필요하다고 여겨졌습니다. 제가 먼저 격려의 메시지를 하고 성도들이 저에게 묻고 싶은 것을 엽서에 적어서 주면 그걸 일일이 다 대답을 해 주었습니다. 어느 한 장도 가볍게 취급하지 않고 진솔하고 성심성의껏 일일이 다 대답을 해주니까 그곳에 모인 성도들이 감동을 받은 것 같았습니다. 후문에 의하면 가까이에서 단둘이 이야기하듯 그런 분위기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교구마다 직접 만든 선물을 저에게 전달을 하였습니다. 어떤 교구는 자신들이 직접 만든 케이크, 또 김밥, 저의 캐리커쳐와 제 시를 캘리그라피로 쓴 액자 등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어떤 교구에서는 저에게 노벨문학상을 준다고 메달을 만들어서 목에 걸어주기도 하였습니다. 또 다른 교구에서는 콩나물 꽃다발을 가지고 왔습니다. 새순이 콩나물처럼 막 자라라고 말입니다. 그런 후에 순장들과 함께 가수 이선희의 ‘그중에 그대를 만나’를 개사해서 함께 노래를 불렀습니다. “♪ 그렇게 대단한 기대까지 바란 적 없다 생각했는데 / 그대 하나 떠나간 우리 교회 이제 그대 아님 채울 수 없소 / 별처럼 수많은 사람들 그 중에 성도로 만나 / 꿈을 꾸듯 새에덴을 이루고 / 주님의 은혜로 벅찼던 우리가 예배로 만나고, 그 모든 건 기적이었음을, 그 모든 건 은혜이었음을...” 그리고 제가 마무리 축복기도를 하고 일일이 한 분 한 분 다 악수를 하였습니다. 천 명이 넘는 순장들이 한꺼번에 모이면 그냥 하나의 집회로 끝났을 텐데, 교회 카페에서 100명, 150명 단위로 모이니까 느낌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역시 작은 공간이 주는 분위기의 효과가 크다는 것을 다시 느꼈습니다. 서로 작은 공간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악수를 하며 아이컨택을 하니까 정말 가까이에서 단둘이 데이트(?)한 것 같다는 말이 나올 수도 있었겠죠. 이러기를, 어떤날은 하루에 몇 번씩 하니까 보통 힘든 것이 아니었지만 끝나고 잠시 누우면 진짜 순장들이 새순이 되어 날아오르는 환상이 보이는 듯했습니다. 정말 콩나물 꽃다발처럼 생명순들이 쑥쑥 자라 오르는 생각이 들어왔습니다. 글을 쓰는 이 시간에도 변함없이 교회오빠인 담임목사를 응원하고 추앙하고 지지해준 교회언니인 순장들이 너무 고맙게 느껴졌습니다. 이를 계기로 해서 우리 교회는 ‘새순이 나르샤’할 뿐만 아니라 ‘생명이 나르샤’하고 ‘부흥이 나르샤’하게 될 것입니다. 코로나 이후에 새로운 부흥의 역사를 쓰고 불멸의 성장 신화를 쓰게 될 것입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3-04-23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땅과 하늘의 찬양대가 앙상블을 이루는 순간”
    정말 꿈같은 시간이었습니다. 아니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바로 지난 주일 저녁에 본당을 성도들로 가득 채운 채 ‘할렐루야’를 찬양하였을 때 말입니다. 그것도 주일 오전예배 때도 아니고 밤 예배 때 말입니다. 지난 부활주일은 보통 부활주일이 아니었습니다. 2시에 광화문에서 한국 기독교 140년 역사만에 최초로 2023 부활절 퍼레이드를 인도하였습니다. 사실 저는 교단 총회장을 하였고, 한교총 대표회장을 하였기에 실무대회장을 한다는 것은 옷에 맞지 않았지만, 이영훈 목사님과 CTS 방송에서 간곡하게 요청을 하여 맡게 되었습니다. 또한 오후 4시에는 한교총 주최로 대통령이 참석하는 한국교회 부활절연합예배에서 축시 순서를 맡았고 저녁에는 우리 교회 부활절 칸타타 행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두 개의 행사가 겹치다보니 막상 퍼레이드 행사에는 못 오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저라도 참석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부활주일 3부 예배만 끝내고 바로 광화문으로 출발하여 겨우 시간 내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지도자는 책임을 지는 사람이기에 그렇게 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4시에 영락교회에서 열리는 한국교회 부활절연합예배에 참석하여 기념시를 낭독하였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은 콩밭에 있었습니다. ‘부활절 퍼레이드에 적지 않은 성도들이 동원이 됐는데 이분들이 지쳐서 저녁에 안 오면 어떻게 하나. 정말 3층 본당까지 성도들이 가득 찰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염려를 왜 저만 하였겠습니까? 우리 교회 실무진들도 저와 같은 염려와 고심이 깊었을 것입니다. 사실 제가 부활주일 저녁예배 행사를 하자고 했을 때 오후에 부활절 퍼레이드 행사가 있어서 좀 무리가 되지 않을까하는 의견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도자는 결단 해야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한 번 해 보자고 밀어붙였습니다. 그러자 팀장회의에서 새에덴의 모든 성도들이 퍼즐 스티커를 부착해서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참석하여 예배가 시작될 때부터 본당 3층까지 꽉 채웠습니다. 저는 본당을 가득 채운 새에덴의 성도들이 ‘할렐루야’를 찬양하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뛰었습니다. 새에덴 연합찬양대가 ‘죽임 당하신 어린 양’, ‘살아계신 주’를 비롯해서 ‘할렐루야’까지 칸타타를 정말 잘했습니다. 연합찬양대가 주축이 되었지만 모든 교인들이 다 일어서서 ‘할렐루야’를 찬양할 때 정말 너무 아름다웠고 꿈을 꾸는 것만 같았습니다. 언젠가 예배시간에 온 성도들이 의복을 하나로 통일하고 찬양하는 시간을 갖기를 원했는데 그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찬양대도 몇 주 전부터 토요일마다 나와서 연습을 하고, 전교인이 자발적으로 참석을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진짜 꿈을 꾸는 것 같았습니다. 아니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가슴이 뜨거워지니까 눈시울도 뜨거워졌습니다. 본당 3층에 있는 성도들에게 달려가서 격려해 주고 싶을 정도로 감사했습니다. 저도 이렇게 기뻐하는데 하나님은 얼마나 기뻐하셨겠습니까? 제가 감사기도를 할 때 죽전의 하늘이 열리면서 우리 교회 찬양대와 하늘의 찬양대가 함께 만나서 하늘을 진동시키고 땅을 진동시키는 앙상블을 이룬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정말 죽전의 하늘을 찢고 하나님의 임재와 운행하심이 가득한 순간이었습니다. 저녁예배가 끝나고 자려고 하는데도 잠이 안 오는 것입니다. 수면제를 먹었는데도 두어 시간 만에 또 깬 것입니다. 그러면서 계속 머릿속에서 환영처럼 “할렐루야, 할렐루야”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꿈과 현실이 서로 교차되면서 현실이 꿈이 되고 꿈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잠 못 드는 밤이었지만 너무 행복했습니다. 꿈 없이 잠들지 않고 꿈 없이 깨지 않는 삶은 여전히 연속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거룩한 욕심이 생기고 또 도전하고 싶은 것입니다. 추수감사주일에는 ‘할렐루야’ 못지않은 전교인 연합찬양을 또 한 번 해 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때는 하얀 옷이 아닌 추수를 상징하는 노란 옷을 입고 해보고 싶다는 도전과 거룩한 욕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때의 모습이 또렷한 잔상으로 남아 있고 제 안에서 ‘할렐루야’ 찬양이 계속 메아리치고 있습니다. 녹화영상을 볼 때마다 그때의 감동이 되살아나고, 특별히 지난 목요일 7시 반에 CTS 방송에서 녹화중계가 방영되었을 때 정말 가슴이 울컥거렸습니다. 그날 참석해 주신 성도들께 다시 한번 감사하고 부활절 계란을 3만 3천 개나 기증해 주신 송성은 집사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모든 영광 하나님께 올려 드립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3-04-16
  • [국독연 칼럼] 임현주 목사의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창 39:2) 형통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형통한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내가 원하는 일이, 내 마음의 소원이 이루어지길 원합니다. 그것이 형통이라 생각 합니다. 집에서 직장에서 세상에서 형통을 이루기 위한 온갖 수고를 쉬지 않습니다. 쉽지 않습니다. 무엇이 형통일까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요셉이 형통한 자가 되었다’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우리들에게 형통은 여호와께서 함께하심입니다. 팔려온 요셉이 살게 된 곳은 이집트 사람의 집입니다. 네, 열 명이나 되는 형들이 아버지를 속이고 요셉을 상인들에게 팔아 넘깁니다. 순식간에 노예가 됩니다. 시위 대장 이집트 사람 보디발을 주인으로 밤낮 섬기게 됩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게 될까요 평생을 노예로 살다 죽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을 겪고 있는 요셉에게서의 형통은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놓여나는 것입니다. 밤이나 낮이나 어떤 기도를 할까요? 하루속히 형들에게 속고 있는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노예가 될 사람이 아닙니다. 가족이 아버지가 집이 있는 멀쩡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습니다. 노예가 된 요셉의 이런 기도는 응답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형통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함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잘됨이 못됨이 형통이 아닙니다. 이런 요셉의 상황은 우리가 생각하는 형통과 거리가 먼 일입니다. 요셉이 주인공이 아닙니다.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이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창 39:23) 이 노예청년 요셉이 계속 형통하여 일어난 다음 일입니다. 이번에는 감옥에 갇힙니다. 주인마님을 성희롱한 죄입니다. 적반하장입니다. 오히려 유혹하는 마님을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겠으며 하나님께 득죄할 수는 없다’며 단연코 거절한 요셉입니다. 억울하고 억울합니다. 누구하나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하나 나는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나서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나의 결백을 들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하늘만 땅만 알겠습니다.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한 요셉은 밤낮없이 또 무엇을 기도하겠습니까? 억울함이 밝혀지기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시고 아신다면 반드시 이 누명은 밝혀 주어야합니다. 이 감옥에서 풀려 나가야 형통입니다. 그래야 형통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잘되고 저것이 잘되는 형통을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넘어지지 않고 잘 달려 원하는 목표를 성취하는 것을 형통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처음부터 언제나 이미 형통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인공입니다. 그래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일이 내 삶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 모든 억울함이 풀려 감옥에서 나간들 요셉은 여전히 노예입니다. 보디발을 섬기며 변함없이 전과 같은 종의 생활을 계속해야 합니다. 요셉의 형통은 아닙니다.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형통은 이 요셉을 어느 날 때가 되었을 때 왕 앞에 세우는 것입니다. 왕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왕에게로 인도할 사람을 요셉이 있는 곳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주님의 나라, 주님의 백성들을 먹여 살리고 번성케 하고, 지키기 위한 하나님의 형통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형통입니다 여호와께서 함께하심이 형통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오늘 이 하나님의 영을 받고도 여전히 다른 형통을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언제가 되어야 여기저기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서 구하던 형통이 멈추어질까요 인정해주고 마음을 채워주고 나를 세워 줄 세상을 여전히 구하고 다니기에 오늘도 분주한 우리들입니다. 이미 함께하고 계신 그에게 무릎 꿇음이 먼저입니다 그래서 여전한 하나님의 형통을 보게 되길 기도합니다. <항상기쁜교회는 현재 서울 강서구 개화동에서 예배를 드리며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유튜브에서 ‘항상기쁜교회’로 검색할 수 있습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3-04-15
  • [국독연 칼럼] 강성률 목사의 ‘자기를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다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 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마23:29-3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을 선지자와 의인들을 죽인 조상들보다 의로운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 자신이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마귀가 들어갑니다. 욥에게 사탄이 들어가서 그의 재산을 다 잃게 하고, 자녀를 모두 잃게 하였으며, 욥 자신에게는 온 몸에 악창이 나게 하였습니다. 사탄이 욥에게 들어왔던 이유는 그가 자신을 너무 옳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욥32:1). 서기관과 바리새인도 분명히 마귀가 들어간 사람들입니다(눅18:9).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이려 한 것입니다. 왜 자기를 의롭다고 생각할 때 마귀가 들어갈까요? 영적인 원리가 이렇습니다. 마귀가 하나님께 욥을 참소했듯이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사람에 대하여 하나님께 아룁니다. “하나님 아무개가 자신을 옳다고 여기는데 그 사람이 진짜 옳은 사람인지 틀린 사람인지 한 번 시험해보겠습니다.” 합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마귀를 허락하셨듯이 그 사람에게 마귀를 허락하십니다. 한 번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의 하속들이 그들에게로 왔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어찌하여 예수님을 잡아오지 않았는지 물었습니다. 하속들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요7:45-46). 자신을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지 않은 하속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스스로 의롭다고 믿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죄인으로 보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하속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도 미혹 되었느냐?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이가 있느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요7:47-49). 당국자들은 관원들을 뜻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왜 잘못 된 것인지는 말하지 않고 단지 “유대 지도층이 믿지 않는 것만 봐도 잘 못되었다는 뜻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유대 지도층에 속한 자신들의 분별력은 평민들의 분별력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하는 오만함이 깔려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이 배우고, 지위가 높으면 스스로 분별력도 좋다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바리새인들 가운데는 간혹 정신이 바로 박힌 사람도 있었습니다. 니고데모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 그러자 다른 바리새인들이 말합니다.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상고하여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요7:51-52). 같은 바리새인 니고데모는 그래도 사람의 말을 듣고 행한 것을 알고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하속들에게 말한 것 ‘관원들과 바리새인들 가운데 믿는 이가 있느냐?’의 부정이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지역 탓합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사람이기 때문에 메시아가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사셨지만 태어난 곳은 유대 땅 베들레헴이었으며, 예수님께서 사신 곳 갈릴리 역시 선지자가 나지 못하는 곳이 아니라 요나 같은 선지자는 갈릴리 가드헤벨 출신이며, 호세아, 나훔, 아모스, 엘리야, 엘리사 등도 갈릴리 출신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왕하14:25). 그들의 큰 소리는 사실에 기반을 두지 않고 지역감정에 기반을 두고 있었습니다. 선지자와 의인을 죽인 조상들보다 자신들이 의롭다고 생각한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한 후 총독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사형시켜달라고 청구하였으며, 그 외에도 사도들과 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습니다(마23:34-36). 이처럼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것은 영적인 암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것이 교만이며, 교만한 자에게 사탄이 들어가며, 사탄은 하나님의 대적입니다(벧전5:5). 모든 일에서 “하나님은 옳으시다.”라고 고백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3-04-13
  • [언론회 논평] 서울광장에서 음란한 동성애 축제는 불허되어야 한다
    오는 7월 1일 서울광장은 소위 퀴어문화축제가 접수된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 집행부는 서울광장의 잔디광장, 동편광장, 서편광장 사용을 모두 접수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는데, 이번만은 음란한 동성애 행사를 불허해야 한다. 벌써 수년째 서울광장에서는 동성애 퀴어축제라는 명목으로 그들만의 행사가 벌어지고 있는데, 해마다 음란한 모습으로 시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장면들이 나왔다. 더군다나 외국의 대사들까지 가세하여, 인권이라는 빌미로 대한민국의 미풍을 해치고 내정을 간섭하는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이런 모습을 서울시민들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동성애를 좋아하고 즐기는 사람들만의 행사에 왜 건강하고 건전한 시민들과 자라나는 자녀들이 보게 되어 정신적, 심리적, 여가문화를 즐겨야 하는 기회의 침탈로 피해를 당해야 하는가? 이에 대해서는 오세훈 서울시장의 의지가 분명히 나타나야 한다. “서울특별시 서울광장의 사용 및 관리에 관한 조례”에 보면, 서울광장 사용의 목적이 명확히 나온다. 제1조에 보면 ‘시민의 건전한 여가선용과 문화활동, 공익적 행사 및 집회와 시위의 진행을 위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역대 서울광장에서의 동성애 축제에서 음란성에 대한 시비가 없었던 적이 있는가? 서울광장 사용에 대하여 ‘열린광장운영시민위원회’가 있지만 이들의 구성원도 편파적이라는 비난이 있었고, 설령 그들이 사용결정을 한다고 하여도 서울시장은 이를 얼마든지 수리(受理)하지 않을 수 있게 되어 있다(제6조 1항) 근본적인 문제가 되는 것은 광장의 조성 목적인 ‘건전한 여가 선용’에서 벗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시장에게는 신고의 변경 및 취소(제8조)와 사용중지(제9조)의 권한이 있다. 그런데도 서울시장이 이런 음란한 동성애 축제 사용을 매년 허락하는 것은 명백한 직무유기이며, 시장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서울광장에서 굳이 동성애 행사를 계속하려는 것은 단순한 성소수자에 대한 이해를 바라는 문화가 아니라, 저들의 ‘성혁명’ ‘성평등’(양성평등이 아님)을 통한 이념을 심어주고, 네오마르크스주의를 확산시키려는 것이다. 따라서 서울시가 이런 행태를 알면서도 서울광장 사용을 허락한다면 시민들과 국민들 사이에 정치적, 이념적 갈등을 조장하는 것이 된다. 서울시는 이렇듯 음란성 시비와 특정한 정치적, 이념적 목적에 이용되는 동성애 축제를 하는 시간에 청소년들과 시민들에게 건전한 여가선용의 기회를 돌려주어야 한다. 마침 7월 1일 같은 시간대에 <청소년•청년 회복 콘서트>가 신청되어 있다. 이런 행사를 허용해야 한다. 서울광장에서 이미 동성애의 음란한 축제는 여러 차례 시행된 바 있고, 그 행사에 대한 불편과 불만이 계속 제기되는 만큼, 이제는 서울시가 과감하게 청소년, 청년들의 회복을 위한 콘서트에 자리를 할애해야 한다. 서울시는 동성애 음란 행위의 모든 것이 드러났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 준다면 이는 서울시민들을 무시하고 모독하는 것이 된다. 서울시와 서울광장은 서울시민의 재산이다. 그리고 서울시장도 서울시민들이 선택하여 세운 공직자이다. 따라서 서울시장이 건전한 서울시민들의 의견을 무시한다면, 이는 시민들이 믿고 지지해 준 것에 대한 배신으로 시장으로서의 자격이 없는 것이다. 2023년에는 서울시의 얼굴이요, 시민들의 건전한 놀이 장소인 서울광장이 우리나라의 다음 세대인 청소년과 청년들이 마음껏 젊음을 느끼고, 발산하고, 주눅든 마음들을 회복하여, 건강한 나라를 만들어 가는데 일조(一助)하기 바란다. 동성애 퀴어 행사 신청에 대하여 불수리(不受理)할 것을 서울시와 서울시장에게 촉구한다.
    • 칼럼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3-04-11
  • [언론회 논평] 사법부는 기독교 복음 방송의 특수성을 인정해야 한다
    최근 서울행정법원(제1부)이 방송통신위원회(이하 방통위)가 차별금지법에 대하여 방송한 극동방송에 대하여 내린 제재 조치 명령은 정당한 것으로 판결하므로, 기독교의 복음방송이 가진 특수성을 소홀히 함을 보여주었다. 과정을 살펴보면, 지난 2020년 6월 국회에서 소위 말하는 차별금지법(혹은 평등법)이 발의되었는데, 이에 대하여 복음의 가치를 중시하는 극동방송이 다음 달인 7월에 이와 관련된 전문가들을 초치하여 특별좌담회를 했다. 그런데 이에 대하여 방통위에 민원이 제기됨으로 심의하여, ‘주의’ 조치를 내렸다. 이에 대하여 극동방송이 2021년 방통위를 상대로 제재 조치 명령을 취소해 줄 것을 원하는 소송을 제기했으나, 법원에서는 방통위의 조치가 정당함을 판결한 것이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방송 프로그램에서 패널들이 차별금지법에 반대하는 입장 만을 피력했기 때문에 공정성을 잃었다는 것이다. 또 일어나지 않은 일을 거론했기에 객관성에도 위반된다는 취지이다. 그리고 이에 대하여 올 2월에 1심 판결선고를 한 상태이다. 만약에 극동방송이 일반방송이었다면, 법원에서 주장하는 일반적인 방통위의 기준에 맞춰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극동방송은 종교방송의 특수성이 있는 것과 함께, 특히 복음적인 기독교를 대변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즉 기독교인의 절대다수는 차별금지법이 제정될 경우, 소수에 대한 차별문제보다 훨씬 심각한 대다수에 대한 ‘역차별’을 우려한다. 새로운 법이 만들어지는데 그 법률로 인하여 개인과 특정 종교가 심각하게 피해를 당할 것이 뻔한데 침묵하는 것이 옳은가? 현재 국회에서 발의되는 여러 건의 차별금지법을 살펴보면, 내용상으로는 성별, 장애, 나이, 종교, 사상, 정치적 견해, 성적지향, 성정체성 외에, 고용에 있어서 재화, 용역 등의 공급이나 이용을 다루고 있다. 또 교육 및 직업훈련, 행정서비스 등의 제공과 이용에 관한 차별행위를 하지 말라는 것을 나열하고 있다. 만약 이를 어길 시 이행강제금과 인신 구속까지도 한다는 것이다(이렇게 될 경우 헌법에 보장된 종교의 자유, 양심의 자유, 표현의 자유, 학문의 자유 등을 해치게 된다) 그러나 실상은 여러 영역의 차별행위를 겨냥하기보다는 성적지향, 성정체성, 가족형태 등 소위 말하는 ‘동성애’를 차별하지 말 것과 이에 대하여 정당한 의견을 표명하는 것을 범법(犯法)으로 간주하여 상당한 금액의 이행강제금은 물론 강력한 구속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차별금지법’이 제정될 경우 사회적 혼란과 갈등이 가중될 것이다. 가정의 해체, 교회의 붕괴, 건전한 윤리와 도덕의 망실(亡失), 성적(性的) 정체성을 잃어버린 젊은이들의 방황, 그리고 국가적으로 크게 문제가 되고 있는 출산율의 추락을 더욱 부추기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렇게 되면 개인과 공동체, 국가가 그 운명을 맞이하게 될 대가는 너무나도 혹독할 것이기 때문에 극동방송이 긴급 토론 방송을 진행한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공정성과 객관성을 강조하기에 앞서 우리 사회와 기독교가 겪어야 할 위기를 논하는 것은 기독교 방송의 당연한 책무이다. 만약 기독교의 복음 방송을 지향해온 극동방송이 목전에 다가온 이런 위험한 상황들에 대하여 방송하지 않는다면, 방통위나 사법부가 결정하기 전에 기독교로부터 심각한 질타와 외면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법률은 현재 일어나지 않은 사건을 예단하는 것을 크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편인데, 사안과 경중에 따라서는 그것을 인정해야 됨에도 불구하고 회피하는 것은 무책임한 처사가 될 수 있다. 차별금지법이 만들어질 경우, 2020년 7월에 전문가들이 극동방송에 출연하여 나타날 문제점을 방송한 내용의 실현이 결코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우리 속담에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다’는 말이 있다. 한번 법이 만들어지면 그것을 바로잡고 고치기는 더욱 어렵게 된다. 차별금지법이 아직 한국에서는 제정되어 실행되지 않고 있으나, 이런 종류의 법을 통과시켜 시행해 오는 세계 여러 나라들의 사례들을 보면 충분히 그 폐단이 실증된다. 따라서 사법부에서 방송통신위원회가 극동방송에 내린 ‘주의 조치’를 정당하다는 것은 기독교를 무시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기독교적 가치와 사회적 건강성을 전달한 극동방송의 프로그램 구성이 오히려 시의적절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사법부는 현행법의 규정을 준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못된 법이 만들어졌을 때, 그 예상되는 폐해를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통찰력도 있어야 한다. 이는 국민들의 건강하고 안정된 삶을 보장하는데 필요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가는 앞길에 큰 홍수가 나서 낙석(落石)으로 인한 위험이 분명하니 그곳으로 가서는 안 된다고 누군가 외쳤다면, 그것을 위험에만 치중한 편향으로 보아 공정성을 해치는 것이 되는가?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예견하여, 세계 여러 나라의 정황과 법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의 주장과 논리를 파악한 근거로, 일어날 것으로 말하는 것이 객관성을 결여한 것이라고 판결한다면 이는 근시안적 판단이다. 모든 사고와 위험을 당한 뒤에 이를 바로 잡으려고 한다면 사회적 비용과 국민적 갈등과 혼란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그때는 누가 책임질 것인가?
    • 칼럼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3-04-11
  • [언론회 논평] 북한은 인간 지옥이자 인권 지옥이다
    통일부가 30일 보도자료를 통해서 “정부의 첫 2023 북한인권보고서 공개 발간”을 발표하였다. 정부는 북한의 전반적인 인권상황을 일반 국민들이 널리 알 수 있도록 북한인권보고서를 발간했음을 밝히고 있다. 정부로서 당연한 책무이다. 이 보고서에서는 지난 2017년부터 2022년 사이 북한 지역에서 발생한 북한 인권상황을 증언을 토대로 하고, 실태 중심으로 국제인권규약상 균형적, 객관적으로 작성하였다고 한다. 즉 여성, 아동, 장애인 등 취약계층과 정치범 수용소와 국군포로, 납북자, 이산가족별로 분류하였다고 한다. 정치권에서는 지난 2016년 “북한인권법”을 만들었지만, 그 동안 전 문재인 정권이 ‘북한의 눈치보기’를 하느라, 북한 인권 개선 노력에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하지만, 현 윤석열 정부 들어서는 북한 인권 실태를 공개하는 보고서를 작성하므로, 북한 인권을 고쳐나가기 위한 일에 진일보할 것으로 보인다. 유엔에서는 이미 10년 전에 “북한인권조사위원회”를 출범시켰고, 북한 인권 결의를 시작하기로는 벌써 20년이 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당사국이면서도 이에 훨씬 늦게 동참하였고, 그 동안 국내 정치적, 이념적인 문제로 지지부진한 부끄러운 모습만 보여 왔던 것이다. 정부는 이번 보고서를 통하여 북한 인권 증진에 기여하기 위하여, 정부와 민간, 국제적인 연대와 협력을 강화해 나간다는 방침도 밝혔다. 북한의 실제적이고 객관적인 인권 침해 사례와 자료가 없이는 북한 인권 개선에 관심을 이끌어 내기가 어렵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북한에서는 여성에 대한 차별, 여성에 대한 폭력, 탈북 여성에 대한 끔찍한 인권 침해, 아동에 대한 처벌과 폭력, 성착취와 학대, 강제 노동과 노력 동원, 고아에 대한 방기(放棄)가 심각하다고 한다. 또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심각한데, 장애자의 거주지 제한과 불임수술을 시행하고, 왜소증 장애인에 대해서는 불임수술을 강제적으로 시행한다는 증언이다. 그리고 장애 여성들에게는 자궁적출 수술을 하고, 정신 지체 장애인들은 가족의 동의하에 생체 실험까지도 행하여졌다고 한다. 북한에는 정치범 수용소가 여럿 있는데, 무려 11곳이다. 함경북도에 4곳, 함경남도에 3곳, 평안남도에 2곳, 자강도에 2곳 등이다. 여기에는 수만 명의 사람들이 수용되어 있는데, 그 정치범 수용소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출신성분 문제, 김일성, 김정일 등에 대한 (말도 안 되는)권위 훼손과 관련된 문제, 간첩행위, 북한 내 권력 다툼에 의한 것, 기관원의 부정으로 인한 것이다. 특히 종교활동, 탈북자 가족과 탈북을 시도한 사람, 한국과 관련된 영상물 배포나 판매 등으로 인한 처벌이 더욱 엄격하여, 처형 등이 비일비재로 이뤄져 그야말로 가장 원시적인 공산독재 집단이 저지를 수 있는, 온갖 인권 유린 행위가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국군 포로도 상당수가 있는데, 6.25 전쟁이 끝나고 유엔이 발표하기로는 국군 실종자 수가 82,000명이었는데, 그 중에 상당수는 사망하고, 2016년 기준으로 약 500명이 생존했을 것으로 보였으나, 지금은 훨씬 줄어들었을 것으로 본다. 그런데 북한 당국은 그들 대부분을 함경북도와 함경남도의 오지에 있는 탄광, 광산, 협동농장에 배치하여 수많은 세월 동안 꾸준히 괴롭혀 온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북한은 6.25전쟁 중에 약 10만 명을 납북했고, 전후에도 3,835명을 납북했으며, 2022년 기준으로 북한에 억류된 납북자 중 생존자는 516명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들에 대한 차별과 학대도 지속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산가족의 생사확인, 만남, 교류도 북한 당국의 저지로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북한에 법률이 없어서. 이런 학대와 인권 지옥이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북한 당국은 철저히 폐쇄되고, 억압된 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정권 입맛에 맞지 않는 사람들은 무조건 인간 지옥으로 몰아 내고 있는 것이다. 북한 주민의 인권 개선을 위해서는 저들의 실태를 정확히 파악하여, 계속 외부에서 외쳐야 하며, 국제 사회와 공조하고, 더 확실한 대북제재를 통해서 인권 탄압과 그 박탈이 얼마나 잘못된 범죄인가를 깨닫게 해야 한다.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순진하게 ‘그곳도 사람 사는 곳인데’라는 생각을 할 수 있는데, 정말 그곳이 사람 살만한 곳이면, 왜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그 땅을 떠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북한은 전 세계에서 엄연히 최악의 인권 유린이 이뤄지고 있는데, 이에 대하여 귀를 막고, 눈을 가리고, 입을 닫는다면 저들과 함께 공범(共犯)이 되는 것이다. ‘강도’를 강도라고 말하고, ‘살인자’를 살인자라고 말해야, 강도와 살인자가 사라지는 것이고, 강도와 살인자와는 협상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저들이 인권을 비로소 중요하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 칼럼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3-04-04
  • [국독연 칼럼] 임현주 목사의 ‘와서 아침을 먹으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것을 알았기 때문에 당신은 누구십니까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요21:12) 모든 일이 순식간에 일어났습니다. 무조건 뛰어야 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겨우 몸을 피할 수 있었지만 선생님은 잡혀서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모든 재판 과정을 몰래 따라다니며 숨죽여 보았습니다. 우리 선생님이 법정 최고형, 1급 사형수들이 받는 십자가형을 선고받아 나무에 못 박혀 높이 매달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시체가 무덤 속으로 넣어지는 것도 보았습니다. 이 모든 일이 한 순간에 끝나버렸습니다.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가실 수는 없습니다. 물 위를 걸었던 분입니다. 폭풍을 꾸짖던 분입니다. 죽은 사람도 살려낸 분입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로마제국으로부터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예루살렘 입성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드디어 우리 왕이 왔습니다 수많은 군중들이 앞에서 뒤에서 따르며 환호했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막11:7~10) 우리는 그 환호성의 한가운데에 있었습니다. 나라를 되찾는데, 내 집이, 내 하는 일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모든 것을 다 던질 수 있었습니다. 가는 곳곳마다 나아와 호소하는 이들의 문제를 해결해 준 선생님입니다. 그러나 그 선생님의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날아갔습니다. 우리는 무섭고 두려워 그 밤에 다 도망쳤습니다. 두르고 있던 겉옷도 버리고 알몸으로 도망쳤습니다(막14:51,52) 모든 것이 다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그가 지금은 다시 우리들을 바닷가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처음으로 우리를 불렀던 곳입니다. 허기진 우리들을 위해 숯불을 피우고 생선과 떡을 준비합니다. 그런 줄 알고 따랐던 그 선생님이 그 선지자가 아닙니다. 창세 이후 사람이 무덤에서 살아나올 수는 없습니다. 그를 하나같이 버렸던 우리를 다시 찾아 올 수는 없습니다 그의 죽음 앞에서 그를 ‘모른다‘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던 우리들입니다. 그가 재판받을 때, 악한 일을 도무지 한 적 없는 분임을 증명해 줄 증인들이 우리였음에도, 나서지 못한 우리들입니다. 홀로 죽음의 길을 가게 한 그 분입니다. 그러나 지난 3년 동안 같이 먹고 자면서, 한 사람 한 사람 우리 발을 손수 닦아주신 그 분이 맞습니다. 이 바닷가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지금 눈앞에 서 계십니다. 처음에 무덤을 찾아갔던 마리아가 그가 살아계심을 보았다고 했을 때 도무지 믿지 않았습니다(막16:11) 엠마오시골로 다시 돌아가던 두 제자도 자신들에게 나타나셨다고 말하였을 때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눅24:13~35) 그러고 보니 살아생전 몇 차례나 이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막9:31) 왜 말씀하신 그대로의 일이 일어나도 그 때나 지금이나 믿을 수 없을까요? 지금도 사실 새까맣게 모르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몇 차례나 우리의 믿음 없음을,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살아난 후에 우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겠다(막14:28,16:7), 여기서 만나자 하신 곳, 이 곳입니다. 왜 다시 이런 우리를 찾아 오셨을까요. 그 선생님, 우리들의 주 앞에 다시 섰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사람들 앞에서 왜 모른다 했는지, 왜 저주까지 했는지, 왜 버리고 도망했는지,그것부터 먼져 따져 묻겠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도 서운한 기색, 실망한 기색이 없습니다. 야단할 기색이 아닙니다. 다만 숯불을 피워 아침을 준비 했습니다. 역시나 밤을 새워 일하고도 물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한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만남을 준비 했습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다시 주 예수님과 함께 먹는 아침입니다. 그러나 전처럼 신나게 웃고 떠들고 할 수 없습니다. 도대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행동 할 수 없습니다. 귀신도 쫓아내며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도 행한 우리였지만(마10:1), 선생님의 십자가형 죽음 앞에서는 모두 도망쳤던 우리입니다. 어떤 얼굴을 해야 합니까? 이럴 줄은 몰랐습니다. 차라리 왜 그랬냐, 왜 못 깨닫느냐, 또 다시 야단이라도 맞고 싶은데 이젠 눈도 마주칠 수 없습니다. 무어라 말씀하실지 귀만 기울 일 뿐입니다. 다시 살아나신 그 분 앞에서 더 이상 감출 것도 숨을 곳도 없습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아침 먹을 시간이라도 주어진 것이. 먹으며 생각을 해 보아야겠습니다. 입으로 떡은 생선은 들어가지만 도무지 생각이 멈추었습니다. 지난 3년이, 처음부터가 내 생각이었습니다. 끝이 내 생각이었습니다. 그것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내 생각대로가 아니었습니다. 내 눈앞에서 일어날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분만 우리의 생각들에 개의치 않고 하실 일을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하고 있습니다. 이제야 내 생각을 멈춥니다. 분주한 나를 멈춥니다. 내 안의 모든 시끄러움과 다툼이, 모든 의문, 모든 억울함, 울음과 두려움이 멈춥니다. 오직 그 분 앞입니다. 온 세상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앞입니다. 그는 이렇게 다시 살아나 있습니다 우리 앞에 이렇게 있습니다 다 먹은 후에 드디어 베드로에게 말씀 하십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다만 사랑을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21:15~17) 사랑이 아닌 그 모든 것은 십자가 죽음 앞에서 남김없이 모조리 도망쳐야 하는 것임을. . . 죽음을 넘은 사랑으로만 세워 가는 주님! 오직 사랑이길 원하는, 사랑이신 주님! <항상기쁜교회는 현재 서울 강서구 개화동에서 예배를 드리며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유튜브에서 ‘항상기쁜교회’로 검색할 수 있습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3-04-03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