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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요 14:27)
    재난의 징조로서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눅 21:10-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쟁, 지진, 기근, 전염병이 계속되는 상황 속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마음의 평안일 것입니다. 우리에게 마음의 평안을 주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으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모든 근심과 두려움을 뛰어넘는 내적이며 절대적인 평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죄인인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골 1:21-22) 주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이웃과도 평화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께서 주시는 평강을 확장시켜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닫아걸고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찾아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1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평강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강은 영적인 평안입니다. 그 평안을 얻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에게 평안이 없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평안을 주시고,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말씀을 생각나게 하십니다.(요 14:26)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먹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영이 건강하고 얼굴에 빛이 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내려올 때 그의 얼굴에는 빛이 났습니다. 주님과 함께 말씀을 나누었기 때문입니다.(출 34:29) 우리가 주 안에서 기뻐하면,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면, 모든 일에 염려 없이 기도로, 감사로 주님께 아뢰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빌 4:4-7) 주님은 백성의 심지가 견고하여 요동함이나 치우침이 없이 그 은혜를 의존할 때에 그들의 보호자가 되셔서 평강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사야 26장 3절을 보면,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한결같이 주님을 신뢰하는 자에게 평강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변함이 없으시고, 인간은 불안전하기 때문입니다. 유다 왕 아사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일, 올바른 일을 하였습니다. 이방 제단과 산당을 없애고, 유다 백성에게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의 율법과 명령을 실천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나라는 조용하였고 주님께서 그 나라와 아사에게 평안을 주셨습니다. 아사 왕은 백성에게 우리가 주 하나님을 찾았으므로 평안을 주셨다고 말했습니다.(대하 14:1-7) 우리도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을 때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평안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0:13)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며 전도해야 합니다. 전도는 나의 지혜의 설득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는 것이기에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해야 합니다.(고전 2:4) 예레미야 29장 11절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평안이요, 미래와 희망을 주시는 것을 기억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갖고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저는 『천로역정』 책을 읽었을 때나 <천로역정> 영화를 보았을 때 가장 감동적인 언어가 ‘희망’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간 존 번연은 소망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알았기 때문에 환경을 넘어 희망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천국으로 가는 여정 속에서 모든 것이 평탄하기만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셨기에 우리도 이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평안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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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13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성도님이 얼마나 내게”
    “♪ 성도님이 얼마나 내게 소중한 사람인지 / 헤어져 있다가 보니 이제 알 것 같아요 / 성도님이 얼마나 내게 필요한 사람인지 / 헤어져 있다가 보니 이제 알 것 같아요(중략) 사랑해요 사랑해요 / 주님 은혜 사모한 사람 / 고마워요 행복합니다 / 왜 이리 눈물이 나요” 이는 2024 장년여름수련회 첫 시간에 불렀던 노래입니다. 올해는 최초로 오크밸리와 교회에서 이원화로 수련회를 했습니다. 저로서는 코로나 때보다 더 긴장하고, 애간장에 녹는 순간순간이었습니다. 오크밸리 현장으로 오신 분들도 소중하지만, 개회 예배 때부터 본당과 동탄 지성전에 참석한 분들이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사실 유튜브로도 시청할 수 있는데 말입니다. 더구나 첫날 저녁부터 성도들이 본당 1층을 꽉 채우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그냥 울먹했습니다. 어떤 기자는 저에게 “왜 이렇게 목사님답지 않게 긴장하십니까, 여유를 갖고 하세요.”라고 말하며 갔지만, 여유를 가질 수가 없는 게 교회에서 차량을 운행하는 시간이 있잖아요. 제가 그 시간에 맞추어 설교를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본당에서 은혜를 사모하며 기대하는 성도들은 과연 얼마나 소통이 되고, 얼마나 은혜가 잘 전달이 될 것인지... 그러면서 동시에 또 현장에 있는 성도들의 눈동자와 마주쳐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긴장을 안 할래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또 이름없이 빛도 없이 섬기며 봉사하는 준비위원과 봉사 요원들, 또 일일이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도 헌금하는 성도들을 생각하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어쩌면 목요일 저녁이 피크였을지도 모릅니다. 수요일 저녁은 수요저녁예배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목요일도 교회당 본당을 거의 다 가득 채웠고, 오크밸리 현장에서는 오는 분들이 너무 많아서 의자를 다시 더 좁게 깔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목요일 저녁 설교 분량이 가장 많았습니다. 시간에 맞추기 위해서 많은 부분을 생략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원고를 줄이고 있는 중에 집사람이 저한테 전화로 이렇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성도들이 은혜받고 있으니까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맘 푹 놓고 설교하세요.” 그렇지만 저는 준비한 내용을 대폭 줄이고 생략하기 위해서 살을 베어내는 마음으로 설교를 해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작곡한 노래로 마무리를 하려고 했는데, 원고를 봤더니 그 노래가 아닌 것입니다. 제가 원고를 수없이 보고 또 봤는데 왜 그걸 발견하지를 못했는지... 아차 했지만 이미 때늦은 시간이었습니다. 숙소로 돌아와서 생각해 봤습니다. “문학과 예술이 영원한 미완성인 것처럼 설교도 마찬가지구나. 그렇게 준비하고 그렇게 애를 태웠는데... 하긴 그런 아쉬움이 있어야 다음 시간은 더 잘할 수 있겠지...” 그런데 다음날 새벽시간 뿐만 아니라 폐회예배 설교도 아쉬웠습니다. 설교 준비는 A+였는데 전달은 B+ 정도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물론 이 폭서에도 아무런 사고없이 잘 마칠 수 있었던 것이 은혜이고 또 은혜였습니다.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새에덴의 성도님들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며 교회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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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11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범사에 감사하십니까’(살전 5:18)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신과 가족과 타인에게 그리고 자신이 속한 직장과 사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산다는 것은 매우 행복한 일입니다. 감사는 고마운 마음을 상대에게 전하는 아름다운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감사를 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감사는 자신에게나 상대에게 즐거움을 주고, 서로의 관계를 끈끈하게 맺어주는 아름다운 행위인데 말입니다. 우리는 감사에 인색해서는 안 되며 매사에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감사할수록 유대관계가 좋아지고 건강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감사는 단지 고마움에 대한 마음의 표현이 아니라 서로를 단단하게 동여매주는 수단이고 건강한 삶도 가져다줍니다. 감사의 말 속엔 따뜻한 긍정의 에너지가 들어 있고, 무엇이든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지만 감사를 잘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매사를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비관적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십니다(18절).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사의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다. 범사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다 포함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시각으로 보면 불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상태에서 보면 무엇 하나도 눈물 흘리며 감사하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고난도 환란도 유익합니다(욥 23:10; 시 119:67, 71).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지금의 상태가 최고이고 최적의 상태라는 것이지요. 다니엘은 왕의 칙령이 내려졌으므로 자신이 기도하면 사자굴에 들어갈 것을 알면서도 집에 돌아와 모든 문을 열어놓고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크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단 6:10). 다니엘은 상황을 원망하거나 하소연하지 않았습니다. 그 상황을 바꾸어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처해있는 그 상황에 감사하였던 것입니다. 감사는 환경이나 조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과 생각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합 3:17-18에서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을 보면 감사는 신앙의 문제이지 환경의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은혜를 받는 비결은 감사이며, 은혜를 받은 결과도 감사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해 감사하는 삶이 바로 신앙의 생명이요 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복된 생활인 줄로 믿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 믿음은 대단히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성도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지금까지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가게 된다는 믿음의 확신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말세에는 더욱 감사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감사’는 헬라어로 ‘유카리스테오’입니다. 이 말의 뜻은 마음 중심에서 가식이나 부담 없이 자원하여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감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감사는 자원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신앙의 표현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늘 감사로 표현했습니다(시 95:2 ; 100:4). 감사는 단순히 인간의 의지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감동과 감화의 결실입니다. 이러한 감사는 궁극적으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고후 4:15) 우리의 전 생애를 하나님께 위탁하며 충성하는 적극적인 신앙의 행위와 태도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감사가 있는 곳에 기적이 있고, 기쁨과 사랑과 믿음이 있습니다. 모든 것, 모든 순간, 모든 사건, 모든 시간을 하나님께서 주신 소중한 선물로 여기며 범사에 감사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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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09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긴장과 설렘 사이에서”
    우리 교회는 신년이면 신년축복성회를 하고 또 여름에는 장년여름수련회를 해 왔습니다. 코로나 기간에도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습니다. 올해는 아주 특별한 여름수련회입니다. 오크벨리와 교회에서 이원화로 진행하거든요. 순장 모임인 ‘새순이 나르샤’에서 교회에서 수련회를 하자고 요구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실제로 작년에 교회에서 본당을 가득 채우며 여름수련회를 했거든요. 그런데 2022년도에 수련회를 끝내고 미리 계약을 했거든요. 그리고 그 계약을 연장하여 작년에는 교회에서 했습니다. 그러나 그걸 해약을 하면 계약금 외에 1억을 위약금으로 물어줘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1억을 손해 보지 않기 위해서 올해는 이원화로 하게 된 것입니다. 제가 보고받은 바에 의하면 오크벨리에 참석하는 인원보다 교회에 참석하는 인원이 더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아쉬움 반, 기대 반이죠. 물론 교회에 참석한 인원이 오크벨리에 다 오신다고 하더라도 공간이 부족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한 자리, 한 장소에서 함께 은혜받는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데요. 그래서 내년에는 교회에서 하려고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원화로 하다 보니까 긴장과 설렘 사이에서 아쉬움 반, 기대 반의 마음이 가득합니다. 다른 해에도 설교 준비에 심혈을 기울였죠. 그런데 올해는 정말 더 많은 진액을 쏟았거든요. ‘선재 업고 튀어’라는 드라마가 한창 중일 때 저는 ‘요나 업고 튀어’라는 주제를 정해놓고 말씀 속에 있는 보화와 진리를 얼마나 캐고 또 캐냈는지 모릅니다. 내년에는 도대체 무슨 말씀을 준비해서 어떻게 전달할지 걱정될 정도로 최선을 다해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이원화로 하려고 하니까 긴장과 설렘 사이에서 아쉬움 반, 기대 반의 마음이 큽니다. 현장에 참석을 하시든 교회에서 영상으로 함께 하시든 말씀의 은혜가 참 시원한 생수처럼 쏟아질 것입니다. 현장에 오신 분들이 어찌 수련회에 참석을 안 하시겠습니까마는, 어쩔 수 없이 못 오신 분들도 교회에 꼭 참석하시기를 부탁합니다. 이 글을 쓰는 밤에도 산들바람이 불어와 창가에 산들산들 들어옵니다. 그 바람이 제 마음을 더 긴장과 설렘의 숲길 사이를 걷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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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04
  • [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무분별한 ‘탄핵’의 부메랑 효과’
    더불어민주당은 현 정부에서 임명된 방송통신위원장 3명 전원을 탄핵 대상에 올리며 정부 여당과의 공영방송 주도권 쟁탈전을 벌이고 있다. 야당이 8월 1일 공동발의한 이진숙 방통위원장 탄핵소추안은 그의 위원장 임명 하루 만에 시작된 것으로 2일 표결에서 가결했다. 앞서 발의됐던 이동관·김홍일 전 위원장, 이상인 전 위원장(직)은 표결 전 자진해서 사퇴했다. 이로써 방송·통신 관련 정책을 총괄하는 방통위는 ‘식물 조직’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현 정부들어 이진숙 위원장을 포함해 탄핵 대상 인사는 14명(18건)으로, 이상민 장관과 방통위원장·방통위 직무대행 등 4명, 검사 9명이었다(검사 2명 자진철회). 이 정도면 ‘습관성 탄핵중독증’이다. 그리고 탄핵의 종착지는 대통령이다. 그렇기에 아직까지 헌재로부터 단 한건도 인용받지 못함에도 계속되는 야당의 무분멸한 탄핵시도는 다분히 계산된 정치 공세로 볼 수 밖에 없다. 대통령의 거부권이 당연히 예상되는 법안들도 일사불란하게 밀어붙여 지금까지 15번의 거부권을 유도한 것 역시, 이를 미리 염두에 둔 야당의 의도적 도발로 보는 것이 국민적 정서이다. 당연히 국회 입법권을 무시한다는 야당의 주장이 힘을 잃고 있다. 민주주의에서 탄핵은 당사자가 헌법에 준하는 확인된 중대한 범죄를 근거로 입법부가 국민적 심판을 가하는 일종의 헌법적 강제 기능이다. 그러므로 탄핵 시도는 매우 신중하고 진지해야 하며, 마지막 불가피한 선택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최근 민주당의 발의한 탄핵안이 헌재에서 인용된 경우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반복하는 것은 나름대로 계산이 있기 때문이다. 공직자에게 탄핵 만큼 위협적인 수단도 없다. 탄핵은 해당자들을 압박하여 민주당에 불리한 결정이나 조치를 하지 못하기 위한 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의 탄핵에 대해 그 어떤 공직자도 심각하게 생각하거나 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국민적 동의도 얻지 못하고 있다. 이런 야당의 탄핵 시도는 지지자들의 이탈 방지와 결집을 위한 무리한 시도일 뿐이다. 아직 멀리 있는 총선에 지금 국민적 우려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며, 현실적으로 지지층 결집이 필요한 야당에게서는 마치 마약과 같은 내성과 유혹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또 무분별한 대통령의 거부권은 비판받아야 마땅하지만, 지금의 거부권 행사는 마치 야당이 그렇게 하라고 유도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뻔히 거부권 행사를 예상하면서도 강행하는 것은 잦은 거부권 행사에 대한 반발심리가 무분별한 탄핵의 부당함을 가려 줄 것이고, 거부권을 집중 공격함으로 탄핵 시도에 대한 공격을 무력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탄핵으로 굳이 당사자를 그 자리에서 내쫒지 않더라도, 야당에 불리한 행정, 수사, 판결, 조치하는 공직자들에 대한 공공연한 위협이 성공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당 대표의 사법 리스크에 직면한 야당으로서는 수사기관과 사법부에 탄핵 카드는 그들을 움츠러들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야당이 간과하는 것이 있다. 탄핵에서 돌아온 그들의 가지게 될 반발과 무분별한 탄핵을 바라보는 국민적 정서이다. 계속된 탄핵은 대상 기관의 집단 반발과 순수성을 의심한 국민적 저항은 결코 만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탄핵의 부메랑 효과는 그 어떤 것보다도 크다. 여야 정치세력이 연대하여 성공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의 효과는 보수정권의 궤멸과 대적 불가한 진보정권의 탄생을 가져왔다. 반면 한나라당의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실패는 그 다음 총선에서 민주당의 압승을 가져왔다. 그 만큼 탄핵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어느 한 축은 거의 궤멸적 타격을 입는다. 이런 경험들이 탄핵을 전가의 보도로 여기는 정치판이 되었고, 다른 쪽에서는 그 탄핵의 부메랑 효과를 고대하고 있다. 이런 정치에는 더 이상 미래가 없다. 입법 폭주와 이에 맞서는 거부권의 쳇바퀴 돌기, 이런 정치에는 진실이 없다.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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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성택시사프리즘
    2024-08-03
  • [언론회 논평] 영적·종교적으로 더 피폐해진 파리 올림픽
    지난 26일부터 프랑스 파리에서는 제33회 ‘파리올림픽’이 열렸다. 전 세계 206개국에서 10,500명의 선수들이 참가하여, 32개 종목에서 329개 경기가 열리는 세계적인 스포츠 축제이다. 이번 올림픽은 8월 11일까지 계속된다. 그런데 세계인의 축제에서 기독교를 한껏 모독한 장면들이 나와 기독교계를 분노하게 하여, 저질 올림픽으로 기록될 전망이다. 이번 올림픽 개회식에서는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패러디한 작품이 선보였는데, 예수 그리스도로 분장한 뚱뚱한 드래그퀸(여장 남자)을 등장시켰고, 주위에도 비슷한 인물들을 배치시키고 있다. 또 다른 장면에서는 남자, 여자, 동성애자가 도서관에서 만나 의기투합한 듯, 한 방으로 뛰어 들어가는 모습도 연출하였다. 파리 올림픽은 다양한 성 정체성을 평등하게 대우하고, 포용성을 앞세워 ‘열린올림픽’을 표방하지만, 수 많은 세계인들이 믿는 기독교를 가장 저질스럽게 표현하는 것이 열린 시각인지 묻고자 한다. 전 세계에 25억 명의 기독교인들이 있는데, 이들을 모욕하고, 조롱하고, 부정하는 것이 열린 자세인가? 이번 파리 올림픽은 심각하게 기독교에 대하여 폐쇄적이고, 영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가장 타락하고 피폐하여, 볼품없는 올림픽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 밖에도 이번 파리 올림픽에서는 오륜기를 거꾸로 건다든지, 공연에서 프랑스 마지막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의 머리가 잘린 모습을 무대에 등장시키고, 헤비메탈 음악과 함께, 프랑스 혁명 당시 단두대를 연상하는 피가 사방으로 튀는 것과 같은 모습이 연출되었다. 폭력적인 방법이 어찌 평화를 지향하는 올림픽과 매치 된다는 것인가? 거기에다 거의 나체로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있어 그 장면은 여러 나라에 송출이 중단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개막식에서 한국을 북한으로 소개하고, 우리나라의 펜싱 부분 금메달리스트인 오상욱 선수를 오상구로 표기하는 등 상식 이하의 모습들이 파리 올림픽에서 드러나고 있다. 세계인의 화합과 만남과 새로운 기록과 승리의 순간을 위해, 그리고 올림픽을 준비하기 위하여 각고의 노력을 한 모든 선수들을 위로하는 것이 올림픽이다. 또한 세계인들이 스포츠 정신을 통하여, 건강한 삶과 인간 승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재미를 더하는 것이 올림픽이다. 그러나 이번 제33회 파리 올림픽처럼 전 세계인 가운데 1/3을 차지하는 사람들이 믿는 기독교를 모독하고, 결과적으로 부정하여, ‘당신들 기독교인들은 필요 없다’는 식의 스포츠 행사는 올림픽에 대한 거부감만 커질 뿐이다. 동성애는 우대하고, 기독교는 박대하는가? 파리 올림픽 관계자들과 세계올림픽위원회는 전 세계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정중히 사과해야 한다. 한국의 기독교 대표적 단체들도 이 점에 대하여 올림픽위원회에 강력히 항의하여, 다시는 이런 악행이 벌어지지 않도록 조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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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4-07-30
  • [언론회 논평] 대법원의 ‘종교의 자유’에 대한 해석이 잘못 되었다
    대법원이 헌법 제20조에 보장된 ‘종교의 자유’에 대하여, 지자체의 행정명령보다 못한 것으로 해석하여 논란이 되고 있다. 사건의 개요를 살펴보면, 지난 2020년 9월 당시 광주시의 모 교회에서 성도들이 예배 드린 것을 지자체장이 행정명령을 어겼다며 ‘종교의 자유’를 현격하게 침해한 것을, 18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판단을 내렸다. 당시 광주시는 코로나19 상황에서 관내에 있는 모든 교회에서 대면 예배를 금지하라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해당 교회는 성도들 30~40명이 모여 예배를 드린 것이다. 이것이 예배 준비를 위한 9명까지의 입장 제한을 어겼다는 것으로, 담임 목사 등에게 벌금 처분을 내린 것이다. 이에 해당 교회는 지자체의 행정명령이 부당함을 호소하며 행정소송을 벌였는데, 1심 재판부는 각하(却下-법원이 심리하지 않고 사건을 끝냄)를 했고, 2심 재판부는 기각(棄却-법원이 판단하는 것을 물리침)을 하였다. 그런데 대법원에서는 교회측의 상고를 기각하고 원심을 확정하였다. 즉 제대로 된 심리도 없이, 종교의 자유보다 공익의 목적이 중하다는 입장을 취한 것이다. 지역 주민의 건강을 위하여, 그리고 공공의 목적을 위하여, 지자체가 행정명령을 내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여도(물론 이것도 문재인 정권하에서의 행정편의주의라고 본다) 법원의 판결은 달랐어야 했다. 즉 ‘종교의 자유’에 관한 것은 헌법적 가치를 구현하는 것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당시 교회들은 철저하게 정부에서 주문하는 대로 ‘방역수칙’을 지켰고, 나중에 알려졌지만, 교회에서 정기 예배를 통한 코로나 확진자는 없었다. 그런데 교회만 유독 ‘고위험군’으로 지정하여 현장예배(대면예배)를 제한한 것은 형평성, 공정성, 평등성, 비례원칙, 정교분리원칙, 종교의자유 등을 크게 제한한 잘못이다. 헌법에는 여러 가지 국민의 기본권인 ‘자유’가 있다. 그래서 기본권이 충돌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에는 어떤 자유가 우선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자유의 개념’은 성경에서 가장 먼저 나타나고 있고, 이를 헌법에 반영한 것이다. 따라서 모든 자유 가운데 ‘종교의 자유’가 으뜸임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각급 법원들이 이에 대한 정확한 심리나 판결 대신 각하와 기각을 하고, 대법원마저도 ‘집합 금지로 제한되는 종교의 자유가 공익보다 중하다고 보기 어렵다’는 주장은 과연 우리나라의 대법원이 ‘종교의 자유’에 대한 의미나 제대로 이해하는지 모르겠다. 지난 2021년 6월 서울행정법원에서는 교회들이 서울시장과 은평구청장이 내린 대면 예배 금지 명령을 취소해 달라는 소송 결정에서 ‘교회의 대면 예배 전면 금지는 위법하다’는 판결을 한 적도 있다. 현대 사회에서 가장 귀한 권리로 인정받아야 할 ‘종교의 자유’를 소송을 맡은 법원들이 서로가 미루고, 떠다밀고, 그것을 끝내 용인해 주는 사법부의 태도는 실망 그 자체이다. 차후에 비슷한 사건이 발생하면, 무조건 ‘밀어붙여’식으로 ‘종교의 자유’를 아무렇지도 않게 유린하겠다는 것인가? 법원이 지나치게 정치적이 되고 법의 정신과 정의를 외면하고 그저 두루뭉술하게 그 판단과 결정을 미루는 것은 국민의 기본권마저도 무시하는 처사로 보인다. 이를 어찌 ‘법치주의 국가’에서 가장 법률적 권위를 가져야 할 법원의 태도라고 할 수 있는가? 유사한 사건들이 남아 있는데 대법원의 판결을 지켜볼 것이다. 법관들의 치열한 법리적 해석과 판결로 국민들을 실망시키지 말아야 한다. 특히 대법원은 말 그대로 ‘법 정신’을 명확히 할, 법원 조직의 최고 상급심의 면모를 제대로 보여 주기 바란다.
    • 칼럼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4-07-30
  • [언론회 논평] 대법원의 과심(過審)이 헌법 체계를 마구 뒤흔든다
    7월 18일 대법원은 이상한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이 동성 커플에게 건강 보험상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하라는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우리 헌법 제36조에서는 혼인을 ‘양성 평등’에 기초하여 성립한다고 하였다. 즉 결혼은 남녀, 양성에 의하여 이뤄짐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대법원은 동성(남성)끼리 결혼을 하고 동반자로 사는 사람을, 이성간 결혼을 하고 사는 사람들과 똑같이 피부양자로 인정하지 않는 건강보험공단이 잘못이라는 것이다. 대법원의 판결은 ‘피고(건강보험공단)가 이성 동반자와 달리 동성 동반자인 원고(남성 동성애 커플)를 피부양자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합리적 이유 없이 원고에게 불이익을 줘 사실상 혼인 관계에 있는 사람과 차별하는 것으로 헌법상 평등원칙을 위반하여 위법하다’는 것이다. 도대체 우리나라 최고 법원인 대법원 판결에서 무엇이 평등원칙을 말하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현재 우리나라는 동성결혼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헌법 제36조에서 분명히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성간 결혼을 한 부부 사이에서 어떤 사람은 피부양자로 인정하고, 또 다른 사람은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평등원칙’에 분명히 어긋나는 것이다. 그러나 정상적 혼인이 될 수 없는 동성 동반자에게 동일한 권리를 주라는 대법원의 판결은 ‘평등의 원칙’을 과심(過審)하는 것이다. 아무리 대법관이라고 하여도 우리 법의 가장 근간이 되는 헌법(憲法)을 무시하면 온당한 판결을 할 수 없게 된다. 법관이 법률을 외면하면 그것은 사법부의 권한을 벗어나는 것이며 오심(誤審)의 원인이 된다. 대법원은 이 판결에서 건강보험공단의 조치에 대하여 ‘인간의 존엄과 가치, 행복추구권, 사생활의 자유, 법 앞에 평등할 권리를 침해하는 차별 행위이며, 그 침해의 정도가 중하다’고 했다. 그럼 최고 법원이 헌법을 무시한 결정을 내릴 때, 국가 전체적으로 오는 혼란과 법의 체계가 무너지는 위험은 누가 책임지는 것인가? 오히려 소수 의견을 낸 4명의 대법관들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이들은 ‘국민건강보험법에서 직장 가입자의 피부양자로 인정하는 배우자는 이성 간의 결합을 본질로 하는 혼인을 전제로 하는데, 동성 간의 결합에는 혼인 관계의 실질이 존재한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헌법에 맞는 판단이 아닌가! 실체적 하자가 없는 것을 ‘평등 원칙’을 들먹여서 선명한 헌법에 덧칠을 해 버리면, 법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억지가 되는 것을 모르는가? 개인의 행복이나 자유는 충분히 보장되어야 하지만 헌법의 규정과 혼인의 가치를 벗어난 사람들을 위한 ‘차별 논리’로 법의 질서를 무너뜨린다면 이것은 대법원의 심각한 모순이 되며 그 권위와 신뢰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심각한 과실이 될 것이다.
    • 칼럼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4-07-30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전인적 재충전의 기회”
    저는 지금까지 하나님께 원 없이 쓰임 받았습니다. 저는 10대 후반 소년 때부터 쓰임 받았거든요. 하나님 앞에 부름받아 교회를 나가고 예수님을 영접한 날부터 저는 교회에서 활동하고 자는 것이 가장 즐거웠습니다. 이런 표현을 하기는 뭐 하지만, 고3 때도 학교에 있는 것보다 교회에 있는 게 더 즐거웠습니다. 토요일 오후부터 교회에서 활동하고 교회 가서 잤습니다. 그러다 신학교를 간다고 집에서 쫓겨난 후 20대 때는 진짜 풍운아의 삶을 살았습니다. 백암교회를 개척할 때 모진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한 나무로 설 수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한 번도 안식년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한 10여 년 전 탈진 증상이 왔습니다. 밥을 먹어도 배가 고프고 수액을 한두 번 맞아서는 효과도 없었습니다. 그때 저에게 김용선 장로님이 약을 지어주면서 “좀 쉬어주어야 합니다. 약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하시는 것입니다. 며칠 쉬니까 또 고비를 넘긴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새순이 나르샤, 전반기 교역자 워크숍, 킹덤맨, 피어라 봄까지 연이어서 주관을 하고 진행을 하였습니다. 그리고도 교계연합을 위해 얼마나 많은 비공개 모임을 가졌는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요즘 다시 탈진을 느낍니다. 지난 화요일에 오산리기도원에서 열린 OCCK성회에서 중화권의 목회자와 성도들이 2천여 명 모이는데 어떻게 설교를 할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강단에 올라가니까 또 그냥 팔팔 날았습니다. 그런데 집회를 마치고 내려오니까 다시 허기가 졌습니다. 고기를 먹어도 허기지고 탈진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번에도 김용선 장로님이 한약을 지어 오셨습니다. 또 목요일에는 다건연세내과에 가서 수액도 맞았습니다. 수액을 맞으면서 생각을 해보니까 옛날 오색그린야드에서 교역자 워크숍을 할 때 쉬시려고 오신 몇몇 목사님들이 저에게 하신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목사님, 쉬엄쉬엄하세요. 우리처럼 쉬어 가면서 하세요. 우리가 놀러 온 것이 아닙니다. 쉬러 온 것입니다. 목사님도 언젠가는 지칠 때가 있을 겁니다.” 그래서 그날 저녁 산행을 해야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낮에는 덥고 찌는 날씨였지만 산에 오르니까 역시 산 공기는 달랐습니다. “산 공기와 도심의 공기가 어쩜 이렇게 다를 수가 있는가. 시멘트를 밟지 않고 흙을 밟으니까 이렇게 온몸이 가벼울 수가 없어. 산 공기를 마시니까 이렇게 가슴이 시원하고 상쾌할 수가 없어. 왜 이렇게 좋은 산행을 몇 주 동안 못했단 말인가.” 내 마음 흙이 되어, 바람이 되어 이 상쾌함을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전하고 싶었습니다. 수련회를 위해서라도 한 주 쉬려고 했는데, 또 외부일정이 있네요. 그러나 장년여름수련회에 가면 마음껏 은혜를 누리고, 산 공기를 마시며, 전인적 재충전의 기회가 될 거라는 기대감으로 설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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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4-07-28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자족 신앙’(빌 4:12-13)
    현대는 불만족의 시대라고 합니다. 어디를 가든지 만족하다는 소리를 듣기가 어렵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풍요한 삶을 누리는 것 같으나 실상은 모두가 불만의 포로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모르거나 곡해함으로서 불평과 불만에 사로잡혀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영적 피조물입니다(창 1:27). 전 3:11에서는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다만 흙으로 빚어진 물질적인 존재인 줄로 착각하여 지식이나 재물로 그 공백을 메꾸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의 행복은 바람과 같아서 아무리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습니다. 잡았다 생각하지만 빈손입니다. 그래서 전 1:14절에서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물질제일주의로 물질을 추구하면서 물질로 행복을 사겠다고 하지만 도리어 그 물질 때문에 불행해졌습니다(딤전 6:10). 세상은 자족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여기지 않고 더 가져야 한다고 아우성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우리에게 자족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2절).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라”(딤전 6:8)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족이란 자기만족이 아니라 부단히 싸워서 이겨야 하는 즉 자기와 싸워서 이겨야 하는 바로 그런 것임. 자족은 스스로의 체념에서 오는 자기 비하나 자기 포기가 아니라 어떤 도전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용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신자는 가난하고 비천한 환경에서도 결단코 실망과 낙담하거나 열등감에 빠져 자포자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자족과 감사의 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족하는 생활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니 경험을 통하여 자족하는 비결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형편에든지 불평이나 불만은 배우지 말고 자족하기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남의 것을 보고 비교하지 말고, 내 입장과 환경을 바라보며 만족합시다. 세상에는 가만히 있어도 알아지는 것이 있고, 배워야 알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본능적인 것은 누구나 배우지 않아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부단히 본능적인 욕구들로부터 자족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고후 3: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우리의 만족은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충족시켜 주십니다(시 23:1, 약 1:17). 세상의 만족, 육신의 만족이 아니라, 주님을 신뢰하는 데서 오는 만족인 것입니다. 우리는 환경에 의해 자기의 행불행을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행복은 자기가 처한 환경에 달린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에 내 자신을 굴복시킬 때 우리는 어떠한 환경에서도 자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13절)는 말씀은 ‘세상의 성공’에 초점을 맞추지 있지 않고, ‘자족하는 삶’에 초점을 두고 있는 말씀입니다. 나는 어떤 상황 속에서라도 믿음을 지키며 그 어려운 환경을 극복할 수 있다는데 메시지가 있는 것입니다. 자족은 능력주시는 주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어떤 환경이나 생활 속에 처할지라도,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만족하면서 영적 부요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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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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