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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언론은 권리만 있고, 책무는 없는가? ’
- 최근 윤 대통령의 해외 순방 일정 가운데 MBC 기자를 대통령 전용기에 탑승시킬 수 없다고 하여 시끄러웠다. 이에 대하여 MBC와 언론 단체들은 크게 반발하였다. 그런데 특별한 이유도 없이 대통령실에서 그런 조치를 내렸다면, 이는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MBC의 제3노조가 발표한 성명에 보면, 왜 MBC가 그런 조치를 받았는지를 알 수 있다. 제3노조가 발표한 내용에 의하면, MBC는 얼마 전 대통령이 미국을 순방할 때 사석 발언을 타사 기자들에게 알렸고, 또 대통령이 하지도 않은 말을 자막에까지 넣어 방송하였다. 그리고 특파원들이 한국의 대통령이 미국 의원들을 욕을 했다고 백악관과 국무성에도 알렸다. 그리고 전에도 MBC가 보도한 행태를 지적했는데, 더불어민주당 출신의 손혜원 의원 투기 의혹 보도를 미적거렸고, 조국 법무부장관 의혹에 침묵했고, 울산시장 관권 선거 의혹을 사실상 은폐했고, 똑같은 총선용 비례대표정당을 민주당에는 ‘의병정당’으로, 야당에는 ‘위성정당’이라 불렀고, 천문학적 피해를 일으킨 라임 펀드와 옵티머스 자산운용 사건을 축소 보도하였고, 대장동 비리 의혹을 외면하다 유00로 꼬리를 자르려 한 의혹을 받았고, 공수처의 전방위 통신사찰에 대하여 침묵했다는 것이다. 또 지난 3월 대선 100일간 선거 기간에는 단 하루도 예외 없이 편파 보도를 하면서, 윤석열 후보 인터뷰를 방송하면서 ‘거짓말’이라는 노래를 틀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MBC는 편파 보도에 대하여 단 한 번도 사과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말로는 진영을 뛰어 넘는 언론노조가 되자고 하면서, 지난 2017년 MBC의 비민주노총 기자 88명이 기자 업무를 빼앗길 때 침묵했다고 꼬집는다. 그렇기 때문에 ‘MBC 구성원들은 지금이라도 특정 정당의 선전도구라는 오명에서 벗어나 언론의 본모습을 찾으려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언론자유를 주장할 자격이 생긴다’고 피끓는 호소를 하고 있다. 흔히 MBC를 ‘노영방송’(勞營放送)이라고 한다, 노조(勞組)에 의하여 움직이는 방송이요, 언론이라는 것이다. MBC는 과거 2007년 5월 노무현 정부가 정부의 37개 부처 기자실을 3곳으로 통•폐합하여 언론에 대못을 박았고, 기자들도 허가 없이 공무원을 만나지 못하게 할 때에는 별 반응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들이 확연하게 편파, 왜곡 보도를 하는 것은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대통령실의 국익을 위한 조치에는 한껏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MBC의 불공정 보도를 우려하고 비판하는 일들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래서 MBC가 국민들에게 신뢰를 이미 잃어버렸는데도, 그에 대한 반성은 없고, 언론의 자유를 침해당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아주 빈약하다. MBC의 이런 태도에 보조를 맞춘 것은 한겨레와 경향신문 정도이다.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언론들이 있다. 2020년 기준으로 한국언론진흥재단에 등록된 우리나라 언론은 총 5,154개(일간전국종합신문 23개, 일간지역종합신문 124개, 경제일간신문 13개, 스포츠일간신문 6개, 일간외국어신문 2개, 기타전문일간신문 55개, 무료일간신문 1개, 전국종합주간신문 33개, 지역종합주간신문 554개, 전문주간신문 673개, 공영방송 19개, 민영방송 12개, 종교특수방송 8개, 종편보도채널방송 6개, 지상파 DMB 3개, 인터넷언론 3,594개, 통신사 28개)이다. 여기에 종사하는 사람만도 62,806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많은 언론들이 있는데, 이제는 편파, 왜곡을 일삼는 MBC 방송의 영향력은 상당히 떨어져 있다. 이에 즈음하여 사회 일각에서는 MBC 폐방 운동도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다. 언론의 역할이 제대로 이뤄어지지 않을 때 발생하는 현상을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 언론의 역할과 영향은 지대하다. 그만큼 언론이 잘못된 보도를 할 경우, 돌이키기 어려운 폐해를 사회와 국가와 국민들에게 끼치게 된다. 자신들은 공정한 방송을 제대로 하지 못해, 언론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형성시키고, 더 나아가 국익을 손상시켜 국민들을 피로감에 시달리게 하면서, ‘언론의 자유’를 일방적으로 주장한다는 것은 얼마나 공허하고 허탄한 소리인가? 언론은 권리만 있고, 책임과 의무는 없다는 것인가? 남을 비판하고 사회적 부정과 부패를 찾아내고 알리는 언론이야말로, 가장 공정하고 가장 정확하고 가장 불편부당(不偏不黨)한 자리에 있어야 그 일들이 인정을 받게 된다. 그렇지 못하면, 그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이 맞다. 그런 측면에서 기독교계 언론들도 예외는 아니라고 본다. 흔히 말하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고, 거기에다 선교적 사명까지 감당해야 한다. 교회연합신문이 창간기념일을 맞는다. 축하드리며, 지금까지도 어렵게 교회의 현장을 지키면서 기독교 언론 역사를 만들어 왔지만, 앞으로도 한국교회를 지키는 보루(堡壘)의 역할에 더욱 매진해 줄 것을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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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언론은 권리만 있고, 책무는 없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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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시평] 임영천 목사의 ‘피난처’와 ‘안네의 일기’의 나라
- 요즘 우연한 기회에 네덜란드(화란)의 역사를 좀 들춰보는 일이 있게 되었다. 아니, 스페인과 네덜란드의 상호 ‘침략과 방어’의 역사에 더 관심이 갔기 때문에 지난 16세기 전후의 네덜란드 역사를 그 관점에서 주로 살펴보게 된 것이다. 이 시기에 스페인의 군주는 펠리페 2세였는데, 그는 특히 가톨릭 옹호자로 이름을 날렸고, 그 때문에 반(反)종교개혁 운동가로서 너무도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당시 스페인의 지배를 받고 있던 네덜란드 사람들에게 칼뱅주의 개혁의 바람이 크게 불어 닥침으로써 결국 개신교(개혁 교회)가 강화돼버린 네덜란드를 그대로 놔둘 수가 없다고 판단한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는 어떤 강경책을 써서라도 네덜란드를 스페인처럼 획일적인 가톨릭 국가로 만들 방책으로 ‘스페인 식 종교재판소’를 네덜란드에도 세우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자국 스페인과 이웃 포르투갈에 이 종교재판소를 설치하여 가톨릭 강화(획일화)에 크게 득을 보았던 스페인의 군주는 네덜란드에도 그 종교재판소를 두어 가톨릭 일원화를 획책하려고 하였다. 이 스페인 식 종교재판소가 어떤 기관이었는지 이미 정평이 나 있어서 그 악명을 귀로 듣기만 해도 사람들이 소름 끼칠 정도였는데, 종교 면에서 자유와 관용을 사랑하는 네덜란드인들에게 이 소식은 마치 푸른 하늘에 날벼락(청천벽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스페인의 종교재판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19세기 후반에 창작된 도스토예프스키의 최후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1880) 속의 ‘대심문관 이야기’에 잘 나타나 있다. 그 이야기에서 보듯이, 그리스도께서 그곳에 내려오신 때는 종교재판소의 ‘엄한 화형(火刑)의 뜰’에서 100여 명에 가까운 이단자들이 대심문관인 주교의 지휘 아래 대거 분형(화형)에 처해진 바로 다음날이었다. 이 이야기는 15세기 스페인의 도시 세비야, 그러니까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성취되기 직전 시기에 대표적인 가톨릭 국가였던 스페인의 한 도시에서 있었던 일로 설정되어 있다. 그런데 이때는 속칭 이단자들에 맞서 교황이 시작한 이를테면 고전적인 종교재판의 성격이 강했지만, 그 재판이 스페인이란 나라에서 그들의 특성에 맞게 발전해(?) 나간, 즉 15세기 후반(1478)부터 스페인에서 시작된 ‘스페인 식 종교재판’이란 것은 그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었다. 이 스페인 식 종교재판이란 것은 유대교에서 가톨릭교로 개종을 했다곤 하지만 진심으로 개종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는 유대인들을 심사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것이다. 악명 높은 이 재판에서는 정치경찰과 정보원들의 활약에 힘입어, 사실을 그대로 자백하라고 유대인들을 고문하는 일은 다반사였고, 또한 무슨 법적 테두리에 구애 받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수년 뒤 소위 알함브라 칙령(1492)이 발표되고 난 후 유대인들에게 상황은 더 악화되어 갔다. 스페인 정부는 유대인들이 가톨릭교로 개종하는 걸 기다리고 있기보다는 아예 스페인에서 “모두 떠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4개월 안으로 떠나라는 칙령에 의해, 지금껏 개종을 거부하고 이제야 추방령을 수용한 17만여 명의 유대인들이 갑자기 그 나라를 떠나면서 질병과 아사(餓死) 등으로 수만 명의 사람들이 사망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이런 무자비한 스페인 정부가 이제는 네덜란드마저 가톨릭 획일 국가로 만들기 위해 종교재판소를 설치하겠다고 나오자 지금껏 지배국 스페인에 대하여 순종적이기만 했던 네덜란드가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성상파괴운동(1566)을 시발로 해서 터진 저항운동은 네덜란드 독립전쟁(1568) 양상의 무장투쟁으로 확대되었고, 북부 의 도시 레이덴에서 맞붙은 양군(兩軍)의 전투(1574)는 그들의 생명줄인 제방을 허물어 물바다를 만들며 결사 항전한 네덜란드 군의 승리로 끝났다. 이후 네덜란드인들은 ‘사상과 종교의 자유’란 원칙에 따라 그들의 종교(개혁교회)를 그대로 지켜나갈 수 있었고, 특히 유대인들과 같은 수난자들을 기꺼이 받아들여 17세기의 황금시대를 열 수도 있었다. 그러나 1940년 독일 나치 군의 침략을 받아 자기네들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물론, 그들이 영입한 유대인들마저 극도의 박해를 받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 했던 일은 그들로서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수난의 유대인들을 도운 코리 텐 붐 일가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신앙수기 <피난처>가 이 나라에서 나오게 된 것은 큰 축복이었고, 또한 유대인 소녀 안네 프랑크와 그 가족의 고통스런 삶이 기록된 <안네의 일기>마저 이 나라에서 탄생하게 된 일은 더 큰 축복이었다. 유대인들이 최후의 피난처로 삼았던 이 관용의 나라가 아니었더라면 이런 결과는 결코 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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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시평] 임영천 목사의 ‘피난처’와 ‘안네의 일기’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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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시평] 임영천 목사의 '무속 세계에 얽힌 사연들'
- 20년 전(2002년)에 어느 방송사가 방영했던 TV극 <장희빈>을 무슨 이유에서인지 요즘 한창 재(再)방영하고 있어서 자연히 그 내용에 끌려 시청을 하고 있다. 그런데 지난 회(79~80회)에서는 좀 특이한 장면이 나와서 그것에 끌려 더 눈을 크게 뜨고 화면을 보았던 기억이다. 희빈 장씨가 막례란 무녀를 끌어들여 중전을 음해하는 공작을 벌이고 있는 장면이다. 취선당에 차려놓은 신당에 미리 마련된 중전(왕후 민씨)의 얼굴을 표적삼아 화살을 겨냥해 과녁(눈알)을 명중시키는 짓거리를 거리낌 없이 자행하고 있다. 무당 막례가 몇 차례 화살을 당기다가, 직접 쏘아보라고 희빈 장씨에게 활을 넘겨주니까 거침없이 화살을 당기고 있다. 중전 민씨가 큰 타격을 받아 빨리 죽도록 만들어 보려는 무당 막례의 계획된 만행에 서슴없이 가담하는 희빈 장씨의 잔인한 모습이다. 장희빈은 중전 민씨(인현왕후)가 죽게 되면 그 자리에 다시 자기가 오를 것을 걸기대(乞期待)하며 그런 저주의식을 주저 없이 감행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사실이 민씨 사후(死後)에 최숙빈의 발고(發告)로써 밝혀짐으로 인해 그녀의 운명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무술(巫術)과 부패 권력이 자기의 이익을 위해 서로 손을 잡은 사례를 볼 수 있다. 김동리 작가의 장편소설 <을화>(1978)에는 주인공인 어미 을화와 아들 영술 사이의 기막힌 이야기가 들어 있다. 어미 을화(乙火)는 무당 신분이고 그녀의 아들 영술이는 예수교 신자이다. 영술이가 마을 교회엘 들렀다가 우연히 그의 생부를 만나게 된 뒤로, 그가 아비 집에 찾아가거나 머무는 일이 잦아진 것을 극력 반대하는 어미 을화와 아들 영술 사이에 심한 갈등이 있게 된다. 어미와의 대립 끝에 영술이 나흘간이나 귀가하지 않는 동안, 을화는 아들의 귀가를 고대하며 식음을 전폐한 채 치성을 드리고 있었다. 영술이, 지난 제 감정적 처사를 반성하며 귀가한 다음날 새벽, 을화는 아들의 성경책을 몰래 빼내 불에 태우며 굿을 벌이고 있었고, 이 현장을 목격한 영술이 그 불을 끄려고 근처의 물그릇을 집어든 순간, 을화의 식칼이 아들의 왼쪽 가슴을 찔러버린 것이다. 칼을 맞은 영술은 다음날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무당에게는 모자지간의 관계조차 제대로 유지하기가 어려운 무슨 불가침의 영역이 있음이 드러난 셈이다. 우리는 여기서 무녀의 양심(또는 사랑)이란 것이 그녀 특유의 ‘엑스터시(황홀경)의 유지’만큼도 그 자신에게 귀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서기원 작가의 장편 역사소설 <조선백자 마리아상>(1979)에는 사기장이[陶工] 김신봉이란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는 상당히 늦게 예수교도(속칭 천주학쟁이)가 된 편이기는 하지만 신앙만은 아주 굳건하게 유지하고 있는 청년 신도이다. 그런데 그의 사기장촌에도 ‘천주학쟁이’들에 대한 일대 검거선풍이 불어닥쳤고, 그도 동료 도공들이 먼저 잡혀간 광주목의 관아로 자수 형식으로 걸어들어갔다. 이가환 광주 목사(부윤)의 온갖 회유와 협박, 아니 견디기 힘든 장타(곤장 타격) 등의 악형에도 굴하지 않던 신봉이가 그만 마지막 한 순간에 힘없이 무너지면서 “소인은 하느님을 모릅니다.”라고 배교를 선언해버리고 만다. 이는 무당인 장모의 딸, 곧 ‘신봉의 아내’가 벌인 고도의 심리전술에 그가 휘말린 때문이었다. 남편을 어떻게 해서든 배교자로 만들고서 자기들의 무속 세계로 그를 끌어들여 보려고 무던히 애를 쓰던 그녀가 남편이 취조 받는 옥으로 갓난아기까지 안고 들어와서는 남편 대신 자기가 처벌을 받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이게 무당인 그의 장모의 머리에서 미리 짜낸 작전이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장판(杖板) 위의 아내가 곤장을 맞는 소리, 거기에 놀란 아이의 자지러진 울음소리…. 게다가 매질에 축 늘어져 있던 아내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며 “하느님 같은 건 모른다고 제발 어서 말씀드리세요.”라고 애걸하는 속에서, 결국 신봉이는 속절없이 무너져버리고 만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에 대한 무속세계의 끈질긴 대결의식과 그 만만찮은 파괴력을 확인하게 된다. 지금껏 우리는 한 사극과 두 소설 작품들 속에 나타난 무속 세계의 권력지향 성향과 대(對)기독교 파괴력의 실상 등을 살펴보았다. 문제는 이런 것이 사극이나 문학작품 속에 보이는, 그 수준에 그치는 실상일 뿐이냐는 것이다. 이런 무당 이야기들은 결코 작품 속에서만 살아 있는 게 아니라는 데 그 심각성이 있다. 실제론 우리 삶의 현장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는 것이다. 전(前) 박 정부 시절, 최 모(某)란 무녀가 국정 책임자를 맘대로 좌지우지하다가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그 책임자도 몰락하게 한 사례를 결코 잊어선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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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시평] 임영천 목사의 '무속 세계에 얽힌 사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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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어른의 고집이 아이들의 교육을 망친다’
- 6월 1일 지방선거가 끝났다. 이번 선거에서는 광역 단체장, 국회의원 보궐, 기초단체장, 지역 광역의원, 비례대표 광역의원, 지역구 기초의원, 비례대표 기초의원, 그리고 광역 교육감을 선출하는 선거였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현 여당인 국민의 힘이 상당수의 자리를 탈환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선거는 광역시·도 교육감 선거라고 본다. 교육감은 매년 100조원에 가까운 예산을 사용하면서, 대한민국의 교육과 학생들의 미래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되는 자리이다. 그 동안 우리 교육 현장은 대부분 진보 계통의 교육감들이 교육을 좌지우지해 왔다. 전국 17개 광역시•도 교육감 가운데 14명이 진보였다(전교조 출신이 10명, 민교협 출신이 4명) 그 동안 진보 교육감들이 벌여온 교육 행정은 학생인권조례, 혁신학교, 무상급식 등 진보 정치의 실험 무대처럼 여겨졌다. 진보 교육감들은 학생들에게 시험에서 해방, 인권 강화 등을 시키는데 주력했는데, 엄청난 예산을 쏟아부으면서도 학력 저하, 사교육비 급등 등의 부작용을 불러왔다는 지적이다. 진보 교육감들이 지난 10여년 간 주력하여 만든 혁신학교는 전체에서 22.6%나 차지하는 2,696개교나 된다. 고등학교 혁신학교의 경우 전국 평균보다 3배 가까이 기초학력이 미달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학교에서 공부를 가르치지 않아 실력이 뒤떨어지는 학생들이 서야할 곳은 어디이겠는가? 학생들을 과도하게 공부하는데 몰아넣어서도 안 되지만, 당연히 갖춰야할 실력을 쌓을 기회조차 낭비한다면, 이것은 바른 교육이 아니라고 본다. 아마도 이번 2022년 교육감 선거에서 진보 교육감들이 남아 있는 곳에서는 계속 혁신학교들이 늘어나게 될 것이다. 학생들의 성적 하향화는 학생들의 개인 문제 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큰 손해가 될 것이다. 그 밖에도 진보 교육감들은 학생인권조례를 만들어 학생들이 누리지 않아도 될 과도한 권리를 주어서, 피교육자 신분인 자신들을 망치고, 교권이 흔들리는 일들을 해 왔다. 그리고 잘못된 성 평등, 성 교육을 통하여 아이들의 인성을 망치게 하지 않았는가? 학교에서 젠더교육, 성적 자기 결정권, 콘돔사용, 피임법 등이 과연 필요한 것인가? 거기에다 좌편향 인권교육, 이데올로기를 대입한 민주교육 등은 결국 진보 교육감들의 성향에 맞춰 학생들을 이념의 아바타로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닌가? 교육감 선거에서는 매번 2,000억원 정도의 선거비가 들어간다고 한다. 그 많은 선거비를 국민의 세금에서 지출하고, 각자 들어간 선거 비용을 뽑아내기 위하여 부정은 없을까? 일선 교육감들이 집행하는 돈은 엄청나다. 2022년 교육부 예산이 89조 원이다. 이 중 상당수가 각 교육청을 통하여 집행되고 있지 않은가? 이번 지방선거에서 진보 교육감은 14명에서 9명으로 줄었다. 그런데 서울시의 교육감 선거는 상당히 아쉬움으로 남는다. 소위 말하는 진보 교육감을 교체할 절호의 기회였다. 이번 선거에서 진보 교육감은 38.1%의 지지를 받았다. 반면에 보수 교육감 후보 3명이 받은 득표율은 53.2%이다. 보수 교육감 후보들이 우리 교육의 미래를 위하여 통일된 의견을 가지고 서울 시민들의 의견을 물었다면, 당연히 보수 교육감이 당선될뿐더러, 진보 교육이 망쳐놓은 공교육을 되돌릴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설왕설래하던 후보 단일화는 끝내 이뤄지지 않았고, 결국은 쪼개진 상태로 교육감 선거를 치르게 됨으로, 뻔히 알면서도 진보 교육감 후보에게 교육감 자리를 헌납하는 어리석음을 보였다. 어른들의 정치적 욕심 때문에 우리 아이들의 교육이 계속 멍들게 될 것이다. 물론 단일화라는 형식이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진보 교육감들이 교육을 망치는 것을 보면서(보수 후보들도 이 문제를 다 지적함) 자기들의 정치적 야망과 권력의 욕심으로 이런 절호의 기회를 흘려보낸 것은 매우 지탄받아야 할 일이다. 우리 아이들 교육의 미래와 공교육 회복을 감히 자신들의 욕심으로 채우려다, 망쳐버린 결과는 교육의 미래를 위해 간절히 바라던 국민들의 바람도 헌신짝처럼 버린 꼴이 되고 말았다. 2022년 6·1지방선거의 최대 잘못은 서울시 교육감 보수 후보의 단일화를 이루지 못한 일이며, 이것 때문에 또다시 교육 망가지기를 지켜보아야 하는 국민들의 안타까움과 실망은 크다. 이제는 진보 교육감들의 교육 행태에 대한 국민들과 학부모들의 감시가 강화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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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어른의 고집이 아이들의 교육을 망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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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시평] 대통령 취임식장의 인사(人事)법
- 지난 5월 10일 국회의사당에서는 제20대 대통령 취임식이 있었다. 정권 교체를 열망하는 국민들의 소망이 이뤄지고(윤석열 대통령은 5년 전 문재인 대통령의 사람으로 분류되었고, 문 대통령 시절에 승승장구하여 검찰총장까지 지냈지만, 문재인 정권하의 절대권력을 수사한 것 때문에 갈등을 겪다가 결국 검찰총장직을 물러나고, 정치에 입문한 지 8개월 만에 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어 새로운 대통령에 당선되는 이변을 낳았음) 역사적인 취임식까지 거행하게 된 것이다. 위대한 국민이 만들어낸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 자리에는 직전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하여, 문재인 대통령에게 대통령이 되게 한 촛불세력에 의하여 탄핵되어 4년 9개월을 감옥에서 지내다가 풀려나서 새로운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전 박근혜 대통령, 그리고 아직도 감옥에 들어가 있는 이명박 대통령의 부인과, 고 전두환 대통령 부인, 노태우 대통령 딸도 뒷자리에 참석하고 있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입장하기 전 다른 분들은 단상에 앉아 있었고, 문재인 대통령 부부가 마지막으로 단상으로 올라갔다. 그때 나는 문 대통령이 먼저 자리에 앉아 있던 전직 대통령과 다른 전직 대통령 가족들과 손이라도 잡으면서 인사를 나눌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문 대통령 내외는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 미안해서일까? 무안해서일까? 미처 보지 못해서일까? 사실 그런 인사는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하는 자리가 아니면 좀처럼 나누기 어려운 기회일 것으로 본다. 전직 대통령과 물러나는 대통령이 지난 시간들 속에서 이유야 어찌 되었든, 괴롭게 하고 힘들게 하여 감옥에서 오랫동안 고생하게 했다면, 마음이야 어떻든지 간에 ‘미안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앞으로 건강하십시요’라며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면 얼마나 국민들이 보기 좋았을까? 우리나라는 현재 윤석열 대통령을 포함하여 열세 분의 대통령을 배출하였다. 그중에 한 분은 망명지에서 돌아가시고, 두 분은 짧은 임기를 마쳤고, 네 분은 감옥에 갔었고, 한 분은 극단적 선택을 하였다. 아직도 한 분은 영어(囹圄)의 몸으로 있다. 국가 최고 권력의 자리에 있었고, 국민을 위한 가장 큰 봉사의 자리에 있었지만, 결말은 불행한 경우들이 많았던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어느 때는 미국의 생존한 전직 대통령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다정한 표정을 지으며, 국가 원로의 모습을 보일 때, 참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는 그것이 왜 안 될까? 우리나라는 정치적 견해가 다르고, 정당이 다르면 마치 원수 대하듯, 특히 최고 권력의 자리에 앉았던 분들이 정치적 견해의 다름으로, 줄줄이 감옥에 가는 것을 보면 민망하다. 정치색이 다르다고, 후대의 잣대로 선대의 지도자를 평가하여 문제가 있다며 보복을 한다면, 이는 국민이 불행하고 국가의 품격이 떨어진다. 역대 대통령을 지낸 분들도 그 당시에는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던 것이 아닌가? 또 나름대로 업적들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마치 적을 대하듯 하는 모습은 어쩐지 슬픈 일이다. 그저 한 자리에 어렵게 모였을 때,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할 분이 거침없이 손을 내밀고 짧은 인사라도 나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반면에 취임하는 대통령과 부인은 깎듯이 직전 대통령과 전임 대통령을 예우하는 것을 보았다. 온 국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넓은 마음으로 덥석 손을 잡는 모습을 보일 수 있는 아량이 있다면, 대통령들이 국민통합이니, 협치니, 상호 갈등 해소니 하는 정치공학적이고 공허한 말을 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국민들 앞에서 말은 그럴듯하게 하면서, 실제 모습은 아닌 것을 보노라면, 우리나라 정치가 지금까지 저래왔구나, 앞으로도 그럴 것인가? 걱정이 된다. 정치가들은 흔히 국제적으로 유명 정치인이 사망하면, 조문(弔問)을 가는데, 그곳에서도 각국의 정상 사이에 ‘조문 외교’가 벌어진다. 국제회의에 참석하면 역시 그곳에서도 ‘막후 외교’가 벌어진다. 정치를 하는 분들은 일반인보다 훨씬 정치 감각이 뛰어나다고 본다. 그런 감각이 있다면, 대통령 취임식이라는 경축의 자리에서 어찌 ‘경축식 인사’나 ‘취임식 인사’로 보는 이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할까? 성경에 보면, 화평하게 하는 것, 화목하게 하는 것, 용서하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말씀한다. 대통령을 지낸 분들은 자신의 지지자들만의 대통령이 아니라, 온 국민의 대통령이며, 국민 대통합의 정신과 자세를 항상 잃지 말아야 한다. 대통령 취임식장에서의 인사법,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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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시평] 대통령 취임식장의 인사(人事)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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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시평] 임영천 목사의 ‘뻐꾸기 둥지에 얽힌 사연'
- 윤모촌 수필가가 <서울 뻐꾸기>란 이름의 수필을 쓴 적이 있다. 이를 표제로 한 수필집이 나오기도 하였다. 그만큼 <서울 뻐꾸기>는 꽤나 이름난 수필 작품이기도 하다. 그런데 의문점이 없지 않다. 왜 하필이면 ‘서울 뻐꾸기’일까? 한국인들 모두의 새라면 ‘한국 뻐꾸기’도 될 수 있고, 그의 고향 이름을 따서 ‘연천 뻐꾸기’라고 했더라면 훨씬 더 정감이 느껴지는 그런 이름이 되었을 법도 한데 왜 하필 ‘서울 뻐꾸기’란 말인가, 의문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아무 근거 없는 의문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김광섭 시인이 자신의 시 한 편에다가 <성북동 비둘기>란 이름을 붙여 발표한 적이 있다. 성북동이 서울의 한 동네이니까 만일 그 시에다 ‘서울 비둘기’란 이름을 붙여 발표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게도 되지만 왠지 어색하기 짝이 없는 이름인 것 같다. 역시 그 시는 <성북동 비둘기>여야 했다고, 역시 근거 없는 단안이 한 순간 내려진다. 마찬가지로 윤모촌의 수필에다가도 ‘성북동 뻐꾸기’, 또는 그가 살았던 어떤 동네 이름을 붙여 발표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지만 이번엔 예상 밖으로 신속하게 ‘역시 <서울 뻐꾸기>여야 해’, 라는 근거 없는 확답이 따라 나오고야 만다. 결국은 기성 명칭이 지니는 기득권의 위력이 그만큼 크다는 결론 아닌 결론이 나오고야 만 셈이다. 윤모촌의 <서울 뻐꾸기>는 뻐꾸기란 새의 아주 어렸을 때의 배은망덕的 만행(?)에 대하여 리얼하게 묘파해 놓고 있다. 남(개개비)의 둥지 속에서 막 알에서 깨어난 어린 것이 어찌 못되게 구는가를 그는 이렇게 그려 놓은 것이다. “털도 나지 않은 놈이 움직이기 시작하여 필사적으로 개개비의 알을 둥지 밖으로 밀어내, 천길 만길 아래로 밀어내뜨리는 것이다. 저를 품어 키우는 은인의 알을 하나도 남김없이 밀어내고, 그놈은 개개비의 품을 독점하는 것이다.” 실로 사람들의 심금을 휘어잡는 구슬픈 울음을 울어대는 뻐꾸기의, 선천적으로 못된 습벽(習癖)을 이 수필이 완전히 사실적으로 묘사해 놓았다고 보겠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이 ‘습벽’이란 말을 풀이해 “오랫동안 자꾸 반복하여 몸에 익어버린 행동, =버릇”이라고 했는데, 이 말 풀이처럼 알에서 먼저 깨어난 어린 뻐꾸기가 주인(은인)인 개개비의 알을 둥지 밖으로 밀어내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은 그의 조상 때부터 ‘오랫동안 자꾸 반복하여 몸에 익어버린 못된 행동(버릇)’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 수필(‘서울 뻐꾸기’)의 작가인 윤모촌은 이해하기 힘든 이 동물을 가리켜 ‘신세를 원수로 갚는 놈’이라고 하면서도, 이어서 또 이렇게도 반응하였다. “알 수 없는 것이 조물주의 그 조화”라고 말이다. 또 비슷한 이런 표현, 곧 “배은망덕으로 생존을 잇게 한 신의 의지와 섭리가 알 수 없는 일”이란 해석(표현)을 덧붙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켄 키지의 소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제목에 의할 것 같으면 새들의 둥지에는 ‘개개비 둥지’만이 있는 게 아니라 ‘뻐꾸기 둥지’란 것도 있어서 다른 새(이를테면 개개비 같은 새)에게 은혜를 베풀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게 한다. 나는 생물학자도, 조류학자도 아니기 때문에 ‘개개비 둥지’ 아닌 ‘뻐꾸기 둥지’란 게 따로 있는지조차 전혀 알지 못한다. 켄 키지의 소설에 ‘뻐꾸기 둥지’란 말이 분명히 쓰인 것을 보면 그런 게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또 다른 관점에서는 일종의 은유적 표현으로만 쓰이지 실제로 ‘뻐꾸기 둥지’ 같은 게 있을 리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왜냐면 뻐꾸기는 개개비 둥지에서 실제적으로 도움을 받아 성장하는 새이기 때문에 따로 무슨 ‘뻐꾸기 둥지’ 같은 것을 자기들 스스로 만들어 가지고 있을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켄 키지의 그 소설 속에서도 무슨 뻐꾸기 둥지라는 게 따로 있는 것 같지는 않고 단지 은유적 공간으로만 그런 표현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 사례로써 분명한 실증을 얻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즉 ‘뻐꾸기 둥지’는 하나의 은유적 공간일 뿐이다, 라고 말이다. 실제로 ‘뻐꾸기 둥지’는 그 소설 속에서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못된 뻐꾸기들이 득실거리는 권력집단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그 집단이 뻐꾸기 둥지로서의 성격을 지닌 이상, 그 구성원들이란, 개개비를 이유 없이 밀어내는 뻐꾸기와도 같이 무자비하고 잔인한 근성의 소유자들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은 ‘신세를 원수로 갚는 놈’이 될는지도 모르겠고, 또는 그들에게 “배은망덕으로(라도) 생존을 잇게 한” 조물주(神)의 섭리마저 의심케 만들 그런 존재가 되고 말지, 우리는 오늘의 ‘서울 뻐꾸기’들의 앞으로의 행태를 예의 주시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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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시평] 임영천 목사의 ‘뻐꾸기 둥지에 얽힌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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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시평] 진보가 보는 진보의 몰락?
- 제20대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결과는 야당 후보의 0.73%포인트의 승리였다. 이는 야권이 정권을 잡는 것이기도 하지만, 5년 만에 진보 정권의 재집권 실패이기도 하다. 대략 진보건 보수건 10년 정도는 집권하는데, 이번에는 5년 만에 깃발이 넘어간 것이다. 사실 야당은 5년 전 당시 현직 대통령이 탄핵을 당하면서 지리멸렬했다고 본다. 오죽하면 당에서 인물을 뽑지 못하고 정치 신인인 여당 쪽의 공직자였던 사람을 대선후보로 선택했겠는가? 반면에 여당은 야당에 비하여 많은 것에서 유리한 점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권 여당이 참패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야당 후보가 주장한 ‘공정’과 ‘상식’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현 정권이 출범할 때, 과정과 결과가 공정할 것이란 말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환호했는가? 그러나 그런 정치적 주장과 실제 행태는 너무나 달랐다. 현 정권의 이념적 색채는 어떨까? 2018년 2월 9일 평창동계올림픽 개막 리셉션에서 문 대통령은 공산주의(사회주의) 사상가 신영복을 존경한다고 하였다. 일종의 사상적 커밍아웃을 한 것이다. 그 자리에는 미국의 부통령, 일본의 수상, 북한에서 온 손님들도 있었다. 그만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만큼 동조 세력이 있다는 것이었나? 이 정부의 사상적 이념적 색채는 좌파·진보이며, 종북에 가깝다. 현 정부는 왜 5년 만에 대권을 내주게 되었는가? 그것도 정치에 입문한 지 8개월밖에 안 되고 현 정권에서 충성했다 하여 검찰총장으로 임명했던 사람에게 말이다. 이것은 진보의 가치를 잃어 버린 때문이 아닌가? 이를 소위 ‘진보’라고 불리는 인사들의 말을 통하여 들어보자. 진보 논객으로 유명한 전 동양대 진중권 교수는 “진보는 어떻게 몰락하는가”라는 책의 표지에서 단도직입적으로, ‘자신들이 정의라는 독선, 공정을 무시하는 반칙과 특권, 자기들도 믿지 않는 평등의 위선’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조국(曺國-청와대 민정수석, 법무부장관 역임) 사태로 진보는 파국을 맞았다고 한다. 그리고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죽음이 ‘한 사람의 죽음이 아니라 진보 전체의 죽음으로 느껴진다’고 평가한다. 고 박원순 씨는 인권변호사, 참여연대를 설립한 시민운동가, 또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던 사람이 ‘성추행’으로 고소를 당한 것은 위선이며, 어리석음으로 보고 있다. 진 교수는 진보가 이 사회를 폐허로 만드는 것을 지켜봤다고 한다. 그리고 ‘아빠 찬스’는 기회의 평등함이 되고 ‘문서위조’는 과정의 공정함이 되었고 ‘부정입학’은 결과의 정의로움이 되었다고 꼬집는다. 진보의 가치는 전도되고 비리를 저지른 자들이 피해자 행세를 하며 그것을 적발한 검찰과 그것을 알리는 언론을 질타하는 것, 이 적반하장은 문재인 정권하에서 일상의 풍경이 되었다고 개탄한다. 역시 진보 언론학자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싸가지 없는 정치”(싸가지는 욕설이 아닌 사람에 대한 예의나 배려를 속되게 하는 말로 해석함)에서, 문재인 정권의 문제점을 ‘싸가지 없음, 오만하다. 기존의 제왕적 대통령제와 청와대 정부가 심화(싸가지 없는 정치)되었고, 이의(異義) 제기마저 가로막는 열성 지지자 집단의 검열 활동이 성공한데 큰 책임이 있다’고 설명한다. 또 현 정권을 둘러싼 586운동권 문화는 ‘개인숭배 문화’가 있고, 거기에다 ‘진보의 완장화’가 있어, 싸가지 없는 것이 불가피하게 되었다는 판단이다. 그는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내 입맛에 맞지 않는 주장이 있으면 비아냥대고 저주를 퍼붓는 문화가 있는데, 개인을 숭배하고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해서 써먹는 것은 진보가 아니라’고 진단한다. 또 있다. 자신을 한 때 ‘묻따민’(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민주당을 찍는다)이라고 소개한 중앙일보 정치부 기자 출신의 유성운 기자는 “사림, 조선의 586”이라는 책에서 조선 시대 당파 싸움을 주도했던 사림(士林)들과 현재 우리나라 진보정치의 핵심인 586세대를 비교하면서, 공통점을 찾는다. 그는 ‘기득권층을 성토하면서 정작 자신들도 기득권층의 행태를 똑같이 따라 하는 것, 특정 가치관에 매몰되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 눈을 감고 엉뚱한 정책을 펴는 것, 그리고 신분 상승의 사다리를 걷어차고 자신들만의 매트릭스를 꾸며 놓는 점’이라고 지적한다. 또 대통령을 비판하면 ‘무엄하다’고 꾸짖는 행태를 보인다고 고발한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 진보정치의 모습이다. 물론 이번 대선에서 졌다고 진보계가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진보를 자처하는 권력과 세력은 아직도 기세가 등등하다. 그러나 진보의 참된 가치를 잃어버린 세력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현재도 엄청난 권세를 가진 진보세력은 권토중래(捲土重來)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양식 있는 진보 인사들이 보기에도 가치를 잃어버린 진보의 행태는, 보수 세력을 ‘적폐’로 몰았던 그 여세가 자신들을 들이치는 부메랑이 되지는 않을까 살펴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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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시평] 진보가 보는 진보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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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2022년, 희망의 하모니를 높이자!’
- 2022년 한 해가 시작되었다. 우리의 화두(話頭)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한국교회 각 연합기관과 주요 교단장들의 신년사를 읽어 보았다. 모두가 코로나 시대에도 희망(Hope-소망)을 말하고, 교회가 세상의 희망이며, 그 희망으로 세상 사람들의 위로자가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지극히 맞는 말이다. 교회는 어느 시대에도, 어떤 상황에서도 세상을 이끄는 희망이어야 한다. 그래서 교회는 희망을 선포해야 한다. 희망(소망)을 사전적 의미로 찾아보면, ‘장래에 실현될 것에 대한 기대’라고 정의한다. 성경에서는 희망과 소망을 같이 사용한다. 성경에서도 소망을 말씀한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롬8:24)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소망의 등불이 되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에서 한탄하고 근심하고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말하고, 또한 그 희망의 능력으로 위로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의 위로를 받고 있고, 우리들의 그러한 믿음의 결과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 성경에 보면 수 많은 선지자들의 믿음에 행적이 나타나고 있다. 그들 대부분은 인간적으로는 매우 혹독한 시련과 연단의 삶을 인내하면서 살았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과 말씀에 따라 희망을 잃은 사람들을 깨우기 위해서 희망(소망)을 힘차게 외쳤다. 이사야 선지자는 당시 사람들의 윤리와 도덕이 땅에 떨어지고, 우상숭배가 횡행하고, 예배는 형식에 흘렀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게 됨을 희망적으로 전하였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회개하지 않는 유다의 멸망을 예견하면서도, 죄에서 돌이키도록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40여 년을 눈물로 호소하였다. 에스겔도 유다의 멸망이 시시각각 다가오지만, 하나님의 심판 후에 하나님께서 다시 회복시키시고, 영원한 구원을 주실 것을 희망의 메시지로 전하였다. 우리가 사는 세상, 우리 시대 사람들의 태도와 모습에서 과연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가? 육욕(肉慾)에 사로잡히고 육정(肉情)에 사로잡힌 세상 사람들은 차치(且置)하고, 교회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 삶의 모습 속에서 자신 있게 희망을 건져낼 수 있는가? 우리에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신앙이 있다. 죄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어둠과 멸망에서부터 건져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면서 세상에 희망을 전파하는 것이다. 사실상 우리의 완전한 희망의 날은 시간이 지나갈수록 점점 다가온다. 작년보다는 올해가 더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있으며, 어제보다는 오늘이 더 희망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 우리는 지금 코로나 상황 3년 차를 맞는다. 모두가 두려워하고 피하고 싶은 날들이다. 교회들도 많은 시련과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이것을 피하여 살 수는 없다. 우리 힘으로 안 되고, 우리 지혜로도 어렵지만, 이것을 통과하도록 하나님께 은혜를 구해야 한다. 무너진 시련의 모퉁이에서 희망의 불빛을 보고, 그 빛을 확장하여 비출 때, 많은 사람들이 마침내 희망의 빛을 보게 되며, 정상(頂上)으로 향하는 길을 찾게 될 것을 기대한다. 그것이 우리 한국교회가 할 일이다. 2022년은 아무도 살아보지 못한 미지(未知)의 시간들이다. 그래서 아무도 장차 일어날 일에 대하여 장담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희망의 날이 반드시 도래(到來)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계속 희망을 더욱 크게 외쳐야 하는 이유이다. 우리는 절망의 세상을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희망입니다! 교회가 희망입니다! 복음이 희망입니다! 우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 희망입니다! 여러분 그 희망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 오십시오! 어찌 보면 2022년도도 전혀 희망적이지 않을 수 있지만, 그럴수록 희망의 함성은 커져야 한다. 희망의 거대한 출발점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희망의 줄을 꼭 잡아야 하고, 그 희망의 노래를 줄기차게 불러야 한다. 희망의 근원에는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며,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가 있다. 새롭게 시작된 2022년에 우리 한국교회가 희망의 충전소가 되고, 이를 다시 세부적으로 전파하는 보급소가 되고, 많은 사람들이 느끼도록 실핏줄 같은 사명을 감당하자. 희망을 가진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실개천이 시내를 이루고, 이것들이 모여서 강을 이루고, 강물이 흘러 큰 바다로 달리듯, 우리들도 희망의 하모니를 높여가는 기쁨으로 살자! 오라, 도전의 날들이여! 오라, 새로운 날들이여! 모든 날들을 희망으로 덮으리라. 올해를 소망으로 가득 채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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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2022년, 희망의 하모니를 높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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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시평] 임영천 목사의 ‘코로나19’를 품은 올해의 성탄절
- 2021년 올해는 지난해에 이어 유난히도 ‘코로나19’로 인해 시달리고 타격을 받은 해였다. 그래서 우리가 보낸 2021년 한 해를 ‘코로나19의 해’라고 표현한다고 해서 조금도 이상하거나 어색할 리 없을 것 같다. 그만큼 올 한 해는 코로나19에 의해 완전히 지배된 해였다. 앞서 두어 차례 백신을 접종했을 때만 해도 무언가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후 델타 변이니 오미크론이니 하는 변종들의 위협을 받게 되면서 지금은 너나없이 이른바 부스터샷이라 불리는 추가접종을 받지 않으면 안 될 궁지에 몰리고 있는 실정이다. 만일 이 3차접종이란 관문의 통과 없이는 시민으로서의 정당한 사회생활을 할 수 없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는 형편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에게 ‘맞을 수 있는 권리’이기도 하고, ‘맞아야 할 의무’이기도 한 이 부스터샷 접종의 과정을 넘기기만 하면 모든 게 풀리리라고 기대하는 일 자체도 그렇게 희망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 같다. 보건행정 당국에서는 앞으로 ‘하루 2만 명의 확진자’가 나올 수도 있다는 우려를 이제 공공연히 발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때문에 그만큼 사회 통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하는 예고이기는 하겠지만, 이 일을 당하는 우리 시민들은 절망적인 현실 앞에서 속수무책의 무력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각종의 통제가 시민들의 숨통을 그야말로 숨 막히게 조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유럽 등의 어떤 나라 국민들처럼 “통제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항의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닌 것 같다. 그런 나라들에서 확진자나 사망자들이 더욱 늘어나는 엄연한 현실을 생각해 본다면, 마스크를 쓰지 않거나 접종을 거부하거나 또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무시(거부)한다고 해서 일이 해결될 수 있는 것은 분명 아닌 것 같다. 그러나 문제는, 통제를 가해서 코로나19의 확산을 막기 위한 노력을 부단히 기울이는 것은 타당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정부의 관심두기는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자영업자들, 또는 소상공인들, 그리고 기타 열악한 업종에 종사하는 이들에 대한 배려가 크면 클수록 좋으리라는 것이다. 이런 매우 열악한 형편에 놓여 있는 이 나라에 예수께서 오신 날 곧 성탄절을 우리는 맞이하게 되었다. 지난날에는 성탄절이라고 하면 무조건 기분이 좋은 세계적 명절로 생각하고 즐겼던 것이 사실이지만 올해의 성탄절은 전혀 예년 같지 못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아기 예수께서 오신 날이라고 하여 특히 아동들이 더 좋아하곤 하던 성탄절이었건만 올해는 전혀 그럴 분위기가 못 되는 것이다. 어린이집이니 유치원이니, 아니 초등학교마저도 코로나19의 여파로 대면의 모임이 통제되고 있으며, 또 상당한 수의 어린이 확진자들까지 발생하고 있는 실정이어서 매우 어두운 분위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럴 때 우리는 (아기)예수의 힘들었던 시절들을 되새겨 보면서 이 난국을 헤쳐 나갈 어떤 힘을 오히려(역으로) 얻게 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아기 예수께서 탄생하신 날은 분명히 기쁜 날이지만, 탄생 이후 예수께는 기쁜 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어둡고도 어려운 날들을 많이 맞이하신 것이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헤롯왕이 아기 예수를 죽이려는 줄을 알고 가족 모두가 애급으로 피난의 길을 떠난 것은 시련의 첫 단계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아기 예수를 찾다가 찾아낼 수 없게 되자 두 살 이하의 어린이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한 일이 발생한 것은 예수께는 또 다른 의미의 시련이었다고 볼 수 있으리라. 사회적으로 가장 약자라고 할 수 있을 어린아이들이 자기(아기 예수) 때문에 무기력하게 희생되었다는 사실 앞에서, 만일 예수 자신이 생각(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나이였다고 한다면, 얼마나 애통한 일로 여기셨을까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 때문에 예수께서 공생애 때에 어린이들과 관련된 다소 혹심한 말을 발했던 게 아니었을까 생각되기도 한다. 즉 “어린이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게 나으니라.”와 같은, 상당히 무서운 말씀을 하셨던 게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그러니까, 아무 죄도 없는 어린이들을 마구 학살하다니 말이 되는가, 라고 과거의 헤롯과 같은 권력자의 만행을 은근히 비판하는 말씀을 겸해서 하셨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아무튼 공생애 때 예수께서 받은 수난은 극에 이르렀고, 마침내 십자가에 달리신 것으로 그 수난의 바퀴가 굴러가는 게 마감되었다. 예수의 제자인 우리는 주님의 그런 고난을 생각하며 애써 인내하면, 오늘의 ‘코로나19’의 고난도 결국 이겨낼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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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지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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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시평] 임영천 목사의 ‘코로나19’를 품은 올해의 성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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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한국교회 진정으로 연합되기를’
- 최근 교계에서는 세 개의 연합 단체들이 하나로 되기 위한 노력들이 나타나고 있다. 본래 세 개의 단체들은 하나였다. 1980년대 고 한경직 목사님을 중심으로 복음적인 목소리를 내기 위하여 만들어진 한국기독교총연합회로 하나의 단체였는데, 수년 전에 분열하여 지금의 세 개 단체가 된 것이다. 한국 교계를 보면, 분열하기는 쉬운데 연합하고 통합하기는 쉽지 않다. 교단들도 여러 개가 하나로 뭉쳤다가도 어떤 연유로 다시 분열하는 경우들이 있다. 하나로 뭉친다는 것이 상업광고(廣告)처럼 되는 것이 아니다. 힘쓰는 노력이 필요하다. 성경은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3)고 하신다. 그 하나 됨을 깨는 사람이 문제이다. 한국교회는 1950년대와 1960년대를 거치면서 장로교 교단들이 분열하기 시작하였고, 1990년대를 거치면서는 교단의 숫자를 다 헤아리기조차 어렵게 나뉘어졌다. 교단들이 분열한 이유는 여러 가지 있겠으나, 실제적으로 분열할 수밖에 없었던, 교리나 신학적인 차이로 인한 경우는 많지 않았다. 주로 헤게모니(Hegemonie) 싸움이었다고 본다. 누가 큰 세력을 갖느냐, 누가 교권을 차지하느냐의 지루한 분열이었다. 연합 단체도 이런 것에 영향을 받았는지, 한기총이 구심점을 잃더니, 여러 개로 쪼개지고 말았다. 이에 대하여 수년 전부터 연합 단체를 합동한다는 소문과, 로드맵도 나오는 듯 했지만, 실상은 결혼하고 싶지 않은 처녀·총각이 맞선보는 자리에 어쩔 수 없이 나온 것처럼 열매를 맺지 못했다. 마음은 있으나 결단이 없으니, 지지부진하여 지금까지 온 것이다. 이제라도 진정으로 한국교회가 하나 되는 모습을 보였으면 좋겠다. 지금까지는 분열하는 양태였지만, 이제는 복음으로 하나 되어야 한다. 물론 연합하기 위해서는 선결과제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는 것은 인정하고, 먼저 정리해야 한다. 어찌 맞선 보는 자리에 목욕도 하지 않고 나오겠는가? 그리고 욕심을 버려야 한다. 성경에 보면 기독교 역사상 처음으로 열렸던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이방인의 할례와 그들의 구원에 관한 문제가 논의되었다. 안디옥교회나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들이 자기들의 주장이나 욕심을 내려놓으면, 하나님이 보이고, 하나님의 뜻이 나타난다. 거기에 충실하면 된다. 한국교회가 분열됨으로 여러 가지 손해된 일도 있었다. 일례로 지난해부터 시작된 코로나 정국에서 한국교회는 가장 소중하고 근본적인 예배 문제에 있어서도 혼선을 빚었다. 어느 연합 단체는 비대면 예배를 주장하고, 다른 단체는 대면 예배를 강조하였다. 적어도 한국교회가 예배만큼은 한 목소리를 내야 했다. 그런데 분열되어 있다 보니, 목소리도 달랐다. 또 정부와의 문제나, 언론과의 문제, 그리고 사회 전반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도 복음적인 마음을 담아 같은 목소리를 내지 못하였다. 한국교회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물리적으로 하나만 된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다. 연합 정신에, 형제에 대한 깊은 사랑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편지를 통하여 빌립보 교회에 말씀하시기를,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2:2~4)고 하신다. 연합 단체는 대외적인 일들도 효과적으로 잘해야 되지만, 내부의 결속을 다지는 것도 중요하다. 여러 개의 연합 단체를 하나로 묶는 물리적인 것만큼 중요한 것이, 형제에 대한 격려이다. 히브리서에서는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히10:24)라고 하신다. 분열하고 나뉘는 과정에는 반드시 상처와 아픔이 있다. 이것이 먼저 치유되면 좋겠다. 격려하고 섬기는 마음을 통해 성령께서 역사하실 것이다. 지금 하나됨의 중심에 서 있는 분들로부터 이런 마음을 가지면 좋겠다. 이제는 분열이 아닌, 하나됨을 통하여 한국교회를 세워갔으면 좋겠다. 하나된 믿음을 통하여 주님 나라를 확장하고 부정적 시각을 가진 사회 속에서 본과 덕이 됨으로, 복음의 지경을 더욱 넓혀가는 소망스런 일들이 펼쳐지기를 바란다. 한국교회 진정으로 하나된 모습을 보여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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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한국교회 진정으로 연합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