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8(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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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북 용천 출신
차재명 목사(車載明·1881.4.6-1947.4. 26)는 평안북도 용천군 동산면 용암포에서 태어나 1905년 기독교에 입신 그 다음해에 세례를 받았다. 그가 기독교에 입교한 해는 조선이 사실상의 국권을 일본에게 넘겨준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해였다.
이 시기 기독교에 입교하여 훗날 조선 기독교계 지도자가 된 대부분이 그러했듯이 차재명 목사 역시 20대 중반의 혈기 왕성한 나이에 나라의 주권이 일본에 강점 당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 기독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국가의 주권이 일제에 강점 당한 1910년 당시 유명했던 이승훈이 선천(宣川)에 세운 기독교학교요 미션스쿨이었던 신성중학교(信聖中學校)를 졸업한 후, 서울로 상경해 새문안교회의 조사(助師)로 봉직하면서 언더우드(Underwood) 목사를 도우며 새문안교회와 인연을 맺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조직된 1912년 그의 나이 31세 되던 해에 장로(長老)로 피택되었으며, 이후 교회의 재정적 후원과 협조를 받아, 1916년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장립을 받았다. 이러한 점에서 차재명 목사는 새문안교회가 키운 대표적인 인물 중의 한 분이라 하겠다(새문안교회 100년사, 윤경로 편, 새문안교회 1995, p.235).

새문안교회 최초 한국인 담임목사
차재명 목사는 언더우드와 쿤스 선교사에 이어 한국인으로써 최초로 모교회인 새문안교회의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고 시무하고 있던 영등포교회를 사임하고, 1920년 12월 26일 성탄절 다음날 위임예식을 온 성도들의 환영리에 드리고 새문안교회에 부임해 장장 21년간 생애의 후반부를 크게 봉사하였다.
차재명 목사는 관서지방 출신이었기 때문에 관서지방의 총회 총대들의 협력으로 총회적으로도 어려움 없이 총회를 위하여 원만하게 일할 수 있었다.
그가 총회를 위하여 일하면서 남긴 큰 업적 가운데 하나는 한국인으로써 최초로 한국교회의 역사를 정리한 일을 들 수 있다. 그의 이름으로 간행한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朝鮮예수敎長老會 史記)는 1928년 기독교창문사에서 발행한 대한예수교장로회사로써 최초의 정사(正史)였다.
이 역사책은 차재명 목사가 총회로부터 위임을 받아 시대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천신만고 끝에 펴낸 책으로써 지금 한국교회 사학자들만 아니라, 100년 이상 혹은 9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개교회들은 반드시 읽고 참고해야 할 총회역사 교과서 이기 때문이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 편찬
이 책에 약간의 미진함이 있다는 사실을 전재함에도 어느 교회가 몇년도에 누구에 의해 복음을 전달 받았으며, 또 누구에 의해 교회와 지교회가 설립되는가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총회를 섬겨운 일꾼들, 김수진, 한국장로교출판사 2005, p.83).
최근 총신대학교 역사신학 교수인 박용규 박사가 신학지남(神學指南)에 본서에 대한 해제논문이 나와 여기에 언급해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의 역사적인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한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 상권은 1928년에, 하권은 1930년에 원고의 교정까지 완료되었으나 일제 강점기의 경제적 어려움과 뜻하지 않은 1950년 6월 25일 전쟁으로 인해 40년이나 지난 1968년 한국교회사학회(회장 백낙준 박사)에 의해 연세대학교 출판부에서 간행되었다.
사기(史記) 두권은 1934년에 발행된 Harry Rhodes가 편집 간행한 History of the Korea, P.C.U.S.A (1884-1934)와 더불어 한국장로교회 초기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문헌이다.
영어로 된 이 책은 한국주재 장로교 선교사가 선교초기부터 한국선교 희년을 맞이하는 1934년까지 학술적으로 잘 정리된 사료(史料)라면, 전자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 상·하 두권은 한국 북장로교회 역사만 기록한 영문판보다 한국장로교회(韓國長老敎會) 전체의 역사를 아울러 기술했다는데 더 중요한 사료라 하겠다.
기독교 역사가 곤잘레스(Gonzalles)는 말하기를, 만일 유세비우스(Usevius)의 교회사가 없었다면 초대교회 문헌 3분의 1은 소실되었을 것이라고 말헌 적이 있다.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의 존재 의미 또한 그렇다는 이야기다.
이 책이 출간되어 오늘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는 것은 장로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한국교회 전체의 축복의 선물이라 할만하다. 이 책을 통해서 이 땅에 복음이 전해진 과정을 알 수 있고 공의회(公議會)가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독노회와 총회로 어떻게 발전, 조직케 되었는지를 한 눈에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기<史記> 상권의 서언을 양전백 목사가 쓴 것은 왕길지(G.Enge)가 오랫동안 편집 책임을 맡아 수고했지만, 마지막 양전백이 검열위원장으로 책이 출판되기까지 실무책임을 맡았기 때문이다.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권의 간지에 <저작자 겸 발행자가 차재명(車載明)으로 되어 있다.
그 이유는 전술한 바와같이 교섭위원으로 당국의 허가를 받고 총회장 이름으로 발행하려고 하였으나 일제당국이 허락하지 않아 불가불 차재명 명의로 발행되게된 것이다. 발행소도 서울 서대문 신문내 교회당이다. 이같은 상황은 장로회사기(長老會史記)를 출판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던 것이다.
「사기」(史記) 하권의 서문은 당시 한국교회사학회(韓國敎會史學會)를 이끌어 가고 있었던 백낙준 박사(연세대 총장)가 썼다. 그동안 하권의 원고가 탈고되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 소재를 알 수 없었는데, 동경(東京) 한인교회 담임목사였던 교회사가(敎會史家) 오윤태 목사로부터 제보를 받아 교회사학회 창립기념사업으로 백낙준 박사가 출판부에 의뢰해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 (상·하)는 김광수(金光洙) 목사가 지적한대로 교회안의 공식문서인 당회록과 노회록 및 총회록에 의해서만 기록한 문서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어느 개인의 작품이 아닌 문자 그대로 술이부작(述而不作)이 적용되어 있기 때문에 개교회와 총회의 역사를 파악하는데 있어서 추호의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데 중요성이 있다고 하겠다.
총회가 편집위원회를 구성하고 각노회 편집위원회에서 개교회 역사를 수집정리 해 위원회에서 엄밀히 검열과 교열을 했음으로 초기 한국장로교회 정사로 인정된 「정사서」(正史書)의 권위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신학지남 2014 가을호(통권320호) p.145-167참고).

연합사업과 교회일치운동에 앞장
차재명 목사의 새문안교회 21년간(1920-1941)에 진행된 일들을 한 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차목사의 사역자체가 매우 다양했고 그 중엔 미묘한 사건도 있었고, 교회 내적으로 새문안교회의 행정일체를 대대적으로 정비쇄신하였고, 외적으로 노회와 총회를 비롯 연합사업과 교회일치운동에 많은 협력을 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일제하의 운신의 폭이 제한되고 시대적인 어려움 가운데서도 교회 초창기의 문헌들, 즉 당회록 제직회록 교적부(생명기록부) 공동의회록 및 각 기관회록 등이 잘 정리되었다. 나가서 1913년에 조직은 되었으나 유야무야했던 면려회를 1921년 5월에 재조직해 활성화시킨 것과 교회행정쇄신 조치로 교인들에 대한 심방제도를 기구화 시켰고, 주일학교 조직을 강화한 점을 새문안교회100년사(p.240)는 증언하고 있다.
여기에서 차목사의 새문안교회 20주년기념식에 대해 잠시 언급해 보면, 1941년에 이르러 교회에서는 가장 기쁜 한 가지 행사가 있었는데, 그것은 차재명 목사의 근속20주년기념행사이다. 동시에 20년 근손시무한 이들의 표창도 있었는데 송순명, 이용석, 박희병, 김경환 장로와 김진애, 염준애 집사였다. 교회는 차목사가 이들 6명에게도 기념품과 표창장으로 그동안 교회를 위한 수고에 교회가 감사를 표한 뜻깊은 행사였다.

차재명 목사가 예수 믿게 된 동기
차목사의 어머니는 기독교를 일찍 받아들인 믿음의 여성이였고, 신실한 신자였다. 차재명은 청년시절에 이미 한문공부를 많이 하여 그 지방에서는 한학자로서 양반으로서도 쟁쟁한 인사였다. 어머니가 출석하고 있던 교회는 조그만한 시골교회였다. 한번은 그 교회 목사와 여집사들과 겨울인데 집에 심방을 와서 재명에게 예수 믿자고 강권하였다. 그러나 목사의 권고와 전도에 들은 척도 아니하고 외면한 채 못마땅하다는 듯이 벽을 향해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였다.
그때 목사는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화가난 차재명은 목사가 기도할 때 가만히 밖으로 나가 꽤나 뜨거운 물을 한 바가지 떠와서 목사의 머리 위에 부었다. 목사는 그래도 더욱 열심히 기도하였다. 눈물을 흘리며 저 청년을 주님께서 긍휼히 여기소서 회개하고 주님 믿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고하는 것을 보고 감동이 되었다. 자기가 그렇게 기도하는 목사 머리 위에 불을 부으면 벌떡 일어나서 노발대발하며 책망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개의치 아니하고 자기 영혼을 위하여 기도하는데는 그렇게 완고하던 자기마음이 감동되어 회개하고 예수를 믿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한국기독교대사전, 박용규편, 성은출판사, 1978, 서울 p.801-802).
차재명목사가 자기가 시무하던 새문안교회에서 모였던 대한예수교장교회 제18회 총회 총회장으로 피선되어 교단을 위해 마지막 영광스러운 중책을 잘 감당했으며, 1947년 4월 26일 자택에서 영민했다. 그가 총회장시에 결의된 안건으로 ① 총회사무국을 설치하기로 하여 총회행정을 정상적인 업무화 하였다. ② 평양노회를 평북노회와 용천노회로 발전적인 분립을 허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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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제18회 총회장 차재명(車載明)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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