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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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북 의주 출신
김창인 목사(金昌仁, 1917.11.18-2012.10.2)는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읍 서부동에서 1917년 11월 18일 부 김택연과 모 김택신 사이에 5형제 중 3남으로 태어났다. 김창인이 태어난 시대적인 배경은 고종황제의 서거와 한일합방의 비애가 채 가시기 전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났으나, 그로인한 경제적 빈곤과 정치적인 압제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지 못해 살아가는 비운의 시대였다.
창인이 8세 때 일찍 아바지(36세)를 여의고 부족함이 많았던 어려움 속에서도 잘 자랄 수 있었던 것은 어렸을 때부터 남달리 믿음이 좋았던 어머니의 기도 덕분이었다. 어머니의 기도와 열심한 신앙생활은 그의 보통학교 시절에 신구약성경을 14번이나 통독할 수 있었고, 어려운 교회 전도사의 길을 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35세가 되던 해에 남편과 사별한 어머니를 따라 새벽 4시에 찬물에 목욕을 하고 예배당에 나가 무릎을 끓고 기도했다. 또한 육신의 밥을 먹기 전에 성경을 먹어야 된다는 것을 배웠다.

보통학교 때 이미 성경 14번 통독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가운데 그의 생활이 변화되었다. 그는 10세까지는 의주읍 서교회에, 11~18세 까지는 의주군 위화면 상안교회에 출석하여 어린 나이지만 주일성수는 물론이고, 최선을 다하여 믿음을 지키며 교회봉사도 쉬지 않았다.
어머니는 가끔 창인이를 향해 “나는 네가 하는 말이 참 재미있다. 네가 말하는 것은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또렷또렷 분명하게 들려서 참 재미가 있다”라고 종종 말했다.  
또 어떤 때는 “창인아 너는 내 입 안에 있는 혀와 같구나. 입 안에 있는 혀는 생각하기 전에 벌써 순종하는 것처럼, 내가 무엇을 했으면 좋겠다 생각하면 네가 미리 해놓으니 내가 네게 할말이 하나도 없구나”라고 하시면서 어머니는 늘 칭찬을 하였다. 그래서 다른 형제들이 창인을 향해 “어머니의 사랑은 저것이 다 받아”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아들 다섯 형제를 믿음으로 잘 키워놓고 공산치하에서 신앙의 절개를 지키다가 북한 땅에서 순교하였다.

중3때 부흥회 인도
창인이가 중학교 3학년 때였다.  어느 교회에서 우리교회에 와서 한시간만 설교해 달라는 청이 들어왔다. 그래서 생각해 보니 설교를 부탁한 교회도 이상하지만 아직 중학교 3학년인 그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염치좋게 “그러지요”라고 답하고서는 주일날 자전거를 타고 혼자 그 교회에 갔다. 창인이가 이렇게 한데는 나름데로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권능이 소년 다윗을 통해 골리앗 거인 대장을 때려 눕혔는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냐”라는 배짱이 있었던 것이다. 가자마자 기도하고 강단에 올라가 주일낮예배 설교를 겁도 없이 하고 내려와 점심을 먹는데 제직회를 한다고 떠들석하더니 제직회를 마치고 최헌금 장로님이 집사님 한 분과 같이 와서 하는 말이 제직회에서 결정했는데 3일동안 김선생이 부흥회를 인도해 달라는 것이었다. “제가 무슨 선생입니까 못합니다”라고 거절했더니 그러지 말고 사흘동안만 부흥회를 해달라고 명령하는 것이었다. 못한다고 거절했는데 갑자기 위에서 명령하는 것이었다.
모세가 혼자 힘으로 맷돌을 돌려 밀가루를 만들어 60만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일려고 했다면 아마 그것은 불가능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장중에 붙들린 바 되어 지팡이를 들었다가 놓았을 뿐인데 60만 대군을 먹이고 이끌어 홍해 바다를 건너지 않았는가? 만나는 하나님이 주셨다. 너는 성경만 들고 서면 될 것이 아닌가?라는 성령의 감화가 왔다.
이같은 용기와 감화는 어릴 때 중학교 가기전 14회나 신구약성경을 통독한 경험에서 얻은 감화요 지혜에서 비롯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부흥회를 인도하게 되었는데 성경을 읽다가 오늘은 이 본문이면 되겠지 하고 준비해 강단에 서면 자기도 모르게 90분 설교가 청산유수처럼 폭발하였다. 시간시간마다 똑같은 경험이었다. 마지막 저녁 설교를 하고 내일 새벽기도회만 끝내면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웠다.
마지막 아침상을 받고 있는데 또 최헌금 장로와 몇분의 제직들이 제직회에서 결정했다면서 부흥회를 3일간 더 해달라는 것이었다. 김창인은 “이게 무슨 소리요 안되겠수다”라고 했다. 못한다더니 잘만 하는데 공연히 거절하지 마세요. 하면서 욱박지르는 것이었다.
더는 못한다고 입으로는 말했는데 그 속에서는 주님의 음성이 들렸다. “그동안 사흘도 네가 했느냐?” 이 음성에 창인 전도사는 “주여 옳습니다. 제가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하고는 부흥회를 또 3일간 이어갔다. 이것이 김창인이 전도사 아닌 중학교 3학년 때 한 일이었다. 큰 나무가 될 묘목은 떡잎부터 다르다고 했던가. 창인 학생이 바로 그 꼴이었다.

장로교 전도사로 본격적 사역
김창인의 본격적인 사역은 1936년부터 장로교 전도사로 나선 것이다. 그는 처음에 의주군 주내면 청전교회에서 정식으로 그의 목회일생이 시작되어 용천군 동산면 성동교회를 거쳐 1937년 의주군 월화면 추봉동 혜천교회에서 시무하게 되었다.
그는 신학교를 졸업한 것도 아니고, 교회봉사의 경력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이렇게 부족함이 많은 그였으나 억지로라도 그에게 자격을 찾는다면 성경을 열심히, 그리고 많이 통독하고 요양원에서 폐결핵 치료를 받으면서도 자칭 전도사의 역할을 한 경력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도행전을 보면 초대교회 사도들 중에도 바울 사도를 제외하면 현대 우리들이 목회자 학력기준에 해당되는 지도자들은 거의 없는 것이 아닐까? 창인 전도사 자신도 이런 면에서 스스로 자위를 하고 용기와 열심을 내 교회에 봉사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전도사로 나서게 된 배경은 중3때 부흥회를 인도한 경험과 14번이란 성경통독의 성경지식이 큰 밑거름이 되었고 김창인을 거목으로 일으키는데 큰 지렛대 역할을 했던 것이다.

해방 후 신앙의 자유 찾아 월남
김창인 전도사는 1948년 12월 3일 신앙의 자유를 찾아 3·8선을 넘어 월남하였다. 그해 12월에 서울 장충동에 재건교회를 설립해 잠시 목회를 하다가 1950년 6·25가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난을 가 그곳에서 동일교회를 개척했다. 이름을 동일교회(東一敎會)라 한 것은 그 곳이 부산시 동구 동대신동 1가여서 였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으로 정부가 서울로 돌아오자 김창인 전도사도 수복된 서울로 올라와 그 해 9월 6일 서울시 중구 인현동에 자리잡은 한명덕 권사(당시는 집사)댁 2층에서 19명이 모여 동일교회로 개척예배를 드리고, 같은 해 9월 21일 충무로 5가 36번지의 대지를 매입 건축을 시작했다. 1954년 10월 기공예배를 드리고 1년 후 상량을 올리고 교회를 완공하였다.
교회 이름을 충현교회로 바꾸고 시작한 목회방향은 주일학교 부흥이 교회의 부흥이란 신념으로 노력하고 힘쓴 결과 충현교회 주일학교 부흥이 전국에 알려지게 되고 교회도 안정되어 갔다. 그리고 1983년 역삼동으로 이전 확장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1953년부터 1963년까지는 충현교회 설립기로 교회 부흥의 기초를 다지며 교회당 건축에 힘을 기울이며 주일학교 발전에 힘을 기울였다고 한다면, 1964년에서 1973년까지는 교회의 외적발전은 물론 내적인 교회 성장발전에 주력하였다.
또 1974년부터 1983년 어간은 충현교회의 확장기였다. 그간 축적된 힘을 바탕으로 세계선교와 북한선교 뿐만 아니라 교회내 각 위원회와 각급기관의 조직 정비 확대로 체계적인 교회운영에 진력하여 교회 인근에 약자들과 교단발전과 남북통일에 대비, 대외적인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김창인 목사는 충현교회 단일교회 지도자에서 1970년 9월 24~28일 대구서현교회에서 모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제55대 총회장으로 피선되어 교단의 수장으로서만 아니라 대외적인 교회의 연합과 일치로 한국교회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총회장 재임시 총회결의 사항을 보면 ①설악산에 총회 수양관을 세우기로 하고 강원노회로 하여금 추진키로 하다. ②재일대한기독교총회와 유대관계를 갖도록 하다. ③서만수 선교사를 인도네시아에 파송하기로 하다. ④경남대회를 조직하기로 허락하다.   ⑤지방신학교(칼빈신, 대전신, 부산신, 서울신)를 인준하다. ⑥총회산하 각 노회는 1개척 교회를 설립하기로 하다. ⑦총신대학교 대학부 입학시 추천은 당회장으로 하기로 하다. ⑧성경에 근거한 요리문답, 예배모범, 헌법적 규칙, 주일성수토록 하다. ⑨총회는 세계적 복음화운동을 전개하여 성경관과 신앙이 우리와 같은 국제기독교단체와 교류를 하도록 하다.
그는 40년의 목회 역정을 마감하고 1987년 자신이 개척하고 성장시킨 충현교회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그가 남긴 저서들은 대부분 자신의 강단에서 외친 설교들인데 △예수님의 좋은 일꾼 △구역장과 심방 △이사야 강해집(1-6) △칭찬 듣는 교회 △시가서 설교집 △서로 사랑하자 △선교란 무엇인가? △예식과 설교 △바울서신 설교집 △성도의 가정 △나의 힘이되신 여호화여 △하나님께서 귀히 쓰시는 일꾼 △교회란 무엇인가 △절기설교집 △성도의 시험 △복음서 설교집 △자유란 등이 있다.
김창인 목사의 목회철학의 중심사상은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였다. 평생을 주님과 교회와 교우들을 사랑하여 목회 하다가 2012년 10월 2일 95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경기도 광주 충현동산에 성도들의 애도속에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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