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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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영 목사(1887.4.23~1968.11.2)는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에서 이유성과 김동혜의 3남 2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 마을은 일명 금당실 마을로 서양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믿는사람들이 생겨났다. 소위 교동대감으로 불리는 이유직이라는 사람이 1893년 낙향하여 생활 하던 중 금당실에 형 이유인을 기념하는 한옥저택(99칸)을 지어서 1899년 전후에서 몰래 예배를 드린것이 금곡교회(金谷敎會)시작이다. 아마도 이유직은 동학혁명에 가담해 쫓기던 중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피신하던 중 믿음을 얻게 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다 금당실 마을은 유교가 절대적인 한편 불교를 믿는 사람들도 많아 마을에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 용이하지 못해 은둔의 신앙으로 기도하며 때를 기다리며 주변의 가족들과 친지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여 점차 교회로 모이는 형태였고 차츰 교인의 수도 하나 둘 늘어가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고루한 재래신앙으로 꽉 차있는 예천(醴泉)지역에서 본격적인 선교사의 발걸음이 닿은 것은 1907년 일이었다. 금곡교회로 발전한 금당골교회는 평신도교회이며 자생(自生)적으로 시작한지 7년만에 예천군에 공식적으로 미국 북장로교 소속 부해리(傅解里 Rev.Henry Munro Bruen)선교사와 이희봉 조사(助師)에 의해 전도를 받게 된 것이다. 최초 신자인 나만기(羅萬基)가 기독교에 입교하면서 괴당교회가 세워지고 금당실(금곡)교회도 선교사의 지도를 받으면서 상곡교회(上谷敎會)라는 정식 교회 이름을 가지면서 새롭게 출발하게 된다.
예천군 지보면 상락교회는 이웃한 의성군 삼분동교회를 출석하던 성도들이 1906년 분립해 교회를 세웠다. 이는 삼분동교회 신자인 오의근씨가 사돈인 양조환씨를 전도하며 수개월동안 삼분동교회로 출석하다가 1906년 상락교회를 설립하였으며, 이때부터 예천군의 3개교회(상곡, 괴당, 상락)가 부해리(Henry Bruen) 선교사에 의해 지도를 받았으며 대구 선교부(Taegu Sfation)에 등록할 때 상곡(上谷)과 상락(上樂)교회를 양조환씨를 설립자로 등록하였다. 이때 괴동교회는 나만기가 최초신자로 기록되었지만 상락교회와 상곡교회(금곡교회)는 양조환이 설립자가 될 정도로 믿음이 좋고 선교부의 인정을 받았다. 이때 이대영은 괴당교회가 세워질때, 친구인 나만기의 전도로 믿음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부모님들의 반대로 신앙생활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며 드러내 놓고 선교사와 함께 활동하지 못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대영은 1907년 예수를 믿기 시작할즈음에 이미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었으며 이듬해 1908년에는 장남 이규원(李奎元)이 출생하였다. 하지만 완고한 부모님들의 반대와 박해로 믿음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게되자 신앙생활을 시작한지 3년만인 1910년 한일합방이 이루어지던 해 가족을 데리고 영일군 흥해면(현재 포항시)으로 이사해 층해교회에 출석하였다. 이대영은 이때부터 적극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며 선교사로부터 본격적인  신앙훈련을 받을 수 있었다. 이때부터 경상노회 전도인으로 사역을 시작하면서 고향인 예천지역을 2개월동안 순회하면서 본격적인 전도인의 삶에 진력하였다. (대구교회사학 3권 장영학의 글 p.29~30참조 1912 대구)

흥해교회서 본격적인 목회활동
본격적인 목회사역은 흥해교회 사역이 그에게 있어서 본격적인 목회활동으로 볼 수 있다. 이대영이 무급전도인으로 활동할 시기에는 노회가 간섭하거나 보고를 받지 아니하였지만 유급 전도인이 되었을 때는 노회가 지도하기에 정식으로 보고를 하게 되었다. 이대영은 흥해로 이사와 흥해교회에 출석하면서 신앙훈련은 물론 전도인의 소양도 갖추게 되었다고 본다. 당시 경상도 노회의 인준을 받고 1915년부터 정식 유급 전도인으로 세움을 받고 먼저는 고향 예천지방으로 가서 2개월 동안 복음을 전하였고 흥해교회에 출석하면서 대구선교부의 중심교회였던 대구교회(현 대구제일교회)에서 실시하는 ‘겨울남자성경반’에 등록 수년간 본격적인 성경공부와 전도방법을 익혔고 좋은 성적으로 공부를 하였기에 유급 전도인으로 추천받아 본격적인 전도사역에 종사할 수 있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에 보면 예천군 선전교회 지역에서 전도활동을 전개하여 많은 사람들이 믿고 교회가 부흥했다.(예수교사기 하 1968. 서울 p.179 참조) 이후 이대영은 목회자가 되기 위하여 경산노회에서 신학 입학을 허락받아 처음으로 시무교역자인 조사(助師)로 부임한 것이 경주시 외동면 말방리에 있는 장산(長山)교회였다. 이 교회는 1902년 같은 동리 한주혁씨 자택에서 예배를 드리게 된 거서이 교회의 시발점이었다.

1917년, 평양신학교 입학
1917년에 이대영은 드디어 평양에 소재한 장로회신학교(평양신학교)에 입학 신학수업을 받게 된다. 당시 평양장로회신학교는 5년제로써 매년 3월 1일부터 6월 15일까지 3개월 동안은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공부를 하였고 6월 16일부터 이듬해 2월말까지 8개월 반 동안은 섬기는 교회를 중심으로 공부한 것을 현장에 적용해 실습하게 하였다. 이대영 학생은 이미 조사로서의 사역과 입학시험의 결과로 신학교 2학년에 입학이 허락되었다. 당시 학당장은 마포삼열(Rev. Samuel Moffett)목사였고, 이대영의 나이는 30세의 나이로 결혼한지 10년이나 되어 10살난 아들 규원(奎元)이 있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신학을 하는 동안 가족들은 시무교회에 머물러 있었으며 혼자서 기숙사에서 동료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당시 신학교 구내에는 미북장로교회가 세운 기숙사 2동, 남장로교회 1동 호주장로교회가 지은 기숙사 1동이 있었으며, 그의 캐나다 장로교 선교부 소속학생들을 위해 학교 밖에 마르다기념관이란 기숙사가 따로 1동이 있었다. 이대영은 신학을 공부하는 중에 1917년 장산교회를 잠시 사면했다가 1918년 이듬해에 재 부임하였으며, 1920년에는 대구교회로 알려진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 조사로 부임하였다. 그 당시 담임목사는 독립운동의 선구자였던 이만집 목사였지만 3·1운동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감옥에 있었기에 이대영 조사를 청빙하여 전임사역자로 시무케 하였던 것이다. 이때 이대영은 신학교 5학년으로 졸업을 앞둔 시기였다. 그해(1920) 12월 2일 신학교 교정에서 열린 평양장로회신학교 졸업식에서 17명의 동료들과 함께 졸업하였다. 동기들 중에는 경북노회에서 함께 사역한 강석진과 28회 총회장을 역임한 윤하영이 있다.
1921년 1월 12일 저녁 7시부터 14일가지 대구 동산성경학원에서 개최된 제9회 경북노회에서 목사장립을 받고서 이튿날(13일) 속회된 회의 벽두에 강석진과 함께 첫 강도(설교)의 기회를 가졌다. 이대영은 성경 느헤미아 1장을 본문으로 “느헤미아의 성공”이란 제목으로 전 노회원 앞에서 시험을 치루었고 같은날 저녁시간에 교회사기(박문찬 목사), 정치(박영조 목사), 신경(어도만 선교사), 서영(김영옥 목사) 등의 고시과목을 치루고 고시위원들이 본회에 문답이 잘되었다는 보고에 이어 그 자리에서 역사적인 목사안수를 받았다. 목사 안수를 맏은 이대영 목사는 고향인 안동읍교회의 위임목사로 부임하였다.
그는 당시 안동선교부(Andong Station)의 권찬영 선교사의 동사목사(同事牧師)로 시무하는 조건으로 노회의 허락을 받고 1921년 2월 부임했다. 기독교에 입신(入信)한지 14년만의 일이요 고향을 떠난지 11년 만에 고향인근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중국 산동성으로 선교사 파송
이대영 목사의 사역에 있어서 전기가 된 것은 장로교 제10회 총회(1921. 9)에서 중국 산동성(山東省)으로 파송된 선교사 직이었다. 1922년 6월 13일에 중국 산동성 래양(萊陽)에 도착 선교지를 답사하고 선교업무에 들어갔다. 선교비는 총회 전도국이 관리하며 행정까지 지원하였다. 이대영 선교사는 중국 선교사로 사역 하면서 자신이 중국 선교에 죽도록 헌신할 각오를 하였기에 철저히 중국 목회자들의 모임에 동참하기 위해 중국교회(中國敎會)로 이명까지 해 자신을 중국화 하려고 노력했다.
이대영 목사의 활동지역인 산동성 주묵현은 홍승한 목사가 1923년초 안식년으로 귀국한 상태여서 할일은 더 많았다. 선교사역 중에는 중화기독교회 교동노회(膠東老會)에 가입하였다. 또 선교사역 중에도 항상 중국인 복장을 하고 중국인들과 더불어 살면서 피선교지 사람들과 기독교인들이 타국 선교사로서의 이질감이나 우월감을 느끼지 않도록 마치 중국인처럼 토착화된 선교의 모델이었다. 나중엔 표준 중국어와 산둥어를 익히면서 중국말로 설교하는 경지에 이르자 현지의 지도자들과 교인들의 존경받는 지도자로 우뚝 서게 되었다. 한국교회의 중국선교는 1913년 박태로 김영훈 사형순을 산동성에 1917년 이들의 철수한 이후 다시 방효원 홍승한 목사를 재 파송한데 이어 1918년 박상순을 파송했으나 여러가지 재정적인 사정으로 잠시 지체하기로 했으나 1925년 이대영 목사를 파송 중국대륙을 향한 선교사역을 이어가게 된 것이다. 1956년 9월 새문안교회에서 모인 제 41회 총회장으로 피선되었다. 이대영이 총회장이 된 총회에서는 다시 태국에 최찬영 김순일 목사를 선교사로 파송하였고 기성교회로 부터 500m 내애서는 교회 개척금지로 하고 전도관의 박태선을 이단으로 결의, 경남노회를 경남 마산 진주 3개 노회로 분리키로 했다.  그의 마지막 사역지는 승동교회였으나 1959년 교단 분열의 바람에 휩싸여 편한 목회는 아니었다. 총회가 어느정도 안정을 찾았던 이대영 목사는 1968년 11월 2일 81세를 누리고 사랑하는 주님의 품에 안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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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제41회 총회장 이대영(李大榮)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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