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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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황주 출신
이삼성 목사(1922.3.1~2008.2.10)는 황해도 황주군 소해리에서 태어났다. 매봉산 자락에 위치한 이 마을은 쌀과 목화의 산지이다. 그리고 유명한 사과가 풍성하게 소추되는 조용한 시골에서 자랐다.
그는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 1946년 어느 봄날 내 인생의 가장 큰 사건이 일어났다. 공산당이 창궐하던 당시 교회생활을 하며 신앙을 영위하던 나에게 유치장 생활과 공산당원들의 계속적인 내게 대한 감시로 정상적인 신앙생활이 어려워져 갔다. 계속 죄어져 오는 감시의 사슬에 나는 아내와 형님, 동생 등 조카들에게 3일 후면 돌아오겠다고 약속을 하고 고향을 떠난 것이 50년이 넘어서도 다시 되돌아가지 못한 거짓말장이가 되고 말았다. 그는 야곱이 그의 인생 말년에 자기가 죽기전 요셉을 만나리라 했던 과정이 지금 나의 심정이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나에게 한가지 소원이 있다면 통일의 노래 가사처럼 죽어 꿈에서라도 통일이 되어 고향에 돌아가 두고 온 가족들을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것이 작고 하기 전 그의 소회이다.

공산당의 박해 피해 서울로
서울에 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이 서대문안 신문로에 있었던 피어선성경학원에서 대학신문을 발행하는 일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자그만치 2년이 넘는 시간을 보냈는데 그 일이 큰 경험이 되어 단국대학교에서 국문학을 공부하는 계기가 되었고(기독교대백과사전 제12권 p143 참조), 후에 총회신학교로 진학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1953).
이듬해인 1948년부터는 한국교회 최초순교자가 된 <토마스 목사 순교 기념전도단>을 조직하여 전도운동에 나섰다. 전도여행은 원만하지 못했으나 주님의 도움으로 목회하기 전에 좋은 경험이 되었으며 가는 곳마다 준비된 후원자들을 만나 성과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이 선교회에서도 1947년부터 6·25가 나던 1950년까지 봉사하는 기회가 되었다.
그 당시 전도했던 황해도 옹진교회는 주일예배에 400명이 모이는 대교회로 성장했고, 해변가에 있는 안동에서도 한동교회가 세워진 것은 지금 생각해도 하나님의 기적이었다.

본격적인 신학도로 인천제2교회 부임
이삼성은 옹진읍, 해주, 광산교회와 은동교회 그리고 연안읍 미산리교회를 개척하며(1948~1949) 빌립집사와 같은 전도 능력을 보였다.
이렇게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젊은이를 하나님께서 어여삐 보셨던지 본격적인 주의 종의 사명을 감당시키기 위하여 총회신학교로 그를 이끌었고 본격적인 전도자의 길을 걷게 되었고 신학도(神學徒)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66년 4월 29일 인천제2교회로 부임해 1999년 12월 9일 은퇴하기까지 그의 사역은 일진월보였다. 그는 농촌을 무대로 전도하며 교회를 개척하던 시절을 추억하며 회상하듯 농촌교회 지원과 기도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교회 안의 남여 전도회를 동원 원·근을 불문하고 농촌의 어려운 미자립교회들을 지원하고 도왔을 뿐만 아니라, 선교위원회를 조직해 다방면으로 국·내외 선교에도 관심을 가지고 지원하기에 이른다.

교회개척과 인천신학교 설립
이 목사는 자기과시적인 단견적인 선교가 아니라 한 교회라도 집중지원하며 개교회로 하여금 자립하게 하였고, 그런 교회가 경북에 3개 교회, 경남에 3개 교회, 충남에 1개 교회, 경기에 4개 교회, 모두 18개 교회에 이르렀다.
교회가 복음의 열매라면 신학교는 전도의 터전이라는 생각으로 교단 안의 전도자 훈련기관이 수도 서울에만 집중되고 있음을 깨닫고 인천과 경기지역에도 전도자 양성기관의 필요성을 느끼고 서울의 관문 역할을 하고 있는 인천에 신학교육기관의 모판으로 삼겠다는 계획아래 어느 누구도 실행하기 힘든 인천신학교(仁川神學校)를 1971년 3월에 설립 후에는 예장총회 인준신학교로 발돋움하게 되어 수많은 목사 후보생들과 여교역자 양성, 나가서는 선교사들을 양성하게 되는 인재 양성의 교육기관으로 발전하기에 이른다. 친히 교장으로 교수로 봉사하며 후엔 이사장으로 학교를 육성하고 지원하는데 앞장서게 되었다.
그는 1953년 인천 제2교회 전도사로 부임한 이래 평생을 칼빈주의 개혁신학의 바탕위에 하나님 중심·성경중심·교회중심으로 목회에 전념하였고, 지역사회와 교단발전에 이바지한 수고를 기억하고 있었다는 듯 1980년 4월 5일 미국 남부에 있는 아트란타 대학교(Atlanta University)로부터 명예신학박사(D.D)학위를 받았다(인천 제2교회 40년사, 이삼성 편 1989, p.190-193 참조).
또 이삼성 목사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요한 21:16)라는 말씀대로 한 생을 성실과 진심을 다해 목양일념을 실천한 목회자의 삶을 살았다.
1954년 8월 목사 장립을 받은 후 지금까지 오로지 교회를 위한 기도와 헌신의 목자로 당시 교인들의 머리 속에 각인되어 있었다.
그는 어린이 교육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개별적인 교육시설이 없었던 때인 1966년 10월 2일 20여평의 단독건물로 교육관(敎育館)을 건축해 지방내 여러 교회들의 부러움을 샀을 정도로 진취적이고 어린이 교육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당시 그 신앙교육 요람에서 교육받은 학생들 중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오늘 인천제2교회를 섬기는 중견인물(장로·집사)들이 되었다.
특기할 사항은 당신의 대를 이어 제2교회 3대 담임목사인 이건영목사가 그때 학생이었다는 사실이다(인천제2교회 40년사 p.195). 뿐만 아니라 목회자의 안정은 곧 교회 안정이요, 목사관(牧師館)의 규모는 교인 가정집 규모의 예표이기에 온 교인들은 목회자가 안정적인 목회사역을 위해 목사관 건축(2층 양옥 28평 1968.10.27준공)에 이어, 교회신축에 꿈을 주었다. “앞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사택의 몇십배 훌륭하게 건축하여 하나님께 바칠것을 다짐하며 온 교우들에게 기도할 것을 선포하고 성전건축 준비에 착수하였다. 당시로써는 과하다할 정도로 전국에서 세번째로 손꼽힐만한 성전을 붉은 벽돌 건물로 고딕식 예배당을 1972년 3월 22일 기공하여 10개월 만인 1973년 9월 13일 성황리에 헌당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고딕식 예배당 헌당과 교육관 건축
성전 완공 후 어느 가정에 심방을 갔는데 성전건축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받치고 셋방에서 생활하고 있는 성도에게 감동되어 난생 후 가장 많은 눈물의 기도를 드렸다고 후일 회고하였다(같은책 p.197).
교회안의 각급 주일학교는 그 교회의 미래요 교회성장의 밑바탕이다. 교회가 성장함에 따라 교육장소의 협소함의 문제가 대두되어 교회와 인접한 550평의 대지를 온교인들의 교육관 건립을 위한 전교인 적금통장운동을 벌여 1978년에 대지를 구입해 1984년 5월 21일 기공 1986년 1월 11일 완공, 주일학교 교육환경이 개선되어 교회부흥발전에만 이바지한 것이 아니라 노회 안의 여러 연합기관의 모임의 장소로써 교단발전에도 크게 기여하기에 이르렀고, 오늘의 제2교회의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1953년 전쟁의 와중에 전도사로 부임했던 1989년 은퇴하기까지 36년 동안 한 교회에서 아름답고 성스러운 목회사역을 감당했던 이삼성 목사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제77회 총회는 교단의 최고 명예의 자리라고 할 수 있는 총회장에 선출되었다. 총회장으로 선출된 그 장소는 그가 그렇게 사랑하고 피와 땀과 노력이 깃든 인천제2교회 목회현장이어서 본인에게 더없이 감회가 깊었다.
1992년 9월 22일~25일에 모인 총회에서 결의된 중요한 안건들을 보면, 이 해에 유독 많은 노회들이 분립되어 교단성장의 일면을 보여주었다. 노회분립허락 <북전주와 전주> < 경남과 경상> <대전 대전서 동대전> <경안과 경안서> <군산과 군산동> 등이다.
△헌법 수정만 노회수의한 결과 통과됨 △총신 및 지방신학교 이사장 및 교장은 겸임치 않기로 함 △전도국을 설치하기로 하다 △선교사 파송 창구를 일원화 하기로 하다 △총신대 교수 임용시 단독목회 3년 협동·교육목사 5년을 경유한 자로 한다 △의사규정, 감사규정, 은급정관 은급시행 규정 받기로 하다 △농어촌 미자립교회 재정지원 후원회를 구성키로 하다 △주일 오후예배는 한국교회의 전통적인 것임으로 그대로 시행하기로 하다  △군목부를 신설하여 전도국 산하에 두기로 하다 △구제주일은 12월 둘째주일, 순교자기념사업주일은 6월 첫째주일, 농어촌주일을 5월셋째주일에 지키기로 하다.
이삼성 목사의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필자가 1990년 가을 총신 71회 동기들이 인천에 모여 회의를 마치고 인천제2교회를 방문, 후배들에게 환영 및 편달의 한 말씀을 청했을 때, 가장 아쉬웠던 점은 교회 가까이에 있는 학교 건물을 인수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놓친 것이라고 하면서 교회교육의 중요성을 피력하였다.
또 한 가지는 목회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가르침 한 마디 부탁에 칠판에 참을 인(忍)자를 크게 쓰면서 목회자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 가운데 명심해야 할 덕목이요, 자기의 목회철학이었다는 말씀이 아직도 아련하게 내 마음 속에 새겨져 있다.
이러한 목회관을 가지고 반평생 목회와 교정을 이끌었던 이삼성 목사는 자기가 평생 섬기고 가꾸었던 목회현장에서 2008년 2월 10일 주일에 사모하던 주님의 품에 안기웠다(자료제공 2015. 9. 10 인천제2교회 고재만 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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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제77회 총회장 이삼성(李三盛)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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