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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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남 평원군 출신
한경직(韓景職 1902.12.29~2000.4.19)목사는 평안남도 평원군 공덕면 간리에서 태어났다. 간리는 평양 동북쪽에 떨어져 있는 작은 마을이다. 그 옛날 원산(元山)에서 조랑말을 타고 평양으로 가던 선교사 한 분이 순천에서 자산 사인당으로 빠져야 할 길을 잘못하여 이 마을 앞으로 지나가게 되었다. 마침 해는 저물고 갈 길을 더 갈 수 없어서 부득불 이 마을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이때 마을사람들과 대화를 나눈 것이 계기가 되어 이들 중 청년 셋이 평양을 다녀온 후 가족들과 함께 마을 동쪽 언덕위 돌매나무 밑에 모여 앉아 예배를 드렸다. 이것이 자작교회의 시작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온 동네가 예수를 믿게 되었고, 한씨 문중에서만도 20여 가구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 이 마을 복음화에 정성을 쏟은 사람은 마포삼열(S.A. Moffeft)이었다.
마을 동쪽 고개 넘어 있는 법흥사 부속 건물을 헐어서 얻은 재목과 기와로 첫 예배당을 지었다. 처음 모여 예배를 드렸던 그 자리에 예배당을 지은 것이다. 장로교 초대 선교사들의 선교정책 그대로 이 마을 복음화를 위해 선교사들은 교육기관의 필요성을 강조하여 윗마을 동구밖에 학교를 세웠는데 이름을 진광학교(眞光學校)라 하였다. 설립자는 배위량(Rev. W.M.Bard) 선교사였다.
한목사가 10살되었을 때 어머니가 별세했다. 한목사는 어머니가 대단히 부지런하며 인자한 분이었다고 기억한다. 어릴때 어머니를 따라 목화를 따러 다니던 일들과, 간혹 밤에 잠에서 깨어나 보면 어머니는 그때까지 물레질을 하며 가족들의 의복을 준비하던 일이 늘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고 하였다.
만혼을 한 아버지는 아들에 대해 두가지 결심을 했는데, 내가 만혼을 했으니 내 아들만은 일찍 결혼시켜야겠다는 것과 내가 배우지 못했으니 아들만은 힘 닿는데까지 공부를 시켜야겠다는 것이었다. 한경직은 그래서인지 13살에 결혼을 하게된다. 
부인은 뒷 동네에 살던 김씨댁 규수였는데, 연상이어서 살람살이에 능했다. 한목사가 남평양영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 첫아이(순희)를 낳았고, 미국 유학시절에는 특별한 환경에 처해 있는 부녀자들을 위하여 세운 송현학교(松峴學校)에서 공부하여 어린딸을 키우며 돌보느라 고생이 많았다.
한목사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였을 때에는 건강이 좋지 않을 때여서 폐결핵으로 2년간 투병하는 남편을 뒷바라지 하느라 고생이 많았다. 한목사가 살아있을 때에는 종종 부인 김찬번 여사를 가르켜 그이는 나의 은인이라고 말했다. 한목사가 영락교회일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목회자로서 발돋음하게 된 뒤에는 말없이 희생적으로 보살폈던 김찬빈 사모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이렇게 한경직목사 뒤에서 그림자처럼 건강을 챙기며 남편을 섬기던 감찬빈 여사가 갑자기 무릎관절에 고장이 생겨 투병 하다가 1974년 12월 31일에 먼저 주님의 품으로 안기게 되자. 그 어느 누구보다 당황하고 안타까워했던 사람이 한경직 목사였다.

오산학교에서 애국애족사상 전수
한목사는 진광학교를 마치고 민족의 얼을 가르치기 위해 세워진 정주 오산학교에 입학해 이승훈 선생과 조만식을 만나 애국애족사상을 마음속 깊이 아로새기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평양숭실전문학교로 진학했다. 학교 건학 이념이 첫째 신앙, 둘째 애국, 셋째 과학의 교과로 숙지시키는 기독교정신에 기초한 초급교육으로 단단히 다졌다.
민족과 한국교회를 위해 큰 일을 하기 위하여서 좀더 공부해야겠다는 비젼에 눈을 떳으나 학비가 문제였다. 이때 숭실대학교 교수로 있던 방위량(Rev.W.N.Blair 方偉良 D.D.) 선교사가 한목사에게 미국유학을 권유함과 유학에 필요한 모든 경비를 방목사 자신이 준비해 주었다(목회의 증언, 안재정 편, 도서출판 목양 1999 서울 p.176-178, 183).
문제는 한국에서 미국까지 가는 여비 가 해결되지 않아 염려하고 있던 차 남강 이승훈 선생을 찾아가 의논을 하는데 스승께서 추천 및 소개서를 두 통 써 주었다.  한 통은 K선생께, 또 한 통은 윤치호 선생에 가져갈 소개서였는데, 먼저 찾아간 K씨는 일언지하에 거절했고, 두번째 윤치호 선생을 찾아가 추천서를 내 보였더니 당시 돈 100원을 선뜻 내주면서 열심히 공부해 국가와 민족을 위해 훌륭한 지도자가 되어 줄 것을 부탁하여 이 돈은 갚지 않아도 된다고 하면서 꼭 갚고 싶으면 이후에 다른 사람에게 같은 뜻으로 도와주면 될 것이라고 했다.
한목사는 100원을 준 그 의미를 평생을 새기며 목회와 고아원과 양로원 혹은 학교를 세우며 이웃과 민족을 위해 일하는 데 뜻을 두었다고 후일 후배들에게 말하곤 했었다.

미국 엠포리아대학과 프린스톤 유학
한목사는 처음에 캔사스주에 있는 명문사학 엠포리아대학에서 공부했다. 이 학교는 장로교 계통의 대학답게 학생들에게 신앙지도에 철저를 기하는 학교였다. 이미 숭실대학에서도 교육받은 바 있었지만 다시 새롭게 다가오는 기독교교육이었다. 학문 심오함과 공부의 매력을 이곳에서 더욱깊이 깨닫게 되었고 조국의 복음화에 견인차 역할을 해내야겠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한목사는 후일 후배들에게 엠포리아대학의 유학생활에 만족했고 학문에 대해 눈을 뜨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고백하였다. 엠포리아대학을 마치고 프린스톤신학교로 가서 본격적인 신학을 터득하게 된다. 이 학교 재학 중 특히 구약학을 가르쳤던 스티븐슨 교장, 교회사를 가르쳤던 릿츨, 성서학을 가르쳤던 어도만, 희랍어의 메천교수 등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프린스톤신학교를 마치고 예일대학으로 가 교회사를 공부할 계획을 세우고 있던 중 예기치 못한 건강에 이상이 왔다. 종합진단결과 당시 흔했던 결핵이었다. 예일신학으로 가고자 했던 것은 단념하고 뉴멕시코에 있는 엘바커크요양원으로 가 정양을 하게 되어 그곳에서 어느 정도 안정을 찾게되고 치료가 잘되어 모교가 있는 평양(平壤)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돌아오자마자 숭신상업학교에서 교목 겸 교사로, 한편 모교 숭실대에서도 부름받게 되었으나 일본 경찰당국은 미국에서 선교사 밑에서 민주주의 교육을 받았다는 것을 빌미로 사상이 불온하다는 이유를 들어 취임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예상치않은 신의주 제2교회로부터 부름을 받게된다. 어느날 김기범이란 분이 한목사를 찾아왔다. 자기는 신의주 제2교회 장로인데 우리교회 전도사로 초빙하기 위해 불원천리하고 달려왔노라고 했다. 이렇게 간절하게 호소하는 김장로의 청을 뿌리칠 수 없었다. 당시 신의주 제2교회는 전임자(최득의목사)가 압록강 건너 안동현교회로 가고 은퇴한 최명준목사가 설교자로 임시 시무하고 있었다. 이곳에 부임 당시 200여명의 교회가 3000여명으로 성장하였다(총회를 섬겨온 일군들, 김수진, 장로교출판사 2005, 서울 p.173).

공산당 박해 피해 월남, 영락교회 설립
1945년 광복이 되었으나 사회는 혼란에 빠졌다. 3.8선 이북에는 소련군이 진주했고 남쪽엔 미군이 주둔해 이데올로기 대결로 북쪽엔 공산주의자들이 기독교인들과 교회를 압박해오기 시작했다.
한목사는 월남하기로 작정하고 당시 백마에서 활동하던 윤하정 목사와 함께 김치선(전 숭실대총장, 법학자)의 안내로 1945년 10월 서울에 왔다. 그가 베다니교회(현 영락교회)를 개척 시무했는데, 6.25전쟁으로 평안도 교인들이 서울로 피난오게 되어 교회는 급속도로 부흥성장하기에 이르렀다.
6.25전란으로 흩어졌던 북한에 고향을 두고 온 신자들은 자연히 영락교회에 나오게 되니 고향사람들도 만나게 되었지만, 한편은 흩어졌던 이산가족들이 만나게 되는 영혼의 고향노릇을 하기도 하였다. 모여드는 신자들을 천리교당을 인수한 건물로 수용할 수가 없어 1949년 돌예배당을 신축, 국내에는 물론 세계적인 장로교회로 발돋음하기에 이른다.
그는 기독교계만 아니라 국내외적으로 성직자로 목회자로 지도자로 두각을 나타내었다. 무엇보다 교회적으로 민족복음화 전군신자화 세계복음화의 꿈을 안고 한국교회 여타 지도자들과 함께 민족과 세계복음화에 앞장서 열심히 일하였다.
6.25직후 밥 피일스 박사, 빌리 그레이함 박사, 조세광 목사 등을 계속 초청해 개교회와 연합적인 모임을 이끌어갔고, 73년 빌리그레함전도대회를 비롯 EXPIO ’74국제대회, 77민족복음화대회, 80세계복음화대회 등을 타교단 지도자들과 함께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에 기초한 복음전도운동 맨 앞자리에 서서 진두지휘를 했던 것이다.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을 맞아 기념사업회 총재로서 앞장섰고, 한국기독교총연합회를 발기 오늘의 연합기관으로 대정부 대사회 창구역할을 하게 했으며, 1955년 4월 22일-26일 그가 목회하고 있던 영락교회에서 개최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50회 총회에서 총회장에 피선, 한국교회지도자로 우뚝서게 되었다.
그가 이끈 40회 총회 중요결의 안건을 보면 △한국교회사상 처음으로 1955년 7월19일 교역자(목사) 신분증을 발행하기로 하였고 △전국 500개 무교회 면마다 교회개척하기로 하였고 △대한신학교와 총회야간신학교를 통합하여 직영야간신학교로 하기로 했으며 △용문산기도원 설립자 나운몽씨의 가르침은 장로교신경에 맞지 않음으로 이를 막기로 결의했다.
1970년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에 이어 1992년엔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탬플턴상(Templeten)을 받기도 했다.
한경직목사는 98세를 일기로 2000년 4월 19일 사랑하는 가족들과 영락교회 교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로운 얼굴로 주님의 품에 안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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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제40회 총회장 한경직(韓景職)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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