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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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로 내한
배유지 선교사(1868.4.1~1925.9.28 裵裕祉)는 미국 켄터키주 스코트선교구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 소속 목사로 1893년 내한하였다.
1891년 켄터키주 센트럴대학(Central University)을 졸업하고, 1894년 켄터키신학교(Kenturky Seminary)를 졸업하였다. 목사안수를 받고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의 파송을 받아 서울에 도착해 전남선교부가 설치된 나주에 부임하였다.
그해 9월 6일 나주읍에 최초로 나주장로교회를 설립했다. 그러나 이곳의 유림(儒林)들과 양반들의 텃세가 심해 외국인에 대한 반발이 커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1897년 10월 1일 서해안에 새로 개항된 목포로 선교기지를 이동해 이듬해 목포선교지부를 개설하였으며, 뒤따라 부임한 의료선교사 오웬(Clement C. Owen 吳元) 및 여선교사(Straffer, Fredrica) 등과 함께 전도 및 부녀자 계몽사업을 시작하였다.
배유지 선교사는 나주로 부임하기 전에는 하위렴(W.R.Harrison) 선교사와 함께 서울에서 조선어 훈련을 먼저 받다. 배유지와 오웬 선교사는 나주에서 목포로 이동, 새로운 둥지를 잡고자 선교사역을 착수했으나 나주에서처럼 향교를 중심한 유림들과 양반들의 텃세 때문에 정착하는데 여간 어려운게 아니었다(기독교대백과사전 제7권 기독교문사 1982. p.745).
할 수 없이 그들은 변두리로 밀려나 유달산이 바라다 보이는 목포 양동 공동묘지 끝자락에 자리를 잡고 겨우 선교사들의 주택과 교회당을 겸해서 사용할 수 있는 거처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래도 오웬은 목사이면서 의사였기 때문에 목포진료소를 설치할 수 있어 이를 매개로 주민들을 상대로 진료에 임할 수 있었다.
이곳 진료소를 찾는 이들은 주로 해남, 진도, 완도, 강진, 장흥 지역민들이었는데 그 이유는 오웬이 이 지역들을 순회하면서 목포진료소 소식이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소문이 나게 되었기 때문이다(총회를 섬겨온 일군들, 김수진 저, 한국장로교출판사 2005. p.22-23).

목포에 선교본부 설치하고 교회개척
배유지 선교사는 선교방법의 일환으로 응접실을 설치하고 변창연(邊昌淵)으로 하여금 관리하게 하면서 결신자들을 위한 상담실 역할을 하게 하였으며 1900년 3월 5일 4명의 원입교인(原入敎人)으로 최초의 목포교회(木浦敎會)가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해 여름에 이르러서는 30명의 세례(洗禮) 지원자 중 6명이 문답에 합격해 세례를 베풀었고, 8명의 원입교인이 증가해 꾸준하게 발전하여 갔다. 호사다마라 했던가, 1901년 4월 순회전도 여행 중 예기치 못한 사고가 발생해, 배유지 목사는 부인(Lottie Withespoon Bell, 裵周良)을 잃었다.
그는 두 자녀를 데리고 미국으로 귀국하였다가 1902년 가을에 다시 내한하여 목포지부에서 선교사역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1903년에 이르러서는 목표교회 교인수가 계속 증가하여 200명에 이르렀다.
배유지 목사는 200명 이상의 교인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 그는 석조(石造)예배당을 계획하고 목포교회 신축계획을 세우고 예배당을 완공하여 이곳 목포선교지에서 별세한 그의 부인을 기리기 위한 의미를 부여 <Lottie Whidespoon Beel>기념 교회당이라 명명하였다.

숭실학교 수피아여학교 설립
이때 당시 목포 인근에는 이미 6개의 예배처소가 세워졌고 100명의 원입교인이 확보된 상태였다. 이리하여 1904년 봄에 개최된 선교연회(Mission Conference)에서 광주선교부(Mission Station)를 개설하기로 결정하였다. 배유지 목사는 광주선교부 책임자로 결정되었다.
배유지 선교사는 광주가 앞으로 행정구역 위치로 보아 전남지방의 중심 도시로 발전될 것을 예견하고 광주지부를 신설할 것에 대해 꿈을 꾸어 왔고, 오웬과 함께 1904년 12월 성탄절 아침에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에 첫 광주교회(光州敎會, 현 광주제일교회)를 설립하였다.
2004년에 광주제일교회는 100주년 기념행사를 거행하며 기념예배를 드렸으며 커다란 자연석에다 광주제일교회100주년기념비까지 세워 초창기에 이 지역에 와서 선교의 열정을 불태웠던 그들의 노고를 기억하였으며, 21세기를 향한 광주지역 복음화와 세계복음화의 꿈을 안고 국내 개척선교를 비롯 해외선교사를 파송, 복음의 빚을 갚아 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광주지역 선교의 포문
1904년 12월 성탄절을 맞이해 그 축하예배를 자신의 사택 사랑방에서 집례함으로 광주지역 선교의 포문을 열었다. 이 모임은 1905년 1월부터 기도회(Pray Meeting) 모임으로 발전하였고, 점차 교인수가 증가하게 되자 북문안(北門內)에 첫교회를 세운 것이 오늘의 광주제일교회의 전신이다. 6년 후 1910년에는 교인 총수가 500명을 기록하였다.
1908년 그의 사랑방에서 몇 사람의 여학생을 모아놓고 이듬해엔 남학생까지 모집해 성경을 가르친 것이 시초가 되어 오늘의 수피아여학교와 숭일학교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가 세운 교회는 광주제일교회(양림동 소재)를 비롯해 송전교회, 장성군 모생리교회, 해남군 우수명교회, 곡성군 옥과리교회, 장성군 소룡리교회, 순창군 쌍계리교회, 해남군 신덕리교회, 장성읍교회, 광주월성리교회, 담양읍교회 등 수없이 많아 배유지 선교사야 말로 호남선교의 대부라 할만 한 선교열매를 거둔 선구자였다. 뿐만 아니라, 배유지 목사는 수년동안 평양장로회신학교 교수직을 감당하며 초기 한국교회 지도자 영성에도 크게 기여하였으며, 광주기독병원(당시 제중병원) 탄생에 산파역도 감당하였다.

한국서 두 부인 잃고 끝내 자신도 순직
1911년 10월 15일엔 전주에서 개최된 전라노회 창립노회 부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하였으며, 1914년 황해도 재령 남산현교회(南山峴敎會)에서 모인 제3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선교사 총회장으로는 세번째) 피선되었다(기독교대백과사전 한영제 편, 같은책 p.745).
총회장으로 당선된 배유지 목사는 이미 광주선교부를 신설하고, 1908년에는 숭일학교와 수피아여학교를 세워 교회와 국가를 위한 인재양성에도 큰 공을 세웠다.
그가 재임했던 장로교총회 중요결의 안건을 보면 △길림성과 만주지역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하다. △주공삼씨를 동경연합교회(현 동경한인교회) 선교사로 파송하다. △조선기독교청년연합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하다(제98회 총회 회의결의 및 요람, 안명환 편, 예장총회 2014, p.13참조).
배유지 목사는 이 땅에 와서 두번째의 개인적인 아픔을 겪었다. 그것은 그의 둘째 부인(M.W. Bell)이 3.1운동 당시 경기도 화성 제암리교회 참상을 취재한 후 귀가 길에 교통사고로 순직한 일이다.
이러한 와중에도 선교사로서의 긍지를 가지고 전라도지방 선교에 헌신, 전도자의 열정을 불태웠다. 배유지 선교사 자신도 격무에 과로로 결국 1925년 9월 28일 광주선교부 자택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안한 모습으로 주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의 자택이었던 양림동의 집은(2층 양옥) 현재까지 <벨기념관>으로 남아있다.
유족으로는 3남(Henry, Euqene, William) 1녀를 두었는데, 딸은 남장로교 선교사였던 린턴(W.A Linton)의 부인이 되어 군산에서 선교하였다. 대전에 있는 한남대학교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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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제3회 총회장 배유지(裵裕祉 Bell Eugene)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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