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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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도 평양 출신
이기풍 목사(李基豊, 1865.12.23~ 1942.6.30)는 1865년 12월 23일 평안남도 평양부(平壤府) 순영리(남하수구리)에서 이씨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그는 6살 때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줄줄 외웠고, 12세 때 지방관청에서 실시하는 초시 백일장에 서 장원(莊元)으로 뽑혔다.
장원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마을 사람들은 모두 기뻐하며 앞으로 큰 출세를 해 한자리 할 것이라고 찬사들이었다. 초시 백일장에서 장원을 할 정도면 더욱 학업에 열중해 인격과 학문을 닦아야 하는데 기풍은 집필묵을 멀리하고 만다.
이 정신적 수모와 멸시를 푸는 방법으로 술을 먹고 행패를 부리며 분풀이로 주먹을 쓰기 시작했다. 말을 탄 평양좌수에게 갑자기 달려들어 다리를 덥석 쥐고 말에서 끌어내려 내동댕이 치면서 ‘이 고약한 진드기같은 놈들 백성들의 피를 빨아먹고 뱃가죽에 살이 디룩디룩 찐 날도둑놈 같으니라구’ 중얼거리며 거리를 활보하였다.
그는 즉석에서 포졸들에게 묶여 투옥되어 꼬박 3개월을 유지장에서 살다가 출옥했다. 옥에서 나왔어도 이와 비슷한 사건들이 비일비재하였다.

사무엘 마팻 선교사 테러
몇년이 지난 후 하루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서는데 생전 구경 한번 한적없는 서양 코쟁이 한 사람이 집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보기드문 큰 체구에다 도도하기 짝이 없는 코쟁이가 걸어가는 모습을 보니 비위가 상해 구역질이 올라왔다.
이기풍은 당시 평양에 와 있던 사무엘 마팻(Rev. Samuel A.Moffett) 선교사의 뒷통수를 노려보며 가만가만 그의 뒤를 따라갔다. 선교사가 자기 집에 막 들어가는 것을 보고 쏜살같이 친구집에 찾아가 저 양코베기가 우리나라에 왜 왔는가? 저것들도 날도둑놈들이 아닌가? 저놈들을 우리나라에서 하루빨리 몰아내자고 부추겼다.
얼마 후 우연히 장터를 지나가다가 사람들이 모여 둘러섰는데 무슨 일인가 하여 어깨 넘어로 들여다보니 평양에서 쫓아내려던 바로 그 양코베기가 한 가운데 서서 “예수 믿으세요, 예수 믿으면 천당가고 안믿으면 지옥갑니다”라며 외치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두리번 거리며 땅에 있는 돌맹이 몇개를 집어들고 있었다. 군중들은 이기풍이 무리 가운데 나타난 것을 보고 하나 둘 슬금슬금 피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 사이 기풍이는 “요새끼 잘 만났다. 내 돌 맛좀 봐라 하면서 몇번 선교사를 향해 던졌는데 돌 한 개가 마팻 선교사의 턱에 정통으로 맞았다. 그는 그 자리에 꺼꾸러져 흘러내린 피가 땅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아무도 마팻을 일으키려고 하는 자들이 없고, 한 사람씩 불뿔이 흩어졌다. 그도 시치미를 떼고 바람과 같이 사라졌다.
그는 또 평양 장대현교회 건축 현장에도 나타나 교회를 향해 돌을 던지며 행패를 부린 적이 있었고, 문자 그대로 평양거리는 이기풍의 거리였다. 이러한 거리에 외국인이 나타났으니 이기풍이 그냥 넘어갈리가 없었던 것이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외국인들이 우리 조선을 얕보고 어떤 구실을 삼아 점령할 것이라는 말에 이기풍은 ‘그럴 수 없다. 나혼자 힘으로라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기풍의 회심
이기풍은 그 날도 담뱃대에 그림을 그려 한 다발 묶어 들고 거리에 나가 전을 펴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그 앞을 지나가는 서양인(西洋人) 한 사람을 보았다. 그 사람을 본 이기풍은 잊어버리고 있던 마팻 선교사의 환상이 떠올랐다.
그 서양인은 손에 전도지를 들고 있었고 예수를 전도하는 선교사였다. 이기풍은 그 사람을 마팻 목사로 착각하였다. 그 선교사는 원산(元山) 지역을 중심으로 선교구역을 삼아 전도하다 평양에 잠시 들려 노방전도를 하던 스왈론(W.L.Swallon) 목사였다.
스왈론 선교사가 이기풍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세요. 예수 믿고 구원 받아야 합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이기풍의 귀에는 하늘에서 들려오는 천둥소리 같았다. 깜짝놀라 일어난 이기풍은 주섬주섬 깔아놓은 짐을 챙겨 도망을 쳤다. 집에 돌아온 그는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눈만 감으면 마팻 선교사가 피를 흘리는 모습으로 자기를 향해 달려오는 것이었다.
새벽녘이 되었을까 깜빡 잠이 들었는데 어디에선가 소리가 들려왔다. “기풍아, 어찌하여 너는 나를 핍박하느냐?” 잠에서 깨어난 기풍은 가슴이 답답하였다. 내가 왜 그런 짓을 했는가. 그의 눈에는 눈물이 흘렀다. 그 순간 머리에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었다. 원산에서 거리를 방황하고 있을 때 그에게 전도하던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고, 마침 그가 살고 있는 집을 알고 있었다. 그를 찾아가 자초지종 이야기를 했다. 그는 이기풍의 이야기를 듣고서는 “우리 주님께서 형제를 사랑하고 계십니다”라며, 스왈론 선교사를 소개해 줬다.
기풍을 알아본 스왈론(Swallon) 목사는 “잘 오셨습니다”라고 유창하게 조선말로 인사했다. 이기풍은 지난 이야기를 소상하게 보고하듯 말했다. 그리고는 속죄의 길을 물었다.
스왈론 목사는 함께 기도해 주었다. 그때 이기풍은 눈물을 흘렸다. 스왈론 목사의 기도소리가 기풍의 영혼을 흔들어 놓은 것이었다. 기도가 끝나자 스왈론 목사는 기풍의 손을 굳게 잡으면서 “형제여 당신의 죄는 이미 예수님의 이름으로 용서를 받았습니다. 기뻐하십시요.” 이 말을 들은 이기풍의 마음은 이상하게도 후련하였다.
그간 지루했던 청일전쟁이 끝났다. 평양에도 평화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이기풍은 원산에서 평양으로 돌아왔다. 이기풍은 새사람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깡패가 아닌 유순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평양으로 돌아왔다.

마팻 목사 찾아 용서 구해
이기풍은 먼저 마팻 목사(S.Moffett)댁을 찾아갔다. 마팻은 이기풍은 알아보지 못했다. 이기풍은 마팻 목사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용서를 구했다.
“선교사님! 저를 아시겠습니까? 저는 평양 깡패 이기풍입니다. 선교사 댁에 돌을 던지고 길거리에서 전도하시는 선교사님에게 돌을 던진 불량배입니다.” 하고서 이기풍은 큰 소리로 엉엉 울었다. 마팻은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으나 돌로 턱을 쳤다는 말에 오래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형제여 울지 마시오. 모르고 한 일이니 다시 하지 않으면 되는 거요. 하나님께서 형제를 사랑하십니다”라고 말했다.
이기풍은 “저를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마팻은 “나는 벌써 용서하였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마팻 선교사는 그 자리에서 기독교 교리를 말씀하였고 이기풍은 들으며 깨우침을…받게 되었다.(목회의 증언, 안재정 편, 도서출판 목양 1999. p.19-22).
그리하여 이기풍은 1903년 평양신학교 첫 입학생이 되었고, 1907년 첫 열매로 다른 동료 6명과 함께 목사가 되어 조선의 남단 제주도에 선교사로 파송받았다. 1907년은 평양대부흥의 기운이 전국으로 확산되던 해였다.

한국장로교 최초 7인 목사로 안수받고 제주도 선교사로
1907년 9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선교사 33명, 한국인 장로 36명이 모여 최초의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가 조직되었고, 이 역사적인 창립노회 노회장으로 마팻 목사가 선출되었다. 여기에서 7명의 첫 조선인 목사가 임직되었고,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이기풍이었다. 이기풍 목사는 초대교회 사울이 부활의 주님을 다메섹 도상에서 만나 변화받아 바울이 되었던 것처럼, 깡패 이기풍이 조선교회의 지도자로 변신, 한국 초대교회 베드로 역할을 하게 될줄 주님 외에 누가 알았으리요.
처음엔 이기풍 목사가 제주도 선교사로 가는 일에 무슨 연유에서인지 마음이 약해져 있었을 때, 사모가 강력하게 그에게 항변을 하면서 “우리가 안가면 누가 불쌍한 영혼을 구원하겠어요. 두말 말고 속히 떠납시다.”라면서 이기풍 목사를 다그쳤다고 한다.
이기풍 목사는 사모는 다음에 제주에서 준비가 되는 대로 데려 가기로 하고 처음엔 혼자 입도하기로 하였다. 목포항을 떠난 여객선이 풍랑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한 이기풍 목사는, 제주에서 상황이 어느정도 자리를 잡아가자 목포에서 기도하며 기다리고 있던 사모를 제주도로 오게 하여 본격적인 선교사로, 목회자로써 사명을 감당하게 되었다.

제10회 총회장에 피선
이기풍 목사는 1921년 9월 10일에서 15일까지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모인 조선예수교장로회 제10회 총회에서 총회장에 선출되었다. 1회 총회부터 3회까지 선교사들이 이끌었던 총회를 7번째 조선인 목사로 영광되고도 어깨가 무거운 총회를 메고 가게 된 것이다.
이기풍 목사가 피선된 10회 총회의 중요 결의안을 살펴보면 ① 함남노회와 함북노회가 합쳐 3개 노회(함남, 함북, 간도)로 분리하기로 하다. ② 평남노회를 (평양, 평서, 안주) 3개 노회로 분립키로 하다. ③ 경북노회를 (경북, 경안) 2개 노회로 분립하기로 하다.
이기풍 목사는 일제 당국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앞장 서서 일제와 투쟁 중 여수경찰서에 끌려가 수감됐다. 그는 밤마다 취조를 당하였으나 끝까지 절개를 굽히지 않아 심한 구타로 끝내 몸이 쇄약해졌다. 그는 취조하는 일본경찰을 향해 “어리석은 짓 하지 말라. 내가 우리 주 예수님을 배반할 것 같으냐? 일본 천황은 사람이요, 천조대신은 죽은 신이다”라며 끝까지 버티다가, 출옥 후 1942년 6월 20일 집에서 요양 중 순교적인 죽음을 맞이하였다(총회를 섬겨온 일꾼들, 김수진 저, 같은책, pp.50-52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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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제10회 총회장 이기풍(李基豊)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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