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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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김해군 명지 출신
한상동(韓尙東, 1901.7.30~1976.1.6)목사는 1901년 7월 30일 경상남도 김해군 명지(鳴旨)에서 한재훈(韓在勳)과 배봉애(裵奉愛) 사이에서 4남4여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가 5살 때에 5촌 당숙인 한금출씨의 양자로 입적하였다. 어릴 때에는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였고, 1910년에는 다대포에 있는 실용학교(實用學校)에서 수학하였는데 당시 교사였던 김성권으로부터 나라의 독립과 애국정신을 배웠다.
1916년 이 학교를 졸업한 그는 동래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본격적인 수학은 못하고, 1918년에는 자기의 모교였던 실용학교의 임시 교사로 부임하였다. 1921년 5월 31일 그의 나이 만 30세 되던 해에 동래군 기장면 김두천씨의 장녀인 김차숙과 결혼하였다.
그해 9월부터 자신의 인생문제로 고민하다가 박창근(朴昌根) 전도사의 전도를 받고 1924년 4월부터 다대포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3월 세례를 받은 그는 이전까지의 삶과는 전혀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으나 당시 완고하던 부모로부터 상당한 핍박을 감수해야만 했다. 핍박은 정도 이상의 것이었다. 신자가 된 그가 가족들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유가적인 풍습인 조상제사 문제를 거역했기 때문이었다. 교회 출석을 하기 시작한 후 2년째 되던 해에 1926년 한씨 문중에서 파양선고(양자해제)를 받게 되었다.
당시 무자한 가정에 양자를 삼는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가 선조들의 제사를 받들어야 하는 것이었는데 이를 거절하였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이 사건은 청년신자 상동(尙東)에겐 자기와의 싸움이자 신앙의 길이 얼마나 험한 시련인가를 채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채험은 후일 조선교회 신앙의 지조를 지키기 위한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노진현과 함께 광림학교 교사 생활
한상동이 교사로 있던 학교는 호주선교부가 1906년에 설립한 초등학교 과정의 학교로써 학생들이 100여명이되었고, 교사 역시 7,8명 정도 되는 소규모의 교육기관이었다.  당시 교장은 예원배(Albert Wright) 선교사였다.
이 학교에서 함께 교사로 일했던 노진현(盧震鉉)과는 이때부터 동료가 되었고 후에는 함께 목사의 길을 걸어갔다. 이들은 때로는 신앙의 동료로, 때로는 이견을 보이면서도 조선교회의 역사를 이어가는 기둥들이 되기도 하였다.
한상동은 광림학교 교사로만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교사로 1년 6개월간 일하던 그는 그 학교를 사면하고 1928년 서울에 있는 피어선고등성경학교(현 평택대학교 전신)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는 피어선(Dr.A.T.Pierson)을 기념하기 위해 1911년에 설립된 학교로써 장로교와 감리교가 공동으로 경영하고 있는 학교였다. 그러나 이곳에서 예기치 못한 폐결핵으로 학교를 중단하고 고향으로 낙향하게 된다. 그는 고향 다대포로 돌아와 정양하던 중 경남노회 부인 전도회가 한상동으로 하여금 전도사로 일하게 주선하였는데, 그의 첫 목회지가 경남 고성군에 있는 학동(鶴洞)이었다. 이곳은 학림(鶴林)이라고도 불리는 곳이었는데 경남 부인전도회가 이미 김석진(金錫珍)씨를 파송 전도한 적이 있는 곳이었는데, 1928년 6월 한삼동을 파송해 전도하게 한 것이다. 이곳의 사역은 한상동에겐 최초의 목회경험이었다. 이곳에서 많은 결신자를 얻게되어 새 예배당을 신축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초량교회 28회 당회록 1929. 5). 그후 그는 경남 하동군 진교면 소재리로 가서 일하기도 했다고 하였다. 이렇게 활동하던 한상동은 몰라보게 건강을 회복해갔다.

평양 장로회신학교 32회 졸업
1933년 평양에 있는 장로회신학교에 입학 3년의 과정을 마치고 김진홍 방지일 이유택 등과 함께 1937년 3월 32회로 졸업과 함께 그해 4월 부산초량교회 전도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초량교회에 부임한 그는 1937년 5월 제39회 경남노회에서 정식으로 초량교회 강도사로 허락되었고 그해 12월 7일 향서교회에서 모인 경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한상동 목사는 안수와 함께 마산에 있는 문창교회로부터 위임목사 청빙을 받고 1938년 1월 6일 문창교회에서 위임식을 거행했다.
문창교회는 1903년 호주선교사였던 아담슨(Rev. A. Adamson) 선교사의 전도로 시작된 이 교회가 아마산지역 최초의 교회였고, 한석진 함태영 목사 등 유수한 목회자들이 목회했던 교회였다. 한목사가 부임하기 직전의 목사는 주기철(朱基徹) 목사였다. 그가 평양 산정현교회로 이거하게 되어 한상동 목사가 청빙을 받게 된 것이었다.
한상동 목사가 이 교회에 부름을 받기는 했으나 사역기간이 길지는 못하였다. 이때는 일제에 의해 신도국가주의(神道國家主義)가 고양되기 시작한 시기로 그의 목회 현장에 영적 전운의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워져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상동으로서는 이미 예견한 일이었지만 소위 시국인식이라는 이름아래 교회지도자들을 소집하여 신사참배를 요구하고 일본의 정책에 순응할 것을 요구 받았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목사는 문창교회 부임한지 두달 후 같은해 3월 6일 주일에 (3대탄식)이란 제목의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선의로 창조한 만물을 국가가 악의로 사용하기 때문에 모든 만물들이 탄식한다며 신사참배 반대 의사를 공식적으로 천명하였다. 그후 1938년 9월 장로교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공식적으로 가결하게 되자 한상동은 한국교회의 참담한 현실의 한가운데 영적 투쟁의 지도자로 걸어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신사참배 반대운동 주도 5년간 옥고
그는 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한 이상 일제당국 뿐만 아니라 장로교 총회 결정에 반대하여 싸워야 하는 이중의 과제를 떠안게 되었다. 문창교회를 사임하고 부산으로 돌아온 그는 집에 칩거하면서 은밀하게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하였고, 1939년 10월에는 밀양 마산교회에서 약 2개월간 시무하기도 하였다. 이곳에서 사역하는 동안 경남지역에서의 신사 불참배운동을 조직화 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교회조직을 계획하였으나 주기철의 반대로 실행하지는 못하엿다. 주기철은 모든 점에서 한상동과 의견을 같이했으나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교회들만의 새로운 치리회(治理會) 구성은 시기상조로 본다면서 반대하였다.
이에 한상동 목사는 최상점, 손명복, 이인제, 조수옥, 최덕지 등과 함께 이 지역에서의 신사참배 반대자들을 규합하고 교회와 성도들에게 신사참배 행위는 범죄행위임을 인식시키는데 힘썼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운동이 조직화 되어가자 일제 당국은 소위 일제검거라는 이름으로 기독교계 지도자들을 모두 검속하였다. 결국 한상동 목사도 1940년 7월 3일 체포되어 해방되기 직전까지 5년간 감옥살이를 하였다. 신사참배 거부 운동으로 2천여명의 지도자들이 투옥되었으며 최소 30명에서 50여명이 희생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해방과 함께 출옥
해방과 함께 8월 17일 평양감옥에서 출옥한 한상동은 출옥한 동료들과 함께 평양에서 교회쇄신운동을 전개하였다.  한국교회가 일제에 의해 수난을 겪은 것은 민주적 정치적인 사건이기도 했지만 한목사는 교회가 영적으로 패배한 이유을 신학교육의 실패에서 온 것으로 인식하고 새로운 신학교육이 교회재건의 밑바탕이 된다는 것을 일찍이 감지하고 한국교회의 미래를 자유주의 신학이나 신신학에 맡길수 없다는 일념으로 정통신학을 수립하여 교회의 지표를 삼고자 하여 1946년 6월 12일 서울 승동교회에서 열린 남부총회가 조선신학교 설립하기로 가결하는 것을 보고 평양장로회신학교를 계승하는 보수정통 총회를 이끌어갈 새로운 신학교를 설립하는 일에 착안하고 이 일에 주남선 목사와 함께 뜻을 모은다.
한상동은 주남선과 함께 뜻을 같이해 1946년 4월 서울에서 전 만주 동북신학교(東北神學校) 교수 박윤선을 만나 신학교 설립의 의견을 교환하고 협조를 얻게 되었다. 박윤선 목사는 당시 경기노회의 지지를 받고 있는 조선신학교로 가느냐, 한상동이 구상하고 있는 신설될 신학교로 가느냐 고심끝에 한상동 목사의 신설신학교 설립에 뜻을 같이 하기로 하고, 그해 6월 23일부터 8월 10일까지 진해 하사관 훈련수련관에서 박윤선 박사를 강사로 오늘의 고신대학교로 이어지는 첫 신학 강좌가 열였는데 수강생이 63명이었고, 그 중에 손명복, 이경석, 이인제, 홍반석, 최성용, 한영원 등이었다.

고려신학교 설립 및 고신교단 창설
그는 한국장로교회를 이끌 수 있는 학교로써 옛 평양신학교를 이어 계승해 갈 수 있는 학교를 계획하고 당시 만주에 거주하고 있는 박형룡(朴亨龍) 박사를 교장으로 모시기 위해 교섭위원으로 남영환을 보내 교장으로 취임해 달라고 하였으나 당시 국내에 유행하는 호열자의 발생으로 귀국이 잠시 지연되자 1946년 9월 20일 박윤선 목사를 임시교장으로 하여 좌천동 일신여학교 교사에서 고려신학교를 개교했다.
개교식은 김치선(金致善) 박사의 ‘신학과 신조’란 제목의 설교와 미국 정통장로교 소속 종군목사 뱃졸드(Rev. John Betzold)의 축사로 진행되었다.
한상동 목사가 총회장으로 재임시 총회 중요결의안 등을 살펴보면, ① 1960년 12월 13일 승동교회의 속회 총회에서 고려파와 합동 원칙 방안을 결의 하다. ② I.C.C.C국제기독교연합회와 우호관계를 단절하기로 하다. ③ 권사의 연령을 50세 이상으로 개정하여 받기로 하다. ④ 강도사가 된자는 1년 후 해노회에서 목사 안수키로 하다. ⑤ 총회신학교와 고려신학교를 통합하되 교사(校舍)는 서울에 두기로 하다. 1960년 9월 22일 승동교회에서 합동 하였으나 고신측의 일부가 옛 고신교단으로 복구선언함으로 한상동 목사는 고신으로 돌아가게 됨으로 예장 오늘의 합동측과 나누어지게 된 아쉬움으로 남이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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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총회장 열전/ ㉗ 제45회·46회 총회장 한상동(韓尙東)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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