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8(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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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북 의주 출신
양전백(梁甸伯 1870.3.10~1933.1.17)목사는 평안북도 의주군 고관면 상고동에서 출생하였다. 9살 되던 해에 가산이 기울어져 생활고로 할 수 없이 구성으로 이사하였다.
그는 유교가문 출신 유학자 이정로(李珽魯)의 문하생으로 한학(漢學)을 공부하였다.
김관근의 전도로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인 그는 교회에 출석하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게 되었다. 한학에서 깨닫지 못한 진리를 기독교 복음을 통하여 인생의 참 의미와 가치를 깨달은 후 자기가 살고 있는 구성에서 한문과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구성에 최초로 신시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청일전쟁이 발발함으로 고향을 등지고 서울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서울에서 마팻(馬布三悅) 선교사를 만나 세례를 받자마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자기가 세운 신시교회를 돌보게 된다.
그 사이 청일전쟁이 끝나자 마팻 선교사를 만나 그간의 자신의 활동을 보고했는데, 보고를 듣고 있던 마팻이 그의 전도에 대한 열정과 당돌함에 큰 감명을 받고 놀라 곧 그를 조사(助師)로 임명하였다.
1896년부터 같은 북장로교 소속 위대모(Norman C. Whittemore)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그의 선교구역인 평안북도 일대를 순회하다가 선천(宣川)에 자리를 잡았다.

선천읍교회에서 장로 장립
1897년에 선천읍교회를 담임하면서 모여드는 조선 청소년들을 그냥 놓아둘 수 없어서 명신학교를 설립해 자신이 교장이 되었다. 선천읍교회에서는 그의 신앙에 감동되어 1902년에 그를 선천읍교회 초대 장로(長老)로 세웠다.
그를 유심히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마포삼열 선교사는 양전백 장로를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시켰고, 신학을 공부하던 그는 9개월간 목회 현장 실습기간에 그곳의 뜻있는 유지들과 선교사들의 협조를 얻어 신성학교(信聖學校)를 설립하였다.
양전백은 3년간 평양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드디어 1907년 6월 평양 장로회신학교 제1회 졸업생이 되었다(총회를 섬겨운 일꾼들, 김수진, 한국장로교출판사 2005. p.31 참조).

장로회신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 최초 7인 목사 중 한 분
졸업하던 그해 9월 조선야소교장로회 독노회가 처음 조직되었을 때에 양전백을 포함한 장로회신학교 졸업생 7인이 목사안수를 함께 받고 노회원이 되어 내일의 조선교회를 이끌어갈 지도자가 되었고, 그때로부터 선교사들의 보조역할을 초월해 같은 동역자로서, 때로는 동사목사(同事牧師)로 함께 조선교회를 이끌어가는 일꾼이 된 것이다.
양전백 목사는 장로 출신 목사로 평북지방 대리회의 순회전도사가 되어 평안북도 초산, 위원, 강계, 자성지역을 맡아 압록강 건너 편에 있는 즙안, 통화, 회인현까지 관장하였다. 그의 활동력과 실력을 인정한 평앙선교부는 1909년 양전백을 다시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 소속 선천읍교회 담임목사로 그를 정식 임명하였다.

제3회 총회 부총회장 거쳐 제5회 총회장에 선출
1912년 처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조직되자 그는 제3회 총회 부회장으로 선임이 되었고, 노회적으로 총회 안에서 목회자로 교계 지도자로 성장해 가던 양전백 목사는 1916년 9월 2일부터 7일까지 평양 장로회신학교 강당에서 회집된 제5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목사 장로 각각 67명, 선교사 회원 50명이 회집한 가운데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양전백 목사는 평양 장로회신학교 제1회 7인 가운데 조신인으로는 김필수 목사에 이어 두번째로 교단장의 영광스러운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다.
양전백 목사가 피선되었던 제5회 총회에서 처리된 몇 가지 결의안을 살펴보면, 그동안 장로회신학교의 이사(理事)는 미북장로회와 미남장로회, 호주장로회와 카나다선교회 등 4개 선교부에서 파송된 선교사들로만 독점되어 온 것을, 한국교회의 전체를 아우르는 소위 에큐메니칼 정신을 구현해 나가야 한다는 취지로 조선에 장로교와 함께 입국하여 선교해 오고 있는 감리교와 연합하는 공의회(公議會)를 조직하기로 결의했으며, 신학교 이사에도 조선인 목사 3인을 파송 선교사와 함께 참여시켜 신학교를 운영해 가기로 하였다.

교단 소식지 기독신보 창간
이 총회에서 공의회 조직 준비위원으로 총회장 양전백을 비롯, 서기 함태영 목사, 배유지 증경총회장, 배위량 선교사 등이 선임되었다. 뿐만 아니라 교단소식지로 기독신보(基督新報)를 장로교와 감리교가 연합하여 발행하기로 하여 1916년 12월 8일 창간하기도 하였다.
한편 경상남북도를 한 노회로 하던 행정구역을 경북·경남 노회로 분리하기로 의결하였으며, 북평안노회 역시 교세의 증가로 북평안·산서(山西) 노회로 분리하기로 가결되었다(예장합동 제98회 총회 결의요람, 2013 서울, p.13 참조).
양전백 목사는 이외에도 1908년에 선천에 대동고아원을 설립하였으며, 보성여학교도 설립해 선교영역을 확대해 나갔으며, 1911년에는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3년간 민족독립운동가로 옥고를 치루기도 하였다.

105인 사건 연루로 3년간 옥고, 3.1운동 33인 민족 대표
1919년 3.1운동 거사계획에도 동참하여 독립선언서의 33인 서명인 중 기독교 대표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정춘수, 이갑성, 신석구 등과 함께 날인을 해 민족대표자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기도 했다.
출감 후 그는 1927년 조선장로교회 역사편찬의 책임을 지고 전국 각 지방 노회, 대리회를 통해 수집된 자료들을 정리해 총회에서 1928년 출간한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長老會史記)를 집필 중 병고로 1933년 1월 17일 주님의 부름을 받았다.
그의 장례식은 선천기독교연합 사회장으로 성대히 치루어졌고, 그의 사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공로훈장을 대통령장으로 추서하기도 하였다(교회사대사전① 기독지혜사, 강병도 1994, p.540 참조).
그는 한국기독교가 민족교회(民族敎會)임을 몸으로 보여준 행동하는 교회지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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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제5회 총회장 양전백(梁甸伯)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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