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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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안악군 출신
박찬목(朴燦穆 1915.11.4~1979.2.8) 목사는 황해도 안악군 안악읍에서 출생하였다. 박찬목은 1932년 안악읍에 있는 안신학교(安新學校)를 졸업하였다. 젊은 나이에 믿음이 좋다는 평을 듣게 되었고, 교회 영수로 임명되어 시골교회를 돌보다가 소명을 받게되어 목회자의 길을 가기로 다짐하고 1941년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이 평양신학교는 신사참배 문제로 1938년 폐교를 당한다. 이 학교는 목회자 양성을 위해 세워진 학교인데 보통 이 학교를 언필칭 후 평양신학교라 일컫기도 한다.
당시 서울(京城)에서는 김재준, 한경직, 송창근 등이 중심이 되어 조선신학교(朝鮮神學校)가 설립되었다. 여기에 대항하여 1939년 9월 제28회 총회에서 평양장로신학교의 설립을 결정한다. 그러나 일제당국은 김석창, 윤하영 같은 민족주의자가 신학교 운영 책임을 맡은데 대해 불만을 가지고 무허가(無許可)를 빌미로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평양신학교측은 일본 당국과의 마찰을 피해 신학교 운영의 활성화를 위해 서울에 있는 채필근 목사를 교장으로 초빙하였다. 1940년 2월 채필근 목사가 교장으로 취임하였고 조선총독부의 정식 인가를 받아 신학교를 시작하고 당시의 교권(敎權)을 장악하게 된다. 그리하여 ‘후 평양신학교’를 “채필근신학교”라 부르기도 한 것이다.

1941년 6월 대금교회 전도사로 출발
박찬목은 1941년 6월 안악군 대원면 대금교회 전도사 사역을 시작으로 줄곳 38년간의 길고도 먼 목회자의 험난한 십자가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박찬목이 태어나 성장한 황해도 안악(安岳)은 민족운동의 본산지라 할만큼 일제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안악 사건과 소위 105인 사건의 중심인물과 활동 근거지가 바로 이곳 안악이었던 것이다.
안악 사건은 1910년 12월에 일어난 사건이었는데 그 배경은 1910년 8월 한일합방이 이루어졌을 때 국권이 완전히 일제당국으로 넘어가고, 구국계몽운동이나 독립운동을 국내에서 할 수 없게 되자 국외에서라도 독립운동이나 국권회복운동을 하기 위하여 군자금이 필요하게 되자 안중근의 사촌이 되는 안명근 의사가 자기의 고향인 황해도 안악을 중심으로 안악과 해주의 부호들을 상대로 자금을 염출해 내는 일을 진행하였는데 이 사실이 일제에 발각되었다. 이 사건을 일컬어 소위 안악 사건(安岳事件)이라 부른다.
다음으로 105인 사건을 들 수 있는데 일제는 이렇게 공개적으로 혹은 비밀리에 조선민족 독립운동들이 줄기차게 시간과 장소를 구애받지 않고 우후죽순처럼 퍼져 나가자 항일운동의 목표를 꺾어버릴려는 음모를 꾸미게 된다. 그 이유를 당시 신민회 활동의 근절과 기독교를 탄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지도자들 105인을 지목해 반일민족운동 기운을 잡아볼려고 음모한 사실이 후에 탄로나 “105인 사건”이라 칭하게 된 것이다.
사실 이 두 사건은 당시의 신앙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이 혼합되어진 배경이 겹쳐있어 일제당국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사건 속에는 안악지역 민족세력들의 인격형성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고 볼 때 일찍이 기독교 복음을 통해 얻은 민족자의식과 신앙의식의 협동력으로 도출된 결과라고 보여지기도 하는 것이다.

신앙의 자유찾아 월남
박찬목 목사는 한평생 목회자로써 한 길을 매진하였기에 그의 생애사(生涯史)에 큰 굴곡은 없는 것 같다. 그는 1945년 9월 평양 장로회신학교 본과 40회로 졸업, 그해 11월에 황해노회서 목사안수를 받고 안악군 대금교회 전도사를 시작으로 1942년 2월에 해주보안서에 잠시 구금되어 시련을 겪기도 하였다. 이는 북한에서는 기독교신앙의 탄압의 서곡임을 깨닫은 박찬목 목사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 드디어 월남하게 된다.
월남한 그는 전남 광주(光州)로 간다. 1947년 9월 당시 지명으로는 전라남도 광산군 송정읍교회에 부임했다. 이곳에서 1949년 9월까지 사역하다가 1949년 10월 30일 광주중앙교회로 목회지를 옮기게 된다. 당시 광주중앙교회는 자유주의신학, 소위 신신학의 조류가 밀어닥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박찬목 목사에게는 이것을 수습해야 하는 대명제가 가로놓여 있었다.
그후 1959년 9월 서울 염광교회로 임지를 다시 옮기게 되었고, 1959년 5월에는 그의 마지막 목회지가 된 혜성교회로 임지를 옮겨 1979년 2월 64세로 일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열심과 성의를 다해 희생적이고도 모범적인 목회자로 살았다.

목회자, 보수신앙 수호자, 교정가
교회사학자요 언론인 출신 김남식 박사는 박찬목의 사역을 일컬어 목회자, 보수신앙 수호자, 교정가로 그의 탄생 100주년 기념강연회(2015.11.4 혜성교회)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박찬목은 한평생 보수신앙 수호자로 헌신하였다. 일제강점기의 전도사 시절의 구금 사건이나 공산치하에서의 구금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민족주의적 색채보다는 보수적 신앙수호의 자세로 일관했다. 그는 월남하여 목회자로 헌신하면서도 보수신앙 편에 서서 예장합동 교단을 이탈하지 않고 끝까지 남았다.”
1959년 WCC 신학문제로 통합측이 이탈해 나갈 즈음에 총회 서기직을 맡아 서울의 이환수, 부산의 노진현, 광주의 정규오 등이 정치적 또는 사상적 동지였고, 후에는 박형룡 박사의 신학적 지도를 받았다.
당시 선교사들의 후원을 받은 통합측이 WCC를 지지하고 나갔을 때 적은 수의 무리였지만 총회의 정통성을 파수하고 이것을 계승하려는 노력이 전국 각처에서 일어났는데 그 중심에 박찬목이란 거목이 항상 서 있었다. 이러한 그의 자세는 1979년(대구 동부교회에서 모인) 총회 당시에도 이른바 비주류 측이 이탈해 나갔을 때도 잠간이나마 행동을 같이 한 것에서도 그의 이 보수신앙수호의 자세를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박찬목 목사는 순수한 목회자였지만 교회 정치에는 무리하게 활동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1953년에 전남노회 노회장에 피선되었고 그해 9월 제39회 총회에서 회록서기로 피선되었다. 그후 1966년 교단의 분열 파동이 지나간 후 제5회 총회장에 피선되어 교단 정치의 핵심의 자리에 올랐다. 그가 교단정치와 행정에 관여하기는 총회의 서기와 회록서기 자리를 여러 번 오르내리며 봉사하였으나 늘 교단 발전과 화목에 앞장섰다.
그는 총회 임원직 외에도 경기노회장(1972, 1972)으로 1967년에는 총회신학대학 이사로, 1965년에는 기독신문 이사로 봉사하기도 하였다.
그는 월남 후 서울에서 목회할 때는 좀더 공부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어 경희대학교 문리과 대학에 진학하기도 하고, 1973년에는 미국 lmanuel대학으로부터 명예신학박사(Honorary Doctor) 학위를 수여 받기도 하였다.
박찬목 목사가 인도하는 예배와 기도회는 매우 경전하였으며 엄숙하였다. 성도들은 그가 드리는 예배와 기도회에 참여하고 감사하며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 큰 은혜를 받았다고 증언한다.

국내외 선교사업에도 늘 앞장
그는 국내외 선교하는 일에도 늘 앞장 섰으며, 총회가 파송하는 선교사업에는 교회 각 기관을 독려해 기도와 헌금으로 돕는데 앞장섰다.
1977년 1월 14일 심근경색으로 잠시 육체의 고난을 겪기도 했으나 건강을 회복한 박목사는 1979년 2월 4일 주일에 <초점과 그리스도의 존귀>라는 마지막 설교를 했는데, 이 설교가 그의 고별설교가 되었고, 마지막 그의 간절한 기도가 되었다.
지난 2015년 11월 4일 그가 목회를 했던 혜화동의 혜성교회에서 그의 유작 설교집 ‘시대의 경고’가 발간됐다. 이는 현 당회장 정명호 목사의 배려로 재판 복고하는 박찬목 목사 탄생 100주년 기념예배를 위해 준비된 것이다.
그 책의 발행인 정명호 목사는 선임자였던 박찬목 목사를 이렇게 평가했다. 첫째 평양신학교에서 수학한 보수개혁신학에 근거한 신앙운동가로, 둘째 본 교단의 신학적 순수성을 지키는데 헌신한 분이었다고…(시대의 경고, 박찬목 저, 혜성교회 2015 p.5~6참조).
그가 재직했던 제51회 총회 결의안을 살펴보면 △토마스 목사 순교기념예배를 드리다. △이북 출신 교역자들의 중혼 문제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4장 6항의 이혼 조건 두 가지에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해석하다. △채은수 목사를 대만 선교사로 파송키로 결의하다. △세속화 운동에 가담하는 자는 엄중히 처리하기로 하다. △보수교단(본교단, 고신, 예수교성결교) 연합기구를 조직하기로 하다. △헌금통일안을 가결하다. △회의경상비 10분의 1을 상회에 상납하기로 하다.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를 번역 출판하기로 하다.
박찬목 목사의 유해는 원래는 서울 청암교회 묘지에 안장하였다(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뇌조리산 1번지, 박형룡 박사 묘소 오른쪽). 최근 서울 혜성교회 묘지로 이장하였다.
그의 유고로는 1978년 5월 31일 발행된 ‘시대의 경고’란 설교집이 있으며, 2015년 8월 31일 혜성교회에 의해 증보판이 나왔다(참조 자료: 혜성교회 65년사, 광주중앙교회 80년사, 박찬목 목사 탄생 100주년기념예배 순서지 기념강연 김남식 박사 글).
박목사의 슬하에는 2녀1남이 있는데 아들 박윤철은 아버지의 대를 이어 미국에서 목회자로 봉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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