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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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해주 출신
이승길(李承吉·1987.7.13~1965.2.18) 목사는 1887년 7월 13일 황해도 황주군 구성면(九聖面) 서성에서 부 이정건(李正建)과 모 동신행(東信行) 사이에 3남으로 출생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한문사숙에서 한학(漢學)을 수학하였으며 어린 나이에도 비범한 생각과 행동은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1896년 이길함 선교사(Rev Graham, Lee 李吉咸)에 의해 온 가족이 복음을 받고 교회에 발을 디뎠다고 한다. 1901년 헌트 선교사(Rev. William Brewster, Hunt, 1897)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수세 후 그는 황주에 있는 3년제 양성학교에 입학하였고 졸업한 후 평양에 있는 숭실학교 중등과에 진학 1905년에 졸업하였다.
졸업하자 마자 사리원 광성교회에서 운영하는 광성초등보통학교 교사로 봉직하기도 했다. 1908년에는 김구(金九) 등과 함께 해서(海西)교육총회를 설립하기도 하였으며, 이 기관을 통하여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하고 나섰다.
1910년에는 이른바 안명근(安明根)사건에 연루되어 15년이란 징역형을 선고받고 경성에 있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7년을 복역하고 출옥하였다. 출옥 후에도 일본 경찰당국의 감시의 눈길은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이 시대에 있어서 국민들의 올바른 사상지도와 구원의 길은 오직 기독교 신앙운동에 있음을 통감하고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수학한 후 1923년 12월 30세가 훨씬 넘은 나이로 제17회 신학교 졸업생이 되었다. 졸업과 동시에 조선야소교장로회 황해노회에서 목사 장립을 받고 이때로부터 오로지 기독교 복음사역자로서의 노력을 다해 헌신하였다.

한국 기독교계의 거성
이승길 목사는 한국 기독교계의 거성(巨星)이라 할만한 인물이었다. 1936년 9월 11일에서 19일까지 광주양림교회에서 모인 제25회 총회에서 부회장을 거치지 아니하고 총회장에 오른 위인이요, 교계의 존경받는 지도자였다. 그 서슬퍼렇던 일제하 감시의 눈을 피해서 단 한치의 흔들림 없이 총회를 무사히 이끌어 갔다. 이듬해 1937년에는 예수교장로회 평양노회 노회장으로 1935년에 이어 노회장으로 재선되어 어려웠던 시기에 노회 역시 은혜롭게 이끌어 가는 지도자의 면모를 나타내 보이기도 했다.
1935년부터 일제 당국은 한국교회를 향해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강요해 옴에 따라 당시 평양노회 노회장이었던 이승길 목사는 이를 반대하는 임시노회를 개최,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결의를 하였다. 이 일로 인해 이목사는 일경(日警)에 연행되어 평양경찰서 고다니 서장과 담판하는 평양교회의 선봉에 서서 맹렬하게 투쟁하였다.
이승길 목사는 대한예수교장로회 교단과는 떼어 놓을래야 떼어 놓을 수 없는 교단역사에 뚜렷하게 각인된 지도자요 인물이다. 그는 목회자로 교정가로써만 평가할 수 없는 특출한 초기 한국교회의 지도자이기 때문이다.

7년의 옥고와 예비검속 등 무려 38회나 잡혀가
총회 100년 역사 가운데 43년 간의 목회자로서 성공적인 영적 리더십을 발휘했을 뿐만 아니라 총회장과 서기로 2회, 평양노회를 비롯해 노회장으로 12회, 부노회장으로 4회를 역임하였다. 또한 일생을 통하여 일본 경찰에 의해 일이 있을 때마다 예비검속 되거나 독립운동과 신사참배 반대의 건으로 구속되기도 하고, 때로는 유치장으로, 때로는 형무소 드나들기를 무려 38회나 되는 이력을 지닌 애국자요, 기독교의 진리사수를 위해 몸을 사리지 아니하고 항상 선두에 선 인물이다. 일제패망 직전에는 소위 정방산(正方山)사건으로 일본 헌병대에 붙들려 가 투쟁하는데 고난을 받기도 했다.
1945년 초 일본 헌병대에서 평양형무소로 이감되어 형 집행만을 기다리고 있던 중 1945년 8월 15일 광복으로 출옥해 고향인 황해도 황주군 겸이포읍으로 돌아왔다. 옥고 후의 후유증을 치료하는 일도 잠시였고 우리나라 상해(上海)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김구 선생의 귀국으로 경성으로 올라가 잠시 경교장(京橋莊)에 머물고 있던 김구 선생을 보좌하였다.
이승길 목사는 이렇게 애국운동에 몸을 담기도 하였으나 정치에서 손을 떼고 다시 본업인 복음전파 사역에 투신하기로 결심하고 집으로 돌아와 평양 대동강에서 순교의 피를 흘린 토마스 선교사를 기리는 기념전도단을 조직하여 복음이 미치지 못한 황해도 연안인 옹진지방을 복음전파 지역으로 설정하고 전도여행에 나섰다.

‘토마스기념전도단’만들어 황해도 지역 복음전도
당시 동참했던 전도단원으로는 이승길 목사를 비롯, 김낙영 목사, 이삼성 목사, 악기를 연주할 수 있는 수명의 청년들로 구성되었다. 이렇게 조직된 ‘토마스기념전도단’은 6.25동란이 일어난 1950년 6월까지 2년여 동안 그 어려운 교통사정과 단원들의 숙소문제 기후조건을 극복하면서 오직 죽어가는 내 동족을 말씀으로 구원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연백, 옹진 전 지역을 두루 다니면서 전도한 결과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는데 이르렀고, 도합 14개처 교회를 세우는 열정을 발휘하였다.
대표적인 교회들로는 본영교회, 한동교회, 용천교회, 연평교회, 부토리교회, 연안읍교회 등이다. 이 때에 전도 받아 복음사역에 헌신한 대표적인 청년들이 이삼성 목사, 정문호 목사, 전종훈 목사(학익교회), 박용규 목사(전 성남교회) 등이 있다(인천제2교회40년사 p.165~166참조).
이승길 목사는 해방을 맞이할 당시엔 겸이포중앙교회에 시무하고 있었지만 3.8선 이북은 소련군이 진주하여 김일성을 앞세워 괴뢰정부 수립을 시도함에 따라 정상적인 자유로운 목회를 할 수 없게 되자 월남을 결심, 1948년 신앙의 자유를 찾아 인천에 자리를 잡았다.
고향땅을 등지고 내려온 교인들을 중심으로 믿음의 둥지(교회)를 인천항에 자리를 잡게되었다. 1949년에는 고향땅을 등지고 월남한 황해도 출신 목사들과 함께 황남노회를 조직해 초대 노회장이 되기도 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잠시 부산까지 피난을 가기도 했으나 9.28수복으로 인천으로 돌아와 현재 통합측에 속한 인천제일교회 교인 일부가 나와 1951년 인천제2교회를(현 예장합동) 설립하고, 1955년 11월 6일 위임목사가 되어 1965년 2월 18일 79세를 일기로 주님의 부름을 받기까지 한 교회에서만 목회 하다가 은퇴하였다.
그가 25회 총회장 재임시에 결의된 안건들을 잠시 살펴보면 ① 종교교육부가 청원한 <기독교보>를 총회 기관지로 할 것을 결의 하다. ② 불신자가 집필한 신편 창송가 발행은 불가하다. ③ 경북노회 분립건(경북·경동)은 허락하기로 하다. ④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구역을 철폐하기로 가결하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그 순간까지 성실한 목회사역을 감당하여 후배 목사들에게 귀감이 되는 지도자로 살았다. 1977년엔 그의 나라를 위한 애국충정과 지도력을 인정받아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우리시대의 전형적이고 모범적인 목회자요 교정가(敎政家)였다. 지금의 인천제2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이건영 목사는 그의 손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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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제25회 총회장 이승길(李承吉)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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