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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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해도 연백 출신
한명수(韓明洙, 1933.12.5~2012.3.25)목사는 평양 다음으로 기독교세가 강했던 지금은 망향의 땅이 된 황해도 연백에서 1933년 섣달에 태어났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대개가 비슷했지만 어린 명수에게도 어린 시절은 행운아가 아니었다. 고향에 있는 국민학교를 나와 백천(白泉)중학교에 진학 공부하던 중, 18세 되던 해에 미래를 꿈꾸던 소년 명수는 3.8선을 넘어 단신 월남하였다. 그때가 한창 6.25전쟁이 발발하여 북한의 인민군대가 부산을 향해 밀물처럼 밀려 내려오고 있던 와중이었다.
1951년 4월 20일 대한민국의 땅 강화도였다. 그는 그곳에서 고아 아닌 고아생활을 하며 연명을 하고 있었는데, 1952년 전효순이란 이웃에 사는 교회 권사의 전도를 받고 기독교에 입신(入信)하게 된다. 담임 이병설 목사에게 학습(學習)을 서고 당대의 부흥목사였던 박용익 목사에게 세례(洗禮)를 받았다.
한명수는 어릴 때 꿈이 있었다. 그것은 유명한 기계체조 선수가 되어 국가를 빛내야겠다는 것과 통일은 내가 이룩해야 겠다는 결심을 하고 군(軍)에 입대해 위험한 적진 후방에 투입되어 아군진지를 구축해야 하는 특수부대(겔로부대)에서 3년간 군생활을 한 것이었다(한명수, 하나님이 너무 오래 참으셨지요? 1993 참조).

장로교에서 세례받고 감리교에서 신앙생활
그가 처음 기독교에 입교해 군생활하는 청년기의 신앙생활은 감리교회에서였다. 군대생활을 하면서 여러 위험한 경우를 만날 때마다 주님에게 매달렸고 군생활을 하던 중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처음 입학한 신학교가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3가 35번지 언덕배기에 자리잡고 있었던 기독교성결교회 총회 직영신학교였던 서울신학교였다. 당시 국내 신학교 가운데 총회신학교 다음으로  보수적인 학교가 서울신학교였다.
군복을 입고 서울근고에 있는 군부대와 학교를 오가며 보통사람들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두 가지 업무를 훌륭하게 감당하였다. 주위에서는 감리교신학교로 가야 한다고 원하는 지도자들도 있었으나 당시 전국적으로(초교파적으로) 유명했던 이성봉 목사, 이명직 목사, 김응조 목사 등이 서울신학교 교수로 있었던 부흥사로써 명성을 잘 알고 있었기에 혼자 교단을 뛰어넘는 결단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즈음 1957년 1월 황연숙과 결혼하고, 서울신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총회신학대학에 편입, 개혁주의 신학과 목회론을 접하게 되는 일대 개인적인 인생과 목회의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때가 1964년도였다.

수원 상이군인 마을에 교회 개척
그 때 경기도 수원시 연무로 26지역에 6.25전쟁의 와중에서 부상을 입은 제대군인들과 남편과 아들을 잃은 전쟁 미망인들이 공동체를 형성해 살고있는 소위 상이군인 마을로부터 교회개척 의사를 밝혀와 그해 4월 26일 전도사 신분으로 후에 평생사역지가 된 오늘의 <창운대교회>의 개척 깃발을 꼿게 된 것이다.
아직 목회가 무엇인지 교회의 본질을 채 체득하기 전의 일이었던 것이 가난하고 의지할대와 위로와 돌봄이 필요했던 전쟁미망인들을 위한 원호교회로 출발한 것이었다. 당시에는 어느 교단 어느 교회나 지방회에도 가입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친구들과 주위의 장로교회 지도자들의 돌봄과 권고로 개척한 이듬해 1965년 10월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함남노회에 정식으로 가입, 감리교회 신자에서 성결교회 서울신학교와 예장 합동소속 총회신학교를 거쳐 드디어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소속 목사가 된 것이다.
그는 느즈막하게 목회를 시작했지만 학구열만은 열화같이 타 올랐다. 창훈대교회 주변의 도시화 현상으로 교회도 성장해 안정을 찾게되자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에 진학, 상담심리학으로 문학석사(M.A)학위를 받았다. 그가 상담심리학을 택한 것도 목회하면서 교인들의 정신적 육체적인 문제만 아니라 신앙적인 문제를 이해하고 도와주기 위함이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미국 Fuller신학대학원으로 가서 목회학박사(D.Min)과정을 이수하였다. 이 역시 목회사역에 일어나는 여러가지 문제 해결을 위한 일연의 노력이었다.

끊임없는 학구열로 목회학 박사학위 취득
한명수 목사의 목회철학을 잠시 살펴보면, 첫째 지역사회 봉사, 둘째 조국통일독립, 셋째 말씀의 세계화(창훈대교회50년사 2014. p.69)이다. 이같은 비젼(Vision)을 수행하기 위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수 1:7)는 실천사항이 있으며, 성숙한 성도 양성을 위해 지켜야 할 7가지 신앙생활 신조를 제시하고 있다.
① 성품-성도는 거룩해야 하고(레19:2) ② 성경-부지런히 성경을 보고(행19:11) ③ 기도-힘써서 기도하고(엡6:18) ④ 주일-거룩히 지키고(출20:8) ⑤ 십일조-온전히 드리고(말3:10) ⑥ 전도-열심히 전도하고(딤후4:2) ⑦ 생활-동정하는 자가 되자(딤전6:18) 라는 구체적인 실천항목을 제시하며 평생을 목회하였다.
그의 교회관을 잠시 언급해 보면, 21세기에 접어들면서 한국교회 성장의 둔화 모습을 보면서도 한국교회는 세계선교를 이끌어갈 중심역할을 할 것으로 보았으며, 지도자들과 한국교회를 섬기는 이들이 어떠한 보상도 기대하지 아니하고 온전히 봉사의 직분으로만 다짐한다면 가능하다고 보았다.

“한국교회 미래는 목회자의 책임”
그의 저서 <한국교회에 보내는 속달편지>에서 첫째, 한국교회의 미래가 목회자의 책임이라고 볼 때, 목회자들은 성도들의 지적을 겸허히 수용해 교회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노력하고 헌신해야 한다. 둘째, 목회자의 사모는 종가집 맏며느리처럼 교회의 구석구석을 살피며 궂은 일을 돌보며 교회가 평안하고 화기애애 하도록 도와야 한다. 셋째, 장로의 직분은 교회와 성도들을 가장 잘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넷째, 재정부장은 투명한 재정집행으로 겸손한 자세로 심부를 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다섯째, 한국교회에는 여성이 많은데 이는 남성들이 가정을 신앙으로 관리하지 못하는 책임의 결과이다. 여섯째, 평신도들도 교회에 할말을 해야 한다.
한명수 목사는 한국교회의 대형화와 귀족화는 대중에게 괴리감을 주는 결과가 되므로 외적 성장 중심에서 내적 성장으로 지향할 것을 주장하였다(창훈대50년사 같은 책, pp.62-63)
한명수 목사의 국가관은 그의 고향이 3.8 이북이서만은 아니겠지만 통일지향적이다. 그로 인해 종종 한 목사는 죄파적이 아닌가 의아해 하는 이들이 더러 있었다. 한미동맹에 대해서도 당시 시대상황으로 인해 불가피한 것이었지만 그것이 호혜평등원칙에 입각한 상호방위 개념으로 존재해야 하는 것이지 종속적 동맹 및 지배구조의 조약으로 이어졌거나 일방적으로 변절되는 경우 거부되어야 하며, 동족만한 우방은 없다는 원초적 이유에서 남북공조와 친북은 그 어떤 국제관계 보다도 우선시 되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
동시에 남북공조를 좌파시 하거나 반미 혹은 비애국적으로 폄하하려는 풍조는 그 자체가 외세의존적 사대주의이므로 결코 용납되어서는 안된다고 보았다.

KLO부대 출신 반공투사
한 목사는 이북 고향에 계신 부친이 남한의 첩보원을 도와주고 숨겨 주었다는 죄목으로 내무서원에 발각되어 심한 고문을 받아 지팡이로 몸을 의지해 다닌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한 목사는 이에 복수심에 볼타 즉시 미8군 극동사령부 소속 K.L.O부대(속칭 캘로부대)에 자원입대 해 휴전 직전까지 수차례 북녘땅을 드나들며 반공투사 역할을 했다. 이런 와중에 주님의 부름을 받고 전도사가 되었고 그 정의감을 신앙의 정의로 승화시켜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러한 그의 행적을 알게되면 그가 주장하는 민족통일과 동족간 화합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다고 보여진다.
그이 생존시 교계(노회와 교단 및 타교단)의 활동영역을 보면 그의 신앙철학을 읽을 수 있다. 지역사회를 위해서는 수원 YFC 이사장(1977), 수원기독교연합회장(1979), 경기도청자문위원 및 법무부 수원교도소지도위원(1984), 경기도경찰청경목위원(1977)(2001), 수원노회장(14대), 예장총회선교부 총무(1975), 기독신문 주필(1995~1999), 예장총회 부회장(2002), 총회장(2002~2003), 수원신학교 교수(1997~2004), 총신대 재단 및 운영이사(1981~2003).

한기총 초대 총무 등 교계 연합활동 활발
기독교계를 위해서는 한기총 초대 총무(1989), 한국찬송가공회 대표회장(2001~2004), 교단장협의회 상임대표(2002), 한국교회부활절연합예배 대회장(2003) 등이다. 그의 활동범위는 가히 전천후적이며 그 흔적이 뚜렷하다.
그가 재임했던 제87회 총회의 결의안을 일별 해보면, ① 기독교영성훈련원(대표 박철수)와 교류를 금하기로 하다. ② 예장혁신총회 남서울신학교는 이단성 있는 단체로 규정하다. ③ 대신대, 칼빈대, 광신대 신학대학원(M.Din) 졸업자들은 심사후 총신대신대원 편입 1년간 30학점을 이수토록 하다. ④ 중·경기노회 분립키로 하다. ⑤ 서울노회를 분립키로하다.(서울·서울북) ⑥ 사회법정에 교단문제를 상습고소자는 엄중 징계하기로 결의하다.
한명수 목사는 자신과 민족이 겪은 6.25전쟁을 겪고 어려운 처지가 된 전쟁 미망인들과 고아들을 위해 창훈대라는 신앙공동체 안에 불러들여 한평생 한 교회를 위해 자기의 능력과 소신 그리고 신앙의 열정을 불태운 정의감이 넘치는 지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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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제87회 총회장 한명수(韓明洙)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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