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게일선교사가 번역, 출판할 때 당대 최고의 화가 기산 김준근 화백이 한국적 예수와 기독도를 그려내며 기독교미술의 새 장을 열었다.
1919년생인 혜촌 김학수 화백은 어린 시절부터 기독교 전파의 역사를 직접 체험한 산 증인이다. 초창기의 한국기독교의 중요한 교회들과 기독교 기관들의 건물을 화폭에 담기도 했고, 또한《예수의 일대기》,《순교와 박해》시리즈를 남겼다. 특히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박해의 모습을 담은 그림들은 지금도 보는 이를 섬뜩하게 한다.
그러나 기독교 화가라고 그림이 기독교 성화만 그리는 것이 아니었다. 고난속에 있는 민족을 따뜻하게 품고 그들의 삶을 진솔하게 드러내고 표현하여 대중적으로 사랑받게 한 민족화가가 바로 박수근 화백이다.
1914년 강원도 양구(楊口) 출생에서 출생한 박수근 화백은 교회에서 은혜를 받고 목회자가 되기를 소원했던 12세 때 밀레의 '만종'을 보고 자신도 그와 같은 화가가 되어 그림으로 복음을 전하고자 결심하게 된다. 그후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계속하여 18세인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수채화 <봄이 오다>로 입선을 하게 되었고 이후 거듭 선전에서 입선하였다. 화가로서 그의 삶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고 다채롭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물론 어린아이들의 이미지를 가장 즐겨 그린다."
이것은 박수근 자신의 철학과 그림에 대한 생각이 담긴 유일한 말로 여기에서 그의 작품의 주제와 특징의 근간을 엿볼 수 있다.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근대사를 산 소박한 우리네 서민의 일상적인 모습이다.
“혼자서 밀레와 같은 훌륭한 화가가 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드리며 그림그리는데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최근 35억에 판매된 이중섭의 <소>와 박수근의 <소>는 대비되며, 농촌 화가의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게 한다.
박수근의 생활 속에서 외면할 수 없는 동물이 소였다. 소를 무리지어 그리기도 하고 단독으로 그리기도 하고 앉아있는 소, 서 있는 소, 왼쪽을 바라보는 소, 오른쪽을 바라보는 소를 그리기도 했다. 수근은 어릴 적부터 소의 적합한 형태를 찾기 위해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종이가 귀하던 시절, 나무에 기름을 먹인 분판에 먹으로 그림을 그리고 지웠다. 갱지나 타자용지에 몽당연필로 소를 그리기도 했다. 여러 번의 드로잉을 거쳐 ‘박수근의 소’가 탄생했다. 그의 예술이 농익은 무렵 내놓은 회심의 작품에 소가 등장한다. 소는 휴식을 하고 있다. 편안하고 여유롭다.
자신의 삶에 묵묵히 소처럼 살아가는 작품<소>에서는 숭고한 기운마저 느끼게 한다. 이렇게 표현된 그의 작품은 수근 자신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인지 '선함과 진실함'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박수근의 <소>는 화강암의 거친 질감을 화폭에 옮겨왔고 그 위에 공간감을 무시하고 극히 단순한 형태와 선묘를 이용한 평면화된 대상을 모노톤의 색채로 그려내어 마치 바위에 각인된 듯한 이미지로 표현했다.
평생 가난에 시달렸으며 자신의 화실조차 가지지 못했고, 개인전은 꿈도 꾸지 못했던 화가 박수근. 목회자의 심정으로 평생 그림을 그리며, 그 그림에 일생을 바친 화가였다. 그래서인지 그의 그림들은 인위적이지 않으며, 진실하고 다정다감하여 그속에 서민들의 사랑이 흐르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사랑받고 있다.
성직자가 되지 않고 화가가 되어 그린 그의 작품들은 오늘날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으며, 가장 인기있는 화가이자 그림의 호당 가격이 3억에 이르는 가장 비싼 작품값을 기록하고 있음은 우연일까?
한국의 기독교 미술의 새 장을 연 김준근, 김학수 그리고 한국의 미켈란젤로 김기창, 한국의 밀레 박수근, 이렇게 4인은 서민의 일상을 소박하게 담아낸 향토성 짙은 작품들로 가장 한국적인 기독교 현대 회화를 한 단계 끌어올린 최고의 화가들로 기억되어야 한다.
기독교 미술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평가가 필요한 시점이다. 복음의 본질은 시대와 장소를 달리하고, 문화와 문화가 충돌하는 속에서도 결코 변하지 않는 진리이다. 변하는 것은 다만 그 복음의 진리를 담아내는 문화적 용기(容器)라는 외형일 뿐이다. 이와 같이 진리의 본질은 결코 변하지 않지만 그 외형은 다양한 문화 속에서 각기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