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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론회 논평] 군인들에게 사적 공간을 어디까지 인정해야 하나?
    지난해 11월 국방부는 ‘군인징계령 시행규칙 일부개정령안’을 입법 예고하였다. 그에 따르면 군인들의 징계 사유 중 (성)‘추행’을 포함하여 군인, 군무원에 대한 동성 간 항문성교나 구강성교, 그 밖에 유사한 행위에 대하여 처벌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이는 현재 군형법 제92조의6에 의한 것으로, 당연한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지난 해 4월 대법원(대법원장 김명수)에서 판결하기를, 남성 장교와 남성 부사관 사이에 사적 공간(영외 독신자 숙소-군 부대 재산)에서의 군인 간 성행위는 처벌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다수 의견 13명 중 8) 이에 국가인권위원회가 ‘사적 공간에서 자발적 의사 합의에 의한 동성 간 성관계는 징계에서 제외하라’는 의견을 냈으나 국방부는 합의 여하와 관계없이 징계한다는 시행령을 내었다. 그런데 이에 대한 편향된 외부의 압력에 의하여, 최근에 국방부가 ‘사적 공간에서 합의된 성관계는 벌하지 않는다’는 문구를 넣는 방안을 검토한다 하여 논란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군인들에게 사적 공간을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가? 영내(營內)가 아닌 영외(營外) 숙소도 사적 공간은 아닐 것이며, 또 휴가를 간 곳에서의 모든 행동도 군인의 행동이지 민간인의 행동은 아닌 것이다. 만약 군대 영내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동성 간 성행위가 있었다 하더라도, 요즘은 스마트폰에 동성애 앱을 깔아 동성애자들끼리의 연락과 연결이 용이하고, 또 그것이 같은 부대나 인근 부대라면 동성애 행위는 계속될 수 있다. 따라서 단순히 영내냐, 사적 공간이냐는 큰 의미가 없다고 본다. 왜 군대 내 동성애를 금하는 것인가? 가장 중요한 것은 전력(戰力)의 손실일 것이다. 동성애자들은 일반적으로 여러 가지 질병에 노출되어, 언제나 전투력을 갖춰야 할 병사들에게는 치명적 약점이 될 수 있다. 또 군대는 상명하복(上命下服)의 조직이기 때문에 겉으로는 쌍방 합의라고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상관에 의한 위압으로 동성 간 성행위를 막을 수가 없다. 현행, 군대 영내에서 이성 간에도 아무리 합의에 의한 성행위라도 발각 시 징계를 받는데, 하물며 동성 간 성행위가 여러 가지 부작용을 일으킬 것이 뻔하다. 때문에 동성 간 성행위를 예외로 하는 사적 공간을 인정한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그리고 이런 예외 규정을 두면 우리 자녀들이 동성 성폭력에 심각하게 노출된다. 이를테면 고참병이나 상관이 후임병이나 부하에게 휴가나 외출 날짜를 맞추게 하고, 이를 합의로 가장한 동성애를 요구할 경우, 그 병사들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 부모들이 자기 자녀를 군대에 보낸 것은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다하라고 보낸 것이지, 동성애의 피해자가 되어 돌아오라고 보낸 것이 아니다. 현재 이런 징계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군형법상 추행죄를 폐지하라고까지 주장하고 있다. 하나를 허용하면 두 개, 세 개, 나중에는 모든 것을 내주어야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 이래서는 안 된다. 저들은 차청차규(借廳借閨-대청을 내주면 안방까지 밀고 들어옴)하려 들 것이다. 국방부는 군대 내 ‘추행’ ‘성희롱’ ‘성폭력’ ‘동성 간 성관계’(합의든 강제이든) 등을 엄격하게 징계하여 군대 내 질서를 유지할 뿐 아니라, 병사들과 하급자들의 인권과 안전을 보장해야 한다. 군인들에게 ‘영외’ 혹은 ‘사적 공간’과 같은 어설픈 예외 규정을 둘 때, 병영문화는 위험해지고 병사들을 동성에 의한 성폭력으로부터 막아내기 어렵게 될 것이다. 국방부는 군대 내 불합리한 동성 간 성관계에 대하여 미온적인 태도로 국가의 미래를 어렵게 하고, 젊은 병사들을 동성애 공포로부터 지켜내지 못한다는 비난을 듣지 말아야 한다. 지금 전 세계가 동성애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제는 우리나라에서도 신성한 국방의 의무 자리까지 ‘평등’이니 ‘행복추구권’이라는 빌미로, 국가 안보까지 무너트리려고 한다. 국방부는 편향된 시각으로 동성 간 성폭력과 국가 안보를 무력화하고 조장하려는 주장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된다.
    • 칼럼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3-03-13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상남자보다 중요한 것은··· ”
    수요일 저녁 예배에 갑작스럽게 미국 뉴욕에서 목회를 하시는 김성국 목사님이 오셔서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분은 퀸즈 장로교회 장영춘 목사님의 지도아래 목회 훈련을 받고, 아주 충직하게 부목사 생활을 하였던 분입니다. 장영춘 목사님은 뉴욕에서 목회를 하시면서 디아스포라 세계 한인 목회자들을 하나로 묶는 세미나와 포럼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때 저희 교회도 적지 않은 후원을 해 주었는데요. 한번은 장 목사님이 한국에 오셨다고 해서 제가 식사를 대접했는데, 다음날 캄보디아로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님 얼굴이 밝아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캄보디아에 가지 마시고, 한국에서 쉬셨다가 미국으로 가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캄보디아 선교지에 꼭 가야 된다고 하시며, 그 마음을 꺾지 않으시고 가셨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소식을 들었습니다. 캄보디아에서 뇌졸중이 와서 급히 미국으로 가셨다고 말입니다. 전화를 해보니까 언어도 불편하신 듯 느껴졌습니다. 사모님께 자초지종을 들으니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런데 중풍에 어떤 특수 약재가 정말 효과가 있다는데, 미국에서 구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 얘기를 들으니까 더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그래서 어찌어찌해서 그것을 하나님 은혜로 구하여 오전 비행기를 타고 뉴욕까지 갔습니다. 제가 갔더니 목사님이 너무 감격해서 막 눈물을 흘리시는 것입니다. “소 목사님이 의리가 있고 신의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토록 상남자인 걸 몰랐습니다. 그간 한인 목회자를 섬겨준 것도 감사한데, 약재까지 가져온 게 너무나 고맙습니다.” 저는 그 분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 드리고, 그날 저녁 비행기로 다시 왔습니다. 돌아와서 계속 전화로 확인해 보니까 그걸 드시고 아주 좋아지셨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 세월이 흐르고, 그 일은 세월 속에 묻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장 목사님을 모시고 부목사를 하다가 퀸즈 장로교회 담임 목사가 되신 김성국 목사님을 대면하니까 그때의 일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김 목사님도 “온 교인들이 소 목사님의 그 헌신과 섬김에 위로를 받고 큰 힘을 얻었습니다. 정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라고 설교 서두에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때 장 목사님께서 하셨던 그 한마디가 요 며칠 동안 계속 뇌리에 스쳐 갔습니다. 그 단어는 바로 ‘상남자’라는 단어입니다. 돌이켜 보면, 저는 상남자의 길을 걸어왔다고 자부합니다. 항상 약자를 보면 보호해 주고 싶고, 지켜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강자 앞에 전혀 굴하지 않는 용기와 패기가 넘쳤던 사람이었고, 무엇보다 의리와 신의를 중히 여기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오죽하면 한동안 우리 교회 당회에서 “믿음이 없으면 의리라도 있자”를 슬로건으로 삼았겠습니까? 모름지기 남자로 태어났으면 상남자가 돼야 합니다. 대장부가 돼야 합니다. 제가 키는 작아 어찌 보면 소인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저의 가슴 안에는 대장부의 심장이 꿈틀거리고 있고, 대장부의 기상과 결기가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그것이 전부가 아니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이 뇌리를 스쳤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것이고, 하나님의 종으로 사는 것이라고요. 그런데 하나님의 종이라면 무엇보다도 소명감으로 가득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요즘 하나님께서 저에게 온유와 겸손의 훈련을 시키십니다. 옛날 같으면 누가 저를 욕하거나 비방을 하면 당장 찾아가거나 전화를 했을 것입니다. 버럭 화를 내며 “왜 그러냐”고 그럴 텐데, 요즘은 그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참는 훈련, 또 온유 훈련, 겸손 훈련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제가 누구보다 배짱이 있고, 용기와 결기가 가득한 사람이잖아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참아야 할 때는 참고, 온유해야 할 때는 온유하게 만드십니다. 어느 현인의 말처럼 말이 되지 않는 사람과 말을 섞으면 ‘실언(失言)’을 하게 되고, 말이 되는 사람과 말을 하지 않으면 ‘실인(失人)’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이 되지 않는 사람들과는 아예 말조차 꺼내지 않으셨던 것을 보지 않습니까? 글을 쓰는 이 시간, 상남자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종이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가슴속에 새겨봅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3-03-12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봄의 약속은 어디서 오는가
    “이제 곧 봄이 오려나봐 / 너는 웃고 있는데 / 난 이별의 말을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 겨울나무도 아무 말이 없어 / 숲 속 나무의자에 앉아 / 우리가 함께 지나온 시간들을 회상하는데 / 바람이 분다 / 꽃이 나만 홀로 남겨놓고 / 산을 내려가네 / 나는 산에 있고 / 꽃은 마을로 간다.” 이 시는 제가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 쓴 시집, ‘꽃으로 만나 갈대로 헤어지다’에 나오는 ‘꽃’이라는 시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꽃은 김춘수의 꽃과는 반대되는 꽃입니다. 김춘수의 꽃이 시적화자와 연결이 되고 관계를 맺는 꽃이라면, 이 시의 시적화자는 꽃과 분리되어 잠시지만 스스로 고독과 고립을 숙명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스스로 꽃과 분리되어 망각의 시공간 속으로 은둔하고 싶어 하는 자아입니다. 코로나의 공포감과 우울함 사이에서 고뇌하는 시적화자는 잠시 어떤 위로와 관계 맺음보다는 오히려 외로움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어느 곳으로도 피할 수 없고, 누구도 믿을 수 없는 폐허와 같은 세상 속에서 혼자 남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죠. 사실 이 모습은 꼭 시적화자의 모습이기 전에 현대인의 모습을 묘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가 여기서만 끝나면 시가 아닙니다. 여기서 시는 반전이 있어야 합니다. 꽃이 나만 홀로 남겨놓고 산에서 내려가 버리는 것이죠. 그래서 얼핏 보면 꽃과 나는 완전히 분리되어 나는 산에 있고 꽃은 마을로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꽃이 마을로 내려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들에게 봄이 확실하게 오는 것이 아닙니까? 코로나 때문에 갈대처럼 헤어져 고립되고 황폐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사이로 화사한 꽃들이 내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서로 꽃으로 만나서 그들 스스로가 꽃이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시적화자도 어쩔 수 없이 꽃과 합일이 되어 마을로 내려가서 꽃으로 만나고 꽃과 같은 세상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꽃’이라는 시는 그냥 서정성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언자적 요소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19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갈대처럼 헤어져 고독을 숙명으로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언젠가 반드시 우리는 꽃으로 다시 만나 화해의 봄, 희망의 봄, 미래의 봄을 함께 맞게 될 것을 노래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봄은 반드시 옵니다. 아니, 코로나 팬데믹도 끝나고 이미 봄은 왔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거리에 보면 마스크를 쓴 사람도 많고, 안 쓰다가도 사람들이 가까이 오면 또 쓰기도 합니다. 또 실외에서는 마스크를 안 쓰다가도 실제로 행사장에서는 다시 다 쓰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 다 마음으로는 산으로 가는 것입니다. 올 겨울은 유난히 길었습니다. 혹독한 날씨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의 혼란과 갈등이 우리 사회를 겨울왕국으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난방비 폭탄이 터지고 물가가 상승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더 얼어붙게 하고 있습니다. 저도 올겨울에는 코로나 때에도 꿈쩍하지 않았던 고뿔이 들어서 힘겨운 싸움을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잠을 잘못 잔 탓에 약지 손가락의 마비가 아직도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분명히 봄은 옵니다. 어떤 추위도, 어떤 겨울도, 심지어 아무리 꽃샘추위가 오고 봄을 시샘한다 하더라도 봄은 옵니다. 앞으로도 한 번쯤 더 눈이 올지 모르고 또 꽃샘추위가 올 것입니다. 그것이 아마 겨울을 더 길게 할지도 모릅니다. 특별히 여기저기서 들리는 뉴스와 사건, 사고들이 우리의 겨울을 더 길게 할지도 모릅니다. 한국교회 역시 말도 안 되는 가짜뉴스와 헤이트 스피치 등으로 갈등과 분열의 골을 더 깊게 할지도 모릅니다. 그런 거짓을 생산하고 조장하는 사람들도 문제지만 또 그것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도 문제입니다. 사실을 직접 알아보지도 않고 무조건 거짓뉴스에 현혹되어 레밍효과나 쏠림현상이 나타나면서 한국교회의 겨울은 더욱 길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봄은 옵니다. 그냥 날씨가 따뜻해져서 봄이 오는 게 아니라 꽃송이 하나로 봄이 오지요. 매화가 됐든, 목련이 됐든 분명히 제일 먼저 핀 자그마한 꽃송이 하나로 봄이 올 것입니다. 저는 그 꽃송이 하나 피우기 위하여 지금도 앙상한 숲 한 가운데서 연둣빛 봄을 꿈꿉니다. 봄길은 차가운 겨울 숲에서 시작하고 봄의 약속은 겨울의 소원에서 시작하는 것이니까요.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3-03-05
  • [국독연 칼럼] 강성률 목사의 ‘기도의 능력’
    “이 밤에 왕이 잠이 오지 아니하므로 명하여 역대 일기를 가져다가 자기 앞에서 읽히더니 그 속에 기록하기를 문 지킨 왕의 두 내시 빅다나와 데레스가 아하수에로왕을 모살하려 하는 것을 모르드개가 고발하였다 하였는지라.”(에6:1-2). 에스더서는 ‘하나님’ ‘여호와’라는 단어가 한 번도 나오지 않는 책입니다. 하지만 총 10장까지밖에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곳곳에 하나님의 숨결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책입니다. 오늘은 본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기도한 백성들에게 어떤 은혜를 베푸시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여기 나오는 ‘이 밤’은 아말렉인 하만이, 자신에 대하여 신임이 두터운 페르시아 제국의 대왕 아하수에로왕에게 모르드개의 목을 구하고자 왕궁 바깥뜰에 나선 날 밤이었습니다. 하만은 한갓 궁지기 신분의 모르드개가 제국 서열 두 번째인 자신에게 절은커녕 무릎도 꿇지 않는 것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22.5미터 높이 되는 나무에 그를 달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이미 그는 아하수에로왕 12년 12월 13일에 모르드개를 포함하여 유대인을 전멸시키도록 왕으로부터 허락 받았지만(에3장), 아직 1월이었기에 당장 모르드개를 처형하지 않는다면 11개월 만큼 더 자신 앞에서 미동도 없는 모르드개를 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왕과 하만은 왕후 에스더가 유대인이며, 모르드개가 딸처럼 양육하였던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왕의 어인이 찍힌 조서대로 한다면 에스더도 유대인이기 때문에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에스더는 그 점을 파고들었습니다. 유대인을 멸하면 자신도 유대인이기 때문에 도매금으로 죽임을 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왕에게 호소하면서 하만의 만행을 고소할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나라 법은, 왕이 부르기 전에 궁전 안뜰로 들어가 함부로 왕에게 나아가면, 남녀노소 누구든지 죽음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한 가지 살길은, 왕이 자기 앞으로 나아오는 자를 향하여 금으로 만든 홀을 직접 내밀어 주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때 아하수에로왕은 한 달 동안 왕후 에스더를 부르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에스더는 유대인 모두가 죽게 된 상황에서 마냥 있을 수 없었습니다. 모르드개를 통하여, 도성 수산궁에 있는 유대인들이 사흘간 그녀를 위하여 금식하도록 청하였습니다. 자신도 시녀들과 함께 금식한 후 “죽으면 죽으리라.” 결심하고 왕 앞으로 갔습니다(에5:16-17). 하나님께서 아하수에로 왕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셨습니다. 왕의 눈에 에스더를 무척 사랑스럽게 보이도록 한 것입니다. “왕후 에스더가 뜰에 선 것을 본즉 심히 사랑스러우므로 손에 잡았던 금홀을 그에게 내어미니 에스더가 가까이 가서 금홀 끝을 만진지라.”(에5:2). 에스더가 금홀을 만지자 왕이 말하였습니다.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며, 요구가 무엇이뇨. 나라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노라.” 그러자 에스더는 왕이 하만과 함께 에스더가 베푼 잔치에 참석하기를 청하였고, 왕과 하만은 에스더의 요구대로 하였습니다. 타이밍이 있는데 에스더는 지나치게 심사숙고한 나머지 잔치 첫날에는 왕을 청하였던 목적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잔치 첫날부터 다짜고짜 사정을 말하여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을 것이고, 왕이 에스더의 소원을 마음으로부터 준비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에스더는 다음 날도 자신이 베푼 잔치에 왕이 하만과 함께 참석하기를 청하였습니다(에5:8). 하지만 늦은 결정이 하마터면 큰 화근이 될 뻔하였습니다. 이후 하만은 에스더가 베푼 2차 연회 전에 모르드개를 죽이기 위하여 22.5미터나 되는 나무를 준비하였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에 수양대군은 왕이 되어 조카 단종을 강원도 영월에 유배시켰습니다. 이에 분개한 신하들이 단종 복위 운동을 벌였습니다. 명나라 사신이 오는 날에 거사하기로 약속하였습니다. 거사를 모의했던 사람 가운데는 무사였던 유응부와 문인이었던 성삼문이 있었습니다. 유응부는 이 일이 새어 나가기 전에 바로 거사를 해야 한다고 서둘렀지만, 문인이었던 성삼문과 다른 사람들은 때가 아니라고 하면서 다른 날로 미루었습니다. 그 결과 김질에 의하여 일이 탄로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옥에 갇혔을 때 유응부는 고문을 당하면서 “군인이 입만 산 서생들과 같이 계획을 짜면 안 된다더니 과연 그 말이 맞더라.”고 한탄하였습니다. 이처럼 거사는 머뭇거리거나 미루면 화근이 될 수 있습니다. 지나치게 조심스러웠던 에스더는 자칫 모르드개가 하만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후에야 하만을 죽여달라고 왕에게 요청할 뻔하였습니다. 모르드개가 죽은 상태라면 에스더는 비록 하만과 그의 가족, 아말렉인을 멸절시킨다고 해도 슬픔이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만이 모르드개를 나무 위에 달기 위하여 바깥뜰에 대기하던 날 밤, 아하수에로 왕은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잠들기 위하여 엎드려 자거나 숫자를 거꾸로 세는 대신, 신하에게 왕들의 일기를 펼쳐 읽게 하였습니다. 마침 두 내시 빅다나와 데레스가 왕을 모살하려고 했던 것을 모르드개가 발견하여 고발하였던 장면을 폈습니다. 왕은 모르드개에 대하여 어떤 상급도 내리지 않았던 것을 알고, 하만을 불러 왕이 존귀케 하려는 자에게 어떤 상을 내려야 할지 물어보았고, 하만은 왕이 입는 의복을 입게 하고, 왕이 쓰는 관을 쓰게 하며, 왕이 타는 말을 타게 하여 왕의 방백 중 존귀한 사람의 손에 붙여서 성 중 거리로 다니며 “왕이 존귀케 하기를 기뻐하는 사람에게 이같이 할 것이라 하게 하소서.”(에6:9내용). 말하였습니다. 왕은 그가 한 말대로 모르드개에게 행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께서는 모르드개에 대하여 하만이 입도 벙긋 못 하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더와 수산성에 사는 유대인들의 기도로 인하여 다음과 같은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첫째, 왕으로 하여금 에스더를 사랑스럽게 보게 하였습니다. 둘째 에스더가 비록 잘 못 판단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에스더의 실수까지도 하만이 모르드개를 왕에게 참소하지 못하도록 입을 막음으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하신 점입니다. 셋째는 화가 복이 되어 그들을 멸망시키려고 하였던 유대인의 대적 하만과 그의 가족 그의 민족이 모두 멸망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모르드개는 왕의 다음이 되어 유대인의 유익을 도모하였던 점입니다. 이처럼 기도는 성도들에게 좋은 일들을 가져다줄 뿐만 아니라 화가 복이 되게 하며 또 보이지 않는 재앙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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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03
  • [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은석 김의환 박사(1933-2010)
    전남 장흥 출신... 군목 제대 후 미국 유학 은석 김의환(恩石 金義煥) 박사는 1933년 11월 19일 전라남도 장흥군 대적읍에서 출생했다. 의환이 고향에서 국민학교를 다니는 동안 그의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가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어머니와 함께 경남 진주로 이사하여 진주고등학교로 진학해 1951년 졸업하고, 1953년 고려신학대학 신학과에 입학하여 1957년에 졸업한 후 육군 군목으로?입대하여 2년 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제대하였다. 제대 후 미국 커버넌트신학교(Covenant Theological Seminary)에 입학했다가, 1960년에 미국 미시간 주 그랜드레피즈에 있는 칼빈신학교(Calvin Seminary)를 졸업하였다. 그 후 1963년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역사신학을 전공하고 신학석사(Th.M) 학위를 받고, 1966년에 미국 템플대학교(Temple university)에서 철학박사(Ph.D)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 제목은 <The Korean Church under Japanese Occupation with Special Reference Movement with Presbyterianism>이었다.   그는 졸업과 동시에 미국개혁장로회(CRC) 필라델피아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OMF 선교사로 임명을 받고 일본 선교사로 가고자 하였으나, 당시 일본 정부가 한국인 선교사에게 비자를 발급하지 않아 한국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1966년 귀국 후 그의 모교인 부산의 고려신학대학의 교수로 가게 되었는데, 정식 발령이 나기 전에 특강을 하는 중에 한 학생이 "전에는 고신측에서 승동측과 합동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다가 지금은 다시 환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데, 목사님은 역사신학자로서 이것을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을 받고, "분열하는 것이 무슨 하나님의 뜻이냐"고 대답한 것이 문제가 되어 고려신학대학으로 갈 수 없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서을 총신대학교의 명신홍 학장이 그를 초청하여 1967년 3월부터 총신대학교 조교수로 가르치기 시작하여 부교수, 정교수로 봉직하다가 1976년 총신대학교를 사임하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총신대 교수직 사임하고 미국서 교회개척 당시 그가 총신대학교를 사임한 배경은 안식년으로 가족과 함께 미국 LA에 갔을 때, 총신대 이사회에서 외국에 가족이 있는 교수들은 3개월 안에 모두 한국으로 이주시키라는 결의가 있었는데, 이 요구에 응할 수 없었던 그는 교수직을 사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미국에서 나성한인교회를 개척하여 1995년까지 시무했으며, 그 기간 1982년부터는 미국에 국제신학교(International Theological Seminary)를 설립하여 1995년까지 학장을 역임하였고, 1985년에는 미국 개혁신학교(Reformed Theological Seminary)의 초빙교수가 되기도 했다. 1995년 다시 총신대학교 총장으로 부름 받아 1999년까지 총장직을 역임한 후, 1999년부터 2002년까지는 서울 성북중앙교회 담임목사로 사역하였고, 2002년에 한국 칼빈대학교 제3대 총장으로 취임하여 2007년까지 재직하였다. 그는 1967년 총신대학교에서 신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여 54년 간 교수로, 목회자로, 총장으로 한국과 미국에서 교회와 하나님나라 확장을 위해 지사충성을 다하다가, 2010년 5월 주님의 부름을 받아 영면에 들어갔다. 개혁주의 신학을 복음주의와 접목시킨 칼빈주의자 은석 김의환 박사를 흔히 개혁주의 신학자요, 칼빈주의 학자로 기억하는 이들이 많지만, 그가 교회사학자라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그리 많은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은석은 1982년에 <기독교회사>(성광문화사)를 저술하고, <복음주의 신학과 한국교회>(2004), ,현대신학과 개혁주의 신앙>(2004) 등 여러 편의 교회사와 관련된 책을 썼다.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에서 가르치는 이인선 박사는 김의환 박사를 가리켜 복음주의적인 개혁신학자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이는 은석이 개혁주의 신학을 복음주의와 접목시키고자 한 것을 일컬어 지적한 것이다.(한국교회를 빛낸 칼빈주의자들, 2020 p.895). 김의환 박사는 칼빈주의와 개혁주의 신학의 기초 위에 교회사가(敎會史家)의 안목으로 자유주의 신학이나, 민중신학, 또는 WCC신학 등을 비판하였다. 진정한 복음주의는 종교개혁의 원리를 따르면서 알미니안주의를 포함하여 개혁주의와 구분된다. 복음주의는 성경의 권위와 교회의 영적 갱신과 선교적 책임감을 일깨우는데 공헌하였다. 이러한 미국의 복음주의 운동의 흐름을 정리한 김의환은 먼저 복음주의의 두 가지 과제로 건전한 정통신학의 보수와 발전, 즉 이단과 자유주의에 대항하여 기독교 진리를 수호하는 책무를 감당해야 하고, 그 다음으로는 세계 선교전략을 수립하여 선교지도자들을 양성하여 오늘의 상황에 맞는 가장 효과적인 선교를 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복음주의 운동의 결실로 ACTS 설립에 역할 김의환 박사는 미국에 유학하던 시절에 미국 교계를 신복음주의자들이 주도하는 모습을 보았고, 거기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이들 신복음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던 복음주의의 두 가지 중요한 특성을 한국교회에서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첫째로, 이러한 복음주의의 연합된 복음전파 활동에 영향을 받아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ACTS)를 설립하는데 관심을 갖고 참여하였다. 이는 한국에서 복음주의운동이 전개되어 결실을 맺은 가장 중요한 사례이다. ACTS는 1974년 5월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에서 개교하였다. 둘째로, 김 박사는 미국에서 신복음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했던 복음주의신학회(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를 국내에서도 설립코자 하였다. 한국교회가?1960년대에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의 대립 속에서 분열하면서 교단의 벽에 갇혀 있던 상황에서 김 박사는 복음주의 신학자들의 교류를 끌어내고자 하였다. 미국에서 복음주의자들은 근본주의의 폐쇄성과 현대주의의 탈교회화 현상을 동시에 비판하고,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복음을 전파하려는 목적에 동조하는 신학자들의 교류를 촉진하고자 하였다. 한국에서 이러한 시도를 제일 먼저 했던 사람이 바로 김의환이었다. 그는 귀국하여 미국에서 신복음주의자들에 의해 조직되었던 미국의 복음주의신학회를 본받아 한국복음주의신학회를 1971년에 조직히였다. 기록을 보면, "1971년도에 김의환 한철하 오병세 조종남 제씨는 한국복음주의신학회를 창설하고, 한국 내의 신학정립과 해외 학자들과의 신학운동을 다짐한다. 그후 10여년 간 잠시 침체기에 들어가 있었으나, 해외에서 수학하고 귀국한 젊은 학자들끼리 자주 만나 복음주의신학운동에 박차를 가하게 됨에 따라 당시 회장직을 맡아 보고 있던 한철하 박사가 발전적 해체를 하고 재출발하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의환 박사는 한국교회가 교단적 폐쇄성을 극복하고 복음주의자들 사이에 건전한 교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복음주의신학회를 조직하고자 하였다. 김의환은 철저한 개혁주의자의 자의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한국보수주의자들이 자유주의자들과의 신학논쟁 과정에서 가지게 되었던 소극주의적이고, 환원주의적이며, 생활과 분리된 신앙생활을 하는 반동적인 신학의 부정주의적인 정신 풍토를 극복하고자 했다. 김의환은 예장합동 교단의 경직된 교단적?분위기 속에서도 분명한 교회연합 활동에 대한 원칙을 가지고 활동하며 기여했다. 교회연합 활동에서 자유주의자들의 조직과 연합을 우선시 하는 것에 대하여 분명하게 비판하면서 교회연합과 일치에서는 교리적인 순결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힌다. 교회의 사회참여도 복음주의적 시각 반영 김박사는 이러한 개혁주의적인 신학을 가지고 복음주의적인 선교활동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이는 김의환 자신이 일본에 선교사로 가고자 했을 정도로 선교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교수 사역을 하면서도 선교활동에는 항상 적극적이었다. 그는 1990년대 이전부터 한국교회의 선교적인 사명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시각은 그의 교회사적이고 세계사적인 안목에서 나온 결과로 보인다. 김 박사는 한국교회의 사회참여에 대하여서도 개혁주의적이며 복음주의적인 시각에서 교회사적이며 선교사적인 면에서의 입장임을 엿볼 수 있게 노력하곤 한다. 그는 교회의 사회참여에 대하여 두 가지 유형을 언급한다. 첫째 유형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따르는 탈세계적인 경건주의를 부르짖는다. 이러한 탈세상적 경건주의는 현실도피적이고 신비주의적인 기도원 운동과 일반은총을 무시하는 재세례파적인 부흥운동이 난무하게 된다는 것을 경계한다. 둘째 유형은 교회가 현실정치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유형이다. 한국교회는 일제하에서 민족주의 영향으로 정치참여의 반열에 직접참여하는 형태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민족의식의 보유자는 될 수 있어도 민족주의자는 될 수 없다. 정교분리의 기본정신을 떠나 교회 이름으로 한 정권에 부질없이 관여하여 복음의 본질을 훼손시킨다고 경고한다. 그는 한국교회의 사회참여는 경건주의적이고 부정주의적인 반응과 정치 현실에 대한 직접 참여의 양극단을 넘어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교회가 세상에 대하여 할 수 있는 것은 첫째 말씀의 봉사, 둘째 기도의 봉사, 셋째 구제의 봉사라는 교회 원래의 본질을 말한다. 또 그는 교회는 신앙적 문제에 저촉될 때만이 교회의 이름으로 정치영역에 직접 발언할 수 있다는 개혁주의자였다.
    • 칼럼
    • 박정규 목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2023-02-27
  • [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이명직 목사(1890-1973)
    서울 출신... 한학에 능통 동양 사상과 기독교 사상의 조화에 관심 이명직(李明稙) 목사는 1890년 12월 3일, 서울에서 한산 이씨 이승태(李承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한산 이씨는 목은 이색(牧隱 李穡)을 중시조로 삼는 일파로서 조선시대 대표적인 문신(文臣) 양반 가운데 하나이다. 초기 한국기독교의 유명한 인물인 이상재(李商在)도 한산 이씨 가문으로 알려져 있다. 이명직의 출생지는 명확하지 않다. 어떤 이는 서울 종로구 중학동이라 하고, 또 어떤 연구자는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종암리라고 한다. 고양군 숭인면 종암리는 지금의 성북구 종암동이다. 이명직의 조상들은 이곳에서 대대로 살았던 것 같다. 이명직은 당시의 관습에 따라 서당에 다니며 한학(漢學)을 익혔다. 김기삼은 이명직 연구의 글에서 소시에는 한학을 배워 사서삼경은 물론, 통감을 읽어 동양의 역사와 한학 문장에 능통하였다고 말했다. 이 한학 공부는 이명직의 삶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그는 기독교와 동양 사상, 특히 유교를 배타적인 것으로 이해하지 않고 서로 조화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가 소년 시절을 보냈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는 조선의 운명이 문자 그대로 풍전등화와 같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명직은 자신이 한편으로는 정치를 공부하고 출세해서 이름을 펼쳐보려는 야망과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을 등지고 삼림에 들어가서 도승이 되어 보고자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어릴 적부터 두 가지 중 하나는 성취하리라 생각하였다. 이명직의 집 뒤에는 절이 하나 있었는데, 새벽과 저녁에 들리는 예불 소리와 종소리가 그의 귀에 인상 깊었고, 승복을 입은?승려들이 삭발을 하고 염주를 들고 다니는 모습이 그에겐 신비감을 가져다 주었다. 특히 그는 15세 때부터 장차 도승이 되어 금수강산을 유람하리라 꿈을 꾸기도 했다. 그는 16세 때 자신이 잠간 불교에 귀의한 적이 있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서 선교사들 통해 기독교 만나 그러나 이명직은 어떤 기회에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에서 공부를하게 되었다. 황성기독교청년회는 선교사들이 경성의 젊은이들을 교육시킬 목적으로 설립하였다. 원래 선교사들은 조선사회의 하층민을 대상으로 세운 선교활동의 일환이었지만, 이 가운데 젊고 똑똑한 상류층의 사람들도 선교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들은 주로 양반의 자녀들이었기에 낮은 계층이 다니는 교회에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에 선교사들은 양반의 자제들을 대상으로 모임을 주선했고, 이런 이유로 인해 생겨난 곳이 황성기독교청년회였던 것이다. 이명직이 18세 되었을 때, 그의 마음 속에는 출세의 욕망이 강하게 일어났다. 그의 표어가 있었는데, "이 시대에 나도 남과 같이"였다. 그의 아버지는 일본 유학을 권하였고, 이것은 이명직의 꿈이기도 했다. 그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 1907년 박갑은과 결혼했다. 이것은 유학 전에 아버지가 계획한 소망이었던 것 같다. 결혼 후 1년이 지난 1908년 그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서울역을 떠나 인천에서 배를 타고 일주일만에 일본에 도착하였다. 일본 동경에 이명직이 도착한 곳은 동경조선연합교회였다. 한국에선 부모의 반대로 마음대로 교회에 다닐 수 없었으나 동경에 와서는 자유로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는 출세를 꿈꾸고 동경에 왔지만, 하나님은 이것을 통해 자신이 신실한 신앙을 갖게 만들었다는 소명을 의식하게 하였다. 동경YMCA에서 김정식 만나 동경성서학원 입학 이명직은 동경의 한인 YMCA에 출석하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김정식(金政植)을 만나게 된다. 김정식은 독립협회 사건으로 이상재 이승만 등과 함께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다가 감옥에서 출옥한 후 연동교회에 출석하며 황성YMCA 부총무 일을 맡고 있었다. 당시 연동교회 담임목사 게일이 경성의 YMCA 회장을 겸하고 있었는데, 그때 마침 경성YMCA가 동경에 한인 학생들을 중심으로 YMCA를 설립하고 김정식을 총무로 파송한 것이었다.   김정식은 많은 조선유학생들을 지도하며 애국심을 심어주었다. 이 시절 당시 와세다 대학에서 공부하던 조만식과 신앙생활을 함께하며 조선독립의 열의를 일깨우기도 했다. 이곳에서 이명직의 신앙생활은?외형적으로는 출중하였다. 주초(酒草)의 금지는 물론, 민속행사 때처럼 백지에 자신의 과오를 적어 불태워 날리기도 했다. 원래 이명직은 일본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려 했다. 당시 많은 유학생들은 법학을 공부해 양명출세를 꿈꾸었다. 대학에 들어갈려고 1년동안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데, 경성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날라왔다. 아버지가 경영하던 사업이 갑자기 실패로 돌아가고 가정이 경제적으로 어려우니 속히 귀국하라는 내용이었다. 청운의 뜻을 품고 일본에 온 이명직은 그래도 그냥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는 여러 가지 방도를 찾던 중?동경의 어느 거리에서 구세군의 '가로전도단'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나팔을 불고 찬송을 하며 열심히 전도하는 구세군인들의 전도 광경을 보고 이명직은 자신의 마음이 뜨거워짐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럴 때쯤 김정식이 동경성서학원을 소개해 주어 입학하게 되었다. 이 학원은 동양선교회가 세운 성경학교로 미국 시카고의 무디성경학원과 비슷했다. 이 학원에서는 오전엔 성경공부, 오후에는 전도, 저녁에는 전도한 사람들을 모아 집회를 하였다. 그는 동경성서학원에서 열심히 공부하였다. 1911년 이명직은 동경성서학원을 졸업하고 귀국했다. 그는 귀국 후 개성전도관의 교역자로 부임하였다. 개성전도관은 동양선교회가 경성의 무교동과 진남포에 이어 세번째 세운 전도관으로 1909년에 문을 열었다. 먼저 사역하고 있는 주임교역자는 강태온이었다. 1912년에는 후배인 이명헌이 개성에 와서 노방전도를 통해 구도자가 된 신자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며 사역하였다. 이때로부터 이명직은 성결교회의 전도자로 또 지도자로 성장해 같다고 볼 수 있다. 해방정국에서 성결교단 정비... 성결교회 초기 발전사 기록으로 남겨 일제 시대를 지나 동양선교회의 전도관은 교회 수의 증가로 전도관 체제를 탈피하고, 장로교나 감리교처럼 자연 교단 조직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8.15 광복 이후 혼란기를 겪으며 교단이 안정되기도 전에 1950년 6.25 전쟁의 발발로 큰 위기를 맞게 되었으나, 전쟁이 끝나고 서울이 수복되자, 교단을 새로이 정비하고 조직 발전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이명직 목사는 자연스럽게 성결교단의 중심에 서서 일하게 되고, 교단장의 일로부터 인재양성의 중심이었던 경성신학교를 복원하는데 그 중심 역할을 했다. 서울신학대학교 명예교수인 박명수 박사는 <이명직과 한국성결교회>라는 저서에서 "이명직은 성결교회 초대 인물의 일원으로 성결교회와 신학교를 키워 놓은 인물이다. 그는 이 교단의 사부요 교부이다. 이 교단이 이만큼 장족의 발전을 한 것은 그의 공이 절대적 역할을 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또 성결교회 총회장을 역임한 오영필 목사는 그의 저서 <성결교회 수난사>에서 이명직을 가리켜 "성결교단을 이룩한 성결의 기수요, 남여 교역자를 양성한 유일한 사부"였다고 말했다. 필자는 그가 남긴 많은 글 중 1929년에 성결교회 초기 발전사를 기록한 <조선야소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 략사>에 주목한다. 이 글은 성결교회의 초기 역사를 정리한 귀중한 자료이다. 이 저서는 1928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사기>가 나온 바로 이듬해에 발간된 것이다. 당시로서는 장로교단에 비교할 수 없는 소규모 교단역사가 출판물로 공간되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책 이름이 좀 긴 것 같지만 성결교회를 지원하고 후원하고 있는 동양선교회(東洋宣敎會)를 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책은 성결교회의 역사와 신조 및 개교회들의 실재를 잘 소개하고 있는 매우 귀중한 교단 역사 사료이다. 그 형태를 보면 판형도 책자다운 국판형으로, 내용은 위에서 아래로 즉 세로 쓰기로 되어 있으며, 고어체 한글과 한자가 병기되어 있는 양장본으로 총 198면에 이른다. 여기에는 동양선교회 계통과 신앙개조 및 성결교회의 연혁과 조직, 성서학원 그리고 각 지방교회의 역사 및 교역자와 선교사들을 소개하는데 총 11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기할 것은 총 74매의 교회 및 교역자들의 사진이 게재되어 있어 역사서로써 역사성을 지닌 저서라 하겠다. 성서학자, 교회행정가, 신학교수로서 '교회사가' 이 책의 서문을 쓴 당시 경성신학교의 곽재근 목사는 조선에 전래된 동양선교회의 성결교회가 한 세대도 덜 된 이 때에 이명직 목사에 의해 저술 출판된 성결교회 략사 출판에 대해 "지나간 역사를 정리 못해 안타깝게 생각해 왔는데, 본 교회의 원로 이명직 형이 몇 년 전부터 이 일에 뜻을 두고 재료 수집 및 기타에 전심 노력한 결과 이에 책 한 권을 제작하니 곧 우리가 기대하던 <조선야소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 략사>이다. 그 미묘한 춘추필법은 독자로 하여금 심오한 섭리와 놀라우신 축복과 엄위하신 권위를 일목요연하게 하였다"라고 하면서, 책의 출간을 반기웠다. 무엇보다도 이명직이 친히 쓴 서문을 보면 이 책의 간행 의미와 저술의 가치를 엿볼 수 있다. "옛날에 이스라엘 르비딤에서 아말렉으로 더불어 싸워 승전한 후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너는 이 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책에 기록하여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출 17:14)라고 하셨고,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행하신 일 곧 그 역사를 기록하여 자손에게 전하라 하셨은즉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를 지금으로부터 22년 전에 우리의 제1 총리 카우만(Charles E. Cowman)과 길보른(Emest A. Kilbourne)으로 말미암아 일으키셨는데, 22년 후 오늘에 앉아 생각하니 하나님의 축복의 현저하심에 놀라지 않을 수 없고 찬송하지 않을 수 없다. 22년 전에 카우만 부부가 가방을 들고 태평양을 건널 때에 이렇게 성공하리라고 믿었겠는가? 그러나 카우만 부부의 믿음의 안중에는 벌써 이러한 환상이 나타나 있었다. 오늘에 이르러서는 과연 그 믿음과 같이 이루어졌으니 일본, 조선, 중국에 전도자를 양성하는 성서학원이 4곳이요, 성결교회로는 일본에 200여 곳, 조선에 70곳, 중국에 20여 곳, 동양 전체는 그로 말미암아 '순복음'을 듣게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이적이 아니며, 큰 축복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이에 짐작할 수 없어 그 능력과 그 축복하심을 만분의 일이라도 증거하기 위하여 감히 붓을 들어 본 약사를 기록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 넓고 크신 능력의 역사를 어찌 졸필로 다 나타낼 수 있겠는가 다 나타내지는 못하였다 해도 거룩한 주의 역사에 이즈러짐과 더럽힘이 없으면 다행이라 하겠다..."(같은 책 서문 p.2). 본 필자가 성서학자요, 교회행정가요, 신학교수요, 한 교단의 사부요, 교부로 추앙받는 이명직 박사를 교회사가(敎會史家)로 칭하는 이유는 장로교와 감리교회가 희년을 맞이해서도 겨우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차재명 1928, 창문사)를 출간했는데, 조선에 후반 선교자로 시작한 동양선교회 성결교회가 30년 한 세대가 되기 전(1907-1929)에 교단사(교회사)를 정리해 친히 저술하여 간행했다는 것은 신학자와 행정가로서만 아니라 먼 미래를 바라 볼 줄 아는 사안(史眼)을 가졌다는 점에서 이명직 목사를 한국교회사가의 반열에 올려도 결코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명직 목사의 저서가 간행된 후 40년 만에 서울신학대학의 그의 제자 이천영 교수에 의해 서울신학교로서는 최초로 문교부의 교수 저작지원금으로 <한국성결교회사>(1970)가 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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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정규 목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2023-02-27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어젯밤 꿈을 꾸었습니다”
    “어젯밤 꿈엔 섧디섧게 울었습니다 / 참으로 억울하고 원통해서 / 엉엉 울어댔습니다 / 타 문화권에서 / 선교활동을 하다가 / 수류탄 파편에 맞아 죽어 돌아온 / 한 선교사의 시신을 보고서 말입니다 / 어느 외딴 섬에서 / 당신의 품안에 그분을 안겨 드리며 / 온몸이 부서진 시신을 보고 / 저는 목을 놓아 울었습니다 / 내가 저렇게 죽어야 했는데 / 내가 먼저 순교하여 / 하늘나라의 영광을 차지해야 하는데 / 내가 저렇게 조각난 주검이 되어 / 하나님의 칭찬을 받아야 하는데 / 왜 나는 저 기회를 빼앗겼을까 / 나는 무엇을 하다 / 저 영광을 놓치고 말았을까 / 내가 그여야 하는 걸 / 하늘 영광은 주검을 덮습니다 / 그의 주검은 / 육신 온전한 내 몸뚱이보다 아름다웠습니다 / 그래서 저는 / 섧디섧게 울었습니다 / 일찍이 저에게 / 홀로서기를 연단시켜서 / 험한 세상 잘 이기며 / 사명 잘 감당하는 / 고고한 한 그루의 소나무로 남아 있게 하신 / 당신 뜻이 고마운 줄 알면서도 / 어젯밤 꿈에는 왠지 섧기만 했습니다 / 당신 만날 새벽에 / 꿈에서 깨었을 땐 / 그 짜디짠 눈물이 / 귓속까지 고여 있었습니다 / 어느덧 익어 가는 세월 속에서 / 이제 저도 조금씩 당신을 닮아가고 / 한 걸음 한 걸음 / 당신 계신 / 영원한 본향에 이를 때가 / 가까움을 느낍니다...(하략)” 위의 시는 저의 첫 시집 ‘어젯밤 꿈을 꾸었습니다’에 나오는 표제시입니다. 지금 보면, 시인으로서의 예술적 심상 보다는 활활 타오르는 소명감으로 가득 찬 목회자의 이미지가 더 강하게 느껴지는 시입니다. 특별히 이 시는 프라미스 콤플렉스 건축을 앞두고 설계를 하던 때에 지은 시입니다. 시가 평범한 것 같지만 시적 화자는 이슬람권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수류탄 파편에 맞아 죽은 선교사의 시신을 보고 원통하고 억울해서 엉엉 울었다는 고백을 합니다. 그런데 선교사의 죽음이 원통하고 억울하다고만 하면 산문이지요. 참으로 원통하고 억울한 사연이 선교사의 죽음이 아니라 시적 화자의 순교였습니다. 그의 순교가 슬퍼서 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너무나 부러워서 엉엉 울어댄 것이죠. 시적 화자의 소원은 “내가 저렇게 죽어야 하는데 / 내가 먼저 순교하여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차지해야 하는데...”에서 보듯이 순교였습니다. 일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시적 화자의 소원이었던 것이죠. 시적 화자는 목양을 하며 큰 교회당 건축을 준비하고 있는 목회자였기에 현실적으로 이슬람권의 선교사로 가서 죽을 수는 없지요. 그런데도 시적 화자는 섧디 서러운 눈물을 터트리며 순교를 갈망하는 속마음을 ‘꿈’이라는 도구를 통해 고백하고 있습니다. 저는 목사이자 시인이었기 때문에 꿈속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시로서 형상화한 것입니다. 저에게 있어 이번 주간은 올해 가장 힘든 고난의 행군이었습니다. 일주일 내내 새학기 새출발을 위한 헤리티지 특별새벽기도회를 인도하고 월요일에는 부산 지역 지도자 신년 만찬회에 참석하여 설교를 하고 왔습니다. 수요일 오전, 저녁 설교, 또 철야기도회 설교와 각종 모임까지 너무나 힘든 일정이었습니다. 그때 저의 뇌리에 이 시가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때의 초심을 생각하며 힘을 내었습니다. 온 몸이 찢겨 순교한 이슬람권 선교사의 순교를 바라보며 “내가 왜 그 기회를 빼앗겼을까, 그 영광을 놓치고 말았을까...” 울부짖으며 순교를 갈망하던 목회자의 불타는 소명감을 다시 한 번 새롭게 떠올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지금 살아있는 순교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제 한 몸, 시간과 체력 모든 것을 다 던져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살아있는 순교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몸은 천근만근이고 마음은 지쳤지만, ‘어젯밤 꿈을 꾸었습니다’라는 시를 읽으면서 다시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새로운 힘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다시 이 시를 노래하며 행복하게 사명자의 길을 달려갈 것입니다. 아니, 살아있는 순교자의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주님이 계신 영원한 본향에 이를 때가 행복한 미소 지으며 달려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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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3-02-26
  • [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노란 봉투, 파란 봉투, 찢어진 봉투!’
    2014년 쌍용자동차 파업에 동참한 노조원들에게 47억원 배상 판결이 내려진 후 시민들이 노조원들을 돕기 위해 노란봉투에 성금을 담아 47,000여명의 시민이 14억 4천만 원의 성금을 모은 일을 계기로 '노란봉투법'이라는 말이 생겼다. 이 법의 취지는 기본적으로, 정당한 쟁의행위와 그렇지 않은 불법적 쟁의행위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세워서, 정당한 쟁의행위에 대한 손배, 가압류가 이루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 법을 발의한 사람들은 쟁의행위는 분명히 법으로 보장된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사용자가 '손해배상과 가압류'라는 민사소송을 통해 정당한 쟁의행위를 저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주장한다. 이를 위한 해당 법안은 2015년 4월 새정치민주연합(현재 더불어민주당) 의원들 34명이 '노란봉투법'을 발의하였고, 19대와 20대 국회에서 연달아 폐기가 되었고, 21대 국회에서는 4건(민주당 3건과 정의당 1건)의 노란봉투법이 발의되었다가 결국 금년에 민주당과 정의당 위원만 참여해 찬성 9표, 반대 0표로 노란봉투법이 상임위 문턱을 넘었다. 모든 법이 그러하지만, 나름대로 정당성과 합법성을 가지고 있다. 법 자체의 정당성과 합법성만을 보면 불필요한 법이 없기 마련이다. 그런면에서 노란봉투법이 정당성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모든 것에 상대가 있듯이 사용자들의 주장도 반영할 수 있는 법이 필요할지 모른다. 이것을 필자는 ‘파란봉투법’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분명히 우리나라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 조정법’ 제3조(손해배상 청구의 제한)에 의하면 “사용자는 이 법에 의한 단체교섭 또는 쟁의행위로 인하여 손해를 입은 경우에 노동조합 또는 근로자에 대하여 그 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노란봉투법은 이 법 조항으로는 근로자의 쟁의권을 완전히 보장받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최근 우리는 노동조합의 과격한 정치 투쟁과 노조의 설립목적에 반하는 파업에 의해 과도한 투쟁으로 인해 막대한 손실을 보았다. 이것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마음에는 노조를 향한 심정적인 지지를 철회하면서 근심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다. 또한 노조는 반드시 개혁되어야 한다는 귀족노조에 대한 반발심리가 확장되고 있다. 회계 장부의 공개를 거부하고, 국민 혈세로 지원받은 경비의 지출 내역을 밝히지 못하고 있다. 귀족 노조의 전횡이 만천하에 드러난 시점에서 더 이상 순수한 노동자의 권익 대변자의 역할을 못하고 있다. 오죽하면 젊은이들이 이에 반발하여 제3의 노조를 만들고 스스로를 지키고 있는가? 이런 시점에서 다수의 힘으로 등장한 노란봉투법에 대하여 국민의 가슴 속에는 파란봉투법이 싹트고 있다. 사용자가 마음대로 기업활동을 할 수 있고, 일자리를 만들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법, 사용자들이 마음놓고 기업의 능력을 고양할 수 있는 법, 악덕 사용자들은 반드시 법으로 처단하였겠지만, 사용자들의 건강한 기업활동을 보장할 수 있는 파란봉투법을 만들어야 한다. 이 시대는 노란 봉투법도 필요하고 파란 봉투법도 필요하다. 어느 한편만을 위한 법이 득세할 경우 이 국민들에게 그 봉투법들은 찢어진 봉투법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언제부터인가 진영논리가 득세하고, 같은 편은 무조건 선이고 상대는 무조건 악이라는 편가르기가 만들어낸 법이라면 그 법은 찢어진 봉투법이다. 비오는 골목실을 걸어가는 다정한 아이들의 우산이 보기 좋듯이 우리들의 노동환경에서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거기에 섞여 있는 찢어진 우산도 빨강 우산과 파란 우산과 함께 빗속에서 다정하게 걸어간다. 우리의 노사도 그렇게 다정하게 보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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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성택시사프리즘
    2023-02-25
  • [언론회 논평] 법관이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면 정상적 판결이 아니다
    최근에 서울고등법원 행정1-3부(이승한 심준보 김종호 부장판사)가 동성끼리 동거(자신들은 결혼했다고 함)하는 사람들을 결혼에 준하는 것으로 판결하여, 우리 사회를 경악케 한다. 사건은 동성끼리 동거하는 사람들이 국민건강보험공단을 상대로 동성 배우자의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해 달라는 것인데, 1심 재판에서는 ‘혼인은 남녀 간의 결합’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법리로 원고 패소를 내렸으나, 2심인 고등법원에서는 이를 번복한 것이다. 즉, 원고들이 주장하기를 사실혼 관계 배우자(이성간)에 대해서는 직장 가입자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하는데, 배우자가 동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피부양자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부당한 차별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다. 개인의 사정이 있다 하여도 법원이 법의 규정안에서 판결을 내리지 않고, 현행 헌법과 대법원의 판결과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무시하는 것은 제대로 된 판결이 아니라, 판사들의 자기 주장에 의하여 법을 시험하려는 행위에 불과하게 된다. 판사(判事)들은 사회운동가가 아니다. 차별을 해소한다며 역차별을 조장하는 국가인권위원회 직원도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고등법원의 판사들이 현행 법률과 헌법을 뒤집어엎는 판결을 내리는지 이해할 수 없다. 판사는 독창적•독보적•독재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들도 법치주의하에 철저하게 법을 지키고 따라야 한다. 자유민주주의 정치는 철저한 3권분립에 의하여 작동되며, 사법부의 법률적 판단은 법의 테두리에서 불편부당(不偏不黨)하게 한 치의 오차도 없어야 한다. 그런데 동성 결합이 제대로 된 결혼도 아닌데(우리 법에서 인정하지 않는), 이를 결혼으로 인정하는 판결을 내리는 것은 고등법원 법관들의 의식과 수준을 의심하게 된다. 판사는 판결로 그 의식과 수준을 말하게 되는 것이고, 그 결정이 얼마나 법에 의하여 조밀(稠密)하게 투과되었느냐 하는 것이 평가된다. 그런데 이번 판결에서 서울고등법원은 따로 판결(번복)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중요한 사안에 대하여 설명하지 않는 이유도 의아스럽다. 참고적으로 우리 헌법 제36조 제1항에서는 ‘혼인과 가족생활은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을 기초로 성립되고 유지되어야 하며, 국가는 이를 보장 한다’로 되어 있다. 그리고 헌법재판소도 ‘혼인은 근본적으로 애정과 신뢰를 기초로 하여 남녀가 결합하는 것’(헌법재판소 2011. 11. 24 선고 2009헌바146 전원재판부 결정)으로 되어 있다. 또 대법원에서도 ‘이성 간의 혼인만을 허용하고 동성 간의 혼인은 허용하지 않고 있다’(대법원 2011. 9. 2. 자2009스117 전원합의체 결정)는 것이다. 따라서 기존의 헌법과 상위 법률 기관의 판결과 결정이 엄연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는 판사들은 판사의 자격이 있는지에 대하여 심판을 받아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분쟁이 발생할 때, 이를 법의 잣대로 냉정하고 엄격하고 세밀하게 그리고 바르게 판단하는 것이 법관들의 책무이다. 그런데도 이를 무시하거나 방관하거나 월권하거나 의도적으로 왜곡해 간다면 이런 판사들은 법복을 벗어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점점 무너지는 상황인데, 이번에 법의 범위를 벗어난 판결은 국민들을 실망시키기에 충분하다. 사법부에 대한 신뢰와 기대가 무너지면 국가와 국민 전체가 불행해지고, 사회적 혼란이 온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 아닌가? 그런데도 헌법을 뛰어넘는 판결을 내리는 강심장(?) 법관들은 어느 나라 국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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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3-02-22
  • [언론회 논평] 새로운 기술, 새로운 변화, 새로운 도전
    지난해 11월 인공 지능(AI) 챗봇 서비스 챗GPT(ChatGPT-언어 생성형 인공 지능)의 등장으로 세계가 술렁이고 있다. 이것이 올해 1월 월간 활성 사용자 1억 명을 넘어서면서 세간의 관심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 이것을 가지고 미국에서 의사, 변호사, 회계사 시험을 치른 결과 시험에 통과했다고 하니, 놀라울 수밖에 없다. 미국의 의사면허 시험에서 생화학, 진단 추론, 생명윤리 과목에서 합격하였고, 미국 미네소타대학의 로스쿨 시험의 4개 과목에서도 통과되었으며, 미국 펜실베니아대학의 MBA 과정에서도 B등급의 점수를 받았다고 한다. 정말 사람을 대체할만한, 사람들의 개인 비서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하여 초미(焦眉)의 관심사를 보이고 있다. 인공 지능에 대한 것은 지난 2016년 알파고가 바둑계의 최고수들을 차례로 물리치는 것을 보면서, 그 놀라움을 경험한 바 있다. 챗GPT는 언어 생성형 인공 지능으로 질문에 답을 함에 있어, 사람과 비슷한 언어로 결과물을 만들어 내고, 사람이 수십 년 동안 축적하고 배운 지식 정도를 단 몇 분에서 몇십 분의 짧은 시간 안에 도출해 낸다고 하니 획기적인 일이 아닌가? 과연, 과학이 만들어 내는 인공 지능은 어디까지 갈 것인가? 얼마만큼 인간들에게 생활의 편리와 도움을 줄 것인가? 인간을 대신할 만큼 정확하고 바르게 정보를 제공하여 문명의 이기(利器)가 될 것인가? 그러나 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첫째는 오용(誤用)의 문제이다. 엄청난 정보와 지식을 가진 ‘초거대 AI’가 국제적인 조작과 일부의 악한(惡漢)들에게 악한 목적으로 이용된다면 이것은 엄청난 피해를 줄 것이다. 언제나 악한 사람들은 있었다. 놀라운 변화의 방향을 잘못된 곳으로 유도하게 된다면 이것은 인류에게 결코 유익이 되지 못할 것이다. 챗GPT의 개발자조차 사이버 공격이나 악성코드 제작으로 유도(誘導)가 가능하다고 인정한다. 두 번째는 정보의 오류이다. 새로운 정보는 끊임없이 생성된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출현과 함께 동시에 탑재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반드시 필요한 최신의 정보가 아닐 수 있고, 또 분야별로는 정보가 부족하여 아예 초보적인 결과물들도 나타난다고 한다. 이런 정보는 가치성과 신뢰성이 떨어지는 것이다. 세 번째는 도덕적인 문제이다. 챗GPT가 가진 정보는 표절, 저작권, 정보의 출처 등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 여지가 남아 있다. 즉 지적 소유권, 도덕성의 문제를 모두 해결했다고 볼 수 없다. 따라서 이런 분쟁이 벌어지게 되면, 사회적 혼란과 다툼을 막을 수가 없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도전에 대하여 분명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과학기술의 발전을 막을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가져올 파장과 혼란은 미리 대처하여야 한다. 한편 우리 기독교는 과학기술이 발달할수록 우리 영성(靈性)이 약화되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이런 기술에 의지하여 영으로 드려야 할 예배나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어야 할 말씀, 그리고 하나님께 헌신하고 충성하고 순종하는 것을 등한히 해서는 안 된다. 과학발전의 시대에도 여전히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神性)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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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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