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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육신한 예수교회-16
    로마서신을 로마에 전한 메신저가 바울이 보낸 사도 ‘뵈뵈’라면(롬 16:1,2), 그녀는 결코 얼렁뚱땅 적당하게 바울의 복음을 전하려는 껄렁이는 아니었을 것이다. 적어도 누가에게까지 알려진 만큼, 뵈뵈라는 여성은 만만하게 여길 위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뵈뵈는 겐그레아 교회의 집사로서 많은 사도들과 복음 사역자들이 그녀를 통해서 안위를 얻을 수 있었고, 그녀의 사역 지를 방문한 이들은 그녀의 마음과 인품에서 우러나오는 파장 때문에, 아무리 겹친 피로로 인해서 회복이 불가했으리만큼 탈진한 전도자였다 하더라도 그녀에게서 마련된 공동체는 참된 쉼과 새로운 기운을 얻기에 넉넉하였던 것이다.바울이 서원이 있을 때에 겐그레아에서 수염과 머리를 밀고, 차분한 정리와 새로운 점프를 준비할 때에, 그 머리가 다 자라고, 수염이 넉넉하게 되기까지는 짧지 않은 기간이었다. 그 기간 동안에 바울은 자신의 지나온 사역과 삶을 재점검할 수 있었고, 바울의 뜨거운 정열은 뵈뵈에게 투명하게 교감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송구스러운 이야기지만 필자가 46년 전에 복음을 들고 집을 나선 이후부터, 로마서를 그 풋 시절부터 사람들에게 항시 강론해 왔지만, 로마서란 너무나 심오하여서 결코 뜨내기 같이 어설프게 덤벼들었다가는 복음을 전혀 모른 채 종교인으로만 남아있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그의 복음서를 총정리하면서 그가 만난 예수님과 어떻게 동행하고 있으며, 예수를 믿는 것과 인간 구원, 예수그리스도의 계시적인 지식을 모두 신중하게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더더욱 그는 그의 복음을 받아들이게 될 청중들에게 가장 고귀한 그리스도의 말씀에 합일하는 삶과 인격을 내포하였고, 개개인의 역동적인 사명을 효율적으로 성과를 낼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성령의 은사들이 불 일 듯이 일어나게 하려하고, 교회 전체가 통전 적이고도 온전한 교회로서 서도록 하려는 거룩한 뜻을 내포하였기 때문이다.만약에 복음을 담지 한 담지자가 경솔하게도 성령의 열매가 부재하거나, 사람들에게 구원의 선물을 확실하게 전달하질 못하거나, 복음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은사가 결핍되었다면, 그가 전달하려는 생명의 성령의 복음은 그만 빛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오늘날의 교회가 본 모습은 잃어버리고 예전만 화려해져서 경건의 모양을 그럴 듯하게 포장하였지만, 이미 경건의 능력을 잃은 지 오래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이 듣고 읽는 복음 자체를 의심하고 돌아서는 지경이 된 것이다. 뵈뵈가 복음을 갖고서 입성한 로마는 이미 유대주의자들과 그리스도인들 간에 충돌이 있어왔고, 그 결과로 추방을 당하기까지 하였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억제되어 있는 상태였다. 교회 안에 깊어진 질곡은 누군가가 풀어야 할 숙제가 되었던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이유로 수차 로마에 가려했으나, 다양한 문제로인해서 좀처럼 기회가 주어지질 않았던 것이다. 저는 로마에 복음 전하는 일은 뵈뵈에게 맡겨야 했고, 그보다 먼저 예루살렘으로 향해야만 하였던 것이다.바울은 평소 그의 동역자들에게 기본적인 그리스도의 복음을 숙지시켰을 뿐만 아니라, 복음 전도자들의 자세와 태도를 아주 중요시하였다. 이는 그가 항상 ‘나를 본받으라.’ 한 그 훈련 지침에서도 밝혀진 것처럼, 사람들이 전도자들의 투명성과 정직성을 보고서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항상 숙지시켰던 것이다. 특히 바울이 그의 서신들마다 빠지지 않고 기록한 것을 보면, 성령의 역사가 빠짐없이 그의 사역에 나타나고 있던 것을 강조하였다. 복음 전도자의 권위가 복음을 전하는 그의 내면에서 나온다면 인간 구원은 불가하다. 복음 자체가 구원과 부활과 영생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신적권위가 뒷받침 되어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타락한 교권자들은 이를 건물로, 사람들의 수 놀음으로 대신하거나, 예전으로 대치해 버렸으나, 바울은 항시 성령의 나타나심, 성령의 임재와 역사를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화가가 그려낸 그림 안에 그의 인격이 녹아있듯이, 한 사람의 책 안에는 그 것을 기록한 사람의 모든 것이 녹아서 스며들기 마련이다. 모세가 시내산 돌덩이에 오경을 기록하였다면, 바울은 그리스도가 계시와 가르침과 삶을 보여주심과 그와 동행하심으로 만나주셨기 때문에, 만나는 사람들의 가슴에 그리스도를 보여줄 수 있었고, 개개인이 인격적으로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도록 증인의 역할을 다하였던 것이다. 사실 로마로 향하는 배에 올라탄 것은 뵈뵈가 아닌 바울이었을지도 모른다. 바울이 안위를 얻고 예루살렘으로 훌쩍 떠날 수 있었던 것은 뵈뵈와 함께 그리스도가 로마로 가시고 계셨기 때문일 것이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6-06-16
  • 성육신한 예수교회-15
    바울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점 가운데 하나는, 그가 로마서 집필을 마치고, 그 로마서를 로마에 있는 교우들에게 보내려던 때일 것이다. 예루살렘이 주후 70년 패망한 이후에 성전 중심의 신앙에서 율법 중심의 신앙으로 전환된 시기에 일이다. 유대 랍비가 문제가 된 멀리 떨어진 유대인 공동체에 율법의 가르침을 전달하려면, 그 전달자가 랍비의 서신을 갖고서 그 지역의 공동체에 가면, 그를 보낸 랍비의 권위를 그대로 갖는다. 거기서 그 공동체에 랍비의 서신을 낭독하고, 랍비의 가르침을 잘 전달하여서, 전달 목적이 이뤄지면, 그 율법 전달자의 권위와 사명이 그 것으로 끝나도록 한 것이었다. 간혹 전달자에 따라서 랍비적 권위를 항구적으로 갖는 이들도 있긴 하였다. 이는 복음서에서 멀리 있는 임금이 그의 사신들을 농장에 보내었던 형식과 일치함을(막 12:1-12) 보아서 그 시대의 전달자의 역할과 기능은 오늘 우리의 특별대사와 같은 성격을 띤다.바울에게 있어서도 그의 로마서 서신을 겐그레아의 여집사 뵈뵈에게 맡겨서 로마에 전달하도록 하였는데, 상식적으로 당시 정황을 보아서 로마서 서신을 낭독하고 가르치고 바르게 전달하는 사명을 가졌음을 인식할 수 있다. 바울이 서원이 있어서 머리와 수염을 밀고 특별한 기간을 보낼 적에도, 그가 뵈뵈의 교회에서 지낸 것을 보면, 뵈뵈와의 인격적인 관계가 제자와 스승의 관계임을 예측할 수 있다. 베드로 서신에서(벧후 3:15-16) 바울의 가르침을 사사로이 다룰 수 있는 가르침이 아닌 것으로 인식한 것을 보아도, 바울이 안심하고 자신의 복음을 전달할 자를 여 집사로 선별하였다는 것은, 뵈뵈가 얼마나 삶과 믿음과 가르침에서 바울의 신뢰를 얻은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더더욱 로마서가 다룬 바울의 복음에서 강한 자와 약한 자와의 갈등도 다룰 뿐 아니라, 윤리와 도덕적인 부문도 거론하고 있어서, 신앙과 실천에서 여간 훈련된 사람이 아니면 지혜로움이라든지 도덕적인 실천면에서 권위를 세울 수 없었을 것이다. 특히 죄와 사망의 법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살도록 청중으로부터 공감을 이끌어 내려면, 복음을 전달하고 가르치는 자가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지 않고서는 불가하였을 것이다. 로마에 바울의 복음을 전달한 뵈뵈는 단순하게 복음서를 전달한 짐꾼이 아니었음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사사 드보라가 등장하였을 시기에, 납달리 지파와 스불론 지파를 통솔하는 바락도 나서기를 꺼려하는 전쟁에서, 여인으로서 군대사령관으로 등장하는 이야기를 보면, 여성 드보라의 지혜, 담력, 카리스마가 남성으로 형성된 군대를 이끌기에 압도적인 권위와 능력을 갖추었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처럼 남성들이 대표권을 갖고 우선권을 갔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누가의 복음서 사도행전에서 여 제자 다비다가 이미 그 사회에 상주하였고, 빌립집사의 딸들이 여선지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었던 것을 보면, 오늘 우리시대의 워킹 맘들이 유리 천장을 뚫고서 대통령이 되는 것이나 회장으로서 경영자의 위치에 있는 것에 낯설지 않은 것과 같다.바울은 로마서를 마치면서 사도들 가운데서도 실력과 활동이 출중한 여사도 유니아를 언급하였는데, 그녀도 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하다가 옥고를 치룬 사도였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공산주의의 장막에서 복음전도를 펼쳐서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영향을 주고, 놀라운 성과를 이끌어내신 분들 중에 여성들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을 보아서도, 오늘 우리 교회가 전통적인 편견과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안목을 가져야 할 때가 되었다고 본다.로마로 보내는 복음을 기록한 바울은 옥에 갇히고, 그 복음을 로마에 전달한 사도는 남성이 아닌 여성이었음을 주목해 보자. 바울 주변에는 바울의 신뢰와 바울이 가르친 교훈에 탄탄하게 무장된 동역 자들이 수많이 있었다. 화가 렘브란트에게 있어서 ‘탕자의 귀향’이 그의 삶과 영혼을 그대로 나타내는 유작이라면, ‘로마서’는 그가 그의 생애 중에 목숨을 내걸고 전한 복음을 정리한 최고의 유작이라 할 수 밖에 다른 말은 할 수 없다. 그런데 이와 같이 섬세하고 온 힘을 다하여 기록한 유작을 뵈뵈에게 맡겼다는 것을 보면, 그 무언가 남성들이 잃어버리는 것들을 여성들이 만회할 수 있었음이 아닐까? 뵈뵈는 특히 우리 남성들이 중독된 권력, 명예, 돈 같은 것에서 자유 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지금까지 수많은 남성지도자들이 한국교회의 대표권을 가지고 한국교회를 이끌어 왔지만, 저들의 책임과 형편이 지난날 세월호가 전복된 이후, 밤새 야반도주하다가 매화 밭에 쓰러져 백골이 되었던, 그 아무개 교주와 같은 처지가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드는 것은 왜일까?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6-06-10
  • 성육신한 예수교회-14
    엘리야가 등장하던 시기의 이야기이다. 당시 정부가 얼마나 부패하고 쇠약하였던지, 말 한마디라도 할 줄 알았던 선지자들은 입을 놀리다가 그만 거의 죽었거나 옥중에서 시간을 보내던 시기였다. 디셉이라는 촌구석에 한 무명 선지자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이 ‘엘리야’이다. ‘야웨가 하나님이시다’라는 말을 이름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서, 부모가 작명하여 준 것이라면, 그 시기에서부터 저들의 신앙이 흔들리고 있었다는 증표일 것이다. 어찌하였든지 간에 야웨 하나님을 제 자리에 돌려놓으려는 의지가 강력하게 엿보이는 이름임을 눈치 챌 수 있다. 그가 이제까지는 무명한 선지자였으나, 이제는 선지자의 씨가 말라서 엘리야라도 등장해야할 시기가 왔던 것이다.엘리야 선지자는 사람들 앞에 서서 “내 입에서 하늘로부터 비가 온단 말이 떨어지기 전에는, 이 땅 어느 구석이든지 비 한 방울 안 떨어지리라”하였다. 이는 저들이 숭배하는, 번영과 풍요의 신인 바알을 지명하여 대적한 것이었다. 인간이 모이면 여러 가지 모사를 꾸미고, 국가의 안전과 평화를 꾀하지만, 어디 그러한 것들이 사람 마음대로 되어 지느냐는 것이다. 정치 놀음에서 서로 주고받다 보면, 하나님은 멀리 보내 놓고 술수를 꾸며서, 도덕적인 것은 내버리고, 경건의 모양만 요란하게 하여 종교 의전만 풍성하게 해서, 민중들의 마음만 사려는 일들이 비일비재하였다. 어느 순간에서 부터는 야웨 하나님의 자리를 ‘바알’이라는 풍요와 번영의 신이 차지하고 말았던 것이다.이즈음에 무명 선지 엘리야는, 온 세상에 선지자라고는 나 하나밖에는 남지 않았으니, 내가 침묵을 지키면 하나님이 내게 벌을 주시리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저는 마지못해서 일어나 일성을 터트리었는데, 처음부터 목숨을 걸고 적극적이 공세를 펴기 시작하였다. 당시 어리석은 민중들은 늘 상, 때마다 흥겹게 벌이는 축제의 신인 바알이 온 세상에 비를 가져오고, 그 비가 오는 덕에 풍요와 번영이 온다고 생각하였던 것이었다. 먼저 형장의 이슬이 된 선배 선지자들은 그 땅의 관리들의 도덕성이 어쩌고, 신앙이 어떻고 하다가 옥에 갇혔지만, 엘리야는 문제의 핵심을 파고들었던 것이다. 이 세상의 주인은 바알이 아니고 ‘야웨가 하나님이시다’임을 선포하고 험증하는 사건을 유발시킨 것이었다.세인들은 엘리야를 볼 적마다 웬 미친......? 하였다가, 일 년 지나 이년 지나 삼년이 되었는데, 정말 하늘이 납처럼 굳어진지 오래고, 웬만한 땅에는 물을 구경할 수가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 즈음에 엘리야는 갈멜산 꼭대기에서 바알의 선지자들과 만나 누가 이 땅에 비를 주시는 하나님이신지, 누가 거짓된 신인지를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확실하게 식별하자는 것이었다. 삼년간 비가 오질 않은 그 땅의 군주는, 오로지 비가 와야 정치적 안정도 함께 오기 때문에, 바알의 사제들을 갈멜산에 집결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엘리야는 무너진 제단을 다시 수축하고, 그 위에 각을 떠서 희생의 제물을 하나님 앞에 진설하였다. 그러고서는 선언하기를, 이 제단에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와서, 제물을 흠향하시는 분이라야 참된 하나님이시라는 것이었다. 이날 야웨 하나님은 엘리야 제단의 그 희생에 불을 내려서 흠향하시고, 야웨가 하나님이심을 시위하셨고, 이어서 하늘을 여시어 삼년 육개월 만에 흡족하게 비를 내리시었다.그런데 오늘 우리 한국 땅에도 이와 비슷한 정황이 벌어진 것이다. 대형교회의 지도자들 거의가 도덕적 결함으로 인해서 권능을 상실한 것이다. 누가 우리에게 참 하나님이시고 구원을 가져 오시는 분이신가에 대해서 혼란에 빠지고 만 것이다. 한 분은 지상에서 공개적으로, S교회의 O목사님이 그 교회를 사임하였다면 한국교회는 다시 일어설 수가 있었는데, 그 남은 기회마저 거의 다 써버린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자신의 영달과 부귀와 권력을 놓아 보내지 못하는 그 처사를 인지한 이들은 뼈아픈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으리라.아마도 하늘에서 불이 떨어진 그 제단은 정말 순수한 제물로 준비된 희생이었을 것이다. 누군가가 가장 소중한 기우제를 준비한다면, 그도 가장 극상품으로 희생을 준비하였을 것이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도 이 땅을 치유하시고 인류의 죄악을 사유하시기 위해서, 아버지 하나님에게는 하나 밖에 없으신 유일한 독자 예수를 희생의 제단에 올리시질 않으시었던가? 3년 6개월 동안 비 한 방울 오지 않은 상태에서, 이 백성들의 가슴을 하늘의 단비로 적시어 주고, 참되신 하나님을 보이고, 교회를 다시금 일으키려면, 이 땅의 누군가가 딱 한사람! 그 사람 스스로가 제물이 되어 준다면, 바로 그 위에 하나님의 불이 내려오고 비도 내릴 것이리라......,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6-06-02
  • 성육신한 예수교회-13
    얼마 전 가톨릭의 교황께서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 가운데에 의전용 차량을 무엇으로 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의논이 많았다. 마지막에 가서는 모 회사의 S 차량이 낙점 되어서, 사람들은 정말 그분이, 우리 평민들이 타고 다니는 차를 타는 줄로만 아는 이들이 많았다. 국가적 이득과 한 기업의 발전을 위해서도 우리 차량을 의전용 차량으로 사용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익이 되었기 때문에, 아마도 사람들은 더 이상 말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허지만 성직자들이라고 한다면 생각이 많이 달라지리라는 판단이 든다. 조금만 더 신중하게 생각해 보면, 어쩌면 그 처사가 일반 신도들의 눈을 가린, 깊은 신앙심을 이끌어내는 일에는 실패를 야기하진 않았는지......, 의전용으로 특별하게 제작되어 나온 차량은 세계 유일한 고가품으로, 말이 소형차이지 결코 소형차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 기업의 명예와 국가적인 위엄에 걸맞게 특수하게 제작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비용이라하면 아마도 이 세상에 가장 고가인 차량과 맞먹는 인력과 기술과 시간이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엘리야가 마차를 타는데, 전통적으로 세상에서 유일한 고가의 비용을 들인 의전용 차량을 탔다면, 아마도 전통을 따르느라고 그렇게 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허지만 오늘의 종교가 언제부터인가 이렇게 의전과 전례에 숨어버린 후로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드리질 못하였다. 오히려 세속적인 인기와 권력과 명예심에 고양되어서 본래의 자리를 떠나버린, 예수를 못 박아서 십자가에 매어단 그 당시의 사제들과 다르지 않게 된 것이다. 영국에서 오랜 동안에 지구촌의 수많은 신도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존 스토트 신부가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갔다. 그가 떠나기에 앞서서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유작이 있는데, 그의 평생의 삶과 신학과 믿음을 대변하는 글들이 간단하게 압축되어져 있다. 우리말로는 ‘제자도’라고 번역되었으나, 원제는 “The Radical Disciple”이다. 이 책은 마치 영국인의 신앙심을 구원선에 비유한다면, 마치 배의 무게중심을 잡아주는 추와 같은 느낌을 같게 된다. 지난 20세기의 영국인들의 삶을 안전하게 인도해준 거대한 균형 잡힌 크루즈 선이라고 할까나? 이 글을 읽는 이들은 누구나 안전감과 편안함을 느꼈을 것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많은 역사학자들이 2차 대전에서 영국이 독일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외적 요인 보다는 저들의 내면에서 나타나는 차이 때문이란 것이었다. 존 스토트가 말하는 교회란, 거친 바다에서 맥없이 넘어져 침몰한 세월호 같은 류의 시스템이 아니기 때문이다.얼마 전인가 분당의 W 교회의 목사님이 이웃교회의 헌신예배에 오셨는데, 간편한 차를 몰고 들어오는 것을 청년들이 보고서는, 다들 ‘역시 저러니까......,’ 하였다는 소릴 들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는 몸집을 너무나 키웠다. 아무도 우리 교회가 이렇게 커질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갑작스레 커지는 바람에 아무도 이 사이즈와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설계를 하질 못하였다. 세월호를 제작하고 운행하는 책임자들이 오로지 돈에만 마음을 빼앗겼던 것처럼, 우리는 사람들이 운집하여 밀려들어오는 것만 좋아하였다. 한국교회는 이만한 구원선을 운행할 수 있는 항해도나 엔진이나 운영진이 부재하다. 크루즈 선을 운행하는 책임자라면 당장에 내릴 수 있는 조치란 무엇일까?아마도 세월호의 사고 기록과 전복의 요인들에서도 밝혀진 바와 같이, 무게 중심에 맞추어 모든 상황에 대응할 수 있도록 인원과 물량을 조절하는 것이다. 어네스트 섀클턴이 남극 탐험 중에, 배가 부빙에 갇혀서 깨어지자, 모든 승무원들이 탐험대장 섀클턴의 지시에 따라서 ‘인듀어런스호’를 버리고 하선한다. 감당할 수 있는 짐만을 갖추고는 미련 없이 소중한 것들을 포기하게 되는데, 살아서 돌아오려는 의지 때문이었다. 우리 한국교회가 조선의 예루살렘이라 하는 교회와 고향을 버리고, 심지어는 가족들마저도 챙기질 못하고 야반도주하다시피 북에서 남으로 넘어온 쓰라린 경험을 갖고 있다. 가족들이 흩어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먹고 잠자고 입을 것도 없어서 사경을 헤매었으나, 그 때 살아남은 신앙인들은 다시금 조국과 교회를 일으킬 수 있었다. 바울이 금고상태에서 로마로 가는 배에서 하던 말을 기억해야 한다.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는 모든 짐을 바다에 버리고, 배도 버려야 한다.” 그 후 저들은 살아서 로마교회를 세울 수 있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교회를 살리려는 의지가 있다면, 시간적으로 선택권이 많지 않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6-05-19
  • 성육신한 예수교회-11
    마태가 그의 복음서 맨 마지막에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하였음은 무엇을 말함일까? 이는 필히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를 삼으라는 말이기도 하지만, 더 구체적으로는 마태복음서가 이르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는, 훈련된 제자를 양성하라는 뜻일 것이다.마태복음의 ‘주기도’ 또한 그 핵심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에 기저를 둔 하나님나라 운동을 위한 기도로서 구성되었기에, 이 기도에 적합한 인격과 성품과 열매를 이루는 훈련이 필수적으로 따랐을 것임이 분명할 것이다. 마태의 주장대로 남을 가르쳐 지키게 하려면, 제자들의 의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을 앞질러야 한다는 것인 만큼, 그 뜻하는 바를 제자들은 확실하게 인지하였을 것이다. 공관복음에서와 요한복음에서도 상세히 나타내고 있는 바, ‘안다’라는 뜻은 여간 안다고 해서는 ‘안다’라는 말을 할 수도 없다. 우리네가 요즈음 악성 댓글 루머 등과 같이, 그렇고 그런 수준에서의 가벼운 앎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앎은 높이와 넓이와 깊이와 길이가 어떠함을 아는 것이기도 하지만, 오랜 시간과 훈련이 중첩되어서 쌓아진, 신뢰가 형성된 앎을 지칭하기도 하고, 한 젊은 부부가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며 깊은 관계를 맺은 나머지, 아이를 낳는 관계에 이룸을 말한다. 그래서 ‘아담이 하와를 알매 가인을 낳고’에서, 이 ‘안다’는 말이 ‘동침하다’라는 말과 같이 사용되어지는 것을 보면, 소문으로 들었거나 거짓 의도를 지닌 악성 루머에 현혹되어 갖추어진 지식을 말하는 것은 더더욱 아닐 것이리라.그래서 복음서의 청중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는 복음 전달자들을 보았을 때에, 그들의 리프서비스 같은 말재간에 마음을 빼앗긴 것이 아니라, 그들의 태도와 삶에서 우러나오는 인격을 보고, 복음을 제대로 소화하여서 가르치는 바가 흔들림이 없고, 성령께서도 그들의 말씀 사역에 동참하여 주셨기 때문에 알 수 있게 된, ‘그리스도의 복음’ 지식을 가리키는 것이었다.지식 중에는 학습된 지식도 있고, 경험적인 지식도 있으나, 훈련하지 않으면 갖추어지지 못하는 지식이 있다. 예를 들어서, 전도를 해서 실질적으로 얻는 지식과, 전도하는 사례를 읽거나 듣고서 얻은 지식은 확실하게 차이가 있어서, 그 간격은 오로지 실습과 훈련으로 메워지는 것이라서, 연습을 게을리 하는 자들은 터득하지 못하는 지식이다. 펜싱 같은 경기가 이론적 지식만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것과 같다. 한 예로, 어느 교회가, 그 교회 구성원에 침투된 적의 첩자를 인지하는 데에 게으른 나머지, 그 첩자가 뿌려놓은 악성 루머나, 그 첩자가 중심 지도권에까지 접근되어서, 치명적인 타격을 받고, 교회의 문을 닫게 되는 지경까지 이르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경우는 그 교회가 도덕적인 부문에서도 노출되었겠으나, 특히 계시적인 지식이 부족함으로 인해서 비롯된 것이다. ‘교회’란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몸이고, 성령이 운행하시는 거룩한 하나님의 지성소이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그 교회를 떠난 경우라면 말할 나위가 없겠으나, 적어도 교회가 교회되려면 음부의 권세에 넘어지지 않도록, 성령이 말씀하시는 바에 예민하게 응답하는, 계시적인 지식도 갖추어져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여 주신 전도자들은, 이에 적합하게, 복음을 명료하게 인지하고 있었고, 그 복음에 합당한 삶과 열매도 갖추어서, 저들을 세상으로 파송하는 교회는 안정된 든든함이 있었던 것이다. 흔한 예로, 우리가 신학을 갖추면 다 된 것으로 치부하는 경우가 있어왔다. 그런데 우리보다 앞선 복음 전달자들은, 복음을 전할 때에 복음도 바르게 잘 전하였지만, 복음이 선포 될 때에 성령의 나타남 까지 융합되어 있었고, 베드로가 고넬료 집에 갈 때에 있었던 계시적인 지식까지도 구비되고 있었던 것이다.복음으로 바르게 학습된 훈련된 제자란, 주님의 통치 아래에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을 하나님나라 안으로 인도한다 함은, 곧 그리스도에게 다스림을 받는 자리로 오는 것이며, 사람을 용서할 뿐만 아니라 치료할 줄 안다는 것이다. 복음의 핵심인 ‘하나님사랑-이웃사랑’이란 인격을 회복시킬 뿐만 아니라, 귀신을 결박하고 내어 쫓는 능력이다. 우리 사회의 공동체 지수가 OECD국가 중에서 36위로 뒤쳐져 있고, 사회적 갈등의 골이 깊은 것은, 현대의 복음 전달자들의 훈련됨이 초대교회보다 뒤처져있음이 아닐까? 오늘의 교회만큼 갈등의 골이 깊고, 집단화된 이기주의가 이렇게 팽배하게 된 원인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6-04-27
  • 성육신한 예수교회-10
    복음서의 하나님나라 운동에 있어서, 앞서 등장한 세례요한의 활동을 보면, 그 그룹이 중요시한 운동의 요소 중에 하나가 ‘공동체가 함께 드리는 기도’였다. 마틴 루터 킹이 인종차별을 그치기 위해서 시작한 사회적인 운동에서도, ‘을’이 ‘갑’질하는 사회 지배층인 백인들로부터 기본권을 되찾는 요소 중 하나가 ‘노래’인 것을 보면, 그 노래 또한 ‘기도’였던 것이다. 그가 외친 ‘우리에게는 이런 꿈이 있습니다.’라든지, ‘우린 승리하리.’라는 구호적인 노랫말과 선포는 모두 기도의 성격을 띠고 있었고, 이러한 기도야말로 인종차별을 그치고, 인간 개개인의 자유를 획득하는 데에 성공적인 요인이 되었다. 기도야 말로 하나님나라를 확실하게 세우게 하는 지렛대역할이 된 것이다.예수께서 하나님나라 운동을 하면서, 그의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신 마태복음에서의 ‘주기도’를 들여다보면, 기도가 길고 장황한 것처럼 보일 수는 있겠으나, 실제로 핵심적인 언어는 두 개의 기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마태복음서 전반에 깔려있는 가르침으로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 할 수 있다. 이 두 기둥을 가지고서 마태 서기관은 하나님나라를 세우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예수가 전파한 하나님나라란, 하나님의 품을 떠났던 아담이 다시금 아버지의 품 안으로 돌아오는 것을 말한다. 아담의 타락 이후, 하나님이 그에게 물으신 질문이 ‘아담아. 네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 ‘가인아. 네 아우가 어디에 있느냐’에서 엿보이듯이, 하나님은 인간의 소재, 현 위치에 관해서 지속적으로 묻고 계심을 알 수 있다. 타락한 인간은 그의 주인이신 하나님으로부터도 멀어졌지만, 그의 형제인 이웃에게서도 소외된 상태이다. 이러한 성경의 질문 앞에서 아담은 ‘내가 부끄러워서 숨었나이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고, 가인도 역시 아주 옹색한 대답,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하는 모습이야말로, 바로 오늘 우리의 현 주소를 대변하는 것이다. 이 타락한 인간의 소재에서, 하나님이신 아버지의 집으로 되돌아오고, 형제와 함께 동거 동락하는 자리로 되돌아오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은 제자들에게 확실하게 각인되었고, 복음을 기록한 서기관에게서도 명료하게 정리되면서, ‘하나님나라’는 대중들에게 이해의 깊이가 깊어지고, 질량도 충실하고 폭도 넓게 볼 수 있게 되었다. 마태나 누가는 이러한 사정을 책으로 편집하면서 그에 대한 답을 해야 했기에, 우리는 풍부한 하나님나라의 안을 잘 들여다 볼 수 있게 된 것이다.제자들의 삶에서도 들어난 바와 같이 ‘하나님나라’ 운동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권’ 회복이다.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을 거부하고, 다양한 이유들을 붙여서 떠나버린 오늘의 인문학을 비롯해서, 공산주의나 진화론 주장자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공공연하게 거절하고, 인간 스스로가 출생하고 떠나가는 것처럼 모든 것을 꾸며대고 있지만, 하나님은 꾸준히 타락한 아담에게 지금 즉시 돌아오라고 부르고 계신 것이다. 누가복음 15장에서의 ‘아버지의 집에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는, 아버지의 풍성하신 생명과 평화를 공급 받기 위해서, 아버지의 사랑 안에 정착한, 인간 구원의 이야기이다. 이 집에서는 아버지의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돌아온 동생이나, 아버지의 집에 항상 함께 있어온 형마저도, 아버지의 사랑의 권위 아래서 용서와 평화를 누린다.과거 가톨릭이, 아버지의 집을 ‘가시적인 교회 제도’로 둔갑시켜서 교황의 치맛자락으로 들어오는 것을 구원인양 괴변을 늘어놓고, 성경을 봉인하고, 글도 가르치질 못하게 하면서, 오로지 거짓말로 백성들을 교회의 명령에만 복종하게 만든, 조지 오웰의 ‘Big Brother’와 같은 더러운 역사의 행태는, 결코 우리 개혁교회에서는 반복되어서는 안 되는 역사이다. 마가나 마태, 누가나 요한, 바울과 아볼로와 같은 증인들이 얼마나 명명백백하게 ‘하나님나라’를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에 기저를 두고서 전하였는가를 알아차려야 한다. 하나님께서 하나밖에 없으신 그 독생자(獨種子)를 십자가에 희생시키셔서 우리의 죄 값을 치르게 하심은, 타락한 아담을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게 하려는 것이다.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 아들이야말로 그 집의 상속자요 주인이 되게 하심이다. 단순히 배나 불리려고 돌아온 것이 아니다. 이는 더 이상 종이 아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회복됨이며, 아버지의 권위 아래서 책임을 지겠다는 뜻이다. 오늘의 교회가 진정 그리스도의 몸이요,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아버지의 집이라면, 돌아온 탕자가 책임을 다 할 수 있도록 용서와 화해를 학습하게 하고, 새 옷을 입히고, 인장을 끼어주어서, 적극적으로 하나님나라에 참여 할 수 있도록 역할과 자리를 구비해야 할 것이리라.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6-04-15
  • 성육신한 예수교회-9
    요즈음 인문학 강좌가 지나칠 정도로 본격화되고 있다. 정부도 덩달아서 금년부터는 여러 대학에 기금을 지원하는 만큼, 각 대학의 인문학 강좌들이 적극성을 띠고 있다. 심지어는 여러 대학의 인문학 교수들도 기업의 지원을 받아서 강좌들을 개설하는 열정을 보였는데, 인문학이란 창조주를 거슬리고, 조물주를 배재한 상태에서 인간이 주인이라는 취지하에 이뤄지는 것이라서, 다윈의 진화론 이론이라든지, 공산주의 이론이나 다원주의를 지지하는 이들의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심지어는 모 신학대학에서는 한 인문학교수를 초빙하여서, 교단 교역자들이 집결된 상태에서 그의 강의를 듣기도 하였는데, 그의 강의를 모두 들어보면 공공연하게 기독교를 부정하는 것은 물론, 창세기를 부정하거나 인류의 타락을 부정하는 주장을 공공연하게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는지 모르는지, 그의 이상스러운 강의에 집중하는 것 같아서, 한 교단의 교역자들 모두가 어리석었음을 공공연하게 들어내는 해프닝이 벌어진 것이다.어디 이뿐이랴? 기독교가 설립한 대학의 철학 교수들이 성경을 부정하는가 하면, 이단들도 조심스러워하던, 성경을 모욕하는 강론들을 시리즈로 유튜브에 올리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개신교 신학자들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아무도 시끄러운 소리가 아니 들리는지, 귀를 막고 있는 것인지 조용하기만하다.오늘에 와서 인문학 강좌란, 마치 뱀과 아담의 유비에서 뱀이 하는 그대로를 흉내 내어 말한다. 선악과를 따서 먹었기에 우리 인류가 이렇게 잘살게 되었다는 것이다.지나온 역사에서 가톨릭이 지나치게 인간을 억압하고 규제하여 묶어놓는 바람에, 지식인들이 반항하려 하던 것은 당연한 이치였을 것이지만, 오늘날 이렇게 인문학자들을 비롯해서 공공연하게 사회 전반이 기독교에 책망하고 있는 것은, 무언가 우리 기독교 안에서 크게 잘못되어가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무궁한 자원을 공급받고,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의존하려는 것만큼은 어느 누구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 바깥에서 교회에다가 집중 퍼붓는 포화는 오로지 오늘의 교회에 부재한 ‘열매’ 곧 하나님께 ‘순종’과 관련된 부문을 책망하는 것이다.창세기 경전이 우리 인간에게 들려주려는 인간의 창조된 뜻은,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하나님을 의존하고 순종하는 올바른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하나님이 이미 선물로 내어주신 우주 만물을 다스리고 돌보는, 하나님을 대표하는 하나님의 사람임을 천명하는 것이다. 지음을 받은 인간 아담은, 이 우주만물의 질서를 잡는 기준으로서, 하나님이 명하신 뜻을 잘 지켜내야, 우주만물의 질서도 따라서 지켜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담과 뱀의 유비에서 경전이 말하는 죽음이란,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됨으로써 온 결과이다. 제일 먼저 복음을 기록한 바울이 말하려는 것도, 이 하나님과 인간의 단절된 관계를 올바르게 회복한 것이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이었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아담이 불순종함으로서 비롯된 하나님과의 단절됨으로 온 죽음은, 예수가 마지막 아담으로서 오셔서, 그의 고귀한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줌으로서, 충분하게 죄 값을 치름으로 말미암아, 인간 구원의 길이 열려진 것이다. 여기서 인간구원이란,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인해서 올바르게 회복되었음을 말함이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죄 값을 치름으로 인해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뜻이다.바울이 하나님과 인간의 의로운 관계가 회복되었음을 알려서, 이렇게 좋은 소식을 들은 이들로,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아들을 믿게 하려는 것이었고, 마태를 비롯한 마가와 누가, 요한처럼 복음을 기록한 이들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의존만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할 책임이 있는, 아주 적극적인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려 함이었다. 계몽기에는 복음을 깊게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어서, 예수를 믿으면 천당에 간다는 영혼 구원에 비중을 두다보니, 저도 모르게 의존만을 강조하고, 그 나라의 의로운 관계인 책임 의식은 등한이 하였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갑작스레 덩치가 커진 만큼, 이에 따른 책임 또한 못지않다. 이제라도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생각하고, 든든히 세워가야 하는 책임을 적극 지어야 할 것이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6-04-06
  • 성육신한 예수교회-8
    몇 해 전이던가, 한 교회에서 전국적으로 교역자를 불러 모으고서 성회를 열었는데, 초청된 연사들이 거의 신학교 교수들이었다. 한 교수가 강연 중에 너무나 감격해서 눈시울이 벌게지는 가운데에, 칼빈 이후 500년 역사에 이렇게 성과적인 교회가 선 일이 없었다고 하자, 경청하던 청중들이 숙연해지는 것이었다. 바울이 그 날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확실하게 알게 될 것이라 하였는데, 칼빈이 세우려던 교회가 과연 오늘 우리 같은 한국교회일까?칼빈은 그 많은 강요와 설교와 실천들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으나, 그도 다 말하지를 못하고 하늘 아버지께로 돌아갔다. 킬빈은 종교개혁 오백년을 맞이하는 한국교회를 보고서, 하늘에서 통곡을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가 한국교회의 허물들과, 하나님나라의 통치에 아직도 들어오지 않고 있는 교회들을 보고서도 그리하겠지만, 자신이 세우려 했던 교회가 이렇게 사람들의 이기적인 욕망에 노출될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질 못했을 것이리라. 가톨릭을 오염시킨 바이러스에, 이제는 개혁교회의 교단과 교단들, 교회와 교회들에게 마치 구제역 같이 노출되었기 때문이다.칼빈이 태어난 지 오백년을 넘겼기에, 하늘에서는 여러 사도들과 주님과의 사귐에서, 개혁자들의 복음의 내용과 질, 그리고 주장들은 이미 바르게 조율되고 수정되었을 것이다. 그곳은 빛이 찬란하여 흑암이 없기 때문이다. 칼빈도 주님과 함께 있기에 온전하여 졌을 것이지만, 이 땅에 서있는 지금 이 교회들은 어찌 할 것인가? 종교개혁 오백주년 기념행사들이 학자들이나 학술 연구소, 교단마다 많은 행사들을 하고 있어서 다소 고무적이긴 해도, 지난 한국교회의 백주년 행사를 돌이켜 보면, 외형이나 내용, 교회의 질량이 변한 것이 없어 보인다. 외모가 내용을 결정짓는다고들 하는데, 세인들이 볼 적에도 한국교회의 외형이 바뀌질 않고 있다는 것이다.예수께서 유월절에 사람들의 기대를 안고서 예루살렘에 오르고 있었다. 제자들이 어린 나귀새끼를 구해 와서, 에쿠스 대신 포니를 탄 격이었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때 아닌 봄철이었는데도, 종려나무 가지를 예수의 행로에 카펫처럼 깔고, ‘호산나! 다윗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하면서 모두다 합창으로 칭송하였다. 이 행렬을 예측하고 있었던 당시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들은 두려움마저 엄몰하였다. 예수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삼일에 다시 세우리라’하였기 때문이다. 그 당시 주전180년에, 제사장들 일부가 쿰란지역으로 떠나갔고, 일부는 이미 이집트로 가서 헬라어로 된, 소위 ‘칠십인경’을 번역한 지성적인 그룹들이 있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울이나 히브리서 기자도 이 칠십인 경으로 학습된 이들이다. 당시 흩어져서 살던 저들이 주장하는 성전이란, 이미 건물과 장소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들어가, 하나님만을 전심으로 예배하고, 그 뜻을 실천하는 백성, 바로 그 공동체 자체를 ‘하나님의 성전’이라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만큼 성전 개념이 건물에서 공동체로 바뀌고 있었던 터이라서, 마치 예루살렘 성전은 누구라도 밀기만 하면 넘어갈 듯하였다. 헤롯 같은 정치인도 예루살렘 건축과 증축에 돈을 퍼부으면서, 그 자신이 스스로를 ‘성전을 짓는 자’란 의미로서, 메시아 명칭을 도용하고 있었던 터이기도 하였다.예수께서 세우려 하신 새로운 성전이란,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하나님을 의존하고 순종하는, 예수께서 우릴 사랑해서 십자가를 지신 것 같이, 서로가 이웃을 사랑하는 공동체이다. 예수의 공동체란, 제도나 계급이나 인종차별을 뛰어넘은, 모든 인류에게 열려진 공동체로서, 예수의 복음을 학습하고 실천하는 공동체를 지칭하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의 행렬이 예루살렘으로 돌진하자, 이를 두렵게 느낀 예루살렘의 대제사장 그룹은, 온갖 계략과 술수로서, 예수를 약식 재판과 십자가 처형에 넘겨, 예수운동을 종식시킨 듯 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는 다시 부활하여서, 그에게 나아오는 자는 누구에게든지, 자신의 희생을 통한 사죄의 은총과 의로움, 십자가의 피로서 새로이 계약된 하나님나라의 시민권을 부여한 것이다. 예수께서 세우신 하나님의 성전은, 그의 사도들이 선포한대로, 예수를 구주로 믿고 의롭다함을 얻은 새로운 백성으로 이뤄진 공동체이다. 당시 예수의 제자들이나 성경의 기자들이 세계 도처에 복음을 선포하고,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초대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통치가 실천되는 공동체를 세우려는 것이었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6-03-24
  • 성육신한 예수교회-7
    최근에 가장 관심을 집중시킨 ‘이세돌과 인공지능 ‘알파고’의 세기의 대결’을 보면서, 인간의 지성과 감성이 집단화 되어서 시스템적인 지성을 효율적으로 융합 시키면, 알파고를 이길 수는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인공지능은 감정이 없고, 우리 인간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는 일이 없어서, 내적치유를 받아야 할 이유도 없기에, 아무래도 기계와 인간이 총체적으로 대결한다면 기계가 한수 위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지워지질 않는다. 몇 해 전부터 반려 견을 키우는 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에서, 동물들이 그들을 돌보는 주인으로부터, 일방적인 돌봄을 받다가 갑작스레 소외와 방치, 심지어는 학대와 버림을 받음으로 인해서, 신뢰와 희망을 잃은 유기견이 된 경우를 많이 본다. 그런데 이 상처받은 짐승들에게 관심을 가진 한 방송사가 이웃나라의 한 동물심리사를 초청해서, 대략 30분 정도에 짐승과의 소통이 이뤄지면 즉각 상처가 치유되어서, 다시 건강하게 회복되어 장애 없이 활동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동물들 거의가 30분 정도면 시원하게 회복되는 것이었다.그런데 이와는 달리, 우리 인간 사회는 너무나 복잡하게 얽혀있다. 내적 치유가 쉽게 이뤄지질 않는다. 세계에서 사회적 갈등의 골이 가장 깊고, 이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비용이 지나치게 많이 치러짐으로 인해서, 국가 경쟁력마저 바닥을 칠 정도인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지난 4년간 국회가 운영되어지는 것을 보니, 무엇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있기나 한 것일까? 이렇게 국민을 두려워하질 아니하고 제 임무와 업무에 태만한 자들을 또다시 선출해야 하는 것인가? 형편이 이렇다보니 국민들 피로도가 너무 높다. 국가가 위기에 노출되었을 경우 시간을 놓치지 않고 다시 복구할 수 있는 능력이 과연 있기나 한 것일까?예수께서 가르치신 말씀 가운데에, 심판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어느 나라든 그 나라의 사회적인 기강을 바로 잡고, 국가 정의를 바로하기 위해서 법률심판관이 있기 마련인데, 신화에서도 보면 제우스가 들고 있는 막대기가 오늘의 계량기의 일종이다. 사람마다 죽어서 그 심판대 앞에서 계측을 받게 되는데, 성경에서는 저마다 그의 인격 내면에 블랙박스가 설치되어 있어서, 그 기록된 영상과 녹음들이 낱낱이 심판 주 앞에서 자동으로 고하게 된다는 것이다. 마태의 복음서에서는 계측기에 미달된 저들을 보내는 영원한 불 못이 등장한다. 이 불 못은 본래 마귀들을 위해서 준비된 것인데, 오히려 사람들이 그 불 못에 마귀들과 함께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마귀가 어떤 자 이기에, 저들을 위해서 특별하게 불 못을 만들어야 했을까? 사람이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였기에 악마가 들어갈 불 못에 함께 들어가야 한단 말인가? 그리고 마귀가 재판 받는 날에 저들도 함께 판결을 받는다고 하는 것을 보아서, 마귀나 사람이나 모두 그 근본이 하나이기 때문일 것이다. 마귀라는 자는, 천사들이 낮 동안에 밭에다가 부지런히 좋은 씨를 뿌리면, 저들은 밤중에 아무도 모르게 나쁜 씨를 뿌려서, 좋은 성과가 불가하도록 악순환 시킨다는 것이었다. 항상 거짓말과 속임으로 사람이 사는 세상을 더럽힌다는 것이다. 조금 고상한 말로 하면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란 것이다. 미국 대통령 오바마는 선거유세 중에, ‘아벨은 나의 이웃입니다. 나는 아벨을 지키는 자입니다.’ 라 하였는데, 이와는 달리 지식을 갖추었다는 어떤 나라는 군사력을 확대하여 이웃국가를 위협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시민들 모두가 그들의 거짓말을 신뢰하도록 고차원으로 연구해서, 정치인들에게 과외수업을 시킨다는 말들이 빈말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묵시 문학을 보면, 가장 원리적인 가르침을 시민들에게 한 것을 볼 수 있다. 어떤 종교지도자나 책임 있는 자들이 메시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하여도 요동하지 말라는 것이다. 성령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지혜로운 식별 능력을 주시기 때문이고, 이미 자신에게 정직한자는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기도 하지만,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기 때문이리라. 잠자는 자에게는 그 날이 도둑의 것이 되겠지만, 항상 그 마음이 깨어있는 자에게는 깊은 밤이라 할지라도 등불을 밝히고 기름도 넉넉하게 준비되어 있어서, 밤이라 할지라도 밤이 아니며, 재앙이 저를 삼킬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국민은 이미 삼중고를 짊어진 상태에 있다. 머리에는 핵을 이고 있고, 국가를 방위할 능력은 남에게 담보한 상태이고, 더더욱 처량한 것은 거짓말하는 무책임한 자들에게 둘러 쌓여있다는 것이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6-03-17
  • 성육신한 예수교회-6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성경에 등장하는 지도자들의 손에는 칼이 없었다는 것이다. 최근 모세가 등장하는 영화에서, 모세의 손에 칼을 쥐어주긴 하였지만, 이는 흥행을 위한 반짝 아이디어일 뿐이다. 성경을 기록하고, 가르치는 서기관들의 고집 가운데 하나가, 이스라엘의 손에 무기를 들리지 않게 하려는 의지가 뚜렷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아주 단단한 전술적 무기 체계를 갖추게 되었는데, 이는 수천 년을 유리하며 방황한 끝에 마련된 조치라 보인다. 만약에 백성들이 좀 덜 도덕적이고 해이해 진다하더라도, 무기 시스템을 구축한 상태에서는 평화의 균형이 그렇게 심하게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무장을 해제한 상태에서 백성들의 도덕성마저 결여된다면, 국가의 운명은 그야말로 최악의 상태로 치닫게 되기 때문이다.세계대전 이후 우리와 같은 처지에서 민주 정부를 수립한 국가들 중, 이스라엘이나 일본에 비교하여 보면, 우리 정부가 가장 국가방위와 안보에 취약하게 노출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더더욱 시민들은 주변 정세에 민감하지도 않을뿐더러, 정치인들마저 국가 실력을 구비하는 데에 총력을 기울이기 보다는, 종교인들의 기도행사를 더욱 의지하는 면이 두드러진다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을 앞두고 있던 시기에 율곡선생이 군사력을 증강해야 한다고 했으나, 정치적인 실리만을 챙기기에 바빴던 조정은, 당파 싸움에만 관심을 빼앗긴 나머지, 국가 방어력을 갖추는 데에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변두리 촌민의 눈에도 국가적 위기가 보이는데, 중앙의 책임 맡은 이들은 도대체 어디에 혼을 빼앗기고 있는지......, 밤이 깊어 자리에 누어도 차마 잠을 이룰 수 없으니 이 무슨 재앙인가?삼월 문턱에서 UN의 대북 제재가 결의되었는데, 이 같은 결의안은 북한에 예측 불가한 사태를 발생시킬 수 있다. 세계대전이 일어나던 시점을 보면, 주변국에서 지나치게 압박을 하자, 국민의 자존감에 깊은 상처를 주게 되었고, 소소한 충돌이 빈번해지더니 결국에 가서는 세계대전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하인리히 법칙이 알려 주듯이, 이미 우리에게 붉은 신호가 점등된 상태임을 알아차려야 한다.몇 가지 질문을 해 보자. 왜 우리에게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이 있는 국가들이 군사력을 증강하고, 전쟁을 할 수 있는 국가로 헌법을 수정하려는가를 생각해보라. 왜 그리 급하게 서두르고 있는가를 자문해 보라. 더욱이 이를 부추기는 미국의 속내는 무엇인가? 더욱이 우리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일들이 있어왔는데,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하기 이전에, 미국이 우릴 배재한 상태에서 저들과 만나고 있었다는 것이며, 뿐만 아니라 중국은 북한에 아무런 조치 없이, 우리에게는 도가 지나친 발언으로 연일 퍼부었던 것이다. 우리가 북한을 제재하기 위해 개성 공단을 철수하고, 싸드(THAAD)를 설치하려고 하였더니, 미.중이 만나 북한제재 안을 내어 놓고, 대북 제재를 충실히 하는 듯, UN 결의까지 이뤄졌다. 이 또한 불안한 요인이 아닐 수 없다.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 집권 시절 1991년 1월 7일 옌볜 자치주를 찾아, 옌지(延吉), 룽징(龍井) 혼춘(琿春)의 방천과 두만 강변을 둘러보았다. 후진타오(胡錦濤) 전 주석도 역시 부주석이던 2001년 8월17일부터 21일까지 4박5일 동안 옌볜을 방문했다. 이어서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2015년 7월 16일 옌볜자치주를 찾았다. 왜일까? 두만강과 압록 강변에 전진 배치되어 있는 군대는 어떻게 설명되어야 할까? 혈맹이라고 항상 불러대는 북한과 전쟁을 하려는 것일까? 두만강은 혼춘을 거쳐 동해로 흘러가나, 중국은 동진하려하나 코앞에서 러시아 국경에 막혀선지 오래다. 어디 그 뿐이랴, 러시아의 항구들은 겨울에 모두 얼기 때문에 군함들이 나진선봉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디 이들 뿐일까? 일본은 항시 대륙에 진입하기 위해서 우리 땅을 호시탐탐 엿보질 않던가? 이미 북한은 누수가 시작되어서 언제 붕괴될지는 시간만 모를 뿐이다. 수많은 북한의 동포들이 남한으로 들어온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북한이 갑자기 무너졌다고 한번 가상해보자. 우리의 지난 역사에 비추어 보아서, 가장 먼저 어느 군대가 이 땅에 들어오게 될까? 70년 만에 온 한반도의 지정학적인 전략적 호재를 이웃 국가들이 놓칠 리는 만무하다. 왕이 중국 외교부장이 민낯을 들어낸 바와 같이, 싸드(THAAD)가 배치되면 저들은 국경을 쉽게 넘어올 수 없다. 바로 싸드 배치가 반드시 이뤄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저들은 국익을 위해서 전략적 행보를 하지만, 우리는 국가 존속과 민족의 목숨을 담보하기 때문이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6-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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