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회장 김경원 목사)가 지난 5월 10일 덕수교회에서 개최한 제33차 열린대화마당에서 심창섭 교수(전 총신대 신대원장 및 부총장)가 발제한 원고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편집자 주>
생명의 실존적 삶에 대한 이해
칼빈은 하나님에 의해 그리스도로부터 부여 받은 생명을 가진 기독교인의 삶에 대해 소중함을 강조하고 있다. 칼빈은 우리의 삶의 주인이요 소유주이신 하나님을 쫓아서 삶을 이끌어 갈 때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참된 근원으로부터 그것의 교훈을 이끌어낸다. 성경은 우리의 삶의 주인이요 소유주이신 하나님께로 우리의 삶을 이끌도록 언급할 뿐 아니라 우리가 창조의 참된 조건과 기원에서 타락했다는 것을 가르치며 또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신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의 삶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표현해야 할 패턴으로서의 모범을 보여주신 것이다.
칼빈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삶의 모범에 쫓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하나님의 속성인 거룩한 삶을 추구하므로 하나님과의 연합의 관계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룩함이 공로가 되어 그 근거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들어간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중생한 삶의 결과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추구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은 악과 부정을 원치 아니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원한다면 당연히 우리의 삶이 거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칼빈은 그리스도로부터 새 생명을 얻은 그리스도인들의 성화적인 삶의 당위성을 속죄와 구원론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칼빈은 중생한 자의 삶의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요. 하늘에 소망을 둔 삶이어야 함을 강변한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의식이야 말로 올바른 삶을 세우는 가장 확실한 토대가 된다는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일반 철학자들의 도덕론은 단순히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는데 그치며 그 이상의 것,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에 대해서는 무지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모든 행동을 하나님이 다스리게 해야
그래서 칼빈은 영적 예배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야말로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고 권면하고 있다. 칼빈은 이렇게 함에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의 생각과 뜻이 하나님의 계획과 행동을 주관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반면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그분의 뜻과 지혜가 우리의 모든 행동을 다스리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한 삶이 아니라 매일 하나님을 향한 삶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칼빈은 이것이야말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은 생명에 이르는 관문이라는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헌신의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그리도인들이 소유한 생명의 존재 의미와 가치임을 역설하고 있다. 이것이야 말로 그리스도인에게 마땅히 일어나야 할 축복된 삶의 형태이며 이것은 곧 자기 비움의 삶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부인의 삶은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과 이웃의 유익을 위한 삶으로 채워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칼빈은 왜 자기 부인의 삶을 강조했는가? 칼빈은 자기 부인의 삶이 없이는 세상의 정욕에 사로잡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온전한 삶의 추구가 불가능 하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삶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귀결돼
그것(자기를 부인함)이 한번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면, 교만과 허식 탐욕과 욕심 그리고 화려함을 좋아하는 것과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데서 온갖 종류의 악행들의 여지가 없어진다(참조 딤후 3:2-5). 반면에 자기 자신을 부인하지 못하는 곳에서는 부끄러움도 모르고 추하고 거짓된 죄악에 빠지든지 어떤 유사한 덕목을 나타낸다 해도 그것은 자기 영광을 위한 부패한 욕심에서 나타난 것이다.
칼빈은 자기 부인은 주님의 명령이며 그것 없이는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는 것은 가능치 않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웃에 대한 의무는 자기 포기라는 결단이 없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 포기를 주장하는 칼빈은 인간의 본성은 원천적으로 자신만을 사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칼빈이 말하는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귀결된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은 무엇이든지 이웃과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아낌없이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웃과 교회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신자의 삶의 자세는 무엇인가? 칼빈은 우리가 교회의 공동 유익과 이웃을 위해 섬기는 태도는 청기지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칼빈의 생각은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며 이웃을 돌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물질관 때문이다. 그리고 칼빈은 청지기의 사역을 감당하는 유일한 길은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한 모든 것들에 대한 청지기이며 그로 인해 이웃을 도울 수 있도록 하셨다. 그리고 청지기직의 평가를 계산하기를 원하신다. 또한 올바른 유일한 청지기직의 길은 사랑의 법에 의해 시험되는 것이다.
그러면 칼빈이 이웃을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칼빈은 왜 이웃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가? 칼빈은 인간을 단순한 생태학적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된 생명체로 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칼빈의 위대한 인간존중의 사상을 볼 수 있다. 칼빈은 사람들이 선을 받을 자격이 대부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에게 서로 선을 행하라고 하나님이 가르친 것은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바로 이러한 원리에서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귀와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여기서 성경은 가장 최상의 길을 보여준다. 즉 우리가 사람들을 그들의 행위의 공로에 따라 판단하지 말고 그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고 인간을 생각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랑과 영예를 받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이다.
칼빈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엄성 때문에 알지 못하는 사람이든, 비천한 사람이든, 불학무식한 사람이든 혹은 전혀 가치 없는 사람이든 관계없이, 그 사람들 속에도 하나님의 아름다운 형상이 빛나고 있으므로 그들이 도움을 요청할 때는 언제라도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칼빈은 마 5:44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태도를 밝히고 있다.
우리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고, 악을 선으로 갚아 주며, 저주하는 자에게 축복한다는 것은(마 5:44) 정말 어려운 일일 뿐 아니라 인간의 본성도 완전히 거스르는 일인데, 그런 일이 이루어 질 수 있는 길은 오직 한가지 밖에는 없다. 곧 사람의 악한 것에 개의치 않고 그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부여 받은 선물
칼빈의 이웃사랑과 존엄사상은 또한 인간의 외형적인 행위에 의존하지 않는다. 칼빈은 사랑을 베푸는 자들이 인격적인 내적 변화가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은 우리 자신을 죽이는 일이며 그것은 사랑의 수혜자의 위치에 자신을 내려놓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리스도인은 자기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바로 그 사람의 입장에 자기를 가져다 놓고서, 그 사람의 불행을 마치 자기가 당하는 것처럼 그렇게 안타깝게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다운 감정이고 참된 동정심이라는 것이다.
칼빈은 인간의 생명이 하나님께로부터 부여 받은 선물이므로 우리의 삶 자체가 철저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목적의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존귀한 존재임을 주장하면서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칼빈은 중생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하나님의 뜻을 쫓아 이웃을 위해 자신을 낮추고 섬기는 청지기로서의 삶을 촉구하고 있다. 이러한 삶이 지속될 때에 생명의 가치와 존재 의미가 있는 것이다. 칼빈의 인간 생명 존중 사상을 보면 그가 왜 제네바 시민사회의 개혁을 위해 목회적 차원에서 온힘을 쏟았는가를 알 수 있다.
칼빈의 시민사회개혁의 신학적인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이 과제는 여러 관점에서 접근해 볼 수 있다. 칼빈의 성경주해를 통해서 그리고 기독교강요 연구를 통해서 집중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강요에 인용된 사도행전 2장 24절, 로마서 12장, 야고보서 1장 5절, 그리고 이사야 23장 18절에 대한 해석이다. 본고에서는 두 가지 관점에서 칼빈의 시민사회개혁의 근거를 검토하려 한다. 하나는 그의 신학주제 중 하나인 생명의 실존적 삶에 대한 그의 견해이며, 다른 하나는 그의 섭리교리와 정치윤리의 견해이다.
생명의 실존적 삶에 대한 이해
칼빈은 하나님에 의해 그리스도로부터 부여 받은 생명을 가진 기독교인의 삶에 대해 소중함을 강조하고 있다. 칼빈은 우리의 삶의 주인이요 소유주이신 하나님을 쫓아서 삶을 이끌어 갈 때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참된 근원으로부터 그것의 교훈을 이끌어낸다. 성경은 우리의 삶의 주인이요 소유주이신 하나님께로 우리의 삶을 이끌도록 언급할 뿐 아니라 우리가 창조의 참된 조건과 기원에서 타락했다는 것을 가르치며 또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신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의 삶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표현해야 할 패턴으로서의 모범을 보여주신 것이다.
칼빈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삶의 모범에 쫓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하나님의 속성인 거룩한 삶을 추구하므로 하나님과의 연합의 관계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룩함이 공로가 되어 그 근거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들어간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중생한 삶의 결과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추구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은 악과 부정을 원치 아니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원한다면 당연히 우리의 삶이 거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칼빈은 그리스도로부터 새 생명을 얻은 그리스도인들의 성화적인 삶의 당위성을 속죄와 구원론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칼빈은 중생한 자의 삶의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요. 하늘에 소망을 둔 삶이어야 함을 강변한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의식이야 말로 올바른 삶을 세우는 가장 확실한 토대가 된다는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일반 철학자들의 도덕론은 단순히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는데 그치며 그 이상의 것,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에 대해서는 무지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모든 행동을 하나님이 다스리게 해야
그래서 칼빈은 영적 예배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야말로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고 권면하고 있다. 칼빈은 이렇게 함에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의 생각과 뜻이 하나님의 계획과 행동을 주관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반면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그분의 뜻과 지혜가 우리의 모든 행동을 다스리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한 삶이 아니라 매일 하나님을 향한 삶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칼빈은 이것이야말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은 생명에 이르는 관문이라는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헌신의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그리도인들이 소유한 생명의 존재 의미와 가치임을 역설하고 있다. 이것이야 말로 그리스도인에게 마땅히 일어나야 할 축복된 삶의 형태이며 이것은 곧 자기 비움의 삶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부인의 삶은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과 이웃의 유익을 위한 삶으로 채워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칼빈은 왜 자기 부인의 삶을 강조했는가? 칼빈은 자기 부인의 삶이 없이는 세상의 정욕에 사로잡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온전한 삶의 추구가 불가능 하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삶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귀결돼
그것(자기를 부인함)이 한번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면, 교만과 허식 탐욕과 욕심 그리고 화려함을 좋아하는 것과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데서 온갖 종류의 악행들의 여지가 없어진다(참조 딤후 3:2-5). 반면에 자기 자신을 부인하지 못하는 곳에서는 부끄러움도 모르고 추하고 거짓된 죄악에 빠지든지 어떤 유사한 덕목을 나타낸다 해도 그것은 자기 영광을 위한 부패한 욕심에서 나타난 것이다.
칼빈은 자기 부인은 주님의 명령이며 그것 없이는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는 것은 가능치 않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웃에 대한 의무는 자기 포기라는 결단이 없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 포기를 주장하는 칼빈은 인간의 본성은 원천적으로 자신만을 사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칼빈이 말하는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귀결된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은 무엇이든지 이웃과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아낌없이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웃과 교회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신자의 삶의 자세는 무엇인가? 칼빈은 우리가 교회의 공동 유익과 이웃을 위해 섬기는 태도는 청기지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칼빈의 생각은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며 이웃을 돌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물질관 때문이다. 그리고 칼빈은 청지기의 사역을 감당하는 유일한 길은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한 모든 것들에 대한 청지기이며 그로 인해 이웃을 도울 수 있도록 하셨다. 그리고 청지기직의 평가를 계산하기를 원하신다. 또한 올바른 유일한 청지기직의 길은 사랑의 법에 의해 시험되는 것이다.
그러면 칼빈이 이웃을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칼빈은 왜 이웃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가? 칼빈은 인간을 단순한 생태학적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된 생명체로 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칼빈의 위대한 인간존중의 사상을 볼 수 있다. 칼빈은 사람들이 선을 받을 자격이 대부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에게 서로 선을 행하라고 하나님이 가르친 것은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바로 이러한 원리에서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귀와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여기서 성경은 가장 최상의 길을 보여준다. 즉 우리가 사람들을 그들의 행위의 공로에 따라 판단하지 말고 그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고 인간을 생각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랑과 영예를 받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이다.
칼빈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엄성 때문에 알지 못하는 사람이든, 비천한 사람이든, 불학무식한 사람이든 혹은 전혀 가치 없는 사람이든 관계없이, 그 사람들 속에도 하나님의 아름다운 형상이 빛나고 있으므로 그들이 도움을 요청할 때는 언제라도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칼빈은 마 5:44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태도를 밝히고 있다.
우리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고, 악을 선으로 갚아 주며, 저주하는 자에게 축복한다는 것은(마 5:44) 정말 어려운 일일 뿐 아니라 인간의 본성도 완전히 거스르는 일인데, 그런 일이 이루어 질 수 있는 길은 오직 한가지 밖에는 없다. 곧 사람의 악한 것에 개의치 않고 그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부여 받은 선물
칼빈의 이웃사랑과 존엄사상은 또한 인간의 외형적인 행위에 의존하지 않는다. 칼빈은 사랑을 베푸는 자들이 인격적인 내적 변화가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은 우리 자신을 죽이는 일이며 그것은 사랑의 수혜자의 위치에 자신을 내려놓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리스도인은 자기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바로 그 사람의 입장에 자기를 가져다 놓고서, 그 사람의 불행을 마치 자기가 당하는 것처럼 그렇게 안타깝게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다운 감정이고 참된 동정심이라는 것이다.
칼빈은 인간의 생명이 하나님께로부터 부여 받은 선물이므로 우리의 삶 자체가 철저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목적의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존귀한 존재임을 주장하면서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칼빈은 중생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하나님의 뜻을 쫓아 이웃을 위해 자신을 낮추고 섬기는 청지기로서의 삶을 촉구하고 있다. 이러한 삶이 지속될 때에 생명의 가치와 존재 의미가 있는 것이다. 칼빈의 인간 생명 존중 사상을 보면 그가 왜 제네바 시민사회의 개혁을 위해 목회적 차원에서 온힘을 쏟았는가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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