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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수능생을 위해 기도하는 아름다운 모습들
- 해마다 수능이 임박해 오면 저희 교회는 100일전부터 금요일마다 수험생 부모님들을 대상으로 청지기로서 어떻게 자녀들을 양육하고 기도해야 할지 훈련받는 시간을 갖고 특별기도회를 합니다. 특히 지난 한 주는 온 교인이 수험생과 자녀를 위한 특별새벽기도로 함께 격려했고, 주일예배 시에는 수험생들을 위한 안수기도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지난 목요일 수능 당일에는 오전 8시 30분부터 오후 5시 40분까지 수능 시험 시간표와 동일한 시간대에 수험생들과 한 마음으로 온 교회가 함께 금식을 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저도 온종일은 못하지만 아침 금식을 하고 기도회에 합류했습니다. 물론 저희 집사람은 하루 종일 기도에 동참을 했습니다. 그리고 저와 교역자들은 틈이 나는 대로 본당에 와서 기도를 했습니다. 특별히 저는 3층 본당에 나와서 300여명의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니까 옛날 제 아들, 딸이 수능시험 볼 때처럼 가슴이 애처로워지고 눈물이 핑 도는 것입니다. 저는 수능생 자녀들의 이름을 부르며 최상의 컨디션을 주시고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점수를 달라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이러한 기도회를 하는 것에 대해서 비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수능은 상대가 있어서 경쟁하게 되는데 자기 자식들이 남의 자식들을 이겨서 좋은 대학에 입학하게 해달라는 이기적인 기도를 하기 때문이라고 말이죠.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그런 주장이 옳다면 그런 비판을 하는 사람들은 자녀들을 위해서 전혀 기도를 안 할까요. 자녀들이 수능시험을 보는데 잘 보든, 못 보든 자기 운명에 맡기면서 부모는 기도도 안 하고 자기 일만 보겠습니까. 남의 일이니까 그렇게 말을 하는 거죠. 그리고 그렇게 비판하는 사람은 직장에서 승진 심사가 있을 때 항상 남에게 양보만 하겠네요. 먼저 상대가 잘 되도록 하고 자신은 영원히 말단에서 근무해야 할까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간절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늘 말하지만, 간절함이 있으면, 그 간절함은 자신을 감동시킬 뿐만 아니라 하나님까지도 감동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돌파구도 뚫고 나갈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간절함이 없으면 핑계만 대고 남을 비판하고 공격을 일삼습니다. 물론 자기 자녀의 입신양명을 위해서만 기도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녀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나중에 잘 되어서 하나님을 잘 섬기고 남을 섬기며 살도록 기도하는 것은 지극히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에서는 무조건 자녀가 좋은 대학에만 들어가는 기도를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라나 이웃을 섬기며 세상을 섬기도록 가르치며 기도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처럼 또한, 요셉처럼 하나님의 복이 그를 통하여 흘러가도록 기도합니다. 저는 그런 마음으로 자녀를 위해 금식을 하며 기도하는 부모들의 모습이 그렇게 아름답고 숭고하게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 기도는 정말 주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숭고하고 존엄한 기도였습니다. 그래서 저도 수험생들을 위해 기도하는데 더 애절한 마음이 생기고 수험생의 이름들이 제 가슴을 문지르는 것 같아 더 애절하게 기도를 하였습니다. 물론 기도를 한다고 해서 모든 수험생들이 다 시험을 잘 보리라고 확언할 수는 없습니다. 기도는 마술이 아니기 때문이죠. 애절하게 기도한다고 해서 바라는 점수대로 다 나올 수는 없습니다. 저 자신도 고등학교 시절 너무 교회 생활에 빠지다 보니 학교 성적이 떨어졌습니다. 그러니 제가 공부한 만큼 실력을 거둘 수밖에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점수가 낮게 나오더라도 기도한 만큼 하나님은 당신을 향한 계획과 플랜을 이루어간다는 건 확실하게 장담할 수 있습니다. 점수가 높게 나오건 낮게 나오건 하나님께서 모든 걸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 역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오늘의 소목사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점수가 잘 나오건 못 나오건 우리는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거기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수능생 부모님들이 기도한 그 기도가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입니다. 부모들은 이번 기회에 자녀들을 위하여 기도의 씨를 심고 기도를 축적한 것입니다. 이번 수능시험 점수에 상관없이 거기에 반드시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할 뿐만 아니라 수능 시험 이후에도 그 기도는 하나님의 선하심의 역사에 기필코 작용을 해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해왔던 수험생 부모들의 기도는 아름답고 위대하고 가치가 있었습니다. 부모가 흘린 눈물의 기도의 씨앗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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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수능생을 위해 기도하는 아름다운 모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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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남산의 추억을 재발견하다
- 지난 목요일 오후에 서울 장충교회에서 있었던 서울지구 장로회 정기총회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 후에 몇 분이 저에게 주변 호텔 커피숍에서 면담 시간을 달라는 요청이 있었습니다. 제가 그분에게 “답답한 실내보다는 남산 길을 걸으면서 이야기를 좀 하면 안 되겠습니까?”라고 제안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남산 길을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길을 걷는 도중에도 무슨 전화와 문자가 많이 오는지, 또 저를 알아보고 인사하는 분들도 계시고요. 그때 같이 동행하시는 분이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총회장이 끝난 지가 언제인데 이렇게 많이 연락이 옵니까? 남산에서도 알아보고 인사를 하는 분들이 있으니 정말 놀랍습니다.” 그분과 첫 번째 면담을 끝내고 또 한 팀을 만났습니다. 그분들과는 남산 타워 앞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분들을 보낸 후에 잠시 남산 벤치에 앉아서 가을 단상에 젖어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붉게 물든 단풍이 아름다워서 단풍잎이 떨어질 때마다 “가을 엽서 한 장 한 장이 떨어지는구나”라는 생각을 했는데, 문득 삼십 수년 전의 추억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때 저는 개척 멤버 한 명도 없이 맨손, 맨몸으로 교회를 개척해야 했습니다. 광주에서 개척을 한다면 조그마한 땅에서 조립식 건물을 짓고 시작하자는 문정남 장로님의 말씀도 계셨지만, 저는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이 있고 감동이 있어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서울 어디에서 시작할 것인가가 문제였습니다. 맨 처음에 목동을 돌아보고 상계동도 다녀보았습니다. 그런데 교회 예배처의 임대료가 너무 비싼 것입니다. 그래서 한 번은 남산 타워에 올라갔습니다. 남산 타워를 몇 바퀴를 돌면서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제가 갈 곳은 어디입니까? 어디라고 지명은 안 해주셔도 동서남북 중에 한 방향이라도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면서 서울의 동서남북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제게 왔던 감동은 “동서남북이 다 하나님의 땅이고 하나님의 영역이다. 그러니 네가 기도하고 마음이 다가오며 형편에 맞는 곳으로 가거라.”라는 마음이 들어왔습니다. 정말 그때를 회상하니 너무 서글프기도 하고 또 아름다운 추억으로 잔잔하게 다가왔습니다. 저는 결국 남산 타워에서 결정하지는 못하고, 서울 시내를 다 다니다가 제일 임대료가 싼 가락동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1차 부흥을 해서 분당으로 가게 되었고, 마침내 지금의 프라미스 컴플렉스를 건축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의 추억을 떠올리며 남산 정상을 한 바퀴 거닐다 보니까 하나님께 또 다른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제가 어디 가서 교회를 지을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 아니라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도대체 한국교회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겠습니까? 저는 총회장이나 한교총 대표회장 같은 직책은 다 끝난 사람이지만 여전히 한국교회의 공적 사역과 연합사역을 생각하면 마음에 부담감과 책임감을 느끼는데, 제가 어떤 방향을 선택해야 하겠습니까? 아직도 마무리되지 않은 연합기관의 통합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런 생각을 하니까 가을 단풍도 이제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서울 시내에 있는 교회 건물만 보였습니다. “이쪽에는 어느 교회가 있지, 저쪽에는 어느 교회가 있지. 그런데 이 모든 교회들이 연합해서 한 방향으로 가야 하는데... 하나님,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다 했습니다. 세부 통합 결의까지 다 했습니다. 이제는 제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제가 계속 이 길을 가야 합니까? 아니면 멈추어야 합니까? 아니면 다른 방향으로 가야 합니까?” 삼십 수년 전 소강석은 개교회의 개척과 성장을 위해서 물었다면 세월이 흐른 후, 지금의 저는 오늘의 한국교회가 가야 할 방향성을 질문하고 있었습니다. 남산에서의 하나님을 향한 저의 질문은 저녁 식사 약속 시간이 다 될 때까지 계속되어졌습니다. 삼십 수년 전 남산에서의 추억이 현재 한국교회의 방향성에 대한 질문으로 재발견되었던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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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남산의 추억을 재발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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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간절함이 없는 자리, 핑계뿐”
- 저는 지금까지 수많은 집회와 세미나를 해왔습니다. 어쩌면 저만큼 많은 연합집회와 목회자 세미나를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특별히 흰돌산기도원에서 4천 명이 모여 2박 3일 동안 했던 목회자 세미나, 또 양수리수양관에서 있었던 그 유명한 한신목회세미나에는 단골 강사로 갔습니다. 그리고 각 교단과 신대원에서 하는 세미나나 특강을 셀 수 없이 다녔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에서 2,500여 명의 목회자들이 모인 생명나무 목회 컨퍼런스를 몇 번을 하였습니다. 작년에는 600여 명의 미자립교회 목사님들을 초청해서 위드 코로나 세미나를 하며 1인당 백만 원 이상을 드리며 섬겼습니다. 그런데 이번만큼 간절한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 간절한 마음을 갖고 강의 원고도 제가 다 작성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원고를 부교역자들에게 돌리고, 몇 분의 전문가에게 보내서 보완할 것 있으면 보완의 의견을 좀 달라고 했습니다. 물론 그분들이 보완해 준 부분도 있지만, 손볼 데가 없을 정도로 원고 내용이 충실하고 원고만 봐도 가슴에 전율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원고를 보고 또 보면서 부족한 부분은 빨간펜으로 내용을 보완하였습니다. 머릿속에 다 들어있는 내용인데도 원고를 또 보고 또 보았습니다. 왜 제가 이렇게 간절한 마음을 갖게 되는가 생각을 해보니까, 가장 어려운 때 성도들의 땀과 눈물이 젖어 있는 헌금으로 컨퍼런스를 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이 그렇지 작년에 이어 올해도 500명이 넘는 미자립 교회에 100만 원씩 지원금을 준다는 것이 보통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거기에 들어가는 행정비, 광고비 하면 더 많은 돈이 들어가는데 제가 간절한 마음을 안 가질 수가 없지요. 또 미자립교회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면 코로나 후유증을 극복하고 초토화된 예배를 회복하며 교회를 세울 것인가”, 이런 기대감을 갖고 온 자립교회 목사님들을 생각하니까 간절함이 안 생길 수가 없었습니다. 저의 이 간절함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목사님들이 저녁 7시가 다 되어가는 데도 거의 한 사람도 꿈쩍하지 않고 끝까지 경청을 하였습니다. 자립교회 목사님들도 교회 세움에 대한 간절한 열망이 있었고 절박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강의 초두에서 이 세상에 새로운 교회는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이 땅에는 진정한 모델 교회도 없다고 했습니다. 진정한 모델 교회는 어뉴 처치(Anew Church), 즉 성경적 원형교회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 새에덴교회도 모델 교회가 될 수 없고 전혀 새로운 교회가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다만 이번 세미나를 통해서 성경적 원형 교회로 가기 위해 새에덴교회가 어떻게 최선을 다했고 몸부림 쳤는가를 말씀드리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팬데믹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함께 우리의 공적 교회를 세워갈 수 있는가를 나누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간절함이 있으면 그 어떤 역경 속에서도 길이 보이고 방법이 보이고, 얼마든지 하이 콘셉트를 가지고 창의적 목회를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간절함과 절박함이 없으면 맨날 핑계만 댄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과연 코로나 팬데믹 때 얼마나 간절함을 가졌었던가요. 지금도 얼마나 간절함을 가지고 있는가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 성도를 향한 간절함, 교회 세움을 향한 간절함이 얼마나 있는가요.” 제가 목사님들께 묻고 되물으면서 찬양과 기도도 인도했습니다. 원래 강의를 맡긴 부교육자들에게는 약 30분씩 강의 시간을 주기로 했는데, 제가 워낙 마음이 좋아가지고 “여유를 갖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모두 정해진 시간을 넘겼습니다. 그러다보니 막상 제가 강의를 마무리 할 때는 시간에 쫓긴 것입니다. 제가 넉넉하게 마무리를 하고 자세히 강의를 해야 되는데 시간에 쫓겼습니다. 그렇다고 저녁 늦게까지 붙들어 둘 수도 없는 것이고요. 제가 만약에 3, 40분만 더 활용했더라면 마지막에 찬송도 하고 기도회도 하면서 목사님들의 눈이 눈물로 흠뻑 젖어 흐르도록 할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아쉽게 마무리를 하였습니다. 더구나 박주옥 음악목사님도 목사님들 앞에서 노래를 한 곡하기를 원해서 그 희망도 들어주고, 또 청소년오케스트라의 연주 시간도 준 것입니다. 결국 제 강의 시간을 다 할애해 준 것이죠. 물론, 아쉬움이 있는 만큼 저는 강의에 열변을 토하였습니다. 마치 따발총처럼 말을 쏟아내고 입술에 모터를 단 것처럼 긴박한 강의, 간절함이 넘치는 강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강의 시간이 축소되어서 아쉽기는 했지만, 그래도 절박하고 간절한 심정이 다 전달됐습니다. 그리고 알아들을 것들은 다 알아들었다고 위로를 해주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말씀을 듣고 다시 생각해 봤습니다. “간절함이 있는 곳은 길과 방법이 보이고 간절함이 없는 자리에는 핑계뿐이라고.” 부디 이번 세미나를 통해서 교회 세움을 향하여 헌신한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큰 은혜가 임하고, 참석한 모든 목회자들에게 간절함의 나비 효과가 더 크게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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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간절함이 없는 자리, 핑계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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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더위가 숨고 바람이 멈춘 언덕
-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낮에는 가을을 무색케 할 정도로 한여름 같이 덥더니 어느새 더위가 어디론가 숨어버렸습니다. 아니, 벌써 겨울이 오는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매미는 할 일을 다 한 지가 오래고 그 사명을 풀벌레에게 기쁨으로 넘겨주었습니다. 더위는 어디로 도망가 버렸을까요. 언젠가 제 서재에서 본당으로 가다 보면 뒷담벼락 위에 개망초꽃이 하얗게 피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개망초꽃이 지고 나니까 더 하얗게 일대를 덮어버린 꽃들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경사가 험한 언덕에 하얀 꽃으로 덮여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풀벌레들이 얼마나 요란하게 합창을 하는지 모릅니다. 가만히 보니 바람이 불어도 꽃들이 흔들리지도 않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가을바람도 저 꽃잎들 앞에는 쉬어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왔습니다. “도대체 저 꽃은 무슨 꽃일까?” 마침내 저는 운동화를 신고 그 곳으로 직접 가서 보기로 했습니다. 그날은 유난히 추운 날씨였습니다. 제가 어지간하면 짧은 팔 차림으로 나갈 텐데 요즘 같은 때 감기에 걸리면 사람이 추하게 보이잖아요. 그래서 행여라도 감기에 걸리면 어쩌나 하고 조심스럽게 긴 옷을 입고 갔습니다. 가서 보니 이름 모를 하얀 꽃들이 온 언덕 위에 만발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막상 그곳에 가니까 전혀 춥지가 않았습니다. 차가운 가을비가 온 후였는데도 수풀 아래는 온기가 느껴졌습니다. 순간 시인의 상상력으로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아, 며칠 전까지 한낮을 달구었던 그 더위가 이곳으로 와서 숨어버린 것은 아닌가. 더위가 그냥 도망갈 수는 없어서 잠시 이곳에 숨어있나 봐. 그렇다면 왜 더위는 이곳에 숨었을까. 아마 이 꽃들이 조금이라도 더 오래 피어 있게 하려고 이곳에 숨었겠지.” 별의별 시적 상상이 스쳐갔습니다. 비 갠 뒤 상큼한 하늘은 청옥같이 맑아 보였고 거기서 비쳐오는 햇빛은 꽃들을 더 하얗고 눈부시도록 해주었습니다. 순간 이런 상념에 젖어 들었습니다. “우리의 삶이 이랬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험한 언덕이라도 하얀 꽃들이 피어 있으면 이토록 아름답고 눈부시게 보이는 것을... 증오를 심고 미움을 심으면 우리 마음에서부터 독버섯이 솟아나거늘, 우리도 소설가 이청준의 ‘꽃씨 할머니’처럼 온 세상에 꽃씨를 뿌리며 살 수는 없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무슨 꽃인가 궁금했습니다. 옆에 있는 수행비서에게 스마트폰으로 찍어서 알아보라고 했더니, ‘서양등골나물꽃’이었습니다. 생전 처음 들어본 꽃명이었습니다. 꽃 이름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꽃이 어떻게 여기에 심겨져 있는지가 궁금했습니다. 한두 송이가 핀 것도 아니고 언덕 전체를 차지하여 하얀 꽃 세상을 만들어 버렸으니 말이죠. 민들레 홀씨처럼 한꺼번에 이곳으로 날려 와서 그들의 영토를 확장해 했는지, 아니면 이청준의 ‘꽃씨 할머니’처럼 누군가가 이곳에 와서 꽃씨를 뿌렸는지, 그것도 아니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또다른 방법으로 꽃씨를 뿌려 놓았으리라고 생각을 해봤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꽃을 통해 저 자신을 돌아보게 하시고 이런 아름다운 꽃밭 언덕 같은 세상을 일구라는 걸 깨닫게 하시려고 그랬지 않았나하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저는 매일매일 창문 너머로 그 꽃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깊어가는 가을, 언제까지 더위가 그곳에 숨어 있고 바람마저 쉬어가는 가를 계속 지켜볼 것입니다. 부디 저 꽃들이 오래오래 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설사 찬 서리가 내리고 눈이 내려 꽃들이 진다해도 제 마음의 뜨락에 하얀 꽃들이 피어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도 저 하얀 꽃들을 바라보며 ‘너는 진다해도 너를 대신해서 나는 지지않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제 가슴의 언덕에 바람도 쉬어가고 더위도 숨어 있어야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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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더위가 숨고 바람이 멈춘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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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나무를 재발견해야 할 때입니다.”
- 지지난주 토요일 저녁 KBS TV에서 '100인의 리딩쇼, 지구를 읽다'라는 방송을 본 적이 있습니다. 다큐는 외주 제작사인 허브넷에서 제작한 것인데요. 이번 다큐는 ‘나무’가 주제였습니다. 첫 내레이션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새소리, 송진향, 도토리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만으로도 나무는 공간을 가득 메운다. 그러고는 우리 마음을 건드리고 흔든다. 감각들을 조용히 일깨우고 밀려오는 생각의 물결을 밀어내면서 숲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나무와 가까워진다.”(자크 타상의 나무처럼 생각하기) 또 내레이션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나무와 숲은 사람들에게 고갈되지 않는 영감의 원천이다. 그러므로 다시 나무를 발견해야 할 때다”라고 말이죠. 자크 타상은 우리가 볼 수는 없지만 나무끼리 서로 공감하고 의사소통을 하며 공생을 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나무를 생각하면 갑바도기아 교부였던 닛사의 그레고리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산상 보훈을 보면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했는데(마5:8), 닛사의 그레고리는 이 청결한 마음이란 에덴동산에서 창조되었을 때의 본래의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마음을 회복하면 자연과 교감하게 될 뿐만 아니라 저절로 아름다운 시가 나오고 음악이 나오며 천재적 예술성을 발휘하는 영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걸 생각하며 지난주에 장로회 수련회 때 속리산 세조길을 찾았습니다. 처음에는 숲을 찾은 줄 알았더니 나무 하나 하나를 찾는 걸 느꼈습니다. 산을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나무를 만나러 온 느낌이었지요. 나무들이 제각기 가을을 맞을 뿐만 아니라 저를 환영해주고 영접해주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럴 때 자크 타상이 말한 대로 나무와 숲은 저에게도 고갈되지 않는 영감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 것입니다. 세조길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 뒷산인 한성산도 마찬가지입니다. 속리산의 나무만은 못하지만 그 산에서 제가 많은 영감의 원천을 얻었거든요. 코로나가 시작될 때 메디컬처치를 착안해 낸다든지, 여러 가지 하이 콘셉트 목회 아이디어와 지하철과 우리 교회 외벽 현수막 문구들이라든지, 전부 다 그 숲 속 나무 사이를 지나며 생각해낸 것입니다. 그러다가 원시림 같은 곳을 가면 나무와 숲에 대한 더 깊은 신비감을 갖게 됩니다. 그럴 때면 제 자신이 소년이 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제가 ‘나무와 소년’이라는 시를 썼습니다. “나무는 소년을 기다렸습니다 / 그리움만큼 기다란 줄을 늘어뜨린 채 / 소년이 다시 그네를 타러 올 날을 /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 새싹이 돋아나던 봄이 가고 / 무성한 나뭇잎으로 몸을 가리던 여름도 가고 / 한 잎, 한 잎 / 그리움에 지친 가을의 추억도 가고 / 이제, 그리움마저 퇴색한 하얀 겨울에도 / 나무는 홀로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 강렬한 햇빛도 / 추적추적 내리는 차가운 새벽 비도 / 겨울밤의 세찬 눈보라도 / 아픔만큼 나이테를 더하지만 / 소년이 길을 잃지 않도록 /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소년을 기다립니다 / 나무 그늘 아래 고요히 잠들던 소년의 하얀 얼굴과 / 풀밭을 뛰어다니던 소년의 웃음소리와 / 나뭇가지에 올라타 먼 산을 바라보던 / 소년의 맑은 눈빛을 기억하면서 / 나무는 홀로 소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소년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긴 그림자 석양녘에 드리우고 / 자기에게 돌아올 그 때까지.” 수 년 전에 ‘깊은 산속 옹달샘’을 방문하였을 때 고도원 장로님이 나무 묵상을 가르쳐준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나무에 대한 재발견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저보다도 먼저 자크 타상이라는 분이 ‘나무를 재발견해야 한다’는 이야길 했다는 걸 알고 새삼스럽게 나무를 재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심지어는 나무를 보고 나를 보게 된 것입니다. 나무가 마치 나의 거울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지요. 더 나아가 닛사의 그레고리의 가르침처럼 청결한 마음으로 나무와 대화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10편의 나무 연작시를 쓰기도 했지요. 저 뿐만 아니라 모든 현대인은 나무를 재발견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나무와 함께 살아가고 나무가 우거진 숲이 끝없는 영감의 원천이라는 걸 다시 깨달아야 합니다. ‘지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며 숲의 생태계를 잘 지키고 그 속에서 생의 고귀함과 풍성한 영감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아무리 바빠도 매주 토요일은 산행을 합니다. 언제 골프를 시작할지 모르지만, 골프를 한다 하더라도 산행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나무가 소년을 기다리고 소년이 나무를 기다리듯, 그런 소년의 마음으로 산행을 할 것입니다. 골프는 운동의 재미와 기쁨을 주겠지만 결코 저를 소년으로 만들어주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숲과 나무는 저에게 끝없이 새로운 영감을 줄 것입니다. 물론 그 영감의 원천은 성령 안에서 나온 것이지만요. 아무튼 우리는 나무를 사랑하고 나무를 재발견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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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나무를 재발견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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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바람의 언어를 듣겠습니다.”
- 지난 수요저녁예배를 마치고 모처럼 곤지암 기도원에 올라갔습니다. 다음 날 특별한 손님 몇 분이 오셔서 밤을 줍는다고 하셔서 미리 간 것입니다. 원래 전날이나 그날 오후에 한번 기도원을 다녀오려고 했는데 도저히 시간이 안 나서 늦은 밤에야 고성능 플래시를 가지고 밤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 밤나무에 밤이 얼마나 달려 있는가를 확인했습니다. 제법 산 깊은 곳까지 가서 확인을 했습니다. 플래시가 워낙 고성능이어서 땅에 밤이 얼마나 떨어져 있고 밤이 얼마나 달려 있는가가 다 보였습니다. 그렇게 확인하는 중에 밤이 하나씩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밤 떨어지는 소리가 그날따라 너무 신기하게 들렸습니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턴보다 더 신기하게 들렸습니다. 더구나 아직 채 익지 않은 밤이 익는 소리까지 들리는 듯했습니다. 방에 들어와서 왜 그런 소리가 들리는가 생각해 보았더니, 그걸 들리게 하는 것은 바로 바람의 언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람의 언어는 벌써 단풍을 물들게 하는 소리까지 들려주었습니다. 아직은 숲이 파릇파릇한데 그 바람의 언어가 단풍 만드는 소리를 들려준 것입니다. 창문을 열어놨더니, 계속해서 바람의 언어에 동글동글 여문 밤알들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습니다. 머지않아 가을바람에 우수수 떨어질 가랑잎들은 떨어진 밤알들을 덮어줄 것입니다. 그리고 또다시 바람의 언어는 꿈을 꾸는 밤알들에게 내년 봄 나무의 새싹으로 태동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그날 밤바람의 언어를 들으며 잠이 들었습니다. 잠이 든 후에 꿈속에서도 떨어지는 밤알과 바람에 굴러가는 마른 잎새들이 나의 삶과 같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그런 꿈을 꾸다가 아침에 일어났습니다. 약속한 대로 특별한 손님들이 기도원을 방문하였습니다. 정신없이 밤을 줍기 시작했습니다. 어린 시절에 산에서 밤을 주웠던 추억이 아련하게 스쳐갔습니다. 그리고 밤을 줍는 순간에도 밤알이 이따금씩 툭툭 떨어졌습니다. 어제저녁 들었던 바람의 언어가 생각이 났습니다. 그 바람의 언어는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이라는 시 구절이 생각나게 해주었습니다. 저는 장석주 시인의 시를 마음속으로 바꾸어 보았습니다. “저 밤이 저절로 익을 리는 없다 / 저 안에 태풍 몇 개 / 저 안에 천동 몇 개 / 저 안에 벼락 몇 개 / 저게 저 혼자 둥그러질 리는 없다 /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숱한 밤들 /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 저 안에 초승달과 보름달 몇 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순간에도 붉은 태양 아래 아직 채 익지 않는 밤알이 익어가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저들은 땡볕과 무서리를 더 맞아야 하는 것 같습니다. 얼마만큼 밤을 줍고나서 바비큐 런치를 즐겼습니다. 우리 교회 김요한 집사님이 오셔서 천막을 설치해 주어서 특별한 분위기를 느꼈습니다. 천막을 안 쳐도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지만, 천막을 쳐 놓으니까 가을 소풍을 온 것 같고, 잔칫집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 주었습니다. 어린 시절 가을 소풍의 추억이 떠오르며 동심 세계를 이루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손님들과 자리를 함께했던 부목사 몇 분들도 같은 느낌이라고 했습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순간에 바람의 언어가 제 귓전을 스쳐갔습니다. 다음에 오면 저 나뭇잎사귀들은 단풍이 될 것이며 한동안 단풍잎으로 온 산은 불타오르는 모습이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서로의 삶의 얘기를 나누는 즐거운 시간도 지나갔습니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죠. 아니, 만날 때부터 헤어질 결심을 하고 만나는 것이 우리의 삶이지요. 아직은 땡볕이 맹렬히 타오르는 여름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조금 있으면 밤 떨어지는 소리도 그칠 것이고 나뭇잎들이 밤알들을 소복소복 덮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 하얀 눈이 소복소복 쌓이게 되겠죠. 겨울이 오면 저는 또 다른 바람의 언어를 들어야 합니다. 그 바람의 언어는 다름 아닌 성령의 감동과 교훈의 말씀입니다. 이렇게 삶을 살다 보면 언젠가 궁극적인 인생의 겨울도 맞이할 것입니다. 삶과 죽음이 악수하는 그 겨울 말이죠. 그때 저는 바람의 영원한 새 언어를 듣고 저 산 너머에 있는 새로운 영토의 세계에서 다시 영원한 삶을 사는 꿈을 꿀 것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제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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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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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바람의 언어를 듣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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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지지 않겠다는 약속의 노랠 부릅니다”
- “눈물 나는데 / 슬퍼지는 이유를 몰랐던 건 / 나를 대신해 / 아파하는 너를 몰랐던 일 / 내 마음 내 어둠 무겁지만 / 내 얘기 내 노래 외롭지만 / 내가 미워한 세상 모든 것 / 어쩔 수 없다며 피하진 않아 / 나를 사랑한 너의 모든 것 / 이젠 내가 더 사랑할 수 있어.., (중략) 내가 방황한 세상 모든 것 / 어쩔 수 없단 말 하지 않아 / 나를 사랑한 너의 모든 것 / 이젠 내가 더 사랑할 수 있어” 이는 가객 이선희와 윤도현이 콜라보한 ‘지지 않겠다는 약속’의 가사입니다. 생태계 파괴로 인하여 상처받고 힘들어하는 고래들을 위로하고 함께 싸우며 지지 않겠다는 약속을 노래하는 것이죠. 제 마음도 푸른 바다의 고래처럼 눈물 나고 슬퍼지고 어둡고 외로울 때가 있습니다. 아니, 무언가 눌림이 있고 힘겨울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제 자신의 문제나 우리 교회의 문제보다는 총회와 한국교회를 생각할 때 찾아오는 고뇌와 눌림입니다. 총회 선관위원장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실 총회장을 할 때보다도 선관위원장을 할 때가 더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사인으로서 보다는, 공인으로서 총회 화합과 상생을 더 중요시하며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사람들은 솔로몬의 지혜를 발휘하며 위기를 극복하고 총회를 화합과 상생의 길로 이끌었다고 하지만, 저의 마음은 얼마나 무겁고 힘들었겠습니까? 무엇보다도 한국교회 연합사역과 미래를 생각하면 암울해집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을 걷는 것처럼 막막하고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지요. 제 마음 속의 고래도 상처 받고 아파하고 슬픔의 바다에 잠길 때가 있습니다. 어쩌면 제가 할 일은 다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한국교회 현 지도부가 결단하고 동의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연합의 길이 묘연해 보이고 험난하게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너무나 안타깝고 아쉽기만 합니다. 그래도 지금 당장은 안 되더라도, 결코 지지 않겠다는 약속만큼은 할 수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저에게 결코 지지 않게 해 주겠다는 약속을 주시는게 더 중요합니다. 이미 그 약속을 받았기에 어려운 일이 생기고 길이 막힐 때마다 확인하며 지금까지 달려왔습니다. 그 약속이 여기까지 끝나는지는 모르겠지만 또 다시 연합의 깃발을 향하여 달려가야 할 시점에서 하나님의 지지 않겠다는 약속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총회 때도 틈틈이 묵상 기도를 하며 지지 않겠다는 약속을 되새겨 보았습니다. 총회를 다 마치고 목요일 저녁에 홀로 산행을 하며 이 음악을 들었습니다. “... 부서지는데 / 무서워하는 법도 몰랐던 건 / 나를 위해서 / 기도하는 너를 몰랐던 일...”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로 알려진 유홍준 교수님은 “알면 보이고 보이면 사랑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보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며 파괴되어 가는 것입니다. 저 역시 이 노래를 통하여 환경 생태계의 중요성과 푸른 바다의 고래 이야기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가을이 깊어가는 저녁에 산에 오르니 고요한 풀벌레 소리가 저의 마음을 다독여 주었습니다. 마치, 결코 지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의 노래를 들려주는 듯 했습니다. 저는 ‘지지 않겠다는 약속’을 노래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저에게도 저만의 노래를 들려주시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어찌 하루아침에 모든 일이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남북통일도 다 때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까지도 최선을 다해왔고 큰일을 이루었지만, 그러나 더 큰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또 다른 인내와 기다림, 때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때를 기다리며 저는 결코 지지 않겠다는 약속의 노래를 부르고 또 부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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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지지 않겠다는 약속의 노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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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저는 끝까지 상생과 화합을 심을 것입니다”
- 저는 요즘 염증으로 고생을 했습니다. 작년에 고 문정남 장로님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뒤통수에 염증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새에덴교회 개척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장 큰 공헌을 하신 문 장로님에 대한 예우를 갖추기 위해 제가 직접 상주가 되어 3일간 조문소를 지켰습니다. 그때 무리를 해서 그런지 뒤통수의 염증이 생기더니 사라진 듯하다가 재발하기를 몇 번 반복하면서 자그마치 세 번이나 수술을 했습니다. 뒤통수의 염증이 커질 때는 잠자는 게 너무 힘들었습니다. 허리나 등에 욕창이 난 것도 아닌데 뒤통수 작은 염증 하나가 온몸을 얼마나 힘들게 하였는지 모릅니다. 근래는 손톱을 너무 깊게 잘라가지고 염증이 생겨 통증이 보통 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조그마한 손톱 하나도 이렇게 온몸에 고통을 준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사실 1, 2주만 고생하면 되는데 염증이 난 손톱이 왜 그렇게 다치고 또 다치는지... 오른손과 세게 부딪쳐 다치고, 손을 씻고 수건으로 닦다가 다시 다쳐 손톱과 살이 붙어 있는 부분이 완전히 벌어져서 얼마나 아렸는지 모릅니다. 엎친 데 덮쳐서 이번에는 코에 또 염증이 생겼습니다. 코 염증 정도야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고 무시하고 놔뒀더니, 코가 딸기코가 되고 밤새 아려서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다행히 이재훈 의료강도사님이 약을 잘 지어주어서 어느 정도 일단락이 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이번 일을 겪으며 저는 작은 염증 하나가 온몸을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럽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 이유를 분석해 보면, 도가 넘는 스트레스로 몸의 면역력이 약해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최근 몇 주간의 제 삶을 돌아보면 총회 선관위 일로 보통 신경을 많이 쓴 게 아닙니다. 많은 분들이 “이건 솔로몬에게 주신 지혜입니다. 소 목사님이 아니면 결코 이렇게 처리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정말 소 목사님의 지혜와 공명정대한 처사가 총회의 위기와 한국교회의 갈등을 중재하여 새 길을 열게 하였습니다”라고 칭찬과 격려를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남들은 그렇게 쉽게 말을 하지만 저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신경 쓰고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오죽하면 자다가도 그런 꿈을 꾸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을 보면 몸의 각 지체가 서로의 역할이 있기에 함께 돕고, 몸의 다른 기관이 아프면 다른 기관이 도와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옛말에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때운다’는 말도 있지요. 그런데 현재 우리 교계 상황을 보면 그렇지 못합니다. 서로 협력하고 도와야 할 연합기관들이 여전히 분열되어 하나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조직이나 공동체이든 미움과 증오를 심으면 또 다른 미움과 증오를 낳게 되어 있습니다. 증오를 심으면 결국 그 조직도 나중에는 증오의 단체가 되어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다가 분열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사랑과 화목을 심는 조직과 공동체는 또 다른 사랑과 화목의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목회를 하든, 총회를 섬기고 교계를 섬기든 언제나 사랑과 화목을 심으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내 몸의 작은 상처도 온몸을 이렇게 힘들게 하고 고통을 갖다주는데 하물며 우리 총회이겠습니까? 우리 교계이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누가 뭐래도 미움과 증오가 아닌 사랑과 화목, 상생과 화합을 심을 것입니다. 부족하지만 저는 우리 교회 안에 이런 모습을 실천해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개척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분란이 일어나거나 분열을 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 작은 열매를 보인 것처럼 앞으로도 저는 끝까지 교계에 상생과 화합을 심을 것입니다. 한국교회 안에 미움과 증오의 가시덤불과 찔레가 가득해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상생과 화합의 향기로운 꽃과 포도송이들이 가득해야 하겠습니까? 저는 사랑과 화목의 꽃씨를 심으며 앞으로도 끝까지 상생과 화합의 꽃밭을 일구어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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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저는 끝까지 상생과 화합을 심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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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빗소리처럼, 풀벌레 소리처럼
- 지난주 화요일 저녁에 몸은 피곤한데도 비를 맞고 산행을 하였습니다. 왜냐면, 우리 교단의 여러 산적한 문제를 풀어야 하는데 마음이 너무 무거워서 정서를 환기하려고 갔습니다. 저는 작년에 떠밀리다시피 총회 선관위원장을 맡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단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이라면 다 알 정도로 목사 부총회장 후보 문제가 뜨거운 이슈가 되었습니다. 이미 한 분 목사님은 부총회장 후보로 확정되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 분 목사님은 선거법 위반 문제로 계속 심의를 해야 했습니다. 선관위원들 중에서도 한쪽에서는 “분명히 위법이 있기 때문에 후보를 탈락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한쪽에서는 “위법이 있지만, 이분을 탈락시키면 교단에 너무나 큰 혼란이 온다. 그래서 확실한 사과문을 낸 후 후보로 올려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계속 치열한 의견 대립을 하면서 결론을 내지 못했습니다. 헌법재판소나 대법원도 결국 다수의 의견으로 결정을 짓지 않습니까? 그래서 부득이하게 어느 목사님의 위법성 문제로 인해 후보를 탈락시킬 것인가, 아니면 올릴 것인가를 놓고 투표를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부위원장에게 사회권을 양보하고 이석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절대 나가면 안 된다고 붙잡아서 어쩔 수 없이 투표를 진행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저는 위원장으로서 기권을 했고요. 그런데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올 수가 있습니까? 7:7로 동수가 나온 것입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말 고민을 하였습니다. 한쪽 목사님은 40년 지기 친구고, 다른 목사님도 매정하게 내칠 수 없는 관계이니 말입니다. 더구나 한쪽을 내치면 총회는 겉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마침 우리 총회 직원이 장로회 치리회 규칙 4장 85조 2항을 찾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조항에 의거해서 의장으로서 캐스팅보드 역할을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위법성이 있는 분이 기독신문에 사과문을 내면 후보로 확정하고 그렇지 않으면 탈락시키는 걸로 하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선관위원들도 만장일치로 의견을 모아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이 나가자 여러 억측과 소문들이 일파만파로 번져나갔습니다. 특별히 제가 월요일에 호남협의회에 가서 설교를 하였는데 설교가 끝나자 저를 앞에 두고 선관위를 향한 규탄 성명서를 발표한 것입니다. 물론 그 전에 저에게 양해를 구했지만요. 저는 그걸 보고도 “허허허” 너털하게 웃음을 지었습니다. “나 없을 때나 좀 하지...ㅎㅎㅎ” 그 순간 어느 정치인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정치란 짐승이 되는 비천함을 견디면서 야수의 탐욕과 맞서 싸워 성인의 고귀함을 이루는 것이다.” 그래서 저는 끝까지 인내심을 갖고 양쪽 목사님을 다 설득을 한 것입니다. 이런 마음의 부담감 때문에 산행을 갔는데 가을을 재촉하는 빗소리가 저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주고 풀벌레의 노랫소리가 가슴의 응어리를 풀어주었습니다. 고요한 빗소리와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사색도 하고 묵상도 하고 기도도 하였는데, 다음 날부터 어떤 역풍들이 순풍으로 바뀌고 파열음의 괴성들이 고요 속에 노래하는 풀벌레 소리로 바뀌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수요일 오후에 한 목사님은 양해서를, 또 한 목사님은 사과문을 내기로 한 것입니다. 총회 화합과 상생을 위하여 선관위에 양해서를 낸 목사님이 고맙기도 하고 송구스럽기도 했습니다. 마침내 목요일 오전에 “여러 문제가 있지만 모든 것을 법리로만 풀 수는 없다. 그 위법성에도 반론이 있고 상대성이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정치적인 묘수를 발휘해서 화합과 상생으로 가자. 그러기 위해선 위법한 분에게는 사과문을 교단지에 게재하게 하고, 양해서를 보내온 분에게는 선관위가 감사의 글을 교단지에 게재하도록 하자.”고 결의를 한 것입니다. 저는 원래 목회자이고 교단 정치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누구에게 정치수업을 받은 적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어릴 때부터 어머니, 아버지가 싸울 때 항상 화합시키고 화해시키는 훈련을 받으면서 노하우를 축적해 왔습니다. 모든 문제를 다 정리하고 목요일 저녁에 산행을 하는데, 화요일 저녁에 들었던 빗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떠오르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남들이 불필요한 오해와 공격으로 상처를 받을 때 거기 가담하지 않고 그에게 때로는 빗소리처럼, 때로는 풀벌레 소리처럼 작은 위로가 되리라.” 그리고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 저 역시 한동안 짐승처럼 비천한 적도 있었고, 오해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터무니없는 야수의 탐욕과 맞서 때로는 설득하고 때로는 싸우면서 화합과 상생이라는 고귀함에 이르게 되었네요.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앞으로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총회 선거가 잘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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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빗소리처럼, 풀벌레 소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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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매미처럼 처절하게, 풀벌레처럼 고요하게”
- 화요일 저녁 모처럼 큰 마음을 먹고 산행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선광현 목사님이 조금 늦게 도착한다고 해서 혼자 먼저 걸어갔습니다. 그러던 중 교회로 오는 성도들을 만났습니다. 생각해 보니까 저녁 8시 기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오는 분들이었습니다. 성도들과 마주치면서 인사를 하였습니다. “아, 기도하러 오시네요. 저는 오랜만에 산행을 하러 갑니다.” 그런데 순간 멈칫했습니다. 성도들은 기도하러 오는데 저는 산행을 가고 있었으니까요. 순간 “나는 뭐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중세시대 수도사 성 버나드가 말한 ‘하나님과 나의 합일의 4단계’가 떠올랐습니다. 첫째, 나를 위한 내 사랑의 단계입니다. 둘째, 나를 위한 하나님 사랑의 단계입니다. 셋째,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 사랑의 단계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위한 내 사랑의 단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완전한 합일의 경지에서 나를 사랑하는 단계입니다. 주님과의 합일의 경지는 나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 사랑이며 하나님 사랑이 내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하나님을 밟고 나를 사랑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숨 쉬고 먹고 마시는 것조차 주님과의 깊은 합일의 경지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 역시 “하나님을 더 깊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산행을 할 거야”라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길을 걸으며 예수님을 태운 나귀를 생각했습니다. 이건 오리겐이나 이레니우스가 했던 풍유적 해석인데, 잠시 그걸 받아들였습니다. “내 한 발은 온유의 발이 되고, 내 한 발은 겸손의 발이 되리라. 내 한 무릎은 기도의 무릎이 되고, 내 한 무릎은 순종의 무릎이 되리라.”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산을 올라갔습니다. 산에서는 풀벌레들이 얼마나 위대한 합창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 순간 여름 내내 처절하게 울어대던 매미들이 생각이 났습니다. “1-2주 전만 해도 목이 터지도록 사랑의 연가를 불러대던 매미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 어느 순간 저의 기도는 잠시 멈추고 사색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그 옛날 신학생 시절 무등산에서 기도했을 때는 왜 풀벌레 소리를 듣지 못했을까. 매미 소리도 기억이 나지 않는데...” 아마도 그때는 저의 인생이 매미처럼 처절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고요한 밤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지는 풀벌레 소리가 하나님을 향한 기도 소리로 들리고 찬양 소리로 들리는 것입니다. 그만큼 저의 삶이 성숙해지고 감성의 지평과 사색의 여유가 생겨났다고 할까요. 저는 정상에 올라와 벤치에 앉아서 기도를 하였습니다. “주님, 고맙습니다. 이렇게 맑은 공기를 마시며 기도할 수 있어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살아있음이 너무나 행복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땀을 흘릴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풀벌레 소리와 함께 고요한 기도를 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언제까지 이렇게 땀을 흘리며 산행을 하고 또 이 땅에서 기도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살아있는 동안에 때로는 매미처럼 처절하게, 때로는 풀벌레처럼 고요하게 하나님 사랑의 연가를 부르겠습니다.” 기도를 마치자, 문득 산에 올라오다가 마주친 이주연 집사님이 생각났습니다. 그분은 저에게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소개해 주신 분입니다. 집사님은 기도하러 교회에 오는데 저는 산행을 하러 가서 조금은 겸연쩍은 마음으로 전화를 드렸습니다. “집사님, 우영우 드라마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기도는 잘하셨나요?” 그런데 집사님의 첫 마디가 저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고 눈시울을 뜨겁게 하였습니다. “목사님, 혼자 산에 가셔서 어떡해요. 신변 보호를 해 드려야 하는데... 우리 목사님 혼자 산에 가시면 어떡하냐고 집사님들과 걱정을 하였어요.” 순간, 이렇게 담임목사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걱정해 주는 성도들이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매미는 7-8년 동안을 땅 속에 있다가 성충이 되어 잘해야 1-2주를 산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세상을 떠나기 전에 어떻게든지 짝을 만나서 사랑을 나누고 2세를 준비하기 위해서 그렇게 처절하게 연가를 부르는 것입니다. 입추가 지나면 저녁에도 더 애처롭게 구애의 연가를 부르는 이유가 그 때문입니다. 저 역시 제 인생의 겨울이 오기까지 때로는 매미처럼 처절하게, 때로는 풀벌레처럼 고요하게 기도하고 사명의 노래, 목양의 연가를 부를 것입니다. 그런 묵상을 하는 동안, 선 목사님과 송 집사님이 뒤늦게 도착을 하였습니다. 그날 밤은 정말 산속에서 홀로 하나님과 독대하는 시간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고요 속에서 드린 목양의 연가요, 적요의 기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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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매미처럼 처절하게, 풀벌레처럼 고요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