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0(금)

칼럼
Home >  칼럼

실시간뉴스

실시간 칼럼 기사

  • [언론회 논평] 중국 대사의 발언은 금도(襟度)를 넘었다
    최근 중국의 싱하이밍 대사의 이재명 민주당 대표를 초대한 자리에서 망언에 가까운 발언을 한 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 싱 대사는 지난 8일 이재명 대표를 불러 약 15분 동안 훈계조로 한국 정부를 비난했다고 한다. 그 주요 내용은 ‘한국이 미국 편에 서면 후회한다’는 것과 ‘한중관계의 책임이 한국에 있다’고 하면서, 내정 간섭하는 내용을 거침없이 뱉어냈다. 싱 대사는 중국 외교부의 일개 국장급에 불과하다. 그런데 국가 의전 서열 8위의 야당 대표가 오만방자한 싱 대사 앞에서 고스란히 그의 독설을 다 듣고 있었다는 것이며, 간혹 동의한다고 볼 수 있는 태도를 취한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싱 대사의 외교의 기본적 형태를 무시한 행위는 한두 번이 아니다. 그는 2010년 우리나라 통일부장관인 현인택 장관이 북한의 천안함 폭침 때 ‘중국의 책임 있는 자세’를 요구했을 때, ‘이거 심한 것 아닙니까’라는 발언을 했는데 그때 당시 그의 지위는 공사관 참사였다. 그리고 2021년 윤석열 대선 주자가 ‘사드는 명백히 우리 주권적 영역’이라는 발언에 토를 달아 ‘이해할 수 없다’고 반박하였다. 그리고 이번에도 야당 대표를 초청해서 온갖 협박성 발언을 서슴없이 쏟아낸 것이다. 싱 대사의 이런 발언은 우연일까? 아니면 자신의 일탈적 개인의 발언일까? 아니다. 지난달 31일 중국 외교부의 마오닝 대변인은 ‘현재 중한관계가 어려움이 있는데, 그 책임은 중국에 있지 않다’는 말로 한국과 미국에게 책임을 전가한 것이다. 결국 싱 대사의 오만은 계산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는 2020년 한국 대사로 왔는데, 그전의 직책은 아시아국 부국장이었다고 한다. 여기에서도 중국의 한국에 대한 홀대를 찾아볼 수 있다. 중국은 현재 미국, 일본, 프랑스, 브라질, 심지어 북한에도 차관급을 대사로 보내는데, 우리나라에는 부국장급을 대사로 보낸 것이다. 반면에 한국은 중국에 장관급 이상을 대사로 보내고 있다. 싱 대사의 발언을 ‘전랑 외교’(戰狼 外交)라고 본다. 즉 늑대나 이리처럼 자기 나라의 국익을 위하여 거친 언사를 쓰면서, 마치 싸우듯이 하는 것을 말한다. 그만큼 우리나라를 얕잡아 보고 있다는 반증이다. 한국과 중국은 지난 1992년 한중수교를 하면서 공동성명을 냈는데, 그 속에서 상호 존중의 의미를 담고 있다. 특히 제2조에서는 ‘주권 및 영토보전의 상호 존중과 내정 불간섭 원칙에 입각하여 한중 양국의 선린 우호 관계를 발전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개 국장급에 불과한 인사가 한국의 외교정책을 드러내놓고 비판하고, 특히 야당 대표를 불러다가 마치 고양이 앞에 쥐처럼 혼쭐을 냈다. 그렇다면 주권 국가인 대한민국 대통령이 중국을 찾아가 ‘혼밥 신세’나 보이고, 동행하는 기자들이 중국 사람들에게 뭇매를 맞아도 아무 소리도 못하는 신하(굴욕적 태도) 외교를 해야 된다는 것인가? 이번 싱 대사의 발언에 대하여 중국 외교부의 태도를 보면 중국의 속내를 더욱 또렷이 알게 된다. 13일 중국 외교부의 왕원빈 대변인은 ‘한국 언론들이 싱 대사의 개인을 겨냥해(싱 대사가 부인과 함께 지난달 울릉도에서 모 기업에서 하루 숙박비 1,000만 원짜리 대접받은 것을 언론들이 보도한 것을 말함) 보도한 것이 유감스럽다’고 하였다. 한국 정부와 국민들에게는 진정으로 미안해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싱 대사는 분명히 ‘패르소나 논 그라타’(Persona non grata) 즉 ‘외교적 기피 인물’이다. 그는 외교관답지 않게 행동하고 있고, 자국을 위한다며 대한민국에 대하여 내정간섭하고 있다. 선린(善隣)외교가 아니라, 양국의 관계를 의도적으로 악화시키고 망치려고 하고 있다. 중국 정부도 한국을 수교국으로 존중한다면 이런 인물을 거둬가야 한다. 이제 우리 대한민국은 조선이 아니며, 중국은 청나라가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한다. 우리 대한민국은 과거에 중국에 조공을 바치던 약소국이 아니다. 세계 무대에서 경제 10위권, 군사 6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중국이 오만방자하고 과거에 사로잡힌 헛된 우쭐함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세계 어느 나라도 중국과 친구가 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정부는 한층 더 당당하며 자주 외교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 야당이 아무리 그래도, 당리(黨利)를 위하여 국익을 희생하며, 국민들에게 굴욕적 대우를 받게 해서는 안 된다. 정쟁(政爭) 중이라도 국익을 위한 일에는 힘을 합하는 모습을 보여야 국민들에게 인정받는 정당이 될 것이다. 이번 중국의 싱 대사 사건을 겪으면서, 초당적인 일치된 모습을 보여주기를 국민들은 진정으로 바란다.
    • 칼럼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3-06-21
  • [언론회 논평] KBS의 개혁을 위해 수신료 분리징수가 정답이다
    공영방송 KBS가 이상하게 되었다. 김의철 KBS 사장은 8일 기자간담회를 통하여 정부에서 수신료 분리징수 추진 철회를 하면, 전 정권에서 임명된 자신이 사장직에서 물러 난다는 입장을 밝혔다. 참으로 가당치 않은 말이다. KBS의 수신료 분리징수를 원하는 것은 국민들이다. 국민들은 국민제안 공개토론에서 수신료 분리징수에 96.5%가 찬성하였고, 아예 이 제도를 없애자는 의견에도 64%가 동의한 바 있다. 그런데 뜬금없이, 김의철 사장은 자신을 현 정부에서 미워해서 이런 상황이 온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KBS의 가장 큰 문제는 공영방송으로써, 편파성과 불공정이 극에 달했다는 것이다. 오죽 하면 현 KBS 이사 가운데 4명이 8일 기자회견을 통하여 ‘KBS의 편파성은 독재정권 때보다 심하다’고 하였다. 왜 그럴까? KBS 이사들에 의하면 민노총 노조위원장 출신이 3연속 보도국장이 되었다고 한다. 공영방송 KBS가 ‘노영방송’이 되려는가? KBS 방송은 지난 4월에 대통령이 방미 중일 때 그에 대한 폄훼 방송을 했는데, 진보측 패널은 16명인데 보수측 사람은 단 한 명으로 16:1로 편성했다. 이는 과거 군사 정권하에서도 6:4, 5:5, 심해도 7:3으로 구성했었는데, 이런 편파성은 찾아보기 어렵다는 비판이다. KBS는 전 정권하에서는 당시 정권을 그렇게 비호하고 옹호했는데, 정권이 바뀌니 현 정부 비판에 열을 올리고 있다. 우리 대통령이 방일 중일 때 뉴스에서 한국 대통령이 일본 국기에만 경례한 것처럼 보도하였다. 또 지난 5월 18일 9시 뉴스에서는 여성 앵커가 민주노총 집회에 대한 보도를 하면서 사실과 다른 내용으로 보도하고 이것이 문제가 되니, 다시 옷을 바꿔입고 마치 다른 것처럼 영상을 찍어 예고 없이 영상물을 교체했다. 이것이 현 공영방송 KBS의 민낯이며, 현주소이다. 거기에다 지난달 한국노총 금속노련의 고공 농성 보도에서 시위자가 정글도(刀)와 쇠파이프를 사용한 것은 빼고 경찰의 강경 진압만 강조했다. 그리고 민노총의 전•현직 간부들의 간첩단 사건을 KBS 9시 뉴스에서는 보도하지 않았다고 KBS방송인연합회가 밝히고 있다. 이래도 KBS가 공영방송이며, 수신료만 챙길 것인가? 또 한 가지는 KBS의 방만한 경영이다. KBS의 2022년 예산은 1조 5,423억원인데, 그 중에 인건비는 4,315억원이다. 전체의 28%를 차지하는데, 연봉이 1억원 이상되는 직원은 51.3%이다. 이는 수신료 분리징수 문제가 계속 불거져 나왔는데도 2021년에 비해 5%가 늘어난 비율이다. 고액연봉자 중에 30%가 넘는 1,500명은 무보직이다. 제대로 일도 하지 않는다는 반증이다. 그런데도 KBS는 수백억 원의 적자를 내고 있다. KBS는 광고도 하여 수익을 내고 있고, 2021년 7월부터는 중간광고까지 하여 수익을 얻고 있다. KBS가 이렇게 마음대로 편파성과 방만한 경영을 하는 것은 연간 6,200억 원의 수신료가 전기세에 포함되어, 따박따박 재정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만용(蠻勇)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국민들도 이런 KBS에 염증을 느껴 해마다 수신료 환불을 요청이 늘고 있는데, 지난 2017년에는 2만 246건에서 2021년에는 4만 5,266건으로 두 배 이상이 늘어났다. 그러므로 KBS 개혁의 정답은 수신료를 현행 전기세에 곁들여 징수하던 것을 분리해야 한다. 땅 짚고 헤염치는 것이 일상화된 KBS는 분명히 달라져야 한다. 다른 나라의 공영 방송들은 어떤가? 영국의 BBC는 수신료를 동결하고 있고, 2028년부터는 아예 이를 폐지한다고 한다. 일본의 NHK도 수신료를 분리 징수하고 있다. 왜 우리 국민들만 편파 방송의 대명사요, 방만 경영의 KBS를 위해 준조세처럼 수신료를 전기세에 포함시켜 반강제적으로 내야 하는가? 이는 매우 부당하다. KBS가 살 수 있는 길은 스스로 개혁에 대한 의지로 뼈를 깎는 노력으로 공정성, 공공성, 공익성, 공평성을 되찾아야 한다. 그리고 불필요한 부분을 도려내는 자구책이 있어야 한다. KBS는 이런 불공정성과 편파성의 문제를 일으켜 국민들로부터 지탄을 받을 것이 아니라, 변하는 시대에 부응하여 국민들이 원하는 양질의 콘텐츠를 자꾸 만들어 내고, 공영방송의 지위를 회복하는데 집중해야 한다.
    • 칼럼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3-06-21
  • [국독연 칼럼] 이상길 목사의 ‘교회의 본질과 복음 진리’(딤전 3:14-16)
    하나님의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 위에 세워진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진리를 떠난 교회는 교회일 수 없습니다. 물을 떠난 배가 아무 쓸모가 없듯이 진리를 떠난 교회 역시 아무런 존재 가치가 없습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진정한 교회의 으뜸가는 표지는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의 말씀에 충성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땅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교회는 진리의 터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그리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침이 없이 바르게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진리의 말씀으로 시작된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땅 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를 진리의 전파자로 세우셨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땅 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게 진리를 수호하는 귀중한 사명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참된 교회를 이루기 위하여 진리의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하여야 합니다. 지금은 말세라고 합니다. 혼돈의 시대입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거짓되고 가증한 것들이 거룩한 곳에 선다고 했습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막 13:4). 진리에 이탈하는 배도하는 일이 더 많이 일어날 것이고. 거짓 선지자들이 더 많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진리의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강해져야 합니다. 진리는 생명력에 있어서 영원하고 그 효력에 있어서는 보편적이며 무한합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교회는 진리를 떠받치는 토대이고, 진리를 세우는 기둥입니다. 성전의 두 기둥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교회는 가장 순수한 진리를 경험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거짓의 광기로 피폐해진 그 누군가가 와도 진리로 말미암아 완전히 깨끗하게 정화되고, 진리의 안전한 갑옷으로 무장되는 곳이어야 합니다. 본문에서는 복음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부활과 승천에 이르는 전 과정을 매우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라는 말씀은 성육신하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멸시와 버림을 당하셨고, 아무런 죄가 없으셨으나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으나, 성령으로 부활하셔서 무죄하심을 증거하셨고, 의롭다 하심을 입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의로우신 자로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대속제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수호하는 기관으로 근본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역의 중심이 되는 교회의 본질과 복음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비밀에 관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 모여 진리의 기둥과 터를 이룬 모든 성도는 온 우주보다 크신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전해야 할 사명이 있음을 교훈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장엄하고 거룩한 복음의 진리를 마음에 새기고 전함으로서 이 땅에 그리스도의 진리와 영광이 해와 같이 빛나도록 해야 합니다. 진리의 기둥으로 역할을 다한 자에 대한 영광을 계3:12에서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 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기둥의 사명을 감당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사용되어질 새이름이 기록되어지는 것입니다. 교회가 진리를 파수하고 진리만을 외치며, 진리를 고집할 때 수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하나님나라가 크게 확장될 줄 믿습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3-06-21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보훈, 국가의 품격
    벌써 17년 전의 일입니다. 2007년 1월 15일, 저는 마틴 루터킹 국제평화상을 수상하기 위하여 마틴 루터킹 퍼레이드 전야제에 참석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흑인 노병께서 저를 찾아오셔서 더듬거리는 말투로 “동두천, 의정부, 수원, 평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왼쪽 허리의 총상 흉터를 보여주면서 “6.25 전쟁 이후 한국에 꼭 한 번이라도 가보고 싶은데 누가 초청해 주는 사람도 없고 형편이 어려워 못 간다”고 하면서 울먹이는 것입니다. 그 분의 이름은 리딕 나다니엘 제임스(Riddick Nathaniel James)였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 자리에서 엎드려서 절을 하면서 “제가 반드시 한국으로 초청하겠습니다. 친구 분들도 함께 오셔도 됩니다”라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저는 그 분이 친구 분들 5-6명 정도와 함께 오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50여 명 가까이 함께 와 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한국교회 최초로 제1회 참전용사 초청행사가 시작되었고 17년째 한 번도 빠짐없이 진행되었습니다. 사실 참전용사 초청행사는 국가기관에서도 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경비와 대규모 자원봉사자, 기획과 준비과정이 필요한 행사입니다. 그래서 정 권사님을 비롯해서 주변에서도 너무 힘이 드니 몇 년만 하고 그만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 마음의 감동이 결코 그만 둘 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초청을 받아 온 참전용사 노병들의 그 감격의 웃음과 눈물, 기쁨과 환희의 모습을 보면서 제 자신이 먼저 감동을 받고 가치와 보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참전용사 초청행사는 우리나라의 자유민주주의와 평화를 위해서 싸워준 참전용사들의 희생을 잊지 않는 보은의 신앙과 보훈 정신을 함양하는 일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해마다 단 한 번도 빠짐없이 17년째 하게 되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도저히 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세계 최초로 온라인 화상 줌과 메타버스를 활용하여 참전용사 초청행사를 진행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우리 교회가 국가 기관도 하기 힘든 일을 17년째 해 오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지난 날의 고난의 역사를 기억하며 한반도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의 야드바셈 박물관에 보면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기억함은 구원의 빛이다. 그러나 망각은 포로 상태로 돌아가는 첩경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수치와 고난의 역사를 기억해야 다시 6.25와 같은 참상이 재발하지 않습니다. 둘째, 우리 스스로 보은의 신앙과 보훈의 정신을 새기고 그 신앙과 정신을 자녀들에게 가르치며 목회적 대형교회로서의 사회적 환원을 하기 위함입니다. 자유민주주의 가치에 의해 건국된 대한민국은 1950년 6월 25일 주일 새벽 공산주의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그러나 애국가 가사처럼 하나님이 보우하시고, 국군 참전용사와 미국과 유엔 참전용사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주셔서 자유대한민국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지막 참전용사까지 기억하고 예우하며 보은해야 합니다. 보은이 한 인격의 품격이라면 보훈은 그 국가의 품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희 교회가 민간 차원에서 참전용사들의 보은을 할 뿐만 아니라 보훈정신을 함양하는 한 알의 밀알로 쓰임 받을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셋째, 한미관계를 증진시키기 위한 민간외교 차원에서 하는 것입니다.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는 한미동맹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저희 교회가 17년째 진정성을 가지고 참전용사 초청행사를 하니까 여러 일간지에 소개되고 공영방송에서 다큐까지 제작 방영되어 국민들에게 역사와 사회를 섬기는 한국교회의 이미지를 고양(高揚)시킬 수 있었지 않습니까? 오늘의 참전용사 초청행사가 있기까지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한 분이 있습니다. 바로 해군 제독 출신이신 김종대 장로님이십니다. 김 장로님께서는 몇 년 전에 성대 수술을 하셔서 목소리를 잃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일생의 사명으로 알고 헌신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 새에덴교회 성도들의 눈물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저는 마지막 한 분의 참전용사가 살아남을 때까지 잊지 않고 참전용사 초청행사를 이어갈 것입니다. 저와 새에덴교회의 자그마한 헌신과 섬김이 한미동맹을 더 강화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피 흘림이 없는 복음적 평화통일의 길을 여는 자유와 평화의 꽃이 되고 별이 되기를 소망하면서 말입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3-06-18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사랑은 무작정 따르고 싶은 마음이지요.”
    지난 수요오전예배를 마치고 평신도사역개발원 간사들과 함께 산행을 하며 숲속의 대화를 하였습니다. 그냥 교회 소예배실에서 모임을 할 수도 있지만 숲길을 함께 걷고 대화를 하며 더 깊은 소통과 공감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산에 오르자 푸른 나뭇잎들 사이로 진한 밤꽃 향기가 코끝을 스쳤습니다. 바쁜 일정 때문에 늘 저녁에 산행을 하는데, 그날은 낮에 평개원 간사들과 소통하는 사역도 하면서 산행을 할 수 있어서 정말 좋았습니다. 그런 저의 마음에 밤꽃 향기보다 더 진한 소통과 공감의 향기가 불어왔습니다. 불곡산과 대지산 사이 깊은 숲에서 나무 벤치에 앉아 평개원 원장인 이경희 전도사의 인도로 간사들과의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양육 사역을 하면서 힘든 일은 무엇이었는지, 어떻게 그 힘듬을 극복했는지, 보람은 무엇이었는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간사들이 이야기를 하면서 은혜와 감격에 목이 메여 말을 못 잇는 것입니다. 저의 눈에는 그들의 뜨거운 눈물이 하나님을 향한 고백이었고 떨리는 숨결이 감사와 찬양의 노래였습니다. 눈물이 쏟아져 말을 못 하겠다고 하는 분들을 보며 제 마음도 울컥하였습니다. “아, 어쩌면 저렇게 아름다운 성도들이 있을까. 내가 보기에도 저렇게 아름다운데 하나님이 보실 때 얼마나 아름답고 귀하게 보실까.” 어느 누가 사명을 감당하면서 힘들지 않겠습니까? 모두 다 사명을 감당하면서 힘들었던 순간이 있고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은 순간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 사명이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게 하고 성숙하게 만들었다는 것이죠. 아니, 사명이 아니었으면 살지 못했을 거라고 하면서 ‘사명은 생명’이라고 고백하는 거예요. 그래서 저도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저도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 목회 뿐만 아니라 여러 공적 사역을 하다보면 정말 절망하고 쉬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주일설교는 어떻게 할 수 없지만, 금요철야기도 같은 경우는 가끔 쉬고 싶을 때도 있고, 목양칼럼도 예전에 쓴 글을 재탕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결국 사명을 붙잡고 다시 설교를 준비하고 글을 쓰며 사명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성도들과 숲속의 대화를 하는데 정말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대화의 끝 무렵에 “앞으로 내가 어떤 목사가 되기를 원하는지, 나에게 바라는 상이 무엇인지”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 지금보다 더 잘하실 수가 없습니다. 건강만 하시면 좋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은퇴 얘기도 나왔습니다. 그러자 “우리는 무조건 목사님을 따릅니다. 몇 살이 되었건 목사님이 가시는 길을 따르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때 하태완 작가의 “사랑은 무작정 따르고 싶은 마음이다”라는 글귀가 생각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너무 좋아서, 너무 닮고 싶어서, 너무 소중해서 무작정 따르고 싶은 마음입니다. 산을 내려오는 길에 올라갈 때 보지 못했던 들꽃들, 올라갈 때 맡지 못했던 밤꽃 향기가 더 진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그 어느 꽃보다도, 그 어느 향기보다도 더 아름다운 것이 평개원 간사들과의 소통과 공감의 시간이었습니다. 누구 하나 빠짐없이 모두 다 하나님 앞에 귀하고 아름답게 쓰임 받고 있는 간사들이었습니다. 그 분들이야 말로 새에덴의 핵심 원동력이요 보배들과 같은 사역자들이었습니다. 대화의 말미에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는 높음이 아니라 깊음을 추구해야 합니다. 한국교회도 깊음이 아니라 높음을 추구하니까 서로 싸우고 분열하고 교만하게 되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우리 평신도 양육 간사들은 언제까지나 높음이 아니라 깊음을 추구하며 각자의 상황 속에서 누군가의 모델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평신도사역개발원 간사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리고, 중국의 시인 쉬즈모의 표현처럼 ‘고개 숙인 온화함’으로 인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그날 그리스도 안에서 나눈 밤꽃보다 더 짙은 소통과 공감의 향기는 계절이 지나도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3-06-11
  • [언론회 논평] 기독교와 이슬람의 뿌리가 같다는 무지한 정치인
    대구의 대현동에는 이슬람 사원(寺院)이 지어지면서 지역 주민들을 매우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오죽하면 지역민들은 자기들의 삶의 터전을 잃게 될까 봐 눈물로 정부와 지자체와 국민들에게 호소하고 있다. 얼마 전에도 수천 명의 사람들이 그들의 고통에 동참하여 집회를 하였다. 지역 주민들이 밀집하여 사는 지역에 이슬람 사원을 짓는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만약 교회나 성당이나 사찰을 인구 밀집 지역에 짓는다면 건축 허가를 내 주겠는가? 이 사건은 2020년 9월 대구 북구청이 이슬람에 건축허가를 내주면서부터 문제가 시작되었다. 이에 주민들이 민원을 제기함으로 2021년 7월 공사중지가 내려졌으나, 소송까지 가서 2022년 9월 대법원이 이슬람측의 손을 들어주므로(건축주) 다시 공사가 계속될뿐더러 갈등이 증폭되고 있다. 여기에는 주민들의 안전을 깊이 생각하지 않고 건축허가를 내준 행정 기관들의 안일한 생각, 법원들의 속단, 그리고 무책임한 국가인권위원회의 공사 속개 촉구 권고 등이 지역민들의 삶을 더욱 어렵게 만들어가고 있다. 이슬람이 다른 보편적 종교들과는 다르게 매우 폭력적이고, 일방적이고, 상호주의를 인정하지 않는 종교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이슬람이 일으킨 가장 대표적인 사건을 기억한다면, 2001년 미국에서 이슬람에 의해 일어난 9•11사태일 것이다. 이때 희생된 사람들이 자그만치 3,000여명이다. 이슬람의 무자비와 무관용과 불특정 다수를 향한 증오에 찬 범죄 현장이 되었다. 그것이 이슬람의 정체이며, 속내이다. 이슬람은 자신들이 ‘평화의 종교’라고 말하고, 일부 과격한 단체들만이 그런 폭력성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슬람은 수니파이든 시아파이든 모두 폭력을 일으킨다. 그 이유는 그들이 가진 경전에서 그렇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슬람이 우리나라의 보수적인 도시인 대구에서 그것도 한국에서 유명한 국립대학인 경북대학교 인근에서 일부 구성원들과 함께, 그들의 둥지를 틀려고 사원을 짓고 있는 것은 작은 문제가 아니다. 이는 종교시설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폭력성을 드러낼 근거지가 됨을 두려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이런 위기 상황에 지자체장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무지를 드러낸 발언을 하여 국민들의 공분(公憤)을 사고 있다. 다름 아닌 홍준표 대구시장이다. 그는 보수 정치권의 대표적인 정치 지도자로 여러 번의 국회의원을 거쳤고, 경남 지사와 대권 후보로, 그리고 지금은 대구시장에 있다. 그는 최근 페이스북을 통하여 ‘이슬람의 뿌리는 기독교와 같다. 구약에서는 같고 신약부터 달라진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이 20여년 전에 이슬람권에서 어떤 교수로부터 들은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더이상 이슬람에 대한 편견과 오해는 없었으면 합니다. 서로 증오하지 말고 포용하여 각자의 종교만 믿으면 됩니다’라고 주장하였다. 참으로 어이없는 노릇이다. 이슬람과 기독교는 뿌리는커녕 아무 것도 같은 것이 없다.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에서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이 일부 나온다고 하여, 같은 종교가 아니다. 홍 시장의 말대로 양 종교가 구약에서 같아지려면, 구약성경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이슬람의 경전에서 활동하는 것과 같아야 한다. 그러나 그런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 결정적으로 인류의 구원주, 메시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슬람에서는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이 믿는 마흐메트만이 최후의 예언자라고 본다. 그런데 무엇이 같은 뿌리라는 것인가? 마치 홍 시장 아들의 이름과 다른 사람의 아들 이름이 같으니, 그가 내 아들이라는 말과 무엇이 다른가? 기독교와 이슬람은 전혀 다른 종교이며, 이슬람의 문제점을 가리기 위하여 위장한 말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된다. 서구 유럽 가운데 프랑스는 1960년대 이슬람 사람들을 대거 받아들이면서, ‘똘레랑스’(관용)을 차용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유럽은 무슬림(이슬람교 사람)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으며, 다문화주의(Multi Culturalism)가 사실상 실패하였다. 유럽이 실패한 ‘개방적 외국인정책’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은 위험하다. 홍 시장이 대구시장이 된 지도 벌써 1년이 다 돼 간다. 그동안 대현동 이슬람 사원 건축에 대하여 함구하다가 느닷없이 이슬람과 기독교의 뿌리가 같다는 것도 그렇고, 각자의 종교만 믿으라는 이슬람을 두둔하는 발언은 대단히 무책임하고 위험한 발상이다. 그가 시장이면서도 지역민들이 위험에 처해도 이에 대한 처방은 내놓지 못하고 기껏해야 이슬람쪽에서 위장된 말로 사용되는 ‘뿌리 타령’을 하는 것을 보면 이슬람에 대하여 매우 무지하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이슬람을 ‘평화의 종교’로 볼 수 있으려면, 지금 전 세계에서 이슬람에 의해 일어나는 모든 폭력이 없어져야 한다. 자기들끼리도 죽이고, 타종교를 핍박하고, 아무런 죄없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폭력을 사용하는 일이 사라져야 그들의 주장이 맞는다. 이슬람을 가볍게, 보편적 종교로 보았다가는 큰코를 다치게 될 것이다. 홍준표 대구시장은 이런 근거 없는 말로 주민들을 압박하지 말고, 이런 발언을 한 것을 사과하고, 정말 무엇이 대구시민의 안전을 위한 것인지를 분별하여 결단력 있게 행정력을 보여주기 바란다.
    • 칼럼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3-06-08
  • [언론회 논평] 국가인권위원회에 ‘인권’이 있는가?
    진보 성향의 모 언론사의 5월 22일자 기사를 보면, 최근에 국가인권위원회(위원장: 송두환, 이하 인권위)에서 여러 가지 논의 사항을 결정하면서, 그중에 모 상임위원이 소수 의견을 냈다고 한다. 즉 인권위의 의견과는 다른 입장이었다. 문제는, 군대에서 ‘해병대 훈련병에게 짧은 머리를 유지하도록 하는 것은 인권상황 개선 권고 사안’이라는 전체적인 결정에 대하여, 이 상임위원은 소수 의견을 달면서 ‘게이(남성동성애자)들이 항문 성교를 허용함으로 항문이 파열되어 대변을 흘리기 때문에, 이것이 자신도 모르게 인권침해가 됨을 인권위원회가 인식시켜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해병대 훈련병들의 두발(頭髮)에 대하여 인권위가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그럼 신병들이 장발(長髮)을 하고 훈련을 받나? 이런 것들이 ‘인권 침해적’인 것이라면, 남성 동성애자들이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 항문 성교를 통하여 신체가 망가지고, 끝내는 매우 불편하고 불행한 삶을 살게 되는 것에 대하여 오히려 인권위가 권고를 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취지로 이해된다. 사실 개인의 ‘행복추구권’이나 삶의 질을 망가트리는 것을 국가기관인 인권위가 권고한다면, 이보다 중요한 ‘인권 개선’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도 인권위는 대한민국 청년 1%가 간다는 해병대 신병들의 두발 상태를 놓고, 국가 예산으로 운영하는 국가기관이 이런 권고들이나 한다고 하니, 기가 찰 노릇이다. 그런데 그 상임위원의 발언은 내부의 압력에 의하여 결정문에서 삭제가 되었고, 더 나아가 이런 상황들이 언론과 친동성애 단체 등에 흘러나가, 그 해당 상임위원을 ‘망신 주기’와 ‘성소수자 혐오’ 표현으로 공격을 당하게 된 것이다. 이 위원은 다른 사안에서도 때로 인권위 전체와 다른 의견을 낸 모양이다. 그 위원은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부장판사를 지냈고 현재는 모 유명 대학의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서, 누구보다도 법률에 관하여 전문가인데, 그런 소수 의견을 냈다고 인격 모독을 하고, 그의 인권을 박살 내려는 것인가? 적어도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이라면 상당한 지위와 법적 지식과 상식이 있는 인물들로 세워지는데, 그 안에서 다른 의견을 냈다고 하여 이렇게 마구잡이식으로 소수 의견과 인권을 짓밟는다면, 이것이 무슨 국가인권위원회인가? 우리나라는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다. 그 위원의 소수 의견에 대하여 공격받도록 유도한 것인가? 내부 판결 내용이 알려지고, 이름을 알리고, 진보 언론들이 이를 취재하여 보도하고, 친동성애 사회단체와 인사들이 그 상임위원의 자격을 운운하는 것은, 그야말로 ‘여론 재판’ ‘인민재판’과 같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사건에 대하여 보도한 진보 언론의 기사 뒤에 실린 댓글을 보면 우리 국민들의 정서를 알 수 있다. 주요 내용들을 살펴보면, 일반 시민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인권위가 한참 뒤처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병든 게이를 치료하는 것이 인권이다’ ‘항문 성교 후유증이 변실금이라는 것이 의학적 사실인데, 왜 혐오 표현인가?’ ‘어느 부분이 혐오인가? 부정하는 자체가 혐오스러운데’ ‘비만은 건강의 위험, 흡연은 폐암의 원인이라 말하면서, 동성애의 문제점인 변실금은 알리면 안 되나?’ ‘왜 동성애가 나쁜지 온 국민이 알 권리가 있다’ 라는 격앙된 목소리들이 많았다. 우리나라의 인권위는 자신들이 정해 놓은 인권 규정 안에서 마치 ‘땅 따먹기’를 하는 철없는 사람들과 비슷하다. 우리 국민들의 별별 사소한 것들까지 소위 인권이라고 들이대면서, 북한 주민들의 심각하고도 절박한 인권침해에 대해서는 마치 솔개 앞에 병아리처럼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한다. 그런 기관이 아무 쓸모도 필요도 없는 것들을 마치 국가기관으로써 대단한 가이드라인이라도 만들어 내는 듯 하다니 한심하다. 이는 한 마디로 국력 낭비이다. 정작 해야 할 동성애로 인한 국민들의 건강과 안전은 말하지 못하고, 동성애자들의 삶과 ‘행복추구권’이 망가지고 있는데도, 오히려 그쪽 편에 서 있는 것을 보면, 인권위가 사족(蛇足)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우리나라의 인권위는 제기능, 제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으니, 차라리 없는 것만 못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 칼럼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3-06-08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샐리와 줄리를 초월한 은혜”
    두어 달 전부터 북유럽 해외 일정이 잡혀 있었습니다. 북유럽 교회의 요양복지시설을 탐방하고 연수하는 프로그램에 동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헬싱키에서 스톡홀름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크루즈 시간이 17시간이나 되는 환상적 타임도 있어서 가려고 했습니다. 더구나 요즘 교계 어느 기관 일로 머리를 식히고 도피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며칠 전부터 가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가기로 약속을 했으니까 한편으로는 가야 할 의무감을 갖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피하고 싶은 마음이 더 드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생각하노라니까 출국 전날인 주일 저녁에 도대체 잠이 오지 않는 것입니다. 다음 날 오전에 새에덴전도단의 집회를 인도해야 하는데 새벽녘까지 잠이 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도 겨우 쪽잠을 자고서야 전도단 강의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공항으로 출발을 했습니다. 가면서 “차가 밀려서 차라리 비행기를 놓쳐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말이 나도 모르게 나왔습니다. 그런데 차가 막히는 일이 없이 공항에 도착했고 저는 순조롭게 비행기에 탑승을 하였습니다. 비즈니스 클래스를 탔는데 제 앞쪽으로 서너 자리 앞에서 두 아이가 연달아 울어대는 것입니다. 순간 불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큰일 났구나. 오늘 저녁도 저 아이들 때문에 잠을 못 자면 어쩌지? 얼마 전 베트남에 갈 때도 아이들 때문에 잠을 못 자서 정말 힘들었는데 오늘도 잠을 못 자고 다음날도 불면으로 이어지면 어찌 될 것인가.” 정말 베트남 일정에서 있었던 불면의 악몽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다 보니 신경이 부쩍 예민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아이를 키웠고 손주가 있기 때문에 백번 이해합니다. 그러나 전날 저녁잠을 충분히 잔 상태라면 그 상황을 극복할 수 있겠죠. 그런데 그날은 정말 자신이 없었습니다. 순간 이런 마음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하나님께 이런 기도, 혹은 서원 아닌 서원을 하였습니다. “주여, 이 비행기의 시스템에 문제가 있어서 비행기 이륙이 대책 없이 늦어지거나 승객 전체가 내리는 일이 생기면 저는 북유럽 일정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5분도 안 돼서 기내 방송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비행기 기체에 결함이 있어 안전운항을 하기 위해서는 결함을 다시 수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수리를 위해서 탑승객 전체가 하기(下機)를 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이루어질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집사람과 정권사님께 전화를 했더니 “아이고 잘 됐어요. 어서 빨리 재역입국을 해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순간 샐리와 줄리의 법칙이 생각이 난 것입니다. 샐리의 법칙은 머피의 법칙의 반대의 법칙으로서 자신의 생각대로 좋은 일만 계속 일어나는 것입니다. 줄리의 법칙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속으로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언젠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줄리는 좀 더 시간에 차이를 두지만 같은 의미죠. 택시를 타고 교회로 돌아오는데 “하나님 은혜 안에서 이것이 샐리인가, 줄리인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 날 제 수행비서이자 현지에 가 있는 강인철 집사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내가 거기 안 가기를 잘한 것인가. 잘못했던 것인가.” “잘하신 것 같습니다. 그 갓난아이들이 저녁에도 울고 깊은 밤에도 울고 새벽까지 계속 울어 대었습니다. 목사님, 절대 잠을 못 이뤘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 오신 분들과 함께 이동을 하는 것이 굉장히 불편한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훗날 개인적으로 편한 시간에 편한 마음으로 오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재입국 후에 무슨 일이 생길까, 어떻게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인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어느 한 사람의 미래를 통째로 바꿔주는 일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해외에 갔다면 그 일을 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절묘한 타이밍의 심방과 헌신기도를 잘할 수 있었고요. 꼭 가야 할 장례식 조문과 약속된 결혼 주례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제 몸이 혹사당하지 않고 쉴 수 있어서 너무 다행이고 감사했습니다. 이거야말로 샐리와 줄리를 초월한, 아니면 하나님께서 제 삶 속에 샐리와 줄리의 법칙을 적용해주신 특별한 은혜였습니다. 그 은혜 속에서 저는 한 주간을 더 감사하며 찬양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님들에게도 언제나 샐리와 줄리의 법칙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3-06-04
  • [국독연 칼럼] 강성률 목사의 ‘그 통’과 ‘통’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왕상17:14). 아합의 죄로 인하여 이스라엘 땅에 기근이 임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시돈 땅 사르밧에 사는 과부에게 보내어 과부에게 엘리야를 공궤하도록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사르밧에 보내실 때, 사르밧의 어느 지역이나 사르밧 과부의 용모나 그가 어느 때에 외출할 것이라는 말씀 등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시니 따를 뿐이었습니다. 무작정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갔는데 마침 사르밧에 나무를 줍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여인이 바로 하나님께서 택하신 과부였습니다. 엘리야가 그녀를 만나 떡을 좀 달라고 하자, 그녀는 떡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통에 가루가 조금 있고, 병에 기름이 조금 있는데 그것으로 자신과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은 후에 죽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엘리야는 그녀 말대로 하려니와 그것으로 먼저 그를 위하여 떡을 만들고 후에 그녀와 그녀의 아들을 위하여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본문 말씀 ‘그 통’과 ‘그 병’을 말한 것입니다. ‘그 통’과 ‘그 병’은 먼저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를 위한 통과 병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위한 것은 곧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의 지시대로 그 가뭄 때에 먼저 엘리야를 위하여 떡을 만들었습니다. 그랬더니 과연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다 소비되었다고 하는 순간 그 통과 그 병의 바닥을 보면 또 채워져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가뭄 기간에도 세 명의 사람들은 무사히 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처음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의 말대로 그 통의 가루와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자,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말할 수 없이 감격하였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방인인 자신에게까지 이런 은혜가 임함을 알고 하루하루가 기뻤고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적도 매일 반복 되면 자연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향하던 때에 하늘에서 만나가 매일 내리자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지 못하고 좀 더 자극적인 음식 타령을 한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민11:4-5). ‘그 통의 가루’와 ‘그 병의 기름’이 ‘일상적인 통과 병’이 된 것처럼 말입니다(왕상17:16). 그 결과 그 집에 큰 사건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과부의 아들이 죽었습니다. 오늘날 신앙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후, 처음에는 사랑을 깨닫게 되고 감사 감격하게 되지만 그 마음을 계속 쓰지 못하면 감각이 둔해집니다. 그리고 우연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과 멀어지고 타락의 길을 가게 되기 쉽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시 회복시키기 위하여 환경을 허락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아들을 바치라는 환경이었고, 사르밧 과부에는 아들이 죽는 환경이었습니다. 죽음이란 육신의 목숨을 의미하는 것만 아닙니다. 자녀들의 타락과 방탕한 생활도 거기에 포함됩니다. 이 때 영적으로 민감한 성도들은 ‘하나님이 나를 재촉하시는 구나. 다시 힘을 쓰자.’하며 떨어진 믿음을 회복하기 위하여 애를 쓸 것입니다. 하지만 육체가 예민해진 반면 영적으로 둔해진 성도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여러 인간적인 방법을 모색하려고 할 것입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일은 세상일이며, 육적인 일이며, 당장 잘 되는 일일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관심사는 일이 아니라 우리 자신입니다. 자신의 영적인 상태입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얼마나 본받아 가는 것인가에 있습니다. 어려움이 임할 때 첫사랑과 첫 은혜를 되새기며 믿음으로 돌아와서 다시 힘을 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도록 하기 위하여 때로는 재앙 같은 복을 허락하시기도 합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3-06-0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하늘의 상을 바라본다”
    저는 목요일 오후에 홀리 스피리츠맨 메달리온 시상식에서 설교를 하였습니다. 김포순복음교회 담임목사이신 김삼환 목사님과 대만 선교사이신 서상진 선교사님께 시상을 하였습니다. 설교 후 두 분에게 시상을 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상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영광스러운 것이죠. 이 땅에서도 잘하는 걸 가지고 상으로 보상을 하지 않습니까? 제가 어린 시절에 다녔던 초등학교는 워낙 시골이라 한 학년에 두 반씩 있는 학교였는데 그 작은 학교에서도 여러 가지 상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상을 받으면 책보 속에 넣지 않고 그 상장을 손으로 들고 다녔습니다. 저를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랑을 하고 동네 사람들 많이 보라고 말입니다. 그뿐 아니라 집에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자랑을 하려고 그 상장을 벽에다가 다 붙여놔 버렸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상장이라고 보관된 게 하나도 없습니다. 다행히 초등학교 때 교육감상 받은 게 있어서 그걸 우리 형님이 어찌어찌 보관을 해서 지금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크고 작은 상을 많이 받아봤습니다. 대통령 표창장에서부터 국민훈장까지, 또 해외에 가서는 마틴 루터킹 재단에서 주는 국제평화상도 받아봤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교회 최초로 미국 연방하원 의회에서 17년째 참전용사초청을 해 왔던 것이 등재되어 등재패도 받았습니다. 제가 시를 쓰다 보니까 천상병문학상과 윤동주문학상도 받았습니다. 글 쓰는 사람의 영광이죠. 그런데 정말 영광스러운 상을 받으면 눈물이 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거나, 연예인들이 연기대상이나 가수상을 받을 때 보면 기뻐서 환호하기보다는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은 왜 눈물을 흘렸을까요? 슬퍼서 흘렸을까요, 속상해서 흘렸을까요? 그건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극도로 기쁘고 즐거운 순간에는 우리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자신이 원했던 것을 각고의 노력으로 이뤄낸 순간, 그 절정의 상태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터지게 됩니다. 그런데 그 눈물이 우리의 격한 감정의 균형을 잡아줄 뿐만 아니라 그 긍정적 감정을 오래오래 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 땅의 상도 중요하지만 하늘의 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자신을 위하여 예비된 의의 면류관을 사모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기 뿐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그 상이 예비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딤후4:7-8) 이렇게 바울은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그 영광스러운 상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히브리서 11장 6절을 보면 「믿음이란 하나님이 계시는 걸 믿는 것이고 상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했지 않습니까?(히11:6)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서 받는 상도 영광스럽지만 하늘에서 받는 상은 정말 더할 나위 없이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 상을 받을 때 우리 모두는 다 울 것입니다. 너무 감격에 감격을 이기지 못해서 울고 또 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 땅의 상도 영광스럽지만 하늘의 상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리고 이 땅의 상은 하늘의 상을 바라보도록 하는 일종의 동기가 되고 동력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하늘의 상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 무뎌져가고 있습니다. 참 믿음은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믿는 것이고 그 하나님께서 상 주시는 것을 믿는 것인데 말입니다. 하나님의 상 주심을 잊어버리고 사람에게 인기와 명예와 보상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현대판 바리새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삶을 지향하면서도 자기는 그런 바리새인이 아니라고 우기는 사람은 현대판 초 바리새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시상식을 하면서 다시 한번 저를 돌아보았습니다. “나는 얼마나 하늘의 상을 바라보는가. 그래, 하나님의 상을 사모하며 살아야지. 이 땅이 어지럽고 혼탁할수록 하늘의 거룩한 상을 사모해야지.” 시상식을 마치고 다음 일정으로 이동하는 중 입에서 이런 찬송이 흘러나왔습니다. “♪ ... 빛난 면류관 받아쓰고서 주와 함께 길이 살리.”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3-05-28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