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0(금)

칼럼
Home >  칼럼

실시간뉴스

실시간 칼럼 기사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거저 받았으니 거저 드립니다”
    저는 설교를 할 때 중간 중간에 찬양을 하고 비록 찬양이 아니더라도 곡조 있는 예화로서 일반 노래를 부를 때가 있습니다. 인간은 음악적 존재입니다. 음악 없이는 살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모세도 운율과 곡을 섞어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암송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신명기31:19) 성 프랜시스 역시 거리와 시장, 광장에서 설교를 하고 복음을 전할 때면, 평민들에게 익숙한, 당시 유행하던 민요나 대중가요에 복음 가사를 입혀 그들에게 복음을 전달하였습니다. 그때 당시의 사제들은 전부 고상한 라틴어로 설교를 했고, 평민들은 설교를 알아듣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성 프랜시스는 시장에서 장터 언어로, 대중가요에 복음 가사를 입힌 노래로 평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구원을 하였습니다. 그뿐입니까? 존 칼빈도 시편 쥬네브 찬송을 만들 때, 다는 아니지만 일부 찬송은 당시 유행했던 프랑스 민요나 대중가요에 시편 말씀을 가사로 붙였습니다. 저 역시 전도집회나 복음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기 위해서 성 프랜시스나 칼빈처럼 대중가요를 복음적으로 개사해서 부를 때가 있습니다. 사실 찬송가에 나오는 ‘하늘가는 밝은 길이’, ‘천부여 의지 없어서’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신자 되기 원합니다’ 등도 다 그 당시 민요와 흑인영가에서 차용했습니다. 그리고 아리랑이라고 하는 곡은 캐나다와 미국에서 찬송가 곡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설교 중 예화가 없는 설교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예화는 어차피 다 세상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볼 때, 일반 예화는 곡조 없는 예화이고, 노래는 곡조가 있는 예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성도들과 소통하고 감동을 더 하기 위해서 설교 중 찬송도 부르고 특별한 경우 곡조 있는 예화로 일반 노래도 선용하는 것이죠. 과거에는 주지주의적인 설교를 하였지만 요즘은 감성과 에토스가 있는 설교를 해야 하기 때문에 음악을 활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면 갈수록 애로사항이 많아져 갑니다. 유튜브에 설교 영상을 올리면 노래의 저작권에 걸리는 것입니다. 다른 노래의 저작권이라면 모르겠는데 3.1절이나 8.15 광복절을 맞아 ‘애국가’를 부르는데도 저작권에 걸리는 것입니다. 또한 어버이주일을 맞아 ‘어머니 은혜’를 불렀는데 이것 역시 저작권에 걸리는 것입니다. ‘애국가’나 ‘어머니 은혜’와 같은 노래는 진짜 국민의 노래가 아닙니까? CCM은 말하기도 어색할 정도로 저작권에 제한을 받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 스텝에게 빨리 저작권 단체에 비용을 지불해서 언제든지 자유롭게 부를 수 있도록 하라고 했는데 저작권을 관리하는 단체도 한두 군데가 아니어서 만만치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업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누가 저에게 권면을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도 작사를 하거나 작곡한 노래를 저작권협회에다가 등록을 하세요. 특별히 ‘사명의 길’ 같은 경우는 어지간한 교회 성가대에서 다 불렀고 해외에서도 많이 부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마 목사님께서도 저작권등록을 하면 저작권료를 꽤 많이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과거의 노래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정말 좋은 가사를 쓰고 좋은 곡을 작곡하여 저작권협회에 등록을 해 보세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그게 무슨 떼돈을 버는 거라고요. 제가 저작권에 걸려 상처를 입었다면 저라도 남에게 그런 상처를 안 줘야 되지 않겠습니까? 물론 저작권은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저는 음악 공부도 안 한 사람이고 국문과 출신도 아니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문학성과 음악성을 거저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저는 저작권료보다 제가 만든 노래가 하나님을 위해 더 많이 쓰임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거저 받았는데 거저 줘야 되는 것이 신앙의 정신과 가치가 아니겠습니까?” 그랬더니 그 분이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목사님, 듣고 보니까 참 그러네요. 정말 존경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목사님께 더 큰 은혜를 주시고 더 큰 복을 주신 것이 아닙니까? 생각해 보면 목사님도 문학성과 음악성을 거저 받은 것이겠지요. 하나님이 몹시 기뻐하실 것입니다. 저작권은 세상의 영역이라면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은 은총의 영역이고 거룩의 영역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제가 60권 가까이 책을 썼는데 누가 제 책에서 설교를 인용하거나, 책을 쓰는데 풋 노트를 달지 않고 인용한 경우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래도 저는 한 번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해 아래 새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마저도 쓰임 받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저는 부흥회나 세미나에 가서 설교나 강연을 한 후 어떤 분이 제 설교나 강의 원고를 달라고 하면 그냥 바인더 채로 줘버립니다. 이렇듯이 저는 앞으로도 거저 받은 은혜를 거저 드리고 살 것입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3-05-14
  • [국독연 칼럼] 강성률 목사의 ‘은혜의 말씀’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고하되,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왕상17:1). 하나님의 말씀이 엘리야를 통하여 아합에게 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어둠이 조금도 없으십니다(요일1:5). 하나님께서 아합에게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은혜입니다. 은혜가 아니라면 아무런 경고도 없었을 것입니다. 아합에게 이 말을 한 것은 아합이 하나님께 돌아와 회개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아합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회개하지 않은 까닭은 첫째, 시돈 여인 이세벨이 끌고 들어온 바알 우상의 영향이었을 것입니다. 바알은 곡물들을 생산하게 한다는 우상으로서, 당시 그를 믿는 사람들은 풍작이나 흉작은 전적으로 그에게 달렸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아합이 엘리야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던 것은 되고 안 되고, 번성하고 망하고, 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 바알에게 달려있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둘째로 아합은 엘리야를 무시했습니다. 엘리야의 외모는 초라했습니다. 그는 길르앗 사람으로서 므낫세 지파에 속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이었고, 허리에는 가죽 띠를 띠었습니다(왕하1:8). 세례요한은 엘리야의 심령으로 온 사람이었는데 세례요한의 행동에서 엘리야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마3:4). 약대 털옷, 가죽 띠, 메뚜기와 석청이 주는 공통점은 가공되거나 꾸밈이 없이 자연 그대로의 상태입니다. 왕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아합이 보기에는 초라하기 그지없었을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을 소개할 때 누구의 자녀라고 소개하는 것이 습관화 되었는데 엘리야는 그러한 소개마저 없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유력한 가문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아합으로 하여금 엘리야를 무시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아합은 엘리야를 붙들고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말씀하시는지 물어야 했습니다. 그러면 엘리야는 분명 모세의 말을 들려주었을 것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삼가라. 두렵건대 마음에 미혹하여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그것에게 절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아니하여 땅으로 소산을 내지 않게 하시므로 너희가 여호와의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속히 멸망할까 하노라.”(신11:16-17).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않게 하는 것은 다른 신을 섬길 때 그렇게 됩니다. 아합은 그들이 바알과 아세라를 섬긴 것을 회개해야만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 기갈은 환경의 기갈을 불러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이 가지고 있어도 타락하지 않을 정도는 주십니다. 그런데 그것마저 빼앗아 갈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인들이 우상을 섬길 때입니다. 신앙인들이 오늘날 보이는 우상을 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전처럼 불상이나 큰 바위 큰 나무를 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보이지 않는 우상입니다. 돈이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명예가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권력이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자녀가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외에 우리 자신의 마음을 온종일 묶거나 끄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우상입니다(고전12:2).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의 은혜의 비가 멈추게 됩니다. 아합 시대에 가뭄이 들기 전 전조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그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는데 저가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문을 세울 때에 말째 아들 스굽을 잃었으니 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로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왕상16:34). 이 일이 일어나기 500여 년 전,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여리고 성을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여호수아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여호수아가 그 때에 맹세로 무리를 경계하여 가로되 이 여리고 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장자를 잃을 것이요, 문을 세울 때에 계자를 잃으리라 하였더라.”(수6:26). 히엘이 여리고를 재건한 것은 여호수아를 통하여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몰라서 그렇게 했을 수 있습니다. 알고도 당시 바알 신이 그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어찌 되었던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한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터를 쌓았을 때 맏아들이 죽었으면 이스라엘의 누군가는 그 사실을 알렸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그것을 무시하고 계속 쌓아나갔습니다. 그러다가 말째까지 죽고 만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것입니다. 당시 히엘의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상태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그러한 기근이 임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아모스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면 영적 기갈이 임하고 영적 기갈이 오면 환경의 기갈이 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사람의 특징은 여러 가지로 나타납니다. 말씀을 들을 때 졸리거나, 지겹게 느끼거나, 거꾸로 듣는 현상입니다. 거꾸로 듣는다는 것은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자신을 콕 찍어서 이야기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반드시 환경에 기갈이 임합니다. 말씀이 안 들리는 사람은 은혜받을 기회가 적어집니다. 반드시 들리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회개해야 합니다. 영적인 말씀은 영으로라야 들을 수 있습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롬7:21-22). 속 사람이라야 들을 수 있습니다. 평소에 겉 사람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주일에 영적인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은혜가 되는 것은 귀를 즐겁게 하는 말씀, 예화나 세상 이야기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안 들리면 겉 사람 따라 살아간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셔서 용서해주시고 귀를 열어주십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3-05-12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용종 있어요?”
    10여 년 쯤이었을까요. 제가 태어나서 난생 처음으로 종합검진을 받을 때였습니다. 종합검진을 처음 받았으니 대장내시경도 처음 받은 것이죠. 저는 그때까지 종합검진 같은 것은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제가 최선을 다해 기도하면 하나님이 저의 건강을 지켜주시리라 믿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변에서 여러 사람들이 권유를 했습니다. 누구도 대장내시경을 했는데 대장에서 용종이 몇 개가 나왔고, 또 어떤 분은 7개, 8개가 있어서 그것을 다 제거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용종을 그대로 두면 암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그러니 빨리 종합검진을 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대장내시경을 받게 되었습니다. 수면 마취를 받기 전에 저의 관심은 “과연 내 속에도 용종이 있을까? 아니야, 없을 거야. 나에게는 절대로 용종이 없을 거야” 하는 기대감을 갖고 한편으로는 긴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수면 마취가 완전히 안 된 것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수면 마취 중에 닥터에게 느닷없이 물어봤잖아요. “선생님, 제 안에 용종이 있나요?” 그랬더니 하얀 가운을 입은 닥터가 이렇게 중얼거리는 겁니다. “이 양반 마취가 왜 제대로 안 된 거야? 약 좀 더 넣어.” 그래서 제가 뭐라고 응대한 줄 아십니까? “이 양반이라니요? 나는 목사입니다.” 그러자 닥터가 말씀하시기를 “예, 알고 있습니다. 용종 하나도 없습니다. 깨끗합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다시 잠이 들었습니다. 그 뒤로도 두어 번 대장내시경을 했지만 이런 경험은 없었습니다. 그냥 잠든 채로 내시경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 다 용종이 전혀 없다는 결과를 통보받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검사결과도 깨끗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난 화요일에 이재훈 의료목사님이 새로 개원하는 다건연세내과에서 종합검진을 받게 되었습니다. 전날 개원예배를 드리고 병원 시설을 둘러보는데 새로 개원한 병원이기 때문에 들어가자마자 호텔 프런트와 같은 분위기를 느꼈고 내과뿐만 아니라 가정의학과도 개설하여 여성들의 자궁경부암과 유방암까지 진단을 할 수 있게 했습니다. 너무 깨끗하고 시설이 좋아서 가까이에 있는 동네 대학병원과 같다고 할 수 있지요. 제가 다음 날 받을 내시경실을 둘러보니까 아주 깨끗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느꼈습니다. 경험한 분들은 아시겠지만, 전날 저녁 장 청소를 하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게다가 가슴까지 설레여서 예약 시간보다 30분이나 먼저 병원을 찾았습니다. 정말 어린 시절 소풍 가는 것처럼 들뜬 분위기였고 설레이는 가슴을 억누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제가 다건연세내과 개원 제1호 환자로 내시경을 받기 때문이죠. “이번에도 용종은 없겠지? 어찌 내 안에 용종이 있을 수 있겠어?” 제가 얼마나 들뜬 기대감으로 가득했는지 이번에도 수면 마취 중에 눈을 뜨고 이렇게 물어봤습니다. “저 용종 있었나요? 용종 없죠?” 그러자 이재훈 원장님(목사님)이 “없습니다. 깨끗합니다.” 그 말을 듣고서야 다시 잠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제가 물어봤죠. “제가 마취 중에 분명히 그런 질문을 했죠? 그리고 용종 없다고 대답하셨죠?” 원장님이 답하기를 확실하게 질문을 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왜 그랬을까요? 저와 함께하신 하나님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용종이 있을 수도 있죠. 그러나 저는 없다고 확신을 했고 그런 기대를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기대가 컸으면 수면 마취 중에 깨어나서 그런 질문을 했겠습니까? 또 하나 제가 다건연세내과 1호 내원 환자로서 가슴이 뛰지 않을 수 없죠. 제가 병원에 가기 전에 이런 생각을 했거든요. 용종이 없고 깨끗한 결과가 나오면 하나님께서 다건연세내과병원이 정말 형통하고 번성하는 걸로 전제를 하고 상상을 할 것입니다. 이 생각이 얼마나 간절하고 기대가 컸으면 수면 마취 중에 눈을 부릅뜨고 그런 질문을 했겠습니까? 그냥 모든 걸 의료진에게 맡겨두고 편히 잠들어도 되는데, 그리고 잠시 후에 결과를 알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에 대한 저의 기대감과 다건연세내과에 대한 간절함이 가득했다는 것이겠지요. 이 다음에도 대장내시경을 받을 때 수면 마취 중에 그런 질문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제 생각과 상상대로 제 안에 용종이 하나도 없었듯이 다건연세내과가 더 형통하고 번성하기를 바라는 것이죠. 앞으로 다건연세내과병원이 더 많은 사람들의 건강을 위해 섬기고 주민 보건에 귀하게 쓰임 받고 형통하는 병원이 되기를 바랍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3-05-07
  • [국독연 칼럼] 강성률 목사의 ‘성령을 소멸치 말라’
    “성령을 소멸치 말며”(살전5:19). 성령은 영원토록 소멸되지 않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령을 소멸치 말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2:4-5). 촛대를 옮기는 것은 예수님께서 촛대에 기름을 부어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기름을 부어주지 않는다면 촛불은 꺼지고 말 것입니다. 기름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성령이 소멸 되는 것은 처음 사랑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소멸치 않으려면 어디서 떨어진 것을 찾아 그것을 회개하고 처음 행위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촛대를 옮깁니다. 성령이 교회에서나 사람에게서 떠나고 맙니다. 성령을 소멸치 않으려면 어떻게 받았는지 어떻게 들었는지 더듬어 찾아 회복해야 합니다(계3:3). 주일성수, 예배, 말씀을 읽고 기도생활, 주님께 드리는 일, 이웃 간의 문제를 다시 점검해봐야 합니다. 첫 사랑 때 어떻게 믿어 섬겼는지 생각하고 행하면 성령의 불이 다시 타오르기 시작합니다. 두 번째는 성령으로 시작된 말씀을 끝까지 지키라는 뜻입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3:3).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복음의 터를 잘 닦아 두었습니다. 그 터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 개종자들 가운데는 믿음으로 구원 받는 말씀에 대하여 깊이 있는 이해가 부족하였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갈라디아를 떠난 후에 율법을 행하고 할례를 받아야 구원받는다고 전하여 이방인 기독교인들까지 혼미케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미혹된 사람들에게 성령으로 시작 된 말씀을 끝까지 지키라고 합니다. 다음은 안병모 목사님의 부인 정귀남 사모님(1997년 소천)의 간증을 요약한 내용입니다. 한 때 하나님의 은혜로 세상을 초월하는 사람같이 살았습니다. 0시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는데 전혀 피곤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는지 몰랐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열심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한번은 잠자는 가운데 주님께서 로마서 “1장 29절” 하시더랍니다. 깜짝 놀라서 그곳을 펴서 읽었습니다. 읽어보니 자신과 상관없는 말씀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세어 보니까 죄가 21가지나 되었습니다. ‘누구더러 하시는 말씀일까?’ ‘왜 나에게 읽어 보라고 하셨을까?’ ‘나는 아니겠지.’ 하며 그날은 그냥 잤습니다. 하지만 그 말씀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나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아.’ ‘나는 얼마나 열심을 내는 사람인데 이 말씀이 나하고 상관되는 말이야?’ 그러나 그 말씀을 떨쳐버릴 수가 없어서 평소에 자주 들렀던 계명산 수녀원에 갔습니다. 그리고 기도드렸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꽝”하고 포탄 소리가 났습니다. 보통 큰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깜짝 놀라서 “어떤 빌어먹을 XX가 여기에 포탄을 터뜨려?”했습니다. 그리고 창문을 열고 보니 차가 오다가 자신이 머무는 기도실 굴뚝과 부딪혀서 그렇게 난 소리였습니다. 이때가 1970년도에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순간 하나님께서 그 자신을 보여주셨습니다. ‘아차, 내가 욕을 하다니, 내 속에 안 믿던 모든 성질이 가득 들어 있구나. 그래서 욕이 저절로 나오는구나. 참 나쁘다. 남은 다쳐서 죽을지 살지 알지 모르는 지경인데 그 소리에 놀랐다고 죽일 것처럼 욕을 해?’ 물론 밖으로 욕을 한 것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욕을 한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거봐라 너 악하지 않느냐?’ 그 후로 매일 매일 악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말씀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고 예수님의 보혈이 아니면 구원받을 수 없는 사람임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깨닫게 해주셨던 것은 처음 자신과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말씀을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소멸시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양심에 합당하고 성경에 합당한 말씀이면 성령의 음성입니다. 그 말씀을 무시해버리면 안 됩니다. 세 번째는 받았던 은사를 그냥 두지 말고 불일 듯 일으키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 일 듯하게 하려고 너로 생각하게 하노라.”(딤후1:6). 받은 은사일지라도 사용하지 않으면 꺼지고 맙니다. 사용할지라도 자신의 영광을 도모한다면 역시 꺼져버리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신앙인들에게 주신 은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성도들을 위하라고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지 아니하고 성도를 위하지 않으면 그것은 마치 금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땅 속에 은사를 파묻어 둔 것과 같습니다. 불 일 듯 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은사를 하나님과 성도 섬기는 일에 사용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처럼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시39:3). 마지막으로 받은 바 말씀을 잘 간직해야 합니다.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 없이 말며”(딤전4:14). 말씀을 간직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을 소멸하면 어떻게 됩니까? 히6:6 이하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타락한 성도가 되고 맙니다. 이런 자는 타락했어도 자신이 타락하였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떤 죄라 할지라도 회개하면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사함을 받지 못할 죄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구가 탄생 된 이래로 가장 값지고 좋은 선물은 진주와 보석 같은 선물이 아닙니다. 온 천하를 다 소유한들 주님을 잃는다면 모든 것을 잃은 것과 같습니다. 죽은 자에게 온 천하는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선물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임마누엘 하나님이십니다.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마28:20).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고맙고 감사함으로 끝까지 섬기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3-05-05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역사는 기억되고 공감되어야 하죠.”
    지난 목요일 오전 저는 서울올림픽 레거시포럼 조직위원회 회의에 참석을 하였습니다. 그날은 원래 총신대 신대원 설교 일정이 있었는데 이 모임에 참석을 하려고 날짜를 바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또 다른 일정이 생겨서 이곳으로 갈까, 저곳으로 갈까 전날까지 고민을 하다가 레거시 모임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서울올림픽 레거시’란 1988년 서울올림픽대회의 정신과 가치를 기억하고 그 정신을 계승하고 알리는 조직인데요. 대한민국 역사에 있어서 88서울올림픽은 대한민국의 내면과 외면, 무형과 유형의 문화를 통째로 바꾼 사건이지만, 하나의 사건으로만 남아 있고 그 정신과 가치가 제대로 계승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88서울올림픽의 정신과 가치를 기억하고 계승하는 조직이 출범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서울올림픽 레거시 포럼’입니다. 이 모임은 장차관 출신이나 체육계 인사들로 구성돼 있는데, 저도 기독교계를 대표해서 위원으로 참석을 하였습니다. 이 회의에서 어떻게 88서울올림픽의 정신과 가치를 계승하고 더 발전시킬 것인가에 대한 의견을 발표하였습니다. 의견 중에 두드러진 내용은 88서울올림픽의 정신과 가치가 계승되려면 청소년들에게 체육 교육을 활성화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학교 교육은 전부 공부 위주가 아닙니까? 체력은 국력이란 말은 절대로 올드한 슬로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컷 공부를 하여 좋은 대학을 갔지만 한참 자라나는 과정에서 체력을 단련시키지 못하면 중년이 되어 건강을 잃고 단명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죠. 그러면 학교 교육 시스템부터 바꿔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 학교나 지역마다 청소년 스포츠센터를 짓는 운동을 하자는 것입니다. 여러 의견들이 있었지만 제가 듣기에는 이 의견이 가장 공감이 되는 부분이었습니다. 그런 얘기를 듣고 나부터도 생활체육을 일상화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건강은 운동과 직결이 되는데 나도 생활체육을 통해서 건강관리를 잘해야 되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발표할 차례가 되자, 저는 마이크를 들고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역사는 기억이 되고 공감이 되며 미래로 계승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88서울올림픽 레거시 포럼의 존재가 국민에게 얼마나 존재감을 불어넣고 공감을 주느냐가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국민들께 88서울올림픽의 정신과 가치를 더 알리고 공감하도록 하기 위해서 한 가지 제안을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몇 부작의 다큐를 만들어 공영방송에 방영을 하는 것입니다. 88서울올림픽의 그 영광의 순간들, 그리고 그 주역들의 그때와 오늘의 얼굴을 비춰주면서 역사적 의미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국민들로 하여금 그때 그 추억의 세계로 돌아가게 하고 우리 국민 모두가 우리 시대에 다시 한번 서울올림픽을 개최하는 열망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너무 좋은 의견이라고 박수소리가 가득하였습니다. 우리 국민 모두가 다 그렇거니와, 저는 특별히 88서울올림픽을 잊을 수 없습니다. 바로 그 해에 저도 우리 새에덴교회를 개척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88서울올림픽의 역사와 우리 교회의 역사는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제 삶의 역사와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정말 88서울올림픽의 역사가 국민들 모두에게 소중한 가치와 의미로 기억이 되고 미래의 새로운 꿈과 도전으로 연결되기를 기도하였습니다. 물방울 하나하나가 모여 강물을 이루고, 별 하나하나가 모여 은하수로 빛나고, 모래 한 알 한 알이 모여 은빛사막을 이루듯 국민들의 마음이 하나로 모아져서 우리 생전에 다시 한번 ‘어게인 서울올림픽’이 개최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역사는 기억이 되고 공감이 되며 미래로 계승시키고 발전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3-04-30
  • [언론회 논평] 엠폭스, 결국 남성 동성애자가 ‘고위험군’이다
    엠폭스는 향후 10년 이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지난 해 5월 발병이 시작된 엠폭스(MPOX-Monkey pox virus, 일명 원숭이 두창 바이러스)가 세계 여러 나라에서는 감소하고 있으나, 아시아권에서는 오히려 늘어나는 추세여서 아시아국들의 주의가 요망된다. 우리나라도 누적 확진자가 20명으로 늘어났다. 지금까지 전 세계 110개국에서 87,039명이 확진되었고, 그중에 120명이 사망하였다. 치명률은 0.13%이지만 이 질병의 영향은 10~30년으로 지속되기에, 그 사이 어떤 변화가 올지 모른다. 세계보건기구(WHO) 발표에 의하면 엠폭스에 걸리는 사람은 남성이 월등히 많다. 확진자 가운데 남성은 96.4%이며, 여성은 3.6%였다. 그런데 남성 가운데 84.1%는 남성 간 성행위를 통하여, 즉 남성 간 동성애를 통하여 전파되었다. 7.8%도 양성애로 인한 감염이었다. 또 여성 가운데 96%는 이성애자였다. 즉 남성 동성애를 통하여 질병이 크게 확산되었고, 그 중에 양성애자들에 의하여 일부 여성들도 감염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남성 가운데 18~44세 사이의 젊은 사람들이 확진자 가운데 79.2%를 차지하여, 역시 활발한 성행위를 하는 젊은이들을 통하여 엠폭스가 크게 전염되고 있음이 밝혀졌다. 이들이 매우 고위험군이 되는 것이다. 결국 엠폭스는 남성 동성애를 통하여 주로 전파되는 질병임이 밝혀졌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질병관리청은 주요 전파 감염경로를 ‘남성 동성애’로 정확히 표기하여, 이 질병의 확산을 무제한으로 막아야 한다. 뿐만이 아니라, 이를 보도하는 언론들도 정확한 보도를 통하여 국민들의 건강을 지키는데 일조해야 한다. 엠폭스는 감염 시 발열(發熱)과 수포성 발진(發疹), 근육통, 무기력증을 동반하며, 심한 경우 죽음을 가져오게 하는 질병이다. 또 전파 속도는 느리지만 그 영향은 오랫동안 지속되는 특징이 있어 남성 간 동성애를 절제하고 막는 노력이 필요하다. 올해 7월에 동성애 단체들이 서울시청 광장에서 동성애 퀴어 행사를 준비한다고 하는데, 서울시청은 시민들의 안전과 건강을 위하여 이런 집단적 동성애자들의 모임을 원천적으로 차단해야 한다. 우리는 3년 전 코비드19를 겪으면서 초기에 너무 안일하게 대처하다 크게 유행을 허락하게 만든 아픈 경험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엠폭스도 제대로 대처하고, 그 발병과 감염경로를 명확히 하지 않으면 피해를 키울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한다. 엠폭스는 단순한 ‘성접촉’이 아니라 ‘동성간 성접촉’이며, ‘남성간 동성애를 통한 성접촉’이 주요 감염 원인임을 사실대로 밝혀야 한다. 이는 차별도 아니고, 폄하도 아니다. 명확한 사실을 통하여 전체 국민들의 보건과 건강을 지키는 것이 정부와 보건 당국의 책무(責務)이다. 또한 이를 보도하는 언론들의 공적 책임과 기능이다.
    • 칼럼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3-04-29
  • [언론회 논평] ‘학폭’은 학교 교육과 교과서와도 관련성이 있다
    최근에 국가기관장 임명을 놓고, 그의 자녀가 과거에 일으킨 ‘학폭’(학교폭력)문제로 우리 사회는 발칵 뒤집혀졌다. 급기야 정부는 12일 ‘학교폭력 근절 종합대책’을 발표했는데, 가해 학생의 학생부 기록은 현재의 2년에서 4년으로 연장하고, 기록삭제는 졸업 전에 피해 학생의 동의하에 가능하게 하며, 이를 대학입시에서도 최대 2점까지(소수점으로 당락이 결정될 때도 있음) 반영한다는 방침이다. 교육부는 이런 학폭 기록을 모든 대학입시에 반영할 것이라고 하며, 교원(敎員)을 양성하는 교대와 사범대에서는 아예 지원을 받지 않고, 다른 분야에서도 심할 경우에는 당락을 좌우할 정도로 엄격하게 하겠다고 한다. 학폭의 문제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기본적으로 학교 교육이 잘못되고 있고, 또 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에도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고 본다. 현재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심성(心性) 교육이나 인성(人性)교육을 제대로 시키고 있는가? 교육은 남을 배려하고 존중하고 함께 살아간다는 인성교육을 시키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런데도 각 지자체의 교육청에서는 ‘학생인권조례’라는 것을 만들어 학생들이 교사나 가르치는 사람에 대한 존경심은 외면하고, 자기들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그러니 곳곳에서 교권(敎權)이 침해를 당해도 해결책이 미진하다. 뿐만이 아니라, 초•중•고교 보건 교과서에서는 마치 아이들에게 ‘성관계’를 조장이라도 하듯, ‘성의 자기 결정권’을 강조하고 있다. 또 생물학적 성(性)보다는 사회•문화적 성(Gender)을 우선하고 있다. 그러면서 Sexuality(성적인 감정, 규범, 태도, 가치관, 행동 방식 등)를 내세우는 교육을 하고 있다. 이렇듯 지나친 성애화(性愛化)를 표현하고, 음화(淫畫)나 다름없는 것들을 가감 없이 교과서에 담아 가르치니, 이는 학생들을 동물로 길들이는 교육이나 마찬가지이다. 폭력은 동물성의 표현이고, 자기 과시의 원시적 방법이다. 또 역사 교과서에는 거짓되고 왜곡된 내용을 담아 버젓이 가르치고 있다. 이를테면,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서 북한의 실상을 심히 두둔하여 왜곡하고 있다. 문재인 정권과 맞물렸던 김정은 정권에 대하여 기술한 것을 보면, 이것이 북한 홍보 교과서가 아닌가 할 정도이다. ‘김정은 정권 이후 북한 경제가 흑자를 보고 있다’(비상교육) ‘김정은 등장 이후 북한은 기업활동이 자율적으로 확대되고 경제활동 통제가 완화되었다’(천재교육) ‘기업의 자율성이 확대되어 수익이 늘어 노동자 임금이 크게 오르게 나타났다’(금성출판사) ‘김정은이 비핵화를 전제로 남북, 북미 정상회담에 적극 나서서 변화를 모색한다’(미래엔)고 기술하고 있다. 학교 교육에서 가장 중요시해야 할 인성의 따뜻한 교육은 빠지고, 아이들에게 성적 자기결정권을 강조하여 프리섹스를 조장하고, 역사 교과서는 현실과 전혀 다른 내용을 가르치고 있는데, 과연 그런 교육을 받는 아이들이 바른 성품으로 자라날 수 있겠는가? 이런 식의 교육으로는 품위 있고, 훌륭한 성품을 갖춘 인격체로 자라가기가 어렵다. 학교폭력의 변화를 보면 진보•좌파 정권과도 무관하지 않다. 2015년에는 연간 19,968건이었으나, 문재인 정권이 들어선 이후인 2017년에는 31,240건으로 급증하였고, 2021년에는 44,444건이었다. 그리고 문 정권이 끝난 2022년에는 62,052건으로 크게 늘어났다. 학교에서 제대로 된 교과서를 가지고 참된 교육을 하지 않는데, 그 아이들이 올바르게 자랄 수가 있겠는가? 자칫하면, 아이들을 ‘동물화’ ‘과격화’ ‘본능화’가 되도록 만들어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학교폭력의 가해자와 혹은 피해자의 증가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학교폭력의 근절이 단순히 입시에 벌점을 주고, 폭력기록을 오랫동안 보관한다며 엄포를 놓는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학교에서의 근본적이고 올바른 교육적인 분위기를 바꾸는 노력을 기울일 때 가능하다고 본다.
    • 칼럼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3-04-29
  • [언론회 논평] 효율성을 높이는 정치 개혁이 되어야 한다
    현재 국회에서는 내년 총선을 앞둔 가운데 정치 개혁과 선거구제 개편을 위하여 국회의원 전원이 참석하는 ‘전원위원회’를 개최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여러 가지 의견들이 나오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즉 선거구제를 현재의 소선거구제에서 중•대선거구제로 바꾸자는 의견, 의원 수를 늘려야 한다는 주장, 반대로 현재보다 의원 수를 줄이자는 의견, 또 의원의 세비(歲費)를 줄이자는 의견도 있다. 그런가 하면 사회 지도층과 시민•사회 단체에서는 국회의원의 특권을 대폭 축소 시키자는 운동에 들어가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현재 국회의원 수는 300명인데, 국회만큼 비효율적이고, 비생산적인 집단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국민을 대표한다는 국회의원 300명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국가발전이나 미래를 위한 진지한 고민은 하고 있는지? 안타깝게도 그런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프랑스에 본부를 둔, 다국적 시장조사 및 컨설팅 기업인 입소스(Ipsos)가 지난해 28개국 성인 남녀 21,515명을 대상으로 주요 ‘직업 신뢰도 조사’에서 나타난 것을 보면, 가장 못 믿을 직업군으로는 정치인으로, 무려 69%를 차지하였다. 직업군 가운데 최저이며, 최하위이다. 최근에 국내에서도 모 여론조사 기관에서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시스템에 대한 신뢰도 조사’에서 정치인을 신뢰한다는 응답은 3.1%로 역시 최하위를 점하였다. 반면에 국회의원에 대한 처우는 OECD 주요국 가운데 한국은 3번째로 대접을 잘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회의원 개인에게 돌아가는 세비는 미국, 일본 다음으로 높았다. 그런데 제대로 일도 안 하면서 세비가 많은 것으로 따지면 세계 최고 수준의 대우를 받고 있다고 보인다. 그런데도 국회에서는 온갖 특권과 자기들 감싸기가 다반사이고, 심지어 일부이기는 하지만, 가짜뉴스를 생산하면서도 반성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 몰염치의 상징이 되고 말았다. 일도 제대로 하지 않고, 당리당략(黨利黨略)에만 능하고, 민생은 제대로 돌보지 않으면서 싸움을 위한 싸움에만 능한 모습에 국민들은 질려버렸다. 우리나라 국회의원 수는 인구비(人口比)로 보면, 미국이나 일본보다 많다. 미국은 인구 62만 명을 1명의 국회의원이 대표한다. 멕시코는 20만 명당 1명, 일본은 17만 7천 명당 1명이다. 반면에 한국은 17만 2천 명을 1명의 국회의원이 대표하는 셈이다. 그러니까 미국, 일본, 멕시코보다 인구 비례로 보면 국회의원 수가 많은 셈이다. 따라서 정치권이 국민의 눈높이에서 정치 개혁을 하려면 획기적으로 국회의원 수를 조절해야 하고, 여러 가지 특권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러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국민들을 만족시킬 수 있겠는가? 첫째는 국회의원의 숫자를 현재보다 확 줄여야 한다. 지금의 300명 의원들도 너무 많다. 어차피 국회는 입법 활동을 하는 곳인데, 지금처럼 의원이 많다고 입법을 제대로 하는 것도 아니다. 다수당은 ‘내로남불’로 ‘입법독재’를 일삼고, 자신들이 만든다는 법률안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파악이 되지 않고, 진지한 고민도 하지 않고 ‘입법’을 남발하여 불필요하게 만들어지는 법률이 너무 많다는 지적들이 있다. 그러면서도 정작 민생에 필요한 법률안은 당쟁(黨爭)에 밀려 국회에서 잠자는 경우들이 너무 많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국회의원 수는 인구 50만 명당 1명 꼴로 선출하여 의원을 100명 정도로 맞추면 좋을 것이다. 현재 국회의원 한 사람에게 1년에 들어가는 비용은 약 7억 원이다. 그러면 국회 한 회기를 마치려면 1조 원 가까이 들어간다. 국민의 세금에서 가장 비효율적인 곳에 쓰이는 셈이다. 두 번째는 세비를 낮춰야 한다. 지금처럼 세계 최고 수준의 예우를 하니, 전혀 국회의원의 자질도 품격도 실력도 안 되는 사람들이 국회에 들어가 온갖 ‘싸움판’을 벌이고 있다. 기본적인 인성과 교양과 인격조차 갖추지 못하고 의회에서 막말과 아무 말이나 하고, 안 되면 고성을 지르고 거짓말까지 버젓이 하는데, 유권자인 국민들을 부끄럽게 만들지 말라. 국회는 면책특권을 내세우고, 자신들만의 권리를 높여 가면서 국민들이 다 보고 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유권자를 기만하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세 번째는 특권을 대폭 줄여야 한다. 국회의원만 되면 200여 가지의 특권을 누린다는데, 일반 국민들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의원의 예우에 관한 특혜가 지나치게 많다 보니 국민을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특혜들을 대폭 줄이고, 거의 봉사직으로 일하게 해야 한다. 네 번째는 지역주민들이 직접 뽑은 선출직만 남기고, 비례대표, 위성 정당으로 억지로 의원 수를 늘리는 행태는 근절시켜야 한다. 비례대표를 둔 목적은 과거에 여당 의원 수를 늘려 집권을 장기화하려는 의도가 강했다고 본다. 또 전문가 집단을 세워서 국가발전을 위한 시도였다고 해도, 비례대표 의원들이 과연 그런 역할을 충실하게 했는가? 그러므로 비례대표제도는 없애야 한다. 다섯 번째는 국민들이 공감할 수 있는 정치 개혁이 되어야 한다. 말들은 개혁인데, 자신들의 특권과 비효율적 정치 집단의 숫자를 늘리기 위한 것이 되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본다. 현재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정치 개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시에는 국민들의 저항을 받게 될 것이다. 어차피 정치인들의 역할은 국민을 위한 것이고, 민생을 위한 것이고, 국가의 발전을 위한 것이고, 국민을 대리하는 자리가 아닌가? 그렇다면 거기에 충실한 목적을 이루면 되기 때문에, 자기 뼈를 깎는 개혁과 올바른 방향을 정해야 한다고 본다. 지금까지는 정치인들이 여러 가지 혜택과 권리를 누려왔고, 국민들은 눈살을 찌푸려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들만의 리그’를 벌여왔는데, 이제는 진정으로 국민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정치 개혁을 하여 국민들의 마음을 기쁘게 해 보라. 우리 사회에서 가장 존경받고 신뢰받는 정치를 하고, 가장 생산적이고 효율적인 입법부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청사(靑史)에 길이 남을 정치 개혁의 신호탄을 쏘고, 국민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으며, 한국 정치사에 획기적인 업적을 쌓는 주인공들이 되어 보시기를 진정으로 바란다.
    • 칼럼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3-04-29
  • [언론회 논평] 과유불급(過猶不及)으로 종교 편향 일삼다
    최근에 대구시의 시립예술단이 공연을 하려다, 음악적으로 유명한 베토벤의 교향곡 9번 가운데 ‘신’(神)이라는 말이 들어갔다 하여, 이를 ‘종교 편향’으로 규정해 공연을 취소했다는 말을 들었다. 참으로 실소(失笑)를 금할 수 없다. 아니, 느닷없는 종교 편향으로 세계적인 음악과 예술의 세계를 단칼에 예리하게 잘라내는, 한국적 종교 편향이 얼마나 이상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단적(端的)으로 보여 주는 대목이다. 이 괴상한 ‘종교편향’이라는 것은 이명박 정권 시에 불교계의 주장으로 급작스럽게 문화체육관광부 안에 ‘종교편향신고센터’를 만들면서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그 효력은 마치 모든 헌법까지 능가하는 것으로, 불교계가 타종교를 빌미로 정부와 지자체에 압력을 넣는 견고한 진지(陣地)가 되고 말았다. 현재 프랑스에서는 고려 시대의 유물이 자랑스럽게 알려지고 있다. 이는 부처와 고승의 대화, 편지 등에서 내용을 뽑아 그 당시 승려가 편찬한 직지심체요절(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 전시되면서 세계인의 눈길을 끌고 있다. 이 책이 유명한 것은 1377년 금속활자로 간행한 것으로, 유럽에서 구텐베르크 성서를 인쇄한 것보다 78년을 앞선다는 기록 때문이다. 이것은 불교 유물인데, 만약에 한국식으로 ‘종교 편향’으로 규정한다면 절대로 공적 공간에서 전시될 수 없는 일이 될 것이다. 이 유물은 현재는 프랑스의 소유라고 하는데, 우리 언론들은 이 사실을 대서특필하고 있다. 그런데 이를 ‘종교 편향’에 대입한다면 불교계의 주장을 심각하게 위배하는 것이 되니까 말이다. 베토벤이 작곡한 ‘교향곡 9번’은 1824년에 최종 완성된 작품이다. 음악과 예술 분야에서는 고전과 같은 것이고, 세계인의 사랑을 듬뿍 받는 명곡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종교 편향이라며, 시민들이 이 음악을 듣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 소식을 접하는 세계인들은 한국을 어떻게 볼 것인가?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말이 있다. 정도가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여, 이상한 방향으로 가게 된다. 서양의 음악을 비롯하여 예술은 기독교를 배경으로 하는 것이 많다. 거기에 종교 편향의 잣대를 들이대면, 대부분 음악은 ‘금지곡’이 되거나 ‘금지선’을 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귀를 막고 눈을 가리고 정저와(井底蛙-우물안 개구리)로 살아야 한다. ‘종교 편향’이란 것이 지나간 정권에서 특정 종교의 아우성에 어쩔 수 없이 정치적 배려를 해 준 것인데, 지금도 그 위세를 부리고 있다면 이는 누구의 책임이며, 누구의 손해인가? 이제는 우리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에서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아야 한다. 우리는 이런 전근대적인 사고와 후진성을 뛰어넘고, 직지심체요절을 금속활자로 만들었던 조상들의 앞선 생각으로 세계를 리드해야 한다. 언제까지 종교 편향이라는 해괴하고 해묵은 주장으로 국민들이 누려야 할 아름다운 예술에 대한 접근을 막으며, 지구촌에는 희극(戲劇)이나 연출하는 촌극(寸劇)을 벌일 것인가? ‘종교 편향’이란 말을 사용한 지도 벌써 15년이 지났다. 정권도 여러 차례 바뀌었다. 이제는 좀 시대에 맞는 옷으로 바꿔 입어야 되지 않겠는가? 한국이 불교의 나라도 아니고, 엄연히 존재하는 헌법의 가치조차 무시하는 ‘종교 편향’이란 하위 규칙을 만들어, 세계적인 예술을 도외시하고 국민들의 듣고 누릴 정당한 ‘문화 자유의 권리’마저도 빼앗으려는 행위를 언제까지 계속하려는가?
    • 칼럼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3-04-29
  • [국독연 설교] 장금오 목사의 ‘주인에게 맡기는 삶이란’(삼상 23:1-5)
    1 사람들이 다윗에게 전하여 이르되 보소서 블레셋 사람이 그일라를 쳐서 그 타작 마당을 탈취 하더이다 하니 2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들을 치리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이르시되 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 하시니 3 다윗의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렵거든 하물며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치는 일이리이까 한지라 4 다윗이 여호와께 다시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 5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그들을 크게 쳐서 죽이고 그들의 가축을 끌어 오니라 다윗이 이와 같이 그일라 주민을 구원하니라 우리가 만약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으로 전문 관광안내자 없이 자유여행을 가게 된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뭘까요?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먼저 여행자 안내소를 찾아 가든지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여행 할 지역에 대해서 알아보고 물어 보는 것이 우선순위 일 겁니다. 그것이 바로 가장 안전하고, 쉽고, 빠르게 여행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죠. 그렇지 않고 혼자의 생각으로 길을 찾아서 여행을 다닌다고 생각하면 동행자들이 보기에 얼마나 답답하고 불안할까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지역에 오랫동안 살아서 그 지역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이든지, 전문적인 관광 가이드의 안내를 받는 것이라 할 수가 있겠습니다. 전문가의 안내를 받게 될 때, 우리는 안전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시간과 힘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면서 여행을 즐길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인생에서 우리가 길을 찾아야 할 때 가장 안전하고, 쉽고, 빠른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오늘의 말씀에 등장하고 있는 다윗과 같이 주님께 여쭤보는 것입니다. 온 우주에서 가장 뛰어난 전문가이시며, 완벽한 인생의 가이드가 되시는 하나님께 조목조목 여쭤보면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 동안 다윗은 양떼들을 지키면서 훈련된 목동으로 여러 가지 위험한 환경 속에서 자기 자신의 지혜와 방법으로 그 모든 것을 극복해 보려고 노력하였지만 때로는 지혜롭게 양떼들을 공격하는 맹수들로부터 양떼들을 보호하기도 했고 양떼들을 잃을 때도 있었을 겁니다. 결국 사울에게 쫓기면서도 반복되는 인생의 절망에 처하게 되었던 다윗의 삶은 비로소 아둘람 굴에서 완전히 새로운 걸음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무엘기상 23장의 말씀을 통해서, 다윗이 그일라 처서 타작마당을 탈취한 블레셋 사람을 보고 의분함을 금치 못하고 다윗의 주인 되신 주님께 블레셋 사람들을 치리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즉시 응답을 하시며 블레셋사람들을 치고 그일라를 구하라고 하셨을 때 즉시 하나님께 순종하여 블레셋 사람들을 다위에 손에 붙이시겠다는 응답을 듣게 되는 다윗의 모습을 보며 어떤 도전을 받으셨나요? 하나님께 합한 자로서 여쭙고 가는 길이 얼마다 복된 길인지 그때 그때 하나님께 묻고 웅답받는 방법을 살펴볼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의 삶이 어떻게 변하게 되었는지 살펴볼 것입니다. 외적인 환경을 볼 때, 다윗의 삶에서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습니다. 사울 왕은 여전히 그의 생명을 찾아다녔고, 다윗은 여전히 죽음과 한 걸음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다윗처럼 하나님께 묻고 기도하는 방법 1) 다윗은 모든 일의 시작과 결정하기 전에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왜 이런 기도를 해야 하는가? 블레셋사람들을 치는 것이 옳은 일인가? 하나님의 뜻인가? 나의 명예를 위한 나의 욕심 때문인지? 선택하기 전에 만일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 아닌 일을 했다면 하나님의 뜻을 끝까지 물어야 합니다. 매사에 주님께서 응답하시기 전에는 하나님의 뜻을 확실히 하고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자신의 진로, 취업, 직장을 구하는 것까지 섬세하게 묻고 응답을 받을 때는 어려움이나 힘든 일이 닥친다 해도 능히 이겨낼 수 있는 믿음과 능력을 공급받게 되고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책임지시고 인도해 주신다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2)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3) 결정권이나 계획까지 모두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 어떻게 할까요? 그리하면 모든 환경과 조성을 사람을 통해서 응답하십니다. 혹시라도 내 뜻을 하나님께 반영하였는가 의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4) 모든 위기 속에서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구할 때 말씀으로 응답하십니다. 다윗은 모든 환경 속에서 오직 주님께 마음의 초점을 고정할 때 다윗에게 임하는 응답의 복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처럼 삶의 주인되신 하나님께 모든 일을 묻고 맡기고 나아가는 승리의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한편, 장금오 목사는 아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을 전공하고 최근 국제독립교회연합회(총회장 정인찬 목사, 설립자 박조준 목사, 사무총장 임우성 목사)의 제19회 목사안수식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높은뜻숭의교회, 높은뜻광성교회 등에서 스리랑카 및 영어권 이주민 사역팀장을 역임했고, 현재는 양주진리교회(담임 채하경 목사)에서 캄보디아 이주민 전문 사역자로 시무하고 있다.
    • 칼럼
    • WAIC 칼럼
    2023-04-27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