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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이형기 박사(1938-)
    강원도 영월 출생... 서울대 종교학과 거쳐 독일과 미국서 공부 이형기(李亨基)는 1938년 4월 17일, 강원도 영월에서 태어나 성장하였다. 그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종교학과에서 한국 종교학의 석학인 신사훈 박사 밑에서 어학과 종교학의 이론에 대한 기초훈련을 쌓았고, 장로회신학대학원에서 교역학 석사과정(M.Div)을 마치고, 독일 뮌스터대학 신학부를 거쳐 미국 하바드대학 신학부에서 신학석사(Th.M), 드류대학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Ph.D)를 마쳤다. 그는 미국 뉴욕 엠허스트 한인장로교회 담임목사(1978-1980)로 사역하다가 1980년 모교 장로회신학대학의 부름을 받고 교수로서 신학대학원장을 역임하였고, 대외적으로는 한국교회사학회장(1997-1998), 공적신학과교회연구소장(2008-2016)을 비롯?WCC 산하 여러 분과에 소속위원으로도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대표적인 저술로는 <세계교회사>(1994), <에큐메니칼운동사>(1994), <역사 속의 교회>(1995), <기독교사상사>(공저 2002) 등이 있다. 그는 '나의 신학 수업의 여정'이란 글에서 "인간은 개인적으로 환원될 수 없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 산다. 나는 한 아내의 남편과 두 자녀의 아비로서 가정공동체 안에서 살았고, 통합측 장로교단 안에서 목사로서 활동하였으며, 무엇보다도 장신신학공동체 안에서 23년 간(1980-2014) 신학을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헌신할 수 있었다. 지나고 보면 이와 같은 공동체 안에서의 삶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뜻?가운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고 달려온 시간이었다.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린다. 2005년에 고관절 수술을 하였고, 2013년에 경추수술을 하였으나, 과학기술적 지식과 인문과학적 지혜 그리고 모든 생명체들의 원천이기도 한 생명의 샘, 곧 하나님의 영께서 모든 제2차적 원인들을 통하여 부족한 사람을 큰 병으로부터 치유하여 주심에 아무리 크게 감사해도 부족하다"(에큐메니칼운동과 에큐메니즘, 2017 p.19)라고 진술한 바 있다. 1980년 이후 장신대서 은퇴할 때까지 교수 생활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그에게 사사한 제자들이 2019년 9월에 그의 팔순을 기리는 기념논문집 두 권을 만들어 스승에게 헌납하였다. 그 논문집 제2권 <공적신학과 교회갱신>에서 출판위원장 임희국은 출간에 즈음하여란 인사말에서 "이형기 선생님은 1980년 모교인 장로회신학대학교에 교회사 교수로 부임하였고, 이때부터 4반세기 동안 교단에서 후학들을 양성하셨습니다. 돌이켜보면 4반세기 선생님의 신학여정에는 그 이동의 폭이 넓었습니다. 부임 후 약 5년 동안에는 종교개혁자 루터를 비롯하여 그 시대의 서양교회사 및 신학사상을 가르치셨고, 그 다음 약 5년 동안에는 본 훼퍼와 칼 바르트를 중심으로 한 20세기 개혁교회 신학사상을 연구하고 가르치는데 주력하였고, 1990년대에는 세계교회 에큐메니칼 운동에 나타난 다양한?신학사상을 연구하셨고, 2001년부터 은퇴하시던 때까지는 몰트만의 신학과 포스트모던이즘에 대응하는 신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선생님의 제자들은 재학한 연도에 따라서 각자의 성향과 지향점에 맞추어 나름의 형형색색 신학사상을 배웠습니다"(공적신학과 교회갱신, 2017 p.7-8). 이형기 박사는 장신대학원 교수 생활을 은퇴한 후의 자신의 신학 활동 편력을 '그동안의 신학 활동을 회고하면서'란 글에서 자신의 신학 여정을 정리하고 있다. "나는 1980-2004년 동안 장신공동체 안에서 나 자신을 키우고 후배들을 키우는 일에 종사하였다. 그리고 은퇴하면서 '나의 신학 수업의 페러다임 이동'(2004)이란 책을 출판하였다. 이 책의 핵심은 제1시기(1938-1968), 제2시기(1980-1985), 제3시기(1986-1990), 제4시기(1991-2000), 제5시기(2001-2016)로 신학연구 페러다임 변화를 정리하였다. 은퇴 후(2005-2012) 바른교회 아카데미 위원장으로? 한국교회 직제 개선을 위한 방안 연구(2011), 한국교회를 향한 경제 선언문(2012)을 공포하였고, 이에 덧붙여 2004년부터 2006년까지는 소그룹 연구모임을 결성해 삼위일체론에 대하여 집중 연구하였다. 제5시기에 해당하는 기간에는 불트만 신학과 포스트모던이즘에 대응하는 신학으로?몰트만의 신학과 내러티브 신학에 대한 내용이었다. 몰트만 신학에서는 역사 속의 종말론은 전적으로 몰트만의 종말론으로부터 동기부여를 받고 기독교 신학 역사 속에 나타난 종말론을 평가해 본 것이었다. <하나님 나라와 교회> <하나님 나라와 공적신학> 그리고 <교회론의 페러다임 전환>에 대해서는 전통적인 교회론으로부터 몰트만의 교회론으로, 역시 몰트만의 종말론적 신학에 입각한 글들이었다. 한 마디로 몰트만의 저서들의 신학에?대한 요약 정리였다. 내러티브 신학은 이레네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루터와 칼빈 그리고 칼 바르트와 한스프라이로 이어지는 내러티브 신학을 소개하였고, <포스트모던 시대의 성경읽기>는 포스트모던이즘의 '거대 담론'에 대한 불신으로 성서의 거대 담론과 담론들이 위협을 받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대한 신학적 대안이었다. 그리고 성서의 내러티브 신학과 교회의 공적책임에서는 한스프라이, 칼 바르트, 몰트만, 크리스라이트, 보캠과 하트, 그리고 스탠리 하우어와스의 내러티브 신학자들을 소개하고, 본문과 본문의 관계성을 강조하는 것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이와 같은 성경 이해가 공적신학 차원이 취약함을 밝히고, 생명공동체인 하나님의 나라와 이스라엘 및 교회에서 그와 같은 취약성을 크게 보완하였다. 그리고 기독교 관점에서 모던이즘 시기의 역사학자들의 역사관들과 포스트모던 시기의 포스트모던 사관들을 비판적으로 접근하면서 대안적 사관을 제시하였다. 에큐메니칼 신학 분야에서는 운동의 페러다임 전환은 그동안 WCC 중심의 에큐메니칼 운동과 에큐메니즘의 역사가 10 차례의 총회를 겪으면서 어떠한 신학적인 페러다임을 보여 왔는가를 논구하였고, <세계교회협의회신학>(2013)은 1990년대부터 2013년에 이르는 동안에 강연이나 세미나에서 발표한 글들을 모음으로서 다양한 에큐메니칼 신학적 주제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번역서인 <에큐메니칼 운동>은 방대한 분량의 책으로서 그동안 축적된 에큐메니칼 운동과 에큐메니즘에 대한 매우 귀하고 꼭 필요한 자료들을 싣고 있다"(에큐메니칼 운동과 에큐메니즘, 2017 pp. 20-23). 포스트모던이즘에 대한 신학적 대안 모색 임희국 박사 은퇴 기념논문집(2020)에 '장신대 역사신학의 발자취'란 논문을 쓴 서원모 박사는 이형기의 역사신학을 '신학의 전환 신정통주의 신학'이란 항목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형기는 자신의 신학사상의 변천을 서술하면서 1986년부터 1990년까지를 제3시기라 불렀다. 제1시기가 유년기로부터 장신대 신대원과 대학원 졸업까지의 시기(1938-1968)라면, 제2시기는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 신학을 연구한 시기로 1980년부터 1985년에 해당한다. 1980년에 이형기가 <에라스무스와 루터에 있어서 인간론 비교>라는 논문으로 드류대학(Derew University)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마친 시기로, 가을학기부터 장신대 강의를 시작했다. 하바드(Havard University) 신학부에서 공부할 때에도(1972-1974) 그는 종교개혁 분야를 공부하였으니 종교개혁 신학에 대한 관심은 뿌리가 깊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종교개혁 신학에 대한 관심은 <종교개혁 신학사상: 루터와 칼빈을 중심하여>(1984)와 <기독교 강요 요약>(1985)의 출판으로 결실을 맺었다. 그런데 이형기는 1986년부터 자신의 신학이 "신종교개혁신학" 혹은 "신정통주의신학"으로 변화했다고 말한다. 그의 서술에 따르면 미국에서 귀국하여 종교개혁 신학과 세계교회사만을 강의하다보니 너무 신학의 시야가 비좁은 것으로 여겨졌고, 이종성 박사 등이 신정통주의를 소개하는 분위기도 함께 작용하여 당시에는 종교개혁 신학보다 신정통주의 신학서들이 더 큰 감명을 주었는데, 그 이유는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오늘을 사는 교회에게 말하는 것으로 생생하게 들렸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1986년에 장로회신학대학 신학성명의 초안을 작성하였는데, 이 초안에서부터 신종교개혁 신학이 암시되었고, 대화의 신학과 에큐메니칼 신학에 대해 눈을 띄게 되었다. 1985년 신학성명을 기초한 이형기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성명 안에는 신종교개혁 신학, 대화의 신학, 에큐메니칼 신학 등 신학의 새로운 방향이 표현되었다. 이러한 전환은 오늘의 사람들과 교회에게 말하는 신학을 찾으려는 노력에서 이루어졌고, 그 구체적인 내용은 종교개혁신학에서 신정통주의 신학으로 넘어가는 확실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칼 바르트의 신학을 개관한 서적들과 바르트의 신학입문서를 번역했고, 본 훼퍼의 교회와 사상을 연구했다. 특히 그는 바르트의 신학입문서를 번역하면서 바르트의 성경해석에 대한 자신의 논문을 첨부했는데, 이것이 그의 신학 제2기의 말씀 이해에서 바르트의 말씀 이해로 페러다임이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교회사연구, 이제는 한국과 아시아로, 임희국 교수 은퇴 기념도서, 2020 pp.83-85). 이형기의 제4기(1991-2000)에 해당하는 시기는 에큐메니칼 운동에 나타난 신학으로 페러다임이 이동하는 시기를 말한다. 그는 이미 1990년에 세계교회협의회(WCC),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 세계개혁교회연맹(WARC),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을 섭렵하여 바르트 신학에서 에큐메니칼 신학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같은 책, p.86). 이형기의 제5기(200년 이후)에 해당하는 시기에는 소위 포스트모던 시대의 신학과 몰트만 신학과 내러티브 신학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시기의 이형기는 포스트모던이즘에 대한 대응을 모색하면서 에큐메니칼 신학과 몰트만의 종말론적 복음., 내러티브 신학을 종합하였다. 포스트모던이즘에 대한 그의 관심은 이 시대의 문화적이고 사상적인 흐름을 읽고자 하는 노력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모던이즘에 대한 포스트모던이즘의 비판은 받아들이면서도 극단적인 해체론은 경계하면서 포스트모던 시대에 적합한 기독교 신학을 탐구했다. 그는 바르트, 몰트만, 에큐메니칼 신학이 스탠리 그랜츠가 포스트모던 신학의 요건으로 제시한 개인주의, 합리주의, 이원론, 주지주의를 넘어서는 복음을 충족시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포스트모던이즘에 대한 신학적 대안으로 내러티브(narative) 신학에 주목하였다. 이 시기에 이형기 박사는 몰트만의 희망신학에 매료되어 있었고, 그는 몰트만 신학을 통해 복음 뿐만 아니라 삼위일체와 하나님 나라 모두가 그것보다 큰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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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정규 목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2023-03-27
  • [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절차는 위법인데 결과물은 합헌이라?’
    필자가 대학에서 일할 때, 발생한 각종 소송에 대응한 일이 여러번 있었다. 그 때마다 우리 일을 맡은 변호사가 필자에게 늘 했던 말이 있다. “본안을 다투기보다 절차상의 하자를 다투는 것이 최선입니다. 절차상의 하자가 발생하면 법원은 본안 자체를 다투기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그 만큼 법원과 법관은 민주적 절차와 과정을 중히 여기고 이것이 무시된 법안 자체는 다루지 않는다는 설명이었다. 그런데 최근 헌법재판소가 일명 ‘검수완박 법안’에 대해 법안 자체는 유효하다는 결정을 내렸다. 근 일년 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안건조정위원회를 그야말로 기기묘묘한 방법으로 통과했다. 안건조정위란 다수 정당이 수적 우세를 내세워 자당에 유리한 법안을 통과하지 못하도록 하는 입법 장치이다. 이에 더불어민주당은 6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위원회의 과반수를 획득하기 위해 2021년 민주당을 탈당한 무소속 양향자 의원을 2022년 4월 법사위로 사·보임시켰으나 양 의원이 검수완박 법안에 반대하자 민형배 의원을 탈당시켜 안건조정위원으로 만들어 결국 해당 법안 중재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대하여 헌법재판소는 국민의힘 의원들의 심의·표결권을 침해한 것이라고 절차상의 하자를 인정하면서도 법안 자체는 유효하다는 이해불가능한 판단을 내놓았다. 입법 절차는 위헌이지만 위법한 절차에서 나온 법안을 인정함으로 정상적인 법감정을 가진 국민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문제는 검수완박 법안에 가표를 던진 4인의 재판관인 유남석·김기영·문형배 재판관은 우리법연구회 소속, 이석태 재판관은 민변과 참여연대 출신으로 모두 당시 여당이 지명한 재판관들이다. 이런 구성으로 볼 때 예정된 결과일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헌재의 결정이 정치적 결정인 것에 대한 아쉬움을 던져 버릴 수 없다. 헌법재판소는 이 땅의 사법적 권위의 최종점에 서 있어야 한다. 그 권위는 의심받아서는 안되며, 어떤 정치적 성향이나 이익에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아무리 정치적 성향이 분명하다 할지라도 최소한 법정신과 절차에 대한 기준은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 이러한 법원의 최종적 권위마저도 눈감고 정치적 판결을 내린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대하여 공분하는 것은 비단 필자만의 시각이 아닐 것이다. 민주사회의 근간은 법이고, 이 법은 언제나 공정해야 하고, 그 정신과 의미에 철두철미해야 하며, 이것은 상급심으로 갈수록 더욱 치열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헌재의 위치는 누가 뭐라고 해도 그 중요성을 시비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하므로 그의 결정도 도전 받아서는 안된다. 그런데 지금 헌재는 의심과 비난을 넘어 조롱을 받고 있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사법적 권위가 대단한 도전에 직면에 있으며, 이를 해결하지 못하면 우리 사회가 궁극적으로 위기에 처할 수 있다는 불행한 신호이다. 교회와 목회자들은 이 일에 주목하고 관심을 놓지 말아야 한다. 이는 한갓 일부 정치인이나 정당의 문제가 아니다. 국운과 관계된 것이고 앞으로 사법적 판단을 받을 수 있는 사안들의 이정표가 될 수 있다. 법치 국가에서 법을 수호해야 할 법원이 스스로 법과 절차를 무시하고 경시한다면, 더 이상 법치국가일 수가 없다. 법원이 이러하다면 과연 이를 바로 잡을 책무가 교회에 있을 수도 있다. 법의 깊은 뿌리에는 인간의 양심과 사회적 윤리성이 자리잡고 있다. 이것을 깨우고 역동적으로 활성화시켜 법으로 법이 되게 하는 법윤리의 각성을 촉구할 수 있는 것은 종교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민주사회의 양심적 마지노선으로서, 국민적 공감을 얻지 못하는 판결을 계속하는 사법부에 대한 경종을 울리고, 우리 스스로도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 자정 능력을 고양하여 반민주적 적폐들을 응징할 수 있는 역량을 모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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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성택시사프리즘
    2023-03-25
  • [언론회 논평] 공영방송의 개혁과 존폐를 생각한다
    3월 16일 윤석열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한•일 관계의 과거사를 딛고, 발전을 통한 양국과의 긴밀한 협조와 동반자 관계 회복을 위한 자리였다. 그런데 공영방송인 KBS가 이와 관련된 뉴스와 관계 장관을 대담하는 모습이 사실과 다르고, 편향된 모습을 보여 국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였다. 지난 3월 16일 KBS는 뉴스 특보를 통해 윤 대통령이 일장기(日章旗)에 경례했다고 하였다. 이는 순방 첫 행사로 일본 총리 관저에서 의장대 사열을 하는 가운데, 윤 대통령이 양국 국기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상황에서 방송 앵커가 태극기는 보지 못한, 보도의 큰 실수가 나온 것이다. 이 뉴스를 전하는 앵커는 ‘일장기를 향해서 윤 대통령이 경례하는 모습을 보았다. 의장대가 우리 국기는 들지 않는 것 같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단상에는 태극기와 일본기가 분명히 나란히 있었다. 잠시지만, 윤 대통령을 이상한(?) 국가 원수로 만든 것이다. 이를 받아서 전직 청와대 의전 비서관과 또 이를 다시 받아서 야당 정치인들은 가십거리로 삼았다. 이런 블랙코미디가 어디 있겠는가? KBS가 이 문제에 대하여 사과를 하기는 했지만, 상식 이하의 가짜 뉴스가 되도록 진행한 것은 국민들을 매우 실망시키기에 충분하였다. 또 18일에는 대통령의 외교 순방을 평가하기 위하여 외교부장관을 KBS 뉴스에 출연시켜 대담을 했는데, 이 방송을 진행하는 앵커는 협상을 잘못했다는 식으로 몰아붙였다. 제목도 ‘한•일 정상 회담 후폭풍’이란 것으로, 아예 외교성과를 부정적으로 단정하고 다룬 것이다. 이에 대하여 KBS의 전직 앵커는 그 문제점을 지적했는데, 방송을 진행한 앵커는 흥분한 사냥개처럼 공격적으로 몰아붙였다고 평가하였다. 또 장관의 답변도 중간에 끊어버리고, 마치 국회에서 야당 의원들이 국무위원을 몰아세우는 듯한 태도였다고 지적한다. 거기에다 방송을 진행하는 앵커가 ‘정권이 민주당으로 넘어가면’이란 전제를 달아, 마치 야당을 대변하는듯한 태도를 보였다. 이는 공영방송의 앵커가 전 국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하는 방송으로서는 전혀 어울리지도 않고 자격도 없는 모습이었다. 오늘날 국민의 방송이며, 공영방송을 망치는 것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KBS 내부의 구성원들에 의해서 이뤄지고 있다고 보인다. 공영방송이 공정하지 못하고, 심지어 뉴스마저 정치적으로 심하게 기울어져 있는데도, 자신들이 엄청난 권력을 가진 것으로 착각하여 국민들과 시청자들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방송사고도, 편파방송도 나오게 되는 것이다. KBS는 거듭나야 한다. 민노총이 움직이는 ‘노영방송’(勞營放送)이 아니라, 국민들에게 신뢰받고 사람받는 방송이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수신료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신료를 스스로 낮추면서도 일하지 않는 인원을 감축하고, 불편부당(不偏不黨)한 방송이 되도록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런 자구책을 통하여 공정한 방송으로, 정직한 방송으로, 정치와 정권에 휘둘리지 않는 공공의 책무를 충실하게 감당하는 국가기관이 될 수 있다. KBS는 국가와 국민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희망을 주는 방송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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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3-03-20
  • [언론회 논평] 통일 교육은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최근 윤석열 정부가 밝힌 통일 교육 지침서가 그동안 전 정권에서 물타기였던 것을 다시 복원시키고, 우리의 정체성과 북한 정권에 대한 정확한 시각을 가지고 정리된 것으로 나타나 다행이다. 통일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에 대한 정체성이다. 우리에 대한 정체성이 모호하면 통일의 방향이 잘못될 수 있다. 그래서 교육을 통해 확실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에서는 ‘남쪽은 대한민국 정부를, 북한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고 했었다. 그러나 유엔이 인정한 정부는 대한민국만이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임이 틀림없다. 두 번째는 북한에 대한 규정이다. 전 정부에서는 김정은 정권을 ‘노동당을 지도하는 최고 영도자의 1인 지배 체제’라는 식으로 추켜세웠으나, 이번 통일 교육 지침서에서는 ‘통치자 우상화를 통한 무조건 충성하는 수령 중심의 1인 독재 체제’로 똑바로 규정하였다. 세계에서 북한 정권처럼 장기적으로 1인 독재 체제로 가는 나라는 없다. 이것을 명확히 하는 것이 맞는다. 세 번째는 북한과의 관계 설정이다. 북한 정권이 핵을 포기하지 않고 군사적 위협을 가해올 경우는 경계의 대상이고, 비핵화를 포기하고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적극 협력해 올 경우 평화통일을 만들어 가는 협력의 대상이 되는 것으로 설정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네 번째는 핵을 통하여 전 세계를 위협하므로 세계가 우려하는 북한에 대한 시각이다. ‘북한은 핵 개발을 통해 한반도 및 세계 평화를 위협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김정은 정권 들어서서 더욱 핵 개발과 이를 위협용으로 사용하는 것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통일 교육은 제대로 된 지침서를 통하여 교육이 이뤄져야 하며, 이런 정확한 현실 인식 속에서 바른 교육이 이뤄짐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또 이런 정확한 상황 인식 속에서 주변국들에게 협력을 얻어내고 지지를 받을 수 있다. 통일교육은 반드시 필요하며, 바르게 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이번 정부에서 나온 통일교육에 대한 지침서는 정로(正路)로 가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지금까지 왜곡되고 북한 정권에 대한 부정적인 것을 은폐되고 과대 포장했던 부분들을 확실히 뛰어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우리 한반도의 통일은 아주 느리게 올 수도 있고, 생각 외로 빨리 올 수도 있다. 그런데 바른 통일교육이 이뤄졌느냐, 아니면 잘못된 평화통일 환상 속에 있다가 맞이하느냐에 따라 통일된 현실 속에서 혼란의 정도가 크게 달라질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바른 교육은 바른 가치와 목적을 만들어 가고, 그것이 현실이 되었을 때 흔들리지 않고 엉뚱한 방향으로 가지 않게 되는 예방이 된다. 우리 한반도에서 통일의 궁극적 목적은 평화와 자유 민주주의가 전제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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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3-03-20
  • [언론회 논평] 우리는 왜 참된 정치 지도자를 갖지 못했나?
    정치는 사람에 의하여 이뤄진다. 모든 국민들이 정치에 직접 참여할 수 없기 때문에 지도자, 즉 국민의 대표자를 투표로 선출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국민들의 삶의 질을 높여주고, 국가의 미래와 발전을 위하여 국민 주권을 위임한다. 따라서 정치가들은 국민들이 믿고 맡겨준 정치적 소임을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려면 기본적으로 국가에 대한 애국심이 있어야 하고, 국민들을 사랑하는 애민정신이 있어야 한다. 뿐만이 아니라 국민들보다 높은 수준의 도덕성과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자신들이 잘못을 하거나 도의적으로라도 책임을 져야 할 사안이 있을 경우는 지체 없이 실행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런데 요즘의 한국 정치 상황을 보면, 오히려 국민들의 인성과 가치관, 도덕적 수준보다도 훨씬 못 미치는 몰염치와 마비된 양심과 비뚤어진 정치야욕을 가지고 있어, 과연 그들에게 국가의 운영을 맡기고, 국민을 대표할 자격이 있는지를 의심하게 하는 지도자가 있다. 현 거대 야당의 대표는 공직에 나오기 전부터 화려한 전과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고, 공직에 나오면서 추가된 범죄까지 ‘전과 4범’이었다. 현재 진보 계통의 정치 지도자들 가운데 그 흔하게 가지고 있는 주사파 학생운동 경력도 아니었고, 더군다나 독재 정권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한 경력도 아니다. 고작해야 공무원자격 사칭과 도로교통법 위반, 특수공무집행 방해, 그리고 공직선거법 위반이다. 그런데 가관인 것은 지난해 국회의원 보궐 선거에서 ‘전과자라고 저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세상을 위해서 뭘 했는지 생각해 보라’고 했단다. 전과자가 아니면 세상을 위해 일할 수 없다는 말인가? 그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일부 국민들도 전과 4범도 대통령 후보에 나오는데, 일반인들이 죄를 짓는 것을 용납해도 되지 않느냐는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는 현재 여러 가지 범죄 의혹으로 재판 중에 있다. 특히 성남시 대장동 개발은 단군이래 최대 치적이라고 했다가 문제가 되자, 슬그머니 물러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런 저런 범죄 의혹으로 그에 대하여 체포를 해서 정확히 조사를 해야 하는데, 난항에 부딪쳤다. 그가 현직 국회의원이며 야당의 대표이기 때문에 체포를 해서 조사를 받아야 하는데, 그가 속한 야당에서 ‘방탄국회’를 펼쳐서 체포안이 부결되고 말았다(찬성 139표, 반대 138표, 기권 9표, 무효 11표-무효와 기권을 합하면 충분히 체포동의안이 가결됨) 그가 받고 있는 범죄 의혹의 비중에 비하면, 국민들의 법감정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위이다. 오죽하면 그가 임명했고, 그가 속한 정당의 전 공동비상대책위원장이 (그가)‘8개월간 보여준 모습은 국민을 위한 정당의 대표도 당원을 위한 정당의 대표도 아니었다’며 사즉생(死則生)의 결단을 하라고 촉구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최근에는 그의 최측근 가운데 한 명이었던 사람이 그와 관련된 문제점에 대한 1차 검찰의 조사를 받고 나서, 극단적 선택으로 세상을 떠났다. 고인은 유서를 통해 ‘이 대표는 정치를 내려놓고, 함께 일한 사람들의 희생이 더 이상 없어야 한다’고 썼단다. 그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벌써 5명이 유명을 달리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책임이라는 말은 하지 않고, ‘모르는 사람이다’ ‘관계가 없다’ ‘검찰의 과도한 수사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라는 말만 되뇌고 있다. 우리나라 정치사에 이런 지도자를 보았는가? 참 국민이 불행하다.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하여 국력을 낭비시키고, 권력을 방패막이로 삼아 법의 질서를 무너트리고, 국민들의 정신 건강에 심대한 피해를 입히는 그 뻔뻔함과 후안무치(厚顔無恥)는 비교될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우리는 역사에서 지도자의 잘못으로 큰 낭패를 보고, 국가가 결딴나고, 국민들이 불행해지는 모습을 얼마든지 보아왔다. 지도자의 잘못도 문제려니와, 그 정당의 책임감과 국민들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참담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다. 중국 노(魯)나라 시대 공자(孔子)는 당시 높은 벼슬에 있던 소정묘(少正卯)를 처형했다. 공자는 사람이 저질러서는 안 되는 5가지 행위를 말했는데, 심달이험(心達而險-마음이 음험한 것) 행벽이견(行辟而堅-행실이 괴팍하고 고집스러움) 언위이변(言僞而辯-말이 거짓되고 교활함) 기추이박(記醜而博-괴이하고 추잡스런 일을 꾸미고 행함) 순비이택(順非而澤-그릇된 일을 행하면서도 옳다고 하며 백성을 기만하는 것) 가운데 한 가지만 해당해도 군자(君子)는 사형을 면하기 어렵다고 했다고 한다. 우리는 최근 우리 정치권에서 벌어지는 해괴하고 무책임하며, 국민들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개인의 괴이한 행위를 방어하는데 사용하는 엇나간 정치 지도자들을 보고 있다. 그러나 민심(民心)은 천심이며, 천심(天心)을 거슬리는 권력자들의 말로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안타깝게 지켜보고 있다. 지도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혜안(慧眼)과 책임의식과 도덕과 양심에 따른 철저한 자기 성찰과 솔선과 국민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지도자들에게 큰 권력을 주시는 것은, 그에 대하여 심판하고 책임을 물으신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즉 모든 권력은 하나님께서 잠시 빌려주신 것이다. 정직과 진실은 고대 유물이거나 어리석은 사람들이나 사용하는 언어가 아니다. 그럼에도 정치권에서는 누가 누가 더 잘 속이나 경연 대회처럼 하고 있으니 꼴불견이다. 국민들은 정치인들에게 성현(聖賢) 군자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 시대 소시민이 가진 보편적인 인성과 양심은 소유해야 되지 않겠는가? 거짓은 눈깜짝일 뿐이다. 성경 말씀에 ‘거짓 증인은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뱉는 자는 망할 것이니라’(잠언19:9)고 하신다. 국민이 대표로 뽑은 지도자의 해악(駭愕-놀라게 함) 정치가 얼마나 갈 것인가? 제발 하나님께로부터 권력을 빌려 쓰는 지도자들이 국민을 더 이상 기만하고 국가를 불행하게 만들지 말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 칼럼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3-03-20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지도자는 선각자여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현자와 우자가 있습니다. 우자는 가르쳐줘도 모르고 현자는 가르쳐주면 아는 자입니다. 그런데 가르쳐주지 않는데도 싹을 보고 미래를 아는 사람을 명자(明者)라고 하고, 싹이 보이지도 않지만 기미만 보고도 미래를 예측하는 사람을 철인(哲人)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싹도 안 나고 기미도 안 보이는데 미래를 꿰뚫어 보고 예측하며 그것을 대비하는 사람을 선각자(先覺者)라고 합니다. 지도자는 미래를 내다보고 대안을 세우는 선각자여야 합니다. 코로나가 왔을 때 저는 교단 부총회장으로서 몇 분의 교회사 교수들로부터 자문을 받은 후, 한국교회 지도부에 칼빈의 ‘쿼런틴’(quarantine) 즉, 격리 시스템을 제안했습니다. 유럽에 흑사병이 창궐할 때 중세 가톨릭 사제들은 공간의 권위를 지키기 위하여 무조건 성당으로 모이라고 했습니다. 그걸 주도한 교황이 클레멘트 6세였습니다. 그 결과 성당이 집단감염의 진원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하였고 중세 가톨릭은 몰락을 자초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선각자적 시각을 가지고 미래를 예측하고 대비하였습니다. 그는 먼저 구빈원을 만들어서 사회봉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흑사병이 왔을 때 구빈원 자체가 쿼런틴, 즉 격리시설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는 일반 성도들에게도 쿼런틴 시스템을 적용했습니다. 그래서 노약자는 물론 일반 성도들도 교회로 오지 말고 집에서 격리를 해 있으라고 했습니다. 대신 성직자들이 찾아가서 예배를 드려 주었습니다. 당연히 교회에서는 비록 소수였지만 성직자들을 비롯하여 건강한 사람들, 혹은 중요한 사람들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칼빈은 예배의 존엄성을 끝까지 지키면서도 이웃 사랑과 생명 사랑을 실천한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의 종교개혁 운동은 제네바 시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계속 발전을 거듭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당시는 제가 부총회장 때라 나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훗날 내가 총회장이 되고 한교총 대표회장이 된 후 한국교회에 쿼런틴 시스템을 제안하고 정부와는 협상을 하며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잡아 균형을 맞출 수 있었습니다. 물론 비난과 공격도 많이 받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극단적인 입장을 취했다면 엄청난 언론의 공격을 받고 교회의 대사회적 이미지는 곤두박질쳤을 것입니다. 또한 총회장 임기 때 저는 총신의 임시이사 문제를 해결하고 정상화를 이루어냈습니다. 사실 다들 불가능하다고 말하며 손을 놓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동안 소통과 신뢰를 바탕으로 쌓아온 사회적 네트워크와 인맥을 최대한 활용하여 총신의 정상화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총회 이사회를 구성할 때도 교육부가 여성 이사를 파송하기 전에 총회가 선제적으로 여성 이사를 추천하자고 했습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105회 총회 때 기여 이사제를 시행토록 결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일부 정치권에서는 “당신은 총회에서 매장된다. 당신은 정치적으로 죽는다” 하면서 반대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응대했습니다. “나는 백번 죽어도 좋습니다. 총신이 발전하고 총회가 잘 될 수 있다면, 나는 총회에서 쫓겨나도 좋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걸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이제와서 후회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마는. 아니나 다를까, 교육부에서 3명의 여성 이사를 선임하였습니다. 저는 어쩔 수 없이 총회 입장에서 반대 성명서를 내고 기자회견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이후로도 저는 반대를 하였지만 다른 분이 교육부를 상대로 소송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총회장 이름으로 소송을 해야 한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총회장 이름으로 소송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총신이 부당한 손해와 불이익을 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닫고 곧바로 소송을 취하했습니다. 요즘일수록 새삼스럽게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지도자는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판단하고 헤아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 눈앞에 있는 현실만을 바라보고 교권적 안목으로 일을 처리하려고 하지 않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지금 우리 총회와 총신에는 진정한 선각자적 지도자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과거에 허허벌판에서 다시 교단을 일궈낸 선진들은 이런 선각자였지 않았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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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3-03-19
  • [국독연 칼럼] 강성률 목사의 ‘사랑을 깨닫는 날부터’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 도다.”(골1:6). 얼마 전에 제가 사는 빌라 3층과 2층 사이 계단에 반려견 한 마리가 묶인 채로 있었습니다. 아랫집 청년이 그 옆에 앉아 지키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왜 강아지가 그곳에 있는지 몰랐습니다. 11세대 가운데 그런 강아지를 기르는 집은 없었습니다. 분명 누군가 그곳에 버리고 간 것으로 보였습니다. 강아지는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그를 만지는 사람들에게 몸을 맡기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버려진 상태가 아니고 분명 주인이 자신을 데리러 올 줄 굳게 믿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모습으로 보아 주인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강아지로 보였습니다. ‘이런 강아지를 누가 왜 버렸을까?’ 의문이 들었는데 다음 날에야 풀렸습니다. CCTV 확인 결과 버려진 강아지가 아니라, 주변에 연로하여 정신적인 장애가 생긴 분이 계시는데, 그분이 길을 지나다가 강아지가 밖에 나와 있는 것을 보고, 노끈으로 목에 채운 후에 끌어다가 매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만일 주인이 그를 학대하였다면, 그는 사람을 경계하거나 심하게 짖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전혀 불안한 기색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던 강아지, 누가 봐도 사랑스러운 강아지였습니다. 알고 보니 어떤 목사님 가정에서 기르는 반려견이었는데, 주인이 잠시 한 눈판 사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주인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강아지가 낯선 환경에서 조금도 요동도 없이 평온하게 지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주님의 사랑을 듬뿍 받은 사람들입니다. 임금이나, 주인을 위하여 대신 죽은 사람들에 대하여 우리는 종종 들은 바가 있지만, 왕이나 주인이 종의 죗값을 죽음으로써 대신 치러 주었다는 말은 결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온 우주를 만드시고 주관하시는 주님께서 저 같은 죄인을 위하여 대신 돌아가신 것입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하여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7-8). 그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신앙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다면 감사 감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다면 보답하는 마음을 가지고 형제들에게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을 깨닫는 것, 사랑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 수 있을까요? 본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 도다.”(골1:6). 듣는 사람은 깨달을 수 있습니다. 다윗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묵상할 때에 화가 발하니, 나의 혀로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시39:3). 묵상하는 것은 읽고 듣고 기억하고 있는 것을 대상으로 합니다. 묵상할 때 감사 감격으로 뜨거워집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읽고 들을 뿐만 아니라 묵상해야 깊게 깨달아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기 위해서는 겸비한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그가 내게 이르되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케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들으신 바 되었으므로 내가 네 말로 인하여 왔느니라.”(단10:12). 겸비케 하기로 결심만 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성경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마음이 둔해지는 것은 겸비치 못하고 높은 마음을 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현자도, 철학자도 아닌 겸비한 마음을 가지고 배우려 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기 위해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7-8).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작은 것부터 사랑을 실천해 나갈 때 사랑이신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자신의 죄악을 깨닫고 회개한 것만큼 주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눅7:47). 자신의 죄악을 깨달은 사람은 죄 문제는 보혈공로 아니면 해결될 방법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보혈을 흘려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고 감사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은 보답하는 자세입니다. 그 보답하는 자세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우리에게 사랑받는 사람에게 어떤 인심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주님께 받은 사랑을 조금이라도 보답하는 마음입니다. 그것이 바로 열매입니다. 저를 비롯하여 이 글을 읽는 모든 성도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그 넓이와 깊이와 높이와 길이가 어떠한 것임을 알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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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15
  • [언론회 논평] JMS 정명석에게 엄정한 형벌이 선고되게 하라
    최근에 주목받고 있는 사교(邪敎)가 있다. 일명 JMS 정명석교(애천교회, 세계청년대학생MS연맹, 국제크리스천연합, 기독교복음선교회 등으로 명칭이 계속 바뀜)이다. 이들의 악행이 얼마나 심각한지 OTT 서비스 넷플릭스에서 정명석에 대하여 다룬 ‘나는 신이다’라는 방송을 통하여 더욱 두드러졌다. 물론 그전에도 정명석에 대해서는 우리 사회가 다 알다시피, 정명석은 여신도 성폭행 문제로 지난 2009년부터 2018년까지 10년간 감옥형을 살고 나왔다(대법원 2009도2001 선고: 강간치상ㆍ강간ㆍ강제추행ㆍ준강제추행) 그런데 출소 후에 또다시 성적인 문제를 일으켰는데, 외국 여자 신도 2명을 성추행ㆍ성폭행하는 등 22차례 성폭력을 저지른 혐의로, 지난해 말 고소를 당하고 구속기소된 상태이다.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하면, 현 이원석 검찰총장이 ‘JMS 정명석에게 엄정한 형벌이 선고될 수 있게 최선을 다하라’고 일선 검찰에 지시까지 했겠는가? 이에 해당 검찰에서는 엄정하게 수사를 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 다큐멘터리에 의하면, 정명석은 젊은 여성들을 자신의 신부인 ‘신앙 스타’로 뽑아 관리하며 이들을 상대로 성범죄를 저질러 왔고, 1만 명의 여성을 하늘의 애인으로 만든다는 것이 하늘의 지상명령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거 이곳에 몸담았다 탈퇴하여 지난 30년간 ‘안티 JMS운동’을 벌이고 있는 김 모 교수가 기독교계 방송에 나와 증언한 것을 보면, 정명석이 이런 사교를 구성하고 악행을 저지르는 것을 제대로 단죄(斷罪)하지 못한 데에는 여러 권력 기관에 속한 사람들의 보호와 비호, 그리고 사건 은폐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찌 범죄자를 잡고, 사회를 정의롭게 하고, 국민들의 삶을 평안하게 해야 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오히려 고약한 범죄자를 두둔했단 말인가? 이들도 공범이나 마찬가지이다. 정명석의 온갖 범죄행위는 명명백백하게 밝혀져야 한다. 그리하여 피해를 당한 사람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어야 한다. 그리고 정명석의 더러운 범죄행위를 도와주므로 계속 억울한 피해자들이 발생하게 만든, 권력 기관의 당사자들도 찾아내어 엄벌로 다스려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이런 사교 집단은 종교를 빙자하여 반종교적, 반사회적, 반윤리적, 반도덕적 집단임을 깨달아, 이곳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 빠져나와야 한다. 더 이상의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국민들도 경계해야 한다. 그리고 이참에 각 피해자들의 진술을 통하여 드러나고 있는 성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JMS 정명석 집단이 과거에 저지른 여러 가지 범죄행위에 대한 것도 엄밀히 조사하여 필벌(必罰)로 다스려야 한다. 교계 언론에 의하면 JMS 정명석교는 기독교의 교회 간판을 달고 전국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파악된 것만도 100여개가 된다고 한다. 그 사이 이들은 정통 교회를 빙자하여 얼마나 마각(魔脚) 행위를 했겠는가? 그들의 정체성을 드러나게 하여 선량한 젊은 여성들과 국민들, 그리고 성도들이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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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3-03-13
  • [언론회 논평] 건국 대통령 ‘이승만 지우기’ 이래서는 안 된다
    올해는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지 104주년이 된다. 그리고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지 처음으로 3•1절 기념행사를 하였다. 그런데 기념식장의 배경이 되고, 독립운동을 위하여 애쓴 분들을 넣은 현수막에 이승만 건국 대통령이 빠졌다. 그 현수막에는 안창호, 김구, 유관순, 이봉창, 이회영, 박은식, 안중근, 김규식, 민영환, 신채호, 윤봉길 의사 등은 들어갔으나, 조선독립을 위하여 가장 많이 애쓰고, 자유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기 위해 최고의 헌신을 한 이승만 대통령은 뺀 것이다. 행정안전부가 주관한 이번 행사에 이승만 대통령이 빠졌다는 것은 심각한 일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1898년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 활동을 했으며, 1919~2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이었고, 1919년 8월에는 구미위원부를 설립하였고, 1921년 6월 대한인동지회를 결성하였으며, 1941~45년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 외교 분야에서 탁월한 독립활동을 하였다. 뿐만이 아니라 해방된 조국에서 공산주의자들이 판을 치던 시대에 대한민국의 운명을 가른, 자유 민주주의 체제와 기틀을 만들었고, 제헌국회 의장으로 우리의 법의 기초를 만들었으며, 초대 및 건국 대통령으로 새로운 국가를 만든 훌륭한 거인(巨人)이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을 정부가 홀대하는 것은 좌파의 지난 정부가 하던 행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문재인 정권은 독립운동가들 가운데도 좌익이나 공산주의자들을 부각시켰고, 지난 2019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때도 서울 도심에 10명의 독립운동가 초상화를 내걸면서도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을 뺏었다. 그리고 2021년 하와이에서 독립유공자들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하는 자리에서도, 그곳에서 20년 이상을 독립을 위해 애썼던 이승만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는, 지독한 ‘이승만 지우기’를 했었다. 그런데 좌파정권에 넌덜머리를 낸 국민들의 여망으로 탄생한 윤석열 정부에서조차 이승만 건국 대통령을 지운다는 것은 뿌리가 없고, 줄기가 없는 나무처럼 살겠다는 매우 어리석음을 보여준 사건이 되었다. 그래서야 어찌 균형 잡히고, 국가와 국민들의 구겨진 역사관과 자존심을 바로 잡는 정권이 되겠는가? 이번 사건은 분명히 의도적으로 이승만 지우기에 앞장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정부는 이런 편향되고 반역사적, 반민주적인 인물들을 찾아내어 문책해야 한다. 그래서 다시는 우리의 당당한 역사와 인물을 가지고 해괴한 이념 놀이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기념식 자리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후손과 김구 선생의 후손들도 손을 맞잡고, ‘국민이 한마음 한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했다는데, 국가가 국민들의 마음만도 못해서야 어찌 국민들을 통합시키는 역할을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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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3-03-13
  • [언론회 논평] 군인들에게 사적 공간을 어디까지 인정해야 하나?
    지난해 11월 국방부는 ‘군인징계령 시행규칙 일부개정령안’을 입법 예고하였다. 그에 따르면 군인들의 징계 사유 중 (성)‘추행’을 포함하여 군인, 군무원에 대한 동성 간 항문성교나 구강성교, 그 밖에 유사한 행위에 대하여 처벌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이는 현재 군형법 제92조의6에 의한 것으로, 당연한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지난 해 4월 대법원(대법원장 김명수)에서 판결하기를, 남성 장교와 남성 부사관 사이에 사적 공간(영외 독신자 숙소-군 부대 재산)에서의 군인 간 성행위는 처벌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다수 의견 13명 중 8) 이에 국가인권위원회가 ‘사적 공간에서 자발적 의사 합의에 의한 동성 간 성관계는 징계에서 제외하라’는 의견을 냈으나 국방부는 합의 여하와 관계없이 징계한다는 시행령을 내었다. 그런데 이에 대한 편향된 외부의 압력에 의하여, 최근에 국방부가 ‘사적 공간에서 합의된 성관계는 벌하지 않는다’는 문구를 넣는 방안을 검토한다 하여 논란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군인들에게 사적 공간을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가? 영내(營內)가 아닌 영외(營外) 숙소도 사적 공간은 아닐 것이며, 또 휴가를 간 곳에서의 모든 행동도 군인의 행동이지 민간인의 행동은 아닌 것이다. 만약 군대 영내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동성 간 성행위가 있었다 하더라도, 요즘은 스마트폰에 동성애 앱을 깔아 동성애자들끼리의 연락과 연결이 용이하고, 또 그것이 같은 부대나 인근 부대라면 동성애 행위는 계속될 수 있다. 따라서 단순히 영내냐, 사적 공간이냐는 큰 의미가 없다고 본다. 왜 군대 내 동성애를 금하는 것인가? 가장 중요한 것은 전력(戰力)의 손실일 것이다. 동성애자들은 일반적으로 여러 가지 질병에 노출되어, 언제나 전투력을 갖춰야 할 병사들에게는 치명적 약점이 될 수 있다. 또 군대는 상명하복(上命下服)의 조직이기 때문에 겉으로는 쌍방 합의라고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상관에 의한 위압으로 동성 간 성행위를 막을 수가 없다. 현행, 군대 영내에서 이성 간에도 아무리 합의에 의한 성행위라도 발각 시 징계를 받는데, 하물며 동성 간 성행위가 여러 가지 부작용을 일으킬 것이 뻔하다. 때문에 동성 간 성행위를 예외로 하는 사적 공간을 인정한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그리고 이런 예외 규정을 두면 우리 자녀들이 동성 성폭력에 심각하게 노출된다. 이를테면 고참병이나 상관이 후임병이나 부하에게 휴가나 외출 날짜를 맞추게 하고, 이를 합의로 가장한 동성애를 요구할 경우, 그 병사들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 부모들이 자기 자녀를 군대에 보낸 것은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다하라고 보낸 것이지, 동성애의 피해자가 되어 돌아오라고 보낸 것이 아니다. 현재 이런 징계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군형법상 추행죄를 폐지하라고까지 주장하고 있다. 하나를 허용하면 두 개, 세 개, 나중에는 모든 것을 내주어야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 이래서는 안 된다. 저들은 차청차규(借廳借閨-대청을 내주면 안방까지 밀고 들어옴)하려 들 것이다. 국방부는 군대 내 ‘추행’ ‘성희롱’ ‘성폭력’ ‘동성 간 성관계’(합의든 강제이든) 등을 엄격하게 징계하여 군대 내 질서를 유지할 뿐 아니라, 병사들과 하급자들의 인권과 안전을 보장해야 한다. 군인들에게 ‘영외’ 혹은 ‘사적 공간’과 같은 어설픈 예외 규정을 둘 때, 병영문화는 위험해지고 병사들을 동성에 의한 성폭력으로부터 막아내기 어렵게 될 것이다. 국방부는 군대 내 불합리한 동성 간 성관계에 대하여 미온적인 태도로 국가의 미래를 어렵게 하고, 젊은 병사들을 동성애 공포로부터 지켜내지 못한다는 비난을 듣지 말아야 한다. 지금 전 세계가 동성애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제는 우리나라에서도 신성한 국방의 의무 자리까지 ‘평등’이니 ‘행복추구권’이라는 빌미로, 국가 안보까지 무너트리려고 한다. 국방부는 편향된 시각으로 동성 간 성폭력과 국가 안보를 무력화하고 조장하려는 주장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된다.
    • 칼럼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3-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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