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6-18(목)

칼럼
Home >  칼럼

실시간뉴스

실시간 칼럼 기사

  • [언론회 논평] 대선에서 선거의 공정성을 촉구한다
    앞으로 대통령 선거가 1달도 남지 않았다. 그런데 선거 판국에 비상이 걸렸다. 우선은 후보자의 자질과 그의 사법 리스크에 대한 큰 문제점이 노출되고 있다. 그는 중공의 권력자 마우쩌둥보다 더 큰 권력을 탐하고 있다는 언론의 보도도 있었다. 그와 그의 주변 권력들은 입법부는 물론, 행정, 사법권까지 틀어질 정도로 자유민주주의의 요건인 삼권분립을 해치는 모습까지 서슴없이 자행하는 무시무시한 행위들을 국민들은 목도(目睹)하고 있다. 그런데도 여론조사에서는 여전히 1위를 달리고 있어, 나라의 장래에 대하여 걱정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그런데다 선거의 모든 것을 관장하는 선거관리위원회와 그에 따른 행정, 그리고 법률의 문제점은 유권자인 국민들을 더욱 불안하게 하고 있다. 아무리 국민들은 민의(民意)를 가지고 투표한다 하여도 선거 관리와 행정이 이를 뒷받침하지 못하면, 국민의 주권은 외면당하거나 왜곡되기 싶다. 이는 결과적으로 불공정한 선거로 전락할 것을 우려한다. 최근에 ‘공명선거전국연합’이 언론에 낸 성명서에 의하면, 이들은 지난 4월에 공명선거 촉구를 위하여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공문을 보내, 몇 가지를 제안했다고 한다. 즉 사전투표 투표용지 진위(眞僞)를 가릴 수 있는 방안, 가짜 투표용지를 추가 투입하는 걸 방지하는 방안, 그리고 투표함 보관 중 투표함이나 투표용지를 바꿔치기하는 것을 방지하는 방안 등을 요청했으나, 신통한 답변을 듣지 못한 것으로 나타난다. 또 기독교를 중심으로 종교, 시민, 사회단체 등이 역시 4월에 ‘국민의 이름으로 공정선거를 요구한다’는 성명서를 통하여 사전투표 폐지, 전자개표기 사용금지, 투표소 내 수개표 원칙, 외국인 선거 참여 제한 등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획기적이고, 참신하고, 신뢰할 만한 방안을 내놓았다는 소식은 듣기 어렵다. 그렇다면 이번 대선에서도 공정하고, 투명하고, 국민의 주권이 침해되지 않는 선거가 이뤄질 것인가? 투표 결과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점에 대한 지적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사전투표’ 문제가 늘 화두(話頭)이다. 지난 2020년 4월 15일 제21대 총선에서 서울시 선거구 49곳에서 민주당의 사전투표 득표율이 당일 투표율보다 평균 12%p가 높았다. 제22대 총선에서도 사전투표 결과와 본 투표 결과가 확연하게 뒤집어진 곳도 상당수가 있었다. 같은 지역구의 주민이 불과 4~5일(사전 투표와 본 투표일의 차이)만에 이렇게 차이가 큰 것은 통계학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당시 서울대 박 모 명예교수는 ‘통계적으로 도저히 발생하기 어려운 것이며, 어떤 형태로든 인위적 개입이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또 명지대 박 모 교수도 ‘이런 결과는 동전 1,000개를 던져 모두 앞면이 나올 경우를 볼 수 없는 것과 같으며, 이런 선거 결과는 인위적인 작동이 있었다고 통계학적으로 해석될 수 밖에 없다’고 하였다. 이제 국가의 운명을 가를 6.3 대통령 선거는 불과 20여 일 앞으로 다가왔는데, 그동안 제기되었던 선거 행정과 방법을 바꿀 대안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국민들은 현실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공명선거를 주장하는 단체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선관위는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 한편 유권자들은 비록 소극적이지만, 가장 현실적인 방법으로 ‘사전투표’ 대신에 ‘본 투표’에 참여하는 것이다. 앞으로 이 나라 선거의 공정성을 위해서는 끊임없이 주권자인 국민들이 권력에 강력히 요구하고 노력하여 관철시켜야 하지만, 지금 당장은 현실 가능한 방법으로 선거 문화를 바꿔나가야 한다. 모든 법과 제도는 처음에는 ‘합리화’와 ‘편리성’을 위해서 만들어지지만, 이를 악용하려는 세력들도 끊임없이 진화하므로, 이를 국민들의 노력으로 혁신시켜야 한다. 이번 대선에서는 국민의 이름으로, 부정선거와 오류의 타깃과도 같은 사전투표를 무력화시키는 것으로, 조금이라도 이를 개혁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 칼럼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5-05-26
  • [언론회 논평] 국민들은 제대로 된 대통령을 뽑고 싶다
    대법원(대법원장 조희대)은 5월 1일 전원합의체를 통하여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이날 유력한 대선 후보에 대한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2심 판결에 대하여 그 법률 적용이 잘못되었음을 확인하는 ‘유죄 취지’로 서울고등법원에 ‘파기 환송’을 주문하였다. 즉 2심에서 무죄로 판결한 것을 1심에서 유죄로 판결한 것, 그대로 인정한 것이다. 이 재판은 여러 가지로 문제가 많았다. 먼저는 공직선거법 위반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1년 내에 3심까지 마쳐야 하는데, 1심이 나오기까지 무려 2년 2개월이 걸렸다. 1심을 맡은 판사는 1년 4개월을 질질 끌다가 갑자기 사표를 내서 사건이 다른 재판부로 넘어갔다. 그리고 2심은 4개월 만에 재판 결과를 가져왔지만, 1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의 형량을 ‘무죄’로 만들었다. 이때 판결한 판사는 우리법연구회 출신이 있었다. 법원에서 법의 양심에 따라 재판하라고 국가가 세웠는데 정치 도구화가 된 것이다. 다행히 대법원이 1달여 만에 신속하게 처리하여, 2심에서의 법 적용이 잘못된 것임을 명확히 하여 ‘유죄 취지’로 ‘파기 환송’한 것이다. 그 당사자가 야당의 대선 후보로 결정되었고, 여러 여론조사에서 수위를 달리는 입장에서 대법원이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사법부가 결코 썩지 않았음을 보여준 사례가 될 것이다. 사실은 2020년에 대법원이 제대로만 판결을 내렸어도 국민들은 거듭되는 혼란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문제는 그렇게도 리스크를 안고서도 대통령 후보로 만든 정당과, 자신의 문제점을 잘 알면서도 오직 대통령이 되겠다는 후보자가 큰 문제이다. 이번 대법원의 판결문은 법적인 전문적인 지식이 없이도, 그저 상식적이고, 범죄에 대한 문제성을 가지고 있는 일반인들도 판단할 수 있는 내용이라고 본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국민들이 공직선거법에 유죄를 받은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으라는 것인가? 선거권을 가진 국민들도 자존심이 있다. 대선 과정에서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던 사람을 나라를 통치하는 대통령으로 뽑을 수 있겠는가? 이 사람은 앞으로도 여러 가지 형사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 그러므로 대통령에 당선된다고 하여도 대통령으로 취임할 수 있을지조차 모르겠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이 이처럼 국가와 국민들에게 혼란과 절망감을 주어도 되는 것인가? 대통령 선거는 친목회 회장이나 동네 반장 선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국민 누구나 대통령으로 인정하고 존경할 만한 인물이 되어야 한다. 뿐만이 아니다. 이번에 대법원에서 공직선거법 위반의 유죄를 선고받은 야당의 대선 후보자는 그가 과거 했던 말들도 문제가 많다. ‘미군은 점령군이다’ ‘일본은 적성국이다’ ‘연합 훈련 핑계로 자위대 군홧발 한반도 더럽힐 수도 있다’ ‘왜 중국에 집적거리나, 그냥 셰셰 이러면 되지’ ‘종북몰이는 범죄 행위이다’ ‘사드 배치를 반대한다’ ‘재벌은 해체해야 한다’ 등을 주장했었다. 그런데 대선(大選)에 나가기 위하여 그 발언들이 변하고 있다고 하는데, 과연 그 진심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가? 최근에는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 묘소까지 참배하고 있는데, 과거에 그가 그분들을 평가한 것을 모두 철회한 것인가? 목적을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처세술은 매우 위험하다. 근본을 감추고 목적을 이룬 후에 그 본성이 튀어나온다면 이를 막을 길이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 국민들은 혼란과 혼돈과 혼잡과 혼미 속에서 대선에서의 투표를 강요받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왜 국민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국가를 위해 좋은 대통령을 뽑는다는 기쁨을 주지 못하는가? 범죄를 하고 무슨 말을 해도, 콘크리트 지지층에 의하여 만들어진 여론조사 수위(首位) 후보라서 괜찮다는 것인가? 국민들에게 공범(共犯)의식을 심어주는 후보자는 이미 자격이 없다고 본다. 본인에게서 일말의 양심의 가책이라도 발동이 되든지, 공당의 지도자들이 국민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조치를 취해야 맞지 않는가? 국민들은 정말 제대로 된 대통령을 선택하고 싶다.
    • 칼럼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5-05-26
  • [언론회 논평] 중국(중국공산당)의 종교활동에 대한 제한 심각
    중국이 5월 1일부터 시행하는 ‘중국 내 외국인 종교활동 관리규정 시행세칙’(이하 시행세칙)이 알려졌다. 이것은 사실상은 중국 내 선교를 대대적으로 제한하려는 것으로 판단되어, 매우 우려를 낳고 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중국은 그동안 ‘종교 사무조례’를 통하여 중국 내에서 이뤄지는 종교활동(특히 기독교)을 관리해 왔으나, 이번의 시행세칙으로 인하여 규제와 압력을 더욱 강화하는 것이다. 중국이 그동안 22개 항목으로 규제를 삼았는데, 이번의 시행세칙에서는 이 보다 훨씬 많이 늘어난 38개 조항을 담고 있다. 이로써 종교 활동의 장소, 방식, 중국 당국의 허가 절차, 또 제재조치를 세밀하게 규정한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종교 활동의 제한과 중국인을 대상으로 한 선교나 교육, 모금, 심지어 인터넷을 통한 종교활동까지 엄격하게 규제할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은 이미 2017년부터 자국 내에서 종교활동에 대한 것을 심각하게 규제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한국의 수많은 선교사들이 강제 추방을 당하거나, 비자 연장 거부 등을 통하여 선교 현장을 떠나온 것이다. 또 교회를 파괴하고 십자가를 불사르는 일들도 있었다. 심지어, 성경조차 중국공산당식으로 다시 만들려는 계획도 있다고 알려진다. 그에 의하면, 예수님이 유대 국가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유대 ‘율법’을 가르쳤는데, 중국에서 태어났다면 공자나 도교의 경전을 가르쳤을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성경에는 중국의 전통적인 이론이나 문화적 표현을 포함 시켜야 한다. 성경이 사회주의 핵심 가치와 일치하고 중국공산당 강령과 결합해야 한다. 그리고 중국 교회에서는 정치 학습도 병행해야 한단다. 경악할 일이다. 그런가 하면 교회에서도 중국 정부를 찬양하고, 중국의 우월성에 대한 설교를 해야 하고, 십자가 대신에 중국 국가 주석의 초상화를 걸고, 중국공산당이 그리스도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을 고백해야 한단다. 이는 과거 기독교를 심하게 박해하던 시대에 있었던 일들과 유사하다. 그러나 기독교를 정치에 깊이 이용한 국가나 권력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기 어려웠던 역사적 교훈이 있다. 중국공산당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알려진 자료들을 보면, 중국은 세계를 정복하려는 ‘통일전선전략’을 펴고 있는데, 그 내용들이 모골(毛骨)이 송연(悚然)하다. 이 전략은 다양한 방법을 구사하는데, 각 나라에서 중국 편이 될 정치 엘리트를 포섭한다. 이미 한국, 미국, 캐나다, 호주 등에서 그런 일들이 드러나고 있다. 또 해외 거주하는 중국인들에게 총동원령을 내리고 그들이 그 나라에서 첩보 활동을 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또 각 나라의 언론을 장악하는 것도 있다. 그 방법은 대상 언론과 교류하거나 중국 언론사의 지국을 설립한다. 그리고 자금을 투자하거나 합작을 한다. 중국에 유리한 담론(談論)을 형성한다. 트위터나 유튜브를 활용하여 중국을 널리 알린다. 또 중국을 옹호하는 글을 언론에 게재하게 한다. 그리고 위장 언론 사이트을 만들어 친중•반미 콘텐츠를 무제한 배포한다. 또한 외국의 ‘싱크탱크’들에 자금을 기부해 중국의 기술, 정책을 지지•찬양하도록 한다. 그리고 대학 연구소에 자금을 후원하고 그곳 대학이나 연구소 졸업자들이 그 나라의 중요한 부서인 국방, 정보, 군 기관에 진출하도록 한다. 또 후원을 빌미로 압력과 회유 등을 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그뿐만 아니라, 학계를 장악한다. 예를 들면 ‘공자 학원’을 만들어 중국이 타국의 교육과 교육기관 운영에 관여하거나 영향력을 미치는 모델을 만들어 간다. 표면적으로는 중국어나 중국 문화를 알리는 것이지만, 실상은 중국공산당을 전파하기 위한 것들이다. 현재 전 세계 155개국에 ‘공자 학원’이 556개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한국에는 28개가 있고 ‘공자 교실’은 132개에 달한다. 이로 볼 때 한국은 전 세계에서 공자 학원(공자 교실 포함)이 제일 많은 나라이다. 문제가 심각한 것은 이런 공자 학원이 주요 대학 내에 있다는 것이다. 현재 대학에 22곳, 중고등학교 등에 6개소가 있다. 이렇듯 중국공산당은 전 세계를 향한 전방위적인, 총체적인, 총력을 기울여 온갖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저들은 하이브리드전(Hybrid Warfare) 초한전(超限戰) 통일전선전략 등을 막강하게 펴고 있다. 그러면서도 중국 내에서는 종교 및 선교 활동을 온갖 구실로 제한하고 있다. 심지어는 공산당식 기독교이단을 만들려고 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전 세계인들이 감시의 눈으로 주시(注視)해야 하며, 우리 한국인들은 중국의 온갖 침략•침탈 전략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될 것이다. 아무리 국가 간에 교류를 하고, 교역을 한다고 하여도, 검은 속셈을 가지고 접근하거나 그 전략을 시행하는 것은 철저하게 찾아내어 근절시켜야 한다. 그리하여 중국공산당이 한국과 한국민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 칼럼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5-05-26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그 청년 바보 의사처럼”
    ‘안수현, 그 청년 바보 의사’라는 책이 있습니다. 제가 원래 이 책을 읽은 것은 아니고 몇 달 전에 국민일보에 나온 기사를 보고 이 책을 구해봤습니다. 故 안수현 님의 삶은 정말 짧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분은 예수님처럼 만 33살 나이로 죽었습니다. 세상에 직업이 의사, 그것도 내과 전문의였는데 33살에 죽은 것입니다. 그분이 영락교회를 다녔는데 장례식장에 4천 명이나 왔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 많은 사람이 왔느냐 하면, 의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다 왔습니다. 그는 군의관이었는데 유행성 출혈열로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그런데 병원에 입원하였을 때 자기가 환자였음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사랑과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 청년의사는 환자와 눈이 마주치면 많이 아프냐고 묻기도 하고 빨리 치료를 못 해줘서 미안하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간호사들을 보면 왜 그렇게 예쁘냐고, 잘생겼냐고 덕담을 건넸다고 합니다. 그는 입원 첫날부터 한밤중이면 살며시 찾아와 환자의 침대 곁에서 기도를 해드렸습니다. 자기 것을 하나도 아끼지 않고 나누고, 누군가가 필요하면 자기 시간을 내주고, 찬양 테이프와 신앙 서적을 따뜻한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는 주변인들로부터 ‘청년 예수’로 불릴 정도로 신실한 청년이었습니다. 돈이 없는 환자의 검사비를 대신 내주고 시한부 환자들의 말동무가 되어 주었습니다. 군의관 시절엔 풀밭에서 사병들과 함께 지내며 부하들의 건강을 먼저 챙겼습니다. 그가 사망한 이후에 안 씨 유가족은 책 수익금 전액을 그가 활동했던 누가회에 기부했고 이를 통해 의사를 양성하는 “안수현 장학회”가 설립되었습니다. 그 장학회를 통해 15년간 의대생 60명이 장학금을 수여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바보 의사라고 불렀습니다. 최근 의료 위기를 맞을 때 그 바보 의사의 말과 삶이 더 빛나게 다가왔습니다. 지난 용기총에서 주최한 용인시복음화대성회를 하는데 5월의 햇빛이 7, 8월의 땡볕 못지않게 작열하였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 종이 모자도 쓰지 않고 앉아 있는 분들이 참 대단하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설교도 한 4분 정도 했을 것입니다. 땡볕 아래 앉아 있는 우리 성도들에게 너무너무 미안한 것입니다. 진짜 제가 바보 목사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이석을 한 걸로 들었습니다마는, 끝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는 분이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 이시영 집사님이십니다. 그분은 진짜 바보 집사님이세요. 이시영 집사님은 마을버스를 운전하시는 기사님이신데, 하루는 버스 운행 중에 단국대를 다니는 중국 유학생 승객이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진 것입니다. 이 집사님은 곧바로 차를 몰아 우리 교회 이재훈 의료목사님이 원장님으로 계시는 다건연세내과로 갔습니다. 집사님은 의식을 잃고 축 늘어진 환자를 등에 업고 정신없이 뛰었습니다. 이재훈 목사님 역시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응급처치를 바로 시작했습니다. 환자는 의식이 없고 혈압도 낮은 상황이었습니다. 조금만 더 늦으면 심정지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초위기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이재훈 목사님께서 급히 수액을 처방하고 혈압을 올릴 수 있는 조치를 취해서 5분쯤 후 신음과 함께 여성의 의식이 돌아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20~30분이 지나서야 완전히 정신이 돌아왔으니까 만약에 응급실을 찾아서 헤매고 다녔다면 심정지가 왔을 수도 있었던 급박한 상황이었습니다. 다행히 이시영 집사님과 이재훈 목사님의 침착하고 신속한 응급 구조가 한 학생의 생명을 살리게 된 것이죠. 이시영 집사님은 병원비까지 다 결재를 하고 다시 버스 운행을 재개했다고 합니다. 이 아름다운 미담이 여러 공중파 방송에 보도가 되어 큰 감동을 주었고 유학생은 나중에 이시영 집사님을 찾아와 치료비를 갚고, 감사 인사와 함께 홍금기를 선물했다고 합니다. 중국에서는 생명을 살린 의인에게 붉은 비단 깃발, 홍금기를 준다고 합니다. 바로 그 이시영 집사님께서 용기총 집회에서 끝까지 자리를 지켰고 소형자동차 경품에 당첨이 된 것입니다. 진짜 그분은 바보 집사죠. 그런데 그 바보 집사님에게 하나님께서 담임목사를 대신하고 또 우리 성가대를 대신해서 경품 선물로 위로하시고 칭찬하신 것 같았습니다. 일주일 내내 이런 생각을 하며 살았습니다. “나도 더 기도하는 바보가 돼야 되겠구나. 더 바보 목사로 살아야 되겠구나...”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5-05-25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예수님의 가르침’(요 13:12~15)
    제자는 좋은 스승을 만나야 바른 교육을 받을 수 있습니다. 스승의 사전적 의미는 ‘나를 가르쳐주는 사람’이고, 선생의 사전적 의미는 ‘남을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교육(education)은 라틴어로 ‘끄집어내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즉 사람됨이 되도록 가르침이 교육의 본질이라는 뜻입니다.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하나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습니다.”(고전 4:2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능력을 키워가기 위해서 서로 배워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주와 선생으로서 섬김을 받기보다 오히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그렇게 섬겨주시면서 제자들에게 서로 섬기는 자세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섬김에서 겸손하신 스승의 모습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3년간 공생애 기간 동안 두 가지 예식, 즉 성찬식과 세족식을 베푸셨습니다. 성찬은 구원의 확증을 의미하는 것이고, 세족은 구원받은 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결단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스승이 되시고 주가 되셨지만,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섬김의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세족식은 예수께서 사랑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섬김을 본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변화시키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삶으로 가르쳐주신 참된 스승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로 세우실 사람들을 찾아다니시며 부르셨습니다.(막 3:13)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이며, 영원한 스승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관심과 눈높이에서 출발하셔서 핵심적인 가르침을 주신 스승이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예수께서는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는 마을에 이르셨습니다. 한 사마리아 여자가 물을 길으러 나왔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마실 물을 좀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께 “선생님은 유대 사람인데,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라고 말하였습니다. 유대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과 상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는 “선생님, 그 물을 나에게 주셔서, 내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여기까지 나오지도 않게 해주십시오.”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여자는 “선생님, 내가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이십니다. 우리 조상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선생님네 사람들은 예배드려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여자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인 “네 남편을 불러 오너라”로부터 출발하셔서 예배에 대한 대화로 옮겨가셨습니다. 결국 그 여자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알고 전도하도록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내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히신 분이 계십니다. 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닐까요?”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뒤에서 살짝 만지고 오랜 혈루병이 나은 여인에게는 어떤 가르침을 주셨을까요?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예수의 소문을 듣고 예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나을 것으로 생각하고 뒤에서 예수의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 그때 몸이 나은 것을 느꼈습니다. 예수께서는 “누군가가 내게 손을 댔다. 나는 내게서 능력이 빠져나간 것을 알고 있다.”(눅 8:4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여자는 더 숨길 수 없음을 알고서, 떨면서 나아와 예수께 엎드려서, 손을 댄 이유와 곧 낫게 된 사실을 모든 사람 앞에 알렸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 앞에 그 여자를 세우심으로써 그 여자가 치유되었고, 더는 부정하지 않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알려주셨습니다. 그 여자가 당당하게 새로운 삶을 살도록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죄인들에게나 병자들에게는 그들의 눈높이로, 제자들에게는 제자들의 눈높이로 가장 적합한 가르침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배워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변화되도록 생명력 있게 가르쳐야 합니다. 제자가 되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말씀을 순종함으로써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고, 그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제자 되기 위해서 주님처럼 삶으로 사랑으로 가르쳐주는 겸손한 종이 되어야 합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5-05-18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초절제가 초감탄을 이룬다
    지난주 화요일 부산에서 총회가 주관한 전국목사장로기도회에 저녁설교를 하였습니다. 제가 화상을 입기 전에 저녁 강사로 초청을 받았는데, 지금까지 합쳐 보니까 목사장로기도회에서 8번 설교를 했더라고요. 총회 역사에 이런 유례가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 첫날 저녁 시간은 목사장로기도회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이상하게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먼저는 거리가 너무 멀었습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설교도 40분 이상 해도 된다고 문자가 와서 넉넉하게 준비를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설교자가 두 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투트랙으로 기도회를 하고 투트랙으로 설교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를 30분으로 줄여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30분 정도 하자 하고 거기에 맞게 준비를 하고 갔습니다. 오랜만에 KTX를 타고 부산으로 갔습니다. 집회 장소에 도착하니까 여러 목사님, 장로님들이 인사를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한 임원이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강의가 많아서 좀 피곤하고 힘듭니다. 좀 졸립니다. 목사님, 제발 설교를 좀 재미있게 해 주세요.” 이 말은 좀 짧게 해달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게다가 동행한 송종호 안수집사가 열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선 설교를 짧게 해야 한다고 압박감을 주었습니다. 사실은 한국기독교 140주년 기념 칸타타 ‘빛의 연대기’ 곡도 몇 곡 소개하고, 6.25 참전용사 초청행사에 대한 영상 등 다채롭게 준비해 왔습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가서 보니까 순서들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제 설교 후 많은 분들의 특별기도, 그다음에는 또 제가 아끼는 후배 목사님의 설교가 있었습니다. 더구나 설교 중에 나와야 할 영상이 제때 나오지 못한 것입니다. “안 되겠구나...” 저는 영상 시스템이 우리 교회와 비슷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저의 설교와 함께 영상이 따라오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기왕 절제한 김에 확실하게 절제를 하자” 생각하고 정말 과감하게 설교를 짧게 끝냈습니다. 끝나고 보니까 설교를 딱 21분 했더라고요. 그러면서도 전하고 싶은 말씀은 거의 다 했습니다. 그렇게 설교를 마치고 나오자 여러 사람들이 이렇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최고였습니다!” 다음날 이종민 목사님도 이렇게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목사님, 설교를 짧게 하시기를 너무나 잘하셨습니다. 그리고 후배를 아끼는 마음이 너무나 들었습니다. 목사님 설교가 짧고 간결하면서도 할 얘기는 다 전했다고 여러 사람들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저도 젊은 날에는 시간을 초과하면서 많이만 듬뿍듬뿍 전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생각해 봤습니다. 초절제가 초감탄을 이룬다고 말입니다. 성령의 은사 중에 하나가 절제입니다. 교회는 혼자서만 신앙생활하는 곳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절제와 양보할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합니다. 또 하나 생각난 것이 있었는데요. 지난번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공연했던 한국기독교 140주년 기념 칸타타 공연을 안 하기로 한 것은 너무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럴만한 시간도 없었고, 상황이 안되었기 때문이죠. 사실은 제가 그렇게 결정했다는 것보다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결정을 하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저는 다시 한번 감격했습니다. "초절제 초감탄"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5-05-18
  • [언론회 논평] 사법 정의가 살아나야 우리나라가 산다
    최근 대법원(대법원장 조희대)이 공직선거법 위한 사건에 대하여 빠른 판결을 위한 속도를 내는 것으로 일려진다. 본래 공직선거법 위반은 3.3.6으로 끝나야 한다. 즉 1심에서 3개월, 2심에서 3개월, 그리고 불복하여 3심까지 갈 경우에도 6개월 내 끝내야 한다는 원칙이다. 그러나 근자에 사법부는 큰 권력에 연관된 사람이나 일부 법관들과 이념과 사상에 맞는 사람에 대해서는 공직선거법 위반자에 대해서도 재판을 질질 끌다가 결국 4년 임기를 마치도록 하는 경우가 있었다. 혹은 임기를 80% 이상을 채운 가운데 결론을 내는 경우들도 있었다. 이것이 ‘사법부 정치화’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러니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권력무죄’로 불의(不義)가 판치고 있었던 것이다. 법을 만드는 입법부 사람들이 법을 안 지키고, 법으로 죄를 단죄해야 할 사법부가 제대로 법을 집행하지 않는 법치주의를 무너트리는 일들이 비일비재(非一非再)했던 것이다. 거기다가 죄가 명백해도 유명 정치인, 유력 정치인이라고 ‘법정 구속’을 않고 봐주는 경우들도 여럿 있었다. 그래서는 만민에게 평등한 ‘법치주의’를 이루기 어렵게 된다. 일반인들은 상상할 수 없는 특혜를 그야말로 일부 특정 정치인들에게 주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대법원이 이재명 의원(전 더불어민주당 당 대표, 유력한 대선 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 3심에서 신속하게 처리하려 한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다. 즉 이 사건을 심리하기 위하여 전원합의체를 구성하여(사회적으로 큰 파장이 되는 사건, 종전 대법원 판례를 변경해야 할 경우에 판결하는 형태) 연속적으로 심리하고 있다고 한다. 이 사건은 1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 것이었으나, 2심에서는 모두 무죄로 선고한 것이어서, 그래서 중요한 쟁점을 대법원이 판단해야 하는 상황이다. 대법원의 판결 내용과 시점에 따라 6월 3일 치르게 될 대선에도 큰 파장이 일어날 수 있다. 대법원이 유죄 취지로 2심 법원에 ‘파기 환송’이나, 대법원이 직접 형량을 정하는 ‘파기 자판’을 할 경우, 이 전 대표는 대선에 나가지 못할 수도 있다. 이 전 대표는 이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말고도 여러 건의 재판을 받고 있다. 또 과거에도 전과 4범이란 불명예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사법부 최고의 권위와 최종 판결을 가를 대법원의 현명한 판단으로 사법부의 정의를 세워주기 바란다. 이 나라는 이미 법치주의가 무너져, 불법, 탈법, 편법, 법꾸라지들에 의하여 혼란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것들을 막아주고, 정의를 세워달라고 사법부를 만든 것이 아닌가? 대법원이 지난 2018년 공정한 판결을 내렸었다면, 오늘날의 이런 혼란스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사법부는 권력자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법의 정신과 법의 정의와 법의 양심으로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중요한 기둥이 됨을 잊지 말기 바란다.
    • 칼럼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5-05-12
  • [언론회 논평] 성명(姓名)을 넣은 기념관과 재단 설립은 명예로워야
    부사관으로 군에 입대한 남성이 성전환 수술을 하여 군 당국으로부터 ‘심신 장애 3급 판단’으로 전역 조치된 사건이 있었다. 그럼에도 본인은 여군으로 계속 복무하겠다며, 강제 전역 처분 취소를 요구하는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그런 일이 끝내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다른 여군들의 입장은 생각해 봤을까? 안타깝게도 이 소송이 진행되는 가운데 본인은 극단적 선택을 한 사건이 지난 2021년에 있었다. 그런 가운데 지난해 2월부터 군 인권을 위한 명목으로 활동하는 단체에서 그의 이름을 넣은 재단(財團)을 만든다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설립을 위한 신청을 하였다. 국가인권위에서는 이에 대하여 몇 차례 다뤘지만, 결론을 내리지는 못한 상태이다. 이를 반대하는 자유인권실천국민행동 등 50여 개 시민단체들은 ‘군인권센터가 변00재단을 만들어 대한민국 정부 독립기관인 국가인권위원회를 압박해 오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며, 공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며, 21일 반대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실 어떤 재단이나 기념관에 사람의 성명(姓名)을 넣어 만들 때에는 그가 역사적으로, 국가적으로, 사회적으로 매우 훌륭한 업적이나 공적이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이승만, 박정희, 안창호, 김구, 백선엽 등의 기념관이나 재단은 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나 이 경우는 다르다. 군 복무를 해야 할 군인 신분으로 성전환 수술을 하고, 군인으로 복무하기에 적합하지 않아, 전역 조치를 당한 후 스스로 죽음의 길을 선택한 사람의 이름으로 재단을 만든다는 것은 오히려 고인을 욕되게 하지 않을까? 어떤 국민들이 이런 상황을 이해하고 인정하겠는가? 아무리 세상이 뒤바뀌고 왜곡된 인권을 강조하는 시대라고 할지라도 국가에 공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개인이 성정체성을 겪다가 극단적 선택을 한 사람의 이름으로 공익적 재단을 만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에 하나,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법인을 허락한다면 국가 기관이 이를 인정하고 부추기는 결과가 될 것이다. 따라서 국가 기관이 이들의 요청을 들어줘서는 안 될 것이며, 이를 반대하는 시민 단체들의 우려를 받아들여야 한다. 한번 생각해 보자. 개인적인 한 사람의 죽음은 매우 안타까우나, 그렇다고 그의 이름이 들어간 재단을 만들어 기린다는 것은 국민들과 우리 젊은이들을 어떻게 보고 하는 행동인가? 생명은 누구나 소중하고 귀하다. 그런 측면에서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석해하는 것과, 그의 이름으로 전 국민 앞에 재단을 만들어 크게 기념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목적을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는 훨씬 불편하고 서로 힘들게 될 것이다. 그런 불편과 불쾌함을 자초하는 우(愚)는 범하지 않기 바란다.
    • 칼럼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5-05-12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효와 사랑과 감동에 대해’ (딤후 1:11~14)
    사람의 마음이 감동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감동’(感動)이란, 무언가 크게 느끼어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감동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본래 마음과 태도가 변화되고, 비로소 귀한 마음가짐과 행동의 변화를 이루어 무언가 새롭고 소중한 일을 하게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의 일꾼인 디모데를 향해서 안수하기를 원했고, 디모데에게 안수할 때 하나님이 디모데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이 불일듯 되살아나게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안수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은혜와 그 마음과 능력을 전달하고 전수하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안수는 그 자체로 매우 고귀하고 선한 행위에 해당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실한 하나님의 일꾼, 순수한 사랑의 사역자 디모데의 진실한 믿음은 먼저 디모데의 할머니 로이스와 그의 어머니 유니게에게 있었는데, 디모데에게도 그러한 믿음이 있는 것을 바울은 발견했습니다. 이렇듯 한 사람의 순수한 열정과 진정한 믿음은 어느 한순간에 이뤄지지 않으며 대를 이어 나타난 그 성실함과 진실함과 온전한 믿음가운데 연결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러한 디모데의 삶과 인성과 마음을 보았고, 감동했으며, 안수를 주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그러한 결심 또한 바울의 개인적이고 자의적인 차원에서 나온 것이 아닌, 하나님과 연결된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또 그분의 거룩한 일을 위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선행이나 무슨 자격으로 된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뜻과 은혜로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인 우리 주님을 증거하는 일과 주님을 위해 고난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살고 있음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본문 13-14절)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하나님의 말씀을 본받아 지키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는 것이 무엇일까요?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요? 제가 잘 알던 고(故) 최성규 목사의 효(孝) 사역이 시작된 계기가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였습니다. 16일만에 극적으로 살아난 3명의 젊은 청년들이, 비록 신앙을 갖지 않았음에도 살아난 것에 대해, 그들이 공통적으로 모두 효자, 효녀였다는 것과 연결되면서 최 목사로 하여금 ‘효’를 본격 연구하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효의 관점에서 성경을 읽어보면, 일곱가지로 효가 정리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고(1효), 부모와 어른 스승을 공경하고(2효), 어린이와 청소년, 제자를 사랑하며(3효), 가족사랑(4효)과 나라사랑(5효), 자연사랑과 환경보호(6효)에 이어 이웃사랑과 인류봉사(7효)로 정리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곱 효가 이뤄지면 다시 7가지 행복(가정 학교 사회 경제 나라 교회 인류)이 온다는 내용입니다. 효의 원전은 효경이나 유교 경전이 아니라, 성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효를 가르친 공자는 BC 551년 인물이지만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을 가르친 모세는 BC 1526년 인물입니다다. 그리고 그 내용은 하나님께서 직접 모세를 통해 주신 말씀입니다. 구원은 예수님을 통해 얻지만 행복은 효를 통해 받는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분명히 부모를 공경하면 이 땅에서 복과 장수를 얻는다는 약속의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복음을 위해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열심은 언제나 그 삶의 방향이 주님의 뜻인 복음과 긴밀히 밀착되어 있어야 하며 이를 실천하기 위해 근본적으로 효를 행하는 사람들이 돼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앙으로 살 때, 우리의 모든 상황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가장 선한 방법으로 가장 크고 놀라운 은혜를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순전한 마음과 진정한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부모를 공경하며, 자녀와 이웃을 사랑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5-05-12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자녀들이 묻거든’(출 12:21-28)
    자녀들이 묻거든 성경에서 답을 찾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정확하게 알려주어야 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중요한 두 가지가 말씀과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니며, 우리의 믿음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일 5:3-4) 본문을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모든 장로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가서 너희의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 우슬초 묶음을 가져다가 그릇에 담은 피에 적셔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 밖에 나가지 말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지나가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의 피를 보시면 여호와께서 그 문을 넘으시고 말하는 자에게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너희는 이 일을 규례로 삼아 너희와 너희 자손이 영원히 지킬 것이니 너희는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대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이를 때에 이 예식을 지킬 것이라 이 후에 너희의 자녀가 묻기를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 하거든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 하매 백성이 머리 숙여 경배하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물러가서 그대로 행하되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를 불러서 너희와 너희 자손이 유월절 규례를 영원히 지키고, 후에 너희 자녀가 이 예식에 대해 묻거든, 이것은 주님께 드리는 유월절 제사인데, 주님께서 애굽 사람을 치실 때에,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 자손의 집만은 그냥 지나가셔서, 우리의 집들을 구하여 주신 것을 알려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은 우리를 죄에서 건져주시고 참 자유를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여러분은 새 반죽이 되기 위해서,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십시오. 사실 여러분은 누룩이 들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의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습니다.”(고전 5: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월절 질문에 이어 성경에서 자녀들이 궁금한 것을 물을 때에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살펴봅니다. 자녀들이 왜 맏아들을 모두 대속하여야 하는지를 묻거든, 주님께서 강한 손으로 우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셨을 때 바로가 우리를 내보내지 않으려고 고집을 부렸으므로, 주님께서 처음 난 것을, 사람뿐만 아니라 이집트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을 죽이셔서, 처음 태를 열고 나온 모든 수컷을 주님께 제물로 바치는 것이고, 아들 가운데서도 맏아들을 모두 대속하는 것이라고 알려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 13:11-16) 자녀들이 하나님께서 명하신 훈령과 규례와 법도가 무엇이냐고 묻거든, 주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규례를 명하여 지키게 하신 것은, 주 우리의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기 위한 것임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만 하면,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를 지키시고, 우리가 잘 살게 하여 주실 것이고, 그것이 우리의 의로움이 될 것을 알려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신 6:20-25) 자녀들이 요단강에 있는 열두 개의 돌들이 지닌 뜻을 묻거든, 주님의 언약궤 앞에서 요단 강 물이 끊기었다는 것과 언약궤가 요단 강을 지날 때에 요단 강 물이 끊기었으므로 그 돌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영원토록 기념물이 된다는 것을 알려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수 4:7) 위 질문의 공통적인 대답은, 주님께서 그들을 바로의 노예에서 어떻게 구원해 주셨는지를 되새겨 기억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열두 지파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것을 영원토록 자손들에게 기념물로 남겨주는 그들의 신앙과 지혜를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무엇을 남겨주고 떠날 것인지, 어떻게 신앙의 유산을 물려줄 것인지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알려주어야 합니다.(신 6:5) 신앙생활의 기초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이 부모님을 왜 공경해야 하는지 묻거든, 하나님의 명령으로서 약속이 있는 계명임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너희 부모를 공경하여라. 주 너희 하나님이 명하신 것이다. 그래야 너희는,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에게 준 땅에서 오래 살면서 복을 누린다.”(신 5: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모님을 공경한다는 것은 부모님을 참 조언자로 중요하게 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부모님을 공경하며,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양육해야 합니다.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19: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모님께 순종하는 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임을 알려주어야 합니다.(골 3:20) 부모는 자녀들을 노엽게 하여 낙심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자녀들에게 격분하게 하여 그들의 의기를 꺾지 않아야 합니다. “어버이 된 이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들을 격분하게 하지 마십시오. 그들의 의기를 꺾지 않아야 합니다.”(골 3: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격분하게 하는 것은 잔소리를 하거나 멸시하여 분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의기를 꺾는 것은 낙심하고 자포자기하여 자라나는 심령이 훼손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녀들을 주님의 말씀으로 비전을 갖고 당당하게 살도록 슬기롭게 양육해야 합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5-05-04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