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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론회 논평] 우는 자들로 함께 울고, 도움의 손길을 펴자
    지난 6일 터키(튀르키예)와 시리아 지역에 발생한 강진으로 현재까지 8,000여명의 사망자와 수만 명의 부상자 등 인명피해가 속출하고 있고, 앞으로도 더 많은 인명 피해가 날 것으로 보여, 세계인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사건 발생 72시간이 ‘골든타임’인데, 이곳에는 강추위가 닥쳤고, 내전 상태에 있는 시리아의 국내 사정 등으로 체계적으로 인명구조가 어렵고, 또 이어지는 여진(餘震)으로 구조를 방해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이에 대하여 전 세계 70여 개국에서 도움의 손길을 펴고 있고, 우리나라도 118명의 인명구조단을 파견하고 인도적 차원의 구호금을 보내는 등의 신속한 노력을 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터키는 우리나라 6.25전쟁으로 공산침략군으로부터 극한 괴로움을 당할 때, 군대를 파견하여 함께 싸워준 고마운 나라이다. 터키 국민들은 우리나라를 형제의 나라라고 부른다. 형제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재난을 당하였으니 이제는 우리가 힘써 도울 차례라고 본다. 우리 한국교회들도 성경 말씀대로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마음으로 재난당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여야 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안전하게 구조되기를, 재난당한 사람들이 생명과 건강이 유지되도록, 그리고 재난당한 지역이 속히 복구되어 삶의 터전이 회복되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온정의 손길을 펼치는데 적극 동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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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3-02-20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바보가 될 바에는 더 큰 바보가 되라”
    류시화 시인이 쓴 ‘신이 쉼표를 넣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말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어느 밀림 속에서 모든 동물들이 평화롭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사건은 당나귀가 풀의 색깔을 파란색이라고 우기는 데서 시작됩니다. 당나귀가 자기 혼자 “풀이 파란색”이라고 소근 거렸으면 좋았을 텐데 아예 모든 동물들 앞에서 풀의 색깔이 파란색이라고 소리쳐 대는 것입니다. 이때 호랑이가 으르렁거리며 “풀은 파란색이 아니라 초록색이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당나귀는 더 소리를 높였습니다. “풀은 초록색이 아니라 파란색이라니까!” 그러자 동물들이 덩달아 편 가르기를 하였습니다. ‘초록색파’와 ‘파란색파’로, 혹은 호랑이파와 당나귀파로 나뉜 것이죠. 호랑이는 포식동물의 왕답게 으르렁대기 시작했고 당나귀는 분수를 모르고 계속 소리를 지르고 있었습니다. “초록색이 아니라 파란색이라니까!” 누군가의 중재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동물들은 밀림의 왕 사자를 초청하여 판결을 부탁하자고 하였습니다. 호랑이도 동의를 하였습니다. 왜냐면 사자는 고양이과 동물로서 당연히 자기편이 되어줄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자가 나타났습니다. 먼저 당나귀의 주장에 귀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호랑이의 주장도 잘 들었습니다. 그러더니 사자는 당나귀의 말이 옳다고 판결을 내렸습니다. 풀은 초록색이 아니라 파란색이라고 말이죠. 판결 후에 호랑이가 사자에게 으르렁대며 “왜 그따위 판결을 하느냐”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습니다. “너도 풀이 초록색이라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 왜 그렇게 오판을 했느냐”고 말입니다. 그리고 오른발로 사자를 치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사자가 지혜롭게 말을 했습니다. “어이, 호랑이. 물론 나도 풀이 초록색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숲의 제왕이 되어가지고 저 하찮은 당나귀와 논쟁을 벌이다니. 논쟁을 벌이려면 적어도 자네보다 훨씬 지식과 지혜가 높은 자와 해야지. 자네는 어리석은 자와 무의미하게 논쟁을 했어. 이미 호랑이다움을 잃어버렸고 소중한 시간과 기운을 낭비한 채 오히려 세상을 더 시끄럽게 만들었다네··· ” 저도 어릴 때부터 우김질을 많이 했던 사람입니다. 한번 우기면 그것이 잘못된 주장인 줄 알면서도 끝까지 우김질을 했던 기질이 있었습니다. 개척교회 때는 물론, 중형교회가 되었을 때도 스티븐 코비의 주장대로 “언제나 주도적으로만 살아야 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그 주도적 의미를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생각을 했던 면도 있었겠지만요. 이런 제가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 연합사역과 공적사역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앞에서 일을 하다 보니까 좋은 일을 하면서도 비판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공교회를 위하여 옳은 일을 하면서도 불필요한 공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마다 제 안에 있는 호랑이 본성이 발동하려고 했습니다. 게다가 코로나가 극심한 상황에 이르러서는 방역 당국과 예배 퍼센티지를 협상하는 것을 신사참배로 규정을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어떻게든지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목회를 포기하지 말라”고 하며 격려비를 지원하는 것을 두고 차마 입에 담기에도 창피스러운 프레임으로 공격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저는 제 안에 있는 호랑이의 입을 다물도록 하였습니다. 제 스스로 말을 했죠. “기왕 바보가 될 바에야 더 큰 바보가 되자. 그리고 논쟁을 하려면 너보다 훨씬 더 유능하고, 능력 있고, 지혜 있는 현자와 하자.” 어떻게 풀이 파란색이란 말입니까? 당나귀의 주장은 말도 안 되죠. 풀은 당연히 초록색이지요. 그러나 호랑이는 호랑이답게 놀아야 했습니다. 당나귀와 논쟁을 하는 그 순간부터 호랑이는 호랑이의 자존심과 체면을 구겨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제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격을 받을 때 많은 분들이 저를 충동질 하였습니다. “소 목사님, 왜 가만히 계십니까? 허락만 해주시면 제가 나서서 대리 고발을 해드리겠습니다.” 그럴 때마다 제 안의 호랑이가 으르렁대려고 했습니다. 아니, 제가 나서서 법적조치를 하면 당연히 실형을 받게 할 수 있죠. 그러나 저는 저 다움과 한국교회 진정한 리더다움을 지키기로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저보다 훨씬 능력이 있고 지식이 넘치는 현자들을 찾아 토론하려고 했습니다. 그런 분들의 글을 읽고, 그런 분들과 만나 말씀을 듣고 때로는 토론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저만이 걸어가는 바보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마침내 제 앞에 골드오션(Gold Ocean)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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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3-02-19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2월에 연둣빛 봄을 꿈꾸다”
    올 겨울은 정말 겨울다운 겨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강추위도 있었고, 눈도 많이 내렸거든요. 난방비 폭탄만 없었으면 올 겨울은 정말 완벽하게 행복한 겨울이 될 뻔 했습니다. 정말 눈도 유난히 많이 내렸습니다. 그리고 체감온도가 영하 25도라는 경이적인 추위를 기록했습니다. 그날, 저녁에 산에 올라가니까 체감으로는 영하 25도를 훨씬 넘긴 것 같았습니다. 마스크를 벗어서 5,6초만 두면 바로 굳어버렸고 호주머니에 넣고 간 생수도 꽁꽁 얼어버릴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겨울나무에 하얀 눈이 쌓여 있는 것을 보면 앙증맞게 피어난 에델바이스를 보는 것 같았고 인동초 처럼 보였습니다. 히말라야산맥이 따로 없었습니다. 저는 그때 우리 교회 외벽에 붙어 있는 “한 겨울에도 연둣빛 봄을 꿈꾸다”라는 문구를 생각했습니다. 이 문구는 지하철 분당선에도 글판으로 걸려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보았을 것입니다. 겨울이 겨울다워서 좋지만 아무리 추운 겨울도 봄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하얀 눈을 지탱하고 있는 나뭇가지들이 추위에 고통스러워하겠지만 저의 눈에는 또 다른 꿈을 꾸고 있는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봄의 연둣빛 꿈이죠. 지금은 하얀 눈으로 덮여있지만 봄의 햇살에는 당연히 녹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홍매화, 백매화가 가장 먼저 필 것이고 뒤를 이어 진달래와 목련이 함께 피고 눈으로 덮였던 설원의 대지는 연둣빛과 연분홍 세상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더구나 봄의 따뜻한 아지랑이가 올라오고 봄비까지 내리게 되면 4월의 풀은 겨울의 황막한 대지를 뚫고 솟아나서 지평선의 푸른 소나타를 노래하게 됩니다. 특별히 바람이 부는 들판에서 흔들리는 풀은 환상적인 봄의 교향곡을 연주하는 생명의 마에스트로가 되지요. 그 역동하는 생명의 박동, 푸른 생명의 펌프질을 보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우리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경기 침체와 난방비 폭탄, 재난, 재해 등 얼마나 많은 사건, 사고와 힘겨운 일들이 많이 있습니까? 겨울의 추위는 한풀 꺾였지만 마음의 추위와 삶의 추위는 여전합니다. 그래도 아니,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는 연둣빛 꿈을 꾸어야 합니다. 그래서 푸시킨도 이렇게 노래하지 않았습니까?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중략) 슬픔의 날을 참고 견디면/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리니….” 우리 역시 아직은 겨울이지만 연둣빛 꿈을 꾸어야 합니다. 그리스 철학자 소포클레스가 말한 것처럼 “내가 헛되이 보낸 오늘 하루는 어제 죽어간 이들이 그토록 바라던 내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맞는 봄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겨울에 죽어간 이들이 그토록 간절하게 맞이하고 싶었던 봄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떻게든지 이 어려운 삶을 견뎌야 합니다. 겨울의 추위는 견뎌냈지만 이제 마음의 추위와 삶의 추위를 견뎌내고 삶의 봄을 맞이해야 합니다. 푸시킨의 말대로 슬픔의 날을 참고 견디면 즐거운 날이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절망하거나 낙심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생(生)이란 명(命)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겨울이지만, 매화가 벌써 꽃 몽우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면 연분홍 진달래와 하얀 백목련이 필 것이고 그 뒤를 이어서 개나리와 벚꽃들이 만개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듯 우리의 삶에도 반드시 봄이 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영국의 시인 셀리의 “추운 겨울이 오면 따뜻한 봄 또한 멀지 않으리”라는 시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추위가 매섭게 느껴지면 느껴질수록 우리는 연둣빛 봄의 꿈을 꾸어야 합니다. 연분홍의 꽃 몽우리를 준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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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3-02-12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가슴이 뛰기만 한다면···”
    ‘문학나무’라고 하는 아주 오래되고 권위 있는 문예지가 있습니다. 작년 말에 저에게 ‘성경 인물시리즈 5편’을 써달라고 공문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저에게 공문이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비서실에서 공문을 안 챙겨 줬든지 아니면 제가 그 공문을 못 봤던지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그래서 지지난주 금요일 날 “왜 원고를 안 보내 주냐며 빨리 시를 써서 보내달라”고 문자를 받았습니다. 급한 맘에 성경 인물시를 쓰려고 하는데 그날이 금요일 오후였습니다. 금요일 오후는 주보 글도 점검하고 철야기도 설교 준비도 해야 해서 가장 바쁜 날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한 번도 써보지 않은 성경 인물시를 쓰려니까 멘붕이 왔습니다. 사실 제가 지난번 시집 ‘너의 이름을 사랑이라 부른다’를 쓴 이후에 시에 관한 한 절필을 했습니다. 제가 여러 목회일정과 연합사역 일로 얼마나 바쁜 시간을 보냈습니까? 그리고 또 신년축복성회 준비를 해야 되고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시인에게 있어서 절필을 한다는 게 얼마나 큰 재앙인지 모릅니다. 물론 제가 여러 가지 산문이나 글은 계속 썼죠. 또 일반 서정시나 제가 자유롭게 정한 제목의 시는 얼마든지 쓸 수 있지만, 아담에서부터 하와, 가인, 아벨, 셋, 이런 식으로 인물시를 쓰려고 하니까 시상이 금방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오죽하면 토요일날 주일학교 교사 순회 기도회와 청년부 집회를 하면서 국문과생이나, 문창과 출신들은 한 문구라도 떠오르면 저에게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누구도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또 토요일날도 바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그냥 선광현 목사에게 기본적인 시의 구성을 엮도록 좀 불러줬더니 선목사님이 이런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좀 종교시 냄새가 나는데요. 일반 문예지에 게재하는 것이니 현대시로 구성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 얘기를 들으니까 더 멘붕이 왔습니다. “시인이 돼가지고 이렇게 시상이 떨어지면 어떻게 되느냐...” 그 순간 한비야의 글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가 쓴 ‘바람의 딸, 지구의 세 바퀴 반’이라는 책이 있는데, 거기 보면 케냐의 한 의사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가 운영하는 병원은 나이로비에서 정말 잘 되는 병원인데 이 의사는 1년 중 6개월만 병원을 오픈하고 6개월은 오지로 가서 의료봉사를 한다고 합니다. 그때는 대통령이 초청을 해도 대통령조차도 만나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비야가 그 의사를 만나기 위해 오지로 찾아가서 이렇게 물어봤대요. “선생님, 여기서 왜 의료봉사만 하세요? 나이로비에서 병원을 가면 더 많은 사람을 고칠 수가 있고 돈도 정말 많이 벌 수 있는데요.” 그러자 의사는 이렇게 대답을 했답니다. “사람이 어떻게 돈만 벌고 삽니까? 돈을 벌면 가슴이 뛰지를 않아요. 이곳에 와서 봉사를 해야 가슴이 뜁니다. 사람이 가슴 뛰는 일을 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문득 이 이야기가 생각이 났습니다. “좋다. 가슴만 뛰면 된다. 내 가슴이 뛰는 한, 시는 반드시 나에게 찾아온다. 정호승 시인처럼 결사적으로 시를 쓰려고 하면 반드시 시는 찾아온다.” 그리고 안도현의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라는 시도 생각이 났습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나중에 연탄재가 될망정 지금 타오르는 연탄처럼 내 가슴이 뜨거우면 반드시 시는 찾아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뜨거운 가슴으로 시를 간절히 사모하고 사모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어느 순간 시적 언어가 생각이 나고 성경 인물에 대한 시적 이미지가 떠오르게 된 것입니다. 하나가 떠오르니까 계속해서 연결이 되고 또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이라는 시를 먼저 썼습니다. “내 안에 유리거울 하나 빛났지 / 당신이 나를 흙으로 빚고 / 코에 생기를 불어 넣었을 때... / 그 거울에 비친 당신의 얼굴 / 산짐승과 날짐승들의 이름을 부르는 바람의 호명 / 태양빛도 숨죽이던 날 / 하와의 하얀 손바닥 위에서 빛나던 / 빨간 선악과의 미혹 / 금단의 열매를 깨물었을 때 / 내 안에 유리거울이 깨지고 / 깨진 유리 파편 위로 / 검은 소나기가 세차게 내렸다 / 에덴을 잃어버린 후 / 지금도 소나기가 내리면 / 슬픈 소년이 된다.” 아담을 쓰고 나니까 하와, 가인, 아벨, 셋으로 연결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월요일에 원고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편집장님과 월요일 오후에 통화를 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써서 보내셨습니까? 이건 정말 소목사님만이 쓸 수 있는 시입니다. 그리고 이런 기획을 하기를 얼마나 잘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금방 피드백을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뜨거운 가슴만 있다면 못할 것이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가슴이 뜨거운가, 안 뜨거운가의 차이입니다. 영어의 정열이라는 말이 Enthusiasm이라는 말인데, 헬라어 ‘앤 데오스’에서 나온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속으로 들어가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올 때 정열의 삶을 살고 가슴 뛰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슴이 뛰고 불타오를 때 글도 쓰고 시도 쓰고 새로운 골드오션의 세계를 열어갈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가슴입니다. 여러분의 가슴은 얼마나 뜨겁습니까? 얼마나 불태우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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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3-02-05
  • [이효상 칼럼] 2023년 새로 쓰는 ‘토끼와 거북이’이야기
    2023년 금년은 토끼의 해이다. 조선시대 고전 소설 ‘별주부전’에 토끼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토끼의 간을 먹어야 병이 낫는 용왕을 위하여 육지로 나간 별주부 곧 자라가 토끼를 용궁에 데려오는 데는 성공하지만, 토끼가 간을 빼놓고 다닌다는 말로 꾀를 부려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나 도망친다는 내용이다. 토끼의 지혜로움을 표현했다. 그런가하면 유명한 이솝 우화 속에도 ‘토끼와 거북이’가 등장한다. ‘토끼와 거북이가 경주를 하였다. 토끼는 달리다 보니 거북이가 하도 멀리 뒤떨어져 오기에 길가에서 한숨 잤다. 그 사이 거북이는 꾸준히 달려 결국 이기고 말았다.’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늘 보아왔던 동화로 토끼는 교만함의 상징으로, 거북이는 부지런함의 대명사가 되어 왔다. 공정사회는 혼자 뛰는 사회가 아니다. 잠든 토끼를 보고 그냥 지나쳐버린 거북이는 아무리 보아도 공정하지 않다. 토끼를 깨우지 않고 지나치는 거북이는 정말 인정 없다. 성경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생각난다. ‘토끼의 잠’은 교만함 때문이라고 주입식으로 가르치는 과거의 교육은 다른 한편으로 의식속에 남의 불행을 딛고 승리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 들게 하지는 않았을까. 토끼와 거북이는 처음부터 '육지의 언덕 오르기'로 승부를 겨룰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거북이가 토끼보다 먼저 언덕을 올라야 하는 게임은 그 자체만으로 불공정하다. 토끼 역시 강물을 헤엄쳐야 하는 경기였다면 거북이에게 패배를 면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경기나 재능은 누구에게나 있다. 승패에 민감하고 쉽게 결과에 승복하지 않으려는 우리 문화는 그동안 하나의 운동장에서 1등이라는 유일한 목표만을 가지고 달려온 탓도 있다. 우화에서처럼 게임 중에 잠을 자거나 잠든 상대를 그냥 놔두고 승부에만 집착한 참가자 사실 모두 패배자다. 올해는 ‘토끼와 거북이’의 이야기가 시대에 맞게 이렇게 업그레이드(upgrade) 하면 어떨까.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성공, 출세, 목표 등 개발 성장시대의 버전(version)으로 계속 주입하기보다는 새롭게 버전을 달리해야 하지 않을까. ‘거북이가 땀을 뻘뻘 흘리며 달리다 생각했다. “야! 정말 토끼는 대단하다. 이렇게 잘 달리기가 쉽냐! 내가 토끼의 능력도 모르고 달리기를 응했으니 내 판단 미스테이크( mistake)야. 이제 토끼의 재능을 달리 보아야겠다. 솔직히 내 패배를 깨끗이 인정하자.” 그런데 가다보니 토끼가 잠자고 있었다. 거북이는 혼자 생각했다. “피곤해 깊이 잠든 모양이군. 모른 척하고 지나가면 내가 이기는 게임인데.”하고 그냥 지나치려 하였다. 하지만 다음 순간 거북의 마음속에 이런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비겁한 행동이야. 성공이나 출세를 위해 남의 불행을 외면하고 그것을 발판으로 딛고 내가 이기는 것은 정당하지 못한 행동이야. 요행으로 이기는 것보다 깨끗한 패배가 더 옳아.” 그리하여 거북이는 토끼를 깨웠다. “토끼야, 넌 왜 달리기를 하다 자니? 일어나 달려야지. 넌 참 달리기를 잘하는구나.” 눈을 비비며 일어난 토끼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거북아, 넌 너무 착해. 그냥 못본척 지나쳐도 되고 그러면 너가 이기는데 왜 날 깨운 거니? 나는 말이야, 너가 달리기를 못한다는 것 알고 일부러 골려 먹으려고 달리기 시합을 하자고 한 건데 너는 나를 이기지 않고 깨우니 내가 너무 미안해. 내가 나뻣어. 내가 진 거야.” 그러자 거북이는 고개를 흔들며 “토끼야, 넌 정말 잘 달려. 내가 너의 실력을 모르고 만만하게 본거지. 내가 어리석게 생각하고 무조건 이길 줄 알았던 거지. 네가 속인 게 아니라 내가 상대의 재능을 얕보고 몰랐던 거야. 나는 너를 못 이겨. 자 달려가 우승의 트로피를 가져. 너는 정말 재능있는 선수야” 거북이는 토끼의 등을 떠밀었다. 그러나 토끼는 “아니야, 너가 이겼어. 나는 경기중 잤으니 사실 졌어. 네가 이긴 거야.” 토끼와 거북이는 서로 자기가 졌다고 하며 둘은 나란히 손잡고 결승점에 도달했다. 마침내 둘 다 공동우승으로 이겼다. 둘은 평생 좋은 친구가 되었다.’ 이렇게 새로 이야기를 바꿔쓰면 어떨까. 교육이 그렇고 문화가 그렇다. 가장 행복한 일은 우리가 생활 속에서 사람과 사람을 잇고, 사람과 지역을, 예술과 문화와 생활을 이어 아름다운 경주를 통해 함께 사는 관계의 방법을 찾고 배우고 익히는 일이다. 토끼의 잠, 남의 실수가 나의 승리가 되기를 바라는 사회는 분명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그런 승리가 결코 자랑스런 승리나 영광이 될 수 없다. 혼자 즐겁고 혼자 열심히 뛴다고 행복한 사회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회는 두사람이 다리를 묶고 뛰는 2인 3각 게임이다. 서로 함께 노력해야 얻을 수 있다. 어느 사회든, 공동체의 건강한 미래를 위해 경쟁이 아닌 함께 같이 사는 지혜를 교육하고 그런 문화, 그런 공동체를 만들어 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이 다음 세대와 환경이 바뀌어 바다나 강에서 토끼와 거북이가 경주를 하더라도 토끼가 쓰라린 패배의 경험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 인생이라는 경주에서도 마찬가지다. 육지의 산도 있지만 바다나 강물도 있다. 강물을 만나면 토끼는 거북이의 등에 의지해야만 한다. 아마 거북이가 토끼를 등에 태우고 둘이 함께 결승점으로 들어가는 장면은 얼마나 멋지고 신나는 일이지 않을까. 인류학자들의 학설에 따르면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가 현재의 인간이 된 이유를 타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에서 찾는다. 이들은 ‘적자생존’의 통념에 반기를 들며 최후의 생존자는 친화력이 좋은 다정한 자였다고 말한다. 우리의 근원이 다정함에 있는데 왜 세계는 문 빗장을 걸어 잠그고 폐쇄적 증오와 혐오, 차별로 뒤덮였을까? 이 문제에 대해 이들이 제시하는 해결책 또한 교류와 협력이 기반이 된 오픈(open)된 친화력이다. 우리는 더 많은 적을 정복했기 때문이 아니라 마음을 열고 더 많은 친구를 받아들이고 만듦으로써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공동체에서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마음의 벽을 쌓고 문턱을 높이면 혼자가 될 수 밖에 없다. 서로의 개성에 맞는 노력이 서로 뒷받침될 때 성숙한 관계가 이뤄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꼭 사랑해서 함께하는 것만이 아니라 앞으로 더 사랑하려고 함께 하는 것이다. 이제는 모두가 함께 즐기고 함께 승자가 되어야 할 세상이다. 편 가르기, 편 먹고 싸우기 그만하자. 그건 권력을 주야로 묵상하는 정치꾼들이나 할 일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다정함을 기반으로 함께 뛰는 훈련, 경주가 필요하다. 시민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상생하는 윈-윈게임(Win-Win Game)이 될 수만 있다면 겨루기는 승패를 떠나 모두에게 참된 기쁨과 새로운 기회, 희망이 될 수 있다. 토끼와 거북이가 함께하면 ‘즐겁데이(day)’다. 승패보다는 경기 자체가 우리 사회의 공동체를 건강하게 만들고 이웃을 신뢰하고 협력하게 하는 일에 얼마나 소중한가에 깊은 관심을 두고 우리 사회는 다함께 같이 승리하는 사회로 가야 하지 않을까.
    • 칼럼
    • 이효상 칼럼
    2023-02-03
  • [언론회 논평]이른바 예수상 문제가 한국교회에 또 다른 피해를 주지 않도록 해야 한다
    최근 소위 ‘세계 최대 예수상’ 문제가 불거져 나오면서, 교계 일간지에서 수차례 그 문제점에 대한 보도를 한 바 있다. 그런데 이 문제는 단순히 ‘우상 숭배’라는 신앙의 근본 문제만이 아니라, 한국교회가 이런 문제에 대하여 너무나 미온적이라는 의구심을 들게 한다. 예수상을 세우겠다는 단체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2월 3일 현재에도 ‘협력 기관’이라는 이름으로 한국 교계의 중요한 교단들과 단체들이 들어가 있다. 자그마치 90여 개에 이른다. 그것이 교단과 기관들의 동의하에 들어가게 된 것인지, 아니면 무작위로 넣은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문제의 심각성을 안다면 신속하게 교계의 조치가 있어야 한다. 밖에서 바라보는 시선으로는 이만큼 한국 교계가 협조하고 함께하는데 무슨 문제가 되느냐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고, 그렇게 되면 한국교회가 계속 피해를 입게 된다. 또 한 가지는 이 사업이 1조 단위의 막대한 자금이 들어간다고 하는데, 필연코 투자자를 끌어들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제대로 사업을 진행할 수 없는 상황인데, 선의의 피해자들만 늘어나게 될 것이다. 이 사업은 해당 지자체로부터 건축이 취소된 상태이고, 대표자의 신분과 행적에 대한 의구심이 들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한국 교계는 이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신속하게 밝힘으로 한국교회의 이미지 실추를 막아야 하고, 피해자들이 더 이상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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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2-03
  • [국독연 칼럼] 강성률 목사의 ‘끝마무리’
    “엘리사가 사자를 저에게 보내어 가로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왕하5:10). 서울 강북 경찰서는 지난달 26일 미아지구대 소속 경찰관 2명을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불구속 입건하였습니다. 해당 지구대 경찰관들은 지난해 11월 30일 서울에 한파경보가 내려졌을 당시 60대 취객을 집 문 앞까지 데려다주고 돌아갔는데, 이 취객이 약 6시간 후에 이웃 주민에 의하여 숨진 채로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경찰관이 취객을 발견하여 집 문 앞까지 데려다준 것은 잘한 일이지만, 1%의 마무리가 잘못되어 취객이 사망하였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중요한 것이 마무리입니다. 작게는 매 순간 사건 사건에서의 마무리이며, 크게는 인생의 마무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전자에 해당하는 것으로 나아만의 병을 통하여 어떻게 사건이 아름답게 마무리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나아만은 비록 한센병 환자였지만 아람 왕에게는 존귀한 자였습니다. 이 전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아람을 구원케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집에는 이스라엘에서 잡아 온 포로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 소녀의 소개로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나아만은 마침내 엘리사가 있는 곳까지 갔습니다. 나아만이 오자 엘리사는 나가보지도 않고 사자를 보내어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왕하5:10)라고 말하였습니다. 평생 대접만 받고 살아왔던 나아만은 엘리사의 이런 태도에 마음이 상했습니다. 노하여 그의 종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왕하5:11-12). 항상 ‘내 생각’이 문제입니다. 다윗은 상책을 좇아가다가 시글락에서 낭패를 맛보았고, 여로보암도 자기 생각 때문에 금송아지를 세워 대대로 악한 길의 전형이 되고 말았습니다. 만일 나아만이 상한 마음에 요단강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자기 생각대로 아마나나 바르발강으로 갔다면 틀림없이 깨끗하게 되지 못하였을 것이며 남은 삶도 이전 삶과 다를 바 없었을 것입니다. 다행히도 그에게는 충성스러운 종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말하였습니다.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일을 행하라 하였다면 행치 아니 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이 말은 “우리가 대접을 받으러 왔습니까? 씻어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였는데, 무엇이 문제입니까?”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충성스러운 종들 덕분에 나아만은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왕이 성군이 된 것은 자신 혼자만의 힘으로 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에게는 요나단이라는 친구가 있었고, 갓이나 나단 같은 훌륭한 선지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나아만에게도 성령의 전달자 역할을 했던 종이 있었던 것입니다. 온전케 되기 위해서는 좋은 동역자가 있어야 합니다. 혼자서는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주관에 치우칠 수 있습니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동역자가 있어야 치우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훌륭한 동역자는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은 항상 자신을 한 발자국 떠나 바라보게 하십니다. 엘리사의 말을 듣고 나아만은 요단강에 갔습니다. 한 번 들어갔다 나왔지만 환처는 여전하였습니다. 두 번, 세 번, 네 번…. 힘써 들어가 보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어 보였습니다. 감기 환자가 있는데 일주일치 약을 조제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틀을 먹어도 아무런 효과가 없다면 다른 병원에 가서 다른 약을 타 올 것입니다. 전혀 차도가 없는데, 일주일을 참고 약을 복용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나아만도 이런 유혹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지. 요단강에 무슨 약 기운이 있다고, 들어간다 해서 곪아 터진 환부가 사라질까?’ 하고 포기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아만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다섯, 여섯, 일곱 번째까지 들어갔다 나왔습니다. 그가 일곱 번 들어갔다 나왔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지긋지긋한 한센병 환처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온전한 순종을 원하고 계십니다. 온전한 순종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끝까지 순종함을 의미합니다. “너희 복종이 온전케 될 때 복종치 않은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고후10:6). 이와같이 좋은 마무리를 위해서는 성령과 동역을 하며, 자원하는 마음과, 끝까지 순종하는 충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 위에 사랑은 온전하게 매는 띠입니다(골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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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2-03
  • [언론회 논평]악법(惡法)은 반드시 폐지되어야 한다
    좌파 교육감들에 의하여 만들어져 그동안 10여년을 학교 현장을 옭죄었던 ‘학생인권조례’가 심판대에 놓였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학생인권조례가 만들어진 곳은 경기도로 당시 교육감이었던 김상곤 씨가 주도하여 2010년 10월에 선포하였다. 그리고 연이어 광주광역시가 2012년 1월, 서울특별시가 역시 2012년 1월, 전라북도가 2013년 7월, 충청남도가 2020년 7월, 제주특별자치도가 2021년 1월, 인천광역시가 2021년 9월에 각각 선포•시행하고 있다. 학생인권조례는 학생들의 존엄과 가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제정된 것으로 포장하지만, 실제적으로는 표현의 자유, 종교의 자유, 부모의 양육권 상실, 교사들의 학습권 침해, 교육의 중립권 상실, 동성애 우대와 보호라는 과(過)를 가져오게 되었다. 학생인권조례를 제정한 지역은 어김없이 좌파 교육감들이 있을 때 만들었는데, 교육을 하향평준화 시키는 혁신학교, 학습능력을 떨어트리는 일제고사 폐지 등에 대한 문제점도 큰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문제점을 간파하고 있다가, 지난해 8월 충청남도에서는 ‘학생인권조례 폐지안’이 충남도의회에 올라간 상태이고, 서울특별시에서도 지난해 8월 ‘주민 발의’로 6만 4,376명이 학생인권조례를 폐지해 달라는 청원을 한 바 있다. 이것을 서울시에서 검사한 결과, 주민 청구에 필요한 25,000명을 훌쩍 넘겨 요건이 갖춰졌고, 이를 서울시의회에 상정할 예정이다. 학생들의 인권도 보호되고 신장되어야 하지만, 이것이 실제적으로 학생들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성 정치’와 ‘성 혁명’을 위한 수단으로 악용된다면 이는 지양(止揚)해야 한다. 학생인권조례에 담겨진 내용들을 보면 ‘성별, 종교, 나이, 사회적 신분, 출신 지역, 출신 국가, 출신 민족, 언어, 장애, 용모, 신체조건, 임신 또는 출산, 가족 형태, 가족 상황, 인종, 경제적 지위, 피부색, 사상 및 정치적 견해, 성적지향, 성별 정체성, 병력(病歷), 징계, 성적 등을 이유로 차별하지 말라’는 것인데, 이 가운데 문제가 되는 부분이 동성애를 옹호하는 가족 형태, 가족 상황, 성적지향, 성별 정체성이 들어 있다. 또 학생들에게 마치 임신과 출산을 권하는듯한 임신 또는 출산으로 차별하지 말라는 것도 문제이며, 사상 및 정치적 견해로 차별하지 말라는 것도 결국은 국가의 정체성을 흔들 가능성이 있는 항목이다. 왜 이런 조항들로 학생들을 정치화시키려는 것인가? 우리나라에서 악법 요소가 들어간 학생인권조례를 폐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유엔교육권특별보고관, 유엔건강권특별보고관, 유엔성적지향및성별정체성독립전문가라는 곳에서 ‘학생인권조례 폐지를 우려한다’는 전갈을 보내왔다고 한다. 결국 이들이 염려하는 것도 한국의 전반적인 인권 상황이 아니라, ‘성소수자’에 대한 부분임을 알 수 있다. 이들의 주장은 유엔 총회 결의도 아니고, 유엔이 인정하는 각국의 주권을 존중하는 태도도 아닌, 그야말로 특별한 기구 일부가 한국의 실정도 제대로 모르면서 ‘내정간섭’하는 식의 훈수는 통하지 않는다. 좌파 교육감들에 의하여 자행된,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우리의 미래가 되는 학생들의 학습권과 교육의 중립성을 망치는 현장을 언제까지 두고 볼 수만은 없는 것이 아닌가? 우리나라의 ‘초중등교육법’ 제32조에서는 학생들의 품행에 관한 학칙과 운영은 개별 학교에서 규정하고, 이를 개정할 권리는 학교운영위원회에 두도록 하고 있다. 따라서 정치 성향이 뚜렷한 일선 교육감과 정치권이 학교 교육에 깊이 개입하도록 장치(裝置)된 ‘조례’로 압박하는 것은 부당하다. 지금까지 각 지자체에서 좌파 교육감과 그를 동조하는 정치권이 만든 악법으로 나타난 ‘학생인권조례’는 마땅히 폐지되어야 한다. 학생들의 미래를 생각하고, 국가 발전을 위한 건강한 교육을 저해(沮害)하는 악법들이 다시는 만들어지지 말아야 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현재 경기도에서는 ‘경기도성평등기본조례일부개정조례안’을 다루려고 하고 있다. 현재는 동성애, 트랜스젠더, 제3의 성으로 해석하고 있는 ‘성평등’ 용어를 ‘양성 평등’으로 명확히 하려는 움직임이 의회에서 일어나고 있다. 바람직한 일이다. 이처럼 ‘성평등’이라 하여, 두루뭉술하게 ‘양성평등’을 깔아뭉개려는 악한 의도는 분명한 개념으로 새롭게 정립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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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2-03
  • [국독연 칼럼]전인격적(知情意)으로 감사하는 믿음 (혹은 온전한 감사)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는 네 가지 은(恩)으로 반응하여야 합니다. 즉 지은(知恩), 감은(感恩), 사은(謝恩), 보은(謝恩)이 그것입니다. 이 네 가지 은(4恩)을 동원한 골고루 갖춘 반응이 전인격적인 감사입니다. 오늘의 본문 눅17:11~19에는 예수님께서 나병환자 10명을 고치신 사역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에 나타난 한 사마리아인의 반응(4恩)을 묵상하며 전인격적 감사에 대한 교훈을 나누고 싶습니다. 1. 지은(知恩): (15절 상) “그 중의 한 사람(사마리아인)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보았다는 것은 깨달았다 뜻입니다.(지은)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 때 감사가 저절로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배은망덕한 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호 6:3) “나는···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시 136편은 창세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곰곰히 구체적으로 회상하며 감사 찬양하는 시입니다. 우리도 받은 은혜를 우리가 누리는 것들을 곰곰히 헤아려 본다면 엄청난 은혜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게 되고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과거/현재/미래, 섭리/사랑/능력, 구원/보호/인도/공급, 등). 하나님의 최고의 은혜는 독생자를 보내신 최고의 사랑입니다. 프랑스의 한 노인이 병원에서 코로나 치료를 받은 후 계산서를 받아들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답니다. “제가 눈물을 흘리는 것은 돈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단지 24시간의 산소 공급을 받고 50만 프랑의 돈을 지불해야 하는데, 그러나 저는 하나님께서 주신 산소를 93년 동안 마시면서도 돈을 지불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제가 하나님께 얼마나 많은 빚을 졌는지요!” 2. 감은(感恩): (15절 하)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것은 고침 받은 은혜를 느끼고 큰 기쁨으로 감격해 하는 모습입니다. 이것은 고마움을 느끼는 정서적인 감은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알고도 느낌이 없는 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감사의 정서(감정)를 발달시켜야 합니다. 골 3:16은 “감사하는 마음으로(thankfulness in your hearts to God)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며(삼상 16:7), 우리가 무엇이든 전심으로(마음을 다하여) 하기를 원하십니다(시 111:1, 신 6:5, 잠 3:5) 3. 사은(謝恩): (16절) “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겉치레가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존경과 깊은 감사를 겸손한 자세와 입술로 표현하였습니다. 이것은 의지적인 감사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19절)고 선언하셨습니다. 입술의 고백이 중요합니다(롬 10:10) 감사의 표현은 우선 말(言)로 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하나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는 것이 감사 기도입니다.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말미암아 배부르게 되나니 ...”(잠18:20). 감사하는 마음을 입술로 고백할 때 우리는 영혼의 만족함을 느낍니다. 감사의 또 다른 표현은 찬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13:15). 감사의 마음을 감사 예물(제물)로 표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시 76:11, 96:8, 빌 4:18, 히 11:4). 감사가 가는 곳에 물질도 따라가게 되어있습니다. 4. 보은(謝恩): 가장 높은 수준의 의지적 감사입니다. 말과 찬양과 예물의 차원을 넘어 삶으로 은혜를 갚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의 은혜에 온전히 보답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시 116:12)라며 고민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살전 3:9)라고 자문하였습니다. 보은은 은혜를 주신 하나님의 소원(뜻, 목적)을 이루어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나 자신과 삶을 드려야 합니다(롬 12:1-2, 행 20:24). 우리는 먼저 눈에 보이는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부터 실천해야 합니다(딤전 5:4, 요일 4:20). 우리 위해 생명까지 주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전인격적(知情意)으로 감사하는 믿음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4은(四恩)의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를 축원합니다. 더가스펠미션/그복음선교회는 선교공동체(선교적 교회)로서 성경에 보여주신 ‘그 복음(The Gospel)’을 바로 알고 전파하는 사명과 “원주민 선교는 원주민 선교사로!”라는 전략으로 33년동안 20개 나라에 40명의 원주민(자국민) 선교사를 파송하였으며, 지금은 시에라리온에 3개의 미션학교(Christian Leadership College, 신학과 중심)와 미얀마에 2개의 고아원을 섬기는 사역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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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2-02
  • [언론회 논평]하나님의 종(從)이 적그리스도의 지령을 받나?
    공산주의는 철저하게 기독교를 부정하고 박해한다 최근 국가정보원이 민노총 조직국장을 맡은 간부를 비롯한 간첩단 사건을 수사하면서 목사의 직함을 가진 사람과도 연락을 취하고, 북한의 지령에 따라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주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진보 정권들이 국가를 위기로 내몰 간첩들을 일부러 수사하지 않고, 암약(暗躍)하도록 묵인한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것은 거짓 평화에 빠져서 국가의 안위를 도외시한 심각한 직무유기였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편승하여 북한의 지령을 받고 공작금을 받으면서까지 목사라는 직함을 가지고 활동한 사람이 있었다니, 그들은 복음 전파를 위해 하나님께 부름받은 ‘주님의 종’이 아니라, 기독교의 신앙을 부정하고 세계에서 가장 기독교에 대하여 박해가 극심한 적그리스도 세력인 북한 정권에게 충성한 매우 어리석은 일이었다. 진보 정권과 그를 추종하는 정치 세력들은 북한과의 종전 선언, 평화 협정, 연방제 통일, 인도적 지원, 심지어 국가 안위를 위한 최소한의 조치인 국가보안법 폐지 등 북한이 주장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 하거나, 저들의 주장을 인정하는 모습들이었다. 그리고 간첩들의 활동을 알면서도 색출(索出)하여 국가 안보를 튼튼히 하는데 등한히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종(從)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 종교의 자유를 말살하고 기독교를 적으로 보는 지독한 공산주의•전재주의, 3대 세습 독재 정권인 북한의 하수인 노릇을 했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공산주의는 결코 기독교와 어울릴 수가 없다. 공산주의는 하나님을 부정하며, 하나님의 몸된 교회를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과 유물론(唯物論)을 주장한다. 성경에 보면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고후6:15)라고 말씀한다. 공산주의 사상과 행위는 그야말로 적그리스도가 된다. 따라서 공산주의 정권을 돕는 일은 결코 하나님의 일이 아니다. 흔히 북한을 돕는 사람들이 예수님께서도 ‘원수를 사랑하라’(마5:44)고 하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원수는 사랑해야 하지만, 사탄•마귀, 적그리스도를 사랑하라고 하시지는 않았다. 또 예수님께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겠느냐’(눅10:36)는 질문을 가지고, 북한 정권을 도와야 하는 것처럼 말하는데, 북한 정권이 강도 만난 사람인가? 아니면 강도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의 이웃이 되어야 하는 것인가? 북한이 기독교계에 파고들어 간첩 세력을 세우려는 것은 기독교계를 무너트리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확실하게 공산주의를 반대하며 영적으로 맞지 않기 때문이다. 북한은 꾸준히 교회를 무너트리고, 기독교를 축소하려는 책동을 해 왔음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현재 반국가 행위를 하여 국민들로부터 지탄을 받는 목사에 대해서는 소속 교단에서 확실한 징계를 내려야 하며, 앞으로 교단들이 목회자를 안수하여 세울 때에도 적그리스도를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의 인도적 사랑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선을 그어줘야 한다. 목사는 적그리스도인 북한 당국을 돕기보다는 세계에서 20년간 기독교 탄압 1위(국제오픈도어선교회 자료)인 나라에서 심각한 인권 탄압을 겪고 있는 북한 주민을 돕기 위한 활동에 힘을 써야 하며,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길이 됨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방첩(防諜)당국은 이번 기회에 더욱 철저한 조사와 수사를 통하여, 우리들의 행복을 좀 먹는 간첩들을 일망타진할 것이며, 다시는 그런 반역적이고 국민들에 대한 배신행위가 일어나지 않도록 철두철미한 국가 안보의 준엄함과 보루(堡壘)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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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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