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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당신의 가을이 더 행복하길...”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길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십시오. 들에다 많은 바람을 넣으십시오. 많은 과실들을 익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극의 햇볕을 주시어 그들을 완성시켜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주 속에 스미게 하십시오...(하략)” 이는 릴케의 ‘가을날’이라는 시입니다. 여름이 그토록 길고 폭염의 나날들이었지만 정작 가을 문턱에 서니까 그래도 남극의 여름의 햇빛을 그리워하고 있는 시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폭염으로 얼굴을 찡그리고 어떻게든지 여름 햇빛을 피하려고 하였지만, 아직도 푸른 나뭇잎들은 여름 햇빛에 환호성을 지르고 있습니다. 햇빛이 강렬할수록 더 부지런히 광합성 작용을 하며 과일들은 단맛을 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뜨거운 햇빛이 여름의 꽃들을 피어나게 하였습니다. 지금 어디를 가든지 길가엔 과꽃, 패랭이, 초롱이 꽃들로 한창입니다. 아니, 제가 산행하는 길에는 벌써 앙증맞게 코스모스꽃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웬 시골 처녀가 분홍색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수줍은 듯 서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화려하고 흠모할 만한 미의 자태를 갖춘 모습은 아니지만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순결한 작은 몸짓으로 저에게 이렇게 말을 하는 듯 느껴졌습니다. “지난, 8월의 뜨거운 햇빛이 없었더라면 나는 이렇게 시원하게 될 수 없었노라고... 살아있는 모든 이들은 여름을 사랑해야 한다. 가을이 오면 올수록 지난 여름이 그리워질 것이라고...” 산행을 한 후 책상에 앉아 아까 전에 본 코스모스의 모습을 생각해 봅니다. 아니, 산 녘에 피어난 이름 모를 작은 꽃들의 모습을 생각해 봅니다. 초가을에 피어난 꽃들의 미소가 제 가슴속에 다가왔습니다. 그들이 말을 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주신 침묵의 모국어로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지난 여름이 폭염의 계절이었다면 지금 맞는 가을은 당신에게 정염의 계절이 되기를 바래요. 지난 여름의 폭염이 오늘의 우리들을 아름답게 피어나게 하듯이 이번에 맞는 가을은 당신에게 꼭 행복한 계절이 되기를 바래요. 가을을 행복하게 지낼 수 있어야 다시 오게 될 불볕더위도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그리고 마침내 그 불볕더위가 그리워지고 그 더위 속에서도 얼굴을 찡그리지 않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갑바도기아 대교부 중 한 사람인 닛사의 그레고리가 했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산상 보훈을 보면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했는데(마5:8), 닛사의 그레고리는 이 청결한 마음이란 에덴동산에서 창조되었을 때의 본래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마음을 회복하면 자연과 교감하게 될 뿐만 아니라 저절로 아름다운 시가 나오고 음악이 나오며 천재적 예술성을 발휘하는 영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 신학자의 말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감히 이런 글을 쓸 수가 있겠습니까? 제가 다시 산행을 한다면 이번에는 제가 꽃들에게 말을 건네고 싶습니다. “그래, 너희들도 여름을 잘 견뎌냈지. 지난 여름에 불볕더위가 있었기에 오늘의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지 않았느냐. 너희들도 가을이 오면 지난 여름을 더 그리워하게 될 거야. 그러나 짙은 가을이 온다고 아쉬워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거라. 아직은 가을이지만 여전히 폭염을 일으키는 저 태양의 불꽃처럼 너희들도 이글거리는 삶을 살거라. 우리 모두 함께 가을이 행복했으면 좋겠구나.” 정말 올 가을은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여름 햇볕으로 인해 모두에게 가을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고 좋은 소식의 열매를 따 먹는 계절이 되면 좋겠습니다. 특별히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가을이 행복한 계절이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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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3-09-10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형편에 따른 치료’
    “창세 이후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요9:32-33). 소경으로 태어나 구걸하며 지내던 사람이 예수님께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시기하던 사람들이 그 사실을 믿지 못하고 ‘예수님이 어디 계시는지’ ‘그가 어떻게 고침을 받았는지’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예수님이 어디서 왔는지’ 한두 번도 아니고 반복해서 물어왔습니다. 이에 대하여 고침받았던 사람은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 하는도다.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요9:30-33)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요9:34)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 글을 통하여 소경이었던 사람의 말은 상당히 조리 있고 설득력이 있지만, 유대인들은 다소 감정적이고 억압적이며, 전혀 말씀에도 맞지 않는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소경이었던 자가 직업의 종류가 다양하지 않았던 당시 구걸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었지만, 그의 지적 소양과 인격만큼은 다른 사람에게 무시 받을 만큼 천박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년 공생기간 많은 환자의 병을 고치셨습니다. 고침을 받는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장애인들과 불치병 환자들의 병을 고쳐 주셨지만, 세부적인 면에서는 다소 차이가 있었습니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을 마치시고 산에서 내려오시자 한센병 환자 한 사람이 절하며 말하였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그러자 즉시 깨끗해졌습니다(마8:1-4). 반면 누가복음 17장에서 등장하는 열 명의 한센병 환자에 대하여는 그들이 소리 높여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했을 때 손을 대지 아니하시고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눅17:14)고만 하셨습니다. 물론 그들도 다 나았습니다. 이 외에도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에 걸렸을 때, 그것을 직접 꾸짖으셨고(눅4:39), 손 마른 사람에게는 손을 내밀도록 하였습니다(눅6:10). 귀먹고 어눌한 자에게는 예수님의 손가락을 그의 귀에 넣고 손에 침을 뱉어 그 혀를 만진 후 “에바다”라고 하시며 고쳐주셨습니다(막7:31-35). 여러 방법 가운데 본문에 등장하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는 과정은 4복음서에 나타난 병 고치는 사역 가운데 가장 많은 과정을 거칩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진흙에 침을 뱉으시고 진흙을 이기셨습니다. 둘째, 그 진흙을 소경의 눈에 바르셨습니다. 셋째,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대로 순종한 소경은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단지 한마디 말씀만 하셔도 무슨 병에 걸렸든지 낫게 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뜻을 모두 헤아릴 수 없지만, 그것은 각 사람의 형편에 따른 치료였을 것입니다. 그 형편은 각 사람 인품의 정도와 믿음의 정도입니다. 이 소경이었던 사람이 바리새인과 같은 유대인 장로들을 상대한 것을 보면 상당히 똑똑하고 야무진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실 믿음에 있어서 야무지고 똑똑한 것은 썩 바람직한 것이 못 됩니다. 오히려 걸림돌이 될 때가 많습니다. 그가 알고 있는 지식들과 논리들이 믿음을 사용하지 못 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소경 되었던 사람도 그가 고침을 받기 전에는 얼마간의 변화 되는 과정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소경이라는 사실과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이 있음을 깨달은 후로는 겸손과 약함을 배웠을 것입니다. 그의 본성대로라면 예수님께서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를 때,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이 사람 뭐 하는 거야? 내가 앞을 못 본다고 이렇게 더러운 흙을 내 눈에 발라? 나를 무시해도 보통이 아니구먼.” 예수님께서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했을 때는 “바를 때는 언제고, 이제는 씻으라고 하는 거야? 그리고 눈을 씻기 위하여 실로암까지 갈 필요가 있어? 여기서 씻으면 되지. 참 별사람도 다 봤네.”하고 따지고 돌아섰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소경은 한 마디 대꾸하지 않고 예수님이 시키는 대로 합니다. 그만큼 그가 볼 수 없는 약점을 통하여 온유하고 겸손해진 표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이었던 사람에게 이 세 과정을 통과하게 한 후 고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쓰실 때는 이전 모습대로 쓰시지 않습니다. 새롭게 고치신 후에 쓰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질까지 바꾸는 것은 아닙니다. 모세는 모세의 기질대로, 베드로는 베드로의 기질대로 쓰셨고 바울은 바울의 기질대로 쓰셨습니다.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게 하고 십자가에 처리하신 후 성령의 열매를 바탕으로 일하게 하신 것입니다. 소경의 경우 이전에는 자신을 위하여 이론이 강하고 변론적인 사람일 수 있었지만, 믿은 후에는 하나님이 주신 기질로 예수님을 위하여 유대인들 앞에서도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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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9
  • [국독연 칼럼] 이상길 목사의 ‘기도합시다’(출 14:15-17)
    그리스도인에게는 모든 일이 기도를 통해서 계획되고,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정로로 가게 됩니다. 기도는 내 뜻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하려고 하면 어려움이 많이 생깁니다. 때로는 기도가 힘들고 귀찮을 때도 있습니다. 특히 새벽기도는 힘들 때가 많습니다. 그래도 기도해야 답이 나옵니다. 기도에 길이 있습니다. 새벽기도는 성도들만이 힘든 것이 아니라 목회자들도 힘이 듭니다. 그러다 보니 오래 전에 어느 목사님이 저에게 ‘미국교회는 새벽예배를 하지 않는데, 꼭 새벽예배를 할 필요가 있느냐’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한인교회는 새벽예배를 드리지 않습니까? 새벽예배가 힘들거나 귀찮아서 그런 말을 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청년시절에는 ‘새벽예배는 순교다. 그러므로 새벽예배는 순교정신으로 드리는 것이라며’ 독려하시던 목사님이 생각이 납니다. 하루의 시작점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기도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것입니다. 열심히 기도해야 힘도 얻고, 믿음이 새로워지고, 성장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시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도우십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출애굽하여 가나안으로 가는 중, 앞에는 홍해 뒤에는 애굽 군대가 쫓아왔습니다. 진퇴양난입니다. 그때 모세는 무엇을 했습니까? 기도했습니다. 모세는 그 어려운 상황에서 살아날 수 있는 길은 기도밖에 없다고 믿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홍해는 갈라졌습니다(출 14:15-16). 탈북여성 1호인 김영실목사님은 총살장으로 가는 길에 ‘아버지 살려주세요!’라고 간절히 기도했다고 합니다.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절규입니다.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겠습니까? 뼈가 녹는 간절함이었겠지요. 그 결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인생에 감옥과 같은 문이 가로막혀 나갈 길이 없어도, 기도하는 성도에게 문이 열려지는 역사가 일어나는 줄로 믿습니다(행 16:19-26). 에스더는 위기에 처한 자기 민족의 소식을 듣고, 사흘 동안 금식하고 기도했습니다. 간절히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담대하게 왕에게 나아갔고(에 4:16), 결국 위기에 처한 자기 민족을 구했습니다. 다윗도 여러 번의 죽을 지경에 처했으나. 그러한 위기에서 생명을 구해주시길 하나님께 기도하여,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구원하여주셨습니다.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우리에게는 좌절보다 신앙적 결단이 필요합니다. 용기를 갖고 기도할 때, 우리에게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까? 기도하십시오. 교회 성장, 교회 부흥 역시 열심히 기도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기도는 만능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고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심은 불신앙인 것입니다. 특히 영적전쟁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는 마귀가 물러가지 않습니다. 고함지른다고 물러갈 줄 압니까? 하나님의 능력으로 물리치시기를 바랍니다. 최근에 한미일 동맹관계가 강화됨으로 중국과 북한이 심한 자극을 받아 반발이 심한 상황입니다. 북한은 전술핵을 사용하여 우리나라의 주요위치를 선제공격대상으로 삼아, 연일 미사일을 쏘아 되며 불안감을 조성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가 대처해야 할 가장 우선순위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이 되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자의 편이십니다. 기도는 나를 변화시키고, 가정을 변화시키고, 사회와 국가를 변화시킵니다. 방법론에 앞서 우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기도합시다. 하나님께서 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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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인문신답 시리즈를 시작하며
    주일설교의 ‘한 말씀 시리즈’를 시작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22회를 했습니다. 물론 앞으로도 해야 할 내용도 많습니다. 그런데 너무 한 주제로 오래 하면 약간 정체되거나 고착화 될 수 있다는 예감이 들었습니다. 이런 강박 때문에 새로운 주제로 말씀을 전할 수는 없을까,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하나님 말씀은 다 진리이고 변함이 없는 말씀인데 같은 말씀이지만 새로운 주제를 가지고 새로운 언어와 옷을 입혀서 설교한다는 것은 목회자에게 큰 관심이자 일종의 강박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코로나 엔데믹 시기에 잠언을 강해 할까, 전도서를 강해 할까 고민을 하였습니다. 언젠가 잠언을 전공했던 교수님이 저에게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에게 물어봤습니다. “코로나 엔데믹 시기에 잠언서를 기반한 설교를 하면 좋겠습니까? 아니면 전도서를 기반한 설교를 하면 좋겠습니까? 제가 인문신답 시리즈를 하려고 합니다.” 그랬더니 교수님이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제가 잠언을 전공했지만 코로나 엔데믹 시기에는 전도서가 훨씬 더 나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전도서를 택하게 된 것입니다. 14세기 중엽에 페스트가 유럽을 휩쓸었습니다. 그래서 유럽 인구의 1/3이 죽었습니다. 적어도 1억 명 이상이 죽었습니다. 페스트는 우리나라 말로는 흑사병이라고 하는데, 사람이 시커멓게 변해서 죽는 병입니다. 어른뿐 아니라 아이들도 죽었습니다. 태어난 지 몇 달 안 된 아이들도 이 병에 걸리면 새까맣게 타서 죽었습니다. 그때 가톨릭에서는 무조건 성당으로 모이라고 했습니다. 그때 클레멘스 6세 교황은 “우리가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이 페스트를 물리쳐주실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사제들의 명령에 따라서 다 교회로 모였습니다. 그러나 지내놓고 보니까 성당이 흑사병의 진원지가 되고 감염의 원천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어른과 아이, 노인 할 것 없이, 그리고 심지어는 성직자들까지도 흑사병에 걸려 죽었습니다. 그러자 교회의 권위가 무너지고 성직자의 권위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이 신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교회를 희화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살아있다면 왜 저 사람들이 저렇게 죽어가도록 놔두신단 말인가?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신 까닭에 아무 죄도 없이 태어난 어린아이가 새카맣게 타서 죽는 걸 놔두고 계신단 말인가? 심지어는 기도하는 성직자까지도 페스트에 걸려 죽게 놔둔단 말인가?” 그러면서 르네상스, 곧 인문주의가 성행하게 된 것입니다. 인문주의를 하다 보니까 당연히 인문학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사람이 묻고 사람이 답하는 것입니다. 신의 존재를 부인하기 시작하고 신의 자리에 인간이 서고 인간 스스로 학문의 상아탑을 쌓기 시작하는 것이죠.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거기에 진리가 있고 행복이 있고 참 만족이 있었을까요? 아니죠. 오히려 사람이 중심이 되는 인문주의가 성행할수록 삶의 회의론자들이 생기게 되면서 실존주의 철학이 나오게 된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만 거기에서도 진정한 답이 있을 수 없지요. 답이 없으니까 인생 회의론에 빠지든지 아니면 쾌락주의로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마약, 동성애, 알코올, 성, 게임 중독 등 사람들이 다 어디에든 중독이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도 코로나를 맞았습니다. 정말 현대의학이 발달하지 않았으면 엄청난 인구가 죽었을 것입니다. 이쯤 돼서 ‘인간이 묻고 하나님이 답하다’라는 주제로 한번 설교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 주제가 딱 맞는 게 전도서였습니다. 그래서 ‘인문신답 시리즈’를 준비하게 됐습니다. 첫 설교도 이미 몇 주 전부터 준비를 했는데요, 이 설교를 준비하느라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모릅니다. 앞으로 20회 전후로 ‘인문신답 시리즈’ 설교를 할텐데요, 저는 매 주가 기대되고 매 주가 설레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들도 많은 기대와 관심을 가져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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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3
  • [언론회 논평] 광주가 평양인가? 중공영웅과 북한영웅을 기리는가?​
    우리 사회가 분별력을 상실하고, 국가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있어 매우 우려되고 있다. 이는 국가의 체제마저 허물려는 편향된 정치가들이 문제이고, 이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문제가 이를 더욱 고착화 시키고 있다. 최근 광주광역시(시장 강기정)에서는 광주 출신이라며, 중공(中共)의 영웅이며, 북한의 영웅인 정율성(본명: 정부은)을 기리는 거리를 조성하고 기념공원을 만드는데 무려 48억 원을 투입한다. 국민의 세금으로 철저한 공산주의자이며, 중공으로 귀화한 인물을 지역 출신이라 하여 이처럼 높이는 것은 대한민국 건국과 독립을 위해 싸웠던 분들에 대한 모독이며, 국민 무시이다. 정율성은 1914년 광주에서 태어났고, 1933년 중국으로 건너가 조선혁명간부학교에 들어갔고, 거기에서 공부하던 중 지린성에서 주로 활약하던 사회주의 계열의 의열단에 들어갔다. 그리고 1936년에는 중국의 좌파 청년들의 모임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그리고 1937년 옌안으로 옮겨 중국 공산당의 루쉰예술학원과 중국인민항일군사정치대학에서 학습하고, 1939년 중국 공산당의 당원이 되었으며, 공산주의 혁명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그가 작곡한 ‘팔로군행진곡’은 중국인민해방군 군가(軍歌)가 되었다. 그의 대부분의 노래는 공산주의 혁명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민족의 비극인 6.25남침 전쟁이 벌어졌을 때에도 마우쩌둥과 저우언라이가 한국전에 참전한 중국인민지원군을 돕게 하기 위하여 1950년 12월 그를 북한에 들어가게 했다. 그는 이때 ‘조선인민군행진곡’을 작곡하여, 6.25전쟁 때 북한 공산군들을 한껏 고무시키는 역할을 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는 1976년 12월 중국의 베이징에서 사망하여 중국 공산당이 배려한 바바오산의 혁명투사 묘지에 묻힌 사람이다. 그는 중공의 영웅이며, 북한의 영웅일 뿐 대한민국을 위하여 한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오히려 6.25전쟁에 중공군 일원으로 직접 참전하여 우리나라를 괴롭힌 사람이다. 그런데도 광주광역시가 막대한 시민의 세금으로 ‘정율성 유적지 역사공원 조성사업’을 하고 있는 것은 광주 시민이나 대한민국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평양이나 베이징을 위한 것이 아닌가 의아스럽다. 광주시가 내세울만한 인물이 그렇게도 없단 말인가? 광주 시민들은 공산주의자를 떠받들고 추앙하는 일을 관망만 할 것인가? 이 사업이 올해까지 진행된다고 하는데, 말이 되는가? 광주광역시는 이런 해괴한 일들을 당장 중단시켜야 하며, 이렇듯 막대한 예산을 시민들의 복지와 문화, 지역발전과 시민의식을 고취시키는 일에 사용되어야 한다. 그리고 다시는 자격 없는 사람을 분별없이, 아무나 기념하고 기리는 일들이 없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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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3-08-28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진심을 다했을 뿐입니다”
    지지난주 금요일에는 한교총 상임회의가 열렸습니다. 저는 이미 총회장도 지냈고 한교총 회장을 지냈지만 지금까지 줄곧 한국교회 연합기관 통합을 외쳐오고 활동을 해왔습니다. 제가 한교총 대표회장일 때도 연합사업을 추진해 왔지만 그때는 한기총이 결정을 미루는 바람에 최종적으로 이루지 못했었습니다. 대표회장 임기가 지난 후에도 연합기관 통합위원장 직을 맡아 세부합의서까지 도출해 냈습니다. 그런데 일부 교단과 교단장의 이견으로 인해 어그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분들의 요구사항을 다 합의 도출해서 완전히 되는 줄 알았습니다. 현재 대표회장인 이영훈 대표회장님을 비롯해서 대다수의 주요 교단장들이 내부적으로 합의를 하였기 때문에 다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일부 몇 교단장들의 이견이 표출된 것입니다. 사실 그런 이견은 옛날에 교단장들이 똑같이 주장한 것입이지요. 그래서 저는 한교총 실무자에게 한기총에서 이단자들을 어떻게 제명했거나 행정보류를 시켰는가 등을 다 드러내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잘 될 거라고, 일부러 세세한 걸 드러낼 필요가 없고 선통합 후에 해도 나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생각지도 못한 교단에서 또 생각지도 못한 주장들이 제기된 것입니다. 저는 어떤 의미에서 앞서서 연합기관 대표회장을 한 사람으로서 많은 말을 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해서 통합위원회 서기로 하여금 발표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저런 이견들이 나오게 되자 어쩔 수 없이 제가 일어나서 얘기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 저도 연합기관을 하나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 100% 있는 게 아닙니다. 저도 하고 싶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끼리만이라도 얼마나 만족하고 행복한 케슬과 같습니까? 서로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끼리 모여서 의견 다툼을 하는 건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계 기독교 역사를 보십시오. 아니, 한국 기독교 역사를 보십시오. 왜 기독교가 무너지고 망했습니까? 그건 분열과 다툼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누구보다도 반기독교 악법을 막기 위해 가장 최후의 전선에서 싸워본 경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코로나 상황 때도 정부와 맞서서 예배 조율과 협상에 나선 사람입니다. 그런데 서로 이견이 있을 때 앞서서 일하는 사람이 얼마나 곤혹스럽고 당황스러운지 아십니까? 기독교가 분열할 때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 줄 아십니까? 반기독교 정서를 갖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종교를 길들이기를 좋아하는 편일 것입니다. 저는 보수주의와 청교도 개혁신학을 공부한 사람입니다. 결코 이단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 공적교회와 공익을 위해서는 이단을 제외하고 하나로 뭉쳐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줄기차게 연합사업을 강조해 온 사람입니다.” 그러자 여기에 대해서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시기를 언제 할 것인가를 논의하였는데, 원래는 9월 총회 전에 마무리를 짓고 총회 때 보고 하려고 했지만, 통합은 하되 결의는 총회 후에 하자고 하였습니다. 지난주는 비서들이 휴가를 갔기 때문에 다른 부목사님이 운전하고 갔습니다. 오면서 하는 말이 “정말 왜 저렇게 연합에 대한 이해와 인식이 부족할까요? 정말 제 심장도 쪼여 가는데 목사님은 얼마나 답답하셨습니까?” 그래서 제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게 말이오. 그러나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닙니다. 선과 악의 문제도 아닙니다. 이것은 이해와 인식 그리고 의식의 차이일 뿐이죠. 얼마나 많은 걸 보고 얼마나 넓은 걸 보느냐에 대한 사고의 차이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선악을 넘어서, 옳고 그름을 넘어서 진심을 다했을 뿐입니다. 여기까지 온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다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나는 주님 앞에 최선을 다했고 진심을 다했음을 감사할 뿐입니다.” 사실 교계 연합기관이 분열을 안 했으면 이렇게 다시 연합을 하려고 몸부림을 칠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나 분열을 하였기 때문에 계속 또 다른 분열이 연쇄작용을 일으킨 것입니다. 저는 영화 ‘오펜하이머’가 떠올랐습니다. 주인공 오펜하이머가 가장 고민하고 우려했던 것은 자신이 만든 원자폭탄으로 인한 파멸의 연쇄작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수소폭탄 제작을 반대하고 원자력 무기 확산 방지를 위해서 노력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교계 분열의 연쇄작용을 막기 위해서는 다시 연합을 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늦은 여름밤인데도 숫매미들의 노랫소리가 무성합니다. 저 매미소리와 함께 저는 주님 앞에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한국교회 공적교회와 공적사역을 위해서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했노라고, 그리고 진심을 다 바쳤노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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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3-08-27
  • [언론회 논평] 삼보일배(三​步一拜)는 기독교의 추모 방식이 아니다
    8월 22일부터 24일까지 ‘10.29이태원참사를기억하고행동하는그리스도인’의 명목으로, ‘10.29이태원참사진상규명특별법제정촉구 및 300일추모4대종교삼보일배’를 한다는 소식이 알려진다. 지난해 10월 할로윈데이에 이태원 지역에서 사고가 난 것을 추모하며, 삼보일배(三步一拜)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이름을 올린 것을 보면, 기독교계의 진보 연합 단체, 진보 성향의 교단과 단체, 또 윤리나 개혁을 주장하는 단체, 진보 사회 선교 단체들과 진보 성향 일부 교회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태원 사고에 대하여 충분한 원인 규명이나 처리에 관한 문제라면 그에 대하여 정부나 수사당국에 요구하면 될 것이다. 비록 반기독교적이고 상업화된 문화를 따르는, 할로윈 행사에서 젊은이들이 사고를 당한 것은 지금도 가슴 아픈 일이다. 그러나 이것을 위하여 특별법을 만들고, 또 그리스도인들이 추모를 한다며 삼보일배를 하는 것은 별도의 문제이다. 이는 기독교적인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삼보일배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삼보는 불교의 불보(佛寶) 법보(法寶) 승보(僧寶)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부처와 불교 교리와 승려에게 귀의(歸依)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또 이기심과 탐욕을 버리고 속세에 더렵혀진 진심(塵心)을 버리고 부끄러운 치심(恥心)을 멸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삼보를 걷고 일배(一拜)하는 것이다. 불의의 사고로 돌아간 분들의 가족을 위로한다고 하여도 불교에 귀의하면서까지 이런 행사를 할 필요가 있는가? 이런 것을 추모한다는 것을 기화(奇貨)로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의 진리를 왜곡해서는 안 된다. 이는 종교혼합과 다원주의를 조장하는 것으로, 결코 기독교 신앙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므로 종교가 정치성을 띤 집회를 주도하여 국민들을 선동하고, 특히 기독교의 이름으로 비성경적인 방법으로 추모에 참여한다는 것은 반드시 재고(再考)되어야 한다. 다른 종교는 모르겠지만, 우리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방법으로 사회적 문제에 접근하고, 다른 종교의 수행방식을 취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성경 십계명은 제2계명에서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출20:4~5)고 하신다. 그리고 제3계명에서는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출20:7)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기독교인의 행동은 하나님의 말씀에 저촉(抵觸)되지 않아야 한다. 그래도 기독교인이 이런 모임에 삼보일배(三步一拜)로 동참한다면, 이는 기독교인의 행동이 아니라 이방인들과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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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3-08-22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보람과 아쉬움은 항상 공존한다”
    로마는 보병을 통해서 세계를 정복했다고 하지요. 그다음에 칭기즈칸은 기마병으로, 영국은 함대로, 미국은 에어포스 공군을 통해서 세계 최강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에어포스보다 더 무서운 힘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미디어’입니다. 그래서 저는 미디어 사역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요즘 미디어를 통해서 자극적이고 충동적 영상들이 얼마나 많이 배포되고 있습니까? 이런 때에 건강한 정신과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저는 교회가 공적 미디어 사역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건강한 미디어 영상 속에 인류의 보편 가치인 인간애와 인류애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기독교적인 선한 이미지도 첨가하고 싶은 선한 욕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단일 교회로서 공영방송에 십수 차례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여 방영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러시아의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을 중심으로 다큐를 만들기로 했는데 제작사를 바꿨습니다. 한마디로 다큐의 질은 훌륭하고 신선했습니다. 그런데 다큐가 끝나고 여러 문자가 왔는데 대표적으로 두 종류의 문자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대학교수님이 보내오신 문자인데요. “역사는 기억하는 사람들에 의해 발전한다는 목사님의 말씀이 가슴에 가장 크게 남습니다. 흉상과 기념비 세우기에 앞장서신 사실도 처음 알았습니다. 저는 다큐를 보면서, 한국기독교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이 무엇인지도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외람되지만, 기독교 목회자의 공적 사역은 교회와 교인들의 영적, 사회적 성장과 발전을 촉진하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목회자는 영적 지도와 가르침 못지않게, 사회적 봉사와 영향력이 매우 중요한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역사에 대한 의식을 높이고, 변화를 주도하시는 목사님의 활동은 존경스러웠습니다. 목사님이 그동안의 종교적 역량과 활동을 기반으로, 훌륭한 ‘종교적 평화주의자’로서 족적을 남겨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를 통해 종교 공동체 내에서 평화와 헌신, 사랑의 가치를 강조하는 문화를 형성하시고, 사회적 모범을 보여주시길 기대합니다. 저는 청년 시절, 제가 다니던 교회로부터 신학을 공부해서 목사 되기를 권유받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만일 그때 권유를 받아 신학을 했더라면, 지금쯤 어떤 목사가 되어 있을까 상상해 봅니다. 아마 소강석 목사님의 ‘창의성과 혁신’, ‘사회적 변화에 기여하는 공적사역’의 모습은 아마 저의 롤모델 이었을겁니다.” 이분은 우리 교회가 공공성과 사회 발전을 촉진하는 일을 한다는 걸 치하해 온 문자였습니다. 이런 면에서는 이번 다큐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 나라 사랑, 숨어 있는 역사를 재조명해 줌으로 인해 아주 만족스럽고 절대적 보람과 가치가 있었습니다. 반면에 이런 문자들이 더 많았습니다. “목사님, 10교구 이00 집사인데요, 최재형 선생 다큐를 보며 광복절에 즈음하여 너무나 의미 있는 사역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잊혀져가는 역사를 기억하고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바라보는 위인의 모습은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특히 이전 다큐와 다른 세련된 촬영과 앵글 그리고 객관적 시각으로 진행되는 스토리 전개 등이 폭넓게 접근해서 시청자의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역시 허브넷이구나, 동네 한 바퀴가 그냥 만들어지는 게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평소에 목사님이 강조하시던 양부모로부터 전수받은 최재형 선생님의 기독교 정신과 가치가 배어나지 않았다는 것이 참 아쉬웠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애국, 애민했던 선생님의 정신이 덜 드러나지 않았는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후손들의 제사 예식도 그렇고요. 그래도 목사님의 시를 통해서 충분히 세계관 전달이 되어서 감사했습니다. 그 먼 길을 돌아 돌아서 가신 보람이있었네요. 주님께서 기뻐하실 다큐로 기억되기를 기도합니다.” 저라고 왜 이런 마음이 없겠습니까? 꼬마 아이가 아버지를 따라 연해주로 가고, 그리고 집을 나가 포시에트 항구에 쓰러져 있던 그를 발견하고 양아들로 삼아 공부를 가르치고 기독교 신앙을 심어준 양부모, 세계를 항해하며 식견을 넓혀서 블라디보스토크의 거상이 되어 학교를 짓고 교회를 세운 감명 깊은 이야기, 흙수저 출신이었지만 대부호가 되고, 특별히 기독교 신앙의 정신인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신념으로 고려인들에게 페치카(벽난로)가 되어주고 독립운동을 했던 스토리로 풀어가도 정말 휴머니티 하면서도 감동적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제작자가 아니고 감독이 아니기 때문에 조금의 아쉬움은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는 성도들에게는 송구한 마음을 전합니다. 그러나 꼭 아쉬움만 남는 것은 아닙니다. 보람과 가치도 있습니다. 이런 일을 어느 목회자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어느 교회가 발상이라도 했겠습니까? 인간이 살아가고 일을 하면서 모든 것에 만족할 수는 없습니다. 또 아쉬움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보람과 아쉬움은 항상 공존하고있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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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20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4:26). 석수장이가 바위를 부술 때 큰 망치를 가지고 무조건 때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바위 사이에 난 틈을 찾습니다. 조그마한 틈이 보이면 쐐기도끼를 틈 사이에 끼우고 비로소 망치질을 합니다. 그러면 큰 바위라도 갈라지고 깨어집니다. 마귀가 신앙인들을 파멸시키기 위하여 틈을 노립니다. 마귀에게 보이는 틈이야 다 헤아릴 수 없겠지만 크게 두 가지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분노는 마귀에게 주는 틈입니다. 만일 분노가 오래 지체되면 마귀는 여지없이 그 틈을 뚫고 분을 품은 사람을 파멸로 몰아넣고 맙니다. 사울이 멸망하게 된 것도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라는 여인들의 춤추며 노래하는 소리에 격분하였기 때문입니다(삼상18:6-8). 압살롬이 스스로 죽음의 길로 간 것도 자신의 누이 다말을 강간한 이복형 암논에 대하여 오랫동안 분을 품은 결과였습니다(삼하13:32). 하나님을 경외하였던 아사왕은 그의 잘못을 책망하였던 선지자에게 노하다가 회개하지 않았으므로 죽게 되었고(대하16장), 매우 총명했던 웃시아 왕 역시 분노를 품다가 한센병이 발하여 여생을 별궁에서 홀로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대하26:16-23). 이처럼 분노는 마귀로 틈타게 하여 상대방보다 분노하는 자신이 더 해를 입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분을 품지 않을까요? 분노는 증상입니다. 허리가 쑤시고 아픈 것은 병의 원인이 아니라 증상이듯 분노 역시 증상입니다. 하지만 디스크가 돌출 되었거나 근육이 뭉쳤다면 그것은 허리 통증의 원인이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분노가 병의 증상이라면 병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지정의로 대표되는 자기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과 뜻이 가로 막히고 상처를 받을 때 분노를 발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분노를 품지 않으려면 자신의 지정의를 십자가에 처리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자신의 지정의를 무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잠3:6).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것은, 일어나는 일들마다 하나님의 허락하심임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장이 ‘쿵’ 찍혀 있음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 감람산 길로 올라갈 때, 베냐민 지파 사람 시므이가 그를 저주하였습니다.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 대신에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붙이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인고로 화를 자취하였느니라.”(삼하16:7-8). 이 말에 대하여 아비새는 격분하여 다윗이 명하기만 하면 단칼에 시므이의 목을 베어버리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삼하16:10). 이처럼 다윗은 시므이를 단순한 시므이로 보지 않고, 그를 저주하라고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사자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시므이에게 격분하지 않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긍휼히 여김을 받을 계기로 삼았습니다.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 하고”(삼하16:12). 그의 말대로 하나님께서는 시므이의 저주를 다윗에게 선으로 바꾸셔서, 다윗이 예루살렘 왕궁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은 신앙인들이 분노하지 않게하는 첩경입니다. 만일 분노하였다면 본문처럼 해가 지기 전에 화해하고 풀어버려야 합니다. 두 번째로 마귀가 신앙인들에게 노리는 틈은 그들을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마귀와 악한 자들은 강자에게는 굴욕적이며 약자에게는 한 없이 강한 특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귀에게는 두려움 없이 처음부터 강하게 나와야 합니다. 한 번은 아람왕 벤하닷이 이스라엘왕 아합에게 사자를 보내어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네 은금은 내 것이요, 네 처들과 네 자녀들의 아름다운 자도 내 것이니라.”(왕상20:3). 그러자 아합왕이 다음과 같이 응답하였습니다. “내 주 왕이여 왕의 말씀 같이 나와 나의 것은 다 왕의 것이니이다.” 아합은 이렇게 대답하면 벤하닷이 만족하게 여겨 거기서 멈출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자 벤하닷은 한 층 더 강하게 나옵니다. “내일 이맘 때에 내가 내 신복을 네게 보내리니 저희가 네 집과 네 신복의 집을 수탐하여 무릇 네 눈이 기뻐하는 것을 그 손으로 잡아 가져가리라.”(왕상20:1-6). 처음에는 신복의 집이 포함되지 않았지만, 두 번째 사자를 보냈을 때는 신복까지 포함되어 모두 가져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아합이 처음부터 약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탄의 공격은 받아주면 받아줄수록 더 큰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니 처음에 딱 거절해야 합니다. 술이나 담배 도박 마약 등은 사탄의 사자들인데 처음에 거절해야지 조금씩 양보하면 마침내 그들이 사람을 삼키고 맙니다. 처음에 항거해야 합니다. 때가 늦으면 이기기 힘듭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도 처음에 과감하게 끊어버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혼미하게 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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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19
  • [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교육 3권 몰각(沒覺)의 의미’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는 조선의 근간이었다. 그것에 대한 현대적 평가는 당시를 기준으로는 의미없는 일이다. 분명한 것은 지금까지 우리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적어도 조선 사회를 굳건히 세웠고, 조선을 지탱시킨 사회적 내공의 근저가 이 것이다. 조선의 패망은 관리의 무능과 부패 그리고 유교적 질서의 허례허식과 파당정치가 가져온 필연적 귀결이었지만, 그런 나라가 그나마 5백년을 지탱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군사부일체의 사회적 동의와 실천이었다. 그런데 비단 조선사회가 아니더라도 한 나라의 교육을 지탱하는 교사와 부모와 사회적 권위는 절대적이고, 질서와 윤리적 가치를 고양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이것을 필자는 교사의 훈육권(敎師勸), 부모의 양육권(父母權), 사회적 계도권(啓導權)이라고 정의한다. 교사들이 가르치고 훈육할 권리(敎師勸), 부모들이 자녀들을 바르게 양육할 권리(父母權), 임금에 준하는 사회적 질서 유지를 위한 권위(啓導權)가 제대로 보장된 나라는 언제나 강성하고 미래 전망이 밝은 나라였다. 이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동일하다. 반면 이것이 무너진 나라는 다른 곳에서 생긴 허점을 견딜만한 내공을 갖추지 못해 결국 망국 지경에 이르고야 만다. 가슴 아프지만 지금 우리의 교육 현장은 이 세 가지가 모두가 누군가 의도된 과정을 거쳐 무너져 버렸다. 아무리 경제가 성장하고 강대한 군사력을 가져도 이를 다루고 사용할 미래 인재가 무너지고 망가지면 그 경제와 군사력이 오히려 자신을 해하는 흉기가 될 수도 있다. 이는 얼마 전 유명을 달리한 새내기 교사의 슬픈 사연을 되뇌고자 함이 아니다. 그의 죽음은 우리 교육의 죽음이고 미래의 죽음이다. 이런 참담한 현실에서 무너져 내린 교사권과 부모권과 계도권을 되살려내지 못하면 더이상 우리 미래를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무례, 무지한 일이다. 소위 이해찬 세대라 불리는 교육의 결과는 철저한 교사권의 붕괴였다. 권위주의를 버리라는 노무현을 오해한 이들이 소중한 권위를 버려버렸다. 이 흐름에서 어른됨, 선배됨이 무시되고, 부모의 권위와 교육권은 무너지고 말았다. 서구의 교육제도를 취사선택하여 나라의 근간을 훼손하며 우리의 교육을 무너뜨리는 데 악용하였다. 서구 교육의 내면은 철저한 교권중심주의이다. 겉으로 보면 학생들의 학습권이 철저히 보장되고, 젊은이들이 마구잡이처럼 자유분방하여 버릇없어 보이지만, 그 배후에는 그것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교권이 버티고 있다. 즉 학습권은 사회적 합의가 있는 권위있는 교권에 기초해 있다는 말이다. 늦었지만 지난 18일 이주호 장관은 정부서울청사에서 진행한 ‘교권 회복·보호를 위한 시·도교육감 간담회’에서 “정당한 교육 활동과 학습권이 보장되고 교권과 학생 인권이 균형 잡히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또 교육부의 교권 회복·보호 종합 방안 시안에서 완성도 높고 실효성 있는 방안을 만들겠다고도 했다. 이 말을 믿고 싶고, 진심으로 기대한다. 모두가 힘을 모아 악성 민원을 근절하고 교원과 학부모의 건전한 소통을 위한 방안을 찾아 사회적 합의를 거쳐 제도적으로 정착시켜야 한다. 기회는 반복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일부 세력들에게 속아 우롱당하여 스스로 내버린 교사들의 교권(敎師勸)과 부모의 양육권(父母權)과 사회적 질서 계도권(啓導權)을 되찾아 바로 세워야만 한다. 이 교육 삼권의 몰각(沒覺)에 교회와 목회자들이 책임이 크다. 우리 교육에서 기독교를 빼고, 가정 훈육에서 교회교육을 빼고 이야기할 것이 얼마나 있는가? 온전한 질서와 가치는 올바른 윤리적 실천에서 온다고 가르쳤다. 이것을 몰각(沒覺)한 채 교회 성장에만 매달려 방관하고 무책임했다는 채무의식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머뭇거리지 말고 현장으로 가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찾자. 이것이 망가진 교육의 피해자 우리 자녀들에 대한 진정한 회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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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성택시사프리즘
    2023-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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