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성택 교수(강서대학교 전 총장)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는 조선의 근간이었다. 그것에 대한 현대적 평가는 당시를 기준으로는 의미없는 일이다. 분명한 것은 지금까지 우리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적어도 조선 사회를 굳건히 세웠고, 조선을 지탱시킨 사회적 내공의 근저가 이 것이다. 조선의 패망은 관리의 무능과 부패 그리고 유교적 질서의 허례허식과 파당정치가 가져온 필연적 귀결이었지만, 그런 나라가 그나마 5백년을 지탱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군사부일체의 사회적 동의와 실천이었다.
그런데 비단 조선사회가 아니더라도 한 나라의 교육을 지탱하는 교사와 부모와 사회적 권위는 절대적이고, 질서와 윤리적 가치를 고양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이것을 필자는 교사의 훈육권(敎師勸), 부모의 양육권(父母權), 사회적 계도권(啓導權)이라고 정의한다. 교사들이 가르치고 훈육할 권리(敎師勸), 부모들이 자녀들을 바르게 양육할 권리(父母權), 임금에 준하는 사회적 질서 유지를 위한 권위(啓導權)가 제대로 보장된 나라는 언제나 강성하고 미래 전망이 밝은 나라였다. 이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동일하다. 반면 이것이 무너진 나라는 다른 곳에서 생긴 허점을 견딜만한 내공을 갖추지 못해 결국 망국 지경에 이르고야 만다.
가슴 아프지만 지금 우리의 교육 현장은 이 세 가지가 모두가 누군가 의도된 과정을 거쳐 무너져 버렸다. 아무리 경제가 성장하고 강대한 군사력을 가져도 이를 다루고 사용할 미래 인재가 무너지고 망가지면 그 경제와 군사력이 오히려 자신을 해하는 흉기가 될 수도 있다. 이는 얼마 전 유명을 달리한 새내기 교사의 슬픈 사연을 되뇌고자 함이 아니다. 그의 죽음은 우리 교육의 죽음이고 미래의 죽음이다. 이런 참담한 현실에서 무너져 내린 교사권과 부모권과 계도권을 되살려내지 못하면 더이상 우리 미래를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무례, 무지한 일이다.
소위 이해찬 세대라 불리는 교육의 결과는 철저한 교사권의 붕괴였다. 권위주의를 버리라는 노무현을 오해한 이들이 소중한 권위를 버려버렸다. 이 흐름에서 어른됨, 선배됨이 무시되고, 부모의 권위와 교육권은 무너지고 말았다. 서구의 교육제도를 취사선택하여 나라의 근간을 훼손하며 우리의 교육을 무너뜨리는 데 악용하였다. 서구 교육의 내면은 철저한 교권중심주의이다. 겉으로 보면 학생들의 학습권이 철저히 보장되고, 젊은이들이 마구잡이처럼 자유분방하여 버릇없어 보이지만, 그 배후에는 그것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교권이 버티고 있다. 즉 학습권은 사회적 합의가 있는 권위있는 교권에 기초해 있다는 말이다.
늦었지만 지난 18일 이주호 장관은 정부서울청사에서 진행한 ‘교권 회복·보호를 위한 시·도교육감 간담회’에서 “정당한 교육 활동과 학습권이 보장되고 교권과 학생 인권이 균형 잡히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또 교육부의 교권 회복·보호 종합 방안 시안에서 완성도 높고 실효성 있는 방안을 만들겠다고도 했다. 이 말을 믿고 싶고, 진심으로 기대한다. 모두가 힘을 모아 악성 민원을 근절하고 교원과 학부모의 건전한 소통을 위한 방안을 찾아 사회적 합의를 거쳐 제도적으로 정착시켜야 한다. 기회는 반복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일부 세력들에게 속아 우롱당하여 스스로 내버린 교사들의 교권(敎師勸)과 부모의 양육권(父母權)과 사회적 질서 계도권(啓導權)을 되찾아 바로 세워야만 한다.
이 교육 삼권의 몰각(沒覺)에 교회와 목회자들이 책임이 크다. 우리 교육에서 기독교를 빼고, 가정 훈육에서 교회교육을 빼고 이야기할 것이 얼마나 있는가? 온전한 질서와 가치는 올바른 윤리적 실천에서 온다고 가르쳤다. 이것을 몰각(沒覺)한 채 교회 성장에만 매달려 방관하고 무책임했다는 채무의식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머뭇거리지 말고 현장으로 가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찾자. 이것이 망가진 교육의 피해자 우리 자녀들에 대한 진정한 회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