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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윤리도 범죄도 묻어버린 제22대  총선의 슬픔’
    오는 29일 윤석렬 대통령이 이재명 민주당 대표를 만난다. 그 전에는 쳐다보지도 않던 사람을 압승으로 끝난 총선 결과 앞에서 먼저 손을 내밀었다. 일각에서는 이것이 협치라고 추켜세우지만, 그 말이 틀린 것도 아니지만, 왜 이렇게 그 말에 쉽게 동의하지 못할까? 만일 총선 결과가 반대였다면 이런 일들이 일어났을까? 총선이 끝난 다음 날 만난 친구는 이민 가버리겠다고 펄펄 뛰었고, 다른 친구는 저녁에 모든 친구들을 불러 한바탕 거하게 쏘겠다고 기세를 올렸다. 왜 우리의 선거가 이 모양이 되어버렸을까? 이겼으니 한턱 내겠다는 것은 탓할 수는 없지만, 이민 가버리겠다는 패배자의 마음은 어찌 보듬을 수 있을 것인가? 여당의 선거 패배의 원인이 한동훈 비대위원장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막판에 윤 대통령의 불통과 권위적 처신에 있다고 의견이 모아지는 듯하다. 이 또한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두 사람으로 대변되는 여당 내의 깊은 속내는 무엇인지를 묻는 사람은 없다. 사회의 책임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야당의 압승일지라도 범죄자들, 막말에 괴변론자들, 참담한 역사관에 삐뚤어진 인물이해를 가진 이들 등등 그 구성원들의 윤리의식, 역사의식, 준법의식에는 결코 후한 점수를 주지 못한다. 한갓 여당과 대통령의 약점에 기대서 얻을 결과를 두고 저토록 방자하다면, 정권에 내린 철퇴를 자신들의 철퇴로 쓰면 안된다. 반면 참담하게 패배한 여당의 처절한 자기반성과 혁신의 의지는 아무리 찾아도 없다. 누구보다 온 몸을 던져 헌신하고 결과에 깨끗이 승복하고 책임지고 퇴진한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을 몰아붙이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 패배의 직접적 책임이 있는 윤 대통령과 그 측근들이 2선 퇴진은 고사하고 당권 장악 시도 역시 어불성설이다. 지금은 다 모여서 어떻게 하면 다시 국민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지 밤을 새워 토론하고 다투어서 국민 앞에 혁신의 자기 변혁 의지를 보여 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국민이라는 높은 상전이 동료 시민이 되어 줄 것이다. 선거로 모든 것이 끝나고, 자신의 허물이 덮였다고 생각하면 이는 진실로 오만한 야당이다. 우리는 그들이 어떤 전과를 가지고 있으며, 그들 앞에 어떤 법적 판단이 기다리고 있는지, 그들이 과거 뭐라고 말하고, 어떻게 글을 썼는지를 알고 있다. 그 엄청난 허물에도 여론의 바람으로 인해 금뱃지를 달았기에 면책될 수 없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 너무 잘 알 것이다. 국민은 그들의 동료시민이 되기에는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필자는 지금까지 수 많은 선거를 했고, 그 때마다 결과는 꼭 필자가 원하는 대로 된 것은 아니지만, 결과에 대한 기분이 이토록 참담한 것은 처음이다. 야당 압승에 대한 불쾌감이 아니라 ‘어떻게 저런 사람을 나의 대표로 인정할 수 있는가?’에서부터, ‘정말 아까운 사람이 왜 나의 대표가 되지 못하는가?’에 대한 안타까움이 결과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부당한 결과라고 호소하는 마음 속에 반발이 있는 것이다. 그래도 하나님의 뜻이라는 큰 흐름에 순종하지만, 이스라엘이 범죄하였을 때 이방을 회초리로 사용하였던 것을 기억하며, 필자의 마음속에서 거부하고 있는 당선자들이 우리들의 회초리가 되었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그 매를 맞을 것이고, 아프더라도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따르지 못한 허물에 대한 책임을 다할 것이다. 그러나 명심할 것은 하나님이 사용하신 회초리는 그 용도가 다하면 흔적도 없이 멸하신다는 것이다. 교회가 이번 선거를 하나님의 뜻이라는 큰 틀에서 수용하고, 하루 속에 하나님의 뜻을 바로 세워, 무릎으로 회개하고, 손으로 섬겨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한다면 굳이 우리 손으로 내치지 않아도 급수에 못 미치는 당선자들의 이름은 영원히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질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처절하게 그리고 빨리 움직이느냐에 따라 그 시기는 더 빨리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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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성택시사프리즘
    2024-04-27
  • [언론회 논평] 기독의원들, 이때를 위함이 아닌가!
    22대 총선이 끝나고 당선된 의원들의 종교가 드러나고 있다. 언론 보도에 의하면, 기독교 신앙을 가진 의원은 총 87명(전체의 29%)이라고 한다. 제20대에서 102명, 제21대에서 125명이 기독 의원이었는데, 이에 비하면 이번에는 많이 줄어든 셈이다. 각 정당별로 보면(비례대표 포함) 더불어민주당 57명, 국민의 힘 29명, 조국혁신당 1명이다. 선거구 지역별로는 서울이 16명, 경기 23명, 인천 7명, 충청권 7명, 강원 4명, 영남권 15명, 호남권 9명과 비례대표 6명이다. 그런데 의외의 인물들도 보인다. 저 사람도 기독 의원인가? 할 정도의 사람들이다. 부정과 비리와 부패에 연루되어 현재 재판 중인 사람들도 있고, 평소에 막말과 거친 말의 주인공들도 포함되어 있다. 또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선거사범이 1,681명에 이르고 있는데,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금뺏지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 현재 기독의원 가운데 더불어민주당 소속이 압도적으로 많은데, 과연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기독 의원으로 기독교의 가치를 실현하는데 큰 역할을 하거나 도움이 된다는 보장은 없다. 제21대 국회에서도 기독교의 가치에 반하는 소위 악법들을 대부분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발의하였기 때문이다. 동성애를 옹호하고 이를 반대할 경우 역차별을 시킬 강력한 법안인 포괄적차별금지법을 비롯하여, 양성평등기본법과 군대 내 동성애 처벌을 중단시키려는 군형법 개정안을 발의하였다. 또 가족해체법으로 분류되는 생활동반자법, 건강가정기본법, 모자보건법, 민법 개정안 등이다. 이처럼 반기독교적인 성혁명 악법, 가족해체법 악법, 생명파괴 악법, 표현의 자유 억제 악법, 친권침해 악법, 일명 교회 폐쇄법 등을 발의하거나 통과시키는데 더불어민주당이 절대적으로 나선 것을 알아야 한다(더불어민주당이 악법 발의 98% 차지) 또 제22대 국회를 맞이하면서 거대 야당의 힘으로 입법독주와 입법독재를 하려 한다는 보도들도 심심치 않게 나돌고 있다. 그렇게 되면 기독교로부터 확실하게 외면을 받게 될 것이다. 제22대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이 막강한 의회 권력을 발휘할 것으로 본다면, 더불어민주당 전체 의원 구성원으로 따져도 기독 의원이 약 33%가 되는데, 과연 이들이 기독의원의 면모를 보일지, 아니면 자당(自黨)에 힘의 논리에만 치중하게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그러나 정말 국민들의 대표이며, 국가의 중요한 축인 입법부의 역할을 맡은 의원들이라면, 최소한 기독교의 가치관을 지키는데 앞장서는 것이 맞다고 본다. 기독교도 거대 야당의 출현으로 상당히 위협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매우 위기 가운데 놓여 있다. 경제와 민생의 내치(內治)는 물론이고, 외교, 안보, 국방 등 다양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그런데 이것을 외면하고 당리당략에만 몰두한다면 이는 비극이 되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세우신 뜻도 부정하는 것이 될 것이다. 기독의원들이 무늬만 신앙인이면 안 된다. 성경에 보면, 요셉은 이집트의 총리로 지내면서 바로(왕)의 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창41:36~45) 또 다니엘은 바벨론왕의 고관으로 왕의 바른 조언자가 되었다(단4:27) 인간의 모든 제도는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한 것이다(벧전2:13)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는 주님께 있다(마28:18) 따라서 기독의원들은 자신들을 이 시대에 쓰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부르셨음을 항상 인식하고, 주님의 뜻을 이루는데 앞장서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맡겨주신 만큼 찾으시는 분이시다(마25장) 이를 감당하지 못하면 그에 따른 준엄한 책망이 따를 것이다. 제22대 국회에 부름을 받은 기독의원들은 비록 당을 달리하고, 정치적 노선이 다르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녀임을 잊지 말고, 신앙과 양심에 따라 기독교의 가치를 지키는데 앞장 서고, 서로 간에 협치와 상생을 하는데 주력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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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4-04-23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신앙에서 많고 적음’
    “대답하되 두려워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왕하6:16). 본문에서는 엘리사와 아람군대와의 관계를 말합니다. 아람 왕은 신하들을 모아 놓고 이스라엘을 칠 궁리를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아무 곳에 진을 치자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아람 왕의 군대가 진을 칠 곳에 이스라엘 군사들이 진을 치고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지 않겠습니까? 이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자 아람 왕은 그의 신하들을 의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 가운데 이스라엘 왕과 내통하는 자들이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신하 중에 한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우리 주 왕이여 아니로소이다. 오직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가 왕이 침실에서 하신 말씀이라도 이스라엘 왕에게 고하나이다.”(왕하6:12). 그러자 아람 왕은 도단에 있는 엘리사를 잡아오도록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냈습니다. 그들이 드디어 엘리사가 있는 곳으로 왔을 때, 엘리사의 사환은 많은 군사들이 그들을 포위한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 그리고 다음과 같이 기도하였습니다.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그러자 하나님께서 사환의 눈을 열어 보게 하셨습니다. 그는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에워싼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왕하6:14-18). 엘리사의 사환이 본 것과, 엘리사가 본 것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엘리사의 사환은 육신의 눈으로 표면적인 숫자를 본 것입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영안으로 보이지 않는 숫자를 본 것입니다. 우리도 일어나는 모든 환경에서 상대의 보이는 숫자에 눌려 당황할 때가 있습니다. 꼭 숫자가 아니더라도, 상대의 기세에 눌려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많고 적음은 보이는 숫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유무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그러한 예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사사시대에 이스라엘이 미디안의 압제를 받을 때가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기드온이 택함을 받았습니다. 당시 미디안과 연합했던 아말렉과 동방의 모든 사람의 숫자는 메뚜기떼처럼 많았고, 약대 또한 무수하다고 했습니다(삿7:12). 반면에 이스라엘의 군대는 간추리고 간추려서 300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적은 숫자만 가지도록 한 이유에 대하여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좇은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삿7:2). 하나님께서 이기게 해주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긍하여 자신들의 능력으로 이겼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300명은 1개 대대 병력도 되지 않은 숫자입니다. 그 숫자로 메뚜기떼와 해변의 모래처럼 많은 미디안 사람들과 싸우는 것은 중과부적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신 이스라엘 군대는 달랐습니다. 300명의 군인만으로도 미디안의 두 왕은 물론, 미디안과 연합한 대군 12만명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기게 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수가 있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만 하면 적은 수 가지고 많은 수를 이길 수 있습니다. 개인이든 단체든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 편에 서 있느냐, 하나님 편에 서 있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수가 많건 적건 상관 없이 하나님 편에 서 있다면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지만, 사람 편에 서 있다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 스스로 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니 신앙인들은 수가 많다고 해서 자고할 필요도 없고, 적다고 해서 오랫동안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편에 서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일들을 이루실 것입니다. 반면에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단체가 하나님 반대 편에 서 있다면 비록 그 단체에 속한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고 해도 모래 이에 쌓은 누각일 뿐입니다. 이처럼 승리는 많고 적음에 있지 않고 우리가 어느 편에 서 있느냐에 있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녀 포함 무리 1만 여명 이상을 먹이실 수 있는 것처럼 적은 인원으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만 하면 항상 승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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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3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꽃잎을 물고 나는 새”
    “새 한 마리가 지는 꽃잎을 물고 날아 간다 / 입에 문 꽃잎이 떨어질까 봐 / 소리를 지르지도 못하고 / 눈물을 흘리며 날아 간다 / 새 둥지로 날아가나 살펴보니 / 둥지를 지나 머나먼 세계로 간다 / 저 아득한 그리움의 세계로 / 구겨진 사랑의 편지 한 장 물고 날아간다.” 이 시는 지난주 목요일 오후에 갑자기 생각나서 쓴 짧은 시 구절인데요. 지난 주는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2박 3일이라도 어디라도 가서 좀 푹 쉬어보려고 하였습니다. 제주도는 왔다 갔다 하기에 너무 멀고 곤지암에 있는 기도원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기도원에서 일하고 있던 김요한 안수집사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목사님, 기도원에 오시면 안 됩니다. 정화조가 고장이 나서 수리한 다음에 오셔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원도 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부고 문자를 받았습니다. 다른 분이 아니라 장희철 장로님의 어머니, 이계순 권사님의 소천 소식이었습니다. 그분은 그냥 어느 한 장로님의 어머니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교회 동탄 지성전을 확장 이전할 때 큰 헌신을 하신 분이시죠. 원래는 장희철 장로님이 어머니에게 기도실을 마련해 드린다고 했는데 그 돈으로 동탄 지성전 확장 이전에 헌신하면 안 되겠느냐는 정 권사님의 영적 권면을 받아들이시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는 이계순 권사님의 동의와 허락이 필요하였는데, 이계순 권사님께서 흔쾌히 허락해 주셨지요. 그래서 저는 어디 가는 것을 포기하고 월요일 저녁에 위로예배를 드려주었고, 화요일에는 입관예배, 수요일 오전에는 발인예배를 집례 하였습니다. 어느 부교역자가 그러더라고요. “목사님은 어디 가서 쉴 팔자가 못 되시나 보네요. 그저 사역의 축복을 너무 많이 받으셨나 봐요.” 화요일 저녁이나 수요일 저녁에도 산행을 하려고 했는데 미세먼지가 너무 많다고 해서 주변 사람들이 만류를 했습니다. 그래서 목요일 오전에는 다건연세내과에 가서 정기검진을 하고 마침내 목요일 오후 늦게 산행을 하였습니다. 산행하는 길에 보니까 먼저 핀 철쭉은 벌써 지려고 하더라고요. 저는 그 지는 꽃잎을 바라보면서 갑자기 한 마리 새가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냥 새가 아니라 시들어 떨어진 꽃잎을 물고 멀리 날아가는 새 한 마리가 되었습니다. 엘리야가 그랬지 않습니까? 그는 하늘을 향하여 외치면 비가 내리고, 불이 떨어지고, 폭풍이 불게 했던 선지자였죠. 사르밧 과부의 남루한 등잔 불빛 아래서 솔솔 쏟아지는 밀가루와 마르지 않는 기름이 부어지게 하고 죽은 아들을 다시 살려 주었던 능력의 종이 아니었습니까? 더구나 그는 갈멜산에서 홀로 맞서 싸워 850명의 이방 선지자들을 불로 사르고 검으로 찢었던 사자의 이빨과 독수리의 날개를 가진 야수의 전설을 가졌던 하나님의 사자였죠. 그러나 이세벨의 말 한마디에 간이 쪼그라져 저 브엘세바 남단 끝으로 도망가 로뎀나무 아래에서 모든 걸 끝내고 싶었던 사람이기도 하였죠. 그러나 그 로뎀나무 아래에서 천사가 가져다 준 숯불에 구운 떡과 물 한 병을 들고 다시 호렙산 굴까지 찾아가서 다시 사명자의 길을 걸어갔던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저도 갑자기 엘리야가 달려갔던 저 그리운 브엘세바 남단에 있는 로뎀나무 그늘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때 엘리야는 로뎀나무 그늘로 얼마나 감사했을까요? 그런데 그런 로뎀나무 그늘에 주님이 찾아오셔서 그의 심신을 어루만져주셨고, 그분이 가져다주신 구운 떡과 물 한 병으로 힘을 얻고 다시 호렙산으로 걸어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어디론가 떠나려고 해도 갈 수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수요일 오전예배 후에는 칼빈대학교와 전도사 인턴십 MOU 체결이 있었거든요. 목요일 오후 늦게 서야 산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가까운 교회 뒷산이었지만 제 마음은 한 마리 새가 되어, 지는 꽃을 입에 물고 멀리멀리 날고 있었습니다. 저 곤지암을 지나 제주도를 넘어서 엘리야가 누웠던 네게브 광야의 로뎀나무까지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구겨진 사랑의 편지, 희망의 편지 한 장 물고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주님께서 제 안에 로뎀나무 한 그루를 심어주셨고, 주님께서 오셔서 저를 어루만지고 구운 떡과 생수 한 병을 주셨습니다. 봄이 꿈처럼 깊어 가는 저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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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4-04-21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깨어있는 신앙’(롬 13:11-14)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재림의 때를 인식하고 영적으로 깨어 각성해야 하는데, 오히려 종말론적 긴박감이 점점 더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시대를 알지 못하고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며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영적으로 잠자는 상태인 것입니다. 또한 이 세상에 마음을 빼앗겨 영적인 일을 등한히 하고, 영적인 일을 잊어버리며 살아가는 삶 역시 영적으로 잠자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잠을 잘 때 사람은 외부의 변화에 무감각합니다. 오롯이 자신의 내적 무의식의 세계 속에만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에게 위험을 주는 것이 환경이나 고난이나 핍박이나 굶주림이 아닙니다. 육신의 연약함을 틈타서 침입해 오는 타락이나, 죄악, 영적 저하를 가져다주는 것들이 대단히 위험한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들은 어두움 속으로 심령이 침체 되게 하여 영적인 ‘잠을 잔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런 잠에서 깨어나야 하고,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여야 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 4:7). 분명 이 시기는 자다가 깰 때입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11절). 우리 모두가 깨어 일어나 사명에 충성하며 주님 맞을 준비를 하십시다. 지금은 깨어 일어날 뿐 아니라 어두움의 일을 벗을 때입니다.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12절하). 어두움의 일이 무엇입니까? 바로 불신앙입니다. 불순종입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더럽고 추한 일입니다. 죄는 어두움을 이용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자”(13절상)고 말한 것입니다. 빛의 갑옷은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옷을 입는다는 것은 자신은 죽고 예수님으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안에 내가 아닌 예수님으로 가득 채우는 것을 의미입니다. 외모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과 생각과 사상과 가치관과 습관뿐 아니라 심지어 무의식의 세계까지 온통 예수님으로 가득 채우라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일을 청산하고 빛 되신 주님을 본받아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행하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낮에 속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단정하게 행해야 합니다. 낮에 속한 자가 밤에 속한 자처럼 죄의 삶을 살면 안 됩니다(살전 5:7-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그러면 빛의 자녀들이 피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방탕입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13절). 우리는 어두움의 일을 벗어야 합니다. 육신의 정욕을 이겨야 합니다. 깨끗하고 거룩한 모습으로 성별되게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한 행위는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않습니다. 과도한 집착과 욕망을 가지는 것은 멸망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8:12-13). 우리는 항상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에서 거룩한 삶의 모범을 보여야 하겠습니다. 깨어나 후회 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과 봉사와 선한 목적을 위해서만 열심히 일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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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6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내 마음 흙이 되어”
    제가 옛날에 쓴 ‘내 마음 강물 되어’라는 시가 있습니다. “내 마음 강물 되어 흐르고 있습니다 / 멈추라 하여도 흘러야만 합니다 / 보냄을 아쉬워 않고 돌아옴을 반기지 않고 / 다시 옴을 그리워하지도 않습니다 / 멈추지 않고 흐르는 것만이 행복이고 기쁨인 것을 흐르고 또 흐릅니다 / 미움도 원망도 슬픔도 고통도 고일 겨를 없어서 / 흐르고 흘러가고 있습니다 멈추고 붙잡는 것이 속절없는 것을 / 흘러야 행복인 줄 알기에 끊임없이 흘러갑니다” 까마득한 신학생 시절, 하늘처럼 우러러 존경했던 분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회상하며 쓴 시입니다. 이 시는 내 마음이 어떤 것에 미련을 두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고 그냥 유유하게 흘러가듯 하는 심정을 표현한 것입니다. 무슨 대단한 문학적 귀족성이 있거나, 함축된 이미지로 표현된 것이 아니고 그냥 제 마음의 서정을 그대로 그려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 갑자기 떠오르는 시가 하나 있었습니다. ‘흙’이라는 제목의 시인데요. “사랑하기 때문에 / 아무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 아무리 파고 덮고 짓눌려도 / 침묵할 뿐입니다 /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 고층 빌딩의 지하 콘크리트가 깊이 박혀져도 / 첫눈이 고이 드리워지듯 / 사뿐히 받고 또 받겠습니다 / 언젠가 당신이 내 곁으로 올 때는 / 생명의 언어로 맞이해 드리지요 / 아니, 그대 옆에 누워 있을 게요 / 하늘의 허락을 빌 뿐입니다.” 제가 잠시 사색하는 시간에 시 구절이 떠올라서 낙서하는 마음으로 문자를 쳐서 선광현 목사님께 보냈습니다. 아무런 반응이 없어서 기억도 안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총선 전날인 9일 저녁부터 이유를 모르는 불면과 투쟁을 했습니다. 저나 제 아들이 국회의원 후보자가 된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불면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수요 저녁예배 전 출구조사를 보고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대략 예상한 바였지만, 맨 먼저 한국교회와 대한민국의 미래가 떠올랐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개표방송을 보다가 나라와 민족, 한국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면서 늦게야 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새벽에 일어나서 보니까 출구조사와는 조금은 달랐지만 그래도 근사치로 나온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 더 차별금지법이나 반기독교 악법들이 쓰나미처럼 밀려올지도 모릅니다. 이런 때에 한국교회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여야를 모두 아우르며 소통하고 설득도 해야 되는데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저는 코로나 때 총회장과 한교총 대표회장으로 섬기면서 예배 지킴과 국민 보건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고 했습니다. 또한, 교회 생태계를 지키기 위해 전면에서 노력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쪽에서는 괜히 딴지를 걸며 험담을 하고, 온갖 가짜뉴스를 생산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총회장과 한교총 대표회장 임기가 끝난 후로는 진짜 내 마음 강물이 되고, 흙이 되어 살아왔습니다. 정말 초야에 묻혀 절대 전면에 나서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도 교인들에게 오해받지 않기 위하여 정말 두문불출했습니다. 물론 오는 손님들은 따뜻하게 맞아주었지만, 교회 안에 숨어서 흙처럼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 써 놓은 ‘흙’이라는 시가 생각나는 것입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이 세상에는 흙이 없이는 존재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흙이 있어야 나무도 있고, 농사도 짓고, 집도 짓는 것처럼 흙이란 우리 모든 삶의 공간의 기본이 되고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흙은 아무 말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 생명의 토대가 되고 근원이 되는 거죠. 저는 지금까지 저의 목소리를 높이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말을 못해 왔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공공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하고 싶은 말을 꾹 참아 왔습니다. 흙처럼 살아온 거죠. 그런데 그런 흙이라 할지라도 하늘에서 비를 내리고 생명의 씨앗을 떨어뜨려줘야 싹이 나고 뿌리를 땅속으로 박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흙이 하나님의 손에 잡혔을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곧 만물의 영장인 아담과 하와가 지어지게 됐고 온갖 생물이 다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저는 최근 2, 3년 동안 초야의 흙처럼 살아왔지만, 하나님이 명하시고 하나님의 손에 잡힌 흙이 될 때 당신의 위대한 도구로, 당신의 위대한 꽃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도 새삼스럽게 생각해 봤습니다. 다만 흙은 흙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지요. 자칫 흙이 바람에 잘못 나뒹굴 때 온갖 미세먼지가 되어 사람들에게 해악이 되지만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하나님의 위대한 그릇으로 빚어질 수 있기 때문이죠. 오늘도 여전히 저는 ‘내 마음 흙이 되어’ 살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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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4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다수의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주님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나서 가로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 하여”(행12:11). 야곱과 그의 자손들이 애굽의 고센 땅에 이주해 왔을 때는 고작 70명이었습니다(창46:27). 그런데 그들이 400년이 지난 후에는 150에서 200여만 명이 되었습니다. 바로는 급성장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여자들이 태어나면 살리고 남아가 태어나면 죽이도록 산파에게 명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던 산파는 바로의 명령대로 하지 않고 남아가 태어나도 살렸습니다. 그것에 대하여 추궁하면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달라서, 그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미처 아이를 낳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바로는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그들을 나일강 하수에 던지고 여자 아이가 태어나면 살리라고 말했습니다(출1:15-22). 이처럼 바로는 이스라엘 자손이 급성장하자, 이스라엘 남자를 전멸시키려고 하였지만, 그럴수록 이스라엘 사람들은 더욱 증가하였으며 최후에는 그의 집에 애굽을 황폐시키고 그의 군대를 수장시킬 모세가 자라게 됩니다. 그의 딸이 이스라엘을 구원시킬, 애굽을 전멸시킬 모세를 입양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기대 밖의 일을 하십니다(고전2:9). 일본은 1941년 7월 인도차이나 반도를 점령했습니다. 그러자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들이 일본 경제제재 조치를 취하였습니다. 이에 일본은 1941년 12월 7일(일본시간 12월 8일) 선전포고 없이 진주만과 필리핀 · 말레이 반도를 동시에 공격했습니다. 그들은 미 태평양함대를 무력화시킴으로써 제한된 시간 내에 동남아시아 일대를 쉽게 장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그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참여하는 계기가 되어 연합국의 승리를 가져왔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나라와 인도차이나 반도 국가들이 독립하던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전혀 예상 밖의 방법으로 일본의 기대에서 벗어나 우리를 독립시켜 주셨습니다. 한 번은 헤롯이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죽였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그 일을 기뻐하였습니다. 이에 고무된 헤롯은 베드로까지 죽이기 위하여 옥에 가두었습니다. 4인 1조로 4개 조가 그를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월절 후에 베드로를 백성 앞에 끌어내고자 하였습니다.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었습니다. 그러자 천사가 나타나서 베드로에게 채인 쇠사슬을 풀어줍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환상을 보는 줄로 알았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그것이 환상이 아니라 실제인 줄 알고 다음과 같이 말을 합니다.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나서 가로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행12:11).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반대하는 예수님이었기에 사도인 베드로 또한 자신이 무사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감옥에서 빠져 나왔습니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행12:5). 그것은 바로 간절한 기도 때문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간절한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고, 주께서 그 천사를 보내셔서 손에 채인 쇠사슬이 풀렸고, 4인 4개조에 의하여 겹겹이 쌓인 파수꾼과 첫째와 둘째 옥문을 지나고 성으로 통한 철문까지 제지 없이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얼마 안 있으면 총선입니다. 참으로 국가적인 행사입니다. 오직 이 나라가 헌법 전문에 나오는 것처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고, 신앙인들이 경건하고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는데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딤전2:2). 비록 다수의 기대에서 벗어난다 할지라도, 전혀 불가능하게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간절한 기도가 있다면 그 일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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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1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우리들만의 아주 특별한 밤
    저는 故 이어령 교수님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이어령 교수님이 누구이십니까? 천의무봉의 필력으로 끝없는 지식을 거대한 산맥처럼 이어가셨고 '디지로그' '젊음의 탄생' '생명이 자본이다' 등과 같은 고정관념의 틀을 깨뜨리는 창조적 신지식의 세계를 보여주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런 분이 저의 문학세계를 인정해 주시고 시집 ‘꽃씨’ 추천사에서 이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한국시사의 첫장으로 알려진 육당 최남선의 ‘바다에서 소년에게’에서는 파도가 네까짓께 뭐야라고 바위와 뭍을 몰아세우며 우르르 쾅 덤벼들지만 소강석 목사의 그리움에서는 오히려 파도와 뭍의 절벽은 서로 친화의 사랑과 그리움으로 어울린다.(중략) 불교에 한용운 스님의 임의 침묵이 있었던 것처럼 기독교의 지도자들도 시를 쓰는 계기를 마련해 주시기를 빌면서 이만 말을 거두려한다.” 특별히 이어령 교수님께서 저의 시에 대해서 애착심이 많으셨습니다. 언젠가는 전화를 주셔서 “내가 하늘나라 갈 날이 얼마 안 남은 것 같습니다. 내가 뭐 추천서 쓸 거 없습니까? 작품 있으면 마지막으로 선물을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시집 ‘외로운 선율을 찾아서’를 썼을 때 추천사를 써 주셨습니다. “소강석 목사는 예향(藝鄕)의 마을 남원 출신으로서 목회자이면서 동시에 시문(詩文)에 능하고 풍류와 흥이 있으며 거친 남도 사내의 야성도 있다. 그의 특유의 친화력과 열정, 사람을 웃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풍모를 잊을 수가 없다. 그래서 그에게 나의 언어를 마지막 선물처럼 주고 이 시집의 추천사는 어쩌면 나의 마지막 도움의 말이 될지 모른다.(중략) 나는 그가 그리울 것이다. 그의 시가 그리울 것이다. 그와 나누었던 추억과 순간들이 그리울 것이다. 소년 같은 그의 웃음과 미소도…” 결국 이어령 교수님은 돌아가셨고 저는 코로나 상황에서도 그 분의 장례식에 직접 가서 조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이 시대 최고의 문학평론가인 김종회 교수님께서 저의 시를 인정해 주시고 평가해 주셨습니다. 저에게는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릅니다. 사실 목사들의 시가 문단에서 잘 인정을 못 받습니다. 일반 서점에서도 잘 팔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목회자의 시가 이미지나 낯설게 하기, 은유와 함축, 반전 같은 것들이 없고 그냥 고백적이고 서사적으로 드러나게 쓰다 보니까 논외로 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김종회 교수님께서는 저의 시를 접하시더니 목회자 시의 테두리를 넘어서 문학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너라는 계절이 내게 왔다’ 시집 원고를 보내 드렸더니 “몇 군데 좀 수정하면 안 되겠느냐” 하셔서 다시 표현을 했더니 확실히 더 돋보이는 것을 느꼈습니다. 작년에 한강 세빛섬에서 북 콘서트를 했을 때도 직접 참석하셔서 시 토크를 진행해 주셨습니다. 후문에 의하면 우리 교인들 가운데 그때 세빛섬에 초청받지 못한 분들이 정말 부러워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정말 예상을 초월한 북 콘서트였습니다. 이번에는 책을 파는 북 콘서트가 아니라 봄을 맞아 꽃과 관련된 저의 시를 이해하고 감상하고 느끼는 ‘꽃소리 들리는 밤’의 시 콘서트입니다. 물론 김종회 교수님을 초청하지 않고 우리끼리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광스럽게도 문단에서 가장 위대한 평론가 중에 한 분이신 김종회 교수님을 모시고 시 콘서트를 할 수 있어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먼저 짧게 1부 예배를 드린 후, 우리 교인들과 함께 시 낭송과 노래, 연주, 토크를 진행하며 꽃향기가 보이고 꽃소리가 들리는 특별한 밤을 갖는 것은 우리들만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저녁에 오신 분들을 정말 예의를 갖춰서 모시겠습니다. 오늘 밤, 우리 모두에게 잊을 수 없는 ‘꽃소리 들리는 밤’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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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7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참된 헌신’(벧전 4:11)
    신자라면 누구나 하나님께 헌신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할 것입니다. 헌신은 자기의 생각이 아무리 옳고 자기의 방법이 편리하다 할지라도 인간적인 생각과 의지를 철저하게 배격하고 하나님 방법대로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힘으로 한다면 반드시 부작용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일하다 보면 늘 경우가 나오고 불평이 생기고 분쟁이 일어나고 갈등을 빚기에 차라리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을 때보다 못한 결과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헌신은 문제가 생기고 시험에 들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의 열심과 생각과 힘으로 주님의 일을 하면 자기 의와 공로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가인의 제사가 열납되지 않았을 때 가인이 분노한 것은 믿음으로 행하지 않았기에 자기 의가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야 부작용이 생기지 않는 법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오직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힘과 은혜로 해야 합니다. 벧전 4:11절에서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지만 자기를 위하여 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상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기가 태반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바로 그렇게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히 일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이 하는 일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일을 하러 오신 예수님을 방해하는 일을 하였지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헌신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뜻으로 바꾸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모압 땅에서 온갖 풍파를 겪었고, 앞으로 당할 고통을 감수하면서 유대 베들레헴으로 향하고 있는 룻과 나오미에게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하는 헌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힘을 공급해주신 것입니다. 룻이 자기 민족을 버리고 남편의 민족에게로 갈 결심을 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헌신의 마음이 지대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어떤 조건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 자신만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룻에게는 당연히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일이 그녀의 최대의 목표이었기에 그녀의 전진은 중단이 없었으며 도중에 머뭇거리거나 곁길로 나가지도 않았고 가야 할 목적지도 잊은 적이 결코 없는 헌신된 발걸음이었습니다. 또한 옥합을 깨뜨린 마리아의 헌신의 이야기는 시대를 초월해서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그녀는 오직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 전폭적으로 거룩한 헌신을 한 것입니다. 은혜를 입은 자는 타산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온전히 헌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셨습니까? 헌신을 다짐하시고 온전히 실천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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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2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사탄의 유혹 ‘마침’’
    지난 시간에는 여호와 이레 ‘마침’에 대하여 글을 썼습니다. ‘마침’은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타이밍이기도 하지만, 항상 좋은 편에만 등장하지 않습니다. 사탄도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듯(고후11:14), 신앙인들이 혹할 수 있도록 적절한 때 행동을 부추기는 추임새로 ‘마침’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거짓말쟁입니다(요8:44). 그들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했지만(창3:17), 죽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창3:4-5). 아담 이후로 사람들의 두뇌가 점점 발달 된 것처럼, 사탄도 사기술이 점점 고도화되었습니다. 아담 때의 뱀이 지금은 용이 된 것입니다. 지금도 아무런 가책 없이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은 사탄의 사자임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욘1:2). 하지만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이 싫었습니다. 자기가 싫어하는 니느웨는 그대로 망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서쪽 끝에 있는 다시스로 도망을 가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마침 다시스행 배가 왔습니다(욘1:3). 그 당시 배는 지금처럼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외국행 배를 만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스행 배가 떡 앞에 나타나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배를 탔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 상태를 이해해 주신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큰 오해였습니다. ‘마침’ 다시스로 향하는 배가 나타난 것은 하나님의 보내심이 아니라, 마귀의 유혹이었습니다. 그 배와 선원과 승객들이 마귀라는 것이 아니라, 요나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 하여 다시스로 가려할 때 나타난 적절한 타이밍이 마귀 유혹이라는 뜻입니다. 거기에 넘어가서 그는 배를 탔고 배는 얼마쯤 가다가 대풍랑을 만났습니다(욘1:4). 이처럼 ‘마침’이라고 해서 항상 하나님의 이레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죄수 아닌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로 압송되어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들이 미항이라는 곳에 도착했을 때, 바울은 배가 더 가면 생명까지 위태하다고 권하였습니다(행27:9-10). 하지만 선장과 선원들은 그곳에서 겨울을 나기가 불편하니 뵈닉스에서 겨울을 나자고 하였습니다. 그때 ‘마침’ 남풍이 순하게 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자신들은 득의한 줄 알고 갔습니다(행27:13). 그러다가 얼마 못 가서 유라굴로 광풍이 덮쳤고(행27:14), 배에 탄 사람 모두는 죽다가 겨우 살아났습니다. 이처럼 ‘마침’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온 것도 있지만, 마귀도 그것을 활용해 적절하게 속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얼마 못 가 본색을 드러내고 맙니다. 마귀는 사람들에게 결코 복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탄의 속임수 마침’과 ‘여호와이레 마침’을 어떻게 분별합니까? 그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첫째는 말씀에 맞아야 합니다. 아무리 순풍이 불어와도 우리가 하는 행동이 하나님의 말씀에 맞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마침’이 아닌 사탄의 속임수 ‘마침’입니다. 요나는 분명히 “니느웨로 가서 외치라”(욘1:2)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말씀에 따르지 않고 다시스로 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는 다시스로 가려고 했던 것 자체가 잘 못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을 맡았던 백부장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도 바울이 미항이라는 곳에서 떠나지 말라고 하면 그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선장과 선원들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전문가의 말입니다. 전문가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이었던 것입니다. 일례로 신앙인들 가운데 매주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지겹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때 ‘마침’ 비가 온다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 하나님께서 오늘은 집에서 쉬라고 하시는 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매 주일 첫 날에 떡 떼고 말씀을 나누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행20:7). 떡을 뗀다는 것은 성찬식의 의미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말씀의 떡을 나누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주일에 말씀을 먹지 않고서는 한 주를 살아가기 힘듭니다. ‘마침’이라고 모두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말씀에 맞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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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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