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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론회 논평] 목사의 성직을 떠난 사람은 속히 목사직을 내려놓고 회개해야
    목사(牧師)를 성직자라고 한다. 하나님께로부터 거룩한 직임을 부여받은 것이다. 이는 이름이나 명칭이 아니다.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약 10년 정도 과정을 거쳐야 한다. 신학대학(일반대학 4년)을 졸업하고 신학대학원 3년을 마치고, 목사 고시를 거쳐야 한다. 그리고 약 3년 정도 목사 후보생 기간을 거친 후, 드디어 목사 안수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목사 안수를 받게 될 때도 하나님께 분명히 서약하게 된다. 교단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나겠으나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從)으로서,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사명자로 부르신 하나님의 절대 소명에 종신토록 헌신하겠는가? 성경이 절대 무오(無誤)한 하나님의 말씀이요, 신앙과 행위에 유일한 법칙임을 믿는가? 중생의 체험과 성령세례를 받았는가? 악의 세력과 이단 사조, 세속화와 자유주의 신학의 사조를 배격하며, 성경적 복음 신앙 노선과 교회를 굳게 지킬 것을 작정하는가? 핍박이나 어려움을 당할지라도 인내하고 충심으로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며, 교회의 성결과 화평을 도모하며 근실하게 사역하기로 작정하는가? 등이다. 그러므로 목사의 길은 때로는 험난하고, 유혹도 많고, 또 핍박도 각오해야 하는 성직(聖職)이다. 그러나 오늘날 목사직에서 이탈한 타락한 목사들을 보게 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매우 부끄러운 일이며, 목사직의 성실함을 아는 국민들에게 매우 죄송한 일이다. 또한 신앙을 본받고 따라야 할 일반 성도들에게도 머리 숙여 사죄의 마음을 갖는다. 목사직은 매우 신성하고, 신적 권위와 신탁(神託)에 의하여 그 사명과 직분이 행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마치 직업처럼, 혹은 목사직을 이용한 세속에 물들고 타락한 모습을 볼 때, 한국교회의 대오각성이 필요하다. 각 신학교와 교단에서는 목회자 후속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서라도 <참된 목회자상>을 계속 가르쳐야 한다. 최근에 목사라는 사람이 일정한 목적을 가지고 대통령 부인에게 함정을 파서 접근하고, 몰래카메라를 들이대서, 그 대화한 것을 한참이 지난 뒤에 편향된 언론 매체를 통하여 공개함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한다. 이는 일반인도 그런 방법으로 타인에게 충격을 주거나 공격하지 않는 더러운 방법이다. 더군다나 북한의 공산주의와 자주 접촉한 후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것이 매우 우려스럽다. 그가 했던 말을 보아도, 공산주의를 옹호하는 세력들이 쓰는 ‘내재적 접근’이란 말을 쓴다. 이는 북한 공산주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평화나 정의를 주장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는 한참 빗나간 모습이 되고 만다. 공산주의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기독교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며, 교회를 가장 먼저 깨부수어야 할 적(敵)으로 본다. 그들은 종교를 아편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영적으로 기독교와 공산주의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기독교도 공산주의를 무신론, 유물론, 계급투쟁, 인민대중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산당과 그 핵심 세력의 권력을 위한 집단으로 보기 때문에, 절대 반대한다. 그런데 목사라는 사람이 공산주의에서 주장하는 것을 신봉하고, 또 여러 가지 불법과 꼼수를 통하여 나라를 혼란하게 만든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며, 그에 대하여 응당한 책임을 져야 한다. 목사는 교회를 사랑하면서도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고, 약한 사람들을 돕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도 바른 정치를 하도록 기도하고 충고하는 역할이다. 그러나 비열한 방법으로 국가와 사회를 혼란하게 하고, 기독교를 무너트리려는 공산주의 편에서 활약하는 것은 이미 목사의 소명과 자격을 상실했다고 본다. 세상에서의 지도자는 그에게 잘못이 있으면, 국민들과 사람들이 평가하게 된다. 그러나 목사로 세움 받은 사람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 성경에서는 이렇게 말씀한다. “개(배교자, 회개 전으로 돌아간 자)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요한계시록22:15) 세상에서 변하지 말아야 할 직종이 있다. 교사들이다. 교사들이 이념적으로 사상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했다면, 그들에게 학생들이 무엇을 배우겠는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성직자이다. 특히 기독교의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고, 진리를 떠나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종’(從)의 사명에서 벗어났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이미 해악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거룩한 공동체인 한국교회에는 얼마나 많은 부정적 이미지를 심어주므로 전도의 문을 막는 것인가? 교회에 덕을 세우고, 유익을 주지 못하는 목사라면 당장이라도 그 직을 내려놓고, 자기 자신의 개인 구원을 위해서라도 힘쓰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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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30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추억을 재현하면 젊음이 온다”
    추억이란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주신 선물일 것입니다. 기억과 추억은 또 다른 차원이죠. 동물도 본능적으로 기억을 합니다. 그러나 동물은 추억의 사유를 할 수는 없습니다. 짐승들에게 무슨 추억의 인문학이나 심리학 같은 것이 있겠습니까? 추억이란 기억보다 몇 차원이나 높은, 뭔가 아름답고 푸근하게 채색되고 윤색되어 있는 차원의 기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똑같은 기억이라 하더라도 그 기억이 나쁜 기억으로만 남아 있으면 상처가 되고 수치스럽지만, 그것이 좋은 채색으로 윤색되어 있으면 아름다운 추억이 될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 부모님께 그토록 꾸중을 듣고 매를 맞았지만, 다시 지내놓고 보면 그 역시 그리운 지청구가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꽤 오래전 복지TV 최규옥 회장님이 사시는 자택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 앞에는 갈담저수지가 그림처럼 펼쳐져 있는 곳인데요. “아, 이런 곳에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제가 회장님께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회장님, 이 집을 저에게 파시지 않겠습니까? 얼마면 되겠습니까?” 저는 제 아호를 지산(池山)이라 할 정도로 전원적이고 지산(池山)적 삶을 구가해왔습니다. 그런데 작년에 최 회장님이 저에게 이런 제안을 하셨습니다. “허름하긴 하지만 작은 방갈로 별장이 있는데 이걸 수리해서 쓰고 싶은 의향은 없으신가요?” 저는 그 자리에서 오케이 했습니다. 호화 주택도 아니고 아주 작은 방갈로였기 때문에 저에게는 너무나 안성맞춤이었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뛰는 심장과 함께 꿈을 꾸었습니다. “어린 시절에 저수지에서 여름이면 수영을 하고, 겨울이면 썰매를 타는 추억을 재현해 보리라. 산들바람이 산들 불어오는 날 저녁은 야간낚시도 한번 해보리라...” 그러나 아직까지 수영 한 번도 못 해보고 낚시 한번 던져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정말 너무 일정이 바빠서 하루저녁 자고 온 날 외에는 갈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겨울이 왔습니다. 저는 당장 김정호 장로님께 “썰매 좀 만들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런데 겨울 초에는 얼음이 단단치 않고 그 위에 눈까지 내려서 썰매가 잘 나가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조명훈 안수집사님이 우산대로 썰매를 만들어 선물로 가져오셨습니다. 게다가 지난주는 평균 날씨가 영하 10도를 밑돌면서 얼음이 더 단단해졌습니다. 그러니까 썰매가 참 잘 나갔습니다.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저수지 맨 끝에서 맨 끝을 몇 번이나 왕복을 했습니다. 얼마나 신이 났으면 두꺼운 점퍼를 벗어버리고 겨울 사나이가 되어 반팔 차림으로 썰매를 탔겠습니까? 저도 모르게 “아하, 썰매의 유레카”를 외쳤습니다. 그야말로 동심 천국이었습니다. 너무나 좋아서 얼음 위에 눕기도 하고 뒹굴기도 하였습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을 그대로 재현해 본 것이죠. 문득 순간적으로 이런 깨달음이 왔습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을 회상하면 그리움이 생기지만, 그 추억을 재현하면 젊음이 찾아오나니...” 정말 소년 시절로 되돌아간 것 같고 마음이 청춘처럼 느껴졌습니다. 어쩌면 인생이란 짧고도 긴 추억의 여행을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좋은 추억을 삶의 책장에 기록하면 그 시절이 그리워지지만, 추억을 재현하면 그리움을 넘어 젊음의 시절로 돌아가고 젊음이 내 안에 찾아옵니다. 2024년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성도들이 젊음을 되찾고, 젊음의 유레카를 많이 외치는 해가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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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4-01-28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하나님의 사람의 삶’(딤전 6:11-12)
    오늘날 성도를 가리켜 하나님의 사람이라 표현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그 호칭에 걸맞게 사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려면 피해야 할 것이 있고, 따라야 할 것이 있습니다. 피해야 할 것들은 다른 교훈(3절), 교만과 변론과 언쟁(4절),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4절), 그리고 돈을 사랑함(10절) 등입니다. 교만하여 사람들과 말다툼하거나 싸워서는 안 되고 남을 욕하고 비판하지 말며 특히 금전욕에 빠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신앙의 정진과 성장을 가로막거나 믿음을 주저앉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따라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온유”와 같은 덕목들입니다”(11절). 이것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갖추어야 할 덕과 실행해야 할 생활 원리인 것입니다. 여기서 의란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같이 진리에 부합하는 올바른 삶을 의미하며, 경건은 하나님을 섬기는 도리를 말하는 것인데 여기에 의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참된 경건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기 위해서는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며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대인관계에서의 신실함과 정직성을 말하며, 이 믿음은 밖으로는 사랑을 낳으며 안으로는 인내와 온유를 낳습니다. 이 믿음과 사랑은 불가분의 관계이기에 사랑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요, 믿음에 근거하지 않는 사랑은 생명이 없는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내란 신앙의 인내인데 어떠한 역경과 환경 가운데서도 낙심하거나 굴하지 않고 온전히 믿음을 지키며 신앙이 도리를 다하는 것을 가리킵니다(살후 1:4 ; 히 12:1 ; 약 1:3). 온유란 그리스도의 성품 가운데 하나로서 여기서는 성도들이 그것을 본받아 항상 사람들을 대하되 그들을 이해하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고전 4:21). 이어서 하나님의 사람에게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영생을 취하라고 권면합니다(12절). 우리가 부패했고, 세상이 부패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의 싸움의 대부분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데 육신의 소욕이 성령의 소욕과 서로 부딪치기 때문이며, 때로는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아 돌아다니는 마귀와 격전을 벌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한 싸움의 대상은 자기 자신이며, 마귀이며, 죄인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과 자신과 마귀를 이기는 방법은 우리의 믿음임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말씀대로 순종해 나아갈 때, 그 승리는 찾아오는 것입니다. 믿음의 싸움은 훈련과는 다르게 실제로 희생이 있고 승리가 따라오는 것입니다. 딤후 4:7에서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는 말씀이 우리의 말씀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선한 싸움을 싸우는 목적은 영생을 취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이 지닐 수 있는 가장 값진 것은 재산이나 건강이 아니라 내세에 대한 확실한 보증인 영생인 것입니다. 영생은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자에게 자신의 기쁘신 뜻대로 주시는 선물이지 결코 인간이 자신의 행위나 공로로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영생을 취하라고 말하는 것은 영생을 보장받은 자로서 마땅한 삶을 살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지 말라는 의미입니다(히 10:29).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는 피할 것은 피하고, 따를 것을 따름으로서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승리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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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22
  • [언론회 논평] 북한의 김정은 정권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다
    지난 10일 북한의 김정은 총비서는 우리 대한민국을 처음으로 ‘대한민국’으로 지칭하면서, ‘주적’(主敵)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는 지난 2021년에는 남조선이 결코 주적이 아니라고 하였고, 2022년 그의 여동생 김여정도 남조선은 주적이 아니라는 말을 사용했었다. 그런데 지난해 말에 김정은은 대한민국을 ‘적대적 교전국’이라고 했다가, 올해 들어 ‘주적’이라는 명백한 단어를 사용한 것이다. 북한은 우리 대한민국을 두려워하고 있다. 지난 2020년에는 대한민국에서 사용하는 말투나 표현을 금지하는 ‘반동사상 문화배역법’을 제정하였고, 한류와 같은 외부 문화를 차단하기 위하여 이런 문화물을 유포하는 자들은 최고 사형에 처한다는 법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2024년 들어와서는 그들의 본색을 드러내어, 대한민국을 주적의 개념에 편입하면서, 우리나라를 점령•평정•수복하고 공화국 영역에 편입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의 헌법까지 바꿔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지난 15일 김정은 총비서는 최고인민회의 연설에서 그들의 헌법에서 ‘평화 통일’의 내용을 삭제하고, 남한을 ‘제1의 적대국’으로 규정하는 내용을 넣어야 된다는 발언을 하였다. 그동안 북한이 얼마나 대한민국에 대하여 적대적인 내심을 숨기고 있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대남 창구 역할을 했던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민족경제협력국, 금강산국제관광국을 폐지한다고 밝혔다. 이는 그의 할아버지 김일성, 아버지 김정일이 지난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이후에 계속 유지해 오던 남북 관계의 기본 틀을 깨자는 것이 된다. 그야말로 김정은 독재자의 본색을 확실히 드러낸 것이다. 북한 김정은 총비서의 저런 태도에 대하여 전문가들이 분석하기를, 북한은 자기들이 하는 일들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 한반도를 분쟁지역으로 만들어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받으려는 것, 그리고 올 4월에 있게 될 대한민국 총선에서 윤석열 정부를 흔들기 위한 심리전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북한 김정은 정권의 노림수에 빠져서는 안 된다. 오늘날 북한이 저 정도로 무너진 것은 공산당사(共産黨史)에 전무후무한 3대 세습으로 정권을 잘못 유지해 온 결과이다. 아무리 북한과 같은 공산국가라 할지라도 소련, 중국, 베트남 등은 일종의 개혁•개방정책을 썼다. 그 개혁•개방을 하려는 명분은 공산당 전 정권에 대한 비판과 함께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북한은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에 의한 3대 세습 정권으로 내려왔기 때문에 할아버지, 아버지에 대한 비판이나 개혁을 도모할 수 없었고, 오직 무기 개발과 전쟁 분위기를 고조시켜 정권을 유지해 오는 방법을 써 온 것이다. 그마저도 이제는 한계에 다다르고 있는 것이다. 북한은 남북이 분단된 지 79년이 되었으나 여전히 대한민국에 대한 적화(赤化) 야욕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북한 당국이 정말 인민들을 위하고 평화를 사랑했다면, 오늘날과 같은 비극적 폐쇄주의, 영구히 변하지 않는 살인적, 전쟁광적 대적관을 갖지는 않았을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은 칼로 일어선 자는 칼로 망한다고 하였다. 무력으로 자유와 평화를 짓밟는 행위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핵으로 일어선 자는 반드시 핵으로 망할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동안 한국의 역대 정부는 저들의 요구대로 ‘퍼주기’와 핵을 개발하지 않거나 사용하지 않는다는 감언이설(甘言利說)을 대변하는 역할을 해 온 것이 사실이다. 이제라도 우리나라는 북한 김정은 정권의 속내를 제대로, 확실히 파악하여, 그에 걸맞는 대북 정책을 써야 한다. 대한민국과 북한은 근 80년 동안 분단된 것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이념 등 모든 면에서 다른 행보를 보여왔다. 이제는 막연한 일방적 ‘통일’보다 우선은 북한이 힘에 의하여 꼼짝하지 못하도록 우리의 안보와 국방, 외교와 국제적 결속을 다져야 한다. 또 한 가지는 북한의 3대 세습에 의한 주민 폐쇄와 그 강요에 의한 일방적인 주권과 인권 유린이 아닌, 북한 주민들이 변화를 일으키도록 유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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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22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성령의 페르소나가 되고 싶다
    지난주는 무척이나 바빴습니다. 광주에서 있었던 전국장로회 모임에서 설교를 하고 대구에 가서 영남협의회에서 설교를 하고 또 대전에서는 전국호남협의회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금요일은 글로벌 에듀 신년하례회에서 설교를 하였습니다. 각기 다른 곳이지만 같은 설교를 하면 안 됩니다. 왜냐면 중복해서 참석한 분도 계시고 또 기자들이 오기 때문에 재탕 설교를 한다고 할까 봐서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목요일에 대전 유성에서 설교를 했는데 많은 분들이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 축사나 격려사를 하러 오신 분들이 대놓고 저의 설교를 막 극찬해주셨습니다. 특히 강태구 목사님은 매주 저의 설교를 듣는데 “소 목사님이 논리적이고 법리적 설교를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성도들이 은혜를 받고 눈물 흐르는 모습을 보면 자기도 가슴에서 눈물이 젖어온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봤더니, “소 목사님의 설교에 진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진심과 진심이 통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지요. 순간 저는 성령의 페르소나로서의 설교자상이 생각났습니다. 이것은 얼마 전에 칼빈대학교 설교학 교수인 김덕현 목사님이 발표한 논문이기도 한데요, 그는 설교자의 상을 세 가지로 나눴습니다. 첫 번째는 명제적 설교자상입니다. 이 설교 형식은 본문에서 추출한 신학적 명제 혹은 중심 사상을 기반으로 작성된 설교입니다. 이 설교는 전통적일 뿐 아니라, 굉장히 논리적이고 권위주의적입니다. 거의 전통적인 설교가 이렇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설교의 단점은 성경의 의도보다는 설교자의 의지와 사상이 앞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설교자의 권위에 무게를 실을 수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서사 중심적 설교자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야기설교를 말하는 것인데요. 이 설교는 신학적 명제나 교리적 내용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에 집중하지 않습니다. 어떻게든지 본문의 의도를 이야기나 스토리 중심으로 전달하려고 합니다. 한마디로 이야기꾼 설교자죠. 성경은 원래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압축된 문장으로 기록된 것이죠. 그러므로 오늘날 설교자는 성경에 숨어 있는 이야기를 끌어내서 회중에게 스토리텔링을 잘해야 합니다. 이것은 명제적 설교보다는 진일보하고 청중과 더 소통이 되는 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도 한동안은 이야기 설교에 심취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야기 설교에 대한 강의도 많이 하고 다녔습니다. 세 번째로 김덕현 교수님은 성령의 페르소나의 설교자상을 논했습니다. 제가 쓰는 용어에 의하면 극화적 설교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트리니티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는 벤후저 교수는 설교를 ‘거룩한 극장에서의 거룩한 공연’, 혹은 ‘교리의 드라마’로 표현을 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설교도 거룩한 공연의 차원으로 이야기를 하는 거죠. 그러기 위해서 설교자는 하나님, 곧 성령의 페르소나가 돼야 됩니다. 영화에서 작가나 감독은 영화에 등장인물로 출연하지는 않지만, 청중에게 표현하고 싶은 감독의 의도를 주연 배우를 통해서 드러나도록 하지 않습니까? 예컨대 봉준호 감독의 의도를 송강호라고 하는 배우가 잘 연기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연기는 그냥 되는 게 아닙니다. 그 작가와 감독이 의도하는 바에 진실한 감정과 전심을 담아야 제대로 연기가 가능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달하고 표현하는 성령의 페르소나가 되기를 원합니다. 한때는 이러한 설교를 제가 광대설교라고 표현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광대라는 말이 별로 그렇게 좋은 어감이 되지 않아서 극화적설교라고 표현한 거죠. 그러니까 성령의 페르소나 역할을 잘하기 위해서는 먼저 설교자가 성경 말씀을 전심으로 연구해야 됩니다. 그리고 그 성경에 나타난 이야기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희로애락의 감정을 잘 표현하고 전달해야 됩니다. 옛날에는 성언운반 일념의 사상이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만 전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려면 성경 속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감정도 함께 수반이 돼야 됩니다. 아마 강태구 목사님이 제 설교에 “진심이 있다.”는 말은 전문적인 용어로 제가 성령의 페르소나로서의 설교자의 모습을 보였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도 저는 필요에 따라 명제적 설교도 하고, 때로는 이야기 설교도 하지만,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의 페르소나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인격적으로 전하는 설교자가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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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4-01-21
  • [언론회 논평] 증오의 말들이 정치 테러를 만들었다
    지난 2일 거대 야당의 이재명 대표가 목 부위를 찔리는 사고를 당하였다. 전에도 유력 대선 후보나 정치인들이 피습을 당하는 경우들이 있었다.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 이는 자유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테러행위인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이 있고 나서 강성 지지층들이 쏟아내는 말들은 더욱 섬뜩하다. ‘연극이다’ ‘사주다’ ‘자작극이다’라는 말들이 나왔고, 아무런 상관도 없는 대통령이나 여당의 비대위원장, 그리고 일선 검사들을 지칭하여 비난하거나 살의(殺意)를 품은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런 일들이 벌어지면 서로가 신중하고 자제하고 언행에 조심해야 되는데, 오히려 더 흥분되고 분열된 집단의 모습이 광기(狂氣)처럼 번득인다. 이를 ‘집단극화’(group polarization)라고 한다. 이는 개인보다 집단의 의사결정이 더 극단적인 방향으로 흐르는 현상을 말한다. 이제는 이런 볼썽사나운 모습에서 탈피해야 한다. 왜 우리 사회가 이처럼 이성 잃은 감정에 함몰되어 갈등에 상처를 더하므로, 그야말로 우리나라가 ‘갈등공화국’이 되었는가? 국민들이 너무 정치에 몰입한 탓이 아닐까? 나와 생각과 의견이 다른 편의 잘못이나 실수를 기다렸다는 듯이 쏘아대는 독침은 모두에게 씻기 어려운 상처를 남긴다. 정치인들이 진영 논리에 빠져서 옳고 그름보다 자기의 주장만이 옳고, 상대편이 하는 것은 무엇이든 잘못되었다는 주장에 따라, 국민들도 적(敵)과 아군으로 쫙 갈라진 모양새다. 정치 지도자들의 분노 유발의 잘못된 행태들이 국민들의 심성조차 파괴하는 도구로 악용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뉴스1이 빅데이터 분석업체 타파크로스에 의뢰해, 지난 몇 년 동안의 언론 기사와 SNS상의 갈등과 관련된 것들을 지수화하여 발표하였다. 이것을 2018년을 100으로 기준 삼았을 때, 지난 2022년의 한국 사회 갈등지수는 178.4로 불과 몇 년 사이에 무려 2배 가까이 치솟았다고 한다. 우리 사회에서 여러 가지 갈등의 요인들이 있겠지만, 가장 심각한 것은 진영(陣營)에 관한 갈등이 72.5%로 가장 높았다. 거의 3/4이 진영으로 인한 갈등이다. 가장 심각했던 것은 지난 2019년 조국 전 법무부장관 사태 때였다. 그때 조국 전 장관을 지지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이 극렬하게 갈라져서 집회를 하였다. 그리고 2020년 총선 때와 2021년 대선 때에도 진영 간 분리의 강도(强度)가 강하게 나타났다. 지금 우리 사회는 정치인들이 앞장서서, 돌이키기 어려울 정도로 갈등과 분열과 증오를 키워가고 있다. 마치 활화산 속에 감춰져 있던 불길이 어떤 이슈만 떠오르면, 사정없이 분출하는 용암과 같다. 여기에는 정치인들의 계산되고, 때로는 사려 깊지 못한 천박한 언행이 그릇된 동력(動力)을 제공하고 있다. 그들의 말은 국민들의 정상적 사고를 무너뜨리는 쓰나미가 되고, 그들의 행동은 국민들을 양편으로 갈라놓는 폭약의 기폭제와 같다. 정치인들은 이런 국민들의 소모적 논쟁을 먹고 사는 ‘불가사리’가 되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확증편향증’에 사로잡혀 죽기 살기로 서로 물고 뜯는다. 이래서는 절대 안 된다. 증오와 혐오를 부추기는 극단의 정치는 결국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133:1)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빌2:3) 우리나라를 ‘갈등공화국’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은 기독교의 사랑과 겸손과 화합이다. 그리고 정치 지도자들의 ‘아무 말 잔치’와 추하고 더러운 말들을 국민들이 걸러내는 것이다. 칼로 벤 상처보다 말로 벤 상처가 더 아물기 어려운 것처럼, 우리는 말에 인격을 걸고, 말에 책임을 지고, 말로 다른 사람에게 위로와 격려를 보내는 에너지를 담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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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4-01-17
  • [언론회 논평] 제 자리로, 정상으로, 공정으로, 기본으로!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27일 보도자료를 통하여 “투•개표관리의 투명성•신뢰성 강화 방안을 마련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동안 선거 때마다 문제가 된 것은 2002년부터 도입된 투표지 분류기 문제, 2013년부터 도입된 사전투표와 그에 따른 관리 문제가 가장 많았다. 그리고 외부에서 선거 행정과 전산망을 해킹할 수 있다는 우려였다. 국민들이 아무리 정당하고 바른 판단을 가지고 투표에 임한다고 하여도, 이렇듯 투표 관리에 문제가 생기면 민의(民意)는 사라지고, 이를 통하여 이득을 노리는 무리들에게 이용당할 공산(公算)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투•개표 업무 개선을 마련한 이유로, 선거 불복이 국민통합을 저해하므로 선거 전반에 투명성과 신뢰성을 높이기 위한 방안이라고 설명한다. 본회도 이런 부정선거의 문제점에 대하여 기독교계에서는 유일하게, 지난 8월 8일 중앙 4대 일간지(조선, 동아, 국민, 경향)에 “부정선거를 막을 원천적이고 불가역적인 제도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성명서를 낸 바 있다. 그렇다면 중앙선관위가 마련한 방안은 무엇인가? 첫째는 개표절차에 수검표 절차를 추가한다는 것이다. 현행 개표과정은 투표용지를 전자 개표기로 나누게 되고, 그것을 특정 후보자나 정당별로 모으고, 투표지 뭉치들을 심사 계수기에 넣어 확인하고, 분류한 대로 떨어지는 투표지를 개표 사무원이 육안으로 보아서 비정상적 것을 찾아내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새롭게 시도하는 것은 분류되어 떨어진 투표지를 개표 사무원(그동안에는 약 40%가 일반인이었는데, 새롭게 바뀌는 것에서는 일반인이 아닌, 오직 공무원만 투표지에 손댈 수 있게 하는 것)이 일일이 손으로 확인한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사전•우편 투표함 보관장소에 CCTV를 상시적으로 설치하고, 사전투표의 선거인 신분증을 현재까지는 투표마감 시각까지만 보관하던 것을 선거 소송 제기 기한인 30일까지 보관한다는 것, 또 사전투표용지 일련번호를 QR코드가 아닌 1차원 바코드로 인쇄한다는 것, 그리고 투표지 분류기 보안을 강화하며, 투표지 이미지 원본을 임기 만료 때까지 보존한다는 것이다. 前 정권에서는 부정선거 시비가 일어나도 변명하기에만 급급하고, 꿈쩍도 하지 않았으나, 새로운 정부에서는 이런 잘못과 문제점에 대하여 신속하게 반응하는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번 중앙선관위의 신뢰성 강화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자 개표가 전면 폐지되거나 완전한 수개표로 돌아선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선거 관리 사무가 시대적 요구에 의하여 변화되고, 유권자들이 그 선거 결과를 빨리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신속성보다 공정성의 가치가 절대적이다. 그러므로 외국에서도 이 같은 시비와 불공정 문제 때문에 전자 개표기 대신, 수개표를 하는 나라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KBS는 그동안 부정선거 문제에 대하여 함구하고 있다가, 지난 26일 9시 저녁 뉴스를 통하여 부정선거 의혹과 시비에 대하여 자세히 보도하였다. 우리나라보다 먼저 전자 투•개표를 도입했던 독일, 프랑스, 캐나다, 스위스, 스웨덴, 타이완 등이 해킹 가능성 때문에 전면적인 수개표(手開票)로 전환했다고 보도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개연성을 알아보기 위하여 국가정보원이 지난 7월 17일부터 9월 22일 사이에 선거관리위원회 보안 상태를 점검하였고, 그 결과를 10월에 발표했는데, 선거 조작이나 부정이 매우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같은 발표조차 미심쩍은 것은 혹시 해킹이 정말 있었던 것을 감추려는 것은 아닌가? 라는 합리적 의심이 든다. 이는 애국시민들이 끝임 없이 주장해 온 것으로 부정선거 주장이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아야 한다. 이제 엄청난 국민적 저항과 국가적 손실을 가져오는 부정선거를 막기 위하여 개표 조작이나 부정이나 해킹이 통하지 않는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 그리하여 국민 간 불신과 소모적인 다툼의 원인을 원천적으로 막아야 한다. 그래서 외국의 경우처럼 手開票만으로 할 것을 요구한다. 지금 대한민국은 제 자리로, 정상으로, 기본으로, 상식으로, 공정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를 국민들은 적극적으로 원하며, 이런 정부를 지지한다. 윤석열 정부는 더욱 박차를 가하여 내년으로 다가온 총선에서부터 불공정과 불법과 조작이 통하지 않는 사회로 만들어야 한다. 불법과 부정을 획책한 자들이 드러나면 엄하게 처벌해야 할 것이다. 이제 확실한 제도 개선과 엄정하고 공정한 시행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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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7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예수님을 결박하는 사람들’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주니라.”(마27:1-2) 새벽이란 ‘아주 일찍’을 의미합니다. 중요한 것일수록 일찍 행동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모리아 산에 바치라고 하셨을 때, 아침에 일찌기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서 떠났습니다(창22:3). 또 다윗도 가드왕 아기스가 블레셋 장관들이 다윗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윗이 이스라엘과 싸우러 함께 가지 못한다고 하였을 때, 다음 날 일찍 시글락으로 갔습니다(삼상29:11). 그는 가드왕이 막는 것을 하나님께서 막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일찍은 중요한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중요하게 여긴 사람들은 일찍 가장 중요한 첫 시간을 드립니다. 그런데 여기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일에 일찍 나서게 됩니다. 그만큼 그들은 예수님을 없애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일곱 마귀가 들어가면 이렇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에 일찍 나서게 됩니다. 하나님을 제일 앞장서서 섬긴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이토록 하나님의 대적이 되었을까요? 그것은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행23:1). 성령은 우리의 양심과 더불어 말씀하시는데(롬9:1), 대제사장은 전혀 양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신들의 욕심을 따라 살았습니다. 예수를 판 유다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은 삼십을 가져다 주었을 때의 그들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다면 “그래? 예수가 무죄한 자라고? 우리가 너무 빨리 사형 판결을 하였구나. 빨리 다시 돌리자.”라고 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마27:3). 그들이 사실상 예수님을 죽게 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가룟 유다에게 모든 책임을 떠 넘기면서 가룟 유다의 마지막 말에 대하여 자신들은 책임 없다고 시치미를 뗀 것입니다. 그것이야 말로 욕심이 양심을 눌러버린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양심을 쓰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대적이 되고 맙니다. 성경을 많이 안다고 해서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에 합당한 양심을 쓰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입니다(행23:1). 대제사장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빌라도에게 넘긴 이유가 양심을 쓰지 않고 욕심을 따라 살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거울입니다. 우리가 거울 앞에 서면 다른 사람의 얼굴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얼굴이 보입니다. 성경을 읽거나 들을 때 다른 사람들의 죄가 생각난다면 거울을 보면서 다른 사람의 티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거울은 오직 우리 자신을 위하여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합당하게 살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대제사장처럼 예수님을 결박하는 행위들이 신앙인들에게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결박하는 행위는 이론입니다. 말씀을 결박하는 것은 이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하여 사울에게 이레를 기다리도록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론으로 결박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왕의 행한 것이 무엇이뇨. 사울이 가로되 백성은 나에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은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치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 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삼상13:11-12). 이처럼 부득이하게 느껴지는 이론이 예수님을 꽁꽁 묶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못하도록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유, 변명, 이론, 까닭 등과 같은 것들입니다. 신앙인들은 이러한 것들을 깨뜨려야 합니다(고후10:3-6). 그것이 복종입니다. 이론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견고한 진이라면 복종은 그 진을 깨뜨리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신앙인들은 예수님 당시 대제사장이 예수님을 결박하여 빌라도에게 넘겨준 것처럼, 여러가지 믿지 아니하는 이론으로 예수님을 결박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주님의 말씀에 더욱 복종하여, 말씀을 대적하는 모든 이론을 파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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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6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설산에 가서, 설산이 되다
    지난 화요일 저녁에 야간산행을 했습니다. 저는 머리가 복잡할 때나 아니면 모든 일을 다 끝내고 나면 산행을 합니다. 그날은 다음 날 있을 수요설교, 그리고 금요 철야기도와 다음주 주일설교까지 다 준비를 하고 아주 홀가분한 마음으로 산으로 향하였습니다. 그런데 산 초입에 누군가가 눈사람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눈이 조금 녹아 흐른 것 같아서 제가 머리 부분에 눈을 덮어서 쓰다듬어 놨습니다. 표정도 미소 짓는 모습으로 단장시켜 놨습니다. 그리고 산행을 시작하였습니다. 산 초입에는 여러 발자국이 있었습니다. 그 발자국마저도 눈이 쌓여 희미하게 덮여져 있었지만 산으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점점 발자국이 없어졌습니다. 나중에는 정말 발자국 하나 없는 산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저는 설산이 너무 좋아서 끝없이 걷고 싶었습니다. 배가 고파서 더 이상 걸을 힘이 없으면 눈밭에 그대로 눕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순간, 얼마 전에 읽었던 문정희 시인의 ‘설산에 가서’라는 시가 생각이 났습니다. “소리 내지 말고 / 눈물 흘리지 말고 / 한 사흘만 설산처럼 눕고 싶다 / 걸어온 길 / 돌아보지 말고 / 걸어갈 길 / 생각할 것도 없이 / 무릎 꿇을 것도 없이 / 흰 옷 입고 흰 눈썹으로 / 이렇게 가도 되는 거냐고 / 이대로 숨 쉬어도 되는 거냐고 / 이렇게 사랑해도 되는 거냐고 / 물을 것도 없이 / 눈빛 속에 나를 널어 두고 싶다 / 한 사흘만 / 설산이 되고 싶다.” 저는 정말 설산이 되고 싶었습니다. 저는 실제로 눈밭에 가면 너무 좋아서 눕기도 하고 저수지 얼음 위에 가면 얼음 위에서도 막 누워버립니다. 그 자체가 동심 천국이 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발자국 하나 없는 평평한 눈밭에 가서 누워 있으려고 하는데, 동행하던 유송근 장로님이 “목사님, 내일 수요일인데 너무 많이 걸으면 예배에 지장이 됩니다.” 하면서 손을 잡고 자꾸 내려가자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무덤이 있는 곳으로 더 향하고 싶었습니다. 거기에도 누구의 발자국도 찍혀있지 않을 것 같아서요. 그런데 유 장로님이 더 이상 가지 말자고 하도 사정을 해서 그냥 내려왔습니다. 산에서 내려오면서 너무 아쉬운 마음을 가지니까 제 마음에 마침내 눈이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제 마음이 설산이 된 것입니다. 제가 눈밭에 누울 것도 없고 제 마음 자체가 설산이 된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설산을 내려왔는데 세상에 그 사이에 산 초입에 있었던 눈사람을 누군가 발로 차서 부서뜨려 버린 것입니다. “도대체 누가 그랬을까? 어떤 억한 심정으로 발로 차서 부서뜨렸을까? 눈사람이 그냥 녹아 흘러내리는 것도 안타까운데 어떻게 발로 차서 눈사람을 망가뜨린단 말인가.” 너무 마음이 안타까웠습니다. “아, 세상에는 눈사람을 만든 사람도 있지만 무너뜨리는 사람도 있구나. 도대체 눈사람을 무너뜨리는 사람은 어떠한 마음일까? 과연, 그 마음에 설산이 있는 사람인가, 없는 사람인가...” 박살 난 눈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저는 제 마음 안에 다시 눈사람 하나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언제나 하얗게 미소 짓고 있는 모습으로요.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주님께 이렇게 속삭여 봤습니다. “주님, 사흘이 아니라 언제나 이처럼 백야 같은 세상이 되면 좋겠습니다. 달빛 하나 없어도 온 땅이 하얀 세계가 되는 세상, 눈사람을 발로 차서 엎어버린 사람도 설산을 그리워하고 갈망하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실수로 눈사람을 부서뜨렸던 사람도 그 마음 안에 눈사람 하나를 만드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한 사흘이 아니라 평생 눈사람 같은 사람, 설산 같은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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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4-01-14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사나 죽으나 주님을 위하여(롬 14:6-9)’
    신앙생활은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동기에서 이루어져야지 자기 체면이나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해서 하면 안 됩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8절).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 구원받은 성도의 삶의 목표요 방식인 것입니다. 고후 5:15에서도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삶의 목적을 바로 깨닫고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으로 성령의 은혜와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갑시다. 인생의 성공여부는 신앙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삶의 목적을 분명히 하여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는 삶의 원리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8절). 6-12절을 보면 ‘위하여’라는 말이 8번 나옵니다. 이것은 목적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삶의 목적이요, 내용이며 중심임을 깨달아 우리의 인생을 보람 있고, 유익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삶의 목표가 오직 예수님일 때, 오직 믿음으로 생각하고, 결단하고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으로 대표되는 구속사역은 우리를 주님의 소유로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9절).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산 자와 죽은 자의 주가 되었다는 것은 주님의 통치권이 지금 살아서 움직이는 자들뿐만 아니라 이미 죽은 사람에게까지 그 효력을 미치게 되는 우주적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주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어떻게 시작을 하느냐’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위해 사느냐’하는 문제 역시 중요합니다. 목적의식, 방향의식이 분명해야 하겠습니다. 모든 사물에는 그 본래의 목적이 있습니다. 인간은 본래 자기를 위해 살도록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예배자로,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존재 의미와 가치가 있습니다. 여기에 나의 나 됨이 있습니다. 우리가 후회 없이 사는 길은 주님을 위해 살다가 주님을 위해 죽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주님께 헌신한 사람입니다. 주님께 헌신한 사람이란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 생명까지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린 사람을 말합니다. 세상일을 하느라 좌로 뛰고 우로 뛰다보면, 때로는 실망과 낙심이 찾아오기도 하고, 허망한 생각이 들 때도 없지 않으나, 주님을 위해 일하다 보면 힘이 생기고 용기가 나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사는 삶은 절대로 후회하지 않습니다. 성도란 주님을 높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기중심으로 살면서 자신을 높이지 말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서 하나님을 높여야 하겠습니다. 어렵더라도 주님 중심으로, 말씀으로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채워주십니다. 나는 보잘것없어도 말씀이 내 길을 지도해주십니다. 갈 길을 인도해주십니다. 말씀을 따라가면 반드시 복된 길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떠나면 고통스런 일들이 생깁니다. 말씀을 떠나면 사탄이 들어오고 역사합니다. 우리는 삶의 목적을 분명히 하여 사나 죽으나 다 주의 것으로 주님을 위해 살고, 주님을 위해 죽고자 다짐하며 승리의 삶을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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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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