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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론회 논평] 국가인권위원회, 인권 정책을 균형 잡아야
    최근 대통령실은 국가인권위원장 후보에 전 헌법재판관 안창호 변호사를 지명하였다. 그는 2012년부터 2018년까지 헌법재판관으로 있으면서, 사회적 약자를 위해 소신 있는 행보를 보여왔고, 법무부에 있을 때에도 법률 복지 향상에 기여했다는 것이 국가인권위원장으로 내정한 이유이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 2001년 당시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 만들어진 기구이다. 설치 목적은 민주적 기본질서 확립과 모든 개인의 인권 보호 향상을 위한 것이다. 또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실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가 해 온 일들을 보면, 지나치게 편향되어 끊임없이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인권위의 가장 큰 문제점은 소수자를 위한다는 목적으로 다수의 인권을 무시하고, 역차별을 하는 정책들을 펼쳐왔다. 즉 동성애, 성소수자를 보호한다는 이유로 동성애를 확산시키는 일을 해 왔고, 가정과 사회가 해체되고 무너지는 것을 조장하였다. 또 언론사들과 ‘인권보도준칙’을 만들어 언론들의 입을 틀어막아, 국민들의 알권리를 봉쇄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다 보니, 동성애와 깊은 연관성이 있는 에이즈와 같은 무서운 질병의 문제점을 제대로 알 수가 없도록 가리는 역할을 해 왔다. 그리고 인권위의 모든 제재 조항들이 ‘포괄적차별금지법’을 비롯하여, 학생인권조례와 온갖 인권조례, 인권헌장 등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다보니, 모든 국민들이 보호받아야 할 실제적이고 천부적인 인권들은 오히려 침해를 받게 되었다. 그야말로 소수자를 위한 것이 지나치게 강조되다 보니, 다수의 인권에 대한 것이 역차별을 받게 된 것이다. 또 인권위는 지구상에서 가장 극심한 인권 탄압을 받는 북한 인권에 대하여 오랫동안 함구하였다. 헌법상으로는 북한도 우리의 영토이며, 우리 국민인데도 북한 주민들의 인권을 외면하여, 결과적으로 지독한 공산독재 3대 세습을 묵인한 셈이 되었다. 이제라도 인권위는 모든 국민들이 인정할 수 있도록, 모든 개인의 인권 보호와 향상을 가져오는 국가 인권 기관이 되어야 한다. 성소수자를 비롯한 소수자만을 위한 인권 정책을 강조한다면, 이는 국가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게 되는 원인이 될 것이다. 안창호 국가인권위원장 내정 후에 여러 가지 이유로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국가인권위원장은 특정 정파, 특정 이념 세력, 특정인들을 대변하는 사람만이 차지하는 자리인가? 지금까지도 인권위는 충분히 편향되고, 편중되고, 편파성을 띠어왔다. 따라서 새로운 국가인권위원장은 우리 국민 모두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실현’하는데, 소홀함이 없는 국가 기관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안창호 전 헌법재판관의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체제하의 활동에 기대를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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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4-09-08
  • [언론회 논평] 목사인가? 잡인(雜人)인가? 간첩은 아닌가?
    목사(牧師)는 기독교의 성직자를 말한다.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예배를 이끌거나 교회를 관리하고, 신자의 영적 생활을 지도하는 성직자로 표현된다. 영어로는 ‘Pastor’라고 하는데, 성경에서의 목양(牧羊)이라는 직능을 감당하는 것을 말한다. 즉 목사는 언제나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말씀 가르침을 통하여, 영적인 훈도와 양육을 위한 일에 하나님께 쓰임 받는 직임을 말한다. 그런데 몇 년 전에 미국에서 왔다는 자칭 어느 목사가 정치권을 기웃거리면서, 나라가 온통 시끄럽다. 최근에는 국회에까지 나가서 대통령 부인과 관련된 청문회에서 국회의원들의 질문에 엉뚱한 답을 하는 것을 보면서, 과연 목사가 맞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는 1995년 도미(渡美)하여 미국에서 활동하다가 지난 2018년 한국에 들어오면서부터 소위 목사의 신분을 가진 사람으로서 이해가 안 되는, ‘국가보안법’과 ‘남북교류협력법’ 위반으로 경찰의 조사를 받는 등의 물의를 일으켰다. 그런데 웬일인지 2020년 당시 문재인 정권에서 ‘무혐의’로 풀려났다. 그러나 그가 국내에서 만나고 다니는 사람 등의 행적에서 문제점들이 누적되었다. 그리고 대통령 영부인 김건희 여사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여, 선물을 주는 것을 몰래카메라로 찍었다가 1년 정도 지난 시점에서, 한국의 총선이 다가오는 2023년 12월 말에 편파적 이념을 가진 유튜브 방송에 공개하면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올해 7월 26일에는 국회 청문회까지 참석하여 궤변 수준의 말들을 늘어놓았다. 모 의원이 ‘당신 목사가 맞느냐?’ ‘예수님이 이 자리에 오신다면 증인을 보시고 뭐라고 하실까?’라는 질문에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여당과 대통령 집무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할 것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하였다. 그에게서는 목사라는 성직자의 모습도, 성직자가 가져야 할 기본적인 태도도 양심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예수님은 정치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이란 말을 쓰신 적이 없다. 당시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렇다면 그가 1995년 도미한 이후의 행적은 어떤가? 2013년 7월 27일에는 북한의 전승절 기념행사에 참석하였고, 2014년에는 김일성의 생일인 태양절 행사에 참석하였고, 북한의 통일전선부 소속 공작원과 여러 차례 접촉하였다. 그는 여러 차례 방북하여, 철저하게 북한을 옹호하고 반미주의 행동을 보였다. 그는 북한에 대하여, 그곳이 정당한 나라이며, 미국을 비롯한 서구가 왜곡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후계자는 인민이 추대하고 수령이 낙점한다는 것으로, 북한의 3대 세습을 옹호하였다. 또한 북한은 종교의 자유가 철저히 보장되고 있으며, 이를 인권 문제로 보면 안 된다는 주장도 하였다. 북한이 주장하는 것을 그대로 되뇌이고 있다. 사실과는 너무나도 상반된 내용이다. 그리고 북한에서 대남전략의 최고 권력을 가진 통일전선부의 부위원장(한국의 장관급으로 본다)을 만난 일도 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주요 인사들도 만난 것으로 보인다. 그가 북한 당국의 대남 정책에 대한 지령을 받는 것이 아니라면, 이런 만남은 이뤄지기 어려울 것으로 본다. 그의 이런 모습들을 보면서 친북한, 대남 활동가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은가? 그러므로 그의 여러 가지 행동을 놓고 볼 때 결코 목사라고 보기 어렵다. 그의 지금까지의 친북 활동은 말할 필요도 없으려니와, 진짜 목사라면 남의 허물도 덮어주고, 실수도 용서하는 것인데, 의도하고 계획적으로 대통령 영부인에게 접근하여 몰래 카메라를 찍은 수법은 세상의 잡인들도 하지 않는 방법이었다. 또 그는 지금까지 복음을 전하는 목사로서 활동한 것이 눈에 띄지 않는다. 목사라면 적어도 다른 사람의 영혼을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사랑과 용서로 죽으심을 본받고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의 말씀을 자가당착(自家撞着)식으로 해석하면서도 자신이 목사라고 강변하는 모습에서 섬뜩한 생각이 든다. 그가 목사라는 이름을 가지고 활동하는 것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참된 목회자들이 세상으로부터 우려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고, 조롱을 당하고, 성직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키우게 되었는가? 목사라는 신분을 가진 한 사람으로 인하여 한국교회 전체가 매도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속히 그가 어느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지금 속한 교단은 어디인지를 밝혀야 한다. 그래야 최소한 가짜 목사, 사기꾼 소리는 면치 않겠는가? 이렇게 말함은, 많은 목회자들이 당신을 가짜 목사요 사기꾼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소한의 양심이 있다면 목사라는 이름으로 무도하게 한 행위는 사죄해야 되지 않겠는가? 최재영, 당신이 목사라고 주장하지 않으면 한국교회가 말할 가치도 없었을 것이지만, 굳이 목사라고 하니 이르는 말이다. 이제 미국으로 돌아가든지, 아니면 그렇게도 좋아하는 북한으로 들어가기 바란다. 아니면 하나님께 철저하게 회개하고, 북한의 실상을 전 세계에 올바로 알려, 평화 통일의 디딤돌이 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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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4-09-08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황순원문학상(시인) 수상소감
    금주 아포리즘은 9월 6일(금) 황순원문학상 수상소감으로 대체됩니다. <작가 주> 황순원 문학상 수상 통보를 받고 심장이 멎는 듯하였고, 현기증이 날 정도로 놀랐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팩트였고, 마침내 오늘 수상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일로 제가 정말 올 수 없는 형편이었지만 너무나 오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오면서 상을 받는 기대감도 있었지만, 부담감이 더 컸습니다. “내가 『너라는 계절이 내게 왔다』라는 시집보다 더 등급된 시를 써야 하는데 과연 내가 해낼 수 있을까?” 이런 부담감이 마음을 눌렀지만 차 창문을 여니 양평에서만 맡을 수 있는 풀잎과 가을 꽃잎들의 향기가 너무나 시원하게 느껴졌습니다. 양평에 사는 분들이 너무 부러워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저도 황순원의 ‘소나기’에 나오는 소년처럼 지리산 자락에서 태어나 자랐거든요. 그런 제가 대기권 밖의 별처럼 마음속으로 흠모하고 동경하던 황순원 선생님의 문학상을 받게 되어서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황순원의 문학정신은 순수와 절제의 서정적 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황순원 선생님께서는 글을 쓰실 때 함부로 칼을 휘젓듯이 쓰지 않고 순수하면서도 절제의 조화를 이루는 문학 세계를 추구하셨습니다. 지금도 한국문학은 황순원 선생님께서 일구신 문학의 지평 위에서 더 새로운 세계를 넓혀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문학 세계가 탐미주의이든, 해체주의이든, 초월주의이든, 어떤 다채로운 빛깔을 채색하더라도 황순원 선생님께서 지켜가신 순수와 절제의 서정성은 사라지지 않고 등불이 되어 앞길을 밝혀줄 것입니다. 저는 전문 문학인도 아니고 시를 전문적으로 쓰는 전업 시인도 아닙니다. 한 사람의 목회자로서 하나님과 사람, 자연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의 마음을 담아 한편, 한편 시를 썼습니다. 저의 시들이 별처럼, 꽃처럼, 햇살처럼 사람들의 마음에 닿아 사랑과 위로, 희망의 노래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황순원 문학상의 순수와 절제의 서정성을 가슴에 새기며 사랑과 용서, 화해와 평화가 가득한 세상을 열어가는 꽃씨와 같은 시들을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부족한 저에게 이처럼 의미 있고 큰 상을 주신 심사위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특별히 시집 『너라는 계절이 내게 왔다』의 표사를 써 주신 정호승 시인님과 늘 격려해주신 문인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 자리에 참석하여 축하해 주신 모든 분과 새에덴교회 성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모든 영광 하나님께 올려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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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4-09-08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믿음의 능력’(막 9장23절)
    성도는 믿음으로 위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눈을 들어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성공적인 삶에 이르는 첩경입니다. 성경을 보면 믿음이 지닌 놀라운 능력에 깊은 감명을 받고 또한 힘을 얻게 합니다. 언약궤를 짊어진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이 물이 잔뜩 불어 있은 요단강에 믿음으로 첫발을 내딛는 순간 흘러내리던 강물이 멈추어 섰고 이스라엘 백성은 강바닥에 드러난 길을 지나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수 3장). 그뿐이 아닙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순종하여 군사들로 하여금 견고한 여리고 성을 엿새 동안 돌게 한 뒤, 마지막 일곱째 날에는 같은 방식으로 일곱 번을 돌며 큰 소리로 외치게 하자 성이 무너져 내렸습니다(수 6장). 다윗은 블레셋의 거인 용사 골리앗에 맞서 매끄러운 돌멩이로 그를 제압했습니다(삼상 17장). 열두 해를 혈루병으로 고생하던 한 여인이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자 즉시 고침을 받았습니다(마 9:20-22). 한 어머니가 예수님에게 귀신들린 딸을 고쳐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어머니의 믿음으로 딸은 즉시 고침을 받았습니다(마 15:28). 우리의 삶 가운데에도 많은 문제와 역경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현실이 아무리 답답하고 어려워도 두려워하지 마시고 믿음으로 물리치시고 용기를 가지고 승리하십시다. 어려울 때일수록 담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인간의 생각을 창조적으로 바꾸고, 사회를 변혁하며, 역사의 방향을 바꾸어 놓는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고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킬 수 없습니다. 위대한 신앙은 하나님께서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다는 확신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환경과 상황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과 관점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보십니다. 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고백이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할 수 없다는 말은 불신앙인 것입니다. 렘 32:27에서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셨고 막 9:23에서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에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는 환난이 가득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은 오히려 믿음의 훈련장인 것입니다. 믿음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환난은 스스로를 문제로 위장한 채 우리에게 다가오지만 믿음의 눈으로 그것을 오히려 기회로 포착하시기 바랍니다. 삶을 비관적이거나 절망적으로 보지 마시고,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과 뜻이 있음을 믿읍시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믿음의 분량대로 역사하십니다. 믿음은 생명력이 있고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합니다. 그러므로 문제가 있을 때 인간의 수단과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주님의 능력을 믿고 강하게 매달리는 것이 최고의 방법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안 되는 일도 주님께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전능하심을 확신해야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 11:1)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의 말에는 역사가 나타나고, 확신 있는 기도는 그대로 받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11:23-24). 언제나 믿음으로 살아서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를 체험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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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05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주님을 만난 사람들의 반응’(사 6:5-8)
    하나님의 백성은 주님을 만났을 때 떨면서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인 우리는 주님 앞에서 두려운 마음으로 엎드려야 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에 대한 회개 없이 주님의 임재 가운데로 경솔하게 들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은 노력으로 청결해지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주님을 만날 때 경험하는 고백과 회개를 통해 깨끗해집니다. 그럼 주님을 만난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이사야는 거룩하신 주님을 뵈었을 때 “재앙이 나에게 닥치겠구나!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왕이신 만군의 주님을 만나 뵙다니!”(사 6:5)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이사야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죄뿐이었기 때문에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죄를 고백했습니다. 그때 한 천사가 제단에서 타고 있는 숯을 부집게로 집어 이사야의 입에 대며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악은 사라지고, 너의 죄는 사해졌다.”(7절)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입술의 죄는 우리의 죄악 중 대부분이지요. 생각으로 짓는 모든 죄가 입술을 통해 밖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마 15:18) 그래서 “누구든지,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온 몸을 다스릴 수 있는 온전한 사람”(약 3:2)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입술이 부정한 우리도 이사야처럼 죄를 회개하여 주님의 음성을 듣고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8절)라고 순종하기를 바랍니다. 에스라는 주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 너무나도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하나님 앞에서 차마 얼굴을 들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은 죄는, 우리 스스로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불어났고, 우리가 저지른 잘못은 하늘에까지 닿았습니다. 조상 때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저지른 잘못이 너무나도 큽니다.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의 왕들과 제사장들까지도, 여러 나라 왕들의 칼에 맞아 죽거나 사로잡혀 가고, 재산도 다 빼앗기고, 온갖 수모를 겪었습니다. 이런 일은 오늘에 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스 9:6-7)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어서 에스라는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 주님은 너그러우셔서 우리를 이렇게 살아 남게 하셨습니다. 진정, 우리는 우리의 허물을 주님께 자백합니다. 우리 가운데서, 어느 누구도 감히 주님 앞에 나설 수 없습니다.”(15절)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죄인인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은 오직 너그러우신 주님의 은혜인 것을 기억하며 항상 감사해야 합니다. 하박국은 주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그 소리를 듣고 나의 창자가 뒤틀린다. 그 소리에 나의 입술이 떨린다. 나의 뼈가 속에서부터 썩어 들어간다. 나의 다리가 후들거린다. 그러나 나는, 우리를 침략한 백성이 재난당할 날을 참고 기다리겠다.”(합 3:16)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어서 하박국은 “무화과나무에 과일이 없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을지라도, 올리브 나무에서 딸 것이 없고 밭에서 거두어들일 것이 없을지라도,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련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련다.”(17-18절)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도 하박국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죄인인 나를 구원하신 그 구원의 은혜로 말미암아 항상 즐거워하고 기뻐하기를 바랍니다. 누가복음 5장을 보면, 예수께서 갈릴리 바닷가에서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시몬에게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아라.”(4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시몬은 “선생님, 우리가 밤새도록 애를 썼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리겠습니다.”(5절)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대로 하니, 많은 고기 떼가 걸려들어서,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자기들을 도와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히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예수의 무릎 앞에 엎드려서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6-8절)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엎드렸습니다. 베드로는 죄인으로서 감히 거룩하신 주님 앞에 마주 대할 수 없어서 주님이 떠나 주시기를 간청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낮에 깊은 물 속에 그물을 던져서 고기를 잡는 것이 비효율적인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베드로는 말씀대로 순종하였습니다. 이처럼 주님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는 주님의 일하심을 놀랍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도 귀로만 듣던 주님을 눈으로 뵙고 주님을 만난 주인공들이 되어 우리를 통해 많은 사람이 살아 계신 주님을 뜨겁게 만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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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26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이미와 아직 사이에 사는 우리”
    제가 두어 주 동안 설교하고 축도만 했지 바깥에 나가서 일일이 성도들과 악수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수요설교를 부목사님들께 맡겼습니다. 그런데 수요일 저녁예배 때 장로님과 권사님 부부가 저한테 와서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저는 종암중앙교회 장로이고 권사였습니다. 그런데 용인 쪽으로 이사를 와서 한동안 종암중앙교회를 다니다가 너무 멀어서 가까운 교회를 다니게 되었어요. 그런데 새에덴교회가 우리 동네에 있다는 걸 몰랐습니다.” 장로님 부부는 그걸 알고 나서부터 우리 교회로 오기로 작정을 하고 등록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2주 동안 새가족 영접도 못 했거든요. 그래서 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수요일 저녁에 본인들이 저에게 와서 부부뿐만 아니라 자녀들까지 다 등록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들에게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정말 하나님은 심기도 하시고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네요. 종암중앙교회로 가는 게 맞지만 거리상 거리가 너무 머셔서 어쩐대요. 하나님께서 저에게 큰 선물을 주셨네요. 제가 얼마나 조경대 목사님을 잘 섬긴 줄 아세요? 교회 오실 때마다 축도로 모셨고 평일에 오셨을 때도 한 번도 빈손으로 보내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바쁜 중에도 조경대 목사님의 천국환송예배를 제가 인도했습니다. 그런데 조경대 목사님께서 살아생전에 애써 심고 양육하고 훈련시켰던 이런 중직자를 저에게 보내주시네요. 정말 우리 하나님은 너무나 세심하시고 정확하신 분이셔요.” 제 방에 들어가서 생각해 보니 아인슈타인이 발견한 ‘물질과 에너지의 등가원리’라는 글을 읽은 게 기억이 났습니다. 물질과 에너지의 등가원리는 물질과 에너지가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질량과 에너지가 서로 동일하다는 원리를 말합니다. 이 법칙에 의하면 질량으로 규정되는 모든 보이는 물질은 그 안에 보이지 않는 일정한 양의 에너지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물질은 물질 자체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창조주의 은혜, 창조주가 제정해 놓은 에너지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심는 대로 거둔다고 했지 않습니까?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는 것입니다. 육체를 위해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해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둔다는 것입니다.(갈6:7-8)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을 잊어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응답하셨다 하더라도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데는 하나님의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에게는 크로노스의 시간으로 나타나지만 하나님에게는 카이로스의 시간에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잉태되는 순간부터 어느 누구든지 1개월이나 2개월 만에 태어난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도 10개월 동안 마리아의 몸에 계시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창조의 법칙입니다. 사과 씨를 심으면 그것이 싹을 틔우고 자라서 사과 열매를 맺을 때까지 과수원 지기에게는 크로노스적인 시간과 인내가 필요한 것처럼 우리의 영적인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주어졌다는 사실 자체는 이미 영적으로 하나님의 결재가 나타난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제원호 교수님에 의하면 이미(already)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현실 가운데 나타나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이걸 아직(not yet)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미와 아직 사이에 산다는 것입니다. 그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영적인 강도가 있습니다. 그게 사탄입니다. 사탄이가 자꾸 하나님을 의심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말씀을 교묘하게 변형을 시키거나 의심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우리가 선을 행하되 절대로 낙심하지 말라.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반드시 거둘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갈6:9) 저는 장로님과 권사님 부부를 통해서 심고 거두는 법칙, 물리학적으로는 물질과 에너지의 등가원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정말로 위로가 되고 희망이 된 것은 저 역시도 이미와 아직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도 이미와 아직 사이에 살고 계십니다. 우리에게는 아직이라고 하는 희망이 있습니다. 함께 이 글을 읽으면서 한번 이렇게 외쳐보면 좋겠습니다. “내게 아직의 축복이 남아 있어. 내게 아직의 은혜가 남아 있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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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4-08-25
  • [언론회 논평] 25만원으로는 결코 민생 회복이 안 된다
    2016년 스위스에서는 일을 하든, 하지 않든지 간에 정부에서 성인에게는 월 약 300만원, 청소년에게는 약 78만원을 주는 기본소득 지급에 대한 국민 투표를 했다. 그때 스위스 국민들은 유권자의 77%가 정부에서 기본소득금을 주는 것을 반대하였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현실적으로 재정 부담이란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정부가 국민들에게 기본소득금을 무상으로 준다고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국민들의 주머니를 끌러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공짜인가?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더불어민주당이 주도한 소위 ‘민생회복지원금법’이 지난 2일 야당 주도로 국회를 통과하였다. 그 금액은 소득 수준에 따라 25~35만원 정도이다. 이는 이재명 대표가 대표 발의한 ‘당론 1호’ 법안이다. 이에 대하여 여당이 필리버스터로 맞섰으나, 24시간 만에 힘에 의하여 강제로 종료시키고, 표결로 들어가 야당 중심으로 통과시켰다. 여기에 들어가는 재원(財源)은 13조원이다.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다. 국민들이 낸 피 같은 세금을 이런 식으로 날려도 되는 것인가? 또 과연 국민들에게 25만원씩 준다고 민생이 회복되는 것인가? 마치 우리 국민들을 25만원으로 낚으려는 저질스러움과 또 이러다 전 국민들을 국가에서 배급처럼 받아 먹는 것에 익숙하게 하여, 국민들을 바보로 만들어 놓고 국가의 정체성을 무너뜨리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마저 든다. 위에서 예로 든 스위스와 우리나라는 여러 모로 상황이 다르지만,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이다. 스위스 국민들이 기본소득금액을 받아도 결국은 스위스 국민들의 세금에서 나가야 하는 것이고, 그에 따른 예산을 맞춰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 25만씩을 준다고 하여도, 13조원의 엄청난 재원을 결국은 국민들이 부담해야 하는 부채다. 한 마디로 야당은 25만원으로 국민들의 환심과 표를 사서, 그들이 원하는 세상을 만드는데 이용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차라리 13조원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마땅한 정책을 마련하여 젊은이들을 위한 일자리를 만들도록 하라. 우리 국민들은 25만원에 넘어가거나 흔들릴 국민들이 아니다. 마치 국민들의 세금에서 선심은 자기들이 쓰고, 국민들의 마음을 훔쳐 가고, 그 주머니를 털어가겠다는 정책은 결코 환영받지 못할 것이다. 이제라도 정치권은 정신 차리기를 바란다. 이런 얄팍한 수준이 당 대표와 제1 공당의 당론 법안이라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가? 이제는 이런 소모적이고, 국민들의 마음을 너무나도 불안하게 하는 입법 독주를 멈추고, 진정으로 국민들을 위한 정당과 정책을 펼쳐 나가기 바란다. 민주당은 이미 여러 번에 걸쳐 수권정당으로 국가를 운영해 왔었다. 그렇다면 이런 꼼수로 국민들이 넘어올 것이라고 함부로 대하는 태도부터 바꿔야 한다. 국민들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신뢰도와 효율성이 뒤떨어지고, 국가와 국민들을 위해야 할 정치권, 특별히 ‘입법독재’를 일삼는 정치 권력들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걱정이 크다.
    • 칼럼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4-08-21
  • [언론회 논평] 존엄사인가? 안락사인가? 자살방조인가?
    정치권에서 2년 전에 폐기된 소위 ‘안락사’를 시행할 수 있는 법률안을 발의하였다. 지난 7월 5일 더불어민주당의 안규백 의원이 발의하고, 같은 당의 정진욱, 문대림, 김준혁, 안도걸, 권칠승, 이건태, 박홍배, 양부남, 문금주 의원과 조국혁신당의 조국 의원이 공동 발의하였다(의안번호: 1412) 이들이 발의한 ‘조력존엄사에 관한 법률안’에 보면, 현재 법률로는 말기 환자들이 극심한 고통 속에서 오랜 시간 보내야 하는 현실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러면서 의사의 조력을 통하여 환자 스스로 삶을 종결할 수 있도록 함으로, 삶의 질을 고려한 존엄한 죽음을 보장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대상은 본인의 의사(意思)로 담당 의사(醫師)의 조력(助力)을 통해 스스로 삶을 종결하는 것으로 정의한다고 한다. 또 이는 ‘형법’에 따른 ‘자살방조죄’의 적용을 배제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즉 스스로 죽음에 이르는 것을 법제화하고 그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것이다. 물론 오랫동안 질병으로 말기 환자처럼 고통을 당하는 것을 환자들이 경험하는 것은 힘겨운 일이다. 그러나 인간의 수명은 신(神)의 영역인데, 이를 사람들이 법률로 정하여 시행한다는 것은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 된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으면 ‘살인’이 된다. 비록 의사라 할지라도 죽는 것을 도와주는 것은 일종의 살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2018년부터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중단하는 소위 말하는 ‘소극적인 존엄사’는 허용되고 있다. 그러나 환자가 약물 처방을 받아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조력 존엄사’나 의사가 환자에게 직접 약을 투여하여 죽게 하는 ‘안락사’는 금지하고 있다. 세계에서는 조력 사망이나 안락사를 허용하는 나라들도 약간 있다. 콜롬비아, 우루과이는 안락사를, 캐나다,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포르투갈, 스페인, 뉴질랜드, 호주의 일부 주에서는 조력 사망과 안락사를 모두 허용한다. 그리고 조력사망을 허용하는 나라는 미국의 10개 주,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스위스 등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인간의 생명을 인간이 주도적으로 마감하려는 것은 신에 대한 도발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제22대 국회에서도 전에 보다 적극적인 살인의 방법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물론 말기 환자들의 고통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고통까지도 신이 내린 인간의 수명이라면, 그것을 함부로 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것은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 한다. 22대 국회가 개원한 지 불과 2달밖에 안 되었는데, 법안 발의가 2,353개가 된다. 그중에 탄핵안, 증언 출석안을 뺀, 일반 법안만도 2,289개에 이른다. 의원 1명이 1주일에 한 개의 법안 발의를 양산하고 있다(선진국에서는 불과 몇 십개 정도의 법안만이 만들어진다고 한다) 도대체 그 법안을 발의한 국회의원이나, 공동 발의한 국회의원들은 그 내용과 후에 나타날 문제점을 알기나 하면서 법률안을 발의하고 제정하고 있을까? 그런 가운데 ‘조력존엄사’에 관한 법률안도 그 속에 들어간 것이라면 끔찍한 일이다. 법률안은 한번 만들어지면 다시 고치기가 쉽지 않다. 더군다나 사람의 생명에 관한 것은 당장에 어떤 분위기에 의한 것이 아니라, 법이 악용되거나 남용되었을 때의 부작용도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신의 영역을 도발하여 진노를 사는 일이 없어야 한다. 전 세계가 다 ‘존엄사’나 ‘안락사’를 허용한다고 하여도, 우리나라만은 그런 법률이 만들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인간의 참된 존엄이 질병으로 인한 고통을 인위적으로 중단시키고, 생명을 단축시키는 것에 있다는 확증이 어디 있는가? ‘조력존엄사’ 법률이 만들어진다면, 우리나라는 광범위하게 자살과 살인을 방조하는 나라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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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4-08-21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무엇을 탐구하며 생각하십니까’(골 3장1-4절)
    우리가 무엇에 마음을 기울이고, 무엇을 찾고 탐구하는가는 우리의 삶의 목표 설정과 함께 우리의 삶에 직접 관계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주된 관심과 목표를 땅에 둘 것이 아니라 위엣 것에 두어야 하겠습니다. 땅의 것은 현세적이며, 자기중심. 세상 중심. 물질중심의 삶을 뜻하는데 이러한 삶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에 방해가 되고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았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자들이기에 위엣 것을 찾고 생각해야 합니다(1-2절). 우리는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늘 하늘나라를 생각하며 살아야지 이 복잡하고 사악한 세상에 붙들리면 안 됩니다. 위에 것을 생각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의 관심과 마음과 생각 모두가 하나님 중심. 그리스도 중심, 말씀 중심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생각이 주님께서 계신 하늘나라에 집중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고 신분적으로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올라가 있는 자들입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5-6).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함께 다시 살아난 새 생명의 소유자이기에 우리의 삶이 영광의 그리스도를 삶의 모든 것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실제로 성도에게 있어서 모든 것의 근원이시오 지혜와 능력과 지식과 힘과 진리와 복의 근원이십니다(고전 1:24 ; 골 2:3). 이 모든 것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소유한 성도의 바람직하고 합당한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 마음과 정신은 여전히 세속적인 것들에 열중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헌신한 이후에도 이전과 동일한 신념이나 욕망 그리고 태도를 계속 지속하며 개인적인 목적과 계획 그리고 자기 자신의 우선순위에 따라 계속 살아가는 이러한 태도의 근본적인 전환과 가치관의 재정립이 요구되었기에 위엣 것을 찾고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을 찾고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땅에서 살지만 우리의 생각과 목적과 뜻이 모두 위에 속한 것들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도 사랑도, 소망도 소원도 자랑도 기쁨도 다 위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항상 그리스도 중심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늘의 시민권자이지만 현재는 세상에 몸담고 있으므로 세상의 일에 대해서는 ‘나 몰라라’하고 그리스도만을 위해 하늘만 바라보면서 마치 구름 위에 떠서 다니는 것처럼 살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과 마귀가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도록 모든 생각과 관심의 초점을 이 세상이 아닌 하늘나라의 일, 즉 보좌에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맞추어야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 지상에서 우리들이 주님과 동행하는 삶은 현재 보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 숨겨져 있는 삶입니다(4절). 숨겨져 있는 삶이 주님 재림하실 때, 모두가 주님의 영광중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주된 관심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에 두며 하나님의 영광과 천국에 두며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집중하여 힘써 나갑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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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21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잠을 자도 주일예배, 일어나도 수련회
    지난 목요일에는 다건연세내과에 가서 수액을 맞았습니다. 며칠 동안 죽을 먹어도 설사를 해서 몸을 가눌 힘이 없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주일 밤예배까지는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신 것 같았습니다. 물론 주일 1부 예배 설교를 2부 예배 때 영상으로 전했지만요. 오죽했으면 그랬겠습니까? 주일에도 설사를 했지만 설교 때는 참을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주일 밤부터 본격적으로 그동안에 쌓였던 긴장과 스트레스를 온몸으로 쏟아낸 것 같습니다. 오죽하면 자다가도 침대에 설사를 했겠습니까? 그래서 다건연세내과에 가서 영양수액을 맞고 피검사도 해봤습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검사 결과가 영양실조 혹은 영양 불균형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데는 다 문제가 없는데 탈수로 인한 영양실조, 영양 부족이라는 것입니다. 참 어이가 없었습니다. 하긴 며칠 동안 탈수를 해버렸으니 그럴 수밖에 없지요. 지금까지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제 평생 처음입니다. 너무나 기진맥진해서 잠을 잤는지 눈을 감고 있었는지 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비서인 송종호 안수집사가 와서 저를 깨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다짜고짜 물어봤습니다. “지금 몇 시요?” 그랬더니 “1시가 넘었습니다.” “왜 이제 나를 깨워! 주일예배는 어떻게 하고? 주일예배 드려야 되잖아!” 송 집사가 대답을 했습니다. “오늘은 주일이 아니라 목요일입니다.” “그러면 수련회 준비해야지! 왜 이제 깨워요?” 송종호 안수집사도 어이가 없다는 듯이, “수련회는 지난주에 했잖아요.” “아, 그런가...” “2시에 손님도 오기로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송종호 집사의 말에 약속된 일정이 생각이 났습니다. 비틀거리며 차에 타는 순간 “아, 나는 잠을 자도 주일예배, 일어나도 온통 수련회 생각뿐이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 제 무의식상에서 주일 2부 예배를 영상으로 설교한 것이 마음의 짐이 된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만큼 여름수련회에 대한 긴장감이 아직도 가시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수련회 기간 동안 말할 순 없지만, 저에게 스트레스를 준 몇 가지 원인이 있었거든요. 성도들에게 은혜를 끼치려니 악한 영이 저를 흔들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요나처럼 욱할 수도 없고요. 욱할수록 저는 더 사명을 붙잡았습니다. 그래서 자다가도 주일예배, 일어나도 여름수련회를 외쳤던 것이죠. 그렇습니다. 우리는 욱하는 성질을 이겨내야 합니다. 욱할수록 사명을 붙잡아야 합니다. 내 안에 요나 콤플렉스를 이겨야 합니다. 요나보다 더 큰 분을 만나며 요나서 5장의 사명 감당을 해야 합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4-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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