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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덤으로 살고 덤으로 쓰임 받다”
    지난 월요일에는 제 모교인 군산제일고등학교를 방문하였습니다. 방문 목적은 한국 기독교 선교 140주년을 맞이해서 전킨 선교사의 선교 흔적을 취재하기 위해서 일간지 기자들과 함께 간 것입니다. 전킨 선교사가 호남 최초로 군산제일고를 세웠거든요. 거기 가니까 지난번처럼 교장 선생님이 따뜻하게 맞이해 주셨습니다. 근데 도착하자마자 어느 기자가 “소강석 목사님이 공부한 교실부터 보여주세요.”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교장 선생님이 이렇게 대답하는 것입니다. “지금 본관이 리모델링 중이어서 죄송합니다. 보여드릴 수가 없습니다. 대신 역사 기념관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러더니 역사 기념관으로 안내하셨습니다. 저도 기자들과 함께 그곳에 들어가 “와”하고 탄성부터 내질렀습니다. 진짜 말로만 듣던 저의 사진이 거기에 걸어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군산제일고를 빛낸 인물 중에 한 사람으로 제 사진이 걸려 있었습니다. 왜 제 사진을 걸어놨냐면 2015년도 <시사 저널>에서 대한민국을 이끄는 인물 100명 중에 한 사람으로 선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2021년도에 한교총 대표회장이 되었다는 이유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저는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교회를 다니면서 학교에서는 완전 비주류가 되었습니다. 교회에 완전히 미쳤다고 기숙사에서 쫓겨나다시피 퇴사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자취를 하며 마음대로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 당시로서는 학교에서 저는 내놓은 자식이고, 교회에 완전히 빠져 있는 놈이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저는 공부를 게을리하는 대신 열심히 새벽 기도를 다녔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부지런히 회지를 만들고 중고등부 학생회를 이끌어 갔습니다. 그런 가운데 저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이러저러한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광주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광주신학교 4년을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개혁신학연구원에서도 3년 동안 공부를 했습니다. 그렇지만 당시 저는 오갈 데가 없었습니다. 누가 저를 써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저는 부목사로 훈련받을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로지 저에게는 교회를 개척하는 길뿐이었습니다. 개척 멤버 한 명도 없이 말입니다. 개척 멤버가 있다면 저희 집사람이고, 정 권사님이고 배영수 장로였습니다. 감사한 것은 제일 멀리서 살았던 김정호 장로님이 낮 예배에 참석해주셨습니다. 그래도 저는 개척 목회자 가운데도 마이너리거였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개척교회 목회자들은 대부분 친인척들이 모여서 수십 명이 되는데, 저는 그러지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부지런히 전도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끝없이 공부하고 학교에 다녔습니다. 다시 학사학위, 석사학위, 박사 과정까지 다 밟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였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저는 30대 나이에 최초로 천여 평에 달하는 예배당을 지었고, 40대 중반에는 만여 평에 예배당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제가 속해 있던 예장의 개혁 교단이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과 교단이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 가운데 저를 대한예수교 장로회(합동) 총회장과 한교총 대표회장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제가 하고 싶어서 되는 것도 아니고, 노력해서 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정말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였습니다. 되돌아보면 개혁측 출신이 경쟁 상대 없이 무투표로 총회장에 당선이 된 것은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방역을 지키고 현장 예배를 끝까지 드리게 했던 리더십을 발휘하게 했으니 말입니다. 더구나 제가 코로나가 오기 전, KBS에서 “이방인과 3.1운동”이라는 프로그램을 제작하기 위해 모교를 방문하여 특강을 하고 공영방송에 모교의 모습을 보여줬던 적이 있었습니다. 제 모교가 3.1운동을 주도했고 그 배후에 린튼 선교사가 있었다는 이유 하나로 모교에 가서 기념 강연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생각해 봐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뭐 주류니 비주류니 이런 것을 생각해 봤지만, 지금은 그런 것조차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은 사는 것 자체가 하나님 은혜요, 덤으로 쓰임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최근 산불 소식 때문에 마음에 큰 염려가 있었는데, 다행히 큰 불길은 진화가 되었다고 해서 그 또한 하나님의 은혜요, 그나마도 덤이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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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5-03-30
  • [언론회 논평] 국회의장은 지금의 내란에 책임이 없는가?
    현재 우리나라는 대통령을 비롯하여 29건의 탄핵(彈劾) 사건으로 인하여 국정이 마비되고, 국격이 떨어지고, 대외 신인도와 대외교 문제에서도 심각한 공백이 생기고 있다. 어떻게 대통령이 임명하는 중요 인사마다 거대 야당이 완력(腕力)으로 ‘탄핵’을 상시화하는가? 이런 나라가 세계에 또 있는가? 그런 과정과 결과에는 국회의 잘못된 역할이 절대적이다. 국민들은 국회의원들을 ‘국민의 대표’로 뽑았지, 국가 운영을 마비시키는 ‘탄핵 거수기’로 선출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국회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 더불어민주당 출신의 우원식 국회의장이다. 그는 국회에서 국가 요직에 있는 인사들을 탄핵할 때마다 의사당 의사봉을 두드린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12일에는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최상묵 대통령 권한대행의 대행에게 마은혁 헌법 재판관을 빨리 임명하라고 요구하였다. 마은혁은 더불어민주당이 추천한 인사로 여러 가지로 문제점이 많아, 헌재 재판관으로 임명하지 못할 인사로 평가받는다. 아니, 해서는 안 된다. 마은혁 판사는 법조계에서 카르텔을 형성하고, 편향성으로 문제가 많은 ‘우리법연구회’ 출신이며, 더욱 심각한 것은 사회주의 지하 혁명 조직인 ‘인민노련’(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전복하고 사회주의 노동자 혁명을 목표로 한 단체)에서 핵심 멤버로 활동했던 사람이다. 그는 판사 시절에도 정의당의 노회찬 출판 기념회에 당당하게 참석하여 기부하고 정치적 참여와 함께, 이념적 편향성에 대한 논란이 있던 인물이다. 그에 대하여 같은 좌파 운동과 노동운동을 했던 김문수 고용노동부장관은 ‘마은혁은 마르크스-레닌주의자였고, 그가 헌재 재판관으로 임명된다면 전체가 사상적으로 오염되므로, 헌재 재판관으로의 임명은 안 된다’고 강하게 주장하였다. 그런데도 우원식 국회의장은 대행의 대행에 불과한 최상목 장관에게, 마은혁을 헌재 재판관으로 임명하지 않는 것은 입법부와 헌재를 얕잡아 보는 것이며, 위험천만한 일이라고 맹비난하였다. 우 의장은 왜 모르는가? 국회가 하는 일마다 국민들로부터 얕잡아 보이는 일들만 하고 있고, 국회의장 자신은 이 나라를 위험천만하게 만들어 가는 장본인이 되고 있음을. 어떻게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일들을 해 온 마르크스-레닌주의자를 헌법 체계에서 가장 중요한 ‘헌법 재판관’에 임명하라고 윽박지르는 것인가? 더불어민주당이 추천할 헌법 재판관 후보자가 마은혁 말고는 없는 것인가? 우원식 국회의장은 다수당의 힘과 횡포를 뒤집어쓰고, 현재 대한민국을 위험하게 만드는 인물이 되었다. 더불어민주당과 야당은 대통령 탄핵을 가볍게 본 모양이다. 그러나 절대 다수의 국민들이 대통령 탄핵을 반대하고 있고, 더군다나 20, 30대 젊은 층이 깨어나니, 매우 불안하고 조급해진 모양이다. 그렇다고 국회의장인 입법부 수장이 명예와 체면도 구기면서 민주당을 돕기 위하여 발 벗고 나선 것은 딱한 일이다. 그는 지금까지 국회가 힘의 논리로 수많은 탄핵 소추를 결정할 때, 가장 앞장 선 사람이다. 국민들은 그의 표정을 기억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7일 첫 번째 대통령 탄핵 소추안이 표결에서 부결이 되자, 울먹울먹하며 잠시 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모습이다. 참으로 낭패스런 광경이었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27일, 대통령 권한 대행인 국무총리의 탄핵소추안을 통과시킬 때 투표에 앞서, ‘재적 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의결 한다’고 하였다. 이는 ‘헌법 해설서’를 무시한 것이다(여기에서는 권한대행의 탄핵 의결 정족수를 의원 3분의 2로 봄) 그러면서 권한대행은 대통령직으로 보아, 자기들이 추천한 마은혁 등을 헌법 재판관으로 임명해 달라는 요구를 한 것이다(헌재 재판관 임명은 대통령만 할 수 있음) 그런데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탄핵 소추 의결은 총리와 장관급으로 낮춰 처리하는 이중적 행보를 보여 주었다. 나중에 이 문제는 헌재에서도 대통령 탄핵에 대한 심문에서 다뤄졌는데, 헌법 재판관이 묻기를, 왜 국회의장이 그 중요한 문제를 의원들에게 가부를 물어보지 않고, 단독적으로 선언하듯 처리했는가를 확인하기도 하였다. 즉 국회의장이 지나치게 자신감(?)으로 독단적으로 졸속 처리한 것이다. 잘못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우원식 국회의장은 지난 2월 7일, 나라가 혼란하고 시끄러운데, 중국의 하얼빈에서 열리는 동계아시안게임 개막식에 참석하였다. 그는 이때 시진핑 중국공산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인 시진핑을 만났다. 문재인 대통령 시절에 문재인 대통령도 만나기 어려워 8끼를 ‘혼밥’하다 왔는데, 국회의장은 단번에 시진핑을 만나게 된다. 과거 문재인 정부 때 국회의장이던 박병석, 문희상 의원도 시진핑을 만나지 못했었다. 결국 우원식은 시진핑을 쉽게 만났으나, 상호 대등한 관계가 아닌 면담이나 접견쯤으로 만난 것이다. 인민일보도 ‘회담’이 아니라, ‘회견’(會見)으로 보도했다고 한다. 동계아시안게임 개막식에 중국을 찾은 외빈은 파키스탄, 키르기즈스탄, 브루나이, 태국 정도의 정상들이 온 것으로 알려진다. 분명히 국회의장은 내란(內亂-국가를 혼란하게 하는 일)의 책임이 있다. 윤석열 대통령 정부 출범 이후 더불어민주당은 29건의 ‘탄핵소추안’을 발의하였다. 그중에 우원식 국회의장이 맡은 제22대 국회에서는 18건이 있었다. 처리된 것을 보면, 자진사퇴로 폐기된 것이 4건, 폐기 1건(대통령 건인데 다시 가결) 헌재에서 기각된 것이 5건, 가결로 진행 중인 것이 8건이다. 그중에서도 이재명 대표와 관련된 수사를 맡은 검사들에 대한 탄핵소추안도 4건이나 되는데, 쌍방울 대금 송금, 대장동, 백현동 비리 등과 관련된 문제이다. 이러한 일에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한 국회의장이 또다시 자격 없는 헌재 재판관을 임명하라고 압박하는 것은 결국 국회의장이 더불어민주당의 집사(執事)라는 것인가? 우리 국민들은 수준 높은 국회의장을 원한다. 자신이 속했던 당이 잘못하면, 오히려 그것에 대하여 꾸짖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막아야 한다. 국회에서 국회의장을 뽑은 것은 대한민국에서 ‘삼권 분립’의 중요한 역할을 제대로 감당해야 할 ‘입법부’의 책임과 정의, 명예와 권위를 세우라는 것이다. 국회의장은 일개 국회의원과는 사뭇 다른 품위와 인격, 그리고 국가의 존망에 대한 엄중한 책임감을 가지고 행동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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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3-26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완전한 구원자 예수’(눅 9:28-36)
    예수께서는 변화산 사건 직전에 베드로에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신앙고백을 들으셨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가 바로 메시아이신 것을 드러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과 부활을 함께 드러낸 것이지요. 예수께서 우리 각자를 향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실 때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예수님에 대한 개인적인 고백을 해야 합니다. 의심 많던 도마는 마침내 부활하신 예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도마의 고백이 우리 각자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알려주신 수난 예고로 사기가 크게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께서는 영원한 천국의 영광을 미리 보여주심으로써 십자가 수난이 과정이지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렇게 제자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셨습니다. 본문은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그들이 무서워하더니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고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기도하시러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들이 보는 앞에서 예수님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게 되었습니다. 문득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더니 예수님과 말하고 있었습니다. 예수의 영광을 본 베드로가 초막 셋을 짓겠다고 말할 때에 구름이 그들을 뒤덮었고, 구름 속에서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예수께서 변화산상에서 그 모습이 변모된 사건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즉 메시아라는 사실과 장차 수난을 받으실 것과 다시금 주님의 영광을 회복하실 것을 알려주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여기서 모세는 율법을, 엘리야는 예언을 말합니다. 즉 구약의 율법과 예언을 이루는 길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변화산 사건은 예수님은 완전한 구원자이심을 알려주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우주적인 사건입니다. 기도하시던 예수님이 변화되시어 옷이 희어지고 광채가 났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한 것입니다. 기도할 때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주님과 함께한 제자들은 그 기도의 능력을 경험한 것이지요. 그때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영적인 눈이 열려 보지 못한 것을 보게 되었고, 귀가 열려 듣지 못한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때의 체험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벧후 1:16-18)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에서 별세는 ‘출발, 밖으로 나가다, 어디로 향하는 길’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영어성경에서 별세는 출발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별세는 예수님이 돌아가신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가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죽음을 출애굽으로 보았습니다. 애굽은 하나님 통치 없는 곳으로 하나님 없이 사는 세상을 말합니다. 그래서 출애굽은 죽을 자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 구원의 은혜를 절대로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다음날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께서는 귀신들린 아이 아버지의 간청을 들으시고 그 소년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악한 귀신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낫게 하셔서 그 아버지에게 돌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보고 놀랐습니다.(눅 9:37-43) 구약의 가장 큰 부분이 이스라엘이 기적적으로 구출된 출애굽입니다. 신약은 십자가 사건입니다. 즉 출애굽과 십자가는 하나입니다. 출애굽 사건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죄 용서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사랑을 어떻게 보답할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일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거기서 속량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신 24: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믿기 전 사탄의 종노릇한 것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죄 사함 받은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과 부활을 전하는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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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3-26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김호연 목사의 ‘이 시대의 사무엘들을 찾음’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 성경은 그 시대를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던“ 시대라고 기록하고 있다(삼상 3:1). 그 시대는 사사 엘리가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로서 마지막을 보내던 시대였는데, 성경에 의하면 그는 눈이 어두워져 처소에 누워있기를 밥 먹듯 했던 것으로 보인다(삼상 3:2). 그는 육신적으로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분별력을 잃어 가고 있었고, 따라서 자신의 아들들의 비리조차 꾸짖지 못하는 그러한 상태였다. 과연 이러한 시대에 이스라엘의 소망은 무엇이며, 누가 하나님의 뜻을 저들에게 전하여 이 민족을 바로 인도할 것인가?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고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워 있었다”고 했다(삼상 3:3). 하나님은 그런 사무엘을 불렀다(삼상 3:4).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점을 발견한다. 그것은 첫째, 이 민족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이상이 희귀한 시대라도 하나님의 등불이 남아있는 한 소망은 있다. 하나님은 이 민족을 버리지 아니하고 사무엘과 같은 사람들을 통해 이 민족을 각성시키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로 돌아오게 할 것이다. 둘째, 하나님은 사무엘과 같은 사람들을 예비하여 훈련시키시고 그들을 불러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게 하리라는 사실이다. 사무엘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손에 맡겨져 훈련받은 사사요, 선지자였다. 그는 항상 하나님의 장막, 여호와의 궤 앞에서 잠을 청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늘 하나님과 가까이하기를 힘썼던 것이다. 그는 거기서 무엇을 했겠는가? 말씀의 훈련을 받았을 것이고 기도로 하나님과 교통하는 종으로서 훈련받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이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인 줄 몰랐다. 그는 선생 엘리가 부른 것으로 착각하고 두 차례나 선생에게 가서 “부르셨냐?”고 물었다. 엘리도 얼마나 영안이 어두워졌던지 두 차례나 그것이 하나님의 부름인 것을 깨닫지 못하고 “가서 자라” 했다. 그리고 세번 째서야 비로소 하나님이 그를 부른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부르시거든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하라 했다(삼상 3:9). 비록 노쇠한 엘리였지만 사무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를 이어 하나님의 종으로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데 마지막 소임을 다 한 셈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하나님이 사무엘을 불러 하신 말씀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엘리의 두 아들의 불의함을 보았고 그들을 심판하리라는 말씀이었다. 엘리는 사랑하는 제자 사무엘의 입을 통해 이 말을 다시 듣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미 엘리에게 이 뜻을 전했지만, 그는 아들들에 대한 저주를 자청하면서도 정작 그 자신이 나서 아들들의 비리를 금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삼상 3:13). 부정(父情)에 끌려 아들들을 망친 셈이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가 이와 같이 되지 않았는가? 영안이 어두워져 이상이 희귀한 시대가 되지 않았는지? 인간적 정리(情理)에 휘둘려 스스로의 죄조차 씻어내지 못하고 있는 처지에 빠져 있지 않은지? 최근 일부 모범이 되어야 할 위치에 있는 교계 인사들의 메시지나 행태를 보면서 과연 이 시대가 엘리의 시대와 같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불의한 세력이 나라를 뒤 흔들고 무도한 행위를 서슴지 않는 것을 보면서도 그들은 어째서 비겁하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말씀 뒤에 숨는가? 이 말씀은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할 것을 말한 것이지 네 자신이 심판의 위치에 서라는 말은 아닐 터다. “용서하고 화합하라”는 메시지를 듣기 좋으나 그것을 사단마귀의 세력에까지 확대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을 말씀에 근거하여 영적으로 분별하여 선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무분별하게 섞어 얼버무리는 것은 옳지 않다. 한 때 존경받는 위치에 있던 분들이 이로 인하여 삯군이라는 소리를 듣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다. 현 시국 한국교회는 사무엘의 영성으로 무장돼야 하리라. 그는 이스라엘 민족을 위로하면서도 경고했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고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치 않겠다 했다(삼상 12:20-25). 그래도 박조준 목사님이나 김진홍 목사님 같은 원로들이 계신 것에 감사한다. 전광훈 목사님이나 손현보 목사님 같은 분들이 주동이 되어 교회를 일깨우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함에 감사한다. 주류 신학교 교수들이 좌경화 되어 대통령 탄핵을 외치는 와중에도 학생들이 일어나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함에 감사한다. 한국교회는 쇄신되어야 한다. 나라와 민족을 살리고, 장차 하나님이 이 민족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비전을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 이 시대의 사무엘들을 찾음. 하나님의 부름에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성심으로 응답하는 종들이 더 많아지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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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3-23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탄식하는 인간, 감탄하시는 하나님
    저는 요즘 하루에 한 번 혹은 이틀에 한 번은 꼭 정 권사님이 거하시는 방에 들어가서 기도를 해드리고 옵니다. 갈 때 말동무는 못 되더라도 잠시 기도를 해드리고 오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해서지요. 목요일 저녁은 지하 계단에서부터 8층까지 걸어 올라갔는데 그 순간 배영수 장로님 부부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것입니다. “짜고 치고 오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이렇게 그 순간에 복도에서 만날 수가 있을까...”라고 생각하며 같이 들어갔는데, 갈 때마다 정 권사님은 성경을 보시거나 기도를 하고 계십니다. 성경을 읽으실 때는 불을 밝게 켜놓지만 기도할 때는 전기세를 아낀다고 불을 끄고 캄캄한 상태에서 기도하고 계시는 거예요. 그래서 저랑 배영수 장로님이랑 탄식하는 말씀을 해드렸습니다. “지하 전 층과 1층, 모든 복도에 다 불이 켜져 있는데 어머니가 방에 불 하나 켜 놓는 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사람 깜짝 놀라게 하지 말고 불 좀 켜놓고 기도하세요.” 그런데 제가 한 번은 이런 적이 있습니다. “왜 이렇게 기도만 하고 계세요. 좀 쉬면서 하세요. 성경도 꼭 읽으려고만 하지 말고 누워서 묵상을 하셔도 돼요.” 그랬더니 “아니네. 나는 성경이 너무너무 재미있고 기도가 나의 사명이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이라네. 하나님께서 왜 나를 살려두셨겠는가? 기도하라고 살려주신 거라네.” 그때 문득 몇 년 전에 정 권사님의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어느 대학병원에서 정 권사님이 폐 CT 촬영 결과 폐암 진단을 받으셨거든요. 제가 얄궂게 물어봤습니다. “암으로 돌아가시면 어쩌시려구요?” 그랬더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무 걱정도 안 하네. 죽으면 천국이고 살면 기도지...” 하여튼 정 권사님은 생에 대한 탄식이나 후회, 갈망 같은 것이 전혀 없으셨습니다. 그냥 무조건 감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때 제가 이렇게 대답을 하였죠. “천국 가시더라도 암으로 돌아가시지 마시고 유언을 잘 남기시고 편안하게 가세요.” 그 이후로 조직검사를 해봤는데 결과는 폐암이 아니었습니다. 사실은 정 권사님도 인간인데 폐암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생에 대한 갈망의 의지가 들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정 권사님은 오히려 암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보다는 영원한 천국에 대한 젠주흐트(Sehnsucht)가 컸습니다. 젠주흐트라는 말은 독일어로 향수의 개념이 강하게 내포되어 있는 갈망이나 열망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정 권사님의 마음은 한결같습니다. 제가 올라갈 때면 “뭐하게 올라왔는가, 내가 대신 기도할 테니까 소 목사는 좀 쉬소.” 얼마나 다정다감하게 따뜻한 손을 잡으면서 그렇게 부탁을 하는지 모릅니다. 이러한 정 권사님이 왜 이렇게 부러운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저에게도 젠주흐트라는 향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무래도 내세에 대한 젠주흐트보다는 우선 이번 주에 어떤 설교를 하고 어떤 글을 써야 하는 부담감이 가득합니다. 어떨 때는 저도 정 권사님처럼 늘상 기도만 하고 성경만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성경을 보고 기도하는 순간 새로운 워딩을 해야되고 메모를 해야 되거든요. 저에게 주어진 사명과 정 권사님의 사명이 조금은 다를 수 있지만 구순이 다가오도록 오직 기도, 오직 성령으로 살아가는 정 권사님은 하나님의 큰 복을 받은 분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시편을 보면 탄식의 시(파괴적인 외침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외침의 시)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탄식의 기도를 들으시고 다 응답을 해주셨지만 정 권사님과 같은 젠주흐트의 기도를 들으시면 얼마나 하나님께서 감탄해 하시겠습니까? 탄식의 기도도 기뻐하시거늘, 감사의 기도와 찬양을 얼마나 기쁘게 받으시겠습니까? 정 권사님을 뵐 때마다 항상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나도 저렇게 오래 살 수 있을까, 저렇게 오래 살면서 오직 기도와 말씀을 붙들고 살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저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몫이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결과일 뿐입니다. 몇 살을 살든지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감탄하시길 빌 뿐입니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종교개혁자들이 외쳤던 구호를 외쳐봅니다. “솔라 스크립투라(오직 성경), 솔라 그라티아(오직 은혜), 솔라 피데(오직 믿음), 솔라 크리스토스(오직 그리스도), 솔라 데오 글로리아(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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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5-03-23
  • [언론회 논평] 선관위는 불법에 불감, 헌재는 감싸기 급급
    요즘 젊은 세대는 기막힌 상황에 놓여 있다. 그래서 그들을 ‘5포 세대’라고 한다. 즉 연애, 결혼, 출산, 내집마련, 인간관계를 포기한 것을 말한다. 참으로 딱한 현실이다. 그런데 이런 젊은이들과 국민들을 실망시키는 사건이 벌어졌다. 선거관리위원회가 수많은 채용 비리를 저질러왔다. 선관위는 지난 10년간 291차례의 경력직 채용에서 878건의 규정 위반을 한 것이 감사원에 적발되었다. 선관위의 채용 비리는 공고도 없이 직원 자녀를 내정하거나, 내부 인사로 시험위원을 구성하여 직원의 자녀들 면접 점수를 조작하였다고 한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이런 조직적인 범죄를 국가기관이 저지르고도 태연하단 말인가? 또 직원들은 성실하게 근무도 않은 경우도 있고, 규정 위반을 하면서 근무 시간을 봐주고, 그야말로 세습과 봐주기와 서로가 나눠 먹는 일을 거리낌 없이 했다고 한다. 그리고 감사가 시작되니 비리 관련 자료를 없애는 방법도 썼다고 한다. 오죽하면 국회가 친인척 자료를 요구하자, 별도로 관리를 안 한다고 했다니, 이 기관은 썩을 대로 썩은 ‘마피아 집단’과 같다. 이런 기관에 모든 선거관리를 맡겨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지난 2023년 5월 노태악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대법관)이 공식적으로 사과를 했지만, 여전히 그 행태는 뿌리 뽑지 못하는 모습이다. 이들은 국가기관이라기보다 ‘가족회사’와 같은 모습이다. 그런데 국민들을 더욱 경악케 하는 것은 헌법재판소(권한 대행 문형배)이다. 이런 불법이 행해지는 선관위에 대한 감사원의 감사 행위에 대하여, 헌재가 판결하기를 ‘선관위는 감사원의 감사 대상이 아니라’고 감싸기를 하고, 강하게 쐐기까지 박았는데 ‘감사원이 선관위를 감사하도록 감사원법을 바꾸어서도 안 된다’고 친절(?)하게 선관위를 철저하게 보호하는 역할까지 했다. 헌재는 선관위를 감싸면서 ‘1960년 3•15 부정선거로 대의민주주의와 국민주권주의의 위기를 경험한 우리 국민은 헌법적 결단으로 선관위를 설치했다’며, ‘선관위는 독립된 헌법기관이므로 감사원의 감사 대상이 아니라’고 울타리를 쳐 주었다. 헌재나 선관위 고위직은 모두 판사들이 차지하는데, 이번에 헌재에 의한 선관위 판결은 서로가 서로를 봐주는 것은 아닌지? 그러나 법률 전문가들은 선관위가 비록 독립적 기관이기는 하지만, 선거관리 업무가 아닌 직원 채용과 같은 행정적 업무에 대해서는 감사원이 감사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선관위가 한두 번도 아니고, 수백 차례에 걸쳐 이런 비리를 저지르는데도 누구도 그 비리를 밝혀 막지 못한다면, 이것이 어떻게 국민의 세금에서 녹(祿)을 먹는 공직자들의 세계라고 할 수 있겠는가? 속히 국회는 선관위 직원 채용 비리에 대한 ‘특검’을 통해서라도 모든 부정을 낱낱이 밝히고, 이런 조직적, 은폐적, 암흑적 부정을 명명백백히 파헤쳐 바로 잡아야 한다. 우리 실력 있고 정의감에 사로잡힌 젊은이들이 들어가야 할, 국가기관의 자리에 세습하는 가족으로 채우는 음성적 범죄 행위는 즉시 사라져야 한다. 선관위는 누구보다도 공정하고 깨끗하고 투명하고 공평해야 할 국가기관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환골탈퇴(換骨脫退)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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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5-03-16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담임목사로 산다는 것은”
    오랜만에 제주도를 갈 계획이었습니다. 여행을 하러 가는 것은 아니고 집회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저는 1박 2일 동안 세 번의 집회를 인도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집회를 앞두고 다리 운동을 좀 무리하게 했었나 봅니다. 지하 3층에서부터 지상 9층까지 여러 번을 오르락내리락하고 나서 다음 날 봤더니 피부 이식을 한 발뒤꿈치 부분이 빨갛게 성이 나 있더라고요. 수술한 병원에 가보니까 무리하면 일시적으로 그럴 수 있다고 앞으로 무리하지만 않으면 괜찮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총회 관계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제주 일정을 취소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부고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바로 김찬호 장로님의 빙모이시자 최성복 권사님의 어머니 김혜 권사님이 소천을 하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조문소가 경남 밀양이었습니다. 밀양이라고 하는 곳은 저와 참 관계가 깊은 것 같습니다. 오래전에 밀양이라는 영화가 나왔지 않습니까? 저는 그 영화를 보고 굉장히 분노감을 가졌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사죄의 은총을 마치 비아냥거리기라도 하듯이 만들어졌기 때문이죠. 그런 일이 있고 난 후 밀양시 기독교연합회에서 집회 초청을 한 것입니다. 저는 모든 일정을 다 제치고 밀양으로 갔습니다. 시립체육관에서 집회를 하는데 첫날 너무나 빈자리가 많았습니다. 보통은 그렇거든요. 첫날은 주최 측 동원으로 모이게 되지만 둘째 날부터는 강사의 실력으로 동원이 됩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집회 두 번째 날은 자리가 거의 가득 찼습니다. 마지막 날은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가득 찼습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최성복 권사님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그 집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특별히 주변 교인분들이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저는 김찬호 장로님의 빙부이시자 최성복 권사님의 친부이신 최기주 장로님의 부고 소식을 듣고 조문을 하러 직접 내려갔습니다. 제 생애 두 번째로 밀양에 간 것입니다. 그로부터 정확히 6년 후, 김찬호 장로님의 빙모이시자 최성복 권사님의 어머니이신 김혜 권사님이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정말 조문을 앞두고 많은 씨름을 했습니다. 네비로 찍어봐도 정확히 4시간이 나오는 것입니다. 왕복이면 8시간이고 예배드리고 앉아 위로의 대화를 나누는 시간 포함하면 9시간 이상이 걸립니다. 김찬호 장로님께서는 극구 내려오시지 말아 달라고 사정을 하셨지만 제가 안 내려갈 수가 없었습니다. 내려가면서 어차피 저는 차 안에서 일을 해야 되거든요. 그래서 전날 저녁에 설교 원고를 작성하기 위해 미리 써머리를 했습니다. 가는 길에 주일 낮 설교를, 오는 길에 주일 밤 설교를 불러주기 위해서요. 만약을 대비하기 위해서 발뒤꿈치 상처 부위에도 신경을 써야 했습니다. 갑자기 브레이크를 잡는다든지, 속도를 낸 상태에서 회전을 하는 경우를 대비해서요. 실제로 그런 순간순간들이 몇 번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한 문장 한 문장, 한 단락 한 단락 설교문을 이어가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제가 김찬호 장로님이 아니라면 간접 조문을 할 수가 있죠. 우리 김찬호 장로님은 우리 교회 재정부장을 10여 년을 넘게 섬기고 계시고 십일조도 최상위 그룹으로 하며 클라팜파 회장을 맡고 계시거든요. 그래서 김찬호 장로님 때문에 또 한 번 밀양을 가게 되었습니다. 물론 오가면서 설교 준비를 거의 다 했습니다. 설교 준비를 마칠 때쯤 차에서 좀 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수요예배가 시작될 무렵이어서 유튜브를 켜놓고 수요예배에 참여를 하였습니다. 그날 김선명 목사님이 설교를 하였는데 통상 담임목사가 없으면 부목사가 설교를 하고 기도하고 축도를 하는 게 일반적이거든요. 그런데 비서실에서 담임목사가 오고 있다고 김선명 목사에게 시그널을 보냈나 봐요. 설교를 마치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또 기도하고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냥 목사님이 축도를 하고 끝내시라”고 문자를 보내놨지만, 김 목사는 그 문자를 보지 않고 계속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 거의 10분 가까이 광고하고 찬양하고 기도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은 부리나케 교회에 도착해서 강단으로 올라가서 기도하고 예배를 마무리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생각해 봤습니다. 담임목사로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라고 말입니다. 담임목사가 아니라면 밀양에 갈 필요도 없으며 담임목사가 아니라면 오가는 길에서 그토록 애를 써서 설교 준비를 할 필요도 없으며 담임목사가 아니라면 수요예배가 끝나기 전 부리나케 도착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얼른 보기에는 담임목사에게 많은 힘과 권한과 명예가 주어진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담임목사의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권한과 힘과 명예를 가진 만큼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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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5-03-16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하미자 목사의 ‘중보기도의 힘’(출 32:11-14)
    우리나라는 대한민국입니다. 대한(大韓)은 고종이 최초로 호칭하였고, ‘세상을 밝히는 큰 지도자’라는 의미입니다. 대한민국의 호칭은 매우 중요합니다. 2008년 8월 8일부터 24일까지 중국 베이징에서 올림픽이 개최되었습니다. 그때 204개국이 출전했는데, 대한민국은 17번째 들어가는 순서였습니다. 그러나 중국이 한국으로 격하시켜서 179번째로 입장했습니다. 전 세계 사람들이 20위까지만 관심을 두고 본다고 하는데, 대단한 홍보 효과의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세상을 밝히는 큰 지도자의 사명이 있는 자랑스런 나라입니다. 그 대한민국은 지금 위태위태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를 위해 간절히 중보기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무엇이든지 우리가 주님의 뜻을 따라 구하면 우리의 청을 들어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일 5:14) 그래서 악한 세력이 떠나 이 땅이 고침 받고 주님께서 다시 대한민국을 번영시켜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출애굽한 모세는 백성의 우상 숭배로 하나님께서 진노하실 때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하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주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11-13절)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뜻을 돌이키시어 말씀하신 재앙을 백성에게 내리지 않으셨습니다.(14절) 이처럼 기도는 주님의 역사를 경험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백성이 금 신을 만들어 큰 죄를 범하였을 때도 모세는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 32:31-32)라고 목숨 걸고 기도했습니다. 모세는 기도를 들으시고 인도해주시는 주님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대한민국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 굳건하게 서도록 주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창세기 18장을 보면, 주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에 대한 부르짖음을 듣고 그 안에서 사람들이 엄청난 죄를 저지르는 것을 알고 내려오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주님께서 하실 일을 알고 주님께 가까이 가서 의인이 악인과 더불어 멸망하는 것은 정의롭지 않다고 아뢰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곳의 실상을 다 아시지만 그들에게 회개하여 심판을 면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을 의지하여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간절히 중보기도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공의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의인 50명만 있으면, 45명, 40명, 30명, 20명, 10명만 있으면 그 성을 멸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의인 열 명이 없어서 소돔과 고모라는 유황과 불로 멸망했습니다.(창 19:24) 그럼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는 응답 안 된 것일까요? “하나님은, 들에 있는 성들을 멸하실 때에, 아브라함을 기억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롯이 살던 그 성들을 재앙으로 뒤엎으실 때에, 롯을 그 재앙에서 건져 주신 것이다.”(창 19:2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생각해서 롯을 재앙에서 건져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중보기도의 힘입니다. 에스더 4장을 보면, 에스더는 하만의 음모로 동족인 유다 백성이 멸망하게 되었을 때 모르드개에게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16절)라고 전했습니다. 그렇게 금식하며 기도할 때 주님께서는 유다 사람이 대적들을 진멸하도록 인도해주셨습니다. 금식하면 기도에 더 집중할 수 있습니다. 에스더는 사람의 힘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위기에 직면하자 많은 사람에게 중보기도를 요청하였습니다. 3일 동안 주야로 금식한 것을 볼 때 그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에스더의 고백은 동족을 위해 자신이 죽을지라도 왕 앞에 나가겠다는 결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겠다는 신앙의 결단이지요. 그런 용감한 결단으로 유대 민족 말살정책은 무산되고 오히려 이틀 만에 대적들이 전멸하는 대역전을 경험했습니다. 기도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입니다. 그래서 대한민국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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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3-14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
    지금은 사순절입니다. 사순절은 예수께서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기억하며, 그 은혜를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사순절은 우리의 무거운 짐을 예수께 내어 맡기고 구속한 주만 바라보는 절기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잠 8:17) 사순절에 주님을 간절히 찾아서 뜨겁게 만나기 바랍니다. 본문을 보면,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계시자이시며, 인간의 연약함을 돕는 중보자이신 것을 알려주신 말씀입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려면, 경건 훈련을 해야 합니다. 경건 훈련은 모든 면에 유익합니다. 이 세상과 장차 올 세상의 생명을 약속해 주기 때문입니다.(딤전 4:7-8) 경건은 사랑 실천을 전제로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주며,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약 1:2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순절 경건 훈련으로 회개, 절제, 기도 순으로 말씀을 살펴봅니다. 회개는 신앙생활의 출발점입니다. 우리는 회개해야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회개는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겠다고 결단하는 행위입니다. 회개하는 날은 새롭게 되는 날, 편히 쉬는 날, 상쾌하게 되는 날입니다.(행 3:19) 우리는 회개를 통해 구원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마음 아파하는 것은, 회개를 하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일로 마음 아파하는 것은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고후 7:1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죄인이기에 항상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그것은 심판받을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죄 용서받을 기쁨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더욱 회개하는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죄를 더 짓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가 생각나는 대로 더욱더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하면 우리의 상한 마음을 아물게 해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사 57:15b) 그것이 바로 회개하는 자에게 주시는 놀라운 은혜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열심히 내어 노력하고,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계 3:19) 회개는 오늘 바로 해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히 3:7-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된 자유는 성숙한 절제에서 오는 것이지요. 절제하면 낭비하지 않고 목표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절제는 이웃과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면 모든 것에 절제할 수 있습니다. 절제하는 사람은 성령충만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갈 5:22-23) 사순절에 무엇을 절제해야 할까요? 첫째, 음식 절제입니다. 에스겔 16장을 보면, 소돔성이 멸망한 다섯 가지 이유가 나옵니다. 교만, 음식물의 풍족함, 태평함, 가난한 사람 돕지 않음, 우상 숭배입니다. 음식물의 풍족함은 너무 먹는 것이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과식은 질병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요. 사순절에 음식을 절제하고 영의 양식인 말씀으로 배부른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말의 절제입니다. “말을 조심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지만, 입을 함부로 여는 사람은 자신을 파멸시킨다.”(잠 13: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분노의 말과 부정적인 말을 삼가야 합니다. “속된 잡담을 피하십시오. 그것이 사람을 더욱더 경건하지 아니함에 빠지게 합니다.”(딤후 2: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쓸데없이 지껄이는 잡담은 시간만 낭비할 뿐입니다. 침묵도 중요한 말입니다. 침묵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며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를 맺게 해줍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게 해주는 침묵 훈련을 해보기 바랍니다. 셋째, 시간 절제입니다. “세월을 아끼십시오. 때가 악합니다.”(엡 5: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해야 합니다. 선을 행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하시며 기도하심으로써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새벽에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 없이 아무 일도 하시지 않았습니다. 열두 제자를 택하실 때도 밤을 새워 기도하셨고, 오병이어로 수많은 무리를 먹이실 때도 먼저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도 저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께서는 쉬지 않고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해 주시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삶의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하면, 말씀으로 우리를 고쳐주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끌어내어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시 107:20)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붙잡고 확신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눅 21:3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어야 합니다. 내 안에 기쁨이 충만하면 기도응답이 된 것을 믿기 바랍니다.(요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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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3-10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주님의 뜻을 이해하는 삶’ (엡 5:17~21)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어리석은’이라는 단어는 매우 좋지 않은 단어입니다. 꼭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는 상태나 어른으로서, 성도로서 반드시 당연히 갖춰야 할 조건들을 갖추지 않았을 경우에 주로 사용하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사전적인 의미로 어리석음은 슬기롭지 못하고 둔한 경우를 말하기도 합니다. 어리석음의 반대는 지혜로움입니다. 사람이 지혜롭게 되는 것은, 그것을 원한다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만 되지는 않습니다.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지혜도, 사랑도, 은사도, 믿음도, 아름다운 소망도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귀한 은혜요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사람을 따라, 지혜를 주실 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믿음을 줄 만한 자에게 더 큰 믿음을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달란트를 주실 때도 그 사람의 재능대로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마태복음은 이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마 25:15). 각 사람의 재능에 따라 소유를 맡겨주셨다는 의미 속에는 사람마다 각각 고유한 인격과 역할이 있다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개인 각각의 인격과 역할을 중요하게 여기시지만, 사람에 따라서 일의 운용방식이나 책임과 인품은 제각각 다를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분이시지만, 받는 사람의 마음과 자세는 사뭇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말씀대로 사람은 결코 어리석은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면 어리석은 결정을 하게 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귀하게 생각하시는 것은 막상 눈이 감기고 귀가 닫혀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며, 자신이 스스로 귀하다고 생각하는 일만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 7:6) 돼지에게 진주를 주어도 그것을 알아볼 수 없는 것처럼, 영혼이 잠자고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귀한 자원이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기뻐하실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한, 본문 말씀은 술 취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술 취함은 방탕한 것이라 했습니다. 술은 일반 음식이나 음료와는 달라서 그것을 섭취함으로 끝나지 않고, 다른 어둠의 경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오직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또한, 성도는 서로 화답하며 지내야 합니다. 시와 찬미와 영적인 노래로 서로 이야기하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19절). 교회 안팎에서 성도들이 만나면 주로 어떤 대화를 나눌까요? 사람 이야기, 목사 이야기, 어느 성도 이야기, 사건 이야기 등 다양할 것입니다. 물론 필요한 말을 해야 함이 당연하지만, 기본적이고 근본적으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이야기나, 은혜받은 이야기, 하나님의 전적인 역사하심 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즐거워해야 할 것입니다. 대화를 하면서 서로 간에 영적인 은혜를 누릴 수 있을 만한 주제와 내용이 오가야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계절, 새로운 시절을 맞이하면서 우리에게 주신 삶을 사는 동안, 우리나라와 교회와 각 개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지혜를 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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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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