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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정신 계승하고 빛과 소금 되자-이 상 대 목사
- 한민족이 일본의 부당한 식민통치에 항거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한국의 독립 의사를 세계만방에 알린 날을 기념하는 제97주년 3.1절을 맞아, 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애국지사들과 소리높이 만세를 외쳤던 민초들과 시대정신에 앞장섰던 한국교회를 되돌아 본다.3·1운동이라는 역사적인 운동을 태동시키고 불을 붙이며, 확대한 주도세력이 바로 한국교회 신앙의 선배들이었다. 물론 민족대표 33인의 종교적 성향에서 보듯이 이 운동은 기독교계 이외에도 당시 천도교와 불교계 등과의 연합에 의해 추진된 초종파적인 민족연합운동이었지만, 기독교가 중심이었다. 3·1운동 당시 기독교 교세는 전인구 1700만명 중 2%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이러한 열악한 교세를 가지고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기독교측 인사가 16인이나 참여하였다는 사실은 교회가 얼마나 신실한 지도자들을 양성하고 품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시금석이 된다.3·1운동의 기본은 독립청원이었다. 당시 ‘동양평화’를 내세우며 한국침략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던 일제당국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논리적 반박은 분명 돋보이는 활동이었다. 자신들을 과거의 조선인이 아니고, 세계의 대세를 알고 문명의 정도를 깨달은 ‘신조선인’으로 규정하면서, “조선 독립은 민족요구의 정의인도(正義人道)이며, 필연의 공리천칙(公理天則)으로 확신한다”라고 선언하며, 당당히 옥고를 치루었다.3·1운동으로 핍박을 받은 수원 제암리교회에서는 일본 경찰들이 주민들을 교회에 몰아넣고 문을 잠근 채 사방에서 총을 쏘고 불을 질러 집단학살 하였다. 일제가 만든 통계로도 3월 1일에서 5월말까지 학살된 사람이 7979명, 부상자만 1만 5961명, 검거된 사람이 4만 6948명에 이른다.3·1운동은 당시 서구 열강의 식민지 내지 반식민지 하에서 신음하고 있던 여러 약소민족에게 독립정신과 독립운동의 불길을 일으키는 ‘불씨’가 되어주었다.3·1운동으로 인하여 그 해 4월에 한민족의 독립정신을 세계에 천명하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을 가져오게 되었다. 3·1운동은 개항이후 이 나라의 새로운 지도 이념과 시대정신으로서의 그 위상을 지켜오며 축척해온 자주독립의식을 분출하므로 교회는 많은 피해와 상처를 입었으나, 이 운동을 통해 교회는 민족의 수난과 호흡을 함께한 민족종교로서의 위상을 정립했다. 3·1운동의 초기단계에서부터 기독교인들과 교회가 이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므로 3·1운동을 점화하고 확산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통해 근대사의 흐름을 이끄는 정신적인 지주로서 역할과 자리매김을 가져언 것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보물 같은 전 민족의 재산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3·1운동정신이다. 3·1운동 정신은 빈부의 차이, 남녀의 차이, 양반과 상인의 차이, 지역과 종교의 차이 등 그 시대의 인류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벽을 뛰어넘어 온 겨레가 한 마음이 되었던 민족통합정신이다. 지금처럼 국론 통합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 시대에 3·1운동정신은 우리에게 소중한 자산이다. 2019년이면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있다. 근대사에 끼친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의 역할과 공헌을 재평가하는 작업과 더불어 3·1운동을 전민족적인 평화통일운동으로 재점화하고 확산시키므로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여는데 기여해야 한다.한국교회가 제2의 3·1운동을 재현해야 한다. 탑골공원을 뒤덮으며 독립의지를 불태우던 함성소리가 다시 일어나야 한다. 3·1정신을 계승하는 제2의 주기철, 신석구, 유관순, 김마리아 같은 인물들이 나와야 한국교회는 미래가 있다.제97주년 3·1절을 맞아 교회는 다시 3·1정신을 계승하고 기독교는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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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정신 계승하고 빛과 소금 되자-이 상 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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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된 이들을 위한 교회…임 영 천 목사
- 누가 나에게 신간 서적 한 권을 전해 주었다. 어느 서점에서 사 온 것도 아니고, 그냥 어디서 한 권 얻어온 것도 아닌, 그 책의 저자가 내 앞으로 증정한다는 사실을 명확히 기록해 놓은 기증본 저서였다. 출판기념식엘 갔는데 저자가 대신 전해 달라며 내 앞으로 사인을 해서 주더라는 것이었다. 표지 장정은 매우 소박하고 단순해 보였으나, 쪽수는 정확히 320쪽에 이르는, 제법 볼륨감이 느껴지는 두툼한 책이었다. 작년 말(2015. 12) 기독교 신앙서적 전문 출판사(홍성사)에서 펴낸 목회체험 수기, 달리 표현해 기독교적인 자서전의 성격을 지닌 책이었다. 그 책의 이름은 <황하의 물결>(2015)이었고, 저자는 최황규로 되어 있었다. 나는 저자의 이름을 두어 번 되뇌어 봤으나 누구인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 책을 대신 전해 준 사람의 말이, 저자가 나에게서 배운 적이 있다고 하더라 했다. 그래서 저자의 경력을 대강 훑어보았다. 저자가 20대 초반의 나이(1982년)에 장로회신학대학에 입학한 사실이 보였다. 이로써 저자와 나 사이에 무슨 연결고리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깐 해 보았다. 나는 어느 지방대학(사대 국교과)에서 근무하다가 1980년 5?18 직후 그 직장에서 떨려난 뒤 다음해(1981) 봄 40대 초반에 장로회신학대학의 신학대학원에 입학해 공부하고, 1984년 봄에 그 대학의 일반대학원에 입학하여 더 공부해서 연속적으로 5년간 기독교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때 학교 당국의 배려로 그 대학에 출강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오륙년 동안 장신대 학생들과 강의실에서 만나는 기회를 얻기도 했었다. 혹시 이때 <황하의 물결>의 저자가 혹시 나와 강의실에서 만났던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여부야 아무래도 좋다. 문제는 장신대라는 한 울타리 안에서 40대 초반의 인사와 20대 초반의 인사가 함께 공부할 수 있었던 기회가 우연적이지 않게 주어졌었다는 점이다. 그때로부터 한 세대(世代: 30여년)의 세월이 이미 흘러갔고, 우리는 각기 70대와 50대의 연배들이 되어 서로를 회고할 위치에 서게 된 것 같다. 나는 장신대가 그렇게 진보적인 신학을 가르치는 신학대라고는 보고 있지 않다. 그러나 나는, 내가 그런 신학대학에서 공부했다고 해서 아주 보수적인 신학에만 안주했다고는 스스로 생각지 않는다. 거의 같은 경우가 <황하의 물결>의 저자 최황규 목사가 아닌가 여겨진다. 그 역시 장신대라는 다소 보수적인 신학대에서 공부한 신학도이기는 하지만, 어떻든 결과는, 단순히 보수적이기만 해서는 감당할 수 없을 기독교 사역을 현재 담당하고 있다고 볼 때, 그가 지금은 진보적인 기독교 세계관을 어느 면 수용하고 있는 교역자라고 봐야 할 것이다. 최 목사는 한때 서울조선족교회에서 부목(副牧) 일을 보다가 지금은 서울중국인교회를 설립해 담임목회를 하고 있다. 조선족교회든 중국인교회든 어느 쪽이든 쉬운 목회처가 아니라는 생각이다. 탈북자, 조선족, 중국인 등을 대상으로 사역할 때의 난관이 어떠했는지 이 책 속에는 매우 리얼하게, 아니 드라마틱하게 기록되어 있다. 한마디로 그는 이미 투사가 되어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투사가 되지 않고서는 그런 어려운 사역을 감당해 낼 수가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다.어느 교회에 가서 목회를 할까 망설이는 신참 목회자 앞에는 자신이 목회를 맡게 될 목회처가 여럿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누구든, 할 수만 있다면, 대형교회를 선호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바꿔 생각해 보면, 그런 교회에는 누구든 갈 수가 있다. ‘이’ 목사가 못 가면 ‘저’ 목사가 가겠다고 자청할 것이고, 또 그것도 아닐 때에는 ‘그’ 목사가 가게 될 수도 충분히 있다. 그러나, 소외된 지역의 교회에는 누구든 선뜻 나서는 것은 아니다. 그런 곳엔 ‘그가 아니면 안 될’ 그런 목회자라야만 가게 될 수 있다. 왜냐면 그런 곳은 모두(아니, 거의) 기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독교 목회자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라는 데 그 특수성이 있다고 볼 때, “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길을 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예수께서는 적어도 휘황찬란한 채색의 길은 걸어가지 않으셨을 것 같다. 그래서 소외된 갈릴리 지역 농어민들에게 찾아가셨고, 후에는 맞서 보아야 본전도 못 찾을 예루살렘 성전 지도자들과 대결해서 미움을 크게 샀으며, 끝내는 십자가의 형틀을 자기 어깨에 메고 골고다언덕으로 향해야 했다. 예수께서 걸어가신 어려운 길을 최소한으로나마 걸어가고 있다는 면에서 그(최 목사)의 목회의 길은 매우 독보적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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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된 이들을 위한 교회…임 영 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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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판으로 망한 구한말의 역사를 보라!-유 만 석 목사
- 보도에 의하면 새누리당 종교위원회 위원장 이이재 의원은 (사)한국역술인협회의 제의를 받고 지난 29일 오후1시부터 국회의원회관 2층 소회의실에서 공동으로 ‘혜안의 선각들과 함께 하는 2016 병신년(丙申年) 합동국운 발표회’를 가졌다.새누리당 종교위원회 부위원장인 김주호 박사의 사회로 열린 이날 발표회의 핵심은 식전행사로 오후1시부터 한 시간 동안 4마당으로 펼쳐진 오민경 무속인의 ‘국운융성기원 및 2016년 병신년 운맞이 재수굿’ 이었다.한국민속신앙사전에 의하면 ‘재수굿’은 가정의 안녕과 재복(財福), 자손의 창성(昌盛), 가족의 수복(壽福) 등 집안에 재수가 형통하기를 빌기 위해 계절의 새로운 과일을 신령(神靈)에게 바치며 지내는 넓은 의미에서의 무속제의(巫俗祭儀)이다.재수굿을 벌인 무속인 오경민 씨는 한 언론사와 사전 인터뷰에서 “하늘 문을 열어서 천신에서 재수(財數)를 받고, 부근도장 신령님, 팔도명산의 신령님 등을 위한 굿을 할 예정”이라며, “특히 세 번째 마당은 나라의 태평과 백성들의 안정을 위한 굿을 할 예정”이라고 했다.오 씨의 말대로라면 사실상 29일 국회에서 벌인 굿마당의 핵심은 국태민안을 명분으로 한 ‘부근도장 산신령, 팔도명산 산신령을 위한 산신제’ 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팔도강산 산신령을 위한 제의(祭儀)를 통해 ‘나라의 태평과 백성들의 안정’ 이라는 재수(財數)를 받겠다는 것이다.구한말 명성황후는 무속인들의 굿에 빠져 굿판 경비로 국가재정을 고갈시키고, 굿판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매관매직으로 국법질서를 문란케 하여 결국 국가를 일본에 내주지 않았는가! 명성황후는 일본에 의해 시해당한 것도 모자라 그 시신마저 불에 태워져 한줌의 재로 돌아가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국모가 굿판에 빠지니 사대부 양반집 아녀자들도 앞 다퉈 굿에 빠지고, 서민들도 굿에 미쳐, 온통 나라가 굿판이 되어 몰락한 것 아닌가?명성황후의 국태민안을 명분으로 한 굿판은 결국 자신도 처참한 종말을 맞이하고, 국가도 파멸시키는 무서운 재앙을 불러들였다. 한반도를 강점한 일본이 오죽했으면 순사들을 동원하여 도처에서 성행하는 굿판을 단속하게 하고, 조선의 굿판에 대해 심도있는 연구를 하게 했겠는가?무속인들이 사가(私家)나 자기들의 경내에서 굿판을 벌이는 것을 누가 말하겠는가? 그러나 대한민국의 국정을 책임지는 여당인 새누리당의 종교위원회가 역술인들과 공동으로 민의의 전당인 국회 내에서 굿판을 벌였다는 것은 불과 130여 년 전 국가를 재앙의 빠뜨린 그 위험에 전철을 밟는 것으로 무책임하고 위험한 처사이다.굿판에 이어서 국내 저명한 역술인, 무교인(巫敎人), 도인(道人)들이 나서서 2016년의 국운에 대한 예언 발표들은 주목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 오히려 각 방송에 나오는 전문해설가들의 2016년 국가전망이 훨씬 신통방통(神通旁通)하다.빅 데이터 시대에 수많은 국내외 여건들이 맞물려 펼쳐지는 치열하고 복잡한 2016년의 역사와 국운을 역술인들이나 무속인들의 산신령 계시로 듣겠다는 발상 자체가 국정을 책임지는 여당이 앞장서서 할 짓은 아니라고 본다.세계 IT 1위 국가인 최첨단의 대한민국 국회 내에서 여당이 주도하여 산신령으로부터 국운의 재수를 받기 위해 굿판을 벌이고, 역술인들의 예언들을 발표한다는 것은 아무리 종교 간의 대화와 화합의 차원이라고 갖다 붙여도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이는 고등종교의 전파로 인하여 우리 민족의 정신세계를 한 차원 높였다고 인정하는 2000년 전으로 돌리려는 퇴행적 발상으로 국민들의 정신을 무속신앙으로 몽매(蒙昧)하게 하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행태가 아닐 수 없다.대한민국을 세운 제헌국회는 하나님께 대한 기도로 시작되었다. 1948년 5월 31일 오후2시 제헌국회 제1차 회의 개회에서 임시의장 이승만 박사의 개회사를 보라.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종교 사상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누구나 오늘을 당해 사람의 힘만으로 된 것이라고 우리는 자랑할 수 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기도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동의하십니까?(동의와 제청함) 우리가 성심으로 일어서서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릴 터 인데, 이운영(감리교목사) 의원 나오셔서 간단히 말씀으로 기도를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이렇게 기도로 세워진 대한민국 국회에서 여당이 공동으로 굿판을 벌인 것은 대한민국의 수치요, 통탄할 일이다. 새누리당 종교위원회는 이에 대해 국민들 앞에 머리 숙여 사죄하기 바라며, 재발 방지를 국민 앞에 천명해 주기 바란다.정치인, 공직자들을 막론하고 과학의 첨단시대에 국가의 공공기관 내에서 굿판을 벌이는 것은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이요, 재앙이다. 우리는 이를 좌시할 수 없다. 지금 대한민국은 미개한 무속신앙이 아니라 고등종교 시대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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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판으로 망한 구한말의 역사를 보라!-유 만 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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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선박 침몰 사건
- 1912년 4월 10일 영국의 사우샘프턴 항구를 출발해 미국으로 향하던 초호화 여객선 타이타닉호가 4월 15일 새벽 바다 한가운데서 빙산과 충돌해 침몰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승객 2천2백여 명을 태우고 뉴욕 항구를 향해 소위 처녀항해를 하던 거대 선박이었는데, 항해 도중 다른 선박들로부터 빙산을 조심하라는 경고를 누차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대책도 마련하지 못하고 불행한 결과를 자초하고 말았다. 이 거선이 결코 침몰하지 않도록 도와줄 것이라고 승무원들을 굳게 믿게 했던 수밀격실(水密隔室)에는 하나씩 점차적으로 물이 차오르기 시작하였다. 이 침몰 사태로 불귀의 객이 된 승객들은 무려 1천5백여 명이나 되었다. 이 선박에는 새로운 삶의 희망을 품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던 갑판 밑의 3등실 승객들이 압도적으로 많아서 보는 이들과 관련자들을 가슴 아프게 했다. 그런데 이 선박은 실제로 빙산과 충돌하기 전에, 즉 항해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부두에 정박해 있던 뉴욕호 여객선과 충돌할 뻔한 일이 발생했었는데, 이 일로 인해 승객들 사이에서는 이 거대 여객선에 대한 안전 및 기술 여부에 대한 의문이 일었었다고 한다. 이 사건을 소재로 하여 영화 <타이타닉>이 만들어져 많은 이들이 이를 관람하였다. 그 영화 가운데서 특별히 나를 감동시켰던 장면은 그 아수라장과 같은 혼란 속에서도 마지막까지 키를 잡고 선박과 함께 운명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선장의 의젓하고 늠름한 모습이었다. 영화의 이 장면은 결코 실제에는 없었던 일을 영화에서 가공으로 만들어낸 장면은 아니다. 이는 실제로 있었던 일이며 그 선장 이름이 에드워드 스미스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비슷한 선박 침몰 사건이 근래(2014년)에 있었다. 모두들 너무도 잘 아는 ‘세월호 침몰’ 사건으로서 이날이 4월 16일이었으니 묘하게도 타이타닉 침몰 일자(4. 15)와 겨우 하루 격해서 일어난 일이었다. 이 사건을 지켜보았던 많은 이들이 너무도 실망했던 것은 선장 이준석 씨가 팬티 바람으로 젊은 승무원들과 함께 먼저 배에서 내리는 장면을 직접 목도하게 된 일이었다. 수백 명의 승객들을 배에 그대로 놔두고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만을 뒤로한 채 자기들만 살겠다고 재빨리 도망쳐버린 꼴이었으니, 이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요즘 이와 유사한 선박 침몰 사건이 정치판에서 일어나려 하고 있다. 그 선박은 이른바 제1야당인 ‘더민주’호이다. 다가오는 총선(總選)을 위해서나 그 후에 오게 될 대선(大選)을 위해서 국민들(유권자들)이 큰 기대를 걸고 있던 제1야당이 지금 바다 한가운데서 빙산과 충돌해 침몰하기 직전의 형편에 놓여 있다. 타이타닉호가 항해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부두에 정박해 있던 여객선 뉴욕호와 충돌할 뻔한 일이 일어났었던 것처럼, 더민주호도 그와 흡사한 일이 결코 없었던 게 아니므로 더욱 경각심을 지녀야 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못해, 보이지 않는 빙산과 지금 충돌하지 않을까 우려되는 상황에 처해 있다. 그 ‘흡사한 일’이 바로 지난번 치렀던 각종의 보궐선거에서 제1야당이 참패함으로써 그 당 대표에게 가해졌던 충격파였다고 하겠다. 그때 적의하게 처신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침으로써 그는 지금 그 당 전체의 운명을 ‘빙산과의 충돌’ 직전 상태로 만들어 놓았다.당이 침몰하기 직전의 혼란 상태에서 하선(下船)하는 일은 마치 이준석 선장이 취했던 몰염치한 처신과 흡사한 것이다. 당이 흔들리지 않게 요지부동의 것으로 만들어 놓는 게 당 대표로서 취할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기회는 다 흘려보내놓고 이제 침몰하기 직전 상태에 이른 것을 확인한 뒤에야 마치 팬티 차림으로 허겁지겁 하선하는 일은 아무리 봐주려고 해도 봐줄 수 없는 떳떳하지 못한 처신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기억을 되살려 봐도 소위 제1야당의 대표가 이렇게 처신하는 것을 우리가 별로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글쎄 이와 비슷한 사례를 우리가 전혀 겪지 않았던 것은 아닌지도 모르겠다. 전(前) 통합민주당 이기택 총재 때의 일이 갑자기 떠오르기는 한다. 지역구도 타파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어느 특정 지역 인사들에 대한 물갈이를 시도했던 탓에 15대 총선의 결과 과거 의석수의 절반밖에 얻지 못해 꼬마민주당이라는 치욕스런 호칭을 들으면서 사실상 정계에서 멀어져 갔던 일 말이다.당시 DJ(김대중 씨)가 그와 결별하면서 새로운 정당을 이끎으로써 이후 15대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던 일이 함께 떠오른다. 현 ‘더민주’ 당 대표는 이런 과거사를 참고삼아 지나치게 독단적인 특유의 정치 놀음을 더 이상 고집하지 않는 게 좋으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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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선박 침몰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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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는 일에 미소 지으시게 하자-이 억 주 목사
- 지각이 있는 이들이라면 새해를 맞이하게 될 때에 지난해를 돌아볼 것이다. 지나간 시간을 아쉬워할 것이다. 그리고 고쳐서 희망을 품고 새해를 설계할 것이다. 보람 있는 일을 많이 남긴 사람이라도 어찌 지난 시간 중에 아쉬움이 없겠는가. 그런데 한국교회 지난 시간들 속에 드러난 모습은 너무도 실망스러운 일들이 많다. 복음의 가치를 위하여 힘쓰고 수고한 것이 많지만, 사람들은 그 평가를 야박하게 한다. 한국교회, 이제 깨어진 그릇처럼 누구나 발로 걷어찬다. 입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국교회를 향하여 좋지 않은 말을 한마디씩은 한다. 이러다가 한국교회가 3류 종교로 전락하는 것은 아닌지 두렵기도 하다. 그러나 복음적 가치를 말할 때에 한국교회가 담보하고 있는 기독교 진리가 이 땅에 희망인 것은 진리만큼이나 분명하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복음적 진리를 이 땅에서 지켜갈 수 있는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오스발트 슈펭글러(Oswald Spengler)는 그의 저서 《서유럽의 몰락》에서 서구 유럽의 몰락은 기독교의 몰락이라는 의미심장한 예언적 진단을 했는데, 그의 사후 80년도 못되어 누구나 알 수 있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한국교회가 우리나라의 독립과 근대화에 기여하고 함께 해온 역사적 사실을 사람들은 점차 지워버리려고 한다. 이는 교회구성원들이 생각하고 바라는 것과 반대로 가고 있는 일이다.그러나 우리들은 성경말씀에서 배우고 역사에서 배워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복음적 가치에 충실했던 국가들은 흥왕했었다는 것을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기독교 국가 영국이 해가 지지 않던 영화를 구가할 때에 그 뒷면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으로 충만했던 것을 본다. 앨프레드 대왕(Alfred the Great, 849년 ~ 899)치세에 영국은 국가적 통일을 이루었는데, 그 뒤에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다. 엘리자베스 I세(Elizabeth I. 1533-1603)가 유럽 변방의 작은 섬나라에 지나지 않던 영국을 대영제국으로 일으켜 세우는데 기초를 세웠다는 평가이다. 그런데 그 배경에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다. 빅토리아(Victoria, 1819~ 1901)여왕의 치세에는 통칭 빅토리아 시대(Victorian era)로 영국의 영토가 전 세계에 걸쳐 있었으므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렸던 대영 제국의 최전성기였는데, 이때에도 기독교 신앙으로 영국을 통치했었던 것이다.주지하는 대로 미국은 청교도 정신위에 건립된 국가로써 현재도 세계 최대강국의 영광을 누리는 것은 우연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미국 대통령이 사용하는 국새(國璽) 뒷면에 새겨진 글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애뉴트 셉티스(annuit coeptis)라는 글인데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는 일을 좋아 하신다. 또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는 일에 미소를 지으신다는 뜻이다. 국가가 어떤 일을 승인할 때에 찍게 되는 도장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한다는 확신이야 말로 얼마나 당당하고 얼마나 확신이 있는 일인가. 한국교회 2016년은 하나님께서 미소 지으시는 일을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 한국교회가 하는 일을 기뻐하신다(annuit coeptis)는 주장을 인정받게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한국교회는 다시 한 번 일어설 수 있는 것이다.먼저, 한국교회 복음진리를 굳게 지켜감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 방법론이 아니라 복음진리를 붙잡아야 한다. 비복음적인 방법론에 목매는 모습은 애처롭기까지 하다. 이제 복음의 본질, 복음진리를 굳게 잡고 가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절대 진리를 양보해서는 안된다. 다른 복음은 없는 것이다.(행4:12) 다음으로 하나님을 하나님 되시게 해라는 종교개혁자들의 외침과 같이 하나님으로 하나님 되시게 해야 한다.(Let God Be God)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므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 그 다음으로 교회가 선한 일에 하나가 되어야 한다. 교회연합단체의 분열은 한국교회의 힘을 잃게 했다. 사분오열도 모자라 보인다. 정치 코미디 멘트처럼 ‘이게 뭡니까?’ 그 과정에서 파생되는 온갖 부끄러운 모습은 그대로 세상에 전파된다. 그 파급력은 한국교회 전체가 피해로 떠안았었다. 이제는 성령 안에서 하나 되기를 힘쓰라고 하신 말씀대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 조직체의 물리적인 통합이 어렵더라도 선한 일에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 시편133편 말씀처럼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이제 2016년은 하나님께서 우리 한국교회가 하는 일에 미소 지으시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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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는 일에 미소 지으시게 하자-이 억 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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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와 교회부흥-강 경 신 목사
- 소망의 새해를 맞는다. 새해가 되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새로운 소망과 기대를 가진다. 그런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은 교회가 새로워지기를 기대하고 소망한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초지일관 ‘부흥’에 힘써 왔다. 부흥이 한국교회의 키워드였다. 매년 부흥에 대한 키워드로 새해를 맞이하며, 교단적으로나 교회적으로 부흥을 위하여 총력을 기울여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작금의 한국교회는 여전히 침체의 늪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사회적 신뢰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교회의 영적 권위가 실추되고, 교회의 사회적 위상이 추락하고 있다. ‘교회의 위기’라는 말이 귀에 너무도 익숙해져서, 오히려 그 말이 식상할 정도가 되었다. 실로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새해에는 한국교회가 모든 면에서 새롭게 회복되어지고, 부흥되어지기를 더 절실하게 염원하게 된다.특히, 새해는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2017년의 직전 해로, 교회사적인 측면에서 특별한 해이다. 또한 2017년은 평양대부흥운동 110주년을 맞는 특별한 해로 한국교회의 부흥은 더욱 절실하다. 돌아보면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시작한 부흥운동은 2007년 100주년을 맞아 ‘Revival Again’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범기독교적인 차원에서 열정을 가지고 전개했다. 그 이후 교단마다, 교회마다 계속해서 부흥운동에 매진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교회는 부흥이 요원하다. 이러한 때 교회는 어떠한 부흥을 말해야 하는가? 어떤 부흥을 꿈꿔야 하며 어떤 부흥을 지향해야 하는가? 한마디로 단정해서 말하기는 어렵고 막막하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지금 이 시점에서 겸허한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깊이 성찰해야 한다. 우선 그동안 부흥을 교회성장과 동일시하여 외적인 성장과 양적인 팽창에만 집착해 왔던 것을 반성해야 한다. 지금 한국교회는 지나친 부흥운동의 폐해를 고스란히 짊어지고 있는 형국이다. 부흥에 대한 바른 신학적 기초와 분명한 성서적 이해가 결여된 교회성장을 부흥인양 전개해 온 것에 대한 뼈아픈 자성을 해야 한다. 이신칭의라는 ‘값진 은혜’를 기복신앙이라는 ‘값싼 은혜’로 변질시켜버렸음을 회개해야 한다. 더 이상 믿음이 세속적 번영과 개인적 성공의 도구가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복음이 형통과 번영의 담보물이 되는 것을 철저하게 경계해야 한다.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이 이 땅에 마치 ‘교회왕국’을 세우는 것으로 오인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한국교회의 부흥은 다시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 전환되어져야 한다.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교회부흥은 철저하게 자신을 부정하는 회개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러면서, 회개가 단순히 개인적, 내면적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민족적 차원으로 넓혀져야 한다. 그리스도가 교회 안에서뿐만 아니라 세상 가운데서, 무엇보다도 삶의 모든 영역에서 드러나야 한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끊임없이 사회적 비판에 직면하면서, 대내외적으로 일대전환을 요구받아왔다. 그러면서, 한국교회는 교단별로, 각 교회별로 나름대로 변화와 개혁을 이루고자 노력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교회는 세상의 변화속도에 둔감하다. 너도나도 할 것 없이 큰 소리로 변화와 개혁을 부르짖지만 정작 교회는 늘 찻잔 속의 미풍과 같다. 교회는 여전히 변화되지 않고 있다. 그냥 그대로이다. 어떻게 교회가 변화하고 개혁해야 하는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 그대로 다시 그리스도 중심의 교회를 세워야 한다. 지난 8-90년대부터 한국교회에 불어 닥친 그리스도의 제자 삼는 운동, 평신도를 깨우는 운동이 철저하게 그리스도 중심 운동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필자는 이 시대의 교회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복’을 어떻게 선포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팔복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새 사람을 말한다. 여기에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기복과 성공, 번영과 형통이라는 말이 없다.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는 우리들에게 ‘팔복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 기억하자. 그리고 잊지 말자. 일백여년 전 이 땅 방방곡곡을 강타했던 부흥운동은 세계기독교계의 찬탄과 경이를 불러 일으켰다. 그 운동은 단순히 회개운동을 통한 교회부흥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돌아가는 운동이 되어 민족과 나라를 새롭게 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이었다. 아무쪼록, 새해에는 한국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부흥을 위한 전위대로서 그 영적 권위를 회복할 뿐만 아니라, 부흥의 기폭제가 되는 한해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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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지골
- 토요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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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와 교회부흥-강 경 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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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에서의 독극물 살인 사건 -임 영 천 목사
- 지난 11일과 12일 양일간에 걸쳐 중국과 한국 두 나라에서 각각 중대한 사법 관련 결행(처형), 또는 판결 등이 있었다. 중국에서는 이른바 상하이(上海) 푸단대(復旦大) 의과대학원생 독극물 살인 사건의 피의자인 린썬하오(林森浩, 29세)에 대한 사형집행이 있었고, 한국에서는 경북 상주(尙州) 농약 음료 살인 사건의 피의자인 박 할머니(82세)에 대한 유죄 판결, 곧 ‘무기징역’ 선고가 있었다. 중국 상하이의 경우, 피의자 린썬하오의 부친이 그 아들을 살리기 위해 무진 애를 썼지만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하겠는데, 피해자의 부친이 자기 아들을 죽게 만든 피의자는 법의 엄한 심판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로 일관하면서 관용 베풀 자세를 전혀 보여주지 않았던 일도 사법부의 처형 결행을 수월하게 만든 한 요인이 아니었나 판단되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무래도 일반인들이 그 사건의 진범이 린썬하오란 사실에 대하여 의심하는 바가 전혀 없었다는 바로 그 점이었을 것이다. 그 때문에 남은 문제는 고작 형량 경감 여부였으리라 보이는데, 결과는 재판부가 일벌백계 태도를 보였다는 것으로 우리는 그 최종 형량을 받아들이게 된다. 경북 상주의 경우, 무기징역은 사형집행보다 나을는지는 몰라도 남은 가족 식구들의 처지에서 볼 때 그 형량은 사형이나 마찬가지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많다고 보는데, 82세 고령 할머니가 그 형량(무기)대로라면 언제 살아서(출소해서) 식구들과 만나는 일이 다시는 없을 것으로 예감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워낙 세인들의 관심이 컸었고, 그 귀추에 대한 관심 역시 큰 것이었으므로 이 무기징역 판결에 대해서 많은 이들이 상당한 충격을 받았을 것임도 능히 짐작해 볼 수 있는 일이다. 이에 대해서는 필자 역시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다고 실토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무기징역 판결이 막 내려졌을 때, 곧 선고 초기(직후)에는 7명의 배심원들도 전원이 유죄로 평결한 것을 보면 ‘유죄로 볼 수밖에 없는 사건’인가 보다 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시간이 점차 흐르고 나서는 여전히 께름칙한 마음 한 구석을 지워버리지 못하고 있다. 과연 검찰이 개진한 각종의 유죄 논리는 온당한 것이었는가? 그 검찰의 의견을 받아들여 유죄(무기) 판결을 내린 재판부는 한 점 부끄럼 없는 결단을 내린 것이라 보아도 될까? 재판부의 판결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이는, 이른바 국민참여재판 제도 속의 배심원들은 흔들림 없는 양심에 따른 평결을 내린 것으로 보아 틀림없을까? 이런저런 여러 가지 생각들로 마음이 편치 않은 게 사실이다. 마치 나 자신이 그런 께름칙한 판결에 동참한 처지라도 되어버린 듯한 찜찜한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고나 할까.일부 여론을 종합해 보면, 이번 재판은 “제3자의 범행 가능성이 없으니 피고 당신이 죄인이오.” 식의 판결이었다고 하니, 이 너무도 안일한 판결이 아닌가. 오늘의 형사재판은 여러 가지 확고한(물적) 증거로 인해 피의자 역시 더 이상 부인할 수 없는 지경에 처해 “내가 범인이오.” 하고 자인할 때 유죄 판결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나 박 할머니는 줄기차게 자신은 마을 친구들을 죽이지 않았다고 하며, 검찰 역시 뚜렷한(물적) 증거는 내놓지 못한 채 고작 정황 증거만을 가지고 유죄임을 역설했다고 하니, 이것은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다시 말해, 물증은 없이 심증만을 가지고 그를 죄인으로 몰아세운 셈이라 하겠으니, 이것이 바로 현대적 판결 수준에 못 미치는 전근대적 판결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를테면 중세의 ‘마녀 사냥’식 판결 말이다. 그래서인지 변호인이 이렇게 변론했다고 하는데, 경청할 만한 구절인 것 같다. “피고인이 범인이라면 악마이거나 사이코패스로 검찰이 정신감정을 의뢰했어야 했다.” 그런데 석연치 않은 것은 재판부에서조차 판결을 내릴 때 피고인의 범행 동기를 전혀 언급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과연 이런 판결도 있을 수 있는가, 우리는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다.우리는 이렇게 믿고 있다. 설사 아홉 명의 범인을 놓지는 한이 있더라도 한 사람의 무고한 시민을 억지로 잡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박 할머니가 죄인이 아님을 우리가 확증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렇다고 해서, 그를 또한 죄인으로 확증할 수 없는 이상, 그에게 유죄의 너울을 씌우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범죄행위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관련 인사들은 알아둬야 할 것이다. 과거에 행해진 그런 유(類)의 유죄 판결이 오늘에 와서 무죄로 판정된 게 어디 한두 가지던가,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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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지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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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에서의 독극물 살인 사건 -임 영 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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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인 과세, 법적인 근거 미비하다
- 지난달 30일 조세소위를 통과한 종교인소득세 개정안은 예산부수법안이기 때문에 법사위를 거치지 않고, 지난 1일 본회를 통과하여 2년의 유예기간을 거쳐 2018년도부터 시행에 들어간다. 그러나 많은 법적 논란거리를 안고 있는 법안이라서 향후 2년 동안 치열한 법 논리 공방이 다시 전개될 예정이다.조세 부과는 합리적 법적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지금 개정안은 우리 기독교 입장에서 보면 법적 다툼의 소지가 매우 크고 부당하다. 정부가 해방이후 70년 가까이 지내오면서 종교인소득세를 부과할 수 없었던 것은 단지 성직자들에게 특혜를 주기 위한 정치적인 이유가 아니었다. 그것은 종교인들의 삶이 빈한(貧寒)했을 뿐더러, 또한 그 삶이 사회를 위한 헌신의 삶이었기 때문이며, 근대화 이후에는 소득세를 과하기 위한 법적 근거가 마련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성직자들은 신의 소명을 따라 정부나 세속의 단체들이 감당할 수 없는 국민의 영적인 문제와 도덕적 사역을 하고 있고, 국가의 손길이 닿지 않는 우리 사회의 어두운 부분들을 돌보고 있다. 따라서 이를 통속적인 세법 잣대로 들이댄다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1968년 7월 국세청장은 목사 신부 등 성직자에게도 갑종 근로소득세 부과하겠다고 발표했다 가 철회했다. 1987년, 기독교 내부에서도 성직자 소득세 논란이 일었다. 시민단체인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이 출범하면서 교회 재정의 투명화와 성직자 세금 납부 주장을 펼쳤지만 공감대를 얻지 못했다. 1994년 3월 국세청은 성직자 소득세 납부는 자율에 맡긴다고 했다. 종교인소득세가 국민적 공론을 일으키게 된 것은 2006년 1월 결성된 ‘종교비판자유실현시민연대’가 목사와 교회들을 탈세의 파렴치한으로 여론몰이를 하면서, 동년 5월 당시 이주성 국세청장을 직무유기로 고발하면서 부터다. 종교인들한테서 소득세를 제대로 거두면 조(兆) 단위에 이를 것이라는 주장에 모 일간지는 “목사님, 세금 내셔야죠”라는 기사 제목으로 힛트를 쳤다.이에 국세청은 기재부에 “종교인에 대한 과세가 가능한가”라고 질의한 바, “교회·성당·사찰 등 종교인이 속한 기관에서 후원금을 ‘수입’으로 잡은 뒤 종교인들에게 ‘임금’ 명목으로 지급했다면 근로소득으로 간주해 과세가 가능하다”는 의견에 종교인소득세문제는 여론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물론 논란의 주 타겟은 한국교회 목사들로 인민재판식 여론의 몰매를 맞았다. 더나가 2013년 8월 이명박 정부의 박재완 기재부 장관이 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국민 개세주의 관점을 들고 나오면서 종교인소득세 논란을 극대화 시켰다.그러나 중요한 문제는 한국교회가 몇 푼의 종교인소득세를 내기 싫어서 반대해 온 것이 아니라, 세금을 부과하기 위한 합리적 법조항 마련이 미비 되었기 때문이었다. 조세는 합리적 법적 근거도 없이 여론몰이로 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언론들이 더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언론들은 교회와 목사들을 매도하는 여론몰이에 성공했다.따져보자. 법에서는 용어 선정이 중요하고, 그 해석에 따라 법적 책임과 권한이 따른다. 그렇다면 첫째, ‘종교인’이라는 법적인 단어 사용이 옳은가? 하는 문제다. ‘종교인’이라는 단어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지칭하는 일반명사이지 성직자를 칭하는 단어가 아니다. 성직자들을 종교인으로 묶는 것은 성직자들에 대한 모독이다. 엄연히 성직자들은 종교의 지도자들이다. 다종교 사회에서 종교마다 명칭이 각각인 성직자들을 일반 신도들과 같은 종교인 이라 칭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정부와 국회는 합당한 법적 단어를 찾기 바란다.둘째, 종교인소득세라며 비정기적 소득에 부과하는 기타소득에 넣는 것은 종교인소득세 항목을 만들었다 해도 법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물론 성직자들에 대한 정부의 배려는 인정한다. 그러나 법리에 맞지 않는 것은 고쳐야 하지 않겠나? 그렇다고 근로소득세 항목이나 사업소득세 항목에 넣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다. 성직자가 매월 정기적 생활비를 받는다고 해도, 근로자의 통상임금과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 그렇다면 소득세법상 독립적인 성직자소득세 항목을 별도 신설해야한다. 거기에 따라 소득세율과 공제항목도 정해야 할 것이다.셋째, 극빈층에 속하는 성직자들의 복지 문제에 대한 대책도 아울러 마련되어야 한다. 근로소득자는 일정 소득기준에 미달하면 ‘근로장려금’을 지원받는다. 그러나 현행법은 기타소득에 들어가 있어서 극빈 성직자들은 이에 대한 혜택이 없다. 따라서 별도 성직소득세 항목에 따라 극빈 성직자들을 구제할 수 있는 사회보장제도가 마련되어야 한다.한국교회는 공직자들이나 정치인들이나 언론들이 성직자들을 직업인으로 매도하거나 근로자로 폄하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국민들은 각자 자기 의사에 따라 개인적으로 말할 수 있다 해도, 공적인 장(場)에서 공인들의 표현은 달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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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지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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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인 과세, 법적인 근거 미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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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계가 국가의 질서를 어지럽히려는가?-유 만 석 목사
- 지난 14일 광화문 일대에서는 민주노총 등 53개 단체가 참여한 「민중총궐기 대회」가 열렸다. 이날 구호는 ‘박근혜 퇴진하라’ ‘국정화를 중단하라’ ‘쉬운 해고 박살내자’는 등 반정부적 성격이 짙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뒤집자 나쁜 정부’라는 구호도 난무하였다.그런데 이 반정부 시위를 주도한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이 경찰의 검거를 피해 불교 조계사로 피신하였다. 그가 정당한 시위를 주도했다면, 종교시설로 피해야 할 이유도 없을 것이고, 불교계가 범법 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의 신변보호를 해야 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그럼에도 이런 상황들에 대하여, 불교계가 국민들에게 사과나 반성은커녕, 여당의 김진태 의원이 ‘경찰 병력을 투입해서라도 검거해야 한다’는 모 방송사 인터뷰 발언을 두고, ‘반불교적 행태’라고 주장하면서, 김 의원의 기독교 신앙까지 문제 삼는 등, 그야말로 적반하장도 유분수다.불교계가 마치 현대판 소도(蘇塗-삼한시대에 죄인이 도망해도 잡아가지 못함)를 흉내 내는 듯하지만, 한상균 위원장은 엄연히 구속영장이 발부되어 수배중인 범법자이며, 그가 주도한 시위에서 경찰 버스 50여 대가 파손되고, 경찰 병력 113명이 다치는 등, 국가의 공권력이 유린당하고, 국가 재산에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이는 70~80년대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던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보호했던 가톨릭의 명동성당이 지난 2001년 민주화 이후로, 노조나 노동계의 농성과 노동계 인사들의 피신을 거부한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불교계는 지난 20일 조계종 조계사의 이름으로 “불교를 탄압하느냐?”는 성명을 내고, 23일에는 조계사의 대표 승려들이 여당의 김진태 의원의 국회 사무실을 찾아가 항의하는 자리에서, 김 의원의 종교를 의도적으로 물어서, 개인의 신앙행위까지 문제 삼는가하면, 의원 사무실에서 목탁을 치는 등 거의 ‘종교폭력’에 가까운 행태를 보였다 한다.더군다나 2008년 이명박 정권 시절에 행했던, 「범불교대회」라는 말까지 나왔다고 불교계 언론에서 보도하고 있는데, 이는 어불성설이다. 불교계는 이때 범불교대회를 개최하여, 정부로부터 불교계 전반적인 지원 확충과 불교계에 유리한 법안들을 만드는데 작용하였다.이번에도 ‘불교 탄압’ 운운 하면서, 현 정부와 김 의원에 대한 압박을 가하려는 생각은 접는 것이 좋을 것이다. 불교계는 이번에 돌아가신 고 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에도 기독교 장로인 고 김 전 대통령의 종교편향을 성토했지만, 고인에 대한 회고에서는 ‘역대 정부 중 불교공약 이행이 가장 높다’는 기사를 통해, 상당히 이중성을 드러내고 있다.이제 불교는 걸핏하면 고위직 기독교 인사들의 개인 신앙에 의한 기독교 행사 참여와 발언을 시비 삼는 악습에서 벗어나기 바란다. 이는 종교자유에 대한 심각한 유린이며, 기독교 신앙을 억누르려는 고약한 발상이다. 뿐만 아니라, 다종교 사회에서 종교 갈등을 유발하는 사회 분열의 단초가 된다.이번 「민중총궐기」의 시위 방법에 대하여 국민들의 대다수도 반대 입장을 보였다. 지난 20일 한국갤럽이 전국 19세 이상 남녀 1002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한 바에 의하면, 응답자 중 67%가 ‘시위방식이 과격했다’고 대답했고, 19%만이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한다.그런가 하면 사회적 비용도 엄청나게 들어가게 되는데, 경찰대 부설 치안정책연구소에 의하면, 서울 도심에서 불법 폭력시위 1회당 890억 원의 사회/경제적 손실이 발생하고, 지난 2011년부터 금년 10월까지 폭력시위로 인한 사회/경제적 손실이 17조원이 넘을 것이라고 한다.이런 사태를 보면서도 불교의 조계사가 민주노총 한 위원장을 끝까지 보호하려 한다면, 이는 스스로 사찰 경내에 국가 공권력 투입을 자초하는 것이며, 이는 국회의원 한 사람을 탓할 일이 아니다.이번 사태에 대하여 불교계는 국민들에게 즉각 사과하고, 범법 행위자를 즉각 경찰에 넘겨, 국가의 치안과 질서를 지키는데 협조해야 한다.종교가 억울한 사람을 보호하고 지키는 것은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이번 민주노총 위원장의 ‘민중궐기’시위 주동은, 종교계가 보호하고 감싸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본다. 어찌 종교계가 범법자의 은신처가 되고, 국민의 원성을 사며, 국가 질서를 흔드는 일에 앞장서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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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지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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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계가 국가의 질서를 어지럽히려는가?-유 만 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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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의 무차별 테러, 알라의 뜻인가?
- 지난 13일 세계는 경악하였다. 프랑스 파리에서 IS(소위 이슬람 국가라고 명칭)의 치밀한 계획과 훈련으로 이루어진 다국적 IS 무슬림들이 선량한 시민들이 모인 문화행사와 체육경기, 식당 등을 향하여 무차별 총격을 가하는 비극이 드러났다. 이것이 어찌 종교의 이름으로 행할 수 있는 만행이란 말인가? 지금은 중세시대나 고대시대처럼 종교의 이름으로 인명을 살상하고, 인권을 유린하는 시대가 아니다. 이 사건은 칼리프를 자처한 IS의 수괴 아브다디가 직접 지휘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는데, 정치적, 종교적, 이념과도 관계없는 다중의 무고한 시민들을 목표로 테러를 가한 것은 그들의 정체성과 그들이 신봉하는 종교의 한계성을 여실히 보여준 대목이다. 이슬람에 의한 무차별적 테러로 인하여 전 세계는 지난 2001년에도 큰 충격을 받았다. 이슬람 무장단체인 알카에다가 납치한 4대의 여객기로 미국 뉴욕의 세계무역센터와 워싱턴에 있는 국방부 청사인 펜타곤에 충돌하는 방식으로 대규모 테러를 획책한 것이다. 이때 2,978명이 사망하였고, 이로 인한 트라우마는 상당히 오래 갈 것이다. 그 후에도 2002년 10월에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폭발사고를 일으켜 202명이 사망하였고, 2004년 3월 스페인 마드리드 기차역에서 폭탄테러를 일으켜 200명이 사망하였다. 또 2005년 7월 영국 런던에서 출근 시간대에 폭탄테러를 일으켜 50여명이 사망하였다. 그리고 2009년 11월에는 러시아 노브고르드 주에서 열차에 폭발사고를 일으켜 27명이 사망하였다. 2014년 2월에는 이집트 시나이반도에서 한국인 여행객을 향하여 폭탄을 터트려 3명이 사망하고 14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리고 올 해 1월 프랑스의 주간지 사무실에서 총기를 난사하여 기자 등 12명이 사망하였다. 또 8월에는 태국에서, 10월에는 터키에서, 지난달에는 러시아 민항 항공기가 테러를 당하여 224명 전원이 사망하였다. 그리고 이번에 다시 프랑스에서 대규모 테러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번 테러에서 보여준 IS의 악랄함은 시리아 난민을 위장하여 테러리스트가 침투했다는 것이다. 세계가 내전으로 고통당하는 난민들을 인도적 차원에서 돕는 것도 테러의 방법으로 차용했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만행이다. 무슬림 단체인 IS가 일으키는 전쟁은 단순한 극단주의자들의 테러전이 아니라, 전 세계를 향한 세계전쟁이다. IS가 지목한 전쟁할 나라가 62개국인데, 그 중에 우리나라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외교부 관계자는 “IS는 지난 9월 미국 주도의 대테러 활동에 동참하는 62개국을 뽑아 ‘십자군 동맹국’ 이라고 칭하며 한국을 포함시켰고, 십자군 국가의 시민을 살해하라는 선전·선동도 했다”고 밝혔다. 또한 국정원은 IS에 동조하는 외국인 5명이 대량살상용 폭탄원료를 국내로 반입하려다가 적발되어 공항에서 추방되었고, IS에 가담하려는 내국인 2명을 출국 금지시키고 여권을 취소시켰다고 발표했다. 지난 2003년 이후, 지금까지 우리나라 사람도 무슬림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으로 10명이 사망했고, 17명이 부상당했으며, 23명이 납치되었다가 풀려나는 인적피해가 발생하였다.현재 국내에도 상당수의 무슬림이 들어와 있다. 2014년 11월 기준으로 한국 무슬림 인구는 내국인 무슬림이 3만 5천명, 장단기 체류자 무슬림이 14만 3천 5백 명(불법체류 무슬림 포함됨)으로 총 17만 8천 500여 명에 이른다. 그 외에 가족 동반이나 유학생까지 포함하면 20여 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는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니다. 이들 가운데 테러리스트가 잠입하지 못하도록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그리고 정치권에서도 할 일이 있다. 지난 2001년에 발의된 “대테러방지법안”이 국회에서 잠자고 있는데, 사태가 이 지경이면 아무리 정쟁으로 날 지새는 줄 모르는 국회라지만, 적어도 국민의 생명을 지켜야 하는 ?대테러방지 법안? 은 여/야를 떠나 시급히 통과시켜야 할 것이다. 소위 인권문제와 국정원의 권한 강화를 막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대테러방지 법안?을 반대 한다는 것은 이제 설득력이 없다. 무자비한 대량의 살상이 벌어지고 있는데 이를 언제까지 방치할 것인가?이렇듯 전 세계적으로 테러를 일으키는 IS와 무슬림들에게 묻고 싶다. 사람의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하찮게 여기는 것이 알라의 뜻인가? 아니면 당신들의 왜곡된 종교적 신념인가? 자유와 정의는 결코 어떤 테러로도 굴복시킬 수 없다. 테러는 인류의 공공의 적으로 인류 모두에게 외면당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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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지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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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의 무차별 테러, 알라의 뜻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