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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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에서 “칼뱅 이단 학살을 주도했다”는 등, 칼뱅을 학살자로 몰고 있는 글들이 나돌고 있는데 대해 이를 바로 잡기 위해 이 글을 발표한다. <글쓴이, 권현익 목사, 총신대학, 총신대학원(M.Div), 현 예장합동 GMS 파리주재 선교사>            편집자주.

1. 소위 칼뱅 학살 주장 및 그 주장의 오류

칼뱅의 학살 주장의 진원지는 칼뱅 당시 제네바의 콜레쥬 드 리브(College de Rive)의  교장이었던 카스텔리옹(Sebastien Castellion, 1515 - 1563 )이다. 그는 목사가 되기를 원하였지만, 평소 그의 행실과 신학적 소양으로 인하여 칼뱅과 제네바 목사회는 그의 청원을 거부하자, 그는 칼뱅에 대한 반감을 증폭시키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그는 칼뱅이 인도하는 목사들의 성경공부 모임에 나타나 칼뱅과 목사들을 비방한 죄로 제네바 시의회로부터 면직을 당하게 되고, 생계 유지를 위해 자유와 학문의 도시인 바젤로 옮겨 가게 된다.
그곳에서 세르베투스 화형 사건(1553. 10. 27)  소식을 접하게 되고, 칼뱅을 향한 비난의 소리가 커지자 카스텔리옹도 그 비난에 동승하여 익명으로 책을 출간했다. 그리고 역사 속에 거의 묻혀 있던 그의 책은 유태인 극작가인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 1881-1942)와 반 칼뱅주의 시대적 흐름과 겹쳐지면서 일약 베스트셀러로 거듭나게 된다.
“칼뱅이 통치한 불과 5년 동안에 당시 전 인구가 1만 3천 명에 불과한 제네바 시에서 13명이 교수대에서 살상되었고, 10명이 목이 잘리고, 35명을 화형시키는 끔찍한 범죄들을 벌였다.”는 카스텔리옹의 주장은 칼뱅을 살상자로 몰고 가려는 반 칼뱅주의자들이 가장 즐겨 인용하는 유일한 참고 문헌이 되어 버렸다.

카스텔리옹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주장은 사실인가?
역사 서술상의 문제점
카스텔리옹의 역사 서술 방식은 증언의 3대 요소인 ‘언제’, ‘누가’, ‘어디서’라는 3원칙이 없다.

“또한 칼뱅과 그의 종교국은 <80세 노인>과 <그녀의 딸>을 무참하게 처형했다. 헌데 그 유일한 사유는 자녀들에게 유아세례 주기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한 출판업자>는 칼뱅을 비난했다고 해서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혀를 잘렸다. <어떤 사람>은 예정설을 반대하는 말을 했다고 해서 가혹한 고문을 받고 <광장>에서 화형을 당했다. 게다가 <자크 그뤼에>란 사람은 단지 칼뱅의 정책을 반대하고 그를 ‘위선자’라고 불렀다는 이유만으로 극한 고문을 받은 후 처형되었다.”

카스텔리옹은 일관되게 ‘어떤 이’가, 아니면 ‘80세 노인’이라는 언급, 그들이 처형된 날짜도 없고, 장소는 제네바에서 광장이 하나 밖에 없었던 것처럼 ‘광장에서’가 사건 설명의 전부이다. 당시 모든 역사 서술에는 반드시 처형된 사람의 이름과 나이, 처형된 날짜와 장소가 기록되어 있다. 거기에다 자신의 이름을 숨긴 채, 10년 만에, 그것도  칼뱅이 머물고 있는 도시가 아닌 다른 곳에서 폭로하였다면 당시 누가 그의 주장을 사실로 인정할 수 있었겠는가?
이런 이유로 그의 역사 언급은 그 어떤 역사 책에서도 인용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가 유일하게 이름을 밝힌 자크 그뤼에(J. Gruet)는 여러 역사 서술에서 등장하는 유명인으로 그것도 그의 주장과 달리 교회사가 필립 샤프는 “반역과 무신론의 혐의로 참수를 당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극작가인 슈테판 츠바이크의 놀라운 문장 편집력
인용문의 악의적 편집 및 조작
그가 칼뱅의 ‘정통 신앙 변론’이라는 책에서 인용했다는 내용에 의하면, 심지어 칼뱅은 “이단을 처형한다는 일은 결코 그리스교도적 사랑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일반 신자가 이단의 거짓 가르침에 물드는 것을 막아주는 구실을 하기 때문에 그것은 사랑의 행위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이 목적을 위해서는 <한 도시>의 <주민 전부>를 없앨 수도 있는 것이다.” 라고 했다고 언급하지만. 이런 인용문은 칼뱅의 이 책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유령 인용문>이다.

단지  칼뱅이 신명기를 인용하여
하나님께서는 전 도시를 그들의 주민들과 더불어 동일한 처벌 속에 가두신다. 그는 말씀하시기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거주하게 하시는 <한 성읍>에 대하여 네게 소문이 들리기를 너희 가운데서 어떤 불량배가 일어나서  그 성읍 주민을 유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가서 섬기자 한다 하거든  너는 자세히 묻고 살펴 보아서 이런 가증한 일이 너희 가운데에 있다는 것이 확실한 사실로 드러나면 너는 마땅히 그 성읍 주민을 칼날로 죽이고 그 성읍과 그 가운데에 거주하는 모든 것과 그 가축을 칼날로 진멸하고...”(신 13:12 이하)라는 성경구절에, <하나님>이라는 단어에 <칼뱅>을 대치하였고, 그 다음의 내용은 칼뱅을 벼랑으로 몰아 세우기 위하여 악의적인 창작 활동까지 더 하였던 것이다.
그는 카스텔리옹의 주장을 여과 없이 그대로 수용할 뿐 아니라 칼뱅을 공격하기 위해서 극작가다운 그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지어낸 역사 서술이다. 따라서 그의 역사 서술은 역사적인 가치는 전혀 없는 것이다.

조찬선 목사 저작, <기독교 죄악사>의 보고(寶庫)는 로마 가톨릭 백과사전(1908, 뉴욕)이다.
조찬선 목사는 “장로교 창시자 존 칼뱅”이라 지목하면서 칼뱅에 대한 ‘자기 증오’를 ‘역사’라는 이름으로 이렇게 서술한다.

“(세르베투스는)…. 칼뱅의 저서 『기독교 강요』를 비판했다가 칼뱅에 의해 제네바 근교에서 불태워 죽임을 당하였다. 칼뱅은 세르베투스가 산 채로 서서 참혹하게 불타 죽기까지 <다섯 시간> 정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총칼에 의해 일순간에 죽는 것도 아니고, 이글이글 <서서히> 타는 불에 타 죽는 처참한 광경을 상상해 볼 때, 신앙의 잔악성은 그 어느 전쟁의 잔악성보다 수 백 배 더하다고 보아야 하고 보복적 수단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 글의 출처가 놀랍게도 추기경의 이름으로 1908년 뉴욕에서 출간된 로마 가톨릭 백과사전에서 나온 것임을 찾아 낼 수 있었고, 두 글을 비교해 본즉 대부분 그대로 빼껴 오면서, 아무런 인용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자신의 글인냥 서술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백과사전에는 조찬선 목사의 주장과 너무나 일치하는 칼뱅에 관한 글이 이렇게 서술되어 있다.

“칼뱅은 세르베투스의 죽음을 주도할 뿐 아니라 세르베투스가 죽는 그 현장에 친히 <참석>하여 죽어가는 모습을 즐겼다”고 서술하면서, 영국의 역사학자 기븐 (Edward Gibbon 1737 - 1794)의 칼뱅에 대한 저주스러운 평가를 인용해 놓았다.

“나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auto-da-fe(가톨릭 종교재판)에서 타오른 수 많은 희생보다 세르베투스 <한 명>의 처형에 대해 더 깊이 분개한다.”

로마 가톨릭는 이 글을 읽는 이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행하였던 다른 수천, 수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학살의 희생들은 칼뱅에 비하면 그 죄악이 경미하며 매우 신사적이었다는 동정을 받아내고 싶었을지는 몰라도, 조찬선 목사가 몰래 훔쳐다 쓴 이 글은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판단이 안된다. 그는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악의적 왜곡인 가톨릭의 주장을 앵무새처럼 반복한 가톨릭 대변인 노릇을 자처하였을 뿐이다.
이러하다면 그것은 학술적 가치는 없으지며 그저 중상모략이나 자작 소설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2. 칼뱅 학살의 근거 문서의 오류

칼뱅이 제네바의 실제적 지도자로 학살을 주도하였는가?
이들은 “당시 제네바에는 분명히 가톨릭의 이단 심문소와 유사한 <종교재판국>(이들이 이 단어를 고집하는 것은 가톨릭의 종교재판소와 같은 화형을 명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던 것처럼 오도하기 위함)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들의 행위는 온 유럽에 널리 알려졌다. 그리고 같은 기간 제네바 외에 스위스의 다른 도시들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방법으로 죽었다. 그런데 근 25년간 그곳의 실제적 지도자였던 칼뱅이 그런 마녀사냥 재판과 만행을 주도하였다.”고 주장한다.
장수민이 쓴 존 칼빈(칼빈 아카데미)에 의하면, “1549년 2월, 드 에끌레시아는 동료 목사들 앞에 소환되어 잘못된 교리를 전했다는 이유로 견책을 받았다. … 이후에도 그는 여전히 같은 가르침을 되풀이하면서, 심지어 동료 목사들을 비난하고 다녔다. 결국 목사회는 그를 면직시켰다. 하지만 그는 의회에 항소하였고, 수석 행정관인 페렝을 움직여 구명운동을 펼쳤다. 목사들은 페렝의 압력에 못이겨 그를 다시 복직시켰다”라고 쓰고 있다.
세르베투스가 죽는 1553년 그 당시 상황을 소개한 일지에 의하면 “2월 28일(화). 페렝파가 나서서 목사들은 투표권이 없다고 주장한데 대하여 칼뱅이 시의회 앞에 나가 이를 효율적으로 반박하는 발언을 하였다. …페렝파는 정치 투표권을 목사들에게서 빼앗아 버렸다. 3월 16일(목). 시민으로서 이전에 총회에서 투표했던 목사들조차 목사직을 하는 동안에는 시민정치에서의 이 작은 몫까지 빼앗겼고 칼빈이 이에 항거했지만, 소용없었다. 7월 24일(월). 2월 선거에서 이긴 페렝파는 시의회를 장악하고 목사들의 시의회 참석 권리권을 박탈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8월 16일(수). 시 정부는 반 칼뱅파의 거두 베르텔리에를 세르베투스의 변호사로 선임한다. 8월 21일(월). 소송을 최대한 길게 끌고 가려는 의도가 역력했던 시의회가 비엔느에 편지를 보내어 세르베투스 사건의 전말을 문의하였다.”

목사들에게 정치 투표권과 시의회 참석하는 권리권 마저 박탈된 상황 속에 칼뱅이 무슨 수로 시의회를 장악하여 마녀 사냥을 주도하였다는 것인지? 이런 글들의 출처가 의심스러울 뿐이다.

칼뱅은 자신의 글에서 과연 자신의 잔학성을 드러내고 있는가?
악의적인 왜곡자들은 세르베투스투스가 화형을 당한 다음 해에 ‘정통신앙 옹호론’에서 “많은 사람들은 내가 파괴한 사람을 내가 다시  죽이고 싶어하는 잔학성에 대해 나를 비난하고 있다. 나는 그들의 말에 관심이 없을 뿐만이 아니라, 나는 그들이 내 얼굴에 침을 뱉는 사실에 기뻐한다” (T.H. Dyer, “The Life of John Calvin”, Harper 1855, citing ‘Defensio’ Calvini Opera Vol.8, at 516.A.)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어처구니가 없게도 오페라 8권 516페이지에 이런 내용은 전혀 없다. 이 인용문을 제시한 T.H. Dyer가 1855년에 그의 책을 출판한 이후, 칼뱅 반대파들은 단 한번도 칼뱅의 오페라를 확인하지도 않고, 이 인용구를 근거로 칼뱅의 잔학성을 고발하고 있다.

3. 진실된 역사적 사실은 무엇인가?
첫째, 1640년에 프랑스 왕국 서열 2인자였던 리셀리유 추기경(1585-1642)은 칼뱅을 중상모략함으로 칼뱅의 권위를 깍아내리기 위하여 칼뱅의 고향인 노용의 역사자료와 프랑스의 모든 기록들을 통하여 흠집을 낼 만한 것을 찾도록 지시하지만 그 어떤 혐의도 결코 찾아내지 못하였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둘째, 철학자 볼테르(1694년-1778년)의 “「범죄와 형벌」에 대한 해설”(1766)에서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학살의 자료를 찾아 그의 책에 게재한다. 그는 칼뱅에 대한 언급에서 “ 장 칼뱅은 의사 세르베투스를 서서히 불에 타 죽게 했고, <칼라브로아 장틸리스>의 목을 자르는데 힘을 보탰다는 사실로 위안을 삼았다. 그리고 장 칼뱅의 계승자들은 1632년에 <앙트완>을 화형시켰다. 과연 이성이, 신앙심이, 정의가 이 모든 살해 행위들을 저질렀다는 말인가?” 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의 글에는 수 십명을 학살했으며, 유아 세례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사형을 집행했다는 그런 기록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셋째로, 데오토르 베즈는 세르베투스 사건으로 유럽의 다른 지역(루터교를 포함)에서 ‘제네바에는 관용이 없는 잔악한 도시’라고 공격을 해 오자, 그는 “종교적 이유로 수 많은 사람들을 처형한 당신들이 세르베투스 사건 외에 <단 한 사람>도 죽이지 않은 제네바를 과연 비난할 자격이 있는가?” 라고 반박했다.
넷째, 제네바의 마녀 사냥 역사를 기록해 놓은 역사 기록물이 칼뱅의 무흠함을 증명한다.
제네바에 있었던 마녀 사냥을 기록한 책들(La magie et la sorcellerie en France와 Chasse aux sorciers dans la vallee de Chamonix(1458-1462) 그리고 Simon Sophie, <Si je le veux, il mourra!>(1497-1530)과 셀더르하위스에 의하면, 제네바에서 마녀 사냥은 1531년 까지 가톨릭 종교재판소에 의해 실행되었다는 기록만 있을 뿐이다.

결 론
그 어떤 역사책에도 칼뱅의 학살을 언급하는 내용은 없다. 그러나 최근 칼뱅을 싫어하는 학자들이 근거 없이 칼뱅이 학살을 주도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정설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주장하는 것이 사실로 받아들여지려면, 리셀리유 추기경이 칼뱅을 폄하하기 위한 노력으로 1640년에 출판한 책을 뒤집을 수 있는  그 전후의 사료를 제시하여야만, 학적인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전 최덕성 교수는 “존 웨슬리는 몬타누스와 펠라기우스, 세르베투스투스를 이단자가 아니라고 주장하였음”을 밝혔는데,  최근 감리교 진영에서 유독 세르베투스 죽음과 관련하여 칼뱅을 비관용과 살인자로 몰았던 이유가 웨슬레의 이런 주장을 옹호하기 위한 칼뱅 때리기가 아니었기를 믿고 싶다.
당당뉴스에 칼뱅을 근거없이 학살자라고 주장하는 인용구나 인용 문헌이 존재하지 않거나, 왜곡, 조작인 것을 증명하였기에 사실무근의 주장인 칼뱅을 폄훼한 글에 대하여 사과와 함께 정정을 요구하는 운동을 시작하려 한다.
참고, 자세한 글은 합동 헤럴드에서 <권현익>을 입력하게 되면 4개의 글을 확인할 수 있다.
이메일  pariskw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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