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분리할 수 없다. 구약성경의 가르침도 따라야 하고, 신약성경의 가르침도 따라야 한다. 그러나 구약성경의 가르침을 어디까지 따라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구약성경의 핵심을 이루는 제사와 관련된 문제는 분명한 가르침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앙생활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성도들 가운데는 여전히 성전, 제사장, 제물, 제단, 번제 등의 구약적인 어휘를 지금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고, 이들은 개념상 많은 혼란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실제 신앙 생활에도 적잖은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점은 이 모든 것들이 다 그리스도의 모형이고, 이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 완성되어 더 이상 우리가 붙들고 있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를 성전이라고 부르거나 강단을 제단, 목사를 제사장, 헌금을 제물, 주일을 안식일 등으로 부르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이들은 다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모형(type)은 실형(antitype)이 완성되면 필요치 않다. 이는 마치 아파트를 사고자하는 사람의 경우와 같다. 그는 먼저 건축업자가 지어놓은 모델 하우스에 가서 그것을 살펴보고 계약을 한다. 그리고 그 아파트의 건축이 끝날 때까지 계약자는 그것을 마음에 두고 바라보고 희망 가운데 살다가 아파트가 완공하면 그곳에 들어가 사는 것이다. 아파트의 계약자는 비록 그 아파트가 완공되지 않았을 지라도 그가 지니고 있는 계약서는 그 계약서 소유자가 건축중인 아파트의 주인임을 인지하고, 아파트가 완성이 되었을 때 건축자는 그에게 아파트의 열쇠를 건네 주며 그곳에 들어와 살도록 허락할 것이다. 그러나 건축자는 아파트가 완성되었을 때 모델 하우스는 없애버린다. 이미 모델 하우스로서의 기능을 다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어떤 인물이나 사건이나 혹은 제도 등을 모형으로 사용하여 앞으로 오실 실형, 곧 그리스도의 모습과 그의 하실 일을 보여주셨다. 이제 그리스도는 오셨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지금 모델 하우스 시대에 사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새로운 성전, 곧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즐기고 누리면 되는 것이다.
솔로몬은 왕이 되어 제사를 드리러 기브온으로 가서 그곳에 있는 큰 산당의 제단에서 일천 번제를 드렸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꿈에 나타나셔서 그가 구하는 지혜를 그에게 주셨다. 그런데 여기에 사용되고 있는 히브리어 “에렙 오롯”(תולע ףלא)은 개역성경의 번역대로 “일천 번제”(a thousand offerings)이다. 따라서 이 “일천 번제”라는 말을 한국의 많은 성도들은 “일천 번의 번제”라고 이해하고, 첫째는 3년 동안 계속적으로 제사를 드린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3년 동안 빠짐없이 새벽 기도회나 대 예배에 참석하며, 둘째는 제사를 드리러 나갈 때는 반드시 제물을 바치기 때문에 교회에 갈 때마다 특별한 헌금을 바친다. 그리하여 솔로몬을 본받으려고 한다. 솔로몬처럼 지혜와 부귀와 명예를 주셨다. 새벽기도회에 빠지지 않고 출석하고, 그때마다 준비한 헌금을 드리는 일은 참으로 귀한 일이고, 칭찬할만한 일이다.
그런데 과연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렸다고 할 때, 3년 동안 빠짐없이 산당에 나가서 제사를 드렸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왕이 백성을 다스리는 일도 힘들었을 텐데 3년을 번제만 드리고 있었다는 말인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다.
히브리어 “오라”(הלע)라는 말은 “번제물”(offering), 즉 “제단에서 온전히 태우는 제물”(an offering burned completely on alter)을 말한다. 또한 동사 “야아레”(הלעי)는 “아라”(הלע, 올라가다”의 사역형으로 “올리다” 혹은 “(제물을)바치다”는 뜻이다. 여기서 동사 “오라”는 명사형 “오롯”과 사역동사형 “야아레”(הלעי)가 같이 쓰이고 있다. 따라서 히브리어 원문, “에렙 오롯 야아레 쉬로모”(המלש הלעי תולע ףלא)는 문자적으로 “솔로몬이 일천 번제물을 (번제로) 드렸다.”(Solomon offered a thousand burnt offerings)라고 이중적으로 번역해야 한다. 개역성경은 이러한 히브리어 원문을 섬세하게 다루지 않음으로 다만 “솔로몬이 그 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라고 번역하고 있기 때문에 마치 일천번의 번제를 드린 것처럼 오해된 것이다. 다행히 “바른성경”을 비롯한 현대 역본들은 “번제물”로 바르게 번역하고 있다. 이는 솔로몬이 소나 양이나 염소 등을 합하여 일천 마리의 짐승을 제물로 드렸다는 의미이다. 즉 많은 제물을 드렸다는 것이다. 결코 일천 번의 제사를 드렸다는 의미가 아니다.
또한 솔로몬이 구한 것을 “지혜”라고 보통 알고 있지만 솔로몬은 자신이 어린 아이라서 세상 물정을 잘 모르기 때문에 주께서 택하신 백성을 셀 수 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으니 “여호와께서 주님의 종에게 지혜로운 마음을 주셔서 주님의 백성을 재판하고 선악을 잘 분별할 수 있게 하소서”라고 말한다. 솔로몬이 여호와께 구한 말을 문자적으로 번역해보면 “그리고 선악을 분별하여 주의(당신의) 백성을 재판할 수 있도록 듣는 마음”을 주의 종에게 달라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솔로몬이 구한 것은 백성들의 소리를 듣는 마음(עמש בל), 곧 이해심과 선악을 분별하는 분별력(ערל בוט–ןיב ןיבהל)이었다. 서양의 역본들은 이를 understanding mind 와 discerning heart로 번역하고 있다. 솔로몬의 지혜는 그가 무엇을 구해야 할 지를 아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백성들의 소리를 듣는 이해심과 바르고 공정하게 시비를 가릴 수 있는 분별력이었다. 그가 구한 것은 당장 그가 누릴 수 있는 부나 명예나 장수를 위한 건강 등이 아니었다. 솔로몬이 아이의 엄마를 찾아주는 재판 이야기는 그의 이해심과 분별력의 극치라 할 수 있고,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참 지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점은 솔로몬이 일천번제물을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해심과 분별력을 주셨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특별하여 원하는 것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고, 솔로몬도 자기가 하나님께 성대한 번제물을 바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베푸신 언약과 인애로 자기를 왕으로 세우셨으니, 어린 자기가 백성을 잘 재판할 수 있도록 이해심과 분별력을 달라고 구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진실한 예배를 드리고, 많은 헌금을 하고, 봉사를 하였다고 해서 그 댓가로 우리에게 복주시는 분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마땅히 성도들로서 해야할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로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고 복을 주시는 분이다. 삼천 번제, 혹은 삼천 번제물을 드림으로 하나님께서 내 소원을 들어주실 것이라고 믿거나 복을 주셨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고, 기독교적이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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