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3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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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는 생전에 제자들에게 “다른 보혜사”를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내가 아버지께 간구하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셔서 영원히 너희와 함께 계시게 하실 것이다. 그 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 이는 그 분께서 너희와 함께 계시고 너희 안에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요 14:16). 예수께서 “다른 보혜사”를 주실 것을 약속하신다. 그렇다면 “보혜사”는 누구인가? 그는 물론 예수님 자신이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함으로 타락한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하나님의 지식이 충만한 새하늘과 새땅을 창조하시는 것이다(사 11:9). 말씀이신 하나님께서는 이 종말적인 뜻을 이루기 위하여 육신의 몸을 입고 찾아오시어 말씀 사역을 시작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 뜻을 계속 이어갈 제자들을 선택하여 가르치고 이들에게 말씀 사역을 위임하신다. 이때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른 보혜사” 혹은 “보혜사”를 약속하신다. 이 “다른 보혜사”를 가리켜 예수께서는 “진리의 영”이라고 하셨고, 그가 영원히 제자들과 함께 하실 분이라고 가르치신다. 예수께서는 왜 제자들에게 “보혜사”를 약속하셨을까?
보헤사라는 말은 헬라어 “파라크레토스”를 번역한 것으로 “돕는자”(helper), “상담자”(counselor), 혹은 “옹호자”(advocator)의 뜻을 가진 말이다. 제자들에게는 예수께서 떠나시면 이들을 돕고, 상담해주고, 옹호해줄 자가 필요했다. 특히 옹호자가 필요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는 그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말씀의 종, 곧 선지자라는 증거가 있어야 했다. 예수께서 말씀을 전하고 이적을 행하실 때마다 유대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그가 무슨 권세로 이 일을 하는 지 그 권세의 출처를 물었다. 따라서 아무나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구약의 경우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종이 되기를 꺼리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그가 하나님의 선지자, 곧 말씀의 대언자라는 것을 인정받은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제사장들은 제자장의 가문에 태어나면 세습적으로 제사장이 될 수 있었고 사람들은 다 그의 제사장으로서의 권위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선지자는 그렇지 않았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대언자(The Spokesman of God)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대신 선포하고 가르치는 자였다. 그리하여 선지자를 가리켜 “여호와의 입”이라고 했고,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전하는 자”(대하 36:12; 렘 9:12; 23:16)라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선지자를 부르심에 있어서 어느 특정한 준비된 사람을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대개 자기의 생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을 불러 선지자의 사명을 주신다. 이때 바로 권위가 문제 된다. 만일 그 부르심을 받은 선지자가 사람들 앞에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외친다고 할망정 아무도 그를 하나님께서 보낸 선지자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 자기 자신도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선지자로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선지자가 되려면 먼저 그가 하나님을 대면했으며 하나님 앞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임을 확신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위하여 그에게 여러 가지 이적을 행하도록 하신다. 품안에 넣은 손에 문둥병이 발하게 하든지, 던진 지팡이가 뱀으로 변하게 하든지 함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보통 인간이 아닌 신적 존재와 대면하게 하시고, 그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체험하게 하신다. 그런 후 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자신이 바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심을 밝히시고 말씀을 주어 가서 백성들 앞에 나가 외치라고 명하신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부르심을 받은 선지자는 자신의 연약한 인간 조건을 핑계 삼아 부르심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달래서 결국 “내가 너와 함께 가겠다”는 약속을 주시며 보내신다. 이제 그 선지자는 백성들 앞에 나아가 그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선지자임을 증명해야 한다. 이 경우 그가 선포한 말이 그대로 이루어지든지 아니면 자기도 어떤 초자연적인 능력을 행해야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종임을 믿고, 말씀을 받아들이며, 그의 선지자로서의 권위를 인정하게 된다. 제자들은 바로 이 신적 능력을 나타내는 데 보혜사가 필요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을 땅끝까지 복음 전하는 일꾼으로 파송하는 장면은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불러 백성들에게 내보시는 모습을 연상하기에 충분하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 모아놓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나에게 주셨으니”(마 28:18)라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이라는 자신의 정체를 제자들에게 이제 당당하게 밝히신다. 그리도 하나님으로서 제자들을 세워놓고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고 명하신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그동안 그가 분부하신 모든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사명을 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는 약속을 주시는 것이다. 따라서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을 복음의 일꾼으로 파송하는 이 말씀은 구약성경의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불러 내 보내시는 사건과 그 양식이 매우 흡사하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제자를 부르신 이 사건은 신약의 선지자를 세우는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에게도 선지자로서의 신적 권위를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아야 하고 또한 사람들에게서 인정받아야 한다. 보헤사는 바로 이러한 역할을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 제자들을 예루살렘에서 만나서 아버지께서 주시기로 약속한처럼 “성령의 세례”를 받을 것을 재확인하시며 성령을 받고 능력을 받으라고 명하신다. 오순절이 되어 제자들은 약속대로 성령의 세례를 받게 된다. 그런데 이 성령받는 모습이 주목되는 점이다.
첫째로 귀로 들을 수 있는 현상으로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같은 소리가 났다. 그렇다고 꼭 그것이 바람이 불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둘째로 눈으로 볼수 있는 현상으로 “불처럼 갈라진 혀들”()이 나타났다. 제자들은 개역성경이나 유사한 한국의 성경들이 번역해놓은 것처럼 “불의 혀처럼 갈라진 것들”이 아니라 불처럼 갈라진 혀들이 그들 위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본 것이다. 셋째로 그들은 성령이 말하게 함을 따라서 각각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불처럼 갈라진 혀들이 그들 위에 임하자 그들이 방언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입이다.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전하는 자이다. 따라서 그들이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전하려면 여호와의 혀가 필요할 것이다. 수많은 혀들이 그들 위에 임함으로 그들은 각각 동시에 다른 방언을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제자들은 자신이 말하지 아니한 다른 말을 함으로 자기들의 능력을 초월한 능력을 체험했을 것이고, 이를 통하여 제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은 선지자로서의 자기 확신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부르실 때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이사야는 성전에 들어가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었다. 그는 자신이 입술이 부정한 백성임을 고백한다. 그는 마음이 부정하다거나 몸이 부정하다는 말을 하지 않고 입술이 부정하다는 말을 하는 것을 보면 그는 이미 “하나님의 입”으로서의 자신의 역할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인지한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화저를 가져다가 그의 입술에 댄다. 이것은 그의 입술을 지진 것도 아니고 그냥 댄 것이다. 이것은 다음의 설명대로 이사야를 정화하는 의식 (purifying cere- mony)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선지자로서의 인치심의 의식 (sealing ceremony)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사야는 분명 이 의식을 통하여 자신의 선지자로서의 부르심을 확신하고 “주여, 제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보내주십시오.”(사 6:8)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처럼 그의 대언자 역할을 해야 할 사람의 발성기관과 관련된 지체에 어떤 자극을 주거나 접촉함으로 하나님께서 그를그의 종으로 쓰실 사람이라는 인증을 하시는 것이다.
오순절의 제자들 위에 임한 혀가 각각 다른 방언을 하게 한 사건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이 오순절 성령세례는 개인의 구원론적인 관점에서 보다는 말씀을 통한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오순절 성령 세례 시에는 ‘혀처럼 갈라진 불’이 임한 것이 아니라 ‘불처럼 갈라진 혀’들이 임한 것이다.
물론 마태복음 3장 11절이나 누가복음 3장 16절에는 예수님을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구절들이 꼭 오순절 성령세례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예수께서 주실 것이 성령 세례와 불세례로 이해한다면 성령세례는 예수께서 주실 구원을, 불세례는 예수께서 가져오실 정화와 심판을 의미하는 말씀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오순절 성령세례시에 마치 불세례를 받은 것처럼 이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오순절의 성령세례는 앞으로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의 말씀을 대언할 선지자로서의 제자들에게 신적 권위를 인치고 능력을 부여하신 사건이다. 이 일은 단회적이고 반복되어야 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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