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2-21(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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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가 읽었던 책 속에서 기억에 남는 인물이 있습니다. 사드는 ‘새디즘’이란 용어를 낳은 성애 문학의 저자입니다. 그의 소설 <미덕의 재난>은 1787년에 발표되었으며, 이듬해에 단편집 <사랑의 범죄>가 나왔습니다. 그 후의 작품으로는 <쥐스틴>(1791), <쥘리에트>(1798)가 있습니다. 사드 가문은 콩데 왕가의 친척인 귀족가문이었습니다. 사드는 1754년에 군대 생활을 시작하였지만, 7년 전쟁이 끝난 후 군대를 떠나 돈 많은 부르주아 가문의 딸과 결혼하였습니다. 결혼 직후부터 방탕한 생활과 창녀들에게 가학적 성행위를 한 그의 행위가 추문으로 세상에 알려진 것은 로즈 켈러 사건이었습니다. 1768년 부활절 주일에 젊은 창녀 로즈 켈러에게 했던 그의 성적 학대 행위가 프랑스를 떠들썩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이 일로 투옥되었고 이후에도 추문과 투옥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는 감옥 생활의 지루함과 분노를 극복하기 위해 성애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소설과 희곡을 써서 발표하였습니다. 그의 가학적 성애는 ‘가학적 성애를 통한 즐거움 찾기’라는 심리학적 용어를 낳았고, 철학에서도 “욕망의 대상 전체에 무한히 접근해 가는”이라는 ‘사드적 운동’(알렌타 주판치치, 『실재의 윤리』참조)이라는 개념이 생기기도 하였습니다. 사드의 이야기들이 욕망의 대상에 대하여 천천히 ‘조금씩 조금씩’나아가는 데 비하여 ‘돈주앙적 운동’은 향유 대상에 대한 ‘하나하나’의 반복적 즐김을 의미합니다.
 라 클로의 『위험한 관계』에 나오는 발몽의 경우가 전자에 해당합니다. 소설의 도입부에서 메르테유 부인은 투르벨 부인을 유혹하려는 발몽의 계획을 듣고 내기를 합니다. 투르벨 부인이 발몽에게 단지 절반의 향유(demi-jouissance)만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발몽과 메르테유의 음모에는 사랑은 기계적으로 산출되고 규제될 수 있으며, 사랑의 불꽃은 사람의 마음에 따라 타오를 수도 쇠약해질 수도 있다는 가정이 놓여 있습니다. 그리하여 발몽은 투르벨 부인이 그와 사랑에 빠지도록 결심하며, 전략을 짜서 이를 체계적이며 단계적으로 이행합니다. 그 어떤 것도 우연에 맡기지 않으면서. 투르벨 부인이 실제로 그와 사랑에 빠지자, 그는 메르테유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메르테유가 벨르로슈와 관계를 맺은 사실을 알게 됩니다. 연인들을 자신만이 지배하면서 제국을 이루었다고 생각하였던 발몽은 메르테유에게 전과 다름없이 자신을 상대해 달라고 하지만, 그녀는 이를 거부합니다. 이와 같은 줄거리에서 발몽의 유혹 패러다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발몽은 투르벨 부인을 만나기 전까지는 ‘하나하나’씩 여인들과 관계를 맺는 바람둥이였습니다. 그러나 투르벨 부인을 향한 욕망의 전략에는 ‘조금조금’의 논리로 그녀를 유혹합니다.
몰 리에르의 희곡 『돈주앙』에 나오는 돈주앙의 향유의 대상 접근 방식은 전자의 발몽과 다릅니다. 그는 신화에 나올 정도로 바람둥이의 전형입니다. 그는 발몽의 경우와 달리 수많은 여인들과 ‘하나씩하나씩’ 관계를 맺어가지만 온전한 향유를 누리지 못합니다. 그의 바람둥이 기질은 이렇습니다. “나는 다른 여자의 매력을 보는 눈은 여전히 간직하고 있으며 자연의 섭리에 따라 그녀들에게 경의와 찬사를 바치는 거야.” 이와 같은 궤변으로 그는 수많은 여인들을 농락한 것입니다.
두 인물을 보면서 나는 나의 스승이셨던 故 조연현 선생님이 강의 시간에 하셨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순수 소설의 기준은 이렇다. 가령 선한 주인공이 작품의 흐름 중간에 죽고, 마지막에 지독하게 악한 인물이 결말에 가서 활개를 친다고 하자. 이를 통속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렇습니다. 발몽과 돈주앙을 통해서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는 사탄을 추정할 수가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보편적으로 욕망이 있습니다. 이 욕망을 다스리는 지혜가 필요하지요. 욕망을 자극하는 사탄에 대한 경계, 이것이 신자가 가져야 할 마음이지요.
성 경에는 ‘뱀’으로 상징되는 사탄이 나오고, 하나님의 의에 위배되는 사탄도 종종 등장하지요. 이와 같은 사탄을 이기기 위해서는 성령의 인도하심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사탄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성령이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기를 기도해야 하지요. 중요한 것은 주님의 시선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를 옮길 때 배꼽을 드러내 놓고 춤을 추었지요. 오히려 이를 비웃는 다윗의 아내가 애를 못 낳는 벌을 받았지요. 한때 나는 개구쟁이 어른처럼 행동한 적이 있습니다. 동호인들 앞에서 몸부림춤을 추고, 시낭송을 하면서 그럴 듯한 가수 흉내를 내기도 하여 사람들을 즐겁게 하였습니다. 이게 무슨 푼수짓이냐고요? 아닙니다. 텔레비전 개그 프로그램을 보시어요. 유재석 등 유명 개그맨이 망가지는 모습에 사람들이 배꼽을 잡고 웃지요. 우리가 예배를 볼 때 영과 진리로 경건하고 진지하게 주님께 예배를 드려야 하지요. 중요한 것은 주님이 그 예배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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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의 행복론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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